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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
손의 반란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혁신에 의한 산업혁명의 성과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결실을 거두게 되었으며, 동시에 기술에 대한 반발과 각성도 생겼다.
19세기 중반 기계가 낳은 보기 흉한 형태에 대항하여 수공예의 순수 효과를 내세운 윌리엄 모리스에 의해 일어난 미술공예운동은 존 러스킨에 의해서 이론적 지지를 받았고, 이 운동은 곧 유럽으로 전파되어 아르누보, 유겐트 양식 등으로 불리었는데, 이는 기술에 대한 손의 반란으로 볼 수 있다.
정교함으로 말하면 손이 기술을 따라갈 수 없지만 동일한 것을 반복하는 데 그치는 기술에 비해서 동일하지 않지만 제작자의 표현이 드러나는 손의 제작이 더 가치 있다고 본 것이다.
19세기 중반 수공예가 번성하기 시작한 건 이런 맥락에서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표현’에 대한 가치판단이다.
예술은 궁극적으로 표현이란 생각이 싹 튼 것이다.
이런 자각을 말로 표현한 건 20세기에 들어서면서였으나 그런 생각은 19세기 중반에 이미 싹텄다.
1830년부터 1930년까지 1세기 동안 프랑스 한 사람의 1년간 생필품 평균소비량의 증가에서 사회의 변화를 알 수 있는데, 주식인 밀은 두 배가 조금 넘게 증가한 데 비해 포도주, 설탕, 커피, 맥주 등 기호식품의 소비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맥주는 4배, 담배는 4.5배, 포도주는 거의 5배, 설탕은 9.5배, 커피는 무려 17배 증가했다.
이는 생활유형이 여유와 여가 중심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식민지의 산물인 설탕과 커피의 소비급증은 제국주의 정책이 프랑스인의 생활과 정신에 여유를 가져다주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는 일부 사상가들의 말대로 ‘경탄의 세기’, 혹은 ‘생성의 세기’였다.
새로운 정신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획기적으로 확장되었으며, 시인, 극작가, 음악가로 1916년 2월 5일 카바레 볼테르에서 다다를 선언한 다다이스트 휴고 발은
“천 년의 문화가 붕괴하고 있다. 파괴되지 않을 기준과 기초, 그리고 근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공중누각이 되었다.
도덕적인 세계에서 더 이상 그것의 미래는 없다. ...
이 시대의 예술가들은 내면을 지향한다.
그들의 삶은 미친 세상과 벌이는 전투다”라고 주장했다.
휴고 발의 천 년의 문화 붕괴설은 과장이 아니다.
불과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2300년의 서양문화는 붕괴를 맞았기 때문이다.
서양 중심의 문화는 1960년대에 들어서 근간이 흔들렸고 다원주의가 예술의 종말, 역사의 종말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것은 따로 논의되어야 할 사항이며 오늘의 강의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으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오늘의 주제는 추상으로 재현에서 표현으로의 변화에 관한 것이다.
다음 주에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자들 잭슨 폴록과 마크 토비에 관해 강의할 예정이므로 칸딘스키와 클레를 포함하여 두 주에 걸친 강의 주제는 추상이다.
회화는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손의 역할은 항상 눈이 본 것을 재현하는 데 한정되어 있었다.
이런 프로세스가 해체되기 시작했는데, 대상을 바라보는 눈의 역할이 달라지든지 오브제의 원상을 다시 제시하기 위해서만 손의 역할이 요구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생겼다.
회화에서 재현representation이 미덕으로 여겨져 왔지만, 재현은 현전presence(앞에prae-존재한다esse)을 전제로 인위적인 반복에 그치는 표상, 혹은 허상virtual image, 환영illusion이므로 회화의 자율성을 자각한 화가들은 눈으로 본 것을 손으로 재현하는 데 반발하기 시작했다.
회화의 자율성이란 곧 표현이다.
오브제를 기술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브제에 대한 것을 표현하는 걸 말한다.
예를 들면 반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은 상징적인 그림인데, 그에게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가 비유로 든 바로 그 씨 뿌리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 나타난 씨 뿌리는 사람은 바로 예수 자신이다.
그래서 그는 지는 해를 씨 뿌리는 사람의 머리 뒤로 구성하여 노란색 후광이 되게 한 것이다.
오브제를 상징물로 자신의 생각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고갱은 사람을 그리면서 그림자를 생략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표현을 위해서 말소한 것이다.
마네는 배경을 평편하게 함으로써 르네상스로부터 중요하게 여겨온 입체감의 환영을 말소했다.
삼차원의 물체가 이차원의 평면에서 입체적으로 보이는 건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그것을 생략했다.
그린버그는 이 점을 높이 평가하여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마네를 꼽는다.
마네가 회화의 본질인 이차원을 자각하고 그것을 극명하게 드러냈다는 것이다.
서양미술사상 최초의 추상화를 그린 칸딘스키와 관련하여 먼저 살펴보려는 인물은 모네다.
르누아르는 모네를 가리켜서 “모네는 눈인데 얼마나 놀라운 눈인가!” 하고 감탄했다.
모네는 오브제가 빛에 의해 시시각각 그 형태와 색상이 달라지는데 착안하여 동일한 오브제라도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서 그리고 계절과 일기의 변화, 또는 하루 중에서도 시간별로 다르게 보이는 것을 평생의 주제로 삼았다.
그 결과 그의 그림에서 오브제들은 빛의 영향에 따라서 그 형태가 불분명해졌으며 색 또한 큰 차이를 보였다.
선과 색채는 회화의 전부이다.
다만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두고 들라크루아파와 앵그르파의 논쟁이 한동안 극심했었다.
회화는 선을 중시한 앵그르보다는 색채를 중시한 들라크루아를 통해서 더 진전되었는데, 모네의 그림에서 선이란 색과 색의 만남일 뿐이다.
특히 만년 30년 동안 그린 수련화에서 선은 존재하지 않고 색만이 있을 뿐이다.
그가 “물의 라파엘로”란 별명을 얻은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나는 표현의 수단으로서 색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 또한 표현의 수단으로서 중요하다.
러시아의 구성주의와 네덜란드 조형주의 추상화가들에게는 선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선과 색이 재현의 수단이 아니라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추상의 의미와 양상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프린트물을 보면서 이야기 하도록 한다.
대상을 알아볼 수 있도록 묘사하는 데 종속되지 않고 표현을 중시한 것이 추상이다.
자연의 모방으로서의 미술을 탈피하기 위한 “추상화하다 to abstract”라는 말에는 “요약하다”, 혹은 “응축시키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알타미라 동굴Altamira cave에 그려진 구석기시대 후기 벽화에서도 사람이 요약, 혹은 응축된 이미지가 있어 원시시대부터 추상화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추상미술abstract art이라고 하면 1910-20년에 탄생하여 10여 년 동안 특수한 정체성으로 확립한 것을 말하며 여기의 중심에 칸딘스키가 있다.
하나의 주의ism로 발전된 이 미술에 칸딘스키와 클레 외에 입체주의Cubism가 기여한 바가 크다.
칸딘스키로 대표되는 추상은 앨프리드 H. 바의 말을 빌면
“지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이고 감성적이며, 기하학적이기보다는 유기적이고 생물형태적인 형태를 취하며, 직선적이기보다는 곡선적이고, 구조적이기보다는 장식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것과 자발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을 고양시킨다는 점에서 고전적이기보다는 낭만적이다.”
이에 비해 러시아의 전위파로 절대주의Suprematism(쉬프레마티슴)를 주창한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1878-1935)로 대표되는 또 다른 추상은
“지적이고, 구조적이며, 건축학적이고, 기하학적이며, 직선적이고, 고전적인 엄격함을 지닌, 논리와 계산에 근거한 것”이다.
칸딘스키의 추상은 대상을 가장 단순한 형상으로 감축시킨 뒤 이런 비재현적인 형상들로 작품을 구성한 것이다.
이는 다음 주에 살펴볼 내면의 느낌을 즉각적이며 자유로운 표현으로 추구한 잭슨 폴록과 마크 토비의 추상과는 대조적이다.
폴록과 토비는 처음부터 대상을 고려하지 않고, 애초부터 재현적인 요소가 부재하는 내면의 일시적인 느낌이나 생각을 오로지 표현하는 추상을 추구했다.
그래서 그들의 추상은 추상표현주의로 불린다.
1917년에 창립된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De Stijl의 피트 몬드리안(1872-1944)과 반 두스뷔르흐의 엄격한 기하학적 추상은 그 근본 미학이 ‘절대적인 실체’를 형상화하려고 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맥을 같이 하고, 신비주의의 면에서는 칸딘스키와도 맥을 같이 한다.
러시아와 네덜란드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형이상학적 고뇌가 있었으며, 칸딘스키와 몬드리안 모두 우주가 본질적으로 정신적이라고 믿는 신지학의 영향을 받았다.
두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세계의 혼돈의 근저에는 심오한 조화, 혹은 진리가 내재한다고 생각했으며, 자신들의 순수추상이 서구세계 정신에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딘스키의 추상은 자유롭게 흐르고 감성적인 데 반해 몬드리안의 추상은 엄격하고 기하학적이다.
몬드리안이 순수색 빨강, 파랑, 노랑으로 한정해서 사용한 데 반해 칸딘스키는 색채에 “정신적 울림”이 있다고 보고 다양한 색채를 사용했다.
칸딘스키와 클레를 간략하게 말하면,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모스크바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법학도로서 장래가 촉망되던 칸딘스키는 189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프랑스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모네의 작품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해 뮌헨으로 향했다.
그로 하여금 화가의 길을 걷게 한 모네의 <건초더미> 작품에서 발견한 건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재현이 아니더라도 색채와 형태만으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이후 그의 그림에서 형태는 색채에 의해 덮여지고 역동적인 색채의 구사는 그의 음악적 취향에 의해 이루어졌다.
음악은 그의 추상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1911년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뮌헨에서 청기사 그룹을 조직하고 비구상회화의 선구자가 된 칸딘스키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모스크바로 돌아가 그곳에서 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아 기하학적인 형태를 차용하게 되지만 다채로운 색채는 여전히 그의 회화의 중심이었다.
이후 다시 독일로 돌아간 그는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육과 저술활동을 통해 자신의 추상이론을 정연하게 후세에 남겼다.
피울 클레Paul Klee(1879-1940):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려서 문학과 음악에 재능을 보인 클레는 왜 화가가 되었느냐는 질문에 뒤떨어진 회화를 음악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고 응답했다.
그는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후에도 바그너, 슈트라우스, 모차르트에 심취했고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음악을 회화의 요소로 사용했다는 점에서는 칸딘스키와 공통점이 있다.
클레는 또한 많은 시를 썼으며, 작품의 제목을 자신의 시에서 따오기도 했으므로 문학은 그의 회화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창작 초기에 윌리엄 블레이크, 고양 등의 상징주의 회화에 영향을 받아 환상적이면서도 위트 있는 작품을 추구한 클레가 추상으로 나아가게 된 것은 로베르 들로네의 입체주의에 근거한 색채 배열의 작품을 보고난 뒤부터였다.
들로네의 색면 대비의 영향 외에 이론적으로는 바우하우스에서 함께 교수로 재직하던 칸딘스키의 영향을 받았다.
소묘에 타고난 재능이 있던 클레에게 소묘는 평생 창작의 수단이 되었다.
칸딘스키와 클레의 공통된 추상개념
색을 소리처럼 사용하다.
칸딘스키는 바그너와 스크리아빈, 그리고 쇤베르크에 관한 에세이를 자신과 마르크가 편집한 <청기사연감>에 소개하면서 “회화도 음악과 같은 에너지를 일으킬 수 있다”고 했는데, 음악이 듣는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형태와 색채도 관람자의 반향을 일으켜 감동시킨다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경험으로서의 음악과 관념으로서의 음악 모두 포함된다.
이는 클레에게도 해당되며 두 사람 모두 음악의 자율성을 자신들의 추상화에 적용했다.
폴 세잔의 다음과 같은 말은 칸딘스키의 추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데생과 색채는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는 동시에 데생한다.
색채가 조화를 이루면 이룰수록 데생 또한 더욱 더 정확해진다.
색채가 풍요로워질 때 형태 또한 충만해진다.”
<즉흥>, <구성>, <인상>
칸딘스키는 1909년부터 <즉흥> 연작을 그리기 시작하여 1913년까지 34점을 그렸다.
<즉흥>이란 제목은 그가 가능한 한 자발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의식적인 제어작용을 극소화한 형상들을 창조했음을 시사한다.
그는 <즉흥> 연작을 통해 선명하지 않은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완전추상으로 더 나갈 수 있었다.
<즉흥> 연작에서 인물, 건물, 산 등은 불분명하더라도 그 형상이 발견되며 그것들은 재현적인 형상들이 아닌 기호로서 기능한다.
<구성> 연작은 <즉흥>에 기반을 두고 계획적으로 확장시킨 것들이다.
<구성> 연작은 1910년 최초로 발표한 이후 1939년까지 10점을 제작했다.
이 연작은 그의 미술에서 핵심을 형성하는 매우 중요한 작품들이다.
<인상>은 외부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제목이다. 1911년에 <인상> 연작을 6점 제작했는데 첫 <즉흥>을 그린 지 2년 후, <구성>을 그린 지 1년 후가 된다.
6점의 <인상> 주제는 무장경관, 분수, 모스크바, 콘서트, 공원, 그리고 일용일로 모두 부르주아의 여가와 문명화된 오락과 관련이 있다.
칸딘스키는 1913년 <폭풍>에 기고한 글에서 <즉흥>, <구성>, <인상>을 규정했다.
1. 인상Impression은 와부 자연으로부터의 즉각적인 느낌이다.
2. 즉흥Improvisation은 무의식적이며, 자연발생적이고, 내재적이며 비물질적인 전체의 특성을 지닌 표현이다.
3. 구성Composition은 장기간의 작업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고 현학적 면모마저 지니는 내재된 느낌의 표현이다.
여기서는 이성, 의식, 확실한 목표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이 역시 계산이 아닌 느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칸딘스키는 회화와 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는 공감각을 표현하기도 했는데, 공감각synesthesia은 20세기 초반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클레의 작품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공감각synesthesia이란 음파가 귀에 자극될 때 소리를 들을 뿐 아니라 색상을 느낄 수 있음을 말한다.
이를 색청이라고 하는데 이때 색상이 변하면 들리는 소리의 음정도 변한다.
이런 감각의 양상modality의 경계를 넘어선 감각현상이 공감각이며, 공감각에는 2차 감각이 현실적인 경우와 기억 표상적인 경우, 혹은 단순한 사고에 그치는 경우 등 정도의 차이가 있다.
칸딘스키는 색과 각 악기의 소리를 연관시키면서도 회화와 음악에는 자체의 특정한 자원이 있다고 주장했다.
클레도 회화와 음악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으며,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회화적 사고>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문화적 리듬’을 언급하면서 음악에서의 장단 구조를 풍경화에서의 리듬으로 보았다.
이런 시각은 그의 회화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며 칸딘스키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1차 세계대전 중 클레는 표현수단으로 숫자, 알파벳, 느낌표, 정지부호, 화살표, 별, 깃발, 눈, 심장 같은 형상적, 상징적, 추상적 기호들을 주로 사용했다.
북아프리카에서 이슬람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그는 자연의 형상들 대신에 십자가, 활, 창살, 점 등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기호와 상징은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하나의 논리적인 의미로 확정되지 않는다.
이런 기호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연과 결부된 한계에서 벗어나 무한한 표현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클레는 예술가의 손을 “비범한 의지의 도구”라고 말했으며, 그의 저서 <창조에의 고백>(1919)에서 자신이 표현한 “예술은 보이는 걸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의 2부: 작품 감상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
43<다채로운 인생>(1907):
<다채로운 인생>에는 여러 양식이 혼재되어 있는데, 붓질을 짧게 한 인상주의 양식과 밝은 색점으로 색들을 분할시키는 신인상주의 점묘기법을 혼용했으며, 색을 오브제를 묘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리듬, 혹은 율동을 표현하여 활력을 나타내기 위해 반 고흐처럼 붓을 구불구불 사용하여 색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다양한 인간의 상황들을 향수적이며 환상적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친 이 작품은 1907년 초 세브르에서 그린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과정이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고, 신념과 다툼, 사랑과 이별 등이 묘사되어 있다.
러시아의 민족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색들이 에나멜처럼 반짝이는 모자이크로 나타났다.
멀리 보이는 금장식의 왕관 같은 크레믈린은 그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것으로 중세의 서정적 느낌을 준다.
중세의 서정성은 모스크바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북부의 볼로그다에서 본 다채로운 의상을 한 부유한 농민들의 삶에 대한 인상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칸딘스키는 그곳 농민들이 모든 가구와 일용 도구들을 다채로운 색으로 장식한 것에 매우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고향에 대한 향수가 배어있는 이 그림을 그릴 때 그는 “선과 색점을 사용하면서 러시아의 음악적 측면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했다.
45<우르술라 교회가 있는 뮌헨의 슈바빙>(1908):
이것은 칸딘스키가 새로 장만한 아파트 부근을 그린 풍경화이다.
관람자는 화면 아래의 파란색, 초록색, 노란색, 붉은색을 따라 시선을 위로 향하다가 하늘의 진한 파란색에 고정하게 된다.
그는 건축물들을 밝은 색으로 칠하여 실제 모양을 묘사하기보다는 표현적인 형상들로 삼았는데 이는 마티스의 영향이다.
오래된 도시를 강렬한 색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그가 새로운 창작의 국면에 접어들고 그린 최초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밝은 순수색을 평편하게 칠하고 선을 끊어지지 않고 천 조각처럼 칠하는 방법은 야수주의의 영향이다.
이런 색의 사용이 그의 작업을 매우 자유롭게 해주었다.
1907년까지만 해도 인상주의 양식으로 그렸지만 1907년에 들어서부터 야수주의 양식으로 그리게 된다.
52<산>(1909):
칸딘스키가 1909년에 그린 그림들을 보면 추상에 이르기 위한 형상과 색채에 매우 고심하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산>은 두 인물이 산을 배경으로 서있는 평범한 구성이다.
콘 모양의 산을 초록색과 흰색으로 칠하면서 가장자리를 파란색으로 하고 산의 주변을 붉은색으로 에너지가 발하는 것처럼 활력을 불어넣었다.
두 인물을 사변적으로 생략된 형상들로 만들어 수수께끼의 인물로 표현했다.
특정한 인물이나 장소를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추상구성을 위해 단순히 풍경과 인물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산 위에 건축물이 그려져 있는데 이런 모습의 중세 러시아 건축물은 초기의 작품에서 쉽게 발견된다.
112<무르나우-철로와 성이 있는 경관>(1909)두꺼운 종이에 유채:
1909-10년에 제작된 칸딘스키가 음악적 에너지를 분출하는 색채와 형상을 창조하기 위해 매우 고심하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뮌터가 1909년에 알프스 산자락 아래의 작은 마을 무르나우의 한 농가를 구입하고 그곳을 칸딘스키와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이 집은 야블렌스키를 비롯해 특히 러시아 화가들의 출입이 잦았으므로 동네사람들이 ‘러시아인의 집’이라고 불렀다.
무르나우는 칸딘스키가 안정적인 생활 속에서 창작하기에 최적의 곳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헤어지기 전까지 칸딘스키와 뮌터는 여름을 무르나우에서 지내면서 작업했고, 여름이 아니더라도 그곳에서 지내는 일이 잦았다.
<무르나우-철로와 성이 있는 경관>에서 칸딘스키는 색면을 사용하여 그림을 평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독일의 표현주의와 프랑스의 표현주의 모두를 알고 있었지만 그들과는 달리 실제상황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기차를 장난감처럼 묘사했다.
검은 실루엣으로 표현한 기차를 향해 흰 손수건을 흔드는 붉은색 의상의 소녀와 흰 연기를 방사하며 질주하는 기차 그리고 전신주가 보인다.
이 그림에서 그가 구성을 매우 자유롭게 했음을 볼 수 있고, 자연에 대한 인상이 좀더 주관적으로 되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면의 오른편만 놓고 보면 무엇을 보고 그렸는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색을 덮어 공간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스피드를 상징하는 과학의 총아인 기차는 인상주의 화가들을 매료시킨 모티브였다.
작품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목적이라면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기차는 필요한 소재이지만 그가 기차를 선호한 까닭은 소리와 명암 때문이었다.
기차 바퀴 아래 그림자 사이로 붉은 햇빛이 비치고, 흰 선로와 펄럭이는 흰 손수건, 그리고 방사되는 기차 연기는 이 그림의 동력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는 형상과 색을 음악의 효과로 나타내는 데 관심이 있었으며, 이 작품에서 그런 율동감이 어느 정도 성취되었다.
1, 2<교회가 있는 무르나우 1>(1910):
무르나우에 있는 시장 마을을 주제로 한 <교회가 있는 무르나우 1>과 <교회가 있는 무르나우 2>를 예로 들면, 그가 그곳의 독특한 장면을 묘사하는 데 관심이 없고 마을의 분위기를 밝고 경쾌하게 표현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음악이 지닌 강력한 힘이 회화에서도 나타나야 한다고 믿었으므로 색을 소리처럼 울림이 생기도록 꿈틀거리게 사용했고, 이런 점은 클레의 그림에서도 발견된다.
<교회가 있는 무르나우 1>은 2에 비해 오브제들이 더 요약되었으며 무의식적인 형상을 만들면서 좀더 환상적인 느낌을 강조했다.
흰 교회 뾰족탑과 왼편의 연립주택이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2와 비교해서 보면 색에 파묻힌 오브제들이 어떤 것들인지 알 수 있다.
2에는 교회 건물이 좀더 분명하고 산들이 검은 실루엣으로 분명하지만 1에서는 색으로 덮여있으므로 알아보기 힘들다.
이 풍경화에 사용된 색채는 야수주의 화가들의 것과 마찬가지로 강렬함을 지니는데, 야수주의 화가들과 칸딘스키 모두 색채를 자연주의와는 거리가 멀게 사용하면서 자연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소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칸딘스키의 풍경화는 전체적인 안정감에 비해 세부적으로는 무한히 교차하는 평면들의 융합으로 진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기에 제작한 그의 풍경화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본 장면들의 이면의 “무, 혹은 모든 걸” 표현한 것들이다.
칸딘스키는 풍경을 세잔의 말대로 “개처럼” 바라보는, 즉 목적을 갖지 않고 바라보는 가운데 단순히 풍경에서 느끼는 진동을 다채로운 색들로 표현했다.
3<암소>(1910):
대상을 생략한, 혹은 색 자체를 표현하고 사징으로 사용한 것이 <암소>이다.
암소의 이미지를 불분명하게 만들고 배경과 동일한 흰색으로 일체가 되게 함으로써 암소의 형상을 색의 형상으로 대치했다.
암소의 흰색과 노란 얼룩을 전면에 부각되게 하고 소녀가 우유 짜는 모습을 왼편에 삽입했다.
암소의 흰색과 노란색이 주변의 흰색과 노란색에 일치되게 하여 암소의 이미지를 생략함으로써 관람자가 암소를 보기보다는 농가의 목가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산 뒤로 둥근 관을 이고 있는 그리스 정교회 건물은 칸딘스키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러시아의 경관으로 조국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것이다.
암소와 마찬가지로 건물의 벽과 탑도 주변의 색과 한데 어우러져 자연을 묘사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125<즉흥 19>(1911):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칸딘스키는 신지학Theosophy과 강신술spiritualism에 심취했으며, 인지학Anthroposophy 사상가 루돌프 스타이너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이런 배경 속에서 그는 내면의 경험, 혹은 정신적 현상을 시각화하는 일에 전념했다.
<즉흥 19>의 양편에는 두 무리의 사람들이 있지만 어떤 사건과 관련된 것인지는 짐작되지 않는다.
왼편의 사람들은 뒤죽박죽 섞인 채 언덕 아래로 걸어 내려오고 있다.
평편하게 칠한 색 바탕에 간략하게 그는 검은 외곽선으로 인물들을 구분했을 뿐이다.
그들 뒤에 좀더 멀리에 뒤따라 내려오는 사람들은 흰색 외곽선으로 그려 불분명하다.
화면 중앙은 다양한 밝은 파란색으로 두드러지며 자연의 모든 형상들은 색 뒤로 사라졌다.
이런 색면에 검은색으로 외곽선을 그어 또 다른 그룹의 사람들을 상징했다.
이 그룹의 사람들은 오른편을 향해 걸어간다.
왼편 그룹은 실제 사람들을 묘사한 것인 데 반해 오른편 그룹은 정신적인 존재들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두 그룹 사이 상단에 둥근 선이 위에서 왼편 아래로 향하고 있다.
6<즉흥 19a>(1911):
<즉흥 19a>는 정신적 현상을 시각화하는 일에 전념하는 창작환경에서 창안된 것으로 앞의 작품들에서 본 대로 색이 분방하고 모호하게 칠해져 오브제와 공간이 구별되지 않는다.
다양한 밝은 색들이 사용되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어두우며 색과 색이 마찰을 일으킨다.
<즉흥 19a>는 자연에 정신이 내재해 있다는 가정 하에 그것을 표현하려고 한 것으로 자연에서 받은 느낌을 전달한 것이다.
언덕을 가로지르는 뾰족한 산 정상은 자연의 형태를 떠나 칸딘스키의 직관에 의한 회화적 구성요소로 변형되었다.
그는 기억 속의 무르나우의 풍경을 근거로 이 같은 내면적인 환상을 일으킬 수 있었다.
오른편에 언덕을 오르는 두 사람이 보이고 두 사람 아래 또 다른 두 사람이 보이는데, 손으로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시선을 끄는 건 정면 왼편으로 불쑥 솟아오른 듯한 어두운 노란색이 칠해진 둥근 형상이다.
마치 산에 작은 폭포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풍경을 동물의 형상으로 만든 것이다.
4<구성 5>(1911): <구성 5>는 추상적 표현주의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작품으로 칸딘스키의 조형언어가 유감없이 나타난 역작이다.
131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붉은 눈으로 바라보기>(1910):
카드에 유채
5<인상3-콘서트>(1911): 칸딘스키는 1911년 1월 2일에 프란츠 마르크와 몇몇 뮌헨 신미술가협회 회원들과 함께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콘서트에 참석하고 쇤베르크와 서신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쇤베르크는 12음계를 기조로 한 무조음악의 창시자이며 그림도 그렸다.
칸딘스키는 그해 말에 개최된 청기사전에 쇤베르크를 초대했으며 쇤베르크는 작품을 출품했다.
<인상3-콘서트>는 칸딘스키가 쇤베르크의 콘서트를 다녀온 뒤 그린 것으로 그가 말하는 인상은 시각적 인상뿐 아니라 비재현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모든 종류의 감각적인 인상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특히 청각적 체험에 대한 인상을 표현한 것으로 형상과 색을 콘서트홀의 분위기와 소리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하면서 노란색과 검은색이 두드러지도록 흰색으로 보완했다.
그는 청각적 인상과 시각적 인상을 동시에 표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검은색을 칠한 면은 무대 위의 그랜드피아노를 상징한 것이며, 왼편 여러 개의 검은 곡선들은 무대 가까이 앉아 있는 청중이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양편의 흰색 기둥은 소리기둥을 은유한 것이다.
가장 인상을 주는 요소는 노란색으로 상징되는 쇤베르크의 소리가 홀을 가득 매운 것이다.
노란색은 칸딘스키에게 소리를 상징하는 색으로 1909년 무대구성에 관한 에세이에서 <노란 소리>라는 제목을 사용했다.
<인상3-콘서트>는 회화와 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는 공감각을 표현한 것으로 공감각synesthesia은 20세기 초반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클레의 작품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133<인상 4-무장경관>(1911):
이 작품은 <인상3-콘서트>와는 달리 실제 형태들이 덜 생략되어 있다.
중앙에 굵은 검은색으로 외곽선을 나타낸 말과 검은색을 두텁게 칠한 무장경관이 있고 말 머리를 향한 대각선이 말의 뒷다리와 연결되어 화면을 양분시킨다.
말 머리 옆 왼편에 검은색 양복을 입은 두 사람이 길을 걸어가다가 무장경관을 보자, 서서 모자를 벗어 인사하려고 한다.
말 등 너머로 오른편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보이며 그들 위에 호롱등이 켜져 있다. 말 머리 뒤로 보이는 3개의 붉은색 기둥을 한 건물은 고전적 공공건물로 무장경관이 이 건물을 순찰하며 보호한다.
이 작품은 1911년 3월 12일 바이에른의 왕자 리젠트의 90회 생일을 기념하여 뮌헨에서 벌어진 행렬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145<세 기사와 함께>(1911):
6개의 선으로 3마리의 말과 3기사를 상징하는 동시에 운동과 에너지를 표현했다.
기사를 모티브로 한 이 수채화는 모던아트의 주요 상징물이다.
<세 기사와 함께>라는 제목 때문에 말을 타고 달리는 3기사를 상상하게 되지만, 그림 자체에는 그렇게 상상할 수 있는 요소가 분명치 않다.
3마리 말이 긴 곡선으로, 3기사는 짧은 곡선으로 간명하게 처리되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붓질로 말의 등선을 상징적으로 묘사했다.
스피드에 대한 인상은 3기사의 등을 구부린 것으로 표현했으며, 3기사는 파랑, 빨강, 노란색으로 상징되었다.
181<무제 (첫 추상 수채화)>(1910):
이 작품은 미술사상 최초의 완전추상 작품으로 알려진 것이다.
여기서는 오브제를 유추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
주목할 점은 이 작품의 제작년도가 1910년으로 적혀 있지만 1913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대에 그가 그린 전 작품을 보면 추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완전추상이 1910년에 성취했다는 건 믿기 어렵다.
1911-12년에 제작한 그림들을 보면 오브제들을 유츄할 만한 이미지의 잔상들이 여전히 남아있어 1912년 이전에 이런 완전추상을 그렷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가 1913년에 그리고 1910년이라고 적은 것으로 짐작된다.
제작년도를 속이는 건 들로네와 페르낭 레제에게서도 나타난 현상으로 당시 누가 먼저 완전추상에 도달했느냐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발생된 걸로 추측된다.
회화를 자연에 대한 모방으로 본 서양의 오랜 전통이 칸딘스키에 의해서 붕괴되었다.
이는 인간의 눈과 이성으로 대상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새로운 시각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는 비재현적인 방법, 즉 추상으로만 가능하다는 새로운 회화적 제안을 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파울 클레의 작품
76<나무 위에 있는 처녀(창조 3)>(1903)아연판에 에칭:
뮌헨에서 그림공부를 한 3년 동안 클레는 드로잉 기법을 익혔고 에칭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1903년 7월부터 1905년 봄까지 <창조 Invention>라는 제목으로 11점의 에칭을 연속적으로 제작했다.
풍자적인 이 작품들은 부르주아에 대한 비판이라고 했다.
<나무 위에 있는 처녀>는 도상적으로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의 인물과 유사하지만 매우 위협적인 이미지로 처녀의 기괴한 얼굴이 관람자를 섬뜩하게 한다.
클레는 훗날 아내가 될 릴리에게 보낸 편지에 “진실을 제시하게 위해 고의적으로 왜곡되게 표현했다”고 적었다.
왜곡은 추상의 한 방법으로 부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며, 추상은 불완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정의되지만 이 둘을 명확하게 구별하기는 어렵다.
외적 메시지를 강조하는 왜곡은 심리적인 시점을 제시해주며 그의 추상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정확한 근육묘사는 해부학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로 보인다.
처녀는 죽은 나무의 앙상한 가지 위에 불안정한 자세로 비스듬히 누운 채 오른팔로 머리를 약간 받치고 있다.
맹목적으로 처녀를 찬양하는 전통적 부르주아 관념에 회의 제기한 비판적인 작품이다.
89로베르 들로네의 <창문>(1912-13):
90<꽃 침대>(1913):
클레는 청기사 기념전에서 파리 태생의 화가 로베르 들로네의 작품을 보고 많은 영감을 받았다.
들로네의 작품에 매료되어 1912년 파리에 있는 그의 아틀리에를 방문한 클레는 그곳에서 <창문>을 보고 당대의 가장 혁신적인 작품이라고 감탄했다.
그는 들로네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예술가들 가운데 하나”라고 적었으며, 들로네의 논문 <빛에 관하여>를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들로네는 1906년 신인상주의와 외젠 슈브뢸의 색채이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후 중심 모티브가 될 색채이론의 미적 응용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으로부터 파생된 색의 분할주의 기법을 채택하는 대신 대조되는 인접한 색채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특히 색채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연결을 탐구했다.
클레는 색과 평면적 구조로 구성하는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색채에 의한 형상들 사이의 리드미컬한 상호작용을 미적으로 적용한 들로네의 영향이다.
<꽃 침대>가 그 예로 미묘한 색조의 변화로 리드미컬한 효과를 냈다.
들로네를 통해 그는 색채에 의한 형태회화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파리의 모더니즘에 가까워졌는데, 파리의 모더니즘은 당시 국제적으로 가장 수준 높은 미술이었다.
197<생 제르맹의 정원, 튀니지 근처 유럽의 식민지>(1914):
클레는 1914년 4월 마케, 무아예와 함께 튀니지에서 두 주를 지냈다.
세 사람은 4월 7일 튀니지에 도착했다.
튀니지는 들라크루아, 모네, 르누아르, 마티스 등이 다녀간 적이 있는 곳이다.
클레는 튀니지를 비롯해 북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을 방문하면서 아프리카의 투명한 빛과 원색의 풍요로움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아 그동안 고민해왔던 색의 개념이 분명해졌고 처음으로 화가라는 자각이 생겼다.
<생 제르맹의 정원, 튀니지 근처 유럽의 식민지>에는 건축물이 있고, 정원이 있으며, 전면에는 나무로 담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들로네의 영향을 여실히 드러낸 작품이다. 왼편 아래에 연필로 S.Kl라고 적었는데 이는 자신이 특별히 좋아해서 소장하겠다는 표시이다.
클레가 튀니지에서 그린 수채화는 30점 가량 된다.
201<회교 사원이 있는 함마메트>(1914/199):
이것은 앞으로 클레의 추상에서 교과서적인 작품이다.
상단에 두 개의 타워와 정원이 있다.
그는 오른편에 가늘고 기다란 종이를 붙였는데, 파란 하늘을 그리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또한 하단을 가늘고 길게 잘라 상단에 180도 돌려서 붙임으로써 하단과 상단의 색상이 연결되게 했다.
209<무제>(1914/94):
210<무제>(1914/147):
1914년에 그린 2점의 <무제>는 색의 대비와 형상들로 순수 회화적 구성을 시도한 것들이다.
클레는 1912년 두 번째 파리 방문에서 들로네 외에도 앙리 르 포코니에, 카를 호퍼 등을 만났으며, 클레는 이들을 만난 뒤 대조되는 인접 색채들 사이의 상호작용, 색채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연결, 입체주의 구조, 쇠약하고 사라져가는 대상의 형상을 서정적으로 묘사하는 방법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
클레가 파리를 방문했을 당시 피카소와 브라크에 의해 창안된 입체주의는 에콜 드 파리 화가들에 의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진전되고 있었으며, 클레는 칸바일러의 화랑에서 피카소와 브라크를 포함하여 입체주의 양식의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했다.
클레의 작품에서 면을 쪼개고 면들을 층층이 쌓아 구성하는 방법은 입체주의 효과를 응용한 것이었다.
10<사원의 정원>(1920/186):
<사원의 정원>은 클레가 1914년 4월 튀니지 방문에서 받은 감동을 되새겨 그린 것으로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시킨다.
계단을 올라 문을 통해 들어가면 야러 정원으로 갈 수 있는 장면이다.
높은 담 밖으로 야자수가 보이고 둥근 지붕을 한 건물도 여러 채 있다.
그는 그림을 세로로 삼등분하여 재구성했는데, 그림이 너무 대칭적이라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그랬던 것으로 짐작된다.
11<사원의 정원>(1920/186): 원래 그림의 중앙부분을 잘라 왼편에 옮겨 붙였다.
12<장미정원>(1920):
<장미정원>은 유기적 형태와 비유기적 형태를 혼용해 리드미컬하게 배열한 것으로 클레는 1920년경 이런 작품을 연속적으로 제작했다.
정원에 대한 그의 개념은 자연적 유기적 성장과 인위적 질서 모두를 포함한 것이었다.
이 작품에는 비정형 삼각형과 부등변 사각형들이 있으며 밝은 붉은색, 오렌지색, 핑크색 벽돌로 쌓아올린 회화적인 벽이 있다.
이런 색상들을 건축적인 방법으로 쌓아올리는 구성을 선택했다.
클레는 로베르 들로네의 색상 대비에 영향을 받아 이를 리듬으로 표현하는 데 적극 활용했다.
그는 화면 중앙의 장미로부터 리듬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도록 구성했다.
그는 노래의 가사를 구성의 요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230<늪의 전설>(1919/163):
1차 세계대전 후 처음 그린 유화 <늪의 전설>은 유기적인 형태와 비유기적인 형태들을 혼용하여 구성한 작품으로 이는 그의 작업에 중요한 경향이었다.
<늪의 전설>에서 창문과 지붕은 기하학적으로 구성되고 늪의 식물들이 어두운 갈색과 초록색으로 칠해진 데 반해, 흰색이 군데군데 장식으로 사용된 것이 두드러진다.
부채살처럼 생긴 전나무가 여기저기에서 눈에 띤다.
하단 왼편에 투명인간처럼 보이는 작은 사람이 있고 중앙 왼편에는 교회가 있다.
이 작품에서 입체주의의 양식이 응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시기에 그는 형태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며 그것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입체주의 양식에 매우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또한 어린이와 정신장애자들의 회화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입체주의와 원시적이며 낯선 형태들에 대한 관심으로 창작의 폭이 매우 넓어졌다.
7<급강하는 새와 화살표>(1919)수채화:
<급강하는 새와 화살표>에서 새가 비행기처럼 보인다.
한 해 전 클레는 <새-비행기>를 이런 모습으로 드로잉을 했는데 비행학교에 복무하던 당시 자신의 머리 위를 떠다니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새란 생각이 든 것으로 추정된다.
직사각형들의 연결부분에 점을 찍고 다리와 머리를 그려넣어 새처럼 보이는 비행기구가 되게 했다.
하단 왼편에 1919 201이라고 적혀 있다. 클레는 이렇게 제작년도와 함께 그해의 제작순서를 번호로 표기하여 작품의 제작순서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했다.
1919 201은 1919년의 201번 째 작품이란 뜻이다.
8<새-비행기>(1918, 연필):
드로잉 <새-비행기>에서는 하단에 작은 화살표를 2개 그려넣었지만 수채화에는 큰 화살표 3개를 그려넣어 하강의 방향을 가리키고 강렬한 인상을 주도록 했다.
드로잉은 그에게 작품을 완성하는 준비과정이었으며, 한 점의 드로잉에서 여러 점의 작품을 고안해내기도 했고, 때로는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재활용하여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9<하강하는 새>()1919/206)수채화:
이 그림들은 1918년 3월 8일 비행학교에서 폭격수 게오르그 슈미트의 비행기가 추락하여 떨어지는 걸 목격한 충격으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전 주 나는 세 차례에 걸친 치명적인 사건을 목격했는데, 한 사람은 프로펠러에 부딪혔고 두 사람은 공중에서 충돌했다. 어제는 네 번째 사람이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지붕 위로 곤두박질쳤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년 뒤 클레는 그날의 사건을 머리에 떠올리며 하강하는 새 모양을 모사하면서 비행기에 13이란 숫자를 적어넣고 오른편에 하강하는 방향을 화살표로 크게 그려넣어 그 속도가 매우 빨랐음을 시사했다.
숫자 13은 비행기에 적힌 번호일 수 있고 불운을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화살표는 이후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238<바이에른의 돈 조반니>(1919):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는 클레가 가장 좋아한 오페라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호색가 돈 조반니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애욕적인 환상의 작품들은 이 고전적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 같다.
<바이에른의 돈 조반니>에는 여자의 이름 5개가 적혀 있는데, 이는 그가 알고 있던 여자들의 이름이다.
카티와 첸즐은 뮌헨에서 회화를 공부할 때 알게 된 여자들이고, 마리는 그가 로마에서 누드를 배울 때 누드반에서 포즈를 취하던 모델이며, 나머지 두 이름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지만 당시 대중적인 인기 소프라노 가수 엠마 카렐리와 테레세 로토서일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 아래 바이에른의 의상을 하고 사다리에 올라 포즈를 취한 인물은 클레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