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7년 가해 6월3일 토요일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수도회] 사랑을 기록하고 전하는 사랑의 사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28,16-20.30-31
† 복음 요한 21,20-25
◈ 오늘의 묵상
요한 사도는 열두 사도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았고, 예수님께
속마음을 여쭈어 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고, 이를 가장 깊이 있는 신학적 언어로 기록한
제자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수위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요한 사도도 그 수위권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
제자였습니다.
요한 복음의 맨 마지막 구절인 오늘 복음에서 저자는,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한번 그 사실을 확인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셔서, 예수님의 신뢰에 대해 혼란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가장 사랑받는 제자인 요한의 미래를 여쭈어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애매모호합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의 답변이
그렇게 기록된 것은, 복음서의 저자인 요한에게는 그 질문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에 남기고자 했던
말씀은, 이 제자가 바로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고 기록한
증인이고, 그의 증언은 참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로부터 자신이 가장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말이나
외적인 표현으로 확인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확인보다 더 큰
사랑은 제자들처럼 죽음을 무릅쓰고서도 자신이 보고 체험하고 느낀
사랑을 세상에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고,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며, 그분의 삶과 부활의
증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언할
차례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너는 나를 따라라.
2017년 가해 6월3일 토요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제1독서
<바오로는 로마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8,16-20.30-31
복음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0-25
예전에는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 밑이나 골목 모퉁이 마루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골목이나 동네
넓은 공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도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모습을 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나라의 인구가
줄은 것일까요?
그보다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하나같이 다 바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그 누구도 바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공부하느라 놀 틈이 없고, 어른들은 돈 벌이 때문에
여유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과거와 비교했을 때, 지금 훨씬 더 잘 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예전과 비교했을 때 여유는 완전히
사라진 것만 같습니다.
과거보다 잘 살아도 여유가 없는 지금의 모습을 생각해보지요. 열심히
노력해서 승진을 했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더 높은 자리를 위해 여유
없이 살아갑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부유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지금보다 더 많은 부를 원하고 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1등을 할 수
없을 텐데, 1등이 아니면 실패한 인생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에 신경을 쓰고 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과연 어느 정도까지 되어야 만족하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하게 될까요? 그러나 세상 것에 대한 만족도는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으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지금보다 더 높은,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과연
어떻게 될 지에 대해 묻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을 정도로 사랑을 많이 받는 제자로 알려져 있었기에 그의
미래가 더욱 더 궁금했나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주님을 따르는 길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주님을 따르는
일뿐인데, 이는 소홀히 하면서 다른 것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말로 내가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써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과 나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남과 비교하면서 나의 부족함에 대해 불평불만의
모습으로 나아갔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계속해서 부, 명예, 지위,
권력 등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나눔은 우리를 '진정한 부자'로 만들며, 나누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누구이며 또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마더 테레사).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원리
저는 지금 현재 17년째 매일 새벽 묵상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8권의 책을 출판했고 이곳저곳에서 원고 청탁을 받기도 합니다. 이렇게
많은 글을 써서 그럴까요? 사람들은 제가 학창시절에 국어를 무척이나
잘 했을 것으로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학창시절에 제가 제일
재미있어하고 또한 잘 했던 과목은 ‘수학’이었습니다.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학교 때에 만났던 수학 선생님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께서는 수학 문제를 푸는 방법만을
가르쳐줬는데, 이 선생님께서는 수학의 원리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원리를 조금씩 깨우치게 되면서 문제 푸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좋은 성적을 얻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공부 자체가 재미있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원리를 통해 논리를 갖게 되었고, 이 논리가 글
쓰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지혜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런데 결과만을 생각하다보니 그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기술만을 얻고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 나아가는 것 역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원리만을 알게 된다면, 이 세상을 분명히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기준으로 잘 사는 것, 즉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만족이라는 결과만을 추구하다보니 주님께 나아가는 원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원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께서 늘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서로 사랑하라.”
어렵다는 수학도 원리만 알면 간단해집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사랑을 기록하고 전하는 사랑의 사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6월3일 토,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21,20-25요한 21,20-25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요한 21,24)
사랑을 기록하고 전하는 사랑의 사도
사랑하는 제자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21)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에게 순교를 예언하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1,22)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재림할 때까지 요한 사도가 교회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가 죽은 뒤에도 당신에 대한 증언이 후대에
전해지고, 당신에 대한 그의 믿음이 지속되기를 바라신 것이지요. 이런
일은 베드로와 상관없는 일이니, 사랑으로 죽기까지 양들을 돌보는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면 그만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여 실행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을 기웃거리며, 베드로 사도처럼
다른 사람과 비교하곤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각각의 사람의 고유함을 존중하시고 그 사람에게 맞는 방식으로
사랑하시지요. 그러니 그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 없이, 사랑이신 분을
사랑으로 바라보며 주님께서 부르시는 방식으로 응답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모두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사가는
스승인 요한 사도를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 표현합니다.
그만큼 요한 사도가 예수님과 친밀했음을 알리려 한 것이겠지요.
복음사가는 요한이 베드로보다 낫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베드로와는 달리 주님과의 깊은 사랑에 헌신했음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바람은,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 사도와 그의
후계자인 복음서의 저자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요한이 전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참된 증언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의 크기와 깊이만큼, 사랑하는 스승 예수께서 전해주신 진리와
사랑의 말씀을 증언하여 영원히 살아 숨 쉬게 합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얼마나 자주 하느님을 잊어버리는지 모릅니다.
그분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통해 당신의 한없는 사랑과
생명이 영원히 기록되고 전해지기를 바라시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갈 때도 많습니다. 세상의 번거로움과 삶을 위한 몸부림 속에
멈칫거리며,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내지 못하기도 하지요.
우리 모두 요한 사도를 본받아 사랑을 전하고, 기록하며, 삶으로
증언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그저 시간의 흐름
속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의미 없이 일정한 공간에
머무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또 내 기준에 따라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그것으로 만족하는 삶에 그쳐서도 안되겠지요.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그보다 훨씬 더 고귀한 까닭입니다. 사랑은
제자들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이 보고 체험하고 느낀 사랑을
세상에 증언하도록 우리를 재촉합니다. 우리 모두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는 ‘거룩한 사랑의 얼굴’임을 기억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사도가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오늘도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나를
따라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6월3일 토.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 22)
우선적으로 바뀌어야 할 대상은 먼저 제자신입니다.
넓어져야 할 대상또한 먼저 제자신입니다.
우리가 열중해야 할 핵심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빈약한 우리 믿음은 끊임없는 참견과 간섭으로 주님의 뜻을
가로막거나 놓치게됩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 불필요하고 잡다한 것들을
비워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에게 더더욱 엄격한 이중적인 우리 모습을 보게됩니다.
이기적이고 차가워진 우리마음이 서로를 향한
따뜻한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원으로 이끌어 갈 주님을 진심으로 믿지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시작은 간섭과 참견이 아니라 나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까지도 우리의 죽음까지도 끌어안으시는
주님을 올바르게 따르는 길은우리자신이 먼저 주님을 따르듯이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에 있음을 잊지않는 따름의
참된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2017년 가해 6월3일 토요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 요한 21,20-25
어릴 때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제게 바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덕분에
바둑에 대한 용어를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포석은 큰 곳을 보라는
의미입니다. 작은 곳에 연연하면 큰 곳을 놓치게 되고 결국 바둑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잡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말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잡겠다고 내 말을 지키지 못하면 도리어
나의 말이 잡힐 수도 있습니다. 작은 것을 욕심내다가는 나의 큰 것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쉽게 내어주는 것은 신중하게
검토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어릴 때 배운 바둑이지만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학생들은 신학을 배우면서 공동체 생활을 합니다. 공동체에는 내규가
있습니다. 함께 살기 때문에 때로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맡겨진
일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저는 신학생 때 몇 가지 일을 했습니다.
아침이면 삼종기도를 알리는 종을 쳤습니다. 종을 쳐야 하기 때문에
다른 신학생들보다 일찍 성당에 가야 했습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인지 일찍 일어나는 것은 제게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매점을
운영했습니다. 동료들을 위해서 물건을 사와야 했고, 식사를 마치면
동료들 보다 일찍 일어났습니다. 매점 문을 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매점을 운영해서인지 본당의 재정을 규모 있게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가계부를 쓰고 있기 때문에 수입과 지출의 용도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교구의 신협에서 이사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동료 신학생들 중에는 안타깝게도 중도에 그만두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내규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규를 지키지 않으면
조금은 편할 수 있습니다. 식사시간, 수업시간, 기도시간, 외출과 외박에
대한 규정들이 때로는 힘들고,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내규가 있어야만 공동체가 원활하게 유지될 수 있고, 그런 내규를
지키는 습관이 있어야만 사제가 되어서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학교는 다른 것들은 이해하고, 기회를
주지만 내규를 어기는 것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대하였습니다. 사제는
모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제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첫째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근심, 걱정은 모두 버려두고
살아야 합니다.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면 봄의 아름다움을, 철쭉의
싱그러움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대인들의 고소로 죄인이
되어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감옥에 갇혔었고, 나중에는 군인들이
지키는 가택연금을 당했습니다. 2년 동안 가택연금을 당하면서도
바오로 사도는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가택연금 중에도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하느님께로 가는 여행과 같습니다. 때로 시련의 비가 내리기도 하고,
고통의 파도가 밀려오기도 하고, 고독과 외로움의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그럴 때 일수록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면 우리는 구름에 가려진
태양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파도를 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멀리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산에 있는 꽃들은 멀리서 볼 때
더욱 아름답습니다. 멀리서 바라볼 때 구름, 바람, 시냇물과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너무 가까이서 보면 미처 피지
못한 꽃도 있고, 색이 바란 꽃도 있고, 이미 시들은 꽃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얼굴도 비슷합니다.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삶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주름도 있고, 점도 있고, 작은 상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웃도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허물과 단점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꽃은 분석하고 나누고 평가하면 그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만나는 이웃을 평가하고, 분석하여
판단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그 안에 숨어있는
가능성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시적인 측면도
필요하겠지만 거시적인 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땅으로 내려온 사람만이
하늘로 오를 수 있습니다.’ 군대에 가면 포복훈련이 있습니다. 철조망
아래에는 진흙탕입니다. 철조망 위로는 실탄이 날아다닙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군인은 낮은 자세로 철조망을 통과해야 합니다. 머리를 들면
철조망에 다치기 쉽고 옷이 찢겨 질 수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총알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낮은 자세로
기어가야 합니다. 삶의 시련도 그렇습니다. 결국은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겸손하게 땅을 향하면 언젠가 하늘로 들어 높여질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6월3일 토.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복음: 요한 21,20-25: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예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따라라”(19절) 하셨을 때 베드로가
돌아다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절) 하고 물었을 때,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2절) 라고 하신다.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속세의 악을 견디는 일에서 당신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나를 따라라.”고 하신다. 요한에 관해서는 영원한 행복을 되찾아
주시기 위해 당신이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하신다.
행동적인 신앙은 주님의 수난의 본을 보고 완전하게 배웠으니 주님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지금 막 시작된 관상은 주님께서 오셨을 때
완전하게 될 것이기에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 되어야 한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견디어 내는 신심은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따르지만,
지식의 충만함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채워지며 그때야 완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다.”는 말은 요한이
죽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는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즉
지금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요한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요한은 죽었다. 외경에 보면 요한은 자신의 무덤을
마련하라고 했는데, 아직까지 요한은 건강했다고 한다. 무덤이
세심하게 마련되었을 때, 요한은 마치 침상에 눕듯 몸을 누이고는
곧바로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소문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요한이
실제로는 죽지 않고 죽은 듯이 보이는 상태로 누워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무덤에 안장을 하고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요한은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뒤로 73년을 더 살며 트라야누스 황제
때까지 살다가 다른 사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 평화롭고 평온하게
하늘 나라로 떠났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이 오래
살아 내가 올 때까지 지상에 남아있기를 내가 바란다 해도 너는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마라. 너는 너의 것, 곧 네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나를 따르기나 하여라.’고 하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온 세상도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많은 일들을 기록할 수
있었지만 단 한 권의 복음서만을 남겼다. 요한은 묵시록도 썼으며,
또한 매우 짧은 서간도 한 편 남겼다. 지금 성경에 있는 세 편의 서간은
모두가 요한의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세 편을 다 합쳐도
100줄이 되지 않는 글이다. 이 복음을 자신이 썼다고 드러내는 이유는
그는 복음을 제일 마지막으로 썼고 복음을 쓴 이유가 그분이 자기를
사랑하셨고 자기 기록이 믿을만한 것이며,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25절)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만물을
지혜로 창조하셨으며 그분의 지혜는 한계가 없으므로(시편 147,5 참조)
한계가 있는 이 세상은 무한한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자기 안에 다 담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한계가 있는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여야 한다.
끊임없이 말씀을 실천할 때 우리는 궁극적인 유익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것들을 잘라 버리고 선을 실천하여 성숙해짐으로써
자신을 밝게 하고 시야를 넓혀야 한다. 그리하여 구원 자체이신 주님을,
하느님을 차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삶을 주님께 청하며 오늘을
봉헌하자.
- 수원 교구 상하 성모세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