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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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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독살 된 왕?: 20경종(4년2개월)//절반의 성공 :21 영조(숙빈최씨의 아들)-사도세자,혜경궁 홍씨
이장희 추천 0 조회 509 16.01.06 23: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20대 경종 가계도 

숙종 - 희빈 장씨 인동장씨 장형의 딸

제 20대 경종

장남 : 경종(1688-1724)

재위기간 : 1720.6-1724.8(4년 2개월)

부인 : 2명 / 자녀 : 없음

1부인

단의왕후 심씨

자식없음

2부인

선의왕후 어씨

자식없음

 

 

 

 

 

세자 바꾸려 한 노론 대리청정 덫을 놓다

독살설의 임금들 경종① 숙종- 노론 수장 전주이씨 이이명 독대

이덕일 | 제136호 | 20091018 입력
 
왕조 국가의 가장 중요한 헌정 질서는 왕권 계승의 예측성과 투명성이다. 갓 태어난 왕자가 원자(元子)가 되거나 세자(世子)로 책봉되면 차기 국왕으로 결정되었다는 뜻이 된다. 세자를 국본(國本)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노론은 이런 헌정 질서를 부인하고 자당이 지지하는 인물을 국왕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면서 많은 비극이 발생한다.
 
노론 영수 전주이씨 이이명의 초상. 이이명은 숙종 43년 정유독대를 통해 세자 교체를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자신도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다.아래 사진은 이이명이 쓴 39소재집39
숙종 43년(1717) 7월 19일. 전염병이 크게 번져 조정은 중신(重臣)을 보내 전염병 귀신에게 여제를 지내기로 결정했다. 7월 초9일에는 폭우가 내려 물가의 가옥이 태반 무너져 내리는 수해가 발생했다.

 

이날 숙종은 안질 때문에 문서를 읽기가 어렵다면서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는 장님이 되는 것을 재촉하는 격이니 변통시키는 방도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좌의정 이이명이 ‘발음이 분명한 사람에게 문서를 읽게 하자’고 제안하면서, “왕세자를 곁에 두고 참견하게 함으로써 정무(政務)를 분명히 익히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권고했다.

노론 영수 전주이씨 이이명이 세자의 정사 참여를 제안한 것은 의외였다.

 

노론이 장희빈 소생의 세자 이윤(경종)을 자신들이 지지하는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훗날의 영조)으로 교체하려고 한다는 건 다 알려진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숙종은 즉각 “당나라 태종도 말년에 병이 위중하자 변통시킨 일이 있지 않았는가?”라고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이이명은 “먼 곳의 고사를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국조(國朝: 조선)에서도 세종대왕이 미령(未寧)하실 때 문종대왕께서 별전에 출어하셔서 대신들과 국정을 결단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세자의 국정 참여는 지극히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추후 대신들과 다시 의논해 결정하기로 하고 오전 회의를 끝냈다.

미시(未時: 오후 1~3시)경에 숙종은 다시 희정당(熙政黨)으로 나가서 좌의정 이이명의 입시를 명했다. 승정원의 승지 남도규와 실록을 담당하는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 권적 등이 관례에 따라 함께 나아가려 했다. 그런데 내시가 좌의정 혼자만 입시하라는 분부라는 숙종의 말을 전했다. 이이명과 독대하겠다는 뜻이었다.

 

승지·사관은 물론 이이명도 당황했다. 승지와 사관의 배석 없이 독대했다가 구설수에 오를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이명은 승지 남도규를 돌아보며“일이 상규(常規: 관례)와 다르니 승지와 사관은 입시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함께 들어가자고 청했다. 하지만 승지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이이명만 불렀는데 왕명이 없는데 들어갔다가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창릉동에 있는 인동장씨 장희빈의 대빈묘. 노론은 장희빈(남인(이 사사 당시 세자(경종)의 하초를 잡아당겨 불구로 만들었다는 악의적인 소문까지 퍼트릴 정도로 장희빈을 저주했다. 사진가 권태균
사관 권적은 “죄벌을 받더라도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며 이이명의 뒤를 따랐다. 승지 남도규는 몇 걸음 따라가다가 권적을 돌아보며 “대신(大臣) 혼자 입시하라고 명하셨는데, 우리들이 먼저 품부(稟復: 윗사람의 뜻을 물음)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 사체(事體: 일의 체통)에 어떠한지 모르겠다”고 주저했다. 사관 권적이 문을 열어젖히려 하자 남도규가 다시 잡으면서 “승전색(承傳色: 명을 전하는 내시)에게 청하여 품지(稟旨)를 거친 후에 들어가자”고 말렸다. 그 사이 독대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승지와 사관이 입시하려 한다는 승전색의 전갈에 숙종은 답을 하지 않았다.

숙종은 독대가 끝난 후에야 승지와 사관의 입시를 허용했다. 이 날짜 '숙종실록'사관은 “이때 이이명은 이미 물러나와 자기 자리에 부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날 임금과 나누었던 말은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숙종 43년 정유년의 ‘정유독대(丁酉獨對)’다.

독대 직후 숙종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하자 야당인 소론은 발칵 뒤집혔다. '당의통략'에서 “(노론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찬성한 것은 장차 이를 구실로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적은 것처럼 소론에서는 세자의 실수를 기다려 연잉군으로 교체하려는 의도로 여겼다.

 

사헌부 장령 조명겸(趙鳴謙)이 “대신의 독대는 잘못된 거조가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습니다”라고 노론 이이명의 견책을 주장한 것처럼 ‘독대 비판론’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82세의 노구로 와병 중이던 소론 영수 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은 관을 들고 상경해 독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독대는 상하가 서로 잘못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국(相國: 정승)을 사인(私人)으로 삼을 수 있으며 대신(大臣)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로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숙종실록' 43년 7월 28일) 소론은 숙종과 노론 이이명이 세자 교체와 연잉군(영조) 추대를 밀약했다고 의심했다.

 

소론 윤지완의 상소에 분노한 숙종은 “임금에게 고하는 말도 함부로 하였고,(노론)  좌의정에 대해서는 바로 ‘사신(私臣)’이란 한마디로 단정해 망측한 누명의 구렁으로 몰아넣으니,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소론의 이런 반발은 세자를 교체하려는 숙종과 노론의 밀약이 실행되는 데 큰 장애가 된 것이 사실이다.

장희빈이 세자를 낳았던 1688년(숙종 14)만 해도 숙종은 장희빈과 세자를 반대하는 서인(노론의 전신) 정권을 갈아치우고 남인들에게 정권을 줄 정도로 갓 낳은 왕자를 총애했다.

 

그러나 재위 20년(1694) 4월 정권을 다시 서인에게 주는 갑술환국을 단행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인동장씨가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고 여흥민씨가 다시 복위한 데다 그해 9월 숙빈 해주최씨가 연잉군(영조)을 낳으면서 세자에 대한 총애는 급격하게 식었다.

 

한번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죽이거나 쫓아내는 숙종의 성격으로 볼 때 세자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세자가 스스로를 보전하는 유일한 방법은 절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작은 꼬투리도 잡히지 않는 것뿐이었다.

'경종대왕 행장(行狀)'은 숙종 27년(1701) 인현왕후 여흥민씨의 와병 때 세자의 행위를 적고 있다. 민씨가 오라비 민진후(閔鎭厚)에게 영결하는 말을 하자 민진후는 엎드려 눈물을 흘렸는데, 세자는 슬픈 용태를 드러내지 않다가 문 밖에 나와서 민진후의 손을 잡고 크게 울었다는 것이다. 그해 8월 인현왕후 여흥민씨가 승하해 시신을 발인했을 때는 교외에서 궁중에 이르도록 통곡을 그치지 않아 도로의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해 10월 숙종은 희빈 장씨를 인현왕후를 저주한 혐의로 죽이는데 모친이 죽던 날의 세자의 정경에 대해 '당의통략'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때 세자의 나이 13살인데 글을 올려 “신(臣: 세자)의 어머니가 그릇된 일을 하는데 신이 알지 못할 리 없으니 함께 죽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면서 궁문 밖에 거적을 깔고 울며 여러 신하들에게 “나의 어머니를 살려 주기를 원하오”라고 하소연했다.

 

이에 좌상 용인이씨 이세백(李世白: 노론 영수)은 옷을 털어 피했으나 영의정 최석정(崔錫鼎: 소론 영수)은 “신이 죽기로 저하의 은혜를 갚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숙종이 마침내 인동장씨 희빈에게 죽음을 내리고 다시 장희재와 업동 및 여러 장씨들을 국문하여 모두 베어 죽이니 이것은 다 이세백이 찬성한 것이었다.('당의통략')

장희빈 사사에 가담한 노론에서 세자 대리청정을 먼저 주청하고 나온 의도는 명백했다. '당의통략'은 “세자가 어머니의 변고를 당한 뒤부터는 근심하고 조심하는 것이 점점 심해지더니 잠을 자는 것도 처음과 같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노론에서는 세자의 자질을 낮춰보고 대리청정을 시키면 숙종의 분노를 살 만한 큰 실수를 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세자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실력을 감춘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다.

 

'경종대왕 행장'은 세자가 대리청정할 때 “여러 업무를 재결(裁決)하는 것이 모두 사리에 합당했으며 일을 당하면 모두 위에 품한 뒤에 행해서 감히 마음대로 독단하지 않음을 보였다”고 전하고 있다. 세자 스스로 대리청정이 부왕과 노론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만든 자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리청정하던) 첫봄에 팔도에 유시하여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굶주리는 백성들에게는 넉넉히 진대(賑貸)하도록 했으며, 유포(流逋: 유랑)하는 자에게는 자산(資産)을 주어 향토(鄕土: 고향)에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역질(疫疾)을 앓는 자에게는 양식과 약품을 지급해 주도록 하였고, 병으로 죽은 자가 있으면 곧 시신을 거두어 묻어 주도록 하였으며, 백성들 중에 의방(醫方)을 알아서 사람을 병에서 구해 주었거나 사재를 들여 길에서 굶어 죽은 자의 시신을 묻어 준 사람이 있으면 위에 계문하여 시상하도록 허락하였다.”('경종대왕 행장')

노론의 희망과 달리 세자는 우매하지 않았다. '행장'은 “신료를 예(禮)로써 대우하였고, 종친은 은혜로써 대접하였으며, 대신이 죽으면 반드시 위차(位次)를 마련하여 곡(哭)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당의통략'에서도 “노론 또한 그의 잘못을 찾을 길이 없었다”고 쓰고 있는 것처럼 쫓아낼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숙종이 재위 46년(1720) 만에 세상을 떠나 대리청정하던 세자가 드디어 즉위하게 되었다. 이렇게 경종 시대가 열렸으나 노론은 그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왕조 국가에서 특정 당파가 헌법 질서에 의해 즉위한 임금을 부인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인물을 택군(擇君)하려는 불행한 사태가 시작된 것이다.

 

 

힘없는 국왕 앞에 드리운 어머니 장희빈의 그림자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37호 | 20091024 입력

 

헌정 질서를 부인하는 세력이 세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 많은 비극적 사건이 발생한다. 경종은 세자 대리청정을 거쳐 국왕이 되었지만 집권 노론은 경종을 부인했다. 노론에 경종은 자신들이 죽인 모친 장희빈과 한 몸이었다. 화해의 정치 대신 증오의 정치, 한때 국모였던 여인을 죽인 과거사가 현실 정치의 발목을 잡고 있는 불행한 상황이었다.

 

연행도 중 조양문 조선 사신들이 베이징 조양문을 향하고 있다. 이이명은 사신으로 가면서 6만 냥을 가져가 청나라 관리들을 매수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가 권태균
독살설의 임금들 경종② 허수아비 임금

숙종이 세상을 떠나기 한 달 반쯤 전인 재위 46년(1720) 4월 24일. 『숙종실록』은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니, 성상의 환후는 복부의 팽창이 더욱 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간경화나 간암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날 숙종은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고 한탄한다. 그토록 숱한 사람을 죽였던 제왕도 죽음 앞에서는 두려웠던 것이다. 숙종이 회생할 가망이 없어지자 노론 영수 전주이씨 이이명(李<9824>命)의 관심사는 이미 숙종을 떠나 있었다. 이이명은 “소신(小臣)이 진달한 바는 비단 일시적인 병의 치료(調) 방도뿐만 아니라, 반드시 국세(國勢)를 지탱하고 만백성을 보안(保安)하는 것임을 유념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비단 일시적인 병의 치료 방도(不但一時調病之道)’보다 중요한 ‘국세를 지탱하고 만백성을 보안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이명은 또 “정신이 조금 나으실 때 대신들을 불러 보시고 국사(國事)를 생각하고 헤아리신 것이 있으시면 하교하소서”라고 덧붙였다.

 

소론에서 편찬한 『숙종실록 보궐정오』의 사관(史官)은 “동궁(東宮)의 대리청정에 억조창생이 희망을 걸어 백성과 나라가 보전되어 근심이 없었다”고 전제하면서 “이이명이 급급하게 이런 말로 위태롭게 동요시킨 것은 독대를 한 후 스스로 (죄를) 면하지 못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사관은 “은연중에 말명(末命:유언)이 어떠한가 여부로 요행을 바랐다”면서 ‘불단(不但)이란 두 글자를 세밀히 따져보면 그의 마음을 확실히 알 수가 있다’고 비난했다. 세자를 연잉군으로 교체하라는 유언을 바랐다는 뜻이다.

그러나 저승길이 어른거리는 숙종은 세자 교체에 관한 유언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세자 교체에 실패한 노론은 경종을 끌어내는 데 당력을 걸었다. 비록 즉위했지만 경종의 왕권은 미약했다.

안동김씨 김창집 글씨 영의정 김창집은 청나라 사신에게 경종의 동생 연잉군의 신상 자료를 건넸다가 숱한 비난을 받았다.
경종 즉위년(1720) 7월 21일 유학(幼學) 조중우(趙重遇)가 “어머니가 아들로써 귀하게 되는 것이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라면서 경종의 모친 장씨의 명호(名號)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희빈의 신원을 주장한 이 상소에 노론은 발칵 뒤집혔다.

 

사헌부 집의 풍양조씨 조성복(趙聖復)은 “오늘날 신자(臣子)된 자가 어찌 감히 이처럼 속이는 말을 제멋대로 입밖에 낼 수가 있겠습니까”라면서 엄하게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중우는 혹독한 국문을 받고 귀양 가다가 평구역(平丘驛)에 이르러 물고(物故:죄지은 사람이 죽음)되었다.

 

기세를 잡은 노론은 역공에 나섰다. 같은 해 9월 성균관 장의(掌議:학생회장) 윤지술(尹志<6CAD>)은 숙종이 신사년(1701)에 장희빈을 죽인 것과 관련, ‘그 처변(處變)이 도에 합당한 것’이자 ‘정도(正道)를 호위한 것’이라며 이를 숙종의 지문(誌文)에 넣어 영원히 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사년의 처분은 선왕께서 국가 만세(萬世)를 염려한 데에서 나온 것이며, 전후 장주(章奏:상소)의 비답에 성의(聖意)를 보이신 것이 해와 달같이 밝으니 전하께서 감히 다시 마음에 다른 뜻을 품을 수 없는 것이며, 또 그것이 도리에도 당연한 일입니다.”(『경종실록』 즉위년 9월 7일)

경종은 자신의 생모를 죽인 것이 ‘해와 달같이 밝은’ 선왕의 업적이라고 주장하는 태학생 윤지술을 처벌할 수 없었다. 윤지술의 유배를 명하자 성균관의 노론계 학생들이 권당(捲堂:동맹휴학)했으며, 노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까지 “사기(士氣)를 꺾는 것이 옳지 않다”고 동조했기 때문이다.

 

국왕의 생모를 신원하자는 주장은 장하(杖下)의 귀신이 되고, 생모를 죽인 것이 선왕의 업적이라는 주장은 ‘선비의 사기’로 추앙받는 상황이었다.

 

경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모든 권력은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불안했다. 자신들이 죽인 여인의 아들이 임금으로 있는 것 자체가 불안했던 것이다.

 

이런 불안 때문에 빚어진 사건이 경종 즉위년 9월 포도대장 전주이씨 이홍술(李弘述)술사(術士) 육현(陸玄)을 장살(杖殺:곤장을 때려 죽임)한 사건이었다. 이후 이홍술은 훈련대장으로 승진함.

 

이 사건에 대해 사신(史臣)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육현은 추수(推數:운명학)에 능해 안동김씨 김창집이 처음에는 친하게 지냈으므로 음사(陰事=역적모의)를 말해주었으나 돌아서서 그 말을 누설할까 두려워 전주이씨 이홍술을 사주해 박살(撲殺:때려 죽임)함으로써 멸구(滅口:입을 막음)했다. 계획적으로 속이고 감추려는 정상에 사람들이 다 의혹을 품었다

.”(『경종실록』 즉위년 9월 21일)

훗날 이 사건의 재조사를 통해 안동김씨 김창집의‘음사(陰事)’는 경종을 모해하려는 역모로 결론지어졌다.

 

경종을 압박하는 사건이 계속되었다. 그해 11월 청의 사신이 숙종의 치제(致祭)를 위해 왔는데 “세자(世子:경종)와 그 아우 등을 만나보겠다”는 말이 있었다. 사신이 국왕의 동생을 만나겠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소론으로 갓 우의정이 된 양주조씨 조태구(趙泰<8008>)는청 사신의 국왕 동생 면담은 사리에 어긋나는 실례(失禮)이므로 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큰 논란이 되는 와중에 영의정 안동김씨 김창집은 연잉군의 신상에 관한 자료를 사신에게 주었고 사신은 이를 문서로 만들었다.

“조선국 세자(경종)는 금년에 33세인데 자녀가 없고, 동생(영조)이 있는데 금년 27세로서 군수 달성서씨 서종제(徐宗悌)의 딸을 아내(=정성왕후 달성서씨)로 삼았는데, 그 모친은 최씨이고 현재 자녀가 없다
.”(『경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

노론 안동김씨 김창집이 소론의 영수 양주조씨 조태구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 사신에게 왕제(王弟)의 신상을 적어 준 것은 큰 물의를 낳았다. 『

 

숙종실록』 사신(史臣)은 김창집의 행위를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저들이 비록 입으로는 황지(皇旨:황제의 지시)라고 일컬었으나 칙서(勅書)에는 이런 말이 없었으니, 우리가 만약 황지에 없는 말은 사신(使臣)이 물을 바가 아니라고 사리에 의거해 엄하게 거절했다면 저들도 반드시 이치에 굽혀 머리를 숙였을 것이다. 김창집은 이렇게 하지 않고 그들의 말만 따라 임금에게 품지(稟旨)도 하지 않고 독단으로 써 주었다. 김창집은 수상(首相)의 몸으로 국가에 욕을 끼치고 저들에게 수모를 당한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춘추(春秋)』의 법으로 논한다면 그 죄는 죽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경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

청나라 사신들은 왜 관례를 깨고 연잉군(영조)을 보겠다고 나섰을까.

 

『숙종실록』의 사신(史臣)은 “혹자는 노론 전주이씨 이이명이 사신으로 갈 때 은화(銀貨)를 많이 가지고 가서 저 나라에 뇌물을 주었다’고 말한다”고 그 배경을 시사했다. 이이명이 청나라에 가서 막대한 뇌물을 써서 청나라가 연잉군을 지지하는 것처럼 일을 꾸몄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것이다.

 

사신(史臣)은 “이는 비록 의심하고 저해(沮害)하는 지나친 염려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 무렵 호차(胡差:청나라 사신)가 거짓으로 황지(皇旨)를 빙자해 전례가 없던 일을 발설했으니, 인심의 놀람과 의혹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경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라며 이이명에게 원인 유발의 책임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경종에 대한 노론의 압박이 계속되자 경종 즉위년 12월 11일 충청도의 유학 이몽인(李夢寅) 등이 상소문을 들고 상경해 대궐문에 엎드렸다. 병조의 당상과 낭청이 꾸짖으며 입궐을 막자 이몽인 등은 도끼와 상소문을 들고 궐문으로 난입했다. 병조에서는 군졸을 시켜 소함(疏<51FE>:상소문을 넣은 상자)을 깨뜨리고 소본을 찢어버린 뒤 밖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이몽인 등 세 사람을 옥에 가두었는데,

 

『경종실록』은 “김창집이 먼저 계책을 쓴 것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소론 이몽인 등의 상소는 장희빈을 죽인 것이 숙종의 큰 업적이라고 주장한 윤지술에 대해 인륜을 무너뜨렸다고 비판하고, 청나라 사신에게 연잉군의 신상을 써준 노론 김창집의 행위도 크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

 

『당의통략』은 이몽인이 “독대(獨對)한 대신이 6만 냥을 훔쳐갔다”고 비난했다고 전하는데 노론 전주이씨 이이명이 이 6만 냥으로 청나라 사신을 매수했다는 비난이었다. 노론이 경종을 내쫓고 연잉군을 세우려 한다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었다.

 

33세 임금을 굴복시킨 ‘한밤의 날치기’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38호 | 20091031 입력

 

과정과 결과는 동전의 양면이어서 과정의 정당성이 결여되면 결과의 정당성도 훼손될 수밖에 없다. 노론은 ‘경종 축출과 연잉군(영조)’이라는 당론을 결정했는데 노론의 당력은 그만큼 막강했다. 그러나 왕조국가에서 국왕을 몰아내고 특정 인물을 추대하려는 구상은 심한 반발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정권에 눈이 먼 노론은 이를 강행하면서 많은 비극이 발생한다.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경주김씨 김주신의 딸: 명릉.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 내에 있다.

왼쪽으로 숙종과 인현왕후 여흥민씨의 능이 보인다.

인원왕후 경주김씨는 원래 소론가였으나 남편(숙종)을 따라 노론을 지지했다.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한다는 인원왕후의 수찰을 받아 쿠데타의 안전판으로 삼으려 했다. 사진가 권태균

독살설의 임금들 경종③ 연잉군 왕세제 옹립

경종 1년(1721) 8월 20일 사간원 정언(正言) 이정소(李廷<71BD>)가 상소를 올린 것이 신호탄이었다.

 

이정소는 “지금 우리 전하께서 춘추가 왕성하신데도 아직 저사(儲嗣: 왕의 후계자)가 없으시다”면서 경종에게 아들이 없음을 지적했다. 이정소의 상소는 곧바로 핵심을 파고들었다.

“방금 국세는 위태롭고 인심은 흩어져 있으니 마땅히 나라의 대본(大本: 세자)을 생각하고 종사의 지극한 계책을 꾀해야 하는데도 대신들은 아직껏 이를 청하지 않으니 신은 이를 개탄합니다.(『경종실록』 1년 8월 20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동 마북동에 있는 유봉휘 청덕애민비. 유봉휘가 용인현감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푼 것을 기념해 숙종 31년(1705) 새긴 것인데 영조 즉위 후 유배갔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가 남아 있는 것이 이채롭다.
아들이 없는 임금에게 건저(建儲: 세자를 세움)를 청하지 않았다고 대신들을 꾸짖는 상소였다. 잘 짜인 한 편의 각본이었다.

 

정6품 사간원 정언이 발의하면 배후의 대신들이 처리에 나선다는 각본이었다. 아들이 없는 33세의 임금에게 후사를 세우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신들이 임금으로 모실 의중의 인물이 있다는 뜻이었다.

 

태종 때 같으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일이었지만 이때는 달랐다.

 

이정소 독단으로 올린 상소가 아니었다. 이정소는 ‘경종 축출과 연잉군(영조) 추대’라는 노론 당론을 야당 몰래 기습 발의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었다.

이정소는 “사직의 대책(大策: 세자 결정)을 정하시는 것이 억조(億兆) 신민의 엄숙한 소망(<9852>望)입니다”라고 말했지만 억조 신민이 아니라 노론만의 ‘엄숙한 소망’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을 무력화시키려는 이 상소에도 경종은 ‘대신들과 의논해서 품처하라’고 심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노론은 기다렸다는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경종수정실록』의 이 날짜 기록은 인현왕후 여흥민씨의 오라비 민진원(閔鎭遠)의 입을 빌려 경종 즉위 직후부터 ‘건저(建儲) 의논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호조판서 민진원은 ‘즉위한 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아 건저 하면 의혹이 생길 것’이라면서 국상이 끝나는 3년 후에 의논하자고 주장했고 영의정 안동김씨 김창집도 동조했다는 것이다.

국상 중에는 부부관계도 자제해야 했기에 3년 후를 기약한 것이었으나 병조판서 우봉이씨 이만성(李晩成) 등은 ‘당장 의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년 후’와 ‘지금 당장’으로 갈라졌던 노론 내부는 이정소의 상소가 나오자 바로 통일되었다.

 

이날 안동김씨 김창집이 빈청(賓廳: 회의 장소)으로 가면서 여흥민씨 민진원에게 “3년 뒤에 하려고 했는데 이미 말이 나왔으니 극력 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하자

 

민진원은 이렇게 답한다.

이 의논이 이미 나온 후에는 한 시각도 지연할 수 없으니 반드시 오늘 밤에 극력 진달해서 대책(大策)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지연된다면 종사의 변이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경종수정실록』 1년 8월 20일).”

아들 없는 임금의 후사를 ‘반드시 오늘 밤’에 결정해야 한다는 말은 ‘3년 운운’이 노론의 계획적인 쿠데타라는 비난을 희석시키기 위한 면피용 수사에 불과했음을 말해준다. 훗날 이정소의 집은 서덕수·김창도·김성행 등 경종을 죽이려 한 혐의로 사형당한 노론 대신들의 아들·조카들의 단골 회의 장소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서도 계획적 쿠데타임을 말해준다.

 

숙종이 재위 14년 만에 후궁 인동장씨(남인)에게서 난 왕자를 원자로 책봉하려 하자 ‘(서인) 인현왕후 여흥민씨가 왕자를 생산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극력 반대했던 노론이었다. 그때 인현왕후는 스물둘인 반면 이때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는 열일곱에 불과했다. 노론은 ‘이날 밤 안으로 후사 결정’이란 당론 관철을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일단 궁궐문을 닫지 못하게 유문(留門)시켰다.

『경종실록』의 사관(史官)이 “당일 대신들은 조정에 모여 발의하지 않았고, 또 교외(郊外)에 있는 대신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라고 전하는 대로 소론 대신들은 의도적으로 배제시켰다. 변란이라도 일어난 듯 밤 2경(二更: 오후 9~11시)에 영의정 안동김씨 김창집, 좌의정 전주이씨 이건명, 호조판서 여흥민씨 민진원, 병조판서 우봉이씨 이만성, 형조판서 이의현 등 노론 대신들이 급히 면담을 요청했다.

 

소론에 속한 우의정 양주조씨 조태구, 이조판서 전주최씨 최석항 등은 배제되었다.

 

시민당(時敏堂)에서 경종을 만난 노론 대신들은 빨리 후사를 결정하라고 다그쳤고,조영복선생영정 문화재 사진 <=승지 함안조씨 조영복(趙榮福)은 “대신들과 여러 신하들의 말은 모두 종사의 대계(大計)를 위한 것이니, 속히 윤종(允從)하소서”라고 가세했다.

경종은 “윤종한다”고 수락했으나 안동김씨 김창집과 전주이씨 이건명은 ‘자전(慈殿: 대비)의 자지(慈旨: 대비의 지시)가 있어야 봉행할 수 있다’면서 대비 인원왕후 경주김씨(숙종비)의 수필(手筆)을 얻어오라고 요구했다. 정사에 간여할 수 없는 대비까지 끌어들여 사후 안전판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 『경종실록』은 “임금이 대내(大內: 대비전)로 들어갔는데 오래도록 나오지 않자 안동김씨 김창집 등이 승전 내관을 불러 구계(口啓: 말로 아룀)로 임금을 재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의통략』은 “김창집 등이… 마음속에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인원왕후 경주김씨는 소론 김주신(金柱臣)의 딸이었으나 김주신이 국구(國舅: 국왕의 장인)가 된 후 당색을 멀리했으며, 인원왕후도 남편 숙종을 따라 노론을 지지했지만 소론 편을 들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경종은 날이 밝아 새벽 누종(漏鍾: 물시계)이 친 후 낙선당(樂善堂)에서 다시 노론 대신들을 만났다.

 

경종이 책상 위를 가리키며 “봉서(封書)는 여기 있다”고 말하자 안동김씨 김창집이 뜯어보니 대비의 친필 두 장이 있었는데 한 장은 해서(楷書)로 ‘연잉군(延<793D>君)’이라고 쓰여 있었고, 다른 한 장은 한글 교서였다.

“효종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의 골육은 다만 주상과 연잉군이 있을 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소? 내 뜻은 이와 같음을 대신들에게 하교함이 옳을 것이오.”

『경종실록』은 “여러 신하들이 다 읽어보고 울었다”고 전하고 있다
. 한밤의 날치기가 성공한 데 대한 기쁨의 눈물이었다.

 

만백성과
소론은 전혀 모르는 가운데 하룻밤 사이에 차기 국왕이 연잉군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노론이 축제 분위기에 싸여 있던 8월 23일 소론의 행(行: 관직이 품계보다 낮을 경우 붙는 말) 사직(司直) 문화유씨 유봉휘(劉鳳輝)가 상소를 올려 문제를 제기했다.

“나라에 있어 건저가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한강 밖에 나가 있는 시임(時任: 현직) 대신들도 전혀 알지 못하고, 처음 불러서 나가지 않은 사람은 다시 부르지도 않고…(『경종실록』 1년 8월 23일).”
먼저 절차상의 잘못을 지적한 유봉휘는 노론이 내세운 논리의 문제를 지적했다.

 

“우리 전하께서는 중전을 다시 맞이하셨으나 약을 드시며 계속 상중에 계셨으니 후사(後嗣)의 있고 없음을 아직 논할 수도 없습니다. 전하의 보산(寶算: 나이)이 한창 젊으시고 중전께서도 겨우 계년(<7B53>年: 15세)을 넘으셨으니 나중에 종사(<87BD>斯: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의 경사가 있기만을 바라는 것이 온 나라 신민들의 엄숙한 소망(<9852>望)입니다.”

소론 유봉휘는 ‘병환이 있다면 의약에 정성을 쏟아야 하지만 이를 신경 쓴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의약은커녕 병이 있는 임금에게 철야를 시킨 노론이었다. “비록 그 성명(成命)은 이미 내려졌으므로 다시 논의할 수는 없을지라도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군부를) 우롱하고 협박한 죄는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신 이하의 범죄를 저지른 것을 바로잡음으로써 나라 사람들에게 사과(謝過)해야 합니다(『경종실록』 1년 8월 23일).”

그러자 승지 한중희(韓重熙)가 문화유씨 유봉휘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안동김씨 김창집 이하 대신들은 늦은 밤까지 청대해 국청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종실록』 사관이 “그(유봉휘)의 뜻은 김창집 무리들이 경종에게 무례했기에 스스로 경종을 위하여 한 번 죽으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라고 평하면서 유봉휘도 당론에 따른 것이라는 양비론을 펴고 있다.

 

그러나 왕조국가에서 노론의 행위는 명백한 쿠데타였다. 노론은 일제히 유봉휘의 처벌을 주청했는데 『경종실록』은 그 정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때 삼사(三司)는 날마다 대궐문 앞에 엎드려 상소하였고, 대신은 여러 재신(宰臣)들을 거느리고 엄한 국청을 열어야 한다고 계청했으며 종실(宗室)과 관학(館學: 성균관) 유생들도 상소했다. 화색(禍色)이 날로 급해졌는데도, 유봉휘는 의금부 앞 거리에 짚자리를 깔고 대명(待命: 명을 기다림)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도성 사람들이 다 모여서 구경했다고 한다(『경종실록』 1년 8월 25일).”

이때 소론 우의정 양주조씨 조태구(趙泰耉)가 차자를 올려 ‘그 뜻만은 나라를 위하는 붉은 마음(赤<5FF1>)으로 결코 다른 마음이 없었다’면서 유봉휘의 국문을 반대했고, 경종이 “경의 차자를 보니 국청 설치를 명한 것이 잘못임을 알겠다”고 받아들였다. 문화유씨 유봉휘는 사지(死地)에서 겨우 살아났다.

 

그러나 연잉군의 세제 책봉은 기정사실이 되었고, 노론은 두 달이 채 못 된 경종 1년(1721) 10월 10일 경종을 무력화시킬 두 번째 정치 일정에 들어갔다.

 

 

대리청정 요구 노론에 소론 중용으로 ‘반격의 칼’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39호 | 20091108 입력

 

노론이 경종 축출과 연잉군 추대의 당론을 정한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신하들이 국왕을 취사선택하는 행위는 곧 역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론은 강한 당세를 믿고 이런 당론을 실천에 옮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권이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젊은 국왕을 공개적으로 내쫓으려는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는 없었다.
소론 광산김씨 김일경 단소(壇所:시신 없이 고인을 기리는 특별한 장소). 경북 예천군 감천면 내성천 근처에 있다. 김일경은 노론 4대신을 4흉이라고 공격하는 신축소를 올려 정권을 장악했으나 영조가 즉위하면서 사형당하게 된다. 사진가 권태균
독살설의 임금들 경종④ 신축환국

노론이 한밤의 기습 날치기로 연잉군(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만든 지 한 달 반쯤 지난 경종 1년(1721) 10월 10일. 노론은 두 번째 정치일정을 시작했다. 사헌부 집의 풍양조씨 조성복(趙聖復)이 상소를 올려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조성복은 세제가 “서정(庶政)을 밝게 익히는 것이 당면한 급무”라면서 경종이 모든 국사를 처리할 때 세제와 그 가부를 상확(商確:서로 의논해 정함)하라고 주청했다. 조성복은 또한 이 일에 대해서도 “자지(慈旨:대비의 교지)를 청하라”면서 대비를 또 끌어들였다.

 

1년 전 유학(幼學) 조중우(趙重遇)가 장희빈의 명호(名號)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상소했을 ‘신자(臣子)가 어떻게 이런 말을 제멋대로 입 밖에 낼 수 있느냐’고 성토해 국문을 받고 죽게 만든 장본인이 조성복이었다. 신자 운운하던 조성복이 국왕의 왕권을 빼앗으려 나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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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조씨 조성복 : 조선 후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노론.

  • [가계]
  •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사극(士克), 호는 퇴수재(退修齋)이다. 아버지는 감역(監役)을 지낸 조시채(趙始采)이다.

  • [활동사항]
  •  

    1702년(숙종 2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과 정언을 지냈다.

     

    1716년(숙종 42) 지평으로 있으면서 윤선거(尹宣擧)의 선정(先正) 칭호를 금할 것을 청하였다.

     

    이후 장령과 헌납을 지냈다
    .

     

    1721년(경종 1) 집의로 양역(良役)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해에 경종에게 세제(世弟, 영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려 노론의 지지를 받음으로써 뜻이 이루어졌으나, 소론 측이 무군부도(無君不道)의 죄로 몰아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았다.

    1722년(경종 2) 정의(旌義)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되었다. 세제의 대리청정 문제는 신임사화(辛壬士禍, 소론득세)의 원인이 되었다. 1723년(경종 3) 다시 잡혀 올라와 옥중에서 독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

    독은 조성복의 형인 조성집이 의금부 예속(隷屬)에게 뇌물을 써서 전한 것이다. 조성복은 신임사화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공주시 정안면 운궁리공자(孔子)주자(朱子),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한 문회당(文會堂)이 있었는데, 문회당기에 의하면 뛰어난 인재였다고 한다.

  • [묘소]
  •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월산리에 있다.

  • [상훈과 추모]
  • 영조 즉위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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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놀라운 상소에 경종은“진달한 바가 좋으니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즉각 수락했다. 경종은 당일 저녁 비망기를 내려 “내가 이상한 병이 있어 10년 이래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다”며 “세제는 젊고 영명하니 만약 청정(聽政)한다면 국사(國事)를 의탁할 수 있고, 내가 편안하게 조양(調養)할 수 있을 것이니 크고 작은 국사를 모두 세제에게 재단하게 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승지 전주이씨 이기익(李箕翊), 응교(應敎) 평산신씨 신절(申<6662>) 등이 즉시 청대해 반대했다.

    경종의 친필. ‘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밖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주역』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의 효사(爻辭)를 풀이한 글이다.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지 겨우 1년이고 춘추가 한창이시며, 또 병환도 없고 기무(機務)도 정체되지 않고 있는데 어찌 갑자기 이런 하교를 하십니까? 신 등은 비록 죽을지라도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경종실록』 1년 10월 10일)

    서른셋의 국왕에게 스물일곱의 세제를 대리청정시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경종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전주이씨 이기익 등은 “지금 대궐문이 이미 닫혔기 때문에 이처럼 고요하지만 조정이 장차 반드시 함께 일어나서 힘써 다툴 것이니 온 나라의 인심을 수습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예견했다.

     

    노론은 세제 책봉 때처럼 저녁을 이용해 상소를 올렸는데 이번에는 소론도 무작정 당하지는 않았다. 좌참찬 전주최씨 최석항이 유문(留門:궁문 개폐를 막는 것)하며 입대를 요청한 것이다.

     

    『당의통략』은 ‘승지 전주이씨 이기익이 깊은 밤이라고 허락하지 않았으나 최석항이 강요해 임금에게 아뢰자 특명으로 접견했다’고 전한다. 전주최씨 최석항이 눈물을 흘리며 환수를 호소하자 경종은 명을 거두었다. 소론은 연일 노론 풍양조씨 조성복을 공격해 진도로 귀양 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경종은 대리청정 명을 환수한 지 사흘 뒤 시·원임대신과 2품 이상 고위 신료, 삼사를 소집해 다시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했다. 느닷없는 명령에 소론과 노론 모두 당황했다. 경종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흘간의 정청(庭請:백관이 특정 사안의 전교를 기다리는 것)에도 경종이 명을 거두지 않자 영의정 안동김씨 김창집(金昌集),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전주이씨 이이명,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양주조씨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전주이씨 이건명(李健命) 등 노론 4대신은 대리청정을 받아들이겠다는 연명 차자를 올렸다.

     

    이 소식에 놀란 소론 우의정 양주조씨 조태구가 선인문(宣人門)으로 달려가 청대를 요청했는데

     

    승지 풍산홍씨 홍석보(洪錫輔)와 승지 함안조씨 조영복 등이 소론 우의정 양주조씨 조태구는 탄핵을 받았으므로 들어갈 수 없다’면서 면담 주선을 거부했다. 세제 책봉을 비판한 문화유씨 유봉휘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는 핑계였다.

    그런데 갑자기 경종이 “소론 : 우상(右相) 양주조씨 조태구 왔다고 하니 들어와 보게 하라”고 입시를 명했다. 승지들은 할 수 없이 만남을 주선했는데 노론 영의정 안동김씨 김창집도 따라 들어가 소론 양주조씨 조태구와 함께 명의 환수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고 대리청정 명은 환수되었다.『경종실록』

     

    사관이 “이때 노론 김창집·이건명 등이 주상으로 하여금 정무를 놓게 만들려고 소론 조성복을 사주하여 상소를 올리고 상시(嘗試:속마음을 떠봄)하였다”(『경종실록』 1년 10월 10일)고 비판한 대로 노론이 경종을 쫓아내려 한다는 사실만 만천하에 공포한 셈이었다.

    경종을 쫓아내고 세제(연잉군)를 추대하려는 노론의 정치 행위에 반발이 일었다
    . 행 사직(行 司直) 박태항(朴泰恒) 등은 상소에서 그 마음의 소재는 길 가는 사람도 안다(其心所在, 路人所知)’고 조소했다.

     

    그러나 현실은 노론의 것이었다. 행 사과(行 司果) 한세량(韓世良)이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없는 법”이라면서 “남의 신하가 되어서 감히 몰래 천위(天位:왕위)를 옮길 계책을 품었다”고 공격하자 승정원과 노론 대신들이 일제히 공격했고 경종은 그를 절도로 유배 보내야 했다. 국왕을 옹위하면 귀양 가는 상황이었다.

    『당의통략』은 승지 홍석보가 “오늘 우상이 온 것을 전하께서 어떻게 아셨느냐”고 재삼 따져 물었다고 전하고 있다. 경종이 대답하지 않자 대간에서는 ‘소론 우상(右相) 양주조씨 조태구가 내시와 통해 몰래 뵙기를 청했다’면서 ‘조태구와 내시를 처벌해야 한다’고 가세했다.

     

    경종은 “내가 진수당(進修堂)에 앉아 있는데 합문(閤門) 밖에서 길 인도하는 소리를 듣고 우상이 들어오는 것을 알았을 뿐 내시는 죄가 없다”고 변명해야 했다. 경종은 여전히 노론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종 1년(1721) 12월 6일 사직 소론 :광산김씨 김일경(金一鏡)을 소두(疏頭:상소의 우두머리), 박필몽(朴弼夢)·이명의(李明誼)·이진유(李眞儒)·윤성시(尹聖時)·정해(鄭楷)·서종하(徐宗廈) 등을 소하(疏下)로 한 연명 상소가 올라왔다.

     

    강(綱)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군위신강(君爲臣綱)이 으뜸이 되고, 윤(倫)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군신유의(君臣有義)가 머리가 되는데···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이 무너짐이 오늘날과 같은 적은 없었습니다”로 시작되는 유명한 신축소였다.

    광산김씨 김일경 등은 노론 풍양조씨 조성복이 앞에서 불쑥 나왔는데도 현륙(顯戮:공개처형)하는 법을 아직 더하지 아니하였고, 사흉(四凶:노론 4대신)이 뒤에 방자했는데도 목욕(沐浴)하고 토죄(討罪)할 것을 청했다는 것을 아직 듣지 못했으니, 임금의 형세는 날로 외롭고 흉한 무리는 점점 성합니다적신(賊臣) 풍양조씨 조성복과 사흉(四凶) 등 수악(首惡)을 일체 삼척(三尺)으로 처단해 조금도 용서하지 마소서”(『경종실록』 1년 12월 6일)라고 했다.

    김창집·이이명 등 노론 4대신을 사흉(四凶), 노론을 역당(逆黨)으로 모는 초강경 상소였다.

     

    노론에서는 즉각 총 반격에 나섰고 승지 신사철·이교악 등이 ‘(소론 광산김씨 김일경 등을) 엄하게 통척(痛斥)해 간사한 싹을 끊어 없애고 형벌을 쾌히 베풀어 나라 일을 다행하게 하소서’라고 주장했다.

     

    대부분 소론 광산김씨 김일경 등이 국문 받다 죽거나 절도에 유배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경종은 ‘나의 천심(淺深)을 엿본다’고 꾸짖으며 (노론) 승지들과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 전원을 파직시켰다.

    경종은 서소위장(西所<885E>將) 심필기(沈必沂)를 가승지(假承旨)로 삼고, 훈련대장 전주이씨 이홍술(李弘述)을 ‘간흉하고 윤리가 없으며 몰래 불측한 마음을 품었다’면서 문외 출송하고 병부(兵符:군사동원패)를 빼앗아 소론 윤취상에게 주었다.

     

    전주이씨 이홍술은 포도대장이던 작년 안동김씨 김창집의 사주를 받아 술사(術士) 육현(陸玄)을 때려죽이고도 훈련대장으로 승진한 노론 무관이었다.

    병조판서에 대리청정을 극력 반대한 소론 전주최씨 최석항을 임명해 군사권을 모두 소론에게 넘긴 경종은 이조판서 안동권씨 권상유(權相游)남인 심단(沈檀)으로, 이조참판 이병상(李秉常)을 소두 광산김씨 김일경으로 삼아 인사권을 주었다. 은인자중하며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경종이 반전의 칼을 뽑은 것이었다.

     

    후속 조치는 전광석화 같았다.

    신축소의 소하(疏下) 반남박씨 박필몽 사헌부 지평(持平), 이명의를 사간원 헌납(獻納), 전주이씨 이진유(李眞儒)를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삼아 백관에 대한 탄핵권을 주었다.

    예조판서 경주이씨 이광좌, 형조판서 이조, 호조판서 김연, 대사간 양성규, 도승지 이정신 등 소론들을 대거 등용해 정국을 순식간에 뒤엎었다.

     

    이것이 소론이 일거에 정국을 장악하는 신축환국(辛丑換局)인데, 당일 사관(史官)은 이렇게 평했다.

    주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공묵(恭默)하여 말이 없고 조용히 고공(高拱:방관함)해서 신료를 인접(引接)하여 더불어 수작하지 않고 군하(群下)의 진달하고 계품하는 것을 모두 허락하니, 흉당(凶黨=노론)이 오만하고 쉽게 여겨 꺼리는 바가 전혀 없었으므로 중외에서 근심하고 한탄하며 질병이 있는가 염려하였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하룻밤 사이에 건단(乾斷:천자가 정사를 스스로 재결함)을 크게 휘둘러 군흉(群凶)을 물리쳐 내치고 사류(士類)를 올려 쓰니, 천둥이 울리고 바람이 휘몰아치며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했으므로, 군하가 비로소 주상이 숨은 덕을 도회(韜晦:재덕을 숨기어 감춤)함을 알았다.”(『경종실록』 1년 12월 6일)

    극적인 반전으로 경종의 친정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경종 시해 시나리오 ‘목호룡 고변’으로 발각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40호 | 20091115 입력

     

    최소한의 공존의 틀마저 무너뜨리면 상대방만 타격을 입는 것이 아니다. 작용이 반작용을 부르는 것은 정치도 마찬가지다. 노론이 경종 제거를 당론으로 삼아 실행에 옮긴 것은 왕조국가에서 각 당파가 공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틀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이 무리한 처사에 격렬한 반발이 일어날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수많은 비극이 양산되었다.

     

    왼쪽부터 ‘노론 4대신’인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의 초상. 노론 영수인 이들은 경종을 제거하고 연잉군을 추대하려던 노론 당론을 추진하다 목호룡 고변 사건으로 모두 사형당했다. 영조가 즉위한 후 모두 복관되는데 노론 쪽에서는 이를 신축·임인년에 발생한 선비들의 화(禍)라는 뜻으로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불렀다.
    독살설의 임금들 경종⑤ 노론 4대신

    노론에서 경종을 끌어내고 연잉군(영조)을 추대하려는 시나리오를 짜던 경종 1년(1721) 여름은 가뭄 끝에 태풍이 덮쳐 기근이 우려되던 때였다. 좌의정 전주이씨 이건명은 이를 임금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고 주장했다.

    “임금 사복(嗣服:즉위) 초에 작은 흠도 없는 정사를 펼쳤음에도 근래 드물게 큰 가뭄과 풍재(風災)가 심했고, 궁궐의 정문(正門)도 무너졌으니, 이는 인자하신 하늘의 경고하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경종실록』1년 7월 20일)

    경종이 묻힌 의릉.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1962년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일반인의 접근이 제한되고 원형이 많이 훼손됐다. 95년 안기부가 옮겨 간 뒤 다시 일반에게 공개됐다. 사진가 권태균
    정작 임금에게는 하늘의 경고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민생과는 무관한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밀어붙인 정당이 노론이었다. 왕세제 책봉은 성공했으나 대리청정 기도가 실패하고 되레 소론 광산김씨 김일경의 ‘신축소’로 정권이 소론으로 넘어가면서 정국은 폭풍전야처럼 긴장되었다.

     

    드디어 경종 2년(1722) 3월 27일 사천목씨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이 긴장을 깨면서 정국을 소용돌이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

    “성상(聖上)을 시해하려고 모의하는 역적(逆賊)들이 있는데, 혹 칼로써, 혹 독약으로, 또 폐출(廢黜:왕을 쫓아냄)을 모의한다고 하는데,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들이니 급하게 토벌해서 종사를 안정시키소서.”(『경종실록』 2년 3월 27일)

     


    이것이 삼급수(三急手) 고변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목호룡 고변 사건이다. 삼급수란 칼, 독약, 폐출의 세 가지 수단을 동원해 경종을 죽이거나 내쫓으려 했다는 뜻이다.

     

    이 중 대급수(大急手)는 숙종의 국상 때 자객을 궁중으로 보내 세자(경종)를 죽이는 것이고, 소급수(小急手)는 은(銀) 500냥을 궁중의 지상궁(池尙宮)에게 주어 경종의 어선(御膳:임금의 수라상)에  독약을 넣는 것이고, 평지수(平地手)는 숙종의 유조(遺詔)를 위조해 경종을 폐출시키는 것이었다.

     

    목호룡은 이들이 만든 교조(矯詔:위조된 숙종의 교서)에 ‘세자(世子) 모(某:경종)를 폐위시켜 덕양군(德讓君)으로 삼는다(廢世子某爲德讓君)’는 구절이 있는 것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목호룡의 말대로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내용들이었다. 더구나 목호룡은 당초 이 모의에 깊숙이 가담했던 인물이란 점에서 그 여파가 어디까지 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신(臣:목호룡)은 비록 신분은 미천하지만 왕실을 보존하려는 뜻을 가지고 흉적(=노론)이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는 모의를 직접 보고는 호랑이 입(虎口)에 먹이를 주어서 은밀히 비밀을 알아낸 후 감히 이처럼 상변(上變)하는 것입니다
    .”(『경종실록』 2년 3월 27일)

    목호룡은 남인가의 서자로서 종친 청릉군(靑陵君)의 가노였는데, 감여술(堪輿術:풍수지리)에 능해 연잉군 사친(私親)의 장지를 정해 준 대가로 속신(贖身)돼 왕실 소유의 장토(庄土)를 관리하는 궁차사(宮差使)까지 오른 것으로 알려진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당초 연잉군 쪽에 줄을 섰다가 세제 대리청정 기도가 실패하고 신축환국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고변 쪽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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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호룡 1684(숙종 10)~ 1724(영조 즉위). 고변자, 변절자 노론->소론

    조선 후기의 지관(地官).

    신임사화의 고변자(告變者)이다. 본관은 사천(泗川). 서얼 출신으로 어려서 풍수술(風水術)을 배워 지사(地師)가 되었다. 노론인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 등과 왕세제(王世弟 : 영조)를 옹호했으나, 소론에 가담하게 되었다.

     

    1722년(경종 2) (광산김씨 소론 김일경(金一鏡)의 사주를 받아) 경종을 시해하려는 역모에 자신도 가담했다고 고변했다. 이 고변으로 노론 4대신인 이이명(李f命)·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등이 사형에 처해지고, 역모에 관련된 60여 명이 처벌되는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고변의 공으로 부사공신(扶社功臣) 3등으로 동성군(東城君)에 봉해지고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뒤 노론의 상소로 신임사화가 무고로 일어났음이 밝혀지자,

     

    광산김씨 소론 김일경은 고문을 당하면서 영조를 나으리(進賜 : 임금 아닌 왕자에 대한 존칭)라 부르며 임금으로 대하지 않고 끝내 공모자가 없다고 우겨서 김일경과 목호령 만 체포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죽은 뒤 당고개(唐古介)에서 효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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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건에 가담했다고 목호룡이 고변한 인물들은

     

    전주이씨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李器之), 이사명(李師命)의 아들이자 이이명의 조카인 이희지(李喜之),

     

    안동김씨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金省行),

     

    광산김씨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손자 김민택(金民澤), 김만중의 손자이자 이이명의 사위인 김용택(金龍澤), 김춘택의 사위 이천기(李天紀) 등 노론 명가자제가 대부분이었다
    . 자제들이 하는 일을 부모들은 몰랐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긴장은 더했다.

    목호룡은 용문산에 들어가 묏자리를 구하다가 이희지를 만났고 그를 통해 이기지·김용택 등을 만났다고 진술했다.

     

    이기지·이희지 등은 전주이씨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가혹한 고문을 참으며 혐의를 부인하다 맞아죽는 길을 택한 이들도 있었고, 고문을 못 이겨 “지상궁을 통해 독약을 쓰는 것이 소급수”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죽은 광산김씨 김용택 같은 인물도 있었다.

     

    목호룡은 이들 자제뿐만 아니라 전주이씨 이이명까지 직접 끌어들였다.

     

    각자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심사(心事)를 표현하는데 김용택은 충(忠)자를, 다른 사람들은 신(信)·의(義)자 등을 썼는데

     

    백망(白望)은 양(養)자를 썼다는 것이다
    . 이천기만 그 뜻을 알고 크게 웃었는데, 이는 이이명의 자(字)인 양숙(養叔)을 뜻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이 이이명을 추대하려 했다는 것은 목호룡의 의도된 과장이겠지만 이이명은 결국 이 사건에 연루돼 사형당해야 했다.

    그가 사형당하던 경종 2년 4월 17일자 실록의 사관은 “이때에 이르러 목호룡이 상변(上變)했는데 이희지 등 여러 역적이 모두 이이명의 자질(子姪)과 문객(門客)에서 나오고, 흉모(凶謀)·역절(逆節)이 낭자하여 죄다 드러나자, 온 나라의 여정(輿情)이 모두 분완(憤<60CB>:분노와 탄식)을 품었다”고 전하고 있다.

     

    숙종 43년(1717) 정유독대 이후 그가 경종을 쫓아내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므로 그의 비극적 죽음은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같은 날 영의정 안동김씨 김창집도 사형에 처해지는데, 그는 숙종 15년(1689) 남인이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사형당한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란 점에서 대를 이은 가문의 비극이었다
    .

     

    이뿐만 아니라 이건명과 조태채도 이 사건에 연루돼 사형당하는데 이들을 ‘노론 4대신’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목호룡의 고변 또는 임인옥사인데 사형당한 이가 20여 명, 국문을 받다 장살(杖殺)된 이가 30여 명, 연루자로 교살된 이가 10여 명, 유배된 이가 100여 명을 넘었다. 집안의 몰락을 보다 못해 목숨을 끊은 부녀자도 9명이었다.

    이 비극적 사건의 뿌리는 헌정질서에 의해 즉위한 국왕을 제거하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인물을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노론 당론(黨論)에 있었다.
    보다 직접적 계기는 세제 대리청정이 무산된 데 있었다.

     

    세제 대리청정이 무산되면서 노론은 반대당파로부터 ‘남의 신하가 되어 천위(天位)를 몰래 옮길 계책을 품었다’ ‘그 마음의 소재는 길 가는 사람도 안다’는 공격을 받게 되자 당황했다. 이 난국 타개의 계책을 제시한 인물이 이천기가 ‘진정한 노론의 혈성(血誠)’이라고 불렀던 환관 장세상(張世相)이었다.

     

    임인옥사 때 사형당한 정우관(鄭宇寬)은 장세상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자백했다.

    “하루는 장세상이 저에게 말하기를, ‘이번에 청정(聽政)하는 일을 노론이 봉행(奉行)하지 않았으니 이는 하늘이 주는데도 받지 아니한 것이다. 장래에 노론은 반드시 씨도 남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한 장의 비망기(備忘記)를 도모해 얻는 즉시 궁성을 호위(扈<885E>)한다면 좋을 것이다. 이제 막 이 일을 서덕수(徐德修)에게 언급하였다.”(『경종실록』 2년 5월 15일)

    경종이 세제 청정을 명했을 때 노론 대신들이 우유부단하게 눈치를 보다 시기를 놓쳤다는 비난이었다. 그러면서 환관 장세상이 제시한 방안은 다시 경종을 압박해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명한다”는 비망기를 얻어내 그 즉시 군사를 동원해 궁성을 호위하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것이었다. 서덕수는 세제 연잉군의 처제(妻弟:영조 즉위 후 정성왕후의 사촌동생)였는데 그 역시 국문에서 “청정(廳政:대리청정)하는 일이 성사되지 않았으니, 노론은 장차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자백했다.

    또한 그는 김창집의 재종제 김창도가 “(대리청정을 허용하는 경종의) 비망기가 내려진다면 즉시 궁성을 호위하여 안팎을 엄하게 끊고, 또 상소하여 시끄럽게 다투는 근심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고도 자백해 그 역시 깊숙이 가담했음을 시인했다. 경종의 비망기가 다시 내리면 즉시 군사를 동원해 계엄 상황을 만들어 일체의 상소를 봉쇄하고 대리청정을 강행하면서 경종을 끌어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비망기를 다시 얻어내는 작업은 실패했고 도리어 김일경이 신축소를 올린 날 『경종실록』 사관의 표현대로 경종이 ‘하룻밤 사이에 건단(乾斷:천자가 정사를 스스로 재결함)을 크게 휘둘러’ 정권을 노론에서 소론으로 갈아치우자 거꾸로 목호룡의 고변이 나왔던 것이다.

    무엇보다 임인옥사가 지닌 가장 큰 폭발력은 사건 판결문인 「임인옥안(獄案)」에 세제 연잉군이 역적의 수괴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처제 서덕수가 깊숙이 관여한 사실이 드러난 데다 서덕수의 추대 제의를 연잉군이 거절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신하가 자신을 임금으로 선택했다는 ‘택군(擇君)’을 수락한 것으로서 역모 가담 혐의를 피할 방도가 없었다. 경종이 선왕의 유일한 혈육인 연잉군의 보호를 선택함으로써 겨우 무사했지만 이 사건 이후 연잉군의 처지는 궁박해졌다. 소론 집권하에서 연잉군의 앞날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경종은 소두(疏頭:상소문 우두머리) 이몽인과 소하(疏下) 심득우(沈得佑)·조형(趙瀅) 등에게 곤장을 친 후 변방으로 충군(充軍)하거나 유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경종은 모든 일에 노론의 뜻을 따랐지만 노론은 경종에 대한 증오를 거두지 않았다. 노론은 경종을 끌어내는 것만이 자당의 이익을 영구히 보존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노론은 경종을 무력화할 프로그램을 작성했다. 이 프로그램은 경종 1년(1721) 8월 20일 사간원 정언 이정소(李廷<71BD>)의 상소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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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좌(李明佐, 1681년 - 1722년)은 임인(壬寅)무옥(誣獄)에 희생된 조선 후기의 종친이며, 도정궁(都正宮) 사손(嗣孫)이었다. 노론 우6인(又六人) 중 한명이다.

     

     

    [편집] 생애

    조선후기 무옥(誣獄)에 희생된 종친으로 본관은 전주, 휘는 명좌(明佐), 자는 자우(子遇)이다.

    덕흥대원군 7대 사손(嗣孫)이었다가 임인사화(壬寅士禍, 신임사화)에 연좌되어 동생 이명회(李明會)에게 대통(大統)을 잇게 하였다.

     

    아버지는 도정궁(都正宮) 사손(嗣孫) 증 참판(參判) 이세정(李世禎)이며, 어머니는 부제학(副提學) 청송인(淸松人) 심유(沈攸)의 딸로 증 정부인 청송심씨(貞夫人 淸松沈氏)이다.

    부인은 감찰(監察) 상주인(?州人) 박대수(朴大需)의 딸이다.

    증 참판 이세정의 장남으로 신유(辛酉) 1681년(숙종 7) 2월 22일 탄생하였다.

     

     1721년(경종 1) 식년시 생원에 급제하여 진사(進士)를 지냈다.

     

    임인(壬寅) 1722년(경종 2) 노론 우6인(又六人) 중 한명으로 임인사화(壬寅士禍, 신임사화) 때 목호룡(睦虎龍)이 경종을 시해하려는 모의가 있었다는 이른바 삼급수(三急手)의 고변으로 노론 3장신(三將臣)의 한 사람이었던 종조(從祖) 충정공 이홍술(李弘述)과 연좌되어 이해 8월 4일 국청(鞫廳)에서 옥에 하옥되었다.

     

    이해 8월 17일 국청(鞫廳)에서 이로써 문목(問目)을 내었더니, 은휘하고 바른 대로 고(告)하지 않았다.

     

     김시태(金時泰)와 면질(面質)시켜 서로 쟁변(爭辨)할 즈음에 자못 의심할만한 단서가 있으므로, 드디어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였다.

     

    한 차례 형문(刑問)하자 거의 다 실토(實吐)하였지만, 아직도 은휘하고 있으므로 두 차례 형문(刑問)하니, 바른대로 공초(供招)하였다.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조송이 처음에 종조(從祖)의 의막(依幕)에 가서 은화 3백 냥을 받았고, 제가 또 조송의 생질(甥姪) 이세복(李世福)으로 하여금 종조의 집에 가서 4백 냥을 가져가게 하였으니, 전후에 낸 것이 합하여 7백 냥이 됩니다.

     

    모두 조송에게 보내어 환관 장세상(張世相)에게 쓰도록 하여 환국(換局)을 도모하게 하였습니다.

     

    제가 김시정(金時鼎)과 정우관(鄭宇寬)을 찾아가서 보고 그의 밀어(密語)를 따라 묻기를, ‘환국(換局)하는 일을 어떻게 도모하겠는가?’ 하니, 정우관이 이르기를, ‘장세상에게 들여 보낸 은화(銀貨)는 내전(內殿)에서 도모한 일이 있는데, 멀지 않아 일이 성사(成事)되면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니, 상세하게 물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김시태가 와서 말하기를, ‘시사(時事)에 좋은 기회가 있는 것이 명확하다. 오늘 저녁에 그대 집의 대감(大監)께서 마땅히 패초(牌招)받는 일이 있을 것이니, 요동(搖動)하지 말고 속에 융복(戎服)을 입고 소로(小路)를 따라 예궐(詣闕)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바야흐로 영상(領相)의 의막(依幕)에 도로 나가서 또한 이 일을 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벌써 종조(從祖)의 은화를 내어 장세상에게 전송(轉送)하고, 또 정우관(鄭宇寬)을 보고 장세상이 도모하는 일을 물었으니, 궁금(宮禁)에 교통(交通)하며 환국(換局)을 도모하는 모의에 동참(同參)한 것이 적실(的實)합니다.”하였다는 자복을 하고 이날 참형으로 원통하게 향년 42세로 별세하였다.[1]

     

    그리고 영조 을사년에 임인년의 옥안에 대해 다시 논의한 내용에는

     

    여흥민씨 민진원이 말하기를,

    “이명좌(李明佐)는 은(銀)을 내어 궁금(宮禁)과 내통했다는 것으로 승복했는데, 이것은 역모했다고 자복한 사람과는 다릅니다.”하였는데,

     

    영조가 이르기를, “그가 이 일로 승복했는가?”하자,

     

    민진원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하니,

     

    영조가 이르기를, “무고라고 하는 것은 문목 이외에 잡언(雜言)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고와는 다르다.”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적몰된 가산을 돌려주어야 하겠습니까?”하니,

     

    영조가 이르기를, “그렇게 하도록 하라.”하였다.[2]

     

    1724년(영조 1) 영조(英祖)의 명으로 신원(伸寃)이 회복되었다.

     1900년(광무 4)에 고종 명으로 5대종손(五代從孫) 이재철(李載哲)에게 봉사(奉祀)하게 하였다.

     

     

    가족관계

    • 아버지 : 증 참판(參判) 이세정(李世禎, 1661년 - 1721년)
    • 어머니 : 증 정부인 청송심씨(貞夫人 淸松沈氏, 1659년 - 1710년), 부제학(副提學) 청송인(淸松人) 심유(沈攸, 1620년 - 1688년)의 딸.
    • 부인 : 감찰(監察) 상주인(?州人) 박대수(朴大需)의 딸.
      • 봉사손(奉祀孫) : 5대종손(五代從孫) 이재철(李載哲, 1835년 - 1894년), 충정공 이홍술(李弘述)의 7대손.
    • 동생 : 이명회(李明會, 1685년 - 1727년), 도정궁(都正宮) 사손(嗣孫)
    • 동생 : 이명진(李明晋, ?년 - 1712년)
    • 동생 : 이명협(李明協, 1694년 - 1716년)
    • 동생 : 이명익(李明翼, 1702년 - 1755년), 종숙(從叔) 증 이조참의(吏曹參議) 이세희(李世禧, 1680년 - 1715년)에게 출계.
    • 여동생 : 한양인(韓陽人) 조종하(趙鍾夏)에게 출가.
    • 여동생 : 칠원인(漆原人) 윤덕순(尹德純)에게 출가.
    • 여동생 : 청주인(淸州人) 한성도(韓聖度)에게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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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에게 毒을 먹이고도 수사망 빠져나간 궁인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41호 | 20091122 입력

     

    헌정 질서를 무시하는 세력이 권력 장악에 나서면 격렬한 투쟁이 발생한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상황’에서는 권력욕을 그럴 듯하게 포장해주는 명분도 이미 사치이므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집안에서는 선현(先賢)의 가르침을 따르는 유학자들이 정치 현장에서는 시정잡배도 주저할 수단을 서슴없이 사용했다.

     

    유교 정치체제는 이렇게 붕괴의 길을 걸었다.

    경종의 초상 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출생 당시부터 서인(노론)의 격렬한 반감을 사다가 36세에 급서해 독살당했다는 설이 무성했다.

     

    초상화에 먹물이 스며든 것은 독살설을 암시한다. 경종의 초상은 전해지는 게 없어 이복동생인 영조의 초상화와 장희빈의 외모에 관한 각종 기록을 참조해 그린 것이다. 우승우(한국화가)

    독살설의 임금들 경종⑥ 세 가지 의혹

    목호룡 고변 사건’ 수사 과정에서 독약으로 독살하려는 소급수(小急手)가 실제 시도되었다는 자백이 나와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안동김씨 김창집의 친족 김성절(金盛節)이 세 차례의 형문(刑問:고문하며 묻는 것) 끝에, “장씨(張姓) 역관(譯官)이 (중국에서) 독약을 사가지고 왔는데, 김씨 성의 궁인(宮人)이 성궁(聖躬:임금)에게 시험해 썼습니다…(『경종실록』 2년 8월 26일)”라고 자백한 것이다.

     

    이때도 역시 환관 장세상이 등장한다. 김성절은 “장세상이 수라간(水刺間)의 차지(次知: 담당자) 김 상궁(金尙宮)과 동모(同謀)했는데, 김 상궁이 많은 은화를 요구하고는 한 차례 성궁(聖躬)에게 시험해 썼으나 곧바로 토해 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성절은 “이기지(이이명의 아들)의 무리가 ‘약(藥)이 맹독이 아니니, 마땅히 다시 은화를 모아 다른 약을 사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경종실록』 2년 8월 26일)”라고 덧붙였다.

     

    중국에서 독약을 사다가 시험해 보았으나 경종이 죽지 않자 더 강한 약을 사오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경종이 독약을 마셨다는 날짜를 『약방일기(藥房日記)』에서 찾아 보니 경종 즉위년(1720) 12월 15일 ‘어제 거의 한 되나 되는 황수(黃水)를 토했다’는 구절이 있었다.

     

    노론 영의정 양주조씨 조태구와 함께 입시한 약방제조(提調) 한배하(韓配夏)가 “그날 수라를 진어(進御)하신 뒤에 즉시 구토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경종은 “그렇다”라고 답했다. 그날의 구토가 독약이 든 음식이 든 결과였음이 확인된 셈이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을 독살하려 한 노론의 정치행위는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당시 노론 당인(黨人)들은 국왕보다 노론이 위에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안동김씨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은 우홍채(禹洪采)에게 “노론은 천지와 더불어 무궁한 길이 있다(老論有與天地無窮之道)”라고 말했는데 국왕은 유한해도 노론은 영원하다는 이런 자신감이 비정상적 거사를 실행에 옮기게 한 원동력인지도 몰랐다.

    이상한 것은 경종의 태도였다. 당초 국청(鞫廳)에서 독약을 올렸다는 김성(金姓:김씨 성) 나인의 조사를 요청하자 당연히 허용했다가 돌연 “김성 궁인을 조사했으나 그런 인물이 없었다”면서 수사를 중지시킨 것이다.

     

    국청에서 계속 사사를 요청하자 “나인을 조사해 밝히는 것(査出)은 원래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노론(老論)을 타도하는 계책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더욱 근거가 없으니 앞으로 이런 문자는 써서 들이지 말라(『경종실록』 2년 8월 18일)”고 거부했다. 독살 기도 사건이 노론 타도 계책으로 확대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경종실록』의 사관은 “인정(人情)이 독약을 쓴 궁녀를 찾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겼는데, 뜻밖의 비답이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의혹해 했으나 그 단서를 알지 못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숙종 43년(정유년) 북경에 갔다 온 역관 중에 장씨 성의 역관이 없자 국청에서 김성절을 다시 추궁했는데 그는 진짜 범인(元犯人)은 ‘역관 홍순택(洪舜澤)’이라고 지목했다. 지난해 이이명의 집에 갔을 때 이희지와 역관 홍순택이 뒷방에서 나누는 밀어(密語)를 들었다는 것이다.

    홍순택이 이희지에게 ‘약값이 부족해서 내가 자비(自費)로 많이 보탰다고 말하자, 이희지가 ‘일이 성사되면 그대가 자비로 낸 돈을 어찌 보상하지 않겠는가?’라고 답했습니다. 제가 창문을 열고 들어가 앉으니 이희지는 즉시 말을 중지했는데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습니다.(『경종실록』 2년 8월 26일)”

    안동김씨 김창집의 서종형제(庶從兄弟) 김창도(金昌道)의 사돈 이정식(李正植)도 “김창도가 약을 쓸 곳을 말했는데 곧 상궁(上躬:임금)을 가리켰습니다”라고 자백했고, 김창도는 “홍성(洪姓) 역관에게 약을 사서 장세상에게 들여보냈다”고 시인했다. 또한 왕세제의 처사촌 서덕수가 모두 이 흉모에 동참했다고 자백했다.

     

    역관 홍순택은 부인했으나 그가 북경에 갈 때 데려갔던 종 업봉(業奉)은 ‘북경에서 계란만 한 황흑색(黃黑色)의 환약(丸藥) 두 덩이를 구입했다’고 자백했다.

     

    이처럼 구체적 정황이 드러났음에도 경종은 김성(金姓) 나인에 대한 수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삼사(三司)에서 해를 거듭 넘기면서까지 계속 요구했으나 경종은 거부했다.

    그러던 경종 4년(1724) 4월 인원왕후 경주김씨가 이 사건을 거론하고 나섰다. 숙명공주(淑明公主)의 아들 심정보(沈廷輔)의 아내 이씨에게, “김성 궁인이 진실로 의심스럽다면 주상께서 어찌 불허하겠는가? 나 역시 어찌 분명히 조사하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궁중에 실지로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찾지 못하는 것이다(『경종실록』 4년 4월 24일)”라고 말했다.

     

    이는 경종의 수사 중지 지시가 대비의 압력 때문일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삼사는 계속 수사를 요청하고 경종은 거부하는 사이 경종은 약방(藥房:내의원)의 입진(入診)을 받게 되었다.

     

    경종 4년 8월 초부터 한열(寒熱)에 시달렸고, 설사 기운이 동반되었다. 한열 때문에 수라를 거의 들지 못하는 가운데 시령탕(柴<82D3>湯), 육군자탕(六君子湯) 등 여러 처방이 올려졌으나 환후가 허하고 피로가 중첩되었다.

    그러던 8월 20일 문제의 사건이 발생한다. 그날 밤 경종은 가슴과 배가 조이는 듯 아파서 의관을 불러 입진했다.

     

    그런데 그날 밤의 흉통(胸痛)과 복통(腹痛)이 그날 낮에 있었던 의문의 사건 때문임이 드러났다.

    여러 의원들이 어제 게장(蟹醬)을 진어하고 곧이어 생감(生<67FF>)을 진어한 것은 의가(醫家)에서 매우 꺼리는 것이라 하여 두시탕(豆<8C49>湯) 및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진어하도록 청했다.(『경종실록』 4년 8월 21일)”

    의가에서 금기로 치는 게장과 생감을 와병 중인 임금에게 진어했다는 것이다.

     

    훗날 영조 31년(1755)의 나주벽서 사건 때 신치운(申致雲)이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경종 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라고 따지자 영조가 분통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게장과 생감을 보낸 인물이 대비 인원왕후이고 이를 진어한 인물이 세제(영조)라는 주장이었다.

     

    경종이 게장 덕분에 평소보다 많은 식사를 했는데 다시 생감을 올리려고 하자 어의들이 서로 상극이라며 반대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올렸다는 것이다. 바로 그날 밤부터 경종의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어의들은 게장과 생감이 원인이라며 두시탕(豆<8C49>湯)과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처방했으나 복통과 설사는 더욱 심해졌고 22일에는 황금탕(黃芩湯)을 올렸으나 역시 효과가 없었다.

     

    24일에도 세제(영조)는 처방을 두고 어의 이공윤(李公胤)과 다투었다.

     

    『경종실록』은 이공윤에 대해 “그의 의술은 대체로 준리(峻利:강한 처방)를 위주로 삼았다”고 전하고 있다.

     

     8월 24일 세제가 “인삼(人蔘)과 부자(附子)를 급히 쓰라”고 명하자 이공윤이 “내가 진어한 약을 복용하신 후 삼다(蔘茶)를 진어하면 기를 운행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라고 반대했다. ‘기를 운행하지 못한다’는 말은 죽는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세제가 이공윤을 꾸짖었다.
    “사람이 본래 자기 견해를 세울 곳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이 어떤 때인데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려고 삼제(參劑)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말인가.(『경종실록』 4년 8월 24일)”

    어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제는 인삼과 부자를 올렸고 경종은 눈동자가 조금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지는 등 증상이 개선되는 듯하다가 다시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그날 새벽 3시쯤 창경궁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하고 말았다. 재위 4년2개월, 만 36세의 한창 나이였다.

     

    대비가 옹호한 김성 궁인의 독약 사건, 대비전에서 올렸다는 게장과 생감, 어의와 다투어가며 올린 인삼과 부자, 이 세 사건은 모두 경종의 죽음과 일련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

     

    대비와 연잉군(영조)이 경종을 살리기 위해 게장·생감·인삼·부자를 올렸는지, 아니면 죽이려고 올렸는지는 그들만이 알겠지만 어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어한 것은 의혹을 살 수밖에 없었다.

     

    경종이 사망한 후 약방도제조 이광좌는 “신이 어리석고 혼미하며 증세와 환후에 어두워서 약물을 쓰는 데 합당함을 잃은 것이 많았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울며 자책했다.

    그러나 세제(영조)의 태도는 달랐다.

    “병환을 시중드는데 무상(無狀)하여 이 지경에 달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기도는 비록 때가 지났으나 속히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국왕이 위독하면 산천에 기도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때까지 기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위독한 상태가 아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갑자기 증세가 악화되어 산천에 기도할 틈도 없이 사망한 것이었다.

    이렇게 경종의 시대가 끝나고 영조의 시대가 열렸지만 경종 시대의 유산이 계속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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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1대 영조 가계도 

    숙종 - 숙빈 최씨 해주최씨 최효원의 딸

    제 21대 영조

    차남 : 연잉군(1694-1776)

    재위기간 : 1724.8-1776.3(51년 7개월)

    부인 : 6명 / 자녀 : 2남 7녀

    1부인

    정성왕후

    달성서씨

    (서종제)

    자식없음

    2부인

    정순왕후

    경주김씨

    (김한구)

    자식없음

    3부인

    정빈 이씨

    (이준철)

    1남1녀

    4부인

    영빈

    전의이씨

    (이유번)

    1남3녀

    5부인

    귀인 조씨

    1녀

    6부인

    숙의문씨(폐)

    2녀

     

     

     

     

    진종

    (효장세자

    화순옹주

    장조

    (사도세자)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화유옹주

     

    화령옹주

    화길옹주

    난 경종의 충신’  소론 광산김씨 김일경은 뻣뻣했다

    절반의 성공 영조① 소론 강경파 숙청

    이덕일 | 제142호 | 20091129 입력

     

    격렬한 투쟁 끝에 정권을 장악하면 반대 당파의 재기를 막기 위한 정치 보복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정치 보복은 권력 강화가 아니라 권력 약화의 길이었다. 진정한 권력 강화는 반대 당파의 탄압이 아니라 반대 당파를 인정하면서 이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타협과 화해를 통해 권력 강화의 길을 선택한 정치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연잉군의 세제 시절 초상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로 세제가 되고 왕위에 올랐지만 소론 강경파는 경종 독살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사진가 권태균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재위 4년(1724) 8월 25일 창경궁 환취정(環翠亭)에서 세상을 떠났다.

     

    닷새 후인 8월 30일 장희빈의 연적(戀敵)이자 정적(政敵)이었던 숙빈 해주최씨의 아들 연잉군이 인정문(仁政門)에서 삼십 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 앞길이 순탄할 수는 없었다. '영조실록'에 “성상께서 대위(大位: 왕위)에 광림(光臨)하시자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떼를 지어 저주하고 과장하며 그릇된 이야기를 선동해서 사방을 미혹하게 했다(1년 1월 17일)”고 전하는 것처럼 ‘경종 독살설’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의 과제는 경종 독살설을 믿는 소론 강경파(埈少)와 남인들, 그리고 백성들의 의구심을 불식시키는 것이었다
    . 이는 반대 당파와의 대타협에 의한 화해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대타협을 할 생각이 없었고, 노론도 마찬가지였다. 영조 즉위년 11월 6일 유학(幼學) 이의연(李義淵)“신축년(경종 1년) 이후의 일은 모두 선대왕(先大王: 경종)의 뜻이 아니었다”면서 “교목세가(喬木世家: 명가)를 주륙한 무리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상소했다.

     

    경종 1년(1721) 김일경의 신축소로 소론이 정권을 잡은 신축환국 이후의 일들은 모두 소론 강경파가 주도했다는 주장이었다.

     

    소론 계열의 사헌부·사간원이 이의연의 국문을 요청했으나 영조는 거부했다.

     

     


    ▲ 이광좌 간찰 영조가 즉위하자 이광좌 같은 소론 온건파는 김일경을 비롯한 소론 강경파와 선을 긋는 것으로 영조와 공존을 꾀했다.
    그러자 소론 영의정 경주이씨 이광좌(李光佐)와 좌의정 문화유씨 유봉휘(柳鳳輝)가 이의연의 처벌을 주장하며 사퇴하고, 우의정 양주조씨 조태억(趙泰億)이 청대해 “이의연의 상소는 선왕을 무욕(誣辱)한 것”이라고 주장해 영조도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이의연은 당(黨)을 위해 죽기로 달게 마음을 먹은 무리”라면서 절도(絶島) 유배를 명했다. 그러나 영조의 속마음은 이의연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11월 9일에는 동학 훈도(東學訓導) 이봉명(李鳳鳴)소론 강경파의 영수 광산김씨 김일경을 역적이라고 공격했다.

     

    영조는 “지금 이후로는 당론(黨論)과 관계되는 것들은 응지상소(應旨上疏: 임금의 구언에 응하는 상소)라도 봉입하지 말라”고 이봉명을 꾸짖었다. 그러면서 김일경도 삭출(削黜)시켰다. 영조의 속뜻이 다시 드러난 셈이었다.

    소론은 강경파(埈少)와 온건파(緩少)로 갈라졌다
    . 영조와 공존을 추구했던 소론 온건파(緩少)는광산김씨 김일경 같은 소론 강경파(埈少)와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했다.

     

    영조실록“영의정 경주이씨 이광좌가 청대하여 강영파 광산김씨 김일경과 서로 친밀하지 않았던 일을 스스로 진달했다(즉위년 11월 19일)”는 기록은 강경파를 희생양 삼아 살아남으려는 온건파의 전략을 말해준다. 김일경으로 대표되는 소론 강경파는 같은 당내에서도 고립되었으나 공세의 칼날에 굴하는 대신 죽음을 각오했다.

    소령원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가 묻혀 있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이 묘는 지관 목호룡이 잡아주었다.

    그러나 목호룡은 영조 즉위 후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했다. 사진가 권태균

    김일경의 삭출에 소론 강경파가 반발하자 영조는 “김일경을 옹호하면 역적을 비호하는 율(律)을 베풀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영조는 김일경을 경종의 충신으로 대접함으로써 소론 강경파와 화합을 추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영조는 즉위년 11월 11일 김일경을 절도에 안치시켰다가 12월 4일 서울로 끌고 와 국문장에 세웠다. 이미 만 62세의 노인이었다.

    그러나 김일경을 죽일 죄를 찾을 수 없었다. 노론 4대신이 경종을 제거하려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또 목호룡의 고변, 즉 삼급수(三急手)를 통해 노론에서 경종을 제거하려 했던 사실도 수많은 연루자의 자백에 의해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할 수 없이 영조는 김일경이 목호룡 고변사건을 태묘(太廟: 종묘)에 고할 때 홍문관 제학의 자격으로 작성한 반교문(頒赦文)과 상소문의 구절들을 문제 삼았다.

    예를 들면 “노(魯)나라의 종무(鍾巫)처럼 야밤에 칼을 품기도 하고, 한(漢)나라의 양기(梁冀)·염현(閻顯)처럼 음식에다 독을 타기도 하며, 진(秦)나라 때의 이사(李斯)·조고(趙高)처럼 국상(國喪)을 이용해 교제(矯制: 거짓 조서)를 만들기도 했다('경종수정실록' 4년 4월 24일)”는 김일경의 글이 영조를 공격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는 삼급수,즉 칼로 경종을 죽이려던 대급수,독살하려던 소급수,선왕의 유서를 위조해 폐출하려던 평지수의 사례를 중국 역사에서 찾아 인용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광산김씨 김일경은 국청에 끌려 나왔을 때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국청에서 그는 “지금은 이 목숨이 끝날 때이니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탓하겠는가? 만 번 주륙을 당한다 해도 교묘한 말로 피하고 싶지 않다”며 “(내가) 평생 지킨 바는 오직 충(忠)과 직(直)”이라고 말했다. 영조는 김일경에게 ‘과거의 잘못을 시인한다’는 대답을 듣고 난 다음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영조를 ‘선왕을 독살한 범인’으로 보고 멸족까지 각오한 그가 잘못을 시인할 리 만무했다. 영조가 ‘부도(不道)’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요구하자 “성품이 원래 충직(忠直)하여 부도한 일은 알지 못한다”라고 부인한 김일경은 “선대왕(先大王: 경종)의 빈전(殯殿:시신)이 여기에 있으니, 여기서 죽는다면 마음에 달갑겠다”라고 맞섰다. 경종의 충신으로 죽겠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김일경은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까지 말했는데 영조는 “‘시원하게 죽이라’고 한 뜻 또한 지극히 흉패(凶悖)하다. 저를 죽인들 내 마음에 무슨 시원할 것이 있겠느냐?”라고 분개했다.'영조실록'은 “김일경은 공초(供招)를 바칠 때 말마다 반드시 선왕의 충신이라 하고 반드시 ‘나[吾]’라고 했으며 ‘저[矣身]’라고 하지 않았다. 죄인은 마땅히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도 이에 감히 고개를 쳐들어서 머리를 덮어씌우라고 명했다(즉위년 12월 8일)”고 전하고 있다.

     

    목호룡도 마찬가지였다.

    목호룡은 영조에게 “회맹단(會盟壇)의 삽혈이 마르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이에 영조는 “그 말이 흉참(凶慘)하다”라고 비난했다. 목호룡은 경종 3년 역적들을 토벌한 공으로 부사공신(扶社功臣) 동성군(東城君)으로 책봉 받았는데, 공신들의 회맹 때 나누어 마신 피가 식기도 전에 역적으로 몰릴 줄 어찌 알았겠느냐는 뜻이었다.

    목호룡은 호된 고문을 견디면서, “고한 자는 죽는 법이니, 장차 고한 자로서 죽겠지만, 흉심(凶心)은 없었다”고 말하고 “다만 종사(宗社)를 위했던 죄가 있을 뿐이고 다른 죄는 없다”라고 당당하게 외쳤다.

     

    영조는 “(목호룡의) 종사를 위했던 죄라는 말은 내가 역적을 돌보아 비호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군부(君父)에게 이런 말을 하니, 지극히 흉악하고 교활하다. 이것이 족히 단안(斷案)이 될 만하다(즉위년 12월 8일)”라고 말했다. 군부 불경죄로 사형시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김일경과 목호룡이 보기에 역적은 자신들이 아니라 영조와 노론이었다. 차이는 누가 현실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느냐 하는 점뿐이었다. 숙빈 최씨의 묏자리를 잡아준 것으로 출세의 기회를 잡았던 목호룡은 그 아들이 왕이 된 그해 12월 10일 역적으로 몰려 죽고 말았다. 김일경은 영조 1년 1월 2일 사형당했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영조 1년(1725) 1월 16일 군사(軍士) 이천해(李天海)가 출궁한 영조의 어가에 저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천해를 국문했으나 영조는 “차마 들을 수 없는 음참한 말이어서 입에 담을 수 없으니 좌우의 사관은 쓰지 말라”고 명했다. 사관 역시 “그 말이 극히 음참하기 때문에 초책(草冊: 실록의 초고)에 쓸 수 없습니다('영조실록' 1년 1월 17일)”라고 답할 정도로 충격적인 말이었다.

     

    28세의 청년 이천해는 24번의 압슬형을 받았으나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영조실록'의 사관은 영조 즉위 후 여러 말들이 난무하다가 “이천해의 흉언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라면서 “그 흉언은 대개 무신년(영조 4년) 역적의 격문(檄文: 이인좌 난의 격문)과 같다고 한다”고 전했다. 영조와 노론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말이란 뜻이다.

    김일경·목호룡·이천해 등을 죽인 영조는 재위 1년(1725) 목호룡 고변사건(임인옥사)를 ‘무고’라고 선언하고 노론 피화자(被禍者)를 신원하는 을사처분(1725)을 단행했다
    . 목호룡 고변사건은 신(新)정권에 의해 없었던 일이 되었다.

     

    기세를 탄 노론은 문화유씨 유봉휘·경주이씨 이광좌·양주조씨 조태구·조태억·전주최씨 최석항 등의 소론 대신들을 ‘오적(五賊)’으로 규정해 공격했다.

    소론 온건파까지 적으로 돌리면 내전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우려한 영조는 재위 3년(1727) 여흥민씨 민진원·남양홍씨 홍치중 등의 노론 대신들을 축출하고 경주이씨 이광좌·양주조씨 조태억 등에게 정권을 주는 정미환국(丁未換局)을 단행했다
    .

     

    재집권한 소론은 임인옥사(목호룡의 고변)를 다시 역옥(逆獄)으로 환원시키고 노론 4대신을 역적 명부인 역안(逆案)에 다시 기재했다.

     

    소론 온건파에 정권을 넘긴 영조의 조치는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이 군사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봉기한 峻少, 하지만 영조 곁엔 緩少가 있었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43호 | 20091206 입력

     

    사회 불안요소 해소의 최선의 방법은 불안요소를 정책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6·25 때 농민들의 동조 봉기가 거의 없었던 것은 발발 직전 단행됐던 토지 개혁 덕분이었다. 영조도 재위 3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 온건파에 정권을 넘기는 것으로 소론의 불만을 수용했기에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봉기를 진압할 수 있었다. 지금도 되돌아봐야 할 역사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무신(戊申) 봉기 영수’ 이인좌 세종 대왕의 4남 임영(臨瀛) 대군의 후손으로 집안 대대로 전형적인 남인 명가 출신이었다. 우승우(한국화가)
    절반의 성공 영조② 남인 광주(廣州)이씨 이인좌의 난

    영조 4년(1728) 3월 15일 밤. 거대한 함성과 함께 청주 병영(兵營)에 돌입하는 무리가 있었다. 병영 문은 굳게 잠겨 있어야 했지만 이날 밤은 달랐다. 병영의 기생 월례(月禮)와 절도사 이봉상(李鳳祥)이 신임하던 비장(裨將) 양덕부(梁德溥)가 내통했던 것이다. 이인좌의 난, 또는 무신난(戊申亂)으로 불리는 소론강경파와 일부 남인의 연합 거병의 시작이었다.

    권서봉(權瑞鳳)은 경기도 양성(陽城)에서 미리 무리를 모아 청주성 경내로 들어온 뒤 행상(行喪:주검을 산소로 나르는 일)을 핑계로 상여에 병기를 실어 성 앞 숲 속에 몰래 숨겨 놓았다. 청주 인근 여러 고을에 건장한 사람들이 몰려들자 이상하다는 말이 유포됐고, 충청병사 이봉상에게 보고했지만 무시됐다. 결국 절도사 이봉상과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 등은 항복을 거부하고 전사했는데 『영조실록』은 “성 안의 장리(將吏)로서 적에게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고 전하고 있다.

     

    영조의 즉위와 노론의 집권은 경종 독살설을 사실로 믿는 세력들과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목호룡의 고변으로 노론에서 실제로 독약을 사용하는 소급수(小急手)를 실험했던 것이 확인된 상황에서 영조가 즉위 직후 소론 광산김씨 김일경과 목호룡을 죽이자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은 일찌감치 거병을 준비했다
    .

     

    여기에 경종의 전비(前妃:전 왕비)인 단의 왕후 청송심씨의 동생 심유현(沈維賢)의 목격담이 더해졌다.(경종의 급서 후 그녀의 동생 심유현은 경종이 노론 환관들에 의해 유폐당한 뒤 독살되었다고 주장하며 이인좌의 난에 동참하였고 그로 인해 그녀의 친정가문이 몰락하였다.)

     

    심유현은 경종 사망 당일 특별히 명소(命召)를 받고 유문(留門:궁궐 문을 임시로 닫지 않는 것) 입시했는데 그가 이유익(李有翼)에게 말한 목격담이 전파됐다. 심유현은 “그때 유문하면서 급히 부르기에 환취정(環翠亭)에 들어가 우러러 (경종을) 뵈었더니 옥색(玉色:임금의 안색)이 평상시와 같으셨다. 그런데 대신이 고복(皐復)을 청하기에 비로소 승하하신 것을 알았다(『영조실록』 4년 3월 29일)”고 말했다. 자신이 봤을 때만 해도 이상이 없던 경종이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느닷없이 대신이 고복, 즉 죽은 사람의 저고리를 들고 지붕에 올라 북쪽을 향해 혼(魂)을 다시 부르는 초혼(招魂)을 했다는 것이다.

     

    소급수를 사용한 김성(金姓) 궁인(宮人)에 대한 조사 요청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사실 김성 궁인은 인현 왕후 여흥민씨가 희빈 인동장씨를 견제하기 위해 끌어들였던 숙종의 후궁이자 영의정 안동김씨 김수흥(金壽興)의 딸 귀인(貴人) 김씨를 지목하는 것이었다.

    사건 수사 기록인 『무신역옥추안(戊申逆獄推案)』에 따르면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과 이유익은 경종의 사인(死因)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가 소론 광산김씨 김일경이 사형당한 직후인 ‘을사년(乙巳年:영조 1년) 봄부터 가산(家産)을 털어 삼남(三南)을 돌며 ‘팔도의 저명한 인사(八道知名之士)’ 규합에 나섰다. 동조자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과거 노론에 의한 피화자(被禍者) 후손을 중심으로 소론과 남인의 강경파 인사를 찾으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로 영남 세력이 많았지만 거사에 동조했던 평안병사 이사성(李思晟)이 “호남·영남에 적도(賊徒)가 번성하다”고 말한 것처럼 호남도 동조자가 적지 않았다. 구체적으로는 태인현감 박필현과 담양부사 심유현, 무장(茂長)에 유배 중이던 반남박씨 박필몽(朴弼夢) 등이 호남에서 거병을 준비했다.

     

    이들은 소현 세자의 증손 밀풍군 탄(坦)을 추대했는데 이는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삼종의 혈맥’이 (->경종 독살) 연잉군(영조)의 역모 가담으로 끊긴 것으로 보고 새 왕통은 소현 세자의 혈통에서 나와야 한다는 정통론이었다.

    이인좌는 현재 『민족문화백과사전』 등에 광주(廣州) 이씨로 나오지만 (세종의 4남 임영(臨瀛) 대군의 후손으로) 조부는 숙종 때 감사를 역임한 이운징(李雲徵)이고 조모는 남인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의 딸이고, 부인 윤자정(尹紫貞)은 윤휴(尹<9474>)의 손녀로서 전형적인 남인 가문이었다.

     

    지방에서 이인좌가 거병하면 서울과 경기도에서 즉각 동조 봉기를 해 도성을 점령하려는 계획이었다. 영조 1년 1월 의릉(懿陵:경종의 능)에 참배하러 가는 영조의 어가를 가로막고 ‘독살’ 운운한 이천해의 행위도 박필현과 이유익이 시킨 것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이들은 경종 독살설을 퍼뜨리는 한편 무장 거병을 준비했다.

     

    특히 평안병사 이사성의 가담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무신역옥추안』에 따르면 이사성은 “많은 군병을 얻을 필요는 없다. 만약 적(賊)이 발생했다는 소문이 있으면 국가는 반드시 나를 장수로 삼아 격퇴하게 할 것이니 이때를 틈타면 어렵지 않게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인좌는 권서봉에게 ‘영남에서 올린 상소문의 소유(疏儒:상소에 이름을 올린 유생)가 만여 인이니 각자 가정(家丁)을 끌고 나오면 12만 명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등 병력 동원에 자신 있었다
    .

     

    더구나 이들이 끌어모은 무리 중에는 녹림(綠林)까지 있었다. 거듭되는 자연재해와 잇따른 실정으로 고향에서 쫓겨나 유리하던 농민들이 집단 도적이 된 무리가 녹림이었다. 녹림을 끌어들인 인물은 하동정씨 정인지의 후손으로 알려진 업유(業儒) 정세윤(鄭世胤)이었다.

     

    용인의 사대부 안엽(安<7180>)은 이사성에게 “정세윤은 녹림 도적(綠林盜) 100여 명과 인연이 있는데 만약 은자(銀子) 수백 냥만 있으면 300~400명은 모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600~700여 명의 녹림을 모을 수 있었는데 주로 삼남에서 활동하는 무리였다. 이는 농촌에서 유리된 세력들이 중앙 정권 다툼에도 개입할 정도로 강한 세력을 형성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서 주목된다.

     

    봉기 준비가 전국으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찬물을 끼얹는 사태가 발생했다. 영조가 재위 3년(1727) 정권을 노론에서 소론 온건파로 바꾸는 정미환국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사건 관련자 임환(任還)의 공초는 정미환국에 대한 이들의 반응을 잘 말해 준다.

    정미년 7월 초하루 환국이 있었는데 8~9월 사이에 박필현·이세홍 등이 이유익의 집에서 만나 크게 놀라며 ‘일이 이뤄지지 않는구나. 노론이 그대로 있다면 일은 용이하겠지만 지금 소론이 천만의외로 다시 들어가게 됐으니 들어간 자가 비록 완소(緩少:소론 온건파)라 하더라도 준소(峻少:소론 강경파)도 희망이 있다고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무신역옥추안』)”

    정미환국은 노론이 소론 온건파까지 공격하는 것에 위협을 느낀 영조가 “사적 복수를 앞세우고 국사를 뒤로 미룬다(先私<8B8E>後國事)”고 비판하면서 취했던 조치로서 소론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조로서는 절묘한 시기에 절묘한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이사성의 “남인은 거론하지 않겠지만 완소는 마땅히 모두 장살(杖殺)할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소론 강경파는 온건파에 분노했다. 그러나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은 봉기를 멈출 수 없었다. 멈추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고, 아는 자도 너무 많았다. 당초 계획보다 규모가 축소됐지만 이인좌가 청주성을 점령하자 각지에서 동조 거사가 잇따랐다. 영남에서는 정희량(鄭希亮), 호남에서는 박필현 등이 앞장섰다. 이들은 진중(陣中)에 경종의 위패(位牌)를 모셔 놓고 조석으로 곡을 하면서 선왕의 복수를 다짐했다. 각지에 관문(關文)과 격문(檄文)을 뿌렸는데 영조는 이를 모두 불태우게 하고 이를 지니거나 전하는 자는 목을 베라고 명했다.

    영조는 ‘경종 독살설’이 담긴 관문과 격문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영조는 총융사 김중기(金重器)에게 출전을 명했으나 반군을 두려워해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노론은 위축됐다. 이때 진압을 자처하고 나선 인물이 소론 온건파 해주오씨 오명항(吳命恒)이었다.

     

    안성에서 패전한 이인좌는 죽산의 산사로 도주했다가 승려들에 의해 붙잡히면서 결국 소론 강경파(峻少)가 일으킨 이인좌의 봉기는 소론 온건파(緩少)에 의해 진압됐다. 정미환국이 없었다면 소론 전체와 남인이 가담하는 전국적인 내란으로 확대됐을 것이고 승패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인좌의 봉기는 노론, 소론·남인의 잘잘못을 떠나 조선 정당정치의 구조적 한계를 표출한 사건이었다.

     

    당쟁의 폐해를 절감한 영조는 노론에서 이를 계기로 소론 온건파를 다시 공격하자 “지금 역변이 당론(黨論)에서 일어났으니 이때에 당론을 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리겠다”며 탕평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노론이 장악한 언관(言官)들은 계속 소론 온건파까지 공격했다. 심지어 분무(奮武) 일등 공신 소론온건파 해주오씨 오명항까지 과거 소론 강경파 광산김씨 김일경과 신축소를 올렸던 이진유(李眞儒)의 유배지를 내륙으로 옮기자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공격당했다. 『당의통략』은 노론 언관들이 심하게 탄핵하자 오명항이 근심과 걱정으로 죽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때가 영조 4년 9월이었으니 불과 6개월 전의 대사에서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사를 지우고 싶은 영조, 탕평을 제안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44호 | 20091213 입력

     

    현재의 권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현재 행위의 결과물인 미래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현재의 권력으로 과거까지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현재의 권력으로 과거를 바꾸려는 시도는 무수히 많았고,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다.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神)의 영역이자 역사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영조의 왕세제 책봉 죽책문 영조는 노론의 지지를 받아 왕세제에 책봉되고, 노론은 대리청정까지 주장했으나 이는 훗날 영조에게 두고두고 시빗거리가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절반의 성공 영조③ 신유대훈

    소론 강경파(峻少)와 남인 일부가 이인좌를 중심으로 군사봉기까지 일으키자 영조는 큰 충격을 받았다. 소론 온건파(緩少)가 나서서 진압한 것이 영조에게는 큰 다행이었다. 그러나 노론은 ‘소론에서 역적이 나왔다’면서 이인좌의 난을 소론 전체를 공격하는 계기로 삼았다.

     

    자칫하면 노론만의 임금이 될 처지에 놓인 영조는 소론과 노론을 모두 비난했다.
    소론의 광산김씨 김일경 무리에게 효경(梟<734D>)의 성질이 있었다면 노론에는 경주정씨 정인중 무리들이 효경의 성질이 있었으니, 피차에 어찌 역적이 없는 당이 있었는가?(『영조실록』·『승정원일기』 4년 9월 24일)”

    조문명 초상 조문명은 소론 탕평파로서 그의 딸은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부인이 되었으나 효장세자가 요절하면서 왕비가 되지 못했다.

    ② 영조의 탕평비 성균관대 안에 세워졌다.

     ‘두루 화친하되 편당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공심이고, 편당하며 두루 화친하지 못하는 것이 소인의 사의이다(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라는 『예기』의 구절을 새겨놓았다. 사진가 권태균

    효(梟)는 어미를 잡아먹는 새이고 경(<734D>)은 아비를 잡아먹는 짐승으로서 불효자나 역적을 칭할 때 주로 사용한다. 영조를 압박한 소론의 김일경이나 경종을 시해하려 한 노론의 정인중이나 모두 역적이란 뜻이었다. 경종의 충신이 영조의 역적이 되고, 영조의 충신이 경종의 역적이 되는 모순된 현실이었다. 이 모순된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은 양자를 다 아우르는 탕평책(蕩平策)밖에 없다고 영조는 생각했다.

     

    탕평이란 『서경(書經)』 ‘황극(皇極)조’에 “편이 없고 당이 없이 왕도는 탕탕하며, 당이 없고 편이 없이 왕도는 평평하다(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란 구절에서 나온 말로서 왕도는 공평무사하다는 뜻이다. 서인이 노·소론으로 갈려 싸우던 숙종 20년경 소론의 박세채(朴世采)가 처음 주장했으나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영조가 사실상 노론의 추대로 즉위한 사실을 아는 소론 온건파로서는 자신들도 등용하겠다는 탕평책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 반면 우참찬 경주김씨 김흥경(金興慶)·좌의정 청풍김씨 김재로(金在魯)·호조판서 기계유씨 유척기(兪拓基) 등 노론 대신들은 이에 반발해 사퇴했다.

    그런 과정에서 각 노·소론의 현실적인 정치가들이 탕평파를 구성하는데 노론에서는 남양홍씨 홍치중(洪致中) 등이, 소론에서는 풍양조씨 조문명(趙文命)·조현명(趙顯命) 형제 등이 대표적인 탕평파였다. 홍치중은 이 때문에 노론으로부터 기회주의자라는 비난도 받았지만 탕평파는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이던 척박한 정치현실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공존을 모색했던 정치세력이었다.

    그러나 탕평파의 입지를 좁힌 것은 경종 때 사형당한 노론 4대신(안동김씨 김창집·전주이씨 이이명·이건명·양주조씨 조태채)의 신원 문제였다.

     

    소론 좌의정 경주이씨 이태좌가
    지금 한편의 사람들이 벼슬에 나오기 어려운 단서는 네 사람의 관작을 추탈한 데에 있으니, 모두 벼슬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절의(節義)를 삼고 있습니다(『영조실록』 5년 8월 18일)”라고 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이는 극도로 민감한 문제였다. 노론 4대신을 신원시키려면 목호룡의 고변(임인옥사) 자체를 무고로 정리해야 했는데 이는 소론의 존립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론과 노론의 탕평파가 타협을 위해 만든 명분이 ‘죄의 경중이 같지 않다’는 분등설(分等說)이었다. 분등설은 경종 때 연잉군을 세자로 건저(建儲)하고 대리청정을 주창한 행위와 임인옥사를 구분해 처리하자는 절충안이었다. 연잉군(영조)을 추대한 경종 때의 세자 대리청정 요구는 충(忠)이지만 임인옥사는 역(逆)이라는 방안이었다.

     

    노론으로서는 세자 대리청정 주청이 역(逆)에서 충(忠)으로 전환된다는 장점이 있었고, 소론으로서는 임인옥사를 여전히 역(逆)으로 묶어둠으로써 이를 처벌한 자신들의 행위를 충(忠)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분등설로 각 당의 탕평파들 사이에는 타협의 공간이 마련되었지만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다.

     

    노론 4대신 중 손자 안동김씨 김성행과 아들 전주이씨 이기지임인옥사에 관련되어 사형당한 김창집과 이이명은 신원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소론 탕평파 여산송씨 송인명이 “김창집과 이이명은 아들과 손자가 역적이니 죄가 없을 수 없으나 전주이씨 이건명과 양주조씨 조태채는 추죄(追罪)할 수 없으니 분등(分等)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영조도 “이건명과 조태채는 관작을 복구하는 것이 옳다(
    『영조실록』 5년 8월 18일)”고 동의했다. 이렇게 두 대신이 신원된 것이 영조 5년(1729)의 기유(己酉)처분이었다.

    영조는 탕평책을 확산시키기 위해 소론 탕평파 풍양조씨 조문명의 건의를 받아들여 쌍거호대(雙擧互對)를 인사 원칙으로 삼았다
    . 인사부서에서 3명의 후보자를 주의(注擬)해서 임금에게 낙점(落點)을 요청할 때 각 당파를 골고루 포함시켜야 하고, 한 부서 안에도 각 당파가 고루 포진해야 한다는 인사원칙이었다. 판서가 노론이면, 참판은 소론을 등용하는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탕평책은 유지되었으나 노론은 두 대신이 신원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영조는 재위 9년(1733) 1월 19일 노론 영수 여흥민씨 민진원소론 영수 경주이씨 이광좌를 불렀는데, 『영조실록』은 “임금이 좌우의 근신(近臣)을 물리치고 주서(注書)에게는 붓을 멈추어 기록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사관(史官)에게만 사실을 기록하게 하고 하교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날 영조의 하교를 ‘1·19 하교’라고 하는데, 핵심은 경종 때 노론의 행위나 소론의 행위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경고였다.

     

    이날 영조는 “아! 당론(黨論)이 나를 모함하고 당론이 나를 해쳤다”면서 임인옥사 때 자신을 추대한 혐의로 죽은 처조카 서덕수와 자신은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고 주장해 자신의 처지 또한 곤혹스러움을 내비쳤다. 이날 영조는 오른손으로는 소론 이광좌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노론 민진원의 손을 잡고 화합을 종용했으나 당쟁은 그치지 않았다.

     

    영조는 재위 13년(1737) 8월 18일 인정문(仁政門)에 나가 백관에게 ‘혼돈개벽(混沌開闢)’ 유시(諭示)를 내린다.

    “아! 당습(黨習)의 폐단이 어느 때야 없어지겠는가?…오호라! 우리나라는 그 명목(名目:당색)이 서로 바뀌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그 폐단이 더 심해서 처음에는 군자(君子)라 하다가 뒤에는 충(忠)이라고 하며, 처음에는 소인(小人)이라 하다가 뒤에는 역적(逆賊)이라고 서로 공격했다.(『영조실록』13년 8월 28일)”
    영조는 이날을 기점으로 “이전의 일은 혼돈에 부칠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개벽이다”라면서 어제까지는 노·소론이 싸운 ‘혼돈’이었다면 지금부터는 모두가 화합하는 ‘개벽’이라고 유시했다.

    그러나 과거사에 매달리기는 영조도 마찬가지였다. 영조는 재위 14년(1738) 12월 처조카 서덕수를 신원했다. 서덕수의 할머니이자 정성왕후 서씨의 어머니인 잠성부부인(岑城府夫人:정성왕후의 어머니)이 사망하자 “서덕수는 사람됨이 어리석어 속임을 당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중전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신원한 것인데, 이는 임인옥사에 대한 영조의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드디어 재위 16년(1740:경신) 1월에는 안동김씨 김창집과 전주이씨 이이명도 신원시켜 노론 4대신 모두의 혐의를 벗겨주었다. 나아가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임인옥사를 무고로 처분하는 경신처분(庚申處分)을 단행했다.

    그러자 연잉군(영조)의 미래를 부탁했다는 숙종의 유조(遺詔)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풍양조씨 조현명의 문집인 『귀록집(歸鹿集)』에 따르면 영조 16년 인현왕후 여흥민씨의 조카 민형수(閔亨洙)는 조현명에게 “정유독대(숙종과 이이명의 독대) 후에 숙종께서 두 왕자(연잉군·연령군)의 보전을 생각하셔 안으로는 (두 왕자를) 동조(東朝:대비)에게 부탁하고, 밖으로는 대장(大將) 이우항(李宇恒)에게 부탁했다”고 말했다. 민형수는 ‘숙종이 이이명에게 선비(士)를 추천하라고 하자 이이명이 김용택과 이천기를 추천했는데, 숙종이 7언고시를 김용택에게 내렸다’고 덧붙였다. 삼급수 중 숙종의 유서를 이용해 경종을 내쫓으려는 평지수가 실제 숙종의 명령에 의한 것이지 역모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김용택의 아들 김원재를 국문한 후 숙종의 유시(遺詩)는 김용택이 위조한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영조는 과거사 정리를 계속해 재위 17년(1741)에는 드디어 ‘신유대훈(辛酉大訓)’을 선포한다.

     

    경종 때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은 역모가 아니라 자성(慈聖:대비)과 경종의 하교에 의한 정당한 조치라면서 『임인옥안(목호룡 고변 사건 수사기록)』을 불태우고 이를 태묘(太廟:종묘)에 고하게 한 것이다. 신유대훈은 영조식 과거사 정리의 완결판이었다. 임인옥안에 역적의 수괴로 등재된 자신의 전과를 말소하면서 재위 1년(1725) 광산김씨 김일경과 목호룡을 죽이고 취했던 을사처분으로 회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을사처분이 재위 3년의 정미환국으로 무효가 된 지 14년 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 을사처분이 일방적 선언이었다면 신유대훈은 소론의 동의를 받아낸 점이 달랐지만 비생산적인 과거사 집착이란 점은 마찬가지였다. 임인옥안을 불살랐다고 사건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자 군왕의 평가는 옥안(獄案)의 등재 여부가 아니라 재위 시의 업적에 의한다는 사실도 간과한 것이었다.

     

    검소한 군주의 눈물도 ‘양반’을 누르진 못했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45호 | 20091219 입력

     

    군주가 백성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궁극적 길은 스스로 가난한 생활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군주는 백성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잘못된 제도를 혁파하는 제도개혁에 앞장서는 것으로 백성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다. 영조는 절검생활을 앞장서 실천하는 유학 군주였으나 백성들은 물론 시대도 그런 개인적 실천보다는 잘못된 제도의 개혁을 요구했다.
     
    박문수 초상 흔히 뛰어난 암행어사로 알려진 박문수는 이인좌의 봉기 토벌에 가담한 소론 온건파로서 고른 인재 등용과 군역제도 개혁에 앞장섰던 개혁정치가였다.
    절반의 성공 영조④ ‘애민군주’의 한계

    선왕독살설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영조는 훨씬 성공한 군주가 될 자질이 있었다. 그는 절검을 솔선하는 애민군주였다.

     

    재위 20년(1744) 5월 영조가 병이 들어 약원(藥院)의 진찰을 받을 때 신하들은 영조의 침실을 엿볼 수 있었다.

    “이때 임금은 목면으로 만든 침의(寢衣:잠옷)를 입었으며…이불 하나 요 하나도 모두 명주로 만든 것이었으며 병장(屛障:병풍)도 진설하지 않았다. 또 기완(器玩)도 없어서…여항(閭巷:민간)의 호귀(豪貴)한 집에 견주어도 도리어 그만 못했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 나와 검소한 덕에 대해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영조실록』20년 5월 2일)”

    영조의 침실이 민간의 부잣집만도 못했다는 이야기다. ‘영조행장’에도 “중의(中衣)·철릭(貼裏:군복) 따위는 이따금 빨고 기워 입고 겨울에 매우 춥더라도 갖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영조는 절검을 솔선함으로써 사대부들의 사치를 금지시키려 했다. 흉년과 전염병이 만연해 백성들이 죽어가는 가운데에서도 사대부들의 사치는 계속되었던 것이다.

     
    순무영진도 조선 후기 군사들의 군진 모습을 그린 것이다. 조선은 양반 사대부는 군역 의무가 없고 가난한 양인들만 군역 의무가 있는 모순된 군역 제도를 갖고 있었다. 사진가 권태균
    재위 8~9년 가뭄과 전염병이 창궐하는 가운데 영조는 “필서(匹庶:서인)의 사치는 곧 조사(朝士:벼슬아치)를 본받은 것이고, 조사의 사치는 곧 귀척(貴戚:왕실의 외척)을 본받은 것이며, 귀척의 사치는 왕공(王公)에 근본을 두고 있다(『영조실록』 9년 12월 22일)”면서 왕실의 고급 비단 직조를 금지시켰다.

     

    영조는 재위 32년(1756) 1월 사대부가(家) 부녀자들의 가체(加<9AE2>:어여머리)를 금지시키고 족두리(簇頭里)로 대신하도록 명했다. 『영조실록』은 이때 사대부가 부인들이 ‘서로 높고 큰 가체를 자랑하고 숭상했다’면서 “한번 가체를 하는 데 몇 백 금(金)을 썼다”고 전하고 있다.

     

    영조는 금주령도 자주 내렸는데, 심지어 “갑자기 좋은 계책이 생각났으니 바로 예주(醴酒:식혜)인데, 아! 예주가 어찌 현주(玄酒:제사 때 술 대신 쓰는 맑은 찬물)보다 낫지 않겠는가?(『영조실록』 31년 9월 7일)”라면서 제사 때도 술 대신 식혜를 쓰라고 명했다. 영조부터 금주했음은 물론이다.

    영조는 절검생활을 하는 것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함께한다고 여겼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도개혁이었다. 모순된 제도를 방치한 채 군주의 절검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때 백성들을 괴롭히는 가장 큰 문제는 군역(軍役:병역)의 폐단이었다. 그 핵심은 양반들이 군역에서 면제된 데 있었다. 개국 초에는 양반 사대부들도 군역의 의무가 있었으나 차차 사라지더니 중종 36년(1541)에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가 실시되면서 합법적으로 면제된 것이다. 양인(良人)들은 16세부터 60세까지 1년에 포 2필을 납부하는 것으로 군역 의무를 대신했는데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피지배층인 백성들은 군역의 의무가 있는 반면 지배층인 양반들은 면제된 것이다. 이후 군포를 내면 상놈으로 천대받고, 내지 않으면 양반으로 우대받는 가치관의 전도 현상이 발생했다.

    성공한 농민 일부가 곡식을 헌납하고 공명첩(空名帖:이름을 적지 않은 관직 임명장)을 사들인 이유도 양반 신분을 획득하면 군역에서 면제되기 때문이었다
    . 재력 있는 양인들이 공명첩을 매입해 군역에서 면제되면서 군역은 돈 없고 힘없는 상놈들만의 의무로 전락했다. 여기에 양란 이후 군사 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이 문제를 악화시켰다.

     

    임진왜란 때 훈련도감을 창설한 이래 이괄의 난을 계기로 어영청이, 경기 일대의 방위를 위해 총융청이, 정묘호란 뒤에는 남한산성에 수어청이, 17세기 말에는 수도 방위를 위해 금위영이 설치됨으로써 군영이 5개로 늘어났다.

     

    군포(軍布)를 납부할 백성 수는 줄어드는데 국방비 수요는 늘어난 것이다. 가난한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숙종 때 군사 숫자를 줄이자는 개혁안이 잠시 등장했다가 국왕 경호가 소홀해질 수도 있다는 반대론에 쑥 들어갔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그냥 방치할 수 없었기에 군역개혁론인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이 등장했다. 사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양반 사대부들도 군포를 내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반 사대부들이 격렬하게 반발했기 때문에 여러 방안이 속출했다.

    양역변통론은 크게 유포론(遊布論), 호포론(戶布論), 구전론(口錢論), 결포론(結布論)의 네 가지가 있었다.

     

    유포론은 군역 기피자를 색출해 군역 의무를 지우자는 것이고,

     

    호포론은 수포(收布)의 기준을 인정(人丁:사람)에서 호(戶)로 삼아 모든 가호(家戶)에 군포를 받자는 것이었고,

     

    구전론은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받자는 것이었다.

     

    결포론은 인정(人丁) 대신 전결(田結:토지면적)에 군포를 부과하자는 것으로서 대동법과 비슷한 발상이었다.

     

    이 중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은 양반 집안도 군포를 내게 하자는 호포론과 양반 사대부 개개인을 징병 대상으로 삼아 돈을 받자는 구전론이었다.

     


    이에 대해 사대부들은 중국 고대 위진 남북조 시대 송나라 왕구(王球)가 말한 “사대부와 서민의 구별은 국가의 헌법(士庶之別 國之章也)”이라는 사대부 특권 의식에서 나온 숭유양사론(崇儒養士論)으로 반대했다. 군역 의무는 상놈만의 것이란 논리였다. 조정에서 가난한 백성들을 대변할 정치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양반 대다수가 반대하자 군제개혁론은 좌초 위기에 놓였다. 영조는 개인적인 절검을 실천할 의지는 있었지만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어가면서까지 군제개혁을 강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영조 26년(1750) 소론 호조판서 고령박씨 박문수(朴文秀)가 호전론(戶錢論)을 제기하면서 다시 양역변통 논쟁에 불이 붙었다. 호전론은 호포론처럼 호를 단위로 돈을 받자는 방안이었다.

     

    영조는 재위 26년 5월 홍화문(弘化門)에 나가 직접 백성들을 만나 군역에 관한 여론을 들었다. 백성들의 하소연을 들은 영조는 “(백성들이) 부르짖고 원망하여 도탄 속에 있어도 구해내지 못하니, 장차 무슨 낯으로 지하에 돌아가서 선조(先祖)의 영령을 대하겠는가? 말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목이 멘다.(『영조실록』 26년 5월 19일)”라고 눈물을 흘렸지만 양반들은 영조의 눈물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영조가 타협안으로 마련한 것이 균역법(均役法)이었다. 균역법은 왕실과 양반 전주(田主:지주)가 조금씩 양보해 백성들의 군포 부담을 줄이자는 방안이었다. 백성들의 부담을 연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대신 줄어든 수입은 어염선세(漁鹽船稅)와 결작미(結作米), 은여결세(隱餘結稅),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등으로 보충하자는 방안이었다.

     

    어염선세는 왕실에 속해 있던 수입을 정부 재정으로 돌린 것으로 왕실이 양보한 것이고,

     

    결작미는 전결(田結) 1결당 쌀 2두(혹은 돈 2錢)를 부과 징수하는 것으로 양반 전주들이 조금 양보한 것이었다.

     

    은여결세는 전국의 탈세전을 적발해 부과하자는 것이었고,

     

    선무군관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군역에서 벗어난 양민들을 색출해 선무군관으로 편성한 것으로서 전국에서 2만4500여 명이 새로 편입되었다.

    균역법은 군역개혁의 목표였던 양반계급의 과세는 손도 대지 못한 채 지배층의 부분적 양보를 명분 삼아 문제의 본질을 덮어버린 반쪽짜리 개혁안이었다
    .

     

    그러나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균역법이 한계를 드러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양반 전주들은 결작미 부담을 전호(佃戶:소작농민)에게로 떠넘겼고, 농민 부담은 다시 가중되었다.

     

    균역법 시행 2년이 채 안 된 영조 28년(1752) 병조판서 남양홍씨 홍계희(洪啓禧)대리청정하는 사도세자에게 올린 보고서는 반쪽짜리 개혁안이 휴지가 된 사실을 잘 보여준다. 홍계희는 가장 가난한 백성들만 군포 납부 의무를 진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세업(世業)도 없고 전토(田土)도 없어 모두 남의 전토를 경작하고 있기 때문에 1년에 수확하는 것이 대부분 10석을 넘지 못하는데, 그 가운데 반을 전토의 주인에게 주고 나면 남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비록 날마다 매질을 가하더라도 바칠 수 있는 계책이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죽지 않으면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영조실록』 28년 1월 13일)”

    홍계희는 이 때문에 ‘죄수들이 감옥에 가득하게 되고 원통하여 울부짖는 것이 갈수록 심해졌다’고 보고하고 있다. 영조가 진정한 애민군주가 되려면 절검이라는 개인적 수신(修身)보다는 양반 과세(課稅)를 통한 신분제의 해체라는 제도개혁으로 나가야 했다. 그것이 시대적 요구였다. 그러나 경종독살설에 발목 잡힌 영조는 양반 사대부의 특권을 철폐할 권력도 의지도 없었다. 양반 사대부의 특권 속에 백성들은 계속 군역의 폐단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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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론 탕평파  남양홍씨 홍계희 1703(숙종 29)~ 1771(영조 4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순보(純甫), 호는 담와(淡窩). 아버지는 참판 홍우전(禹傳)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이상(李翔)의 딸이다.

     

    1737년(영조 13)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언(正言)이 되고 1742년 북도감진어사(北道監賑御史)로 파견되었으며, 이듬해 다시 북도별견어사(北道別遣御史)가 되어 그 지방의 지형과 물정을 상세히 수록한 지도를 작성해 바침으로써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었다.

     

    1748년 일본의 통신상사(通信上使)로 차정되어 일행 500여 명을 이끌고 일본에 다녀왔으며, 1750년 병조판서로 발탁되어 소론 탕평파 영의정 조현명과 함께 균역법 제정을 주관하여 균역사목(均役事目)을 작성·시행하게 했다. 그러나 균역법에 대한 비난으로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출보되었다가 1754년 이조판서로 재기용되었으며, 이후 형조·병조·호조의 판서 및 예문관대제학을 역임했다.

     

    1762년(영조 38) 경기도 관찰사로 나아가 경주김씨 김한구(金漢耉)·해평윤씨 윤급(尹汲) 등과 공모, 나경언(羅景彦)으로 하여금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의 난행을 과장하여 형조에 고발하게 해 세자의 사사(賜死)를 촉발했다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올라 아들 지해(趾海)의 임지인 영변에서 죽었다.

     

    1777년(정조 1) 두 손자의 정조시해 미수사건으로 그의 두 아들 및 일가가 처형당하자 그도 관작이 추탈되고 역안(逆案)에 이름이 올랐다.

     

    그는 경세치용에 관심을 가 진 개혁실천주의자였으나 권력을 좇아 무리를 짓고 자신의 이해에 따라 인간관계를 바꾸어서 사림들로부터 소인 내지 간신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저서로 〈삼운성휘 三韻聲彙〉가 있고, 편저로 〈균역사실 均役事實〉·〈준천사실 濬川事實〉·〈균여사목변통사의 均役事目變通事宜〉·〈해동악장 海東樂章〉·〈경세지장 經世指掌〉·〈문산선생상전 文山先生詳傳〉·〈주문공선생행궁편전주차 朱文公先生行宮便殿奏箚〉·〈국조상례보편 國朝喪禮補編〉·〈사곡록 寺谷錄〉·〈창상록 滄桑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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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난 영조 “양반의 나라니 경들이 다스리시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이덕일 | 제146호 | 20091227 입력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란 말은 조선 후기사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승자인 노론과 패자인 여타 당파에 관한 기록이 그런 것처럼 영조의 모친 숙빈 해주최씨와 라이벌 희빈 인동장씨 이야기도 시종 승자인 최씨의 자리에서 기록되었다. 노론은 최씨를 우호적으로 묘사했지만 영조의 모친 추숭 작업에도 제동을 걸었다. 국왕의 생모라도 신분제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①숙빈 최씨의 소령원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숙종 당시 묻힐 때는 소령묘였으나 영조 즉위 후 소령원으로 격상되었다. ②육상궁 현판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곁에 있다. 영조는 즉위 후 육상묘를 육상궁으로 승격시켰는데 현판은 아직도 육상묘인 것이 이채롭다. 이곳은 주로 왕을 낳은 후궁들을 모신 사당이다. ③이문정의 수문록 들은 대로 썼다는 뜻의 제목을 달고 있다. 이문정은 종제 이진유가 김일경과 신축소를 올리자 절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노론 정체성이 강했고, 이 책도 그런 관점에서 서술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절반의 성공 영조⑤ 숙빈 해주최씨 추숭

    영조는 평생 경종 독살설과 모친 해주최씨의 미천한 신분이란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숙빈(淑嬪) 최씨는 희빈 장씨의 라이벌이었다. 여러 야사에 최씨는 선한 인물로, 장씨는 악독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이는 최씨가 인현왕후 및 노론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한 덕분이었다.

     

    그런 야사의 하나가 조선 후기 이문정(李聞政)이 쓴 『수문록(隨聞錄)』으로서 숙종과 최씨의 만남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다. 최씨가 궐내 자신의 방에 떡과 음식을 차려놓고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숙종이 들어온다. 사유를 묻는 숙종에게 내일이 인현왕후의 탄신일이어서 왕후가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을 차려놓고 비는 중이었다고 대답했다. 숙종은 인현왕후도 그리워졌고 옛 주인을 섬기는 최씨의 정성도 가상했기 때문에 그를 가까이해 태기가 생겼다는 이야기다.

    1936년 편찬된 『정읍군지』는 인현왕후의 부친 여흥민씨 민유중(閔維重)이 인현왕후를 업은 부인 은진송씨(송준길의 딸)와 영광군수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 정읍 태인면의 대각교 다리에서 고아로 떠돌던 해주최씨 소녀를 만나 거두어 길렀다고 전한다. 그 후 인현왕후가 입궐하며 궁녀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숙빈 최씨의 신분에 대해 궁녀에게 세숫물을 떠다 주는 무수리(水賜)라는 것이 일종의 상식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기록들은 달리 전하고 있다. 영조가 즉위 1년(1725)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짓게 한 「숙빈 최씨 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에는 ‘만 6세 때 궁녀로 선발되어 들어왔다(選入宮甫七歲)’고 전하고 있다. 인현왕후가 만 14세에 숙종과 가례를 올릴 때 최씨는 만 11세였다. 최씨가 6세 때 궁녀로 들어왔다면 인현왕후가 데려갈 수는 없게 된다. 또한 6세 때 궁녀로 들어갔다면 무수리 출신도 아니다.

    남인 계열 인동장씨의 미인계에 일격을 당하고 정권을 빼앗긴 서인(노론)에게 최씨는 좋은 반격의 재료였다. 실제 서인(노론)은 고비마다 최씨의 도움을 얻어 정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숙종 20년(1694) 서인들이 하룻밤 사이의 대반전으로 정권을 잡는 갑술환국도 마찬가지였다.

     

    여흥민씨 민유중의 아들이자 인현왕후의 오빠였던 민진원(閔鎭遠)은 『단암만록(丹巖漫錄)』에서 광산김씨 ‘김진귀의 아들 김춘택이 봉보부인(奉保夫人: 숙종의 유모)을 통하여 최씨와 계략을 세워 남인의 정상을 주상에게 자세히 보고하여 환국이 이루어졌다’고 적고 있다. 명문 거족 출신의 거대 정파 노론에 맞섰던 천인 출신 희빈 장씨에 대한 노론의 적대감은 상상 이상이어서 여러 전설을 만들어냈다.

    『수문록』은 왕비 장씨와 최씨의 다툼을 시종 최씨의 입장에서 그리고 있는데, 숙종이 조는 사이 신룡(神龍)이 땅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숙종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숙종이 장씨 방에 가서 살피니 담장 밑에 큰 독이 엎어져 있었는데, 그 속에 임신한 최씨가 결박당한 상태로 있었다는 것이다. 왕비 여흥민씨가 희빈 인동장씨의 종아리를 때린 것처럼 왕비 인동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는 해주최씨를 질투하고 박해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임금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을 죽이려고 시도할 수는 없다. 아들이 귀했던 숙종 때 왕의 혈육을 임신한 여인을 죽이려던 사실이 발각되었다면 갑술환국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그날로 쫓겨나 사형당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숙종 20년(1694) 9월 최씨가 아이(영조)를 출산하자 숙종은 출산을 도운 호산청(護産廳)의 내시와 의관에게 내구마(內廐馬)를 상으로 주었다. 우의정 파평윤씨 윤지완(尹趾完)이 차자를 올려 ‘내구마가 어찌 환시와 의관이 감히 받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라고 반발할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야사는 대부분 장씨가 최씨를 핍박했다고 전하지만 실제 장씨를 죽음으로 몬 여인은 최씨였다. 숙종 27년(1701) 인현왕후 여흥민씨가 병사한 후 인동장씨는 민씨를 무고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한다. 『숙종실록』은 “숙빈 최씨가 평일에 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하여, 통곡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 고했다(『숙종실록』 27년 9월 23일)”고 기록해 희빈 장씨를 죽음으로 몬 인물이 최씨라고 전하고 있다.

    숙빈 해주최씨는 숙종 44년(1718) 48세의 나이로 사망하는데 이때 공교롭게도 최씨의 장지(葬地)를 선정한 인물이 목호룡이다
    . 당초 내관(內官) 장후재(張厚載)가 간심한 숙빈의 장지는 경기도 광주의 명선(明善)·명혜공주(明惠公主) 묘산(墓山) 내의 청룡(靑龍) 터였다. 법금을 무시한 장지 선택이라고 질책당한 후 연잉군이 목호룡을 데리고 직접 간심해 결정한 장지가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동의 소령묘(昭寧墓: 현 소령원)였다. 종친 청릉군(靑陵君)의 가노(家奴)였던 목호룡은 이 공으로 속신(贖身)되는데 삼급수 사건을 고변했다가 영조 즉위 초 죽임을 당했으니 기막힌 인생유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조 즉위 직후 숙빈에 대한 추숭 작업을 추진한 것은 소론 정권이었다. 영조 즉위년(1724) 9월 예조판서 이진검(李眞儉)이 “선조 때 덕흥군을 높여서 대원군이라고 하고, 군부인(郡夫人)을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고 높였다”면서 추숭을 건의하자 영조는 우의정 이광좌(李光佐)에게 물었다. 이광좌가 숙종이 내린 작호에 ‘대(大)’자를 첨가하자고 찬성하자 영조는 “어머니는 자식 때문에 귀해진다고 선유(先儒)가 말했다”고 동의했다. 그러면서 “맹무백(孟武伯)이 효에 대해 묻자 공자는 ‘부모의 뜻을 어기지 말라’고 했다”며 선왕이 내린 작호를 고칠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숙빈의 사우(祠宇)를 따로 짓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두 달 전의 사양이 본심이 아님을 드러냈다. 영조는 숙빈 최씨에게 시호를 올리고 묘(廟)를 궁(宮)으로, 묘(墓)는 원(園)으로 승격함으로써 생모에 대한 효도를 다하는 한편 모친의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를 씻으려고 했다.

     

    재위 17년의 신유대훈으로 목호룡의 옥사를 모두 무효화시킨 영조는 이를 기반으로 재위 20년(1744)부터 본격적인 숙빈 추숭에 나섰다. 이때 영조는 “사서(士庶)도 동추(同樞: 종2품 동지중추부사) 이상은 3대를 추증하는데 하물며 국군(國君)의 사친(私親)을 아버지만 추증해서야 되겠는가?”라면서 3대를 추증하라고 명했다.

    드디어 재위 29년(1753) 6월 25일 영조는 모친에게 화경(和敬)이란 시호를 올리고, 육상묘(毓祥廟)를 육상궁(宮), 소령묘(昭寧墓)를 소령원(園)으로 격상시켰다. 영조는 “오늘 이후로는 한이 없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감격했으나 의식 진행과정에서 제동이 걸렸다. 그해 7월 27일 시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시키는 상시봉원도감(上諡封園都監)을 설치했는데, 은인(銀印) 사용에 반대하고 나선 신하가 있었다. 격분한 영조는 왕위를 물러나겠다는 뜻까지 내비치면서 “내가 사친을 위해서 감히 옥인(玉印)을 바라지는 못해도 어찌 은인(銀印)까지 불가하겠는가?”라고 분개했다.

    이 날짜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우리나라는 양반의 나라이니(兩班之國), 경 등이 스스로 다스리면 될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다고 전한다.

    그뿐만 아니었다. 시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하는 내용을 죽책문(竹冊文)으로 지어야 했으나 작문 당사자인 대제학 양주조씨 조관빈(趙觀彬)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죽책이 옥책(玉冊)에 비하면 경중이 있기는 하지만 국조(國朝)의 크고 작은 책문(冊文)은 승통(承統)한 비빈(妃嬪)이 아니고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영조실록』 29년 7월 29일)”라고 반대했다. 왕비나 세자빈이 아니면 죽책문을 사용할 수 없다고 반대한 것이다. 영조는 “그 마음은 보지 않아도 알 만하다…대신들은 마땅히 토죄를 청해야 할 것이다”라고 분개했다. 영조가 분노한 이유는 조관빈이 경종 때 사형당한 노론 4대신 양주조씨 조태채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숙빈 덕분에 노론이 정권을 되찾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조는 소론의 불만을 무릅쓰며 재위 12년(1736) 양주조씨 조태채의 관작을 복구시켜주었는데 그 아들이 죽책문 작성을 거부했으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논란 끝에 영조는 모친에게 화경(和敬)이란 시호를 올리고, 육상묘(廟)를 육상궁(宮)으로, 소령묘(墓)를 소령원(園)으로 높이는 데 성공했다. 왕비보다는 낮지만 후궁보다는 높은 새로운 궁원(宮園) 제도를 수립한 것이다.

     

    영조 50년(1774) 거창 유생 김중일(金重鎰) 등이 소령원을 릉(陵)으로 올리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구미에 맞춘 말이었으나 영조는 “엄중히 처단해야 하겠지만 기기(忌器)를 참작하여 정거(停擧: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하도록 하라”고 명했다. 기기는 투서기기(投鼠忌器)의 준말로 ‘돌을 던져 쥐를 잡고 싶으나 곁의 그릇을 깰까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영조는 사헌부의 요청에 따라 김중일을 유배 보냈다. 국왕의 생모라도 신분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양반 나라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론은 희망을 잃고, 임금은 이성을 잃었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세상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경쟁할 때 발전하는데 정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치권력은 반대세력을 말살하고 독존하려는 성향이 존재한다. 가끔 현실의 권력으로 반대세력을 말살하고 독존에 성공하는 정치세력이 나타났지만 그 결과는 반대세력만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사회 전체까지 공멸하는 것으로 나타남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윤지의 벽서로 시작된 나주벽서사건은 토역경과사건과 맞물리면서 탕평책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노론 일당 독주 체제를 만들었다. 우승우(한국화가)
    절반의 성공 영조⑥ 나주벽서사건

    영조는 재위 17년(1741)의 신유대훈(辛酉大訓)으로 자신이 역적의 수괴로 등재된 『임인옥안』을 불태우고 경종 당시 있었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은 역모가 아니었다고 선포했다. 영조는 이로써 자신의 과거가 깨끗하게 정리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사는 경종의 편에 섰다가 자신이 즉위하면서 몰락한 소론 강경파(埈少)와 화해를 통해서만 정리될 수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다.

    신유대훈에 동의한 소론은 정권에 참여했던 온건파(緩少)뿐이었다. 게다가 신유대훈 이후 노론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탕평책은 명목상의 존재로 격하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영조 31년(1755)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趙雲逵)의 급보로 시작된 나주벽서사건이었다. 나주 객사(客舍)인 망화루(望華樓) 정문에 ‘간신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의 벽서가 걸리면서 시작된 사건이었다.

     

    영조는 좌의정 청풍김씨 김상로(金尙魯), 우참찬 풍산홍씨 홍봉한(洪鳳漢) 등을 불러 전라감사의 장계를 보이면서 “이는 황건적과 같은 종류인데, 틀림없이 무신년(이인좌의 난) 때의 여얼(餘孼)이다. 그러나 무신년에 최규서(崔圭瑞)가 고변하였을 때도 나는 오히려 동요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는 웃었다.

    영조처럼 감정 기복이 심한 인물이 자신의 치세를 전면 부정하는 흉서를 내보이며 웃었다는 것은 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방증이었다. 영조는 좌·우변(左右邊) 포도대장을 입시시켜 기한을 정해 범인을 체포하라고 명했다.

     

    벽서는 필적을 숨기기 위해 똑같은 자획으로 썼지만 범인을 체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주 정도의 작은 고을에서 목숨을 걸고 영조를 비난할 사대부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며칠 지나지 않아서 범인 윤지(尹志: 1688~1755)가 체포되었다. 영조 즉위년에 광산김씨 김일경 일파로 몰려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 윤취상의 아들이었다. 부친이 사형당한 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만 18년 만인 영조 19년(1743) 나주로 이배(移配)된 인물이었다.

     

    지난 30년 세월이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영조와 노론이 지배하는 한 미래가 없었던 인물이었다. 영조 즉위와 동시에 그의 자리에서 영조는 선왕을 독살한 역적일 뿐이었다.

    사건 연루자인 임천대(林天大)는 윤지가 나주에서 30여 명을 모아 계를 만들었는데 먼저 벽서를 걸어 인심을 소란시킨 후 거사하자고 말했다고 자백했다. 계원인 임국훈(林國薰)은 윤지가 맡긴 각종 책자와 편지를 압수당했는데 그중에는 목호룡의 고변서도 있었다. 윤지와 가장 많은 편지를 나눈 전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은 국문에서 “김일경의 상소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신하로서의 절개가 있다고 여겼다”면서 “꿈에 윤취상을 배알했다”고까지 말해 영조를 충격에 빠트렸다.

     

    영조는 윤지 부자를 사형시킨 후 그의 집을 저택(<7026>宅: 연못으로 만듦)하고 이하징·박찬신(朴纘新)·조동정(趙東鼎)·조동하(趙東夏)·김윤(金潤) 등 연루자를 처형했다. 또한 이미 사망한 양주조씨 조태구·문화유씨 유봉휘 등에게 역률을 추가했다.

    영조는 같은 해 4월 태묘(太廟: 종묘)에 나가 역적들을 모두 토벌했다고 고하고 5월 2일에는 이를 축하하는 토역(討逆) 경과(慶科)를 베풀었다. 나라에 기쁜 일이 있을 때 행하는 특별 과거였다. 그런데 파리 머리만 한 작은 글씨로 영조의 치세를 비난하는 시권(試券: 과거 답안지)이 제출되어 영조를 경악케 했다. 이인좌의 봉기 때 사형당한 심성연(沈成衍)의 동생 심정연(沈鼎衍)이 제출한 시권이었다.

     

    또 답안 대신 ‘상변서(上變書)’도 제출되었는데, 『영조실록』은 “임금이 다 보지 못하고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이었다. 심정연은 친국하는 영조에게 “이는 일생 동안 나의 마음으로서 과장(科場)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써 두었던 것”이라고 답했다.

    심정연은 윤지의 숙부이자 윤취상의 아우인 윤혜(尹惠)와 모의했다고 자백했다. 윤혜에게서 압수한 문서에는 선왕들의 휘(諱: 이름)가 쓰여 있었다. 영조가 그 이유를 묻자 “내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상고하느라 썼다”고 답했다. 영조가 주장(朱杖: 붉은 곤장)으로 마구 치게 했으나 윤혜는 혀를 깨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미 군신 사이가 아니었다.

     

    영조는 보여(步輿)를 타고 종묘에 가서 엎드려, “나의 부덕으로 욕이 종묘까지 미쳤으니 내가 어떻게 살겠는가?”라고 울었다. 그러나 영조는 경종의 충신으로 자처하는 소론 강경파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생각은 없었다. 영조는 군사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갑주(甲<5191>)를 입고 친국에 임했는데, 『영조실록』은 이때 영조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전하고 있다.

    “이때 임금이 크게 노하고 또 매우 취해서 윤혜의 수급(首級: 머리)을 깃대 끝에다 매달고 백관에게 돌아가며 조리돌리도록 명하면서, ‘소론 강경파 광산김씨 김일경과 목호룡의 마음을 품은 자는 나와서 엎드려라’라고 말했다.…임금이 일어나 소차(小次)로 들어가 취해 드러누웠다.(『영조실록』 31년 5월 6일)”

    분노 속에 술을 마셔 이성을 상실한 영조는 사형을 남발했다. 소론 강경파도 이판사판이어서 심정연과 친했던 강몽협 등은 60여 명으로 춘천부(春川府)를 공격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했다.

     

    각 도에서 연루자가 연일 체포되었는데 영조는 그해 5월 12일 강원·전라·경상·함경·경기 다섯 도의 감사에게 사민(士民)을 안정시키라는 명을 내려야 했다. 영조는 그해 5월 16일 좌의정 청풍김씨 김상로(金尙魯)에게 “연달아 없애 다스려도 조금도 징계되어 그치지 않으니 장차 어찌해야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노론 영수 김상로에게 적당(敵黨)의 처리 문제를 물은 것이니 답은 뻔했다. 김상로는 “이는 반드시 큰 소굴이 있어서 적(賊)들이 이를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고, 영조는 “내가 반드시 그 소굴을 찾아낸 후에야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겠다”라고 다짐했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 경종에 대한 충심으로 연결되어 목숨 걸고 저항하는 것이란 생각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영조와 노론 정권은 연루자를 모두 죽이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죄인 광산김씨 김요덕이 물고되었는데 김일경의 종손이다. 김일경의 종자(從子) 김유제·김인제·김덕제·김홍제·김대재·김우해와 종손 김천주·김요백·김요채·김요옥·김요덕 등은 심정연의 초사 때문에 모두 국문을 받았는데, 김인제는 승관(承款)하여 정형(正刑: 사형)되었고, 김요백·김요채는 역적 윤혜와 함께 효시되었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장(杖)을 맞다 죽었다.(『영조실록』 31년 5월 18일)”

    김일경의 후손 중에 중으로 변장한 인물이 있다는 정보가 있자 각 사찰을 대대적으로 색출해 김일경의 종자(從子) 김창규(金暢奎)를 끌고 왔다. 김창규는 “먹고살 길이 없어 걸식했을 뿐”이라고 답하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자 갑자기 “어서 빨리 나를 죽여라(只當速殺我: 5월 20일)”라고 소리쳤다.

     

    김일경이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고 대든 것과 같은 말이었다.

     

    드디어 전 승지 신치운(申致雲)은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1724: 경종 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라고 대들었다. 이 말에 영조는 분통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경종이 와병 중일 때 대비 인원왕후가 게장을 올리고 왕세제(영조)가 상극인 생감을 올려서 독살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사건으로 처형당한 소론 강경파는 500여 명에 달할 정도였고, 이후 영조는 형식적 탕평책마저 완전히 붕괴시켰다.

     

    영조는 경주이씨 이종성(李宗城)· 고령박씨 박문수(朴文秀) 등 극소의 인물을 제외하고는 소론 온건파도 모두 조정에서 쫓아냈다.

     

    그해 11월 영조는 『천의소감(闡義昭鑑)』을 발간했는데, 노론 4대신은 물론 목호룡의 고변으로 사형당한 노론 광산김씨 김용택 등도 모두 충신이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게장은 자신이 보낸 것이 아니라 어주(御廚: 대궐 수라간)에서 올린 것이라는 대비 인원왕후 여흥민씨의 변명도 실었다. 영조와 노론, 그리고 인원왕후의 ‘과거사 다시 쓰기’였다.

    그러나 경종 시절 영조와 노론의 행위는 경종의 자리는 물론 어느 국왕의 자리에서 볼 때도 반역행위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영조와 노론의 과거사 지우기는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해인 재위 32년(1756)에는 노론에서 정신적 지주로 삼는 문정공(文正公) 은진송씨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했다. 드디어 노론이 한 당파의 이념을 넘어 국가의 이념임을 선포한 셈이었다. 소론과 남인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정도로 전락하고 노론 일당 독주가 강화되었다.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가 이런 정국에 불만을 품으면서 소론 강경파에게 향했던 영조와 노론의 칼끝은 사도세자를 겨냥하게 됐다.

     

    반대파를 모두 제거하고 탕평책을 붕괴시킨 노론 일당의 권력이 국왕의 후계자를 겨냥할 정도로 막강해진 것이었다.

     

     

    영조의 왕위이양 ‘쇼’ , 4살 세자는 석고대죄했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48호 | 20100109 입력
     
    세자는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당선자다. 다만 현재의 임금이 사망해야 즉위하기 때문에 즉위 날짜를 모른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 당선자와 다를 뿐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세자는 시강원에서 왕도교육을 받으며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擇君)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세자 역시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 결정판이 사도세자다.
     
    함춘원지의 함춘문 정조는 즉위 후 사도세자 사당을 창경궁 동쪽 후원 함춘원으로 이전하고 경모궁으로 개명했다. 일제는 1924년 이 자리에 경성제대 의학부를 건설하면서 그 원형을 파괴했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병원 자리다. 함춘문은 경모궁으로 가는 문이다. 사진가 권태균
    절반의 성공 영조⑦ 사도세자(上)

     

     



    영조 38년(1762)에 있었던 사도세자 살해사건을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 하는데 현재도 많은 이들이 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다. 홍씨의 『한중록』이 과거 국어교과서에 실린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는데 무슨 까닭인지 홍씨와 다른 시각의 사료는 배제되었다. 그 결과 세자의 정신병이 ‘뒤주의 비극’을 낳았다는 홍씨의 시각만 유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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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빈 전의이씨(暎嬪 李氏, 1696년 음력 7월 18일~1764년 음력 7월 26일)는

     

    조선 왕조 제21대 임금 영조의 후궁이다. 본관은 전의(全義)로, 증찬성 이유번(李楡蕃)과 부인 한양김씨(김우종의 딸) 사이의 딸이다. 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정조의 친할머니이다.

     

    영조와의 사이에서 1남 5녀를 두었다.

     

    첫 시호는 의열(義烈)로 이후 의열궁(義烈宮)으로 불렸다가 다시 소유(昭裕)로 시호가 바뀌었다.

     

     

    [편집] 생애

    1701년, 궁녀로 입궁하여 영조의 승은을 입었고 이후 1726년 11월 16일 내명부 종 2품 숙의에 책봉되었다. 1728년에 귀인이 되었다가 마침내 1730년 11월 27일, 내명부 정1품 빈(嬪)의 첩지를 받아 영빈이 되었다. 슬하에 화평옹주(和平翁主), 화협옹주(和協翁主), 화완옹주(和緩翁主)에 조졸한 옹주 둘을 포함한 5녀와 1남(사도세자), 모두 여섯 자식을 두었다.

     

    1735년 사도세자의 출생 때 영조는 그녀의 곁을 직접 지키고 있었다 한다.

    이덕일에 의하면 영조는 그에게서 어머니 숙빈 최씨의 그림자를 읽곤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영조의 총애를 받던 화평옹주와, 영빈을 닮아 미색이었다는 화협옹주는 병을 얻어 숨졌다.

     

     고명아들인 셋째 사도세자는 애초에 아버지 영조와 사이가 멀었던 데다, 노론 벽파 신료들과 친동생인 화완옹주, 영조의 후궁이던 문숙의까지 나서서 죽음으로 몰아갔으며, 모후인 영빈까지 단죄를 간하자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었다.

     

    막내딸 화완옹주만이 참척(慘慽)하지 않고 천수(天壽)를 누리었으나, 젊은 나이에 어린 딸과 남편을 잃었으며, 말년에는 정조의 즉위와 함께 유배에 처해져 정처(鄭妻)로 격하되기도 했다.

    [편집] 사후

    자식들과 손주들(의소세손, 화완의 딸 등)의 죽음을 지켜보던 그녀는 1764년 음력 7월 26일, 사도세자가 죽은 지 2년 후 사망하였다. 영조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영빈의 장례를 후궁 제일의 것으로 하였고, 의열(義烈)의 시호를 내렸다. 뒷날, 고종 대에 이르러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자 묘(墓)가 원(園)으로 승격되며, 수경원(綏慶園)의 원호를 받았고, 시호 소유(昭裕)가 더해졌다. 칠궁에 올랐다.

     

    그녀의 사당인 선희궁(宣禧宮)은, 그녀가 죽은 1764년에 건립되어 의열묘(義烈廟)라 불리다가 1788년 (정조 12년)에 비로소 선희궁이 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에 해당하는 곳에 있었으나, 1870년 (고종 7년) 위패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가, 1896년 선희궁으로 되돌린 뒤, 1908년 (순종 2년) 다시 육상궁으로 옮기는 등 변동이 잦았다.

     

    현재는 모든 칠궁이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에 존재하고 있다. 신교(新橋)는 신교동 70번지와 청운동 108번지를 이어주는 다리로 선희궁을 만든 후 그 동편에 새로 놓았는데 새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편집]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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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종(효장세자=사도세자의 이복형제=정조의 양아버지)의 어머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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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경궁 풍산홍씨1735(영조 11)~ 1815(순조 15).

    조선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莊祖)의 비(妃) 경의왕후.

     

    본관은 풍산.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로 알려져 있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영조 20)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벽파(僻派)와 시파의 당쟁에 휘말려 1762년 남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비운을 겪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 둘째 아들이 왕세손에 책봉되어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宮號)가 혜경으로 올랐다. 환갑을 맞은 해(1795년)에 〈한중록〉을 썼는데, 이 작품은 남편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회고하며, 자서전적인 사소설체(私小說體)로 기록한 것이다. 문장이 섬세하고 아담하여 〈인현왕후전〉과 아울러 궁중문학의 쌍벽으로 평가되고 있다. 1899년(광무 3) 남편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에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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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록』은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其一)은 홍씨의 회갑 때인 정조 19년(1795) 쓴 것이고, 2편(其二)과 3편(其三)은 67∼68세 때인 순조 1∼2년(1801∼1802), 4편(其四)은 71세 때인 순조 5년(1805)에 각각 쓴 것이다.

     

    『한중록』은 정조의 생존 때 쓴 1편과 정조의 사후에 쓴 2~4편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1편은 주로 사도세자와 자신의 친정이 사이가 좋았음을 묘사한 뒤 “불행히 임계년(영조 28~29년)에 병환 증세가 계셨다”고만 언급했을 뿐 세자의 정신병이 비극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하지 못했다.

    사도세자 사당 전남 무안군 운남면 동암마을에 있는 사도세자 사당. 정조 때 마을 사람들 꿈에 사도세자가 여러 차례 나타나 이 마을에 살겠다고 말한 것을 계기 삼아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사진가 권태균
    반면 손자인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쓴 2~4편에서는 사도세자의 정신병과 비행을 적극적으로 거론했다.

     

    예를 들면 “외인(外人)이 모년사(某年事: 사도세자 사건)로 ‘여차여피(如此如彼)하다’ 하는 것은 다 맹랑무계한 이야기요, 이 기록을 보면 모년 시종(始終)을 소연(昭然)히 알 것이요”라며 『한중록』만이 사건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저 이 일로 영묘(英廟: 영조)를 원망하며, 경모궁(景慕宮: 사도세자)이 병환이 아니시라 하며, 신하를 죄 있다 하여서는 비단 본사(本事)의 실상을 잃을 뿐”이라고 말했다. 세자의 병이 비극의 주된 요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죄 있는 신하’에 친정 아버지 풍양홍씨 홍봉한이 포함된 사실을 알아야 『한중록』의 집필 의도도 알게 된다. 『한중록』은 정조의 즉위와 동시에 사도세자 사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몰락한 풍산홍씨 친정을 복권시키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쓴 자기변명서다. 『한중록』의 사료적 가치를 『영조실록』을 비롯한 다른 여러 사료와 비교 검토한 후 제한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도세자 사건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당파 구조를 상수(常數)로 놓고, 나머지 요인을 변수(變數)로 대입해 분석해야 한다.

     

    그 원인(遠因)은 노론과 영조가 관련된 경종 독살설이고, 근인(近因)은 영조 31년(1755)의 나주벽서사건 및 토역경과사건이다. 또한 영조가 재위 35년(1759) 예순여섯의 나이로 열다섯의 정순왕후와 재혼한 것도 주요 원인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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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순왕후 경주김씨  1745(영조 21)~사도세자-정조- 1805(순조 5).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계비(繼妃).

     

    경주김씨(慶州金氏)로, 아버지는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漢耉)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貞聖王后) 달성서씨(徐氏)가 죽은 뒤, 1759년(영조 35) 여 영조 나이 66세에 14살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52살 차이)되었다. 이때 사도세자 나이는 24세였음

     

    1772년 예순(睿順)·명선(明宣) 등의 존호를 받았다. 소생은 없었고, 정빈 이씨(李氏)의 소생인 사도세자와 사이가 나빴다. 나경언(羅景彦)이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세자의 비행을 상소하자,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폐위시키고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했다. 그후로도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를 미워하고, 그 반대파인 벽파(僻派)를 옹호했다.

     

    정조가 죽고 나이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공서파(攻西派)와 결탁하여 천주교 금압령을 내려 신서파(信西派)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능은 원릉(元陵)이며 시호는 정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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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빈 이씨(靖嬪 李氏, 1693년?~1721년)는

     조선 제 21대 왕 영조(英祖)의 빈으로, 진종(효장세자=사도세자의 이복형제=정조의 양아버지)의 어머니이다.

    [편집] 생애

    이준철의 딸로 동궁전 나인이었고, 영조가 아직 연잉군이었을 적에 그의 첩이 되었다. 1719년, 영조의 장남인 경의군(敬義君, 훗날의 진종)을 낳았다. 이후,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세자궁에 속한 내명부 종5품 소훈(昭訓)이 되었으나 1721년 28살의 나이로 급작스레 훙서하였다.

     

    1722년 환관 장세상이 궁녀들과 공모해 이소훈을 독살하였다는 발고가 있었고 이 사건은 신임사화로 번지게 된다.

    1174년 영조가 왕으로 즉위하자 내명부 정 4품 소원(昭媛)에 추증되었으며, 1725년에 경의군이 세자가 되자 정빈(靖嬪)의 봉호를 받았다.

     

    이후 정조가 즉위함에 따라 법적 부친인 효장세자가 진종대왕(眞宗大王)으로 추존되자, 온희(溫僖)의 시호와 수길원(綏吉園)의 원호, 연호궁(延祜宮)의 궁호가 추상되었다. 연호궁은 칠궁의 하나이다.

    [편집]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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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자신의 친정과 관련 없는 대목에서는 뛰어난 직관으로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사도세자와 경종의 만남을 서술한 대목이다. 경종은 사도세자가 태어나기 11년 전에 사망했으므로 직접 만날 수는 없었다.

     

    사도세자는 영조 11년(1735) 1월 21일 영빈(暎嬪) 전의이씨에게서 태어나는데 『영조실록』은 “이때 나라에 오랫동안 저사(儲嗣: 왕의 후계자)가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다가 온 나라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 45년(1719) 정빈(靖嬪) 이씨가 낳은 효장세자(=진종 추존)가 영조 4년(1728) 세상을 떠난 후 만 41세 때 다시 아들을 본 것이다. 늦둥이는 이듬해 3월 만 1세의 어린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영조실록』 13년(1737) 2월조는 “세자의 나이 세 살인데 행동거지가 의연했으며…『효경(孝經)』을 펴고 문왕(文王)이란 글자를 낭랑하게 송독(誦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최초 일인즉 섧고 애달픈 것이 하나는 어리신 아기(사도세자)를 저승전(儲承殿)에 멀리 두심이요, 둘은 괴이한 내인(內人) 들여오신 연고”라고 한탄했다.

     

    저승전은 경종의 부인 선의왕후 함종어씨(어유구의 딸)가 살던 전각이었다. 연잉군(=영조) 대신 양자를 들여 경종의 후사로 삼으려던 어씨는 경종 급서 후 쓸쓸히 지내다가 영조 6년(1730) 만 2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혜경궁 홍씨가 말하는 ‘괴이한 내인’이란 경종과 왕비 어씨를 모시던 궁녀들을 뜻한다.

    “어대비 국휼 삼 년 후 어대비 부리시던 내인들이 다 밖으로 나갔더니… 어찌 하오신 성의(聖意)신지 경묘(景廟: 경종)와 어대비전 내인 나간 것을 최 상궁 이하로 다 불러들여 원자궁(元子宮) 내인을 만드시니 처소 내인들 모양이 경묘(景廟) 계신 듯 싶을 것이요.(『한중록』)”

    경종과 어씨를 모셨던 궁녀들이 어린 사도세자를 모신 것이 사도세자 비극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사도세자가 반(反)노론의 정견을 갖게 된 계기를 설명하는 셈이다.

     

    그러나 어린 사도세자를 경종 때의 사건으로 끌어들인 것은 경종의 궁녀들만이 아니었다. 영조도 마찬가지였다.

     

    재위 15년(1739) 1월 영조는 느닷없이 승정원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사도세자가 만 4세 때인 경종의 양아들로 삼아 선위(禪位)하겠다고 선언했다.

    “황형(皇兄: 경종)의 후사를 시켜 우리 집을 삼가 지키게 하는 것이 내 본심인데, 열조(列祖)께서 도우시어 다행히 원량(元良: 세자)이 이제는 다섯 살에 차서 이미 주창(主<9B2F>: 후사)이 있다
    . 아! 효장(孝章)세자가 살아 있다면 어찌 오늘까지 기다리겠는가?(『영조실록』 15년 1월 11일)”

    만 4세 아이에게 선위하겠다는 선언이 영조의 본심이 아니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세자는 석고대죄해야 했고 영의정 이광좌(李光佐)를 필두로 백관도 전(殿)에서 내려가 관(冠)을 벗고 머리를 땅에 두드리며 명(命)의 환수를 요청해야 했다.

     

    그제야 영조는 “위로 자성(慈聖: 대비)을 근심시키고 아래로 원량(元良: 세자)을 괴롭힌다”는 이유로 명을 거두었다.

     

    영조는 “삼종(三宗)의 혈맥은 황형(경종)과 나뿐이었다”며 자신의 즉위가 순리였다고 강조했으나 경종 편에 섰던 소론 강경파를 탄압했다.

     

    말로는 경종과 한 몸이었음을 강조하면서도 행동으로는 경종의 충신들을 사형시키는 혼란 속에 어린 사도세자까지 경종의 양자로 삼아 선위하겠다고 끌어들인 인물이 영조였다
    .

    영조는 세자를 만 9세 때 동갑내기 혜경궁 홍씨와 혼인시켰는데 부친 풍양홍씨 홍봉한(洪鳳漢)은 그때 매번 과거에 떨어지던 낙방거사였다. 음보(蔭補)로 능참봉이 되었던 그는 자신의 딸이 세자빈이 된 지 9개월 만인 영조 20년(1744) 10월 과거에 급제했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사도세자가 “장인(丈人)이 과거하시다”면서 좋아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정성왕후 서씨(자식없음)께서는… 노론을 위하시기를 친척같이 하시기에 우리 집에 가례(嘉禮)한 일을 심히 흔희(欣喜)하시다가 (부친이) 대천(大闡: 과거급제)하신 일을 진실로 기꺼하셔서 안수(眼水: 눈물)까지 머금으시니”라고 덧붙였다. 사돈 홍봉한이 노론이기 때문에 가례도, 급제도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론이기 때문에 풍양홍씨 홍봉한은 소론의 견해를 갖게 된 사위와 척을 지게 된다.

     

    세자가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열다섯 살 때인 영조 25년(1749)이었다. 그해 1월 22일 영조는 밤에 승정원에 봉서(封書)를 내렸다. 첫머리에 ‘중옹(仲雍)’ 등의 글자가 있고 하단에는 ‘을유 등록(乙酉謄錄)’이란 구절이 있었다.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둘째 아들 중옹은 막내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 형인 태백(泰白)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도망친 인물이다. 을유년은 숙종이 세자에게 선위하겠다고 소동을 피운 재위 31년(1705)을 뜻한다.

    내가 감히 삼종 혈맥의 하교를 어기지 못해서 비록 이 자리에 있었지만 남면(南面: 임금의 자리)을 즐겨 하지 않은 마음은 25년이 하루 같아서 날마다 원량(元良)이 나이 들기만 기다렸는데 이제 다행히 열다섯 살이 되었다.

     

    오늘 이 거조는 하나는 저승에 가 황형(皇兄: 경종)의 얼굴을 뵙고자 함이요, 하나는 남면을 즐겨 하지 않는 마음을 성취하고자 함이다.(『영조실록』 25년 1월 22일)”

    이튿날 비가 몹시 내리는 가운데 소동이 벌어졌다. 세자는 백관들과 빗줄기 속에서 울면서 명의 환수를 요청했다.

     

    영조는 한참 후에 “대리청정(代理聽政)은 어떻겠는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린 세자로 하여금 막연히 국사(國事)를 모르게 했다가 뒷날 만약 노론과 소론에 의해 그릇된다면 내가 비록 알더라도 어찌 능히 살아와서 깨우쳐 줄 수 있겠는가? 오늘 이 거조는 뒷날에 반드시 효험이 없지 않을 것이다.(『영조실록』 25년 1월 23일)”

    그해 1월 27일 영조는 세자의 대리청정을 태묘(太廟: 종묘)에 고하고 팔도에 전교를 반포했다. 영조는 숙종이 경종에게 대리청정시킨 것을 언급하면서

     

    “30년 동안 이 자리를 벗어나려 고심했으나 저궁(儲宮: 세자)이 울면서 간곡히 만류해 대리청정으로 양보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사도세자는 열다섯의 나이에 정국의 한복판에 섰다

     

    대리청정 덫에 걸린 세자의 뜨거운 가슴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49호 | 20100116 입력
     
    세자 대리청정은 제왕수업이란 점에서 바람직한 일이지만 2인자로서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사도세자는 즉위 때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무인 기질의 세자는 속내를 감추고 있기에는 너무 가슴이 뜨거웠다. 세자는 섣불리 노론에 손을 댔노론은 세자 제거를 당론으로 정했다. 영조가 여기에 동조한 것이 비극의 본질이었다.
     
    사도세자 영정 사도세자는 반(反) 노론의 정견을 표출하다가 영조와 노론의 합작에 의해 살해되었다. 우승우(한국화가)
    절반의 성공 영조⑧ 사도세자(下)

    영조는 재위 25년(1749) 2월 16일 창경궁 환경전(歡慶殿)에 나가 ‘오늘은 세자가 처음 정사를 보는 날’이라며 “품의하여 결정할 일이 있으면 세자에게 품의하라. 나는 앉아서 지켜보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사도세자의 정계 데뷔날이었다.

     

    노론 영의정 청풍김씨 김재로가 북방의 성진(城津) 방영(防營)을 다시 길주(吉州)에 소속시키자는 함경감사의 청을 아뢰었다. 탕평파 소론 좌의정 풍양조씨 조현명(趙顯命)도 동의하자 세자는 ‘방영을 다시 길주에 소속시켜도 성진에 군졸이 남아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렇다’는 대답에 “그렇다면 방영을 길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영조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네 말이 비록 옳지만 당초 방영을 성진으로 옮긴 것은 내가 한 일인데 길주로 다시 옮기는 것은 경솔하지 않느냐? 마땅히 대신에게 먼저 물어보고 또 내게도 품의한 후에 결정하는 것이 옳다.”(『영조실록』 25년 2월 16일)
     
    한중록(恨中錄) 사도세자의 빈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한 많은 삶에 대해 쓴 회고록. 사진가 권태균
     
     
     
     
     
     
     
     
     
     
     
     
     
     
    국사를 신중하게 처리하라는 주문이었다. 같은 해 4월에는 세자가 대신들에게 “민간의 질고(疾苦)에 대해 물어보았다”는 보고를 듣고는 “좋도다. 질문이여!”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세자가 집권 노론의 당익(黨益)에 손을 대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대리청정 초기 사간원 정언 이윤욱(李允郁)이 과거에 급제한 조진도(趙進道)에 대한 삭과(削科:과거 급제를 취소함)를 요구했다. 그 조부 한양조씨 조덕린(趙德隣)이 노론 대신 안동김씨 김창집 등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귀양을 가는 도중 사망했다는 이유였다. 세자가 삭과를 거부하자 노론은 영조에게 직접 요청해 삭과시켰다. 세자가 노론과 다른 정견을 갖고 있음이 표출된 사건이었다.

    성락훈(成樂熏)은 『한국당쟁사』에서 노론 영수 청풍김씨 김상로(金尙魯)가 영조에게 ‘동궁이 선왕(경종) 때의 일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있다’고 보고하자 영조가 불러 꾸짖었는데, 세자가 “황숙(皇叔·경종)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라고 항의하자 못마땅해 했다고 전한다. 영조는 노론 당파성이 강하면서도 공정한 군주인 것처럼 평가받고 싶어했다.

     

    영조는 재위 28년(1752) 경종 4년(1724) 사망한 소론 영수 전주최씨 최석항(崔錫恒)의 관직을 복직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 부덕한 내가 임어한 지 지금 거의 30년이나 되었는데, 날마다 고심한 것은 조제(調劑:당론 조절) 두 글자였다. 아! 내가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여러 신하들 중에 살아남은 자가 드물 것이다…. 아! 나라의 삼척(三尺:법)은 당인들끼리 보복하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 일시에 보복하면 당인은 비록 통쾌하겠으나 오호라! 보복이란 예부터 돌고 도는 것이니, 법을 만든 자가 도리어 그 법에 걸리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영조실록』28년 11월 2일)

    그러나 영조는 재위 31년(1755)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사건을 정치보복의 기회로 이용해 무려 500여 명의 소론 강경파(峻少)를 사형시켰다. 이때 사도세자가 온건론을 주창하면서 위험이 가중되었다. 영조는 경종 때 자신을 보호했던 소론온건파(緩少) 경주이씨 이광좌(李光佐)의 관작까지 삭탈했는데, 이는 살아남을 소론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광좌의 조카인 판중추부사 이종성(李宗城)이 과거 이광좌에 대해 “친척으로 따지면 상복을 입는 관계지만 의리로 따지면 사표(師表)와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 인책할 정도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

    세자는 ‘경(卿)이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성상과 내가 환히 아는 일인데 이처럼 스스로 자책하는가’라면서 달랬으나 영조는 노론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종성의 관작을 삭탈했다.

     

    이종성은 영조 31년 5월 1일 시민당에서 세자를 만나 “방금 새로 큰 옥사를 겪어 뒷수습을 잘하기가 어려우니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대조(大朝:영조)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본받으셔서 끝없는 아름다움을 도모하소서”라고 당부했다.

    세자가 두 사건 관련자의 사형을 거부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세자가 위태로워졌다. 세자는 유배된 파평윤씨 윤광찬, 전효증, 전효순 등을 국문해 죽이자는 대간의 청을 “따르지 않겠다(不從)”고 거절했고, 당대의 명필 전주이씨 이광사(李匡師)를 죽이자는 청도 거절했다.

     

    두 사건 이듬해인 영조 32년(1756) 1월 관학(館學) 유생 유한사(兪漢師) 등이 안동김씨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의 정려(旌閭)를 요청한 것도 거부했다. 세자의 이런 정견 표출로 노론은 물론 부왕과도 사이가 불편해졌다.

     

    영조는 재위 33년(1757) 11월 8일 좌의정 청풍김씨 김상로(金尙魯)와 우의정 평산신씨 신만(申晩)에게, “동궁이 7월 이후로는 진현한 일이 없다”면서 세자를 비난하고 나섰다. 『영조실록』은 이때 김상로가 손으로 땅을 치면서, “신 등은 궐 밖에 있어서 진실로 이런 줄을 몰랐습니다. 신 등이 성상 앞에 있을 때는 말을 가리지 않고 다했으나 동궁에게는 감히 말을 다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통곡했다고 전한다.

    사도세자의 문집인 『릉허관만고(凌虛關漫稿)』에는 세자가 지은 ‘스스로 경계하는 사(自警辭)’가 실려 있는데, “기강을 세우니 상벌이 명확하네, 상벌이 명확하니 나라가 다스려지네, 나라가 다스려지니 백성이 편안하네, 대공(大公)이 바르니 사사로움이 없네(紀綱樹兮明賞罰。 賞罰明兮國治 。 治國家兮百姓安。 大公正兮無私)”라는 내용이다. 세자의 대공(大公)과 노론의 당익(黨益)이 충돌했다.

    수세에 몰린 세자를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만든 것이 영조의 재혼이었다.
    영조는 재위 35년(1759) 5월 정성왕후 달성서씨가 사망한 지 만 2년이 지났는데 영의정 연안이씨 이천보가 계비의 책봉을 청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시킬 정도로 재혼에 집착했다.

     

    영조는 재위 35년(1759) 6월 예순여섯의 나이로 사도세자보다도 열 살이나 어린 열다섯 정순왕후와 재혼했다. 정순왕후의 부친 경주김씨 김한구(金漢耉)와 아들 김귀주(金龜柱)는 풍산홍씨 홍봉한처럼 낙방거사였으나 국혼(國婚)을 계기로 벼슬길에 나서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다. 혜경궁 풍산홍씨 가문과 정순왕후 경주김씨 가문은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지만 세자 제거에는 뜻을 같이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세자가 주정뱅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런 소문 속의 세자가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영조 36년(1760)의 온양의 온궁(溫宮) 행차였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전배(前陪)’도 없고 ‘순령수’도 없는 쓸쓸한 행렬이라고 말했지만 호위병력만 도합 520명이었다는 점에서 거짓이었다. 세자는 배 위에서 궁관 이수봉(李壽鳳)과 ‘임금이 배라면 백성은 물이다’라는 설을 강론했고, “길가의 부로(父老)들을 만나 질고를 물어보고 조세와 부역을 감해주라고 명했으므로 일로(一路)가 크게 기뻐했다.”(「어제장헌대왕지문」)

    호위 군사의 말이 콩밭을 짓밟자 밭 주인에게 후하게 보상하고 군사를 처벌했다. 세자의 실제 모습은 소문과는 달리 성군의 모습이었다. 그러자 노론의 남양홍씨 홍계희(洪啓禧) 등이 영조 38년(1762) 5월 22일 승부수를 던진 것이 나경언(羅景彦)을 시켜 고변한 것이다. 『영조실록』은 나경언에 대해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꾀어냈다”고 전하고 있다. 『어제장헌대왕지문』은 ‘대궐의 하인으로 있던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조 즉위년(1776) 8월 영남 유생 이응원(李應元)이 “저군(儲君:세자)을 형조에 정소(呈訴:고소)한 것은 천하 만고에 나라와 백성이 있어온 후로는 듣지 못하던 일”이라고 상소한 것처럼 일개 상민(常民)이 대리청정하는 세자를 고변한 희한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형조참의 한산이씨 이해중(李海重)의 보고를 받은 영의정 풍산홍씨 홍봉한은 “청대(請對)하여 계품하지 않을 수 없다”고 영조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했고, 이해중은 적군이라도 쳐들어온 듯 세 차례나 급히 청대했다. 경기감사 남양홍씨 홍계희는 호위(護衛) 강화를 요청해 도성과 대궐의 문을 닫게 했다. 잘 짜인 각본이었다. 사도세자는 고변 이후 매일 시민당 뜰에 거적을 깔고 대죄했으나 장인인 영의정 홍봉한이 이 사실을 영조에게 보고한 것은 대죄 7일째인 5월 29일이었다. 영조는 “나는 그가 대명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답하면서도 늦은 보고를 질책하지도 않았다.

    영조는 윤5월 13일 이십일째 대죄하고 있던 세자를 불러 자결을 명했는데 세자궁 관원들의 제지로 실패하자 뒤주 속에 가두었다
    . 세자는 음력 윤5월 중순의 뙤약볕 아래에서 여드레 동안 신음하다가 죽었지만, 그동안 영조와 노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적으로 생활했다.

     

    세자가 죽은 다음 달 소론 영수 풍양조씨 조재호(趙載浩)가 “한쪽 사람들(一邊人:노론)이 모두 소조(小朝:세자)에게 불충하였으나 나는 동궁을 보호하고 있다”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했다. 이 말이야말로 사도세자 사건의 본질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렇게 죽은 사도세자에 대한 확인 사살이 정신병자로 모는 것이었고, 이런 기도는 최근까지도 성공을 거두었다.

     

     

    열다섯 살 계비 정순왕후 경주김씨가 왕실 ‘불행의 씨앗’ 될 줄이야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50호 | 20100124 입력
     
    왕조국가나 대통령제 국가의 큰 문제는 외척이나 측근의 발호 가능성이었다. 영조는 말로는 외척의 전횡을 비판했으나 행동으로는 이들을 정국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또 말로는 탕평책을 주창했지만 행동으로는 소론을 대거 쫓아내 탕평책을 붕괴시켰다.

     

    말과 행동이 달랐던 영조의 이중적 정치 행보는 고스란히 국가적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홍봉한 초상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던 혜경궁의 부친 홍봉한은 세자 사후에 동정론으로 돌아서서 노론 벽파의 비판을 받았다.
    절반의 성공 영조⑨ 두 외척의 대립

     
    소론의 정견을 갖고 있던 사도세자가 살해되고 소론 영수 풍양조씨 조재호(趙載浩)가 그를 보호한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한 후 탕평책은 재만 남고 조정은 노론 일색으로 채워졌다.

     

    영조 48년(1772) 3월 이조판서 동래정씨 정존겸(鄭存謙)과 이조참의 연안이씨 이명식(李命植)이 성균관 대사성 후보 세 명을 모두 노론 청명당(淸名黨)으로 주의(注擬: 후보로 의망함)한 사건은 노론 일당의 정치지형이 낳은 부산물이었다.

    대사성 후보로 주의된 풍양조씨 조정(趙晸)·청풍김씨 김종수(金鍾秀)·달성서씨 서명천(徐命天)은 모두 후보에 처음 오른 신통(新通)인데다 셋 모두 일망(一望: 1위 후보자)으로 올려졌다
    . 대개 한 명을 일망으로, 한 명을 신통으로 올리는 것이 관례였다. 더 큰 문제는 셋 모두 노론 청명당(淸名黨) 소속이란 점이었다.

     

    청명당은 노론 연안이씨 이천보(李天輔), 기계유씨 유척기(兪拓基) 등이 만든 것으로 사림정치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는 소론이 참여하는 탕평책에 반대하고 노론 일당이 권력을 독점해야 한다는 속셈에 불과했다. 세 후보자를 모두 자당(自黨) 소속으로 주의한 것은 사실상 국왕의 인사권을 무력화시킨 것이었다.


     
    이천보 초상 이천보가 만든 노론 청명당은 소론을 배제하고 노론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청명이라고 생각했다.
    영조는 이조판서와 참의는 물론 배후의 영의정 청풍김씨 김치인(金致仁)까지 유배 보내 청명당을 해체시켰다. 영조는 약원(藥院)에서 올리는 탕제(湯劑)를 거부하다가 사태 와중에 병조판서로 임명한 남인 평강채씨 채제공(蔡濟恭)이 올리자 “지금 사람들이 노인 청풍김씨 김치인에게 붙좇고 있는데, 경의 마음은 그렇지 않으니 내가 마시겠다”며 마셨다. 채제공은 조정에 남은 거의 유일한 남인이었다. 탕평책을 붕괴시키고 노론 일당 전제 체제를 만든 결과 국왕의 인사권까지 위협받게 된 것이 노론 청명당 사건이었다.

    사도세자 사후 조정은 크게 두 세력으로 재편되었다.

     

    세자의 죽음을 동정하게 된 풍양홍씨 홍봉한 지지의 부홍파(扶洪派:시파)홍봉한을 공격하는 공홍파(攻洪派 : 벽파)가 그것이다.

     

    노론 벽파인 공홍파는 청명당과 정순왕후의 경주김씨 친정이 주요한 두 축이었다
    .

     

    예순여섯의 영조는 재위 35년(1759) 6월 22일 오시(午時: 11~1시)에 자신보다 서른 살이나 아래인 김한구(金漢耉)의 열다섯짜리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아들과 손자까지 있는 영조가 왜 쉰한 살이나 어린 소녀에게 새 장가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소녀는 3년 후 영조의 아들(사도세자)을 죽이는 데 가담하고, 그후에도 손자(은언군)와 손자며느리(송씨)를 비롯해 수많은 남인들과 천주교도들을 학살하게 된다.
     ............................................................................................................................
    은언군 1755(영조 31)~ 1801(순조 1).

     

    이름은 인(?). 사도세자의 서자로 어머니는 숙빈임씨(肅嬪林氏)이다.

    10세에 은언군에 봉군되고, 13세에 진천송씨 송낙휴(宋樂休)의 딸과 혼인했다. 1771년(영조 47) 외람되게 구종·별배를 많이 거느리고 다닌다는 이유로 은신군(恩信君) 진(?)과 함께 관직에 기용되지 못한다는 처벌을 받고, 이어 시전(市廛) 상인들에게 진 빚을 갚지 않았다 하여 은신군과 함께 충청도 직산(稷山)에 유배되었다. 이어 제주도 대정(大靜)으로 옮겨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774년 풀려났다.

     

    1776년 영조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되고, 이듬해 흥록대부(興祿大夫)가 되었다. 당시 실권자이던 풍산홍씨 홍국영(洪國榮)은 누이동생을 원빈(元嬪)으로 들였으나 1780년에 죽자, 은언군의 맏아들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뒤에 常溪君으로 개칭)이라 하고 왕위를 잇게 하려 했다. 그러나 담은 홍국영과 틀어져 오히려 모반죄로 몰려 유폐되고, 1786년 독살되었다.

     

    이 일로 은언군도 정조의 명에 따라 강화도로 옮겨져 살게 되었다. 1789년 강화도에서 도망쳐 나왔으나 붙잡혀 다시 강화도에 안치되었다. 그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해 정순왕후(貞純王后) 경주김씨가 수렴청정하게 되자, 벽파 세력에 의해 우선적으로 제거될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처 송씨와 담의 처인 며느리 신씨(申氏)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로부터 영세를 받은 천주교도라 하여 붙잡혀 죽고, 그도 사사되었다.

    1849년 손자 원범(元範)이 철종으로 즉위하자 신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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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66세의 영조가 왕비로 맞아들인 15세의 정순왕후는 조선 후기 정국에 큰 파란을 몰고왔다. 사진가 권태균
     낙방거사였던 경주김씨 김한구는 영조의 사돈이 된 그해 12월, 일약 종2품 금위대장(禁衛大將)에 오르고 아들 김귀주도 여동생 덕분에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나와 국왕의 처남이라는 지위를 배경으로 권력을 다투었다.

     

    풍산홍씨 , 경주김씨 두 외척 가문은 사도세자 제거에는 뜻을 같이했지만 세자가 사라진 빈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한 치의 양보 없이 치열하게 다투었다.

    청명당 사건으로 공홍파의 한 축이 무너지자 조급함을 느낀 경주김씨 김귀주가
    영조 48년(1772) 7월 풍산홍씨 홍봉한을 강력히 공격하며 일으킨 것이 ‘나삼(羅蔘)·송다(松茶) 사건’이었다.

    “연전에 재상 홍봉한이 외방(外方: 지방)에서 구매하던 삼(蔘)을 경공(京貢: 서울 공인들이 납품하는 것)으로 바꾸었는데 공인배(貢人輩)들이 실처럼 가는 미삼(尾蔘)을 모아 풀로 붙여 삼이란 이름으로 내국(內局: 내의원)에 바쳤습니다. 혹 내국에서 퇴짜를 놓으려고 하면 홍봉한이 큰 소리로 ‘이는 나를 죽이려는 것이다’라고 꾸짖어 위로는 제거(提擧: 내의원 책임자)에서부터 아래로는 의관까지 마음으로는 잘못인 줄 알면서도 입으로 감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영조실록』 48년 7월 21일).”

    홍봉한이 지방의 인삼 구매선을 서울의 공인들로 바꾸면서 이들과 짜고 싸구려 인삼을 납품했다는 비난이었다.  경주김씨 김귀주는 영조가 6년 전인 재위 42년(1766) 병석에 누웠을 때 자신의 부친 김한구는 좋은 나삼(羅蔘)을 쓰려 했으나 풍양홍씨 홍봉한이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고 주장했다. 3년 전(영조 45년)에 사망한 부친 김한구가 생전에 자신에게 말했다는 것이 근거였다. 홍봉한이 ‘나삼은 조달하기 어렵다’고 말하자 부친(김한구)이 ‘일단 약원(藥院: 내의원)에 있는 나삼을 쓰면서 각도에 나삼을 바치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으나, 홍봉한이 ‘대감은 척리(戚里: 외척)로서 어찌 약원의 일에 간섭을 하시오?’라고 발끈 성을 냈다는 것이었다. 김귀주는 김한구가 동삼(童蔘) 한 뿌리를 구해 달여 올리자 영조의 병이 나아서 “부자가 서로 마주하여 춤을 출 듯이 기뻐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영조의 다리가 아파 고생할 때 전 참의 남양홍씨 홍성(洪晟)의 노부(老父)가 송다(松茶)를 마시고 효험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풍산홍씨 홍봉한에게 송다를 올리라고 권했으나 모른 체했다고 주장했다.

     

    경주김씨 김귀주는 김한구가 이 일을 말할 때면 “가슴을 어루만지고 눈물을 참으려 했으나 감추지 못했다”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 영조가 아플 때 김귀주의 부친 김한구는 정성을 다한 충신이지만 홍봉한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두 외척 가문이 정국의 중심에 서자 나삼(羅蔘)·미삼(尾蔘) 같은 저급한 이야기들이 정쟁의 소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김귀주가 홍봉한을 공격한 진짜 이유는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 김귀주는 “아! 임오년의 일(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바로 성상께서 종사를 위해서 하신 대처분으로 성상의 마음으로 결단하시어 해와 별처럼 빛나니, 신하로 있는 자 그 누가 흠앙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조의 뜻을 받들어 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했던 홍봉한이 세월이 조금 흐르자 그 뜻을 바꾸어 “(사도세자를) 추숭(追崇)하여 종묘에 들이자는 의논을 만들었다”고 공격했다. 김귀주는 “신하 된 자에게 이런 범죄가 있으면 하루라도 천지 사이에서 숨을 쉴 수가 없어야 한다”면서 홍봉한을 사형시켜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경주김씨 김귀주는 홍봉한이 흉적(凶賊)이란 사실을 “전하께서는 막막하게 깨닫지 못하신다”고 영조까지 비난했다. 그에 앞서 김귀주의 사촌동생인 홍문관 수찬 김관주가 홍봉한을 극렬하게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정순왕후 경주김씨 친정의 조직적인 공세였다. 이날 비가 퍼붓고 벼락·천둥이 쳤는데 영조는 김귀주와 김관주의 상소를 모두 돌려주라고 명한 후 “내가 이 두 상소로 기관(機關)을 삼지 않는다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고 말했다. ‘기관’ 운운은 사주당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영조는 우산도 없이 문소전(文昭殿)으로 가서 선왕들에게 울부짖었다.

    “선후를 가릴 것 없이 척신(戚臣)이 함께 날뛰어 이처럼 놀랍고 괴이한 일을 저질렀으니, 종국(宗國)이 반드시 위망하게 되었습니다(『영조실록』 48년 7월 21일).”

     

    영조는 “한 근의 나삼으로 기운이 갑자기 좋아졌다는 말이나 송다를 마셨더니 걸음 걷기가 좋아졌다는 말은 한번 웃어야 할 말이다”라면서 창의궁(彰義宮)으로 환어해 경주김씨 김귀주를 사판(仕版)에서 지우라고 명한 후 이렇게 말했다.

    “두 집안은 형세가 양립할 수 없어서 풍산홍씨 집안을 폐하면 달가워할 것이니 어찌 음덕이 되겠는가? 내가 경주김씨 김귀주의 사람됨을 염려했는데 과연 그렇다. 내가 믿는 것은 오직 곤전(坤殿: 정순왕후 경주김씨)과 충자(<51B2>子: 세손)뿐인데, 이런 거조를 당했으니 내전(內殿: 왕비)의 심사가 더욱 어떻겠는가?(『영조실록』 48년 7월 23일)”

    외척의 발호가 걱정되면 태종같이 외척을 숙청하거나 새 장가를 가지 않았어야 될 일이었지만 낙방거사인 외척들을 끌어들인 인물은 영조 자신이었다. 더구나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정순왕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내전의 심사’를 염려한 인물도 영조였다. ‘나삼 사건’은 경주김씨 김귀주의 일방적 패배로 끝났지만 공홍파(벽파)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공세의 초점은 홍봉한이 사도세자에 대한 견해를 바꾸었다는 데 있었다.

    영조 47년(1771) 8월에는 유생 한유(韓鍮)가 풍산홍씨 홍봉한의 머리를 베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중에 ‘홍봉한이 일물을 바쳤다(獻一物)’는 구절이 있었다.

     

    일물(一物) 또는 목기(木器)는 세자가 죽은 뒤주를 뜻하는데 영조는 “상소의 ‘일물’ 두 자는 나도 모르게 뼛속이 서늘해진다”면서 “저가 비록 ‘홍봉한이 바친 물건이라고 말하였으나 이미 바친 후에 이 물건을 쓴 사람은 어찌 내가 아니었던가? 천하 후세에서 장차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영조실록』 47년 8월 7일)”라고 말했다. 뒤주를 바친 인물이 홍봉한이란 사실을 인정한 말이었다.

    탕평책을 붕괴시키고 아들마저 죽인 엽기적 정치 보복이 영조의 업보로 돌아오는 셈이었다. 더구나 세자를 죽인 거대한 정치 세력은 이제 그의 아들 세손(世孫: 정조)에게까지 향하고 있었다.

     

     

    “옥새를 세손에게…” 새 군주의 시대 열리다

    절반의 성공 영조⑩ 마지막 遺詔

    이덕일 | 제151호 | 20100131 입력

     

    지도자가 후세에 기여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 좋은 후계자의 선택이다. 영조는 탕평책을 붕괴시키고 사도세자를 죽임으로써 노론 일당독재 체제를 수립시켰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아들마저 제거하려는 노론의 당론을 거부하고 세손(정조)을 즉위시켰다. 이로써 경종독살설을 비롯해 각종 부정적 사건으로 얼룩졌던 재위 시의 오점 가운데 상당 부분을 씻어낼 수 있었다.
    1.원릉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경주김씨의 능(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2. 정순왕후 생가 효종이 경주김씨 김홍욱에게 내려준 집인데, 김홍욱은 소현세자 부인의 신원을 주장하다 사형당했다(충남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노론은 세손(世孫:정조)을 겨냥했다. 세자의 아들이 즉위할 경우의 후과(後果)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론 벽파는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죄인지자(罪人之子) 불위군왕(不爲君王)’이라는 ‘팔자흉언(八字凶言)’을 조직적으로 유포시켰다.

    그러나 영조와 혜경궁 풍산홍씨가 모두 세손 제거에 반대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자식과 남편을 제거하는 데 가담했던 두 실력자의 이탈은 노론에게 큰 타격이었다. 영조는 사도세자 3년상을 마친 재위 40년(1764)에 세손의 호적을 고(故) 효장세자에게 입적시켰다. 이복(異腹) 백부(伯父)의 아들로 입적시켜 ‘죄인의 아들’이란 허물을 씻어 주려는 일종의 ‘호적 세탁’이었다. 하지만 노론은 여전히 세손 제거에 당력을 기울였다.

    영조 어진(御眞) 영조는 어진 임금을 표방했으나 소론 강경파는 물론 아들의 피까지 손에 묻혀야 했던 비극의 임금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정조는 세손 시절의 일기인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에서 잡거나 놓고, 주거나 빼앗는 것이 전적으로 저 무리들(노론 벽파)에게 달려 있었으니, 내가 두려워 겁을 내고, 의심스럽고 불안해서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존현각일기' 영조 51년 2월 5일)”고 토로했다.

     

    또한 “흉도(凶徒)들이 내 거처를 엿보아 말과 동정(動靜)을 탐지하고 살피지 않는 게 없었기 때문에 옷을 벗고 편안히 잠을 자지도 못했다('존현각일기' 영조 51년 윤10월 5일)”는 토로도 했다.

    세손이 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공포에 떨던 영조 51년(1775) 11월 20일. 영조는 죽기 전에 세손을 자신의 후사로 공포하겠다고 결심했다. 이날 영조는 집경당에 나가 세손을 시좌(侍坐)시키고 대신들을 불렀다. 영조는 “신기(神氣)가 더욱 피곤하니 한 가지 공사도 제대로 처리하기 어렵다”면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어린 세손이 노론·소론·남인·소북을 알겠는가? 국사(國事)를 알겠는가? 조사(朝事)를 알겠는가?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지 알겠는가? 나는 어린 세손에게 그것들을 알게 하고 싶으며, 나는 그것을 보고 싶다.('영조실록' 51년 11월 20일)”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다는 선언이었다. 노론 대신들의 경악감을 모른 체하면서 영조는 계속 말을 이었다.
    “옛날 황형(皇兄:경종)께서 ‘세제(世弟:연잉군)가 가(可)한가? 좌우(左右:신하)가 가한가?’라는 하교를 내리셨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백배나 더하다. ‘전선(傳禪:왕위를 물려줌)’이란 두 자를 하교하고자 하나 어린 세손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우므로 하지 않겠다. 그러나 대리청정은 국조의 고사가 있는데 경 등의 생각은 어떠한가?('영조실록' 51년 11월 20일)”

    경종이 신하들이 아니라 핏줄인 자신을 선택한 것처럼, 자신도 신하들이 아니라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뜻이었다. 이때 영조의 나이 만 여든하나. 당장 오늘밤을 장담할 수 없는 나이였다. 세손이 대리청정하게 되면 영조 유고 시 자동으로 즉위하게 되어 있었으니 노론은 좌시할 수 없었다.

     

    혜경궁의 숙부 좌의정 풍산홍씨 홍인한(洪麟漢)이 노론 벽파의 대표로 나섰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누가 할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없으며, 국사나 조사는 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

     


    이때 세손의 나이 만 스물셋으로 숙종 즉위 때보다 아홉 살이 많았다. 그럼에도 일체의 국사를 알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풍산홍씨 홍인한뿐만 아니라 영돈녕 광산김씨 김양택(金陽澤), 영의정 청주한씨 한익모(韓翼謨), 판부사 이은) 등 모든 대신들이 대리청정을 반대했다. 대신들의 반대에 직면한 영조는 기둥을 두드리며 울었고, “나의 사업을 손자에게 전할 수 없다는 말인가?”라고 한탄했다.

    열흘 후인 11월 30일 영조는 입자(笠子:갓)를 쓰고 집경당에 나가 세손에게 기대어 앉은 채 상참(常參:신하들이 국왕을 알현하고 정사를 논의하는 것)을 받았다. 영조는 “조사니 국사니 하는 것들이 다 하찮은 말이 되었다. 나의 기력이 이와 같으니, 수응(酬應)하기가 더욱 어렵다. 자고로 전례가 있던 일을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례가 있던 일’이란 대리청정이었다. 영조는 대신들에게 자신이 늙고 병들었으니 대리청정을 시키겠다고 호소한 것이지만 노론은 거부했다. 홍인한은 “차라리 도끼에 베어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받들어 행할 수 없습니다”라고까지 반발했다.

    54년 전인 경종 1년(1721) 34세의 젊은 경종에게 세제 대리청정을 주창했던 당파가 82세 노인의 대리청정에 대해선 ‘도끼에 베어져 죽어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

     

    세손은 지금이 자신의 왕위는 물론 목숨까지 걸려 있는 승부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세손은 풍양홍씨 홍인한에게 대리청정을 사양하려 하지만 “문적(文跡:문서로 된 글)이 있어야 상소할 수 있으니 두서너 글자라도 전교를 받아 내가 상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오”라고 타협안을 제시했다. 영조가 자신을 후사로 삼았다는 문헌적 근거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홍인한을 비롯한 노론 대신 누구도 이런 근거를 남기고 싶지 않았기에 거부했다.

     

    영조는 대신들을 물리치고 세손에게 순감군(巡監軍)을 수점(受點)하라고 명했다. 군사권을 주어야 세손이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아가 이비(吏批:문관 임용자 명단)와 병비(兵批:무관 임용자 명단)도 세손이 수점하라고 명했다. 대신들이 세손의 순감군 수점에 격렬하게 반발하자 영조는 임금의 경호부대인 상군(廂軍)과 협련군(挾輦軍)을 불러들였다. 그제야 두려워진 대신들이 한 발 물러섰다.

    '영조실록' 51년 11월 30일조는 “여러 신하들은 다만 순감군만 궐내에서 점하(點下)하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홍인한은 언찰(諺札:한글 편지)로 인하여 임금의 뜻을 알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언찰’이란 세손의 대리청정이 영조의 뜻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혜경궁의 한글 편지였다. 그러나 홍인한은 조카의 언찰을 무시하고 계속 반대의 선봉에 섰다.

    노론 벽파는 13년 전 사도세자를 제거하기 위해 썼던 방법들을 다시 사용했다
    .

     

    화완옹주의 양자 연일(延日)정씨 정후겸(鄭厚謙), 숙의 남평문씨의 오빠 문성국(文聖國), 정순왕후와 그 오라비 경주김씨 김귀주 등이 나서 세손이 몰래 미행(微行)했으며 금주령 중인데도 술을 마셨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세손을 지지하는 세력은 세손궁의 사서(司書) 풍산홍씨 홍국영(洪國榮)과 온양정씨 정민시(鄭民始) 등 소수에 불과했다. 이때 홍국영이 소론 출신의 행 부사직 대구서씨 서명선(徐命善)에게 산홍씨홍인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게 함으로써 전기를 만들었다.

    대구서씨 서명선은 풍산홍씨 홍인한이 ‘동궁은 국사를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저군(儲君:세자)이 알지 못한다면 어떤 사람이 알아야 하겠습니까?”라고 비난하고 영의정 청주한씨 한익모도 내시들이나 할 행위를 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 서명선으로서는 목숨 건 상소였는데, 영조가 서명선을 불러들여 상소를 읽게 한 후 “우는 소리를 들으니 강개함이 마음속에 맺혀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그 위인이 부드럽고 선함은 알고 있었으나 오늘날 이렇게 자기 뜻을 세울 줄은 몰랐으니 어질다 하겠다”고 서명선의 손을 들어주었다.

    노론에서는 부사직 청송심씨 심상운(沈翔雲)을 시켜 세손궁의 궁료들을 갈아치우라는 맞상소를 올렸으나
    영조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재위 51년(1775) 12월 8일 영조는 세손의 대리청정 절목(節目)을 마련해 정식으로 세손 대리청정을 시행했다. 이로써 세손의 대리청정이 공식화되었으나 그해 12월 22일 세손이 “양사(兩司)의 여러 신하들 중 대리청정 조참(朝參)에 참여한 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한 것처럼 아직 노론은 세손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의 병세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영조가 세손에게 군사권을 주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지 알 수 없었다. 세손은 노론 벽파의 동태를 주시하면서 영조를 간호했다. 영조 52년(1776) 3월 3일 영조가 위독해졌다. 세손이 감귤차와 계귤차(桂橘茶)를 올렸으나 효과가 없었고 의관은 맥도(脈度)가 가망이 없어졌다고 진단했다. 세손이 미음을 떠서 올렸으나 영조는 받아먹지 못했다. 드디어 “전교한다. 대보(大寶: 옥새)를 왕세손에게 전하라”는 영조의 마지막 유조(遺詔)가 반포되었다. 영의정 강릉김씨 김상철이 속광(코에 솜을 대어 보는 것)을 청했는데 미동도 없었다.

    드디어 영조시대가 끝난 것이다. 춘추 만 여든둘. 경종독살설 속에 즉위해 끝내 경종독살설을 뛰어넘지 못한 재위 52년이었다. 세손에게 왕위와 함께 노론 일당독재란 무거운 짐도 함께 넘겨준 것이었다.

     

    만 열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소년이 스물네 살의 나이로 새 시대를 향해 첫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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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의 적자(嫡子) 컴플렉스와 가계도

     
     
     '이산'이라고 불린 개혁군주 '정조'
     
     몇년전에 소설가 이인화의 '위대한 제국'에 의해 조명되었다가 다시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조선의 마지막 개혁군주 정조(正祖)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산(?, '헤아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 明視以算之?, 영어로 표현한다면 count나 calculate)이며 자(字)는 형운(亨運)으로 영조(英祖)의 손자이며 진종(眞宗)의 계자(系子)이자 장조(莊祖)의 친자(親子)이다.

     1752년(영조28년) 9월 22일 축시(丑時, 새벽 1시에서 3시)에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원손(元孫)이 되었다. 정조가 태어날 당시 조선왕실은 극심한 남아(男兒) 부족으로 왕손 단절의 사태를 염려하고 있었다. 오늘날 수 백만의 전주 이씨들의 사정을 생각 한다면 약간 의문점이 들기도 할 것이다. 상당히 수적으로 넘쳐나는 이씨(?)들 가운데 아이러니한 일이 되겠지만 북벌론(北伐論)으로 조선 역사상 가장 진취적인 국왕이 될 뻔한(?) 17대 효종(孝宗, 1619~1659)의 유전자를 가지는 후손은 '희소가치를 지니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한 사람의 자손 수로는 보기드문 500년 역사로 수 십만의 후손을 자랑한다는 태종의 왕자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의 비웃음을 받기라도 하듯, 효종은 아들이라고는 현종(顯宗, 1641~1674)만 낳았고 공주들도 상당히 얻은 것 같지만 선원계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외손(外孫)조차 손가락에 꼽을 만큼 귀할 정도이다.
     
     (정조 초상화)
     
     '북벌군주' 효종의 후손들
     
     현종의 외아들인 숙종(肅宗, 1661~1720)이 재위했을 당시 중인(中人) 출신의 희빈 장씨(禧嬪 張氏)가 그토록 목에 힘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가지, 효종의 자손이 '단절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경종과 성수(盛壽)라는 두 왕자를 낳아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천(賤)하다는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淑嬪 崔氏)가 최고위 후궁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도 같았다. 자손이 귀하다못해 낳기만하면 당장 신분의 변화를 줄 정도로 남아에 목이 타는 왕실에 영조와 영수(永壽) 그리고 이름도 없이 조졸(早卒)한 세 왕자를 낳아주어 '후궁의 꽃'인 정1품의 빈(嬪)에 승격된 것이다.

     

    숙종은 세 명의 왕비를 맞이하였는데 첫 왕비가 공주 두 명을 낳고 죽은 것 이외엔 뒤에 들어온 두 명의 정실(正室) 왕비에겐 자녀가 없다. 후궁에게서만 6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아버지보다 오래 산 자녀는 단 두 사람이다. 경종(景宗, 1688~1724)과 영조(英祖, 1694~1776)로 이들 모두 조선 국왕이 되었다.

     숙종이 그다지 탐탁하지 않게 여기던 후계자 경종이 두 번의 결혼을 통해서도 자손이 없자, 결국 주변에선 양자(養子)을 들여 후사를 잇게 하려는 시도가 생기는데 이 문제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 정치적 극한 대립 속에서 고육책(苦肉策)으로 생각해 낸 계략이었다.

     

     바로 노론의 후원을 받는 영조가 후계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당시 권력을 쥔 소론의 숨은 계책이었던 것이었다. 이 비밀스러운 계략의 대강을 살펴보자면, 효종의 자손으로서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영조보다는 효종보다 대통(大統)이 더 우월하다고 여겨지던 소현세자의 후손 중에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종친(宗親)을 데려와 '경종의 후사'로 세우자는 논리였다.

     

     이 비밀스러운 계책에 구체적으로 거론된 인물은 소현세자의 현손(玄孫)이었던 건석(健錫)이라는 인물이었는데, 결국 경종이 친척의 자식보다는 이복아우를 선택함으로서 건석은 훗날 영조의 즉위 후 유배되는 비운을 겪게된다. 정치적 논리에 앞서 경종은 최종 후계자로 효종의 유일한 후손으로 남겨진 이복동생을 선택함으로서 영조의 치세가 시작되게 되었다.

     


     형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된 무수리의 아들 '영조'
     
     영조가 형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제21대 왕(재위 1724~1776)으로 즉위할 당시 효종의 성년 남자 자손은 영조 뿐이었다. 영조는 평생 정실 부인을 두 명 두었는데 그의 조강지처는 1704년(숙종 30년) 10세 때 맞이한 대구 서씨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였다. 유순하고 천성이 후덕했던 이 왕비는 불행히 자식을 낳지 못했다. 결국 영조는 후사를 얻기 위해 왕이 되기 이전부터 여러 측실(側室)을 얻었고, 그 결과 훗날 정빈(靖嬪)에 책봉된 전의이씨(李氏)에게서 1719년(숙종45년) 아들(효장세자)을 얻게 되는데 당시 숙종에겐 유일한 손자였고 또한 영조의 희망이기도 하였다. 당시 후손이 있는 왕자는 왕위계승에 상당히 유리한 인센티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 영조의 희망은 훗날 진종(眞宗, 1719~1728)에 추존되었는데 바로 정조의 양부(養父)이기도 하다. 이름은 행(?, '실 사'변에 '다행 행'자를 쓴다)으로 영조가 즉위하자 왕자로서 경의군(敬義君)에 책봉되고 이어 1725년 세자(世子)가 되어 양주조씨 조문명(趙文命)의 딸(훗날 孝純王后)과 혼인하였으나 만9세로 사망함으로서 효장세자(孝章世子)라 시호되었다. 효장세자의 죽음으로 후계자를 잃은 영조의 비통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1735년(영조11년)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暎嬪 李氏)가 다시 왕자를 낳는데 이가 바로 장조(莊祖, 1735~1762)였다. 장조는 나중에 추존된 묘호이고 처음 시호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이다. 사도세자의 이름은 선('마음 심'변에 '펼 선'을 쓴다)이며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로 영조의 차남에 해당된다. 사도세자가 태어났을 때 영조의 기쁨은 극에 달했다.

     

     왕자의 탄생에 흥분한 영조는 주변의 신하들에게 '세 종통(효종, 현종, 숙종을 말함)의 혈맥이 끊어질 뻔하더니, 이제는 죽어 역대 조상들을 만날 면목이 서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신이 친히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영조 초상화)
     
      2남 12녀의 아버지 영조와 '사도세자' 

     태어난 그 다음 해 바로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후궁의 자식이 곤전(坤殿)의 계자로 입양되어 세자로 책봉되는 사례는 숙종이 경종을 인현왕후의 아들로 들여 임명하는 예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막 태어난 사도세자도 또한 당시 왕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아들로 입양되어 바로 원자(元子)로서 세자로 책봉된 것이다. 워낙 자손이 귀하다보니 후궁의 자식이더라도 바로 세자로 봉해지는 파격적인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영조도 이 사도세자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아들은 얻지 못했다.

     조선 국왕 중 가장 오랜 수를 누렸다는 영조는 여러 후궁을 두어 자녀 수가 2남12녀에 이르나 성년으로 자란 자녀는 극히 적었다. 영조의 후궁으로 제일 먼저 자녀를 낳아준 사람은 진종의 생모인 온희정빈(溫僖靖嬪) 이씨(李氏)로 진종과 옹주 2인을 낳고 일찍 죽었다. 이어서 영조의 후궁으로는 조강지처격으로 대접받은 인물이 바로 사도세자의 생모인 소유영빈(昭裕映嬪) 이씨(李氏)로 1남6녀를 낳았다. 나머지 4명의 옹주는 귀인(貴人, 종1품) 조씨와 폐숙의(廢淑儀, 종2품)의 문씨가 낳았는데 조씨가 낳은 옹주들은 모두 일찍 죽었고 문씨가 낳은 두 옹주는 결혼해서 자손을 두었다. 여담이지만 영조의 12명이나 되는 옹주들 중에서 자식을 낳은 옹주는 단 3명 뿐이었다.

     영조는 후궁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른 얼마 안되는 사례의 전형이었다. 경종은 적어도 3년 이상 중전의 자리에 오른 어머니를 두고 있었지만 영조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어머니가 무척이나 천(賤)한 신분으로 알려진 여성인지라 수 많은 상층부의 사대부들이 은근히 영조의 출생에 대해 비웃고 있었다. 잘 알려진대로 영조의 어머니는 궁중에 정식으로 나인으로 뽑혀 온 여인도 아닌 나인들을 돕기 위한 무수리 출신이라는 점과 평범한 집안출신인 것은 정설인 듯하다.

     영조의 생모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오위 사과(五衛 司果)를 지낸 최효원(崔孝元)과 남양홍씨(南陽洪氏)의 딸로 태어났다. 부친이 정6품의 직위를 얻은 것은 아마도 최씨가 영조를 낳았기 때문에 예우의 차원에서 받은 관직 같으며 최효원의 선대들은 벼슬한 적이 없는 평범한 인물들로 알려져있다. 훗날 영조가 자신의 어머니를 우대하면서 조부에게는 영의정을, 증조부에게는 우의정을, 고조부에게는 우찬성을, 외조부에게 좌찬성을 증직해 줌으로서 자신의 신분적 컴플렉스에서 위안을 얻고자 하였다.

     숙빈 최씨의 선대 중에서 관직을 얻은 사람은 친조모였던 평강장씨(平康張氏)의 부친인 장원(張遠)이란 인물로 '집안의 음직(陰職)'으로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통덕랑(通德郞, 정5품)을 지낸 것이 전부였다. 모두가 평범한 백성으로 살아간 조상들을 가진 영조로서는 쟁쟁한 사대부들의 천국인 조선 사회에서 기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영조가 국왕으로서 사대부들을 누를 수 있는 권리는 아마도 '효종의 유일한 남자 자손'이라는 메리트일 것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왕권의 실추'를 꼽으라면 세조(世祖, 1417~1468)의 단종(端宗, 1441~1457)으로부터의 왕위를 찬탈한 사건일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장자상속(長子相續)'이라는 성리학의 중요한 논리가 여실히 붕괴되는 장면을 사대부들은 두 눈으로 목격하였고, 두 번째로는 성종(成宗, 1457~1494)이 친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9)을 제치고 즉위하면서 두 번째 폭탄을 맞았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적어도 '적자(嫡子)에 의한 왕권의 세습과정'을 무난히 보여주었으나, 마지막 실추의 직격탄을 쏜 것은 바로 선조(宣祖, 1552~1608)의 즉위였다. 명종(明宗, 1534~1567)의 죽음과 함께 조선 왕실은 사대부의 종가(宗家) 세습보다 못한 행태의 가계 계승이 이루어짐으로서 복잡한 정치적 사건들을 야기시켰다.
     
     왕실을 업신여기는 사대부
     
     방계(傍系)중의 한 자손이 들어와 왕실의 대를 잇자 사대부들이 왕실을 보는 눈은 무척 싸늘해졌다. 그 결과, 훗날 선조가 묻히고자 왕릉터를 구할 때 모든 사대부들은 여러 이유를 들면서 더 이상 왕릉(王陵)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선조의 왕릉인 목릉(穆陵)부터 옛 선조들의 왕릉 터에 비집고 들어가 더부살이하는 '왕릉의 군집(群集)'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왕실이 왕릉의 설치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이 상황은 그만큼 사대부들이 왕실을 업신여기기 시작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하였다. 명종 이전의 군주들의 왕릉지는 현직 영의정의 조부 묘라 할지라도 왕릉이 들어설 자리 근방에 있다면 당장 파서 이장(移葬)해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거기다가 다시 선조의 후궁 출신의 차남이였던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이 이어받자 이제는 누구든지 강력한 정치적인 지지만 받으면 군주가 될 수 있다는 묘한 논리가 생겨, 결국 인조(仁祖, 1595~1649)가 즉위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인조는 광해군보다 정통성 차원에선 더 형편없는 상황이었으나 서인들의 열렬한 지지 덕분에 종계(宗系)의 순서도 무시하고 즉위했던 것이었다. 결국 그 '왕실 정통성 부족문제'를 인조는 후궁출신 왕자였던 부친 정원군(定遠君)에게 원종(元宗)이라는 놀라운 묘호(廟號)를 올리면서 자신의 정통성을 간신히 메꾸어 나갔다.

     인조가 서인들의 반정(反正)에 의한 무력(武力) 변동으로 대통을 계승한 이후, 인조의 자손들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게 되지만 다시 인조가 장남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의 자손들을 버리고 자신이 사랑하던 차남인 효종을 사자(嗣子)로 정함으로서 성리학에서 보는 정당성의 확보 싸움이 훗날 상복(喪服)을 입는 문제에서 발생하여 정치판에선 격렬한 예송논쟁(禮訟論爭)까지 펼쳐지게 된다.

     예송의 논쟁 뒷면에는 왕실이 사대부들에게 '자신의 가계(家系)'에 대한 정당성의 입증을 확인받는 차원 문제로 비춰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현종과 숙종은 효종이 숙제로 남긴 '왕권의 정당성 확보'에 예송논쟁의 결과물들로 내놓았던 것이다.

     

     이런 위태로운 정치 상황의 연속 속에서 효종의 후손 군주들은 강력한 사대부 가문들과의 신경전적인 물밑 전투를 벌려가면서 왕권 확립에 심휼을 기울이었는데 어이없게도 남자 자손의 수가 극소수에 이름에 따라 왕손의 탄생에 목마른 갈증에 시달리는 이중고(二重苦)를 겪는 것이었다.
     
     명문가문과의 혼인을 통한 컴플렉스 타개

     영조는 자신의 자녀들은 쟁쟁한 가문과 혼인시키기로 마음먹고 하나같이 노론의 명문가문과 연결을 맺는데 특히 사도세자의 혼인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국혼(國婚)이었다.

     

    먼저 사도세자의 생모인 소유영빈(昭裕映嬪) 이씨(李氏)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보다는 훨씬 나은 가문에서 태어난 후궁이었다. 영빈의 부친인 이유번(李楡蕃)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를 지내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조부는 별제(別提, 정6품)를 지낸 무반(武班)출신이었다. 영빈의 외가는 예천김씨(醴泉金氏)로 외조부가 오위 부호군(五衛 副護軍, 종4품)을 지내어 그나마 반가(班家)의 체면을 지녔던 가문이었다고 한다.

     외아들의 외가마져 그다지 이름 높은 집안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조는 며느리는 훌륭한 가문에서 골라야겠다는 의무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결국 사도세자가 10살 되던 해, 풍산홍씨(豊山洪氏)의 가문에서 세자빈(世子嬪)을 들이게 된다. 당시 생원(生員)이었던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의 딸을 간택하게 되는데 이 집안은 상당히 혈통적으로 무게감을 지니는 노론(老論)의 명문이었다.

     14대 선조가 두 번의 결혼을 통해 얻은 적자녀(嫡子女)는 모두 2인이었는데 바로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1685)와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으로 계비인 인목왕후(仁穆王后)가 낳은 자녀들이다. 광해군이 어린 영창대군을 죽인 후, 선조의 정실부인 자손은 오로지 정명공주의 후손들이었다. 정명공주는 남동생의 죽음 이후 간신히 하가(下稼)하게 되는데 흥미롭게도 풍산홍씨 집안으로 갔다.

     풍산홍씨는 원래 당파적으론 남인(南人)에 속한 가문이었으나 부마가 되어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진 홍주원(洪柱元, 1606~1672)의 집안만은 유일하게 서인(西人)에 분류되는 '흥미로운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홍주원의 외조(外祖)가 그 유명한 연안이씨 집안의 이정구(李廷龜, 1564~1635)인지라 홍주원 집안은 풍산홍씨 중에서 서인에 속하게 된 것이었다. 이정구는 서인계열 핵심가문 중의 하나인 연안이씨(延安李氏)였는데, 특히 이정구의 고조부였던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의 후손들은 대부분 골수 '노론(老論)가문'으로 분류되었다.

     

     성종때 좌리공신이었던 이석형의 자녀는 2남1녀였는데 그중 외동사위가 은진송씨(恩津宋氏) 집안의 송여해(宋汝諧)였으며 송여해의 6세손에서 '노론의 영수'가 된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나왔다.

     

     연안이씨 이석형의 자손들은 사림(士林)이 파당(派黨)으로 나뉠 때 대부분 서인(西人)으로 분류되었고, 훗날 다시 분당 때엔 노론의 핵심가문으로 떠올랐다. 홍주원은 이런 위세 높은 외가(外家) 덕분에 '선조의 부마(영안위)'가 되었고 엄청난 복록(福祿)을 누리다 죽은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선조 정실 공주의 부마였던 '영안위 홍주원'의 현손(玄孫)이 바로 혜경궁의 부친 홍봉한이다.
     
     적(敵)이었던 사도세자의 처가
     
      사도세자의 세자빈이 된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 뒤에 敬懿王后)는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 핵심가문 출신으로서 쟁쟁한 친족들을 두고 있었다.

     

      혜경궁 홍씨는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렸으며,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에 추서되었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궁호가 혜경으로 올랐고,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에 추존되었다.

     

     아버지 홍봉한과 숙부 홍인한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그녀는 세자
    의 참담한 운명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1795년 남편의 참담한 죽음을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인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한중

     

    록'을 남겼다. 이는 궁중문학의 효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살아 생전, 사도세자는 세자빈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홍씨를 세자빈을 둔 후 그는 바로 다른 여인들에게 관심을 돌렸고 곧 후궁들이 생겨 자녀들을 생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혜경궁은 2남2녀를 낳았는데 첫째인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은 요절했고 둘째가 바로 정조(正祖, 1752~1800)였다. 뒤를 이어 두 명의 군주(郡主)를 낳았는데 모두 성인이 되었고 명문 집안에 하가하여 자손을 낳았다.

     

     사도세자는 두 명의 세손을 낳아 자신의 임무를 다하였다. 거기다가 또 다른 자식들(서자 왕손 3인과 현주 1인)도 얻어서 영조는 후계의 근심을 어느정도 덜 수가 있었다. 자신이 선택한 노론 핵심의 며느리에게서 정당한 후계자였던 정조를 얻음으로서 골치아픈 아들의 비행(非行)에 대해 단죄를 내릴 수 있는 여유도 생긴 것이었다.

     


     1762년 그 해 여름은 격렬하였다. 집권세력인 노론은 사도세자의 정치적 방향에 엄청난 회의감을

     

    드러내 보
    이고 있었다.

     

     

    영조가 여러번에 걸쳐 세자에 대한 양위(讓位)의 의견을 피력하였는데 본의에 의한 말은 아니었고,

     

    적어도 
     비대해진 신권(臣權)이 왕권(王權)에 대해 도전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경각심 차원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이런 양위소동은 오히려 아들 사도세자의 정치적 목숨줄을 죄어놓는 결과로 나타났

     

    .

     

    세자는 왕권을 도전하는 노론보다는 소수파로 몰락해버린 소론에 대해 깊은 애정을 왕권의 대리(代

     

    理)기간
     에 표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세자의 정치적 소신에 대해 노론은 극도의 도전감을 느꼈고 노론의 세자를 향한 인식에 대해서 영조는 어

     

    느 정도의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왕권과 신권이 충돌하다 어느 한 쪽이  패배한다면 그 휴유증은 조

     

    선의 사회를 뒤엎고도 남음이 있는 엄청난 파장이 될 것이라는 걸 영조도 모 를리가 없었다.

     

     

    더구나 숙종 때 처럼 '국왕의 정통성'이 높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신권이 당파로 인해 쪼개진 상황이 아

     

    니었다. 노론 이외 정치마당을 대체할 세력은 이미 경종의 죽음과 함께 소멸된 이 시기 노론 신권이 왕권과

     

    부딪힌다면 양 편의 공멸은 뻔한 이치였다.
     
     아들을 죽음에 몰아넣음으로서 자신의 왕권을 보존한 아버지

     특히 몰락한 소론에 동정을 가지는 세자를 두고서 노론도 서서히 분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론 중에서 세자의 편에 서는 자는 아주 극소수였다. 세자의 정치논리는 노론의 중심부와는 전혀 맞지 않았고 갈등의 끝은 영조의 결단에 달렸었다. 영조는 결국 자신의 아들인 세자를 죽음에 몰아넣음으로서 자신의 왕권을 보존하는 정치적 도박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결단의 끝은 부자간의 비극이었다.

     

    아버지에 의해 아들인 세자는 뒤주 속에서 참혹하게도 아사(餓死) 당하게 되었다. 아들의 어이없는 죽음 앞에서 영조는 엄청난 후회를 한들 현실은 이미 비극으로 종결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본의 아니게 아비가 자식을 죽이는 현실 정치 논리에 원망을 가했고, 그 감정을 사도(思悼, '잘못이 있어 일찍 죽은 것을 애도한다'라는 뜻이다)라는 시호에 넣어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영조는 다시 고달픈 신경전을 펼쳐야했다. 피를 먹어 본 권력은 다시 아들

     

    뿐만 아니
    라 손자의 피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도세자가 유일하게 정실 부인에게서 얻은 아들은 '세손 이산' 뿐이었다.

     

    그러나 노론의 핵심부 눈에는 '세손 이산'이라는 인물은 너무나도 위험한 존재였다. 언제 '아버지

     

    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보복의 칼날을 집권세력인 노론에게 겨눌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조는 노론 으로부터 어린 세손를 살리기 위해 족보를 바꾸기로 한다.

     

    바로 어린 나이로 죽은 백부 효장세자(孝章世子)에게 정조를 출계(出系)시켜 사도세자와의 인연을 끊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정조 행차도 속의 '혜경궁 홍씨의 가마')
     
     할아버지의 결단으로 '세손 이산'은 아버지를 바꾸게 되었는데 조선시대 양자(養子)의 개념은 오늘

     

    날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죽을 때까지 양부가 아버지가 되고 족보에도 그렇게 기록되는 것이다.

     

     

    세손 생부였던 사도세자를 '숙부'라 불러야했고 백부인 효장세자를 '아버지'로 부름으로서 노론의 예봉을

     

    피해나갔다.

     

     그러자 다시 권력다툼은 어이없게도 세손의 이복동생들까지 끼어들이는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영조가 죽었을 때 후손은 세손과 그 3명의 이복동생들 뿐이었다. 즉 총 네 명의 왕손들만이 왕위후보자였는데, 그들은 정조와 은언군(恩彦君)과 은신군(恩信君) 그리고 은전군(恩全君)이라 불린 3명의 서출(庶出) 왕손들이었다.

     

     서2남이던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이었던 연령군(延齡君)의 후사로 나가서 사도세자의 족보에서 빠

     

    졌고 유
    력 후보는 역시 은언군과 은전군이었는데, 특히 은전군이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 당하는 대

     

    상인물이었다.

     

    은전군의 어머니가 사도세자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다른 형제와는 남달랐기 때

     

    문이라고 한다.
     
     영,정조 시대 이후의 조선 왕실

     사도세자의 후궁 아들들은 제 명을 누리지 못하고 죽어갔다. 정치적인 변동에 항상 약자로서 당하는 운명을 맞이하는데 워낙 왕손이 없다보니 툭하고 터지는 역모사건에 그들의 이름이 안 올려지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왕손의 숫자가 뻔하다보니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었다.

     

     결국 직계후손을 남긴 왕손은 오직 은언군 뿐이었다. 그 은언군의 자식들도 부친처럼 계속 정치적인 이용만 당하다가 종국엔 비명에 목숨을 잃어갔고 겨우 손자대인 철종(哲宗, 1831~1863)만이 억세게 운좋게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보상을 받게 되지만, 철종이 후사없이 죽음으로서 그를 마지막으로 효종의 직계 후사는 단절되고 만다.

     

     그토록 간신히 이어져 내려오던 효종의 남계 자손은 철종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게 되고 마지막 조선의 명맥을 이어준 고종과 순종은 유전적으로는 인조의 3남이었던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후손들이다.

     고종의 조부였던 남연군(南延君, 1788~1836)은 인평대군의 7세손으로 은신군의 양자(養子)로 입적되면서 근친 왕손으로 인정받은 사례이다.

     

    참고적으로 고종의 계통은 족보상 영조의 계통이기보다는 숙종의 6남인 연령군(延齡君)의 후손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정조의 동생인 은신군이 소목(昭穆)의 차례를 벗어나 조부뻘인 연령군의 계자(系子)가 되었고 이어 남연군이 은신군의 계자로 집안을 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철종은 순조의 계자로 입적되어 대통을 이어나갔는데 순조는 철종의 당숙(堂叔, 5촌 아저씨)이다.

     영조와 정조의 시대 왕실은 상당히 어려운 난국에 봉착한 상태였다. 점점 왕실의 권위가 혈통적인 면에서부터 잃어가면서 그에 따라 권력의 힘은 약화되었다. 숙종의 사후 정실(正室)의 자식으로서 왕위에 오른 사람은 정조와 헌종(憲宗, 1827~1849) 뿐이었다. 정조조차도 왕비가 자식을 낳지 못해서 결국 여러 후궁을 들여 간신히 후사 순조(純祖, 1790~1834)을 얻었고, 순조 또한 아들이라고는 문조(文祖, 1809~1830) 뿐이었으며 문조 또한 자식이라곤 헌종 밖에 두지 못했다.

     

     왕자의 수 만큼이나 왕권의 힘은 점차 줄어갔고 결국 '방계 중의 방계'였던 철종과 고종이 연이어 들어옴으로서 왕조의 권위와 왕권은 땅에 떨어졌으며 서서히 황혼(黃昏)이 지는 왕조로서 그 이름만 남아 1910년까지 그 명맥을 다해갔다. 

     

    <혜경궁 홍씨  한중록>

     

     

     

     

     

     

     

     

     

     

     

     

     

     

     

     

     

     

     

     

     

     

     

     

     

     

     

     

     

     

     

     

     

     

     

     

     

    정조와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 와는 어떤 사이일까 ?
     
    참고: 노론 벽파 란 ? ==>  조선 200년 집권당이었으며, 사도세자가 잘 죽었다고 생각하는 정당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고, 사도세자의 죽음이 억울하다는 쪽이고, 혜경궁 홍씨는 그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신병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한중록에서 쓰고 있다.  누구 말이 맞을까 ?
     
    그리고 과연 사도세자는 그이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말대로 정신병자였을까 ? 그래서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가, 조선 왕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를 쌀뒤주 속에서 굶겨 죽였을까 ? 만약, 사도세자가 정신병이 있다면,  그냥 폐세자를 시키면 되지 죽일 이유까지가 있을까 ?
     
    사도세자의 비문에는 그가 정신병자가 아니라, 똑똑하고 사리분별이 있고, 지배층이 아니라 농민들을 위한 정책을 수렴청정기간에 많이 노력했다며 칭송하고 있다. 묘비에 있는 글이 더 정확할까 ? 그의 부인이 쓴 한중록 처럼, 그가 정신병자였다는 것이 더 맞을까 ?
     
    정조는 즉위 하자마자, 사도세자를 죽이게 한 이유로 외할아버지(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를 죽이고 또한 혜경궁 홍씨의 삼촌도 죽여버린다. 그런데 그 2사람은  정조의 외가댁이자, 집권 노론 벽파의 영수(우두머리)였다. 그들이 사도세자를 의도적-정치적 이유로 죽였다고 보고, 정조는 자신의 외가댁에 대해서 그 책임자들을(외할아버지-홍봉한과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삼촌-홍인한) 사사시킨다. ==> 홍인한은 조카인 정조의 왕위 등극을 반대하였으며, 조카 정조를 암살할려고 한 인물이다
     
    혜경궁 홍씨의 집안은 당대 최고 명문집안이었다 . 권력도 가지고 있었고, 조선을 200년간 통치하고 있는 집권 여당인 노론의 영수집안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권력 싸움에 사위인 사도세자를 쌀뒤주에 넣고 굶겨 죽인다. 그리고 그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책인 한중록까지 낸다.(집안을 살리기 위해, 사도세자는 정신병자였다며~) 그리고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혜경궁 홍씨의 아들인 정조는, 헤경궁 홍씨가 틀렸다며,  외가를 파멸시킨다. 즉, 외할아버지인 홍봉한과 홍인한 등을 죽여버린다. 사도세자에 대한 보복으로~
     
    그러면, 왜 영조때 집권당인 노론 벽파는 사위를 죽였을까 ?  그것은,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즉 영조와 노론 세력은 그 전왕인 경종을  독살시키며, 왕위에 오른 의심을 받았다. 이때문에 영조 초에 이인좌의 난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즉, 노론은 자신과 맞지 않는 경종을 독살시키며, 영조를 왕으로 세운다(경종 독살설).  그런데 경종은 장희빈의 자식이고, 영조는 최무술이의 아들이었다.
     
    영조는 노론 세력이 너무 커져서 부담스러웠지만, 자신을 왕으로 만든 세력이라서 완전히 헤어질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세자는 노론세력에게 정치적으로 빚진 것이 없으므로 객관적으로 세상을 보는데, 그는 경종이 노론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경종에 대해서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노론 기득권자들이 아닌, 농민들을 위해서 정책을 폈다. (그는 수렴청정을 했다)  .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사도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노론 벽파는 사도세자를 모함해서 죽여버린 것이다. ==> 영조는 나중에,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한다. 즉, 노론 벽파에 속고 놀아난 것을 안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던 정조는, 가슴속에 간직 한후, 왕위에 오른 후에, 아버지의 복수를 조금씩 해가고, 그의 외가를 친 것이다. ( 정조는 그 외가에 의해 암살 위기도 여러번 당하기도 한다.)
     
    정조는 그의 외가를 친 이후, 그래도 어머니 집안을 위해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그녀가 70세가 되는 해에 홍씨 집안을 신원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정조는 그 약속 3년 전에 죽고(정조 독살설도 있슴), 자기 집안을 다시 신원시켜 주겠다고 약속한 아들(정조)이 없어졌으니, 이제 혜경궁 홍씨가 스스로 나서서 자기 집안이 잘못이 없다는 책을 쓰게 된다. 그게 바로 한중록(閑中錄)인 것이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사도세자가 정신병으로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적고 있다. 즉, 자신의 남편을 죽인, 자신의 친가(홍봉한,홍인한, 노론 벽파)은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다.
     

    외척이자 집권당 노론 벽파인 자신의 집안을 다시 세우는 것이, 조선 사대부 집안에서, 자신의 남편이 죽은 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ㅋㅋ
     
     
     
     참고 서적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조선왕 독살 사건
    사도세자의 고백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이덕일의 KBS 역사강좌 동영상 보기 :
      : http://blog.daum.net/dream6838/3128?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dream6838%2F3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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