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왼발의 네번째 발가락(새끼발가락 옆)을 조금 다쳤다. 적절한 치료를 하는데도 걸으면 그 상처가 신발에 대여 좀처럼 낫지를 않는다. 집 가까이 나갈 때는 그것이 대일 염려없는, 발가락 나오는 슬리퍼를 신는데 그래도 거기에 무엇이 대일까, 스칠까 매우 조심한다.
지난 봄 우리집 근처에 축협 한우매장이 생겼다. 내 사전에는 ‘한우 고기’란 없는지라 그 매장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광고를 보니 함 가보고 싶었다. 가보니, 과연 광고대로다. 부위에 따라서는 수입 소고기보다 훨씬 싼 것도 있다. 손님이 많아 거의 북적이는 수준이다. 코로나가 겁나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주우-욱 둘러보니, 어느 부위인지 모르지만 ‘스지’라고 쓰인 것이 가장 싼데 1키로에 만오천(15,000)원이다. 스지 500g짜리 한 팩과 우리밀 국수 한 봉지를 사고 돈을 내기 위해 계산대 옆으로 줄을 섰는데, 아얏! 누가 내 왼발을 콱 밟았다.
새끼발가락이 밟혔다.
그 상처는 밟히지 않아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팍 드는데
“아-” 외마디에 이어 “아이구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고 한다.
내 옆의 젊은 여자가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면서 연신 굽신굽신 한다. 무슨 죽을 죄라도 지은 것 같은 얼굴이다. 그녀의 표정, 태도가 하도 애걸복걸이라 오히려 내가 좀 얼떨떨했다.
“아 예 괜찮아요, 됐어요” 하는데도 계속 용서를 애걸한다.
“아 됐어요, 눈이 옆에 있는 것도 아닌데 뭐 그럴 수 있지요” 하고 안 아픈척하며 계산대 위에 산 것을 올려놓는데
50대로 보이는 돈 받는 여주인(여직원?)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구 어르신 고맙습니다. 어떻게 말씀이 그렇게 고우십니까. 차아-암 존경스럽습니다” 한다.
뭐? ‘곱다’고 ‘존경’이라고… 완전 얼떨떨해진 학수이 반응: “아이 뭐 그러키 케사요. 참 내, 어지럽구로”.
이 말에 그녀는 더욱 친애하는 표정으로 계산서를 뽑아주면서 “이래 말씀하는 손님 없습니다. 어르신 말씀이 하도 좋으셔서 이거 담을 종량제 봉투 제가 그냥 한 장 드립니다” 한다. “허허- 참 왜 이래요” 하는데도, 물건을 그 봉투에 담아 두 손으로 공손히 건내 주면서 또 “아 어르신 정말로 훌륭하십니다” 한다. [햐- 이거 ‘고고 마운틴’이라는 생각이 들어] “허어- 참 그만하시라니까, 내 정말로 어지러워” 손사례 치면서 나가는 문을 여는데
뒤에서 또 “어르신 너무 너무 고맙습니다. 우리 젊은 사람들이 정말로 어르신을 배아야 됩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한다. 뒤돌아 보니, 발가락 밟은 그 젊은이가 나를 향해 계속 굽신굽신하고 있는 것 아닌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 입에서 그냥 툭 나온 말인데, 그 말과 전혀 무관한 제3자 여주인까지 나서서 우째 그러키들 케샀는지…
꼴랑 그 한마디로 이 어리뻥뻥 학수이가 그렇게도 큰 찬사로 어지럽도록 존경을 받다니…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마니래캉 한우 고기 함 묵어본다는 처음의 설래임은 간 곳 없고, 그 얼떨떨한 사태의 이유에 대한 생각만 가득했다.
나는 유학에서 답을 생각했다[물론 기독교나 불교 등에서도 답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 그 사태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인 인(仁), 다시 말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본성 곧 인이 현현(顯現)된 것이다. 형이상의 인이 모든 덕목의 씨앗이다.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是已發之仁 仁是未發之愛. 따라서, 인 곧 사랑은 모든 덕목을 포괄한다.
<도덕감정론>에서 애담 스미스가 말한 철학과 빙퉁그러지게, 궁극에는 사람보다 돈이 먼저이어야 하는 자본주의. 이 자본주의적 세태에서 ‘양극화’가 날로 심화되고 있는 지금 한국사회인지라 사람 간의 관계가 예전과 달리 매우 조심스러워지고 까칠해 지고 있다. 이에 따라 날로 법이 세밀해지고 에티켓 또한 매우 세련되고 있다. 반면에 인간의 본성인 인, 모든 덕목을 꽃피우는 사랑은 점점 보기 어려운 세태이다.
인은 모든 덕목의 씨앗이다. 이에 도올은 “인이란 한마디로 한정해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삶의 유동적 현실 속에서 느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강신표의 조사에 의하면, 그런 까닭에 인이 30개 이상의 의미영역으로
번역되고 있다. 세계적인 유학자들 간에도 인을 상당히 서로 다른 의미
또는 의미영역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영어의 경우, 레게(J. Legge)는
true virtue, 임어당은 the true man, 라우(D. C. Lau)는 benevolence, 풍
유란(Yu-lan Fung)은 human-heartedness, 뚜웨이밍(Wei-ming Tu)과
류슈시엔(Shu-hsien Liu)은 humanity라고 번역하고 있다.
<논어>에 ‘인’이 105번이나 나온다. 그럼에도 공자는 그것을 한가지로
개념정의 한 적이 없다. 제자들이 각기 다양한 정황에서 공자에게 인을
묻고 있고, 그때마다 공자는 각자의 정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인에 관해
말해준다. 그것은 결코 공자의 사고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인이란,
상기 도올의 언명처럼, 오직 삶의 유동적 현실 — 대별하면, 군신간, 부
자간, 부부간, 장유간, 붕우간의 다양한 현실 — 속에서 느껴질 수 있는
그러한 형이상학적 실재이기 때문이다.
오늘 그 뜻밖의 사태는, 덥지도 않은데 꼴시럽게 슬리퍼 끌고 공공장소에 들어온 추리— 하고 쭈글쭈글한 이 영감쟁이 입에서 툭 튀어나온 그 어수룩뻥뻥한 한마디에 예민한 에티켓에 억눌린 인간 본연의 따뜻한 사랑 곧 인이 무심결에 [무심결이므로]즉각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비싼 매이커 옷차림인 누가 ‘어허- 참, 이래 사람 많은데 좀 잘 보고…’ 머 이런 식으로 정색을 하고 스스로 매기고 있는 자신의 품위를 의식하며 똑똑한 말을 했더라면 물론 그녀는 ‘아이쿠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하면서 진정으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결코 그러한 인의 현현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아하— 오늘 나는, 내 자신이 뭐 좀 괜찮아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인 인 덕분에; 또한 그 본성을 억누르고 있는 지금의 세태 덕분에; 아니, 따지고 보면 결국 그 소고기 한 근으로 인해 어지럽도록 존경을 받은 것이다! 허허...
<kang40lava@hanmail.net>
첫댓글 修己治人
나를 잘 다스리기 위해 더욱 수양에 힘쓰겠네.
친구야 충고 고맙다.^
仁是愛
元亨利貞 天道之常
仁義禮智 人性之綱
_ 小學_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