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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기억으로는 이 사건이 TV 뉴스방송에 생생(生生)하게 방영한 걸로 기억 합니다.
나는 53세로 두 딸아이의 아버지이다.
경기도 남부의 1천세대가 넘는 아파트 관리소에서 2년간 근무를 했다.
나는 이번에 관리소장 Y씨의 지시로 아파트 도색 시공과 관련된 업무
(시공업체 선정 및 페인트 구매)를 수행 중이었다.
나는 여기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오기 전에는
안산의 반월공단의 자그마한
K 유통업체에서 10년간 일을 했었다.
그러나 거래처의 부도 여파로 다니던 K사도 동반 부도를 맞았다.
K사 사장님으로부터 눈물 젖은 퇴직금을 받고 나서
50세가 넘은 내가 갈 곳이 이 세상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다가 주변 지인이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공부해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취직해보라고 권유했다.
나는 전문적으로 배운 기술이 없어 당장에 벌이가 필요했기 때문에
자격증 준비를 바로 시작했다.
그러나 50세가 넘은 이 나이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A아파트의 경비 구인공고를 보고 얼른 이력서를 작성해서 지원했다.
그 때 만난 분이 지금 같이 일하는 아파트 관리사무소 소장님인 Y씨이다.
1차 면접에서 내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파트 관리소 또는 경비 경험이 없었던 나로서는
지난 직장에서의 성실함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장님의 질문에 두서없이 답변한 것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최종면접을 하러 일주일 뒤에 다시 아파트 관리소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면접시에 나의 순수한 면을 보시고 성실함을 인정해주신
관리소장님이 최종면접에서 나를 다시 불러주신 것이었다.
얼론 나랑 같이 면접을 본 친구는
40대 초반의 전기기사 자격증까지 있는 친구였다.
하지만 낮은 연봉을 보고 그는 최종 면접시 참석하지 아니하였다.
나는 직장과 집의 거리가 꽤 멀어도
면접 1시간 전에 도착하여 최종면접을 준비했다.
물론 최종면접은 나 혼자였기에 기쁘게도 합격할 수 있었다.
그 이후 2년간의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내가 처음해보는 경비일이라 선임자인 56세 P씨에게 많은 것을 배워야 했다.
지금도 P씨에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또한 저를 좋게 보아주시고 면접에서 저를 뽑아주신
관리소장님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지난 2년간 아파트 주민 중 많은 분들을 알게 되었다.
경비일이긴 하지만 어르신들의 집에는 거실의 전구도 갈아드리고
화장실 세면대가 머리카락으로 막히면
옷걸이 철사를 이용해 뚫어드리기도 했다.
또한 담배 피우러 나오신 아저씨들과 담소를 나누며
직접 재떨이를 치워드리기도 했다.
그러한 성실함과 과거 기업에서 배운 인사성이 동네에 퍼졌기 때문에
나의 평판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관리소장님도 나의 재계약은 문제없을 거라고 얘기해주셨다.
비록 부녀회의 극성맞은 민원(층간소음, 주인없는 자전거, 마을장터 등)처리가
내 주된 업무이기도 했지만 그분들이 내주신 관리비로 내 한 달 월급이 나온다고
생각하니 일종의 사명감도 조금씩 생기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아파트 경비 일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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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의 발단은 아주 자그마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어찌 보면 내가 왜 그런 일에 참여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우습기만 하다.
우리 아파트는 주공아파트이고 지어진지 20년이 조금 안되었다.
그래서 곳곳에 아파트 벽면의 도색작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입주자동대표회의의 승인으로 도색작업 시공업체와 페인트 구매 업무가
아파트 관리소장의 책임하에 진행되었다.
물론 소장님의 관리 감독과 기존에 잘 알던 도색 시공업체 및 페인트업체가 있어서
그나마 저렴한 가격에 공사 계약이 이루어졌다.
내가 생각해도 여기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뭐든지 안 좋은 일이 생기려면
시계 태엽처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기 마련이다.
한 달전의 일이다. 우리 딸아이가 항상 장학금을 탔는데
이번 학기에는 경쟁이 치열해서 못 받게 되었던 것이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등록금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주간 근무이후 퇴근하면서 항상 어깨가 축 쳐져 있던
나를 보고
P씨가 술 한잔하자고 했다.
안 그래도 푸념을 털어놓은 곳이 없던 나는 반가운 말이었다.
가벼운 식사와 반주 한 병은 그간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혀주는 것만 같았다.
물론 P씨의 걱정도 가족 걱정으로 나와 같은 처지임을 하소연 했다.
그러더니 이번에 자기가 관리소장으로부터 어려운 부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혼자 하기 힘드니 나에게도 도와달라는 것이다.
물론 나는 관리소장님을 전적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도와달라고 하면 무슨 일이든 할 마음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맡겨만 달라고 했다.
게다가 이번일이 잘 되면 딸아이 대학교 등록금을 빌려준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관리소장님을 돕고 딸아이 등록금도 마련하는 일석이조,
도랑치고 가재잡는 격이었다.
처음 나의 의도는 순수했으나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 분명히 작지는 않다.
그 다음날 관리소장을 만났다.
소장님은 P씨 그리고 나에게 도색작업의 일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해보자고 제안을 하셨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앞 뒤 따지지 않고 무슨 일이든 맡겨만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 도와준다는 일이 페인트 업체가
보내준 페인트 1700여통을 물로 바꾸자는 것인지는 꿈에도 몰랐다.
도색 작업시 페인트가 부족해도 물을 타서 도색하면 크게
티가 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아파트 벽면은 언젠가는 노후화되어 도색한 것이 떨어지기 마련이니
당장에 큰 변화를 못 느끼면 문제가 없을 거라는 것이었다.
나도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큰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도색 작업하는데 좀 더 두텁게 하든 얇게 하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내가 믿고 있는 소장님이 알아서 책임진다고 하지 않은가.
소장님, P씨 그리고 내가 이번 한 번만 눈을 감으면
우리 딸아이의 등록금을 낼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나의 마음 한 구석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미심쩍음과 불안한 마음은
도색작업 공사일자가 다가올수록 심해졌다.
비가 오는 날 나 혼자 멍하니 있다가
경비실에 102동 아주머니가
갑자기 문이라도
두들기면 화들짝 놀라기만 했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리니
102동 아무머니께서
웃으시며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할 정도였다.
나의 불안한 마음이 몇 주째 계속 되자 집사람이
무슨 일이 있냐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파트 경비일이 너무 많아서 피곤하다고
답변을 회피했으나
그 핑계도 하루 이틀 지나자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결국엔 내가 숨기고 있던 마음을 집사람에게 털어 놓을 수 밖에 없었다.
페인트 납품과 관련된 모든 사실을 이야기하니
속은 조금
후련해졌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져온 집사람의 어두운 얼굴표정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제서야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집사람은 깊고 낮은 울림으로 ‘어떻게 그런 일에 가담했냐 간도 작은 사람이
그런 큰일을 벌려 놓고 잠이 올 수 있냐’라고 말했다.
작은 일침이 나의 폐부를 파고 들었다.
아무리 딸아이의 등록금도 중하지만 나 한명 부정으로
수 많은 아파트 주민들이 피해를 입는 건 생각지 않느냐는
집사람의 떨리는 목소리에
나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집사람이 똑똑하지는 않지만 가끔 바른 소리를 하는 게
언제나 타당했기 때문이다.
여태껏 부귀영화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하늘 아래 부끄럼 없이 살아온 게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집사람의 탄식에
나는 할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며칠을 고민했는지 모른다.
이제 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었다.
그 다음날 나 혼자 빠지겠다고 관리소장에게 말 했으나
갑자기 소장은 나를 욕하기 시작했다.
이미 받은 돈도 써버렸는데 어쩌라는 식이었다.
혼자만 살 거라면 나보고 그 돈 모두 물어 내라고 협박을 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존경하고 믿었던 관리소장이
한순간에 돌변하는 것이었다.
결국엔 책임을 혼자 지기 싫어서 나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일주일을 관리소장과 P씨와 다투었다.
나는 빠지고 싶다고 했으나
그들은 이미 돈을 써버렸으니 빠질 수 없다고 했다.
결국엔 내가 가야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매일 밤마다 부부싸움을 했다.
우리 얘기를 엿들은 딸아이가 울면서 나에게 찾아왔다.
‘아빠 신고하고 선처를 바라자’
딸아이의 부탁을 져버릴 수가 없었다.
그 다음날 K시 경찰서로 찾아갔다.
처음에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몰라서 경찰서 정문에서 서성거리기만 했다.
지나가던 경찰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라는 질문에
놀라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그 다음날 경찰서로 찾아갔다.
말이 안 나올 것 같아 볼펜으로 대강의 내용을 적어서 찾아갔다.
경찰서로 가는 도중 관리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왜 출근하지 않냐’
‘혹시 다른 마음을 품었으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더 이상 내가 머뭇거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번득였다.
처음에는 말이 안 나왔다.
왜냐하면 나도 책임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외로 경찰은 이런 일이 일상다반사라고 생각하는 듯
무심하게 나를 가끔 쳐다보면서 조서를 꾸미기 시작했다.
처음 질문인 ‘성명을 알려주세요’라는 경찰의 질문에
나는 답변을 못했다. 내 이름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조사는 4시간 넘게 이루어졌다.
나는 할 말을 다했기 때문에 후련했다.
그러나 경찰은 다음 조사를 위해 다시 경찰서로 다시 나와 달라고 했다.
조금은 이상했다.
나는 할 말을 다했는데 왜 다시 오라는 걸까?
두 번째 경찰에 갔을 때의 분위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우선 처음에는 이런 아파트 비리를 제보하는 민원의 성격이었다면
두 번째 방문 시 나를 마치 무슨 범죄자인양 취급했다.
첫 방문은 민원실에서 이루어졌지만 두 번째는 조사실에서
단 둘이 이루어졌다.
그 경찰의 눈빛은 마치 벌레를 보는 듯했다.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만 잘못한 게 아니기에
우리 아파트 관리소를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좀 더 조사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답변밖에 못 들었다.
솔직히 욕만 하지 않았지 그들은 나를 인격적으로 자존감을 무너뜨렸다.
어떻게 그런 일을 벌려놓고 대낮에 돌아다닐 수 있냐는 식이었다.
나도 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나의 신고로 더 이상의 피해를 막을 수만 있다면
참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조사가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진행될 때까지
관리소장에 대한 질문은 거의 없고 나의 범죄여부만을 강조했다.
경찰도 확실한 자백이 있는 경우에 집중하는 듯했다.
관리소에 경찰이 조사를 나갔으나
관리소장과 P씨는 이미 관련 증거 문건과 자료를
어디론가 치워버린 뒤였다.
물론 물이 차있는 페인트를 어떻게 하지 못한 듯했다.
그래서 페인트업체까지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나에 대한 조사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가혹해졌다.
차디찬 조사실의 의자가 나는 너무나도 불편하기만 했다.
내가 범죄에 가담했으니 공모자이고 공모자도 주모자와 다를 바 없이
사법처리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물론 억울했지만 억울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관리소장에 대해서는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여
조사의 진척이 느렸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지진해서 신고는 했으나
자수한 피의자 신분으로 바뀌어
조사가 계속 해서 이루어졌다.
결국엔 내가 먼저 자수했으나 그 죄 값은
변함없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파트 주민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심지어 나의 인간성을 의심하는 경찰에게도 미안했다.
이 모든 일이 나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기에 내가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의 죄는 그동안 너무 착하게 살았고
그에 대한 보담을 너무 크게 바랐던 것이었다.
한순간의 실수로 내 인생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크나큰 멍에를 씌우고 말았다.
그래서 더 이상 인생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기엔
내가 너무나도 나약함을 깨달았다.
쉽게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사람임에도
너무나도 커다란 일을 저질러 버렸으니
그에 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에게 미안하고 아파트 주민들을 볼 낯이 없다.
비록 미약하나마 나의 신고로 일이 제대로 수습되기를 바랐으나
벌을 받아야 할 관리소장은 발뺌을 끝까지 하고
좋은 변호사를
선임해서 가벼운 처벌을 받을 것 같다.
내가 바란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
세상에 알리고자 이런 극단적인 선택(자살)을 한다.
지금 이 아무도 없는 지하의 보일러실의 적막함이
오히려 나를 위로해준다.
바깥세상의 눈초리가 너무나도 따갑기만 하다.
차라리 여러 겹으로 묶은 빨간 노끈(자살)에 나의 마지막을 기대어본다.
이제 억울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내 잘못도 분명히 없지는 않다.
그러나 나의 자그마한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서글프다.
나의 선택으로 이 세상에 많은 이들이
이런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위 내용은 2015년 경기도 남부의 아파트 관리소에서 일어났던
실화를 각색하였습니다.
남은 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하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이상-
** 끝 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