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輪廻)》
모두가 지난번 생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이 기억상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수많은 죽음을 체험했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신들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의 기억이 대게 아주 작은 부분만 활동할 뿐이며, 우리의 표면의식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모든 경험과 인상들은 잠재의식 속에 기록되고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 티벳 사자의 서(류시화 옮김) -
〈윤회의 주체는 아뢰야식(阿賴耶識)〉
바르도의 전개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뢰야식에 대한 학습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언행의 자국은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다시 연(緣)을 만나 발동하기 때문이다.
아뢰야식은 알라야Alaya라고 하며 본래 인도의 범어梵語로 장藏이라고 번역하는데, 업력業力들을 감싼다는 뜻에서 포장包藏이라는 뜻이 있고, 정신과 육체 등 모든 것을 포섭하여 유지시켜 준다는 뜻에서 포섭包攝이라는 뜻도 있다. 태어남, 죽음, 윤회, 희노애락 등의 삶의 경험들은 제8식인 아뢰야식에 컴퓨터와 같이 고스란히 갈무리된다. 또한 아뢰야식은 중음신中陰身, 식識 등과 함께 죽음과 환생 사이의 중간인 상태의 존재로, 바르도체 그 자체이기도 하다고 『유가사지론』에서는 말하고 있다.
모든 행동은 카르마(업)의 흔적, 즉 아뢰야식에서 연을 만나 발동한 것이며, 그것은 사람의 성격이고, 운명이며 생각과 행동의 패턴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이는 반응은 모두 여기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므로 언행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습관적인 성향이나 개인의 마음이 남아 있는 한 무의식은 존재한다. 그것은 심지어 죽어서 육체가 사라져도 카르마의 흔적이 정화될 때까지 자국이 남아 다음 생을 또 낳게 하는 윤회의 씨앗이 된다.
유식학에서는 의식意識에 대해 의식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며 어떤 동작을 할 것인가 아니할 것인가하는 것을 능동적으로 생각하면서 행동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마음은 무엇이든 그냥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떤 의도가 있을 때 눈으로 보고 마음이 작용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 즉 눈은 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장미꽃이 눈에 보여지는 것을 눈은 보기만 하지 그것이 장미꽃인 줄 모른다. 그것을 장미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장미꽃을 기억하고 있는 아뢰야식 작용이 눈을 의지해 장미꽃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귀에 의지해 들어오는 소리를 마음이 작용하여 무슨 소리인지를 알아차리게 되는 이식耳識이 생기는 것과 같이 코, 입, 몸을 의지하여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이 활동하는 것이다. 즉 오관인 눈, 귀, 코, 입, 몸을 통하여 활동하는 전오식前五識이라 불리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과 더불어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도 그 내용과 가치를 결정하게 된다. 이 의식의 기능은 매우 강력하고 주관계의 활동을 독차지하기 때문에 그 의식 활동의 업력이 이른바 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 잠재하여 있다가 다시 의식을 통하여 나타나게 된다고 하고 있다.
- 체험으로 읽는 티벳 사자의 서(강선희) -
〈윤회하는 원인〉
에고(小我)가 사라진 환희 상태와 초월의식 상태에 익숙해 있지 않기 때문에 보통 사람의 의식체는 그런 상태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가 쌓은 카르마의 영향 때문에 그의 의식체는 ‘나’라는 사념에 지배당한다. 그래서 의식체는 평정 상태를 잃고 투명한 빛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니르바나는 ‘나’라는 불꽃을 꺼버린 상태라는 뜻이다. 니르바나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것은 ‘나’라는 사념, 곧 에고이다. 이것을 버리지 않으면 윤회의 수레바퀴는 계속해서 굴러간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보통의 사람들은 무지와 부정적인 성향, 미망에 사로잡힌 경험, 단단한 고착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에고에 집착하고 있다. ‘나’라는 생각을 단단하게 붙들고 있으면 실재에 대한 집착이 생겨나고, ‘나’를 ‘인식하는 자’로 다른 존재들은 ‘인식당하는 자’로 분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연쇄 반응을 일으켜서, 생에 생을 거듭하고 탄생에 탄생을 거듭하면서 윤회의 여섯 가지 영역을 맴도는 악순환은 계속된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이생의 바르도를 경험하는 방식이다. 수행을 통해 해탈을 얻을 때까지 이런 경험은 카르마의 힘에 의해 지속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거듭 반복하는 생사윤회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도착지는 오직 ‘무명’뿐이다. 무명은 연기를 모르고 눈에 보이는 사물을 영원하고 단단히 고착된 것으로 여기는 잘못된 견해로, 이는 끝없는 고통의 연속이 될 것이다.
- 체험으로 읽는 티벳 사자의 서(강선희)-
〈윤회와 무아설(無我)의 양립〉
환생의 개념은 현대물리학의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도 연관되어 있다. 한 번 에너지가 생성되면 에너지 형태가 바뀌거나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에너지가 옮겨갈 때, 항상 계 전체의 에너지 총량은 변하지 않고 순환한다는 법칙이다.
윤회와 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2세기 후반 인도 북부를 통치하고 있던 밀린다왕과 나가세나 장로가 문답한 『밀린다왕문경』에 잘 나타나 있다.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 장로에게 죽어 없어진 자와 다시 태어난 자가 동일한지 다른지 여부를 묻고, 동일하다면 무아설과 모순되며, 죽은 자와 태어난 자가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면 윤회와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 되는데, 윤회설과 무아설이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물어본 것이다. 이에 나가세나 장로는,
대왕이여, 짜낸 우유가 굳은 우유가 되고 이것이 다시 버터가 될 때 그 각각은 동일한 것도 아니지만 다른 것도 아닙니다. 굳은 버터는 우유에 의존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 대왕이여, 저 자신은 일찍이 갓난아기로 귀엽게 누워 있었을 때의 제가 지금은 성인이 되어 있습니다. 실로 이 몸에 의존하여 이들 모든 상태가 하나에 포섭되고 있는 것입니다. (...)
대왕이여, 사물의 연속(개체)은 그와 같이 계속하는 것입니다. 생겨나는 것과 소멸하는 것은 다른 것이지만 한쪽이 다른 쪽보다도 앞의 것이 아닌 것처럼, 또 뒤의 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자면 동시적인 것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것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것으로서 최후의 의식에 포섭되기에 이릅니다. 라고 하셨다.
우유와 버터는 모양이 다르고 이름이 다르지만 버터가 우유에서 만들어 졌듯이 서로 연결고리가 이어져 있으며, 아이와 어른도 동일하지 않지만 그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어도 유전자가 흐르듯, 눈에 형상으로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항상 하는 것도 아니고 단절된 것도 아니며, 서로 동일한 것도 아니고 서로 다른 것도 아닌 것과 같다.
또 ‘최후의 의식에 포섭된다’는 것은, 인간계와 천상계, 축생계 등 윤회계의 모든 존재들이 처한 상황과 조건들은 모두 전적으로 의식이 구성하기 때문에 단지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모든 현상은 마음에게만 나타나는 것일 뿐 실제로는 덧없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은 원인에 의존한 현상일 뿐이다. 이 원인은 욕망을 추구하는 데서 오고 완전한 깨달음으로 극복되지 않는 한, 죽음은 태어남을 뒤쫓고 태어남은 죽음을 이어 고통은 끝이 없다.
- 체험으로 읽는 티벳 사자의 서(강선희)- |
출처: 상민이의 불교 자료실, 법보시 원문보기 글쓴이: 상민
첫댓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_()_
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_()_
南無阿彌陀佛 南無阿彌陀佛 南無阿彌陀佛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