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기억
정이녹
인류의 조상 아담은 인간 중에서 유일하게
유소년기 없이 청년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조차 희미한 어린 시절로부터도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가?
내 최초 기억은 만 두 살 무렵이다.
인천 논현동 외갓집의 아주 세밀한 구조까지도 생생하다.
그 집을 떠올리면 거기에는 언제나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 이야기가 떠오르곤 한다. 논현동 집 마당 가운데에 우물, 부엌 안에 커다란 물항아리, 불 지피는 아궁이, 돌계단을 오르면 대청마루, 서까래, 다듬잇돌, 방망이, 종일 해가 머무는 부엌 앞 작은 쪽마루, 대문 옆에 삽이며 빗자루 등이 벽에 기대어 있고 그 옆에 지게가 제 할 일을 기다리며 서 있다. 멍석에 말려진 호랑이를 지고 씨걱 씨걱 용감하게 산골길을 돌아 나가면, 나는 그제야 마른침을 삼키고 슬그머니 다가온 졸음에 햇빛 가득한 쪽마루 위에서 낮잠이 든다. 대문 앞이 바로 버스 정거장이어서 멈추어선 버스의 뒤편 둥그런 범퍼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버스가 출발하며 내뿜는 연기를 하얀 안개구름 먹는다고 코로 입으로 들이마시는데 실상은 매연 덩어리이니 가슴 미어지도록 아팠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그 무렵 기억하나, 무슨 일인지 엄마에게 볼기를 맞았다. 그 또래 아이들이 엄마에게 매를 맞아야 하는 일이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터인데, 집 대문 앞이었고, 저만큼 멀리에 친구들이 옹기종기 바라보고 있었다. 치마를 올리고 맨 궁둥이를 손바닥으로 맞았는데, 창피해서 치맛자락을 당겨 내리며 꺼이꺼이 서럽게 울었다. 그 후 몇 번이나 엄마가 말씀하셨다.
“무슨 아이가 그렇게 서럽게 우느냐?”
아파서가 아니라 친구들에게 보인 궁둥이가 창피해서 울었다.
만 세 살배기 기억으론 청파동 원효로이다.
일본이 망하면서 ‘남묘호렌게쿄’라는 일본 종교가 사용하던 청파동 본거지가 있었다. 어찌 된 연유인지 성결교단이 입수하고 나에게 친할아버지 같으셨던 이성봉 목사님께서 이곳에 십자가를 세우고 예배를 드리셨다. 목사님은 주중에는 지방으로 부흥회 가시고 토요일날 오셔서 주일 예배를 함께 드렸다. 할아버지가 오시는 날이면 문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린다. 덥석 안아 하늘 높이 올리시고 빙빙 돌리며 비행기를 태워 주셨다. 언제나 커다란 갈색 가죽가방을 들고 오셨는데 성경책과 옷 몇 벌 내어 놓으시고 가방을 통째로 들어 엎으시면 간식으로 준비되었던 미제 초콜릿, 땅콩, 사탕, 비스킷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내가 딸 셋 키울 때도 이렇게 안 했는데 이녹이 생각하고 몽땅 담아 왔다.”
작은 손 꼬물꼬물, 땀방울 송송, 다리를 주물러 드리면 금방 드렁드렁 코를 고신다.
“아~ 씨원하다, 우리 이녹이 최고다, 아~ 씨원~하다~”
살짝쿵 손목에 힘을 빼면 단박에 아신다.
그 당시 아버지는 서울 신학교 학생이셨는데 6.25 사변으로 학교가 부산으로 옮기게 되어 그곳에 계시고, 엄마와 남동생과 나, 우리 셋은 주중에 오시는 성도들을 위해 새벽종을 치며 청파동 교회에서 살았다. 그 공간 구석 끝은 낮에도 어두웠고 학교 운동장만큼이나 넓었는데, 그 입구 벽에는 울긋불긋 단청 색이 요란하고, 커다란 눈이 불거져 튀어나올 듯한 털북숭이 할아버지가 창을 들고 고함을 지르는 벽화가 있었다. 그 앞을 지날 때면 언제나 두 눈 꼭 감고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쏜살같이 달렸다.
전쟁 중이라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밤이 되면 촛불을 켰는데 작은 바람에도 촛불의 그림자는 굼틀굼틀 덩실거렸다. 아무도 오지 않는 긴긴 오후가 지겨울 때면, 길게 연이어 닫혀있는 울긋불긋 방문들을 슬며시 열어 보기도 하는데, 숨이 막혀 있던 공기가 제풀에 놀라 기지개를 켜면서 달려들면 놀라 뒤로 자빠지기도 한다.
아직 여동생 태어나기 전이니 네 살이고 기억은 마산이다.
우리 집 바로 근처 동네에 돌벽으로 쌓은 축대가 있었고, 그 위에 철조망이 있고, 그 안에 절대로 웃지 않는 슬픈 눈을 한 아이들이 많이, 아주 많이 있었다.
나는 죽어라 하고 그 축대를 기어 올라가서 철조망 옆 비좁은 땅바닥에 비비고 앉아, 주머니에 넣고 간 작은 돌들을 꺼내어 철조망 사이로 공기놀이를 했다. 모두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서 매일 그곳에 갔다. 근처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 모두 들 한순간에 후다닥 사라지고, 나는 제법 높은 축대에서 껑충 뛰어내려 뒷덜미 서늘하게 도망쳐 왔지만, 다음 날이면 또 올라갔다.
아버지는 서울 신학을 졸업하시고 잠깐 마산에서 전도사님으로 목회를 하셨는데 우리가 살던 집은 한 지붕 아래 많은 사람이 함께 사는 공동 주택이었다. 작은 집들이 나란히 붙어 있었고 그 뒤에 좁고 긴 복도는 밤이고 낮이고 어두컴컴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곳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데, 불행히도 우리 집 안방에서는 그 시커먼 복도 쪽으로 누런 창호지를 바른 작은 쪽문이 있었다. 손잡이가 동그랗고 까만 쇠 걸이였고 놋수저를 꽂아 놓았는데 가끔 누군가 지나다가 문을 잡아당기면 늘어진 문풍지가 펄럭이며 도깨비 하품 같은 ‘푸수스 수슥’ 바람 소리가 났다.
목회가 최우선이셨던 부모님은 언제나 심방을 가셨으므로 집에는 두 살짜리 남동생과 우리를 돌보아주는 세 살 위 혜자 언니, 그렇게 세 꼬마뿐이었다.
그리고 여기는 경남 통영이다.
여동생이 태어났으니 나는 다섯 살이다. 당시에 아이들 간을 빼 먹으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미신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골목이 끝나 꺾어지는 모퉁이에서 궁둥이를 뒤로 빼고 숨을 죽이며 다음 골목길에 누가 있는지 코끝만 빼꼼히 내다보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텅빈 골목길을 바람처럼 달렸다. 아버지는 나를 오토바이라 부르셨다.
경상남도 ‘통영’이 ‘충무’가 되었다가 다시 ‘통영’이 되는 그때 막내 동생이 태어났고, 나는 일곱 살 통영초등학교 학생이 되었다. 보자기에 책을 서너 권 포개고 필통을 얹어 둘둘 말아 어깨에서 허리로 둘러메고, 태평교회 뒤편에 있는 사택 뒷문 계단을 내려와 동네 우물가를 지나고 산허리를 돌아가면 이순신 장군의 부하 수군들의 훈련장, 세병관을 교실로 쓰는 통영초등학교가 있다.
통통배를 타고 한산섬에 자주 갔다.
밥공기 닮은 동그란 섬들이 초록빛 바다 위에 엎어져 있고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뭉치고 흩어지면 하얀 구름 덩이를 잡겠다고 발꿈치를 높이 세우고 두 손을 헤집고 뛰어다녔다. 충렬사 넓은 대청마루에서 매미 소리 자장가 삼아 들으며 꿀잠을 자기도 했다.
내 나이 10살쯤, 이곳은 서울 장충동이다.
현관문 앞에 걸터앉았는데 내 손에 동전 하나가 있었다.
나는 이 돈을 가지고 집 밖으로 나가 1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구멍가게로 갔다. 이 가게는 전봇대를 기둥 삼아 아랫집 담벼락을 의지하고 있었는데, 구불구불 기다란 골목길에 사마귀같이 툭 불거진 거추장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당연한 듯 붙어 있었다.
“할머니, 사탕주세요.”
“할머니이 사탕 사러 왔어요.”
“할머~니이~.”
“거기 있으니 가지고 가거라.”
할머니는 낮잠 중이신지 컴컴한 구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뒤척이며 말씀하셨다. 사탕이며 딱지며 과자며 물총이며 풍선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판매대는 열 살짜리 키로는 조금 높아 까치발을 하고 왕사탕이 어디 있나 살펴보고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망설이다가 세 개를 몽땅 집어, 한 알은 입안에 넣고 두 알은 양쪽 주머니에 넣고, 동전 하나를 슬그머니 내려놓고는 숨이 턱에 차도록 뛰었다.
동전 하나에 알사탕은 두 개였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대문 옆 작은 쪽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섰다. 우리 집 대문이라 함은 실상은 장충단 성결교회 대문이었고, 이 대문은 예배가 있는 날만 활짝 열리는 아주 큰 문이고 보통 때는 그 옆에 작은 쪽문으로 다닌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편에 위풍도 당당하게 교회가 있고, 중앙에 넓은 화단이 있는데 그 너머 정면에 장충단 성결교회 당회장 목사님이 사시는 본채인 우리 집이 있다. 마침 교회 안뜰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우리 집과 교회가 만나는 곳에 있는 우물을 향하여 곧바로 뛰어갔다.
알사탕 표면에 붙어 있는 오돌토돌한 돌기들이 가시처럼 볼따구니를 마구 찔러대고 있었다.
입술을 오므리고, 혀를 말고, 등줄기 온 힘을 다해 입속 사탕을 우물 속에 뱉어내고, 주머니 속 나머지 두 알도 얼른얼른 집어 던졌다.
퐁당퐁당 소리를 내며 사탕 세 개가 우물 속으로 떨어지며 소리를 질러 대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마치 우물에 커다란 마이크를 단 것 같았다.
넓은 성전 마당을 가득 채우고 하늘 높이 번개 치면서 울려 퍼졌다.
순간 나도 우물 속에 같이 빠져 버릴까 했다. 그러면 아버지가 아시게 될것이고… 나는 사탕에 대해 말씀드려야 할 터이고… 등줄기에 찬바람이 불었다.
사흘 밤낮을 앓았는데 모두들 감기가 심하게 왔구나 하셨다.
며칠 전 이 시절 이야기를 세 살 아래 동생 목사와 나누게 되었는데 동생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종이 위에 동전을 그리고 가위로 동그랗게 오려서 그 알사탕 사 먹었는데. ~~~”
“그랬구나~!!! 할머니는 다 알고 계셨구나.~”
유소년기를 거치지 않고 청년기로 직접 지어짐을 받은 아담은 몰랐으리라. 세 살 꼬마가 느꼈던 창피한 서러움을, 어스름 저녁이 오면 슬며시 다가와 숨 막히게 덮치는 어둠의 공포를. 그림자도 잡히지 않는 뜨거운 햇볕 아래 나만 홀로 남겨진 듯한 그 적막감을, 열 살배기가 사탕의 유혹에 어쩌면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지를… 아담은 정말 몰랐으리라.
“아가야
나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서럽고 힘들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다 알고 있단다
나는 언제나 네 곁에 함께 있었지.”
아가로 이 세상에 오신 나의 주님을 사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