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디자인, 예술로서의 장식품
그림 끼우는 액자는 단순한 부착물 아냐… 예술품의 본질에 속하기에 저급한 것으로 취급해선 안돼
에펠탑은 파리, 자금성은 베이징, 마천루는 뉴욕 규정하는 존재… 도시 자체가 돼버린 건축이 도시를 소유
장식품의 시대다. 스마트폰이나 핸드백을 고를 땐 단지 이 도구들의 기능만을 보진 않는다. 얼마나 세련되고 예쁜지 그 디자인을 살핀다. 미술관의 그림들은 순수 예술에 속할지 모르겠지만, 미술관의 기프트숍에서는 그 그림들을 디자인으로 활용한 굿즈가 그림 이상의 인기를 끌며 팔린다. 굿즈를 위해 동원된 그림들은 이제 순수 예술을 고집하지 않고 장식 예술이 된다.
생산품 중 장식이 들어가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해도 될 만큼, 어디서나 장식품을 만날 수 있으며 장식은 생산물이 누리는 인기의 성패를 가름한다. 경쟁적으로 성장해 온 여러 스마트폰과 태블릿 PC의 독특한 디자인들은 장식 예술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사실 매력적인 생김새로 인기를 끌어온 스마트폰과 그것의 디자인을 구분할 수 없다. 생산품에 밀착한 이 장식 예술을 ‘디자인’이라는 말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가구 역시 실용적 기능과 예술이 서로 뗄 수 없이 결합한 장식 예술이다. 순수 예술처럼 보이는 음악도 이런 ‘가구’가 될 수 있다. 작곡가 에릭 사티는 자신의 음악을 ‘가구 음악’이라 부르며, 가구처럼 실용적이기도 하고 장식적이기도 한 음악, 가구처럼 있는 듯 없는 듯 공간을 채우는 음악을 추구했다.
그런데 장식 예술은 순수 예술보다 열등한 것일까. 장식을 다른 말로 하면 ‘치장’이다. ‘장식하다’ 또는 ‘치장하다’란 말은 본질적인 것은 이미 있고, 거기에 부수적인 것을 덧붙인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케이크를 장식한다는 것은 케이크 자체가 있고 거기에 부수적으로 장식이 덧붙여진다는 것이다. 머리치장을 한다는 것은 얼굴과 모발이 이미 있고 거기 장식이 덧붙여진다는 것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장식의 이 부수성 때문에 장식 예술은 이른바 순수 예술에 비해 평가 절하돼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미(美)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마누엘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찾을 수 있다. 칸트는 파레르가(parerga)―파레르곤(parergon)의 복수형―에 대해 말한다. 파레르곤은 장식물이라는 뜻이다. 장식물의 예로 칸트는 회화의 액자, 조각상에 입히는 옷, 건축물을 둘러싸고 있는 주랑(柱廊)을 든다. 황금 액자는 그림에 속하지는 않으면서, 그 액자에 끼워진 그림이 박수를 받도록 만든다. 다시 말해 그림 자체가 아니라 황금 액자의 화려함 때문에 사람들은 경탄한다. 칸트는 이런 경우 이 장식품, 즉 황금 액자가 진정한 미를 해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칸트가 든 장식품의 예들에는 사실 예술품에 대해 부수적인 장식인지, 아니면 예술품 자체에 속하는 것인지 알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칸트가 말한 건축물을 둘러싼 주랑을 그 건축물 자체에 속하지 않는 장식품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장식적인 것을 예술 작품과 칼로 잘라내듯 구별할 수는 없다. 칸트는 황금 액자를 진정한 예술의 아름다움을 해치는 부가적인 것으로 보지만, 우리는 이와 반대되는 관점을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 테오는 형 고흐의 후원자이자 미술상이었다.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에 관한 글이 있다.
이 그림은 하루의 고된 노동을 끝내고 어두운 불빛 아래서 노동의 정직한 대가인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이 그림과 관련해 그림 외적인 것, 장식품이라 불릴 만한 것, 바로 그림이 들어갈 액자 내지 그림이 걸릴 벽의 색깔에 대해 세심히 신경 쓰고 있음을 화가 고흐는 편지 전체에 걸쳐 드러낸다. 고흐는 이 그림은 금빛 액자에 끼워지거나 잘 익은 밀밭 같은 색의 벽지를 배경으로 해야 적당하다고 누누이 말한다. 아울러 어떤 색의 배경에 놓여서는 안 되는지 역시 세심히 설명하고 있다. 그림의 배경에 대해 너무도 신경을 쓰는 고흐의 당부는 장식품, 즉 그림이 끼워질 액자가 단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그림의 본질에 속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실제로 이 그림은 고흐의 강력한 요구를 존중한 듯 금빛 액자에 끼워진 채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 걸려있다.
에르곤(ergon·작품)과 파레르곤(par-ergon·장식품)은 엄밀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감자 먹는 사람들’이라는 그림이 금빛 액자라는 장식품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처럼 말이다. 에르곤과 파레르곤이 서로 식별되지 않는다는 점을 데리다는 그의 미술론 ‘회화에서의 진리’(1978)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늘 파레르곤과 에르곤을 구별하기는 어렵다.……파레르가를 이루는 것은 단순히 잉여로서 외재적인 것이 아니다. 에르곤의 내적 결핍을 메워 주는 구조적 연관이 파레르가를 구성한다.” 에르곤은 파레르곤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파레르곤의 개입을 통해서만 에르곤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도 이런 생각을 ‘진리와 방법’(1960)에서 보여준 바 있다. “장식품은 장식품을 부착하고 있는 것의 자기표현에 속한다.”(이길우 외 역) 즉 장식품은 그 장식이 달린 것에 부가된 것이 아니며, 그것 자체에 귀속하는 본질적 표현이다.
파레르곤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에르곤(작품) ‘옆에(par)’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그리스어 단어 조합은 가령 파루시아(par-ousia) 같은 말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해되기도 하는 이 말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옆에(par) 존재(ousia)함이다. 그래서 이 말은 그리스도가 너와 함께(옆에) 존재한다는 뜻이 된다.) 파레르곤은 에르곤 곁에, 에르곤과 함께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옆에 함께 있는 것이지,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에르곤에 속하면서 그 에르곤의 경계를 이룬다. 가령 원과 같은 어떤 도형의 경계가 원과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예술 작품의 본질에 대한 탐색은 ‘장식’, 즉 파레르곤을 제쳐 두고는 가능하지 않다. ‘장식은 진정한 예술인 것이다.’ 무엇이 가장 대표적인 장식 예술일까. 바로 건축이다. 실용적인 기능을 가지지 않는 건축이란 없다. 건축에선 실용적 기능과 그 기능을 치장하는 장식적 아름다움이 서로에 기생한다. 이런 맥락에서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건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건축물 자체가 본질상 장식적이다.……건축물은 확실히 예술적 과제의 해결이어야 하고, 이 점에서 관찰자의 경탄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물은 삶의 연관에 적합해야 하며, 스스로 자기 목적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빛과 놀이하는 대리석 주랑을 가진 아테네의 신전, 그리고 쾰른, 파리, 안트베르펜, 바르셀로나의 대성당들이 알려주듯 건축은 경탄을 자아내는 예술이다.
다른 한편 건축은 분명 실용적인 도구다. 건축은 순수 예술처럼 그 자신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실용적 기능을 목적으로 한다. 아무리 대단한 예술가가 구상한 것일지라도 건축물이 실용적인 기능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건설될 수 없다. 어떤 도시도 비실용적인 건축물이 들어서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으며, 존재하더라도 실용성이 없다면 그것은 건축이라기보다 그냥 수수께끼의 흉물이 되리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 ‘죽지 않는 사람들’에서는 인간들만 이런 기괴한 건축물을 짓는데, 무한한 삶을 지닌 죽지 않는 인간은 유한자와 달리 인생을 알뜰하게 실용적으로 기획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축에서는 순수하게 아름다움에만 머무는 예술 작품은 가능하지 않다. 건축물은 먼저 예술이 아닌 실용성과 연결돼야만 세워질 수 있다. 건축물은 사무실이든지 학교든지 박물관이든지, 뭐든 실용적 기능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 이상이 요구된다. 건축물은 그것이 세워지는 공간(도시) 안의 다른 시설들과의 조화를 고려해야만 한다. 건축에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이 두 가지(실용성 및 다른 시설과의 조화)는 모두 순수한 예술 외적인 것이다. 즉 건축의 예술성은 예술 아닌 것들을 통해서만 성립한다. 그러니까 건축의 아름다움은 실용적인 도구에 붙은 디자인의 아름다움이고, 도시에 부착된 장식의 아름다움이다. 이런 점은 결코 건축을 순수 예술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강등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건축은 자신을 낳아 준 도시 자체가 돼 버리는 영예를 누린다. 에펠탑은 파리가 존재하는 방식이고, 자금성은 베이징(北京)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마천루 없이는 뉴욕의 이미지도, 본질도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도시가 건축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이 도시를 소유한다.
건축의 예가 알려주듯 이렇게 예술은 실용성과 뒤섞여 존립한다. 사람들은 운동화 하나를 고를 때도 균형 잡힌 외관과 색깔의 조화를 고려한다. 옷을 고를 때도 더위나 추위를 막아줄 실용성만이 아니라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살펴본다. 이 장식적인 아름다움 또는 디자인은 결코 어떤 순수한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에 비해 저급한 것이 아니다.
이런 점은 서예 예술이 잘 보여주고 있다. 당나라 서예가 안진경의 ‘제질문고(祭姪文稿)’는 ‘천하제이행서’로 꼽히는 작품이다. (참고로 천하제일행서로 불리는 작품은 현재 원본은 없는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다.) 이 작품은 안사의 난 중에 살해당한 조카를 위해 쓴 제문이다. 아니, 제문을 만들기 위해 쓴 초고다. 글을 만들기 위한 초고이니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글씨의 아름다움을 위해 쓴 것도 아니다.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로지 제문으로서 기능과 제문을 쓰는 자의 의무가 앞서 온다.
그러나 비탄으로 가득 찬 이 작품은 뭐라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처연히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 이상으로 숭고하다. 아름다움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한 어떤 작품도 이 작품의 세계와 감히 겨루지 못할 것이다. 이 아름다움은 실용적인(즉 인간의 불가결한 활동과 관련된) 제문의 장식이지만, 그것은 위대한 정신의 표현 자체로서 장식이다. 진정한 예술이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 파레르곤(parergon)
그리스어로 부수적인 것, 장식 등의 뜻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에르곤(ergon·작품) 옆에 붙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의 말에서 보듯 고전 철학에서 장식은 본체와 완전히 분리되며 본체의 미를 해치는 것으로 인식돼왔다. 현대 철학은 오히려 장식의 의의를 발견한다. 가다머와 데리다의 철학에서 보듯 장식은 본체와 구별될 수 없으며, 오히려 본체는 장식을 통해서 성립한다.
첫댓글 어째튼 장식은주제와 잘 매칭이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