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1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마르
1,21ㄴ-28) )
Then Jesus faced him and said
with authority,
"Be silent and come out of this man!"
The evil spirit shook the man violently and,
with a loud shriek, came out of him.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자신들의 입으로 ‘다시는 저희가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시고, 죽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던 간청을 상기시키면서 주님의 뜻을 예언자의 입에 담아
줄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남편이나 아내가 없는 사람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몸으로나 영으로나 거룩해지려고 주님의 일을
걱정한다.’며 주님을 충실하게 섬기라고 강조한다(제2독서).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의 운동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설교와 함께 악령을 추방하시는
일로 시작하신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사람들은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고 입을 모은다. 신앙이란 들은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오늘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복음).
☆☆☆
오늘의
묵상
그리스도의 적인
악령이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는 카파르나움의 회당까지 버젓이 들어왔다. 왜 사람들은 그가 회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지 않았을까? 겉으로는 멀쩡한
이웃 사람이었으니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악령이 이웃의 몸을 입고 들어온 것이다. 영혼과 정신이 악령에 사로잡힌 채 살아오던 사람이다. 회당에
들어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본색이 드러나고 말았다. ‘왜 우리를 간섭하십니까?’ ‘왜 간섭하느냐고?
에덴 동산을 파괴하고 하느님 나라를 더럽히는 마귀들과 어찌 공존할까? 나는 사람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말씀이 선포되는 회당과 예루살렘 성전까지,
마침내는 온 세상을 정화하여 아버지께로 인도할 것이다. 아버지의 집과 사람들의 영혼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악귀들을 쫓아내 정화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기도하는 성전이라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예수님께서
계시는 우리 본당에도 악령 들린 자들이 버젓이 들어와 있을 수 있다. 심령으로 살펴보자.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영혼과 정신이 헛된
이념의 잡귀에 사로잡힌 줄도 모르고 신자 행세를 하고 성체를 모시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냐? 사제의 강론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한 자,
‘강론대로라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하는 생각을 가진 자가 여기 앉아 있다면, 그것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자신의 몸속에 악령이
들어와 혼란케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각성해야 할 것이다. 성수를 뿌려 당장 악귀부터 쫓아내는 것이 순서다. “조용히 해라! 당장 나가거라!”
< '피'가
'힘'이다 >
-전삼용신부-
어렸을 때 닮고
싶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슈퍼맨이었고
하나는 이소룡,
또 첩혈쌍웅의 총질
대왕 주윤발 정도였습니다.
하늘을 어찌나 날고
싶었던지 꿈속에서조차 슈퍼맨이었던 적이 많습니다.
물론 높이 날지는
못 하고 자주 추락하고 건물에 부딪히고는 했습니다.
세 발짝 떼고 손을
하늘로 뻗으면 정말 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슈퍼맨도 처음엔
그것을 몰라서 날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 발짝
정확히 띠고 짚단 위를 날다가 배가 흙으로 다 까진 적도 있습니다.
분명 어딘가에
두건을 매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아이도 있다고 확신합니다.
커서 슈퍼맨도 말을
타다 떨어져서 반신불수가 되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이소룡 때문에 또
얼마나 난리였는지 모릅니다.
이소룡의 모든
영화는 다 섭렵하고 절권도 책을 사서 발길질을 해 댔습니다.
그리고 쓸데없이
배웠던 쌍절곤.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지만 가방에 넣고 다닌 적도 있었습니다.
주윤발 때문에
라이터 불을 입으로 빨아 댕기는 것도 배웠고 초등학교 때 담배 연기로 도너츠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라이터 가스로
손바닥 위에 불을 붙이는 것은 우리 모두의 놀이였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아이 때부터도 높아지고 강해지고 지배하려는 자아가 활개를 쳤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만약 지금도 어깨에
망토를 두르고 다닌다면 어떨까요?
아마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날 수도 없고 높아질 수도 없음을 아는 것이 어른입니다.
그런데 그 한계를
모르는 아이들이 세상엔 너무도 많습니다.
아직도 무기를 들고
아직도 무력으로 눌러 다른 이를 제압하고 권위를 행사하려 합니다.
자신이 한 마디만
하면 다른 이들이 복종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본래 자신은
힘이 없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한
선생님은 삽이나 허리띠,
슬리퍼 등으로
우리를 때려가며 권위를 가졌습니다.
그 선생님의 한
마디면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졸업을 하니
그 선생님의 권위는 우리에겐 전혀 해당이 되지 않았습니다.
폭력으로 얻은
권위는 그 환경이 그 권위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시간만 유효합니다.
군대에 갔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자신을 못살게 군 한 사람 정도는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못살게 굴었던 이유는 자신의 말을 잘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선임이 저에게
먼저 담배를 권하기에 저는 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선임은
그것 하나로 제가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을 것임을 알고는 제대 할 때까지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러나 제대하면
어떻습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결국 그들이 권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학교가 권위가 있었던 것이고 군대가 권위가 있었던 것인데 그것들을 이용한 것뿐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늘을
날 수도 없고 다른 이를 조종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힘을 빌려
그렇게 하면서 그 힘이 자신의 것이라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망토만 걸치면
슈퍼맨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권위를 가지려고 쿠테타를 일으켜가면서 정권을 쟁취하려 하겠습니까?
나라의 권위를
이용하려고 그러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이런 모든
것들은 자기 자신은 권위가 없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결국 대통령 직에서
내려오면 아무런 힘도 없는 나약한 자신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것을 참지 못해서
헌법이라도 바꾸어 그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망토를 벗으면 힘이
사라질 줄 아는데 본래 힘이 없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단 한 마디로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마귀가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힘을
지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슈퍼맨도 주윤발도
마귀를 쫓아낼 힘은 없습니다.
참 권위란 이렇게
한 마디만 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힘을 말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참으로 ‘권위’있는 가르침이라고
감탄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에는
언제나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예수님은 무엇을 지니고 계셨기에 그런 힘이 있었던 것일까요?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듣게 하려면 총이나,
칼,
혹은 자신이 가진
무기를 휘두르며 위협을 가합니다.
무언가 짓누르는
것이 없으면 권위가 행사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그분의
‘피’입니다.
마귀는 교만이라고도
하고 자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의 교만을
꺾고 무조건 순종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 바로 우리 자신의 희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성령’이라고도
합니다.
마치 카인이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 아벨의 피 때문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피는 엄청난 힘과
권위를 가집니다.
부모님의 권위도 두
부류로 나뉩니다.
당신들의 희생으로
아이들을 키웠다면 아이들은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시키는 모든 것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희생을
주지 못했다면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라도 권위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권위는
마음까지 닿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피로써 우리에게 권위를 행사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면서 몽둥이를 들고 계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것 하나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
죽어주셨는데 내가 이웃을 위해 냉랭할 수는 없는 일인 것입니다.
‘설득의
심리학’
저자 로버트
치알디니(Robert
Cialdini)는 사람을 설득하는
기술 6가지를 제안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당신이 무언가를
받을 때 다시 되돌려주어야 하는 의무가 생긴다”는
전제입니다.
생일 파티에
초대받으면 자신도 생일파티에 초대해야 하는 의무가 생기는 것입니다.
식당 종업원이
식사를 마친 사람에게 민트사탕 하나씩을 주었습니다.
사탕은 별거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팁이 3%가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사탕을 두
개씩 주었더니 무려 14%가
증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나가다가 “참으로 식사를
맛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식의 말과
함께 사탕을 주니 팁이 ‘23%’가
증가했습니다.
이것이 권위의
법칙입니다.
권위는 내가 한
마디 말을 하면 상대가 따라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 상대가 따라주어야만 하도록 내가 이미 많이 주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에게 줄
것 중 ‘생명’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 당신의 생명인 ‘피’를 주신
것입니다.
사실 이
‘피’가 없었다면 우리는
영원한 지옥불 신세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은 그 생명의 피를 받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권위를 원합니까?
아직도 이 세상의
무언가가 되어서 그 힘으로 사람을 조정하려는 유아기적 권위를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모든 것이
자신의 권위가 아닌 세상이나,
돈,
인기 따위가 주는
일시적인 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힘을
이용했던 사람들은 그 힘이 사라질 때면 그로부터 당한 사람들에게 보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힘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인데,
아이가 슈퍼맨
망토나 장난감 총과 같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힘을
바라는 사람은 참다운 권위인 그리스도의 피에는 관심 없고 그래서 피로 구원받는 이들 무리에 들 수 없습니다.
참된 권위를 지니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먼저 생명을
바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수해 주신 참다운 권위의 길입니다.
거룩한
삶, 권위있는 삶
-거룩함
예찬-
-이수철신부-
거룩함과
권위는 함께 갑니다.
거룩함이란
말마디가 고맙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원초적 갈망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마음
깊이에는 누구나 거룩한 사람이 되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다.
사실
누구나 거룩함에로 불림받고 있는 고귀한 품위의 사람들입니다.
거룩함을
상실해 가는 세상일수록 역설적으로 거룩함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집니다.
여기
뉴튼수도원에서 함께 살고 있는 아프리카 항가 수도원 소속의 버나닌 수사를 만날 때 마다
덕담을
주고 받으며 유쾌해 할 때가 많습니다.
산책
중 성물방에 들려 제가 먼저 말합니다.
"I
come to see you, holy monk(나는 거룩한 수도승인 너를 만나러 왔다)!“
하며
버나딘 수사에게 강복을 주면,
버나딘
수사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오히려 제가 거룩한 수도승이라 하며 손을 내젓습니다.
좀
더 있다 가라 하면 저는 가야 한다 하며 또 기쁜 마음으로 덕담을 나눕니다.
"I
always pray for you in my room(나는 언제나 너를 위하여 내 방에서 기도한다)“
짧은
영어지만 이렇게 이심전심 통함으로 크게 웃고 헤어지면 마음이 참 상쾌합니다.
이런
주고 받는 영적 덕담이 거룩함에 대한 원의를 불러 일으킵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미사 중 신명나게 부르는 부분이 '거룩하시다' 일 것입니다.
저
역시 미사 집전 중, 감사송에 이어 마음을 모아 형제들과 함께 힘껏 부르고 나면 속이 다 후련합니다.
이런
거룩함의 기회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하늘과 땅에 가득 찬 그 영광! 높은 데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높은 데서 호산나!“
아무리
불러도 싫증나지 않는, 끊임없이 부르고 싶은 하느님 거룩함의 찬미입니다.
'나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간절한 소망도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악(惡)에
대한 처방은 선(善)이 아니라 거룩함(聖)입니다.
악은
거룩함의 빛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여실히 입증됩니다.
바로
1독서에서 모세가 말하는 예언자의 출현은 바로 예수님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가
내 이름으로 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직접 추궁할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자 더 이상 숨을 수 없어 뛰쳐 나오며 고백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더러운
영의 고백이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서의 예수님 정체를 분명히, 정확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거룩한
말씀의 '생명의 빛'만이 악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예수님의
꾸짖음에 즉시 복종하여 떠나는 더러운 영입니다.
새삼
예수님의 거룩한 말씀의 힘만이 더러운 영을 퇴치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를
목격한 자들의 이구동성의 반응이 통쾌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 구나.“
거룩함과
권위는 함께 갑니다.
거룩하신
주님께서 새롭고 권위있는 말씀으로 명령하시니 더러운 영이 복종합니다.
참
권위를 갈망하고 찾는 사람들입니다.
권위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지도자의
신뢰와 권위가 실추됨으로 인한 혼란과 불신의 폐해는 얼마나 큰지요.
거룩함에
대한 갈망과 참 권위에 대한 갈망을 일거에 충족시켜주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이
아니곤 우리의 거룩함에 대한 갈망을, 권위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분은
세상
아무 데도 없습니다.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존엄한 품위을 지닌 참된 권위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우리
모두 세례성사를 통해 거룩함의 여정은 시작됐고 이 또한 평생과정입니다.
주님과
우정의 관계가 깊어갈수록 우리 역시 주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 권위있는 사람이 됩니다.
사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이요, 우리의 유일한 인생 목표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거룩한 사람, 권위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는지요?
첫째,
온 몸과 마음으로 평생, 끊임없이 성체성사(미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명령이
아니라 주님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거룩하신
주님을 닮는 으뜸의 수행이자 믿어야 할 신비, 거행하여야 할 신비가 성체성사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무상의 선물이요 교회시작의 원리이며 친교의 토대인 성체성사입니다.
모든
성사들의 중심이요 순례하는 교회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인 성체성사입니다.
이런
성체성사에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자발적 기쁨으로 참여하는 것이 거룩함의 지름길입니다.
정말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성체성사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하느님의 아름다우심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성체성사입니다.
복음과
똑같은 주님께서 미사를 통해
우리
안의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며 우리를 정화, 성화시켜주시고 위로와 치유를 주십니다.
미사
중 감사송에 이은 성령 청원과 더불어 축성 기원문은 얼마나 장엄하고 은혜로운지요.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거룩함의 샘이시옵니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
늘
경문을 읽을 때마다 감동하는 기도문입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성체와 성혈을 모심으로 날로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미사은총이 우리를 부단히 거룩한 삶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은퇴하여 양로원에서 노인 신자들을 돌보시는 아빠스님의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나는
휴가도 못간다.
이
노인분들에게 낙이라곤 미사뿐이 없는데, 내가 미사를 안하고 어떻게 휴가를 갈 수 있겠나!“
정말
미사를 봉헌하는 기쁨이, 낙이 없다면 무슨 기쁨, 무슨 낙으로 사막인생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거룩함의
지름길은 온몸과 온맘을 다해 평생, 죽을 때까지 미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에
저절로 따라오는 참된 권위입니다.
둘째,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의 수행입니다.
시편보다
더 좋은 기도의 학교도, 기도의 책도 없습니다.
수천년간
검증되어온 시편입니다.
모든
성인들이 이 시편기도를 통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셨습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가 우리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합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이 찬미와 감사의 갈망이 있고,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시편 기도수행으로
참된
수도자는 물론 참된 신자, 참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절로
'하느님의 모상'의 실현이 아니라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수행이 있어 거룩한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사람이 됩니다.
찬미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요 찬미의 사람인 우리들입니다.
특히
우리 수도자들에겐 더욱 그러합니다.
도대체
찬미의 기쁨, 찬미의 힘이 아니곤
무슨
기쁨으로, 무슨 힘으로 사막 같은 인생 살아 낼 수 있을런지요.
하여
사부 성 베네딕도도 당신 수도승들에게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일보다 앞세우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 하십니다.
수도자
영성이 보편화되는 시대, 모든 신자들에게 간곡히 권하고 싶은 것이 시편성무일도입니다.
오늘
2독서 바오로의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권고입니다.
모두가
결혼하지 않을 수는 없고 이것은 주님의 원하시는 바도 아닙니다.
권고의
핵심은 결혼하든 않든 중요한 것은
갈림없는
마음으로 품위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일이요,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기도가 이를 이루어 줍니다.
아,
바로 이런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기도가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깊게하고 주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으로,
의미
충만한 인생으로 만들어 줍니다.
저절로
허무와 무의미의 영적 질병도 치유됩니다.
진정한
위로와 치유, 평화와 기쁨, 정화와 성화도 순전히 하느님 찬미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거룩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전례와
삶은 함께 갑니다.
'삶의
전례화'요 '전례의 삶화'입니다.
기도하는
만큼 살고 사는 만큼 기도합니다.
찬미와
감사의 전례기도는 삶으로 직결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과 말씀과 행동을 본 받는 것입니다.
거룩한
주님의 권위는 셋으로 요약되며 오늘 복음에서도 분명히 입증됩니다.
마음의
권위, 말씀의 권위, 행동의 권위입니다.
마음의
권위는 연민의 사랑에서,
말씀의
권위는 생명과 빛을 통한 치유에서,
행동의
권위는 섬김에서 잘 드러납니다.
연민의
사랑,
말씀의
권위,
섬김의
행동이
삼위일체
하나가 되어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치유를 이뤄줍니다.
주님의
거룩한 권위의 위력이 참으로 큽니다.
주님을
닮아 갈수록
우리의
마음은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고,
우리의
말은 주님의 말씀이 되며,
우리의
행동은 섬김의 행동이 됨으로
거룩한
삶이 성취됩니다.
우리가
참회시 '고백의 기도'를 바칠 때
서두
부분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를 성찰 할 때
생각에다
사랑을,
말에다
말씀을,
행위에다
섬김을 더해보면
우리의
죄도 뚜렷히 부각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외없이 거룩한 삶으로 불림 받고 있습니다.
바로
교회의 거룩한 칠성사(七聖事)가 의도하는 바입니다.
하여
사랑의 성사, 성사의 교회라 일컫기도 합니다.
거룩한
삶에 저절로 따라오는 거룩한 품위와 참된 권위입니다.
매일,
평생 정성을 다해 바치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의 은총이 우리 모두의 삶을 날로 거룩하게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권력이
아니라 권위다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살려주시는 주님의 권위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권위를 뜻하는
라틴어 ‘아욱토리타스 auctoritas’는 ‘아우제레 augere'라는 동사에서
유래하는데, 이 동사는 ‘자라게 하다.’ ‘증가시키다.’‘커지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권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다른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위는 사람들을
성장시키라고 주신 것이지 망가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2코린
10,8).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마을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명예와 영광을 높이는데 있지 않고 사람들,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처주시며 마귀를 몰아내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신 예수님의 진정한 권위가 어디에 있는가?
사랑과 봉사, 희생을 통해서 권위가 드러났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고 자라게
하는 권위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존경에서 따라오는 권위보다는 권력으로 사람들을 내리 누릅니다. 나
누군데... 청와대에 있는데..하면서 권력을 가지고 콧대를 세우려합니다. 그것은
권위가 아니라 ‘권위적인 행동’입니다. 마음 안에서 나오는 권위를 지녀야지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에게서 권위는 사라지고
권력의 횡포만 살아있어서 걱정입니다.
국회의원이나
의회의원들이 금배지를 답니다. 왜 금배지를 답니까? 그만큼 권위를 지녔다는
것을 알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국민을 위한 대변자로
그들을 뽑아놓았더니 자기잇속 챙기는 것에는 발 빠르고 힘든 국민들은
외면하기일쑤입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금배지 달 자격이 없습니다.
세금정책이나, 연금개혁등을 하는데 있어서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모습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요? 누가 뽑았습니까?
경찰이나 소방대
고위직의 모자를 보면 금테를 둘렀습니다. 그 금테를 두르는 것은 그처럼
고귀하게 봉사하겠다는 뜻입니다. 수위실의 수위도 금테를 두르는데
마찬가지입니다. 충실히 고귀하게 봉사하겠다는 뜻입니다. 금테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금테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봉사하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올바른 권위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희생, 봉사, 말하는 바와 행동의 일치를 통해 권위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가정에는 가장의
권위, 부모의 권위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학교는 선생님의 권위가, 병원에는
의사의 권위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들은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대통령은 대통령의 권위가 살아있어야 하고 성직자는 성직자의 권위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권위를 지키기보다 권력을 추구하는 욕심이 세상을
어둡게 합니다.
대표적인
사회지도층인 율법학자들은 배운 것도 많고 권력, 재력을 다 갖췄지만 속은 비어있고
겉모양을 중시하여 율법의 의미를 까다롭게 따지는데 급급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행실을 따라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나르는 일에 손가락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마태23,3이하).
그런데 왜 더러운
영이 들리게 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첫
반응은 권위 있게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하며 거부하는 소리를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평소에 하느님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요한15,6)는 말씀처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생명이 말라 버린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치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 자기
생활 속에 하느님의 존재라고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사람,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생활에서는 하느님과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곧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따로국밥”신앙인입니다.
국 따로, 밥 따로 이듯 ‘신앙 따로, 생활 따로’여서는 안되겠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양다리 걸치기, 어중간은 없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두 번째 반응, 증세는 예수님 앞에서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존재가 자신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멸망시킨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러
오셨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멸망시키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러운 영을 멸망시키는 것이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파멸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파멸시키는 악을 그 사람에게서 나가게 함으로써 그를 살리려고
오신 것입니다.
한 번 우리의 삶을
점검해 보십시오. 성경을 읽으면서 실천하려고 할 때 ‘이 말씀대로 산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멸망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잖아요. 복음이 희생을
요구할 때도 있고 용서와 화해, 더 큰 사랑을 실천하기를 요구받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대로 한다면 분명 손해를 봐야하고,
바보가 되어야 하고 때로는 생존의 위협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타협하기를 좋아하고 나에게 손해 보지 않는 범위 안에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갖는 생각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말씀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실천한다는 것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이 말씀은
듣기에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6,60)하고 모두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고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67)하고 물으셨고, 이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68)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나의 생각과 다른
말씀, 희생이나 고통을 감당해야 할 말씀을 들었을 때 순명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우리를 멸망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려고 오셨고 치유해 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믿고 순명하게 될 때 나를 위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도록 얻게 하려고
왔다.”(요한10,10)고 선언하셨습니다.
‘멸망시키러
오셨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생활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나를 살리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권위 있는 말씀을 실행하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유광수신부님의
‘다가오는 예수’를 많이 참조했습니다)
-조재형신부-
2월의
첫날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선하고,
착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고,
정의롭고,
겸손하며,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물속에 비친 모습이
나의 모습이듯이 나의 삶과 나의 행동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여 질 것입니다.
‘난향
천리,
덕향
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덕과 겸손함이 향기
그윽한 난보다 더 멀리 간다는 뜻입니다.
2월에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일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에는
사제,
부제 서품식이
있습니다.
서품을 받기 전에
후보자들은 교구장님과 교회 앞에서 ‘순명서약,
독신서약,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일에만
순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명해야 합니다.
사제가 혼자 사는
것은 이제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제가 선포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아니라,
교회의 전통과
하느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서품을 받으시는
분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하게 나는 성직자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피정을 해야 합니다.
올해에도 서품 대상
부제님들이 피정을 하였습니다.
피정 중에 가장
강조하는 것은 ‘원리와
기초’입니다.
원리와 기초는
4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태어난 목적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다.’라고 말을
합니다.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듯이,
종은 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듯이,
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둘째는 세상의
재물입니다.
‘이 재물은 모두
하느님께서 만드셨고 사람들은 이 재물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쓸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버릴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은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사용하면 된다고 합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남을 해치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면서
사용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셋째는 삶의
기준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다.’라고 말을
합니다.
이 부분이 피정을
하는 학생들에게도 어려운 부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도 이 부분에서는 자신 없어 합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고 말을 합니다.
자는
것도,
사는
것도,
먹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와 같은 단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피정을 하는 것이고,
이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길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도
바로 이런 원리와 기초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혼인을 한
사람도,
혼인을 하지 않은
사람도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혼자 사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면 내세울 것도 아닙니다.
혼인 생활을 해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비행기로 가는
길,
기차로 가는
길,
자동차로 가는
길,
걸어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로
가든지,
중요한 것은
부산이라는 목적지입니다.
비행기로 가도
목적지가 다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걸어간다 하더라도
목적지가 같으면 언젠가는 도착하게 돼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가르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리와
기초’를 중심으로 한
가르침입니다.
환자를 치유하는
것도,
기적을 행하는
것도,
악령을 내쫓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언자는
자신의 권위와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말을 합니다.
2월의 첫
날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만으로
충분한
-양승국신부-
바오로
사도 서간 중에 가장 흥미진진한 서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코린토 서간입니다. 서간을 읽다보면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교회 신자들을 향한, 그리고
이 시대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을 향한 절절한 애정, 무한한 인내, 아버지로서의 사목적 사랑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누가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 자녀를 두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길이 잘못된 길이지 아닌지 구분도 못하고 끝도 없이 깊은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달래도
보고 얼러도 보고, 호되게 야단도 치는가 하면 너무 화가 나서 입에 담지 못할 악담도 합니다. 오로지 타락의 끝으로 향하는 아들을
위해서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사목서한인 코린토서가 바로 그랬습니다. 코린토는 어떤 도시였습니까? 기원전 1000년전 쯤에 시작된 코린토는 지정학적인 특성상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다사다난한 역사와 함께 폐허와 재건이 반복되는 등 급격한 부침을 거듭한 도시였습니다.
지리적
요충지였던 코린토였기에 다인종, 다종교가 혼합된 개방적 도시로서 도덕적 윤리적 타락도 심각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이 판을 치고 있었고
음란과 환락이 만연하던 거대 도시가 코린토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바오로 사도가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도시의
회개와 복음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던 흔적이 코린토 서간에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때로
질책과 경고를 서슴지 않고 때로 다정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도 아끼지 않습니다. 코린토 신자들을 자식처럼 아끼고 극진히 사랑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으로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나는
여러분이 걱정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는 과정에서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었습니다. 수도 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나 하면 밥 먹듯이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는 고통과 십자가 앞에 면역이 되어 그 어떤 환난 앞에서도 걱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시련이 다가와도
오로지 주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며 아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체험했던 소중한 경험을 코린토 교회
신자들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의 몸과 마음이 모두 전적으로 주님께 속한 상태이기에 더 이상 세상의 일은 바오로 사도에게 큰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내면은
이미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더 이상 그 안에 이 세상의 고통, 세상살이로 인한 걱정꺼리들이 자리할 공간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환난의 시대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바오로 사도가 경험했던 그 강렬하고 절실했던 하느님 체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내면이 은혜롭고 감미로운 주님 현존으로 가득 차 있어서 더 이상 그 무엇도 우리 마음을 산란케 하지 않는 그런 상태, 세상이
주는 고통이나 시련이 크다 할지라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눈물로 하소연한 것처럼 “우리 각자가 바로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기에 주님만으로 충분한, 주님의 현존만으로 행복한 그런
신앙생활 아닐까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르 1,25) -오상산신부-
2월
첫날입니다. 1년중 가장 짧은
달이니 더 알차게 보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영적성장을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이는 데도 불구하고 성장이 참으로
더디다면 뭐가
문제일까요? 아마도 쓰잘데 없는
것으로 우리 맘이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보다 먼저 내 속에 있는
나쁜 것들을 비워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게 나의 힘만으론
쉽지 않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
주십사고... 내 안에 있는
사악한 감정과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 이런저런 세상사에
대한 근심걱정, 이런 것들이 내
속을 점령하고 있는 한 나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가 없으니까요.
오늘 주님께 이런
악령들을 내쫓아 주십사
청합시다. 그분은 기꺼이 나를
위해 그렇게 해주실
겁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리고나서 맑고 깨끗한 좋은
영으로 조금씩
채워갑시다.
관계의
성사화
-기경호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회당에서 ‘말씀’과 ‘행적’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체험하도록 해주신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거기 있던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해방시켜주셨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마르 1,27)이라며 몹시 놀랐다. 어떤 점이 새롭고
권위 있었을까? 당시 율법학자들은 구약성서와 조상의 전통을 근거로 하여 율법의 규범과 조상들의 여러 사화를 가르쳤다. 그들의 가르침은 과거에
치우쳐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와 기쁨으로 다가올 희망을 선포하셨다. 율법학자들은 하느님께 의지하는
이들과 소통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율법의 준수와 전통을 강조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소통하시며 하느님 체험으로 가르치셨다.
그 결과 그분의 가르침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 안에 근원적인 변화와 자비를
불러일으켰다(1,23-28).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참된 권위를 살려면 무엇보다도 출발점이 ‘내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이 되어, 말씀대로 행동할 때 권위가 서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철저히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을 건네줄
때에 참된 권위가 드러난다. 예수님처럼 온 마음과 정성과 혼을 다해 사랑할 때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와 선이 드러난다. 말씀과 행동이 온전히
일치되어 하느님을 드러내는 순간이야말로 경이로운 창조의 때가 아닐 수 없다. 말씀을 듣지 않는 권위, 사랑없는 권위,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는
권위는 참 권위가 아님을 새기자!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함께하는 ‘관계의 권위’이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 하면서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1,24) 하고 외친다. 더러운 영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방어하기 위한 일종의 완강한 항변이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셨다. 더러운 영의 반응은 실은 우리의 죄 곧 하느님과 단절된 모습이며, 하느님과 무관하게 자기 의지를 제멋대로 사용하려는
삶과 태도를 말한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서 정화해 나가실 온갖 형태의 억압적인 힘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내쫓고 자유와 생명을 선사하러 오신 분이시다(마르 1,25).
오늘날
왜곡된 개인주의가 팽배해가고 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스스로를 하느님과 단절시키고 폐쇄시킴으로써 스스로 더러운 영으로 변신해가는 것이다. 내
돈 쓰는데 무슨 상관인가? 내 멋에 살아가는데 왜 간섭하는가?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것은 바로 나인데 왜 감히 나를 비판하느냐? 너나 잘
하세요! 나의 생각과 성향이 다르면 안 어울리면 되지 등등. 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는가? 회당은 하느님과 함께하고, 인간공동체가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듣고, 하느님의 자비를 함께 체험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함께함’, ‘함께 어울림’, ‘함께 아파해주고, 기뻐해주고,
슬퍼해주는 삶’이 아니라면 우리는 더러운 영으로 남게 되리라! 단절은 소외를 부르고 소외는 죽음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눈으로, 그분의
말씀과 사랑으로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통하여 하느님을 드러내고 체험하는 ‘관계의 성사화’가 절실한 때이다.
제1독서는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신명 18,20)고 말하면서 모든 죄의 뿌리는 우상숭배에 있다고 가르친다. 우상숭배는
생명의 하느님을 떠나는 행위로서 죽음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죄는 아무 제한도 받지 않으려는 것이며, 한 마디로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려는 사람은 육과 세속의 노예가 되고 만다. 하느님의 자유로운 종이 되지 않으려는 사람은 반드시
죄악의 노예가 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이며, 관계의 성사화를 외면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불러주셨음을 믿고 먼저 그 안에서 자유로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하고, 나아가 신자로서 지속되는 삶
가운데에서도 온전히 주님께 마음을 쓰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길임을 가르친다. “나는 여러분이 걱정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1코린
7,32) 그렇다! 걱정 없는 행복한 삶은 내 안의 더러운 영을 몰아내고 하느님을 품고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가능한 것이리라! 오늘도
하느님의 말씀과 자비, 선과 자유 안에 머무는 행복한 날 되길
바랍니다.
-한상우신부-
"나자롓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가 맺고있는
관계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시와
억압 통제와
간섭뿐인 무의미한 우리의
관계가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나누는 관계이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시하고
통제하는 하느님을
잃어버린 영혼의
절규처럼 어두운 영은 가슴을
찌르며 주님을
마주합니다.
삶이란 가장
먼저 주님과 관계를
맺으며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삶의 근원적인
치유는 먼저 조용히
주님의 말씀을 듣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조용히
하여라."
삶에 대한
인식은 주님에 대한
인식이기도
합니다.
안주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처럼
사람됨이 무언지를
고민하며 사람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거기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깨닫게
됩니다.
무수한 욕망의
존재이지만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거기에서 욕망을
넘어선 새로운 행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두운
욕망은 결코 우리의
삶을 지탱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롭고
권위있는 주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 삶을 맡겨야
할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참된 환희의
기쁨은 주님 뜻에 복종하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생명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과
‘갑을관계’
박재식신부-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인지 미사를 봉헌할 때 교우들 표정이 썩 좋지 않습니다. “왜 인상을 쓰고 계세요?”라고 물으면 억지로 웃으면서 “감기 때문이지요. 신부님이
옮기신 듯합니다” 하고 답합니다. 이번 겨울에는 제가 신자들에게 ‘더러운 영’을 전파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죄송하고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의 모습을 △큰소리를 지른다(마르 1,23) △괴성을 지른다(마르 9,26) △사납다(마태 8,26) △고통스러워한다(마태 12
45) △실신 상태나 경련을 일으킨다(마르 9,18) 등으로 표현합니다. 모든 특성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결국 타인과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기 힘든
사람이며, 주변인들에게 외면당하는 부류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에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길 수 있는 사소한 일인데도 지나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갑을관계’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언론에 보도되는 것은 대부분 식당을 비롯한 상점에서 손님(갑)과 종업원(을)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들입니다.
시골에서 곡물이나 과일을 도시에 판매할 때도 이런 문제가 부지기수로 발생합니다. 배나 곶감 등을 보내면 “색상이나 빛깔이 동일하지 않다”며 일정
기간이 지났는데도 반품을 요구하는 소비자가 있고, 과일을 먹다 보니 썩은 것이 있다며 바꿔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농민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변상을 해야 합니다.
인간 관계 속에서
이와 비슷하게 벌어지는 차별이나 억압을 미국 ABC방송사의 프로그램 ‘What would you do?’(어떻게 할 생각이세요?)에서 자주
봅니다. 연기자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현상(모욕당하는 노숙인, 인종차별 등)을 연기하고 몰래카메라로 시민들의 반응을
살펴봅니다. 반응을 보인 시민들에게는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묻습니다. ‘What would you do?’는 우리가 타인의 상황이나 사회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과의 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는,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그것도 권위를 지니시고
말입니다. 권위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입니다.
영어로는
‘authority’(지휘권, 권한)입니다. ‘au’는 ‘늘리다. 증가하다’라는 의미이므로 ‘autor’는 ‘자라게 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참된 권위는 ‘하느님의 힘으로 누군가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초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릇된 권위는
누군가에게 공포와 억압, 두려움을 주고 서로 대화와 소통을 어렵게 하며 개개인의 삶을 축소시키거나 단절시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릇된 권위는
독재정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공자는 군자가 ‘덕’과 ‘예’에 의한 교화를 통한 정치로 질서를 회복하고 태평한 세상을 이루는 것이 참된 정치적
권위라고 봤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사람을 살리시고, 서로 만남과 대화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으로서 완성을 향해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참 권위를 보여주십니다. 교우
여러분! 저도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등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존경과 배려를 통해 참다운 권위가 흘러넘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도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1월 10~11일
도시 손님 25명이 성당을 다녀갔습니다. 토요일 저녁 주일 미사를 마치고 교육관 마당에 나오니 본당 어르신들과 손님들이 어우러져서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며 웃으시는 어르신들 옆에서 장단을 맞추면서 추임새를 넣고 흥을 돋우는 손님들 모습은
기쁨과 환희 그리고 존경이라는 단어가 현실로 드러나는 느낌이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함께할 수 없는 멋진 축제였습니다. 참 기쁨의 인간 관계를
보았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도 예수님처럼 참 권위를 가지고 더러운 영을 추방해 힘차고 신명 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갑시다. 아멘.
치유, 하느님의
선물
-강우현
신부-
오늘은 마르코
복음의 첫 이야기에 속하는 ‘더러운 영’ 곧, 악령을 쫓아내시는 치유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복음 전면에 기록함으로써 마르코가 의도하는 것은
인간의 질병이 항상 악령에 사로잡힌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더러운 영들은 강박, 분노, 배척, 음해, 두려움,
공포 등의 정서를 불러 일으켜 인간에게 혼란을 가져다 줍니다. 또한 이러한 정서들은 인간에게 하느님의 길을 따르는데 있어서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마르코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을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 표현합니다. 그 사람은 더러운 영의 지배하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더러운 영의 지배에서 늘 구속되어 자신의 삶과 공동체 안에서의 삶이 혼란과 배척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의 삶은 예수님의 복음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과는 반대로, 자신의 일상은 늘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강박에 시달리는 삶을 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더러운 영의 지배에
놓인 사람은 정작 예수님과 만나면서 더욱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본색을 드러냅니다. “나자렛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마르 1, 24)라고 소리치며 예수님께 따지듯 묻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더러운 영은 자신의 입을 통하여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 25)라고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고백합니다.
이처럼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사람에게 마지막 발악을 하며 떠나갑니다. 이제 그는 더러운 영의 속박에서 자유를 되찾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기쁨을
누립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의 복음은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 속에서도 복음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겪는 어려움을 겪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강박과 분노, 공동체의 배척과 음해, 현실의 두려움과 공포 등 다양한 현상으로
우리를 무너뜨리려 하는 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힘들고 또한 불편한 진실로
다가옵니다. 머리로는 신앙에 힘을 믿는 다지만, 우리의 삶 깊은 곳에서는 믿음 없는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께 탓을 돌리고,
화를 내면서 주님의 말씀을 외면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보지 못하고 오직 주변과 주님에게 탓을 돌리게 하는 세력으로부터 벗어나야 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참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희망을 두고 신앙 여정을 힘차게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 나가라”(마르 1, 25) -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마르 1,21-28)
-차광호신부-
우리가 방금 들은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께서
인식일에 카파르나움에서 처음으로
가르치셨다고 전 해 줍니다. 그
가르침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알려주 고 있습니다.
그것은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첫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첫 반응 은 신앙을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르침과 더불어
예수님의 첫 행동은 더러운 영의 추방이었습니다.
더러운 영이란 사람을 자기 속에 가두어놓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다른 사람의 말은
담아 듣지 않으며, 자신의 뜻만을 관철시키려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실을 왜곡하고, 거짓을 말하며, 부자유스러운
행동으로, 자기 말고 다른 모든 것은 소외시켜버리려
합니다. 거기에 믿음과 친교는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상황을
주도하고 통제하려 합니다. 지배와 굴복만을
추구합니다. 결국 사라지고 없어질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면서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참조). 모든 것에서 모든 분이시지만,
마치 아무것도 아닌 분처럼 처신하십니다. 그런
하느님에게서 지배와 굴복은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용서와
화해 그리고 친교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영은
분노와 경련을 일으키며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 앞에서
떠나야만 했습니다. “더러운 영은 그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다.”(마르, 1,26)
하고 오늘 복음은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에 사람들은 놀라고 당황스러워합니다.
뒤틀리고 뒤집힌 세상 사물의 질서를 바로 잡으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은 사람을 자기 속에 가두어놓을 뿐만
아니라, 주위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마련입니다.
불의하고 부정한 제도와 구조와 법을 만들어 냅니다.
사람들이 ‘세상이 다 그렇지 뭐!’ 하며 자조하고 포기하고
절망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몸소
실천하심으로써,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해방 그리고 올바른 정의와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과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와 우리 신앙공동체의 삶은 자신을 사로잡아
자신 속에 가두어버리는 더러운 영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을 정화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더러운
영이 우리 교회 안에서 발붙일 곳을 없게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오늘 주일 복음 말씀을 새겨들으면서,
예수님께서 맨 처음 하신 행동이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삽시간에 퍼진
예수의 소문
-강길웅신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실 때 전도활동의 무대를 갈릴래아 지방 으로 정하시는데 그 중심지가 바로 가파르나움입니다. 세례자 요한 이 주로 남부에서 그의 사명을
수행했다면 예수님은 북부에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전도활동의 기간은 대략 3년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 며 예수님은 33세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보다 다르게 해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로 그 가파르나움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대중들에게 설교하시고 가르침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의 설교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대단히 권위가 있고 그리고 이해가 쉽게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놀라고 감탄했으며 특히 그분의 말씀 한마디에 악령이 무서워 도망치는
것을 보고는 모든 사 람들이 탄복을 했고 그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권위있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 해 봐야 합니다.
옛날 율법학자들은
성서에 대해서 많은 지식과 훌륭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율법학자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학자들의 권위가 쇠퇴하게 됩니다. 도대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은혜와 삶의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압과 두려움과
그리고 속박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말씀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백성들에게 목소리만 높였고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 축소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랑에서 외면하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생전 느껴보 지 못했던 하느님의 사랑이 넘쳐흘렀고 복잡하고 막연하기만 했던 하느님의 율법 안에서 그들은
하느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으며 또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풍성한지를 체험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진정
위대한 스승이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이론이 나 전통에 묶여져 있지도 않았으며 왜곡된 내용을 쓸데없이 고집하지도 않았습니다. 막연하고 애매한
것은 직접 예화를 들어 설명해 주셨으며 말씀의 참뜻이 무엇이며 거기에 어떤 힘과 사랑이 있는지 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위대한 스승의
모습이었으며 또 한 그것이 하느님의 가르침의 교수법이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언행의 일치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악령 보고 '나가라.' 하시자 악령 이 혼쭐이 나서 도망쳤습니다. 이런 일은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성직자들에게 자주 문제가 되는 것이 '언행의 일치'입니다. 아무리 강론을 잘하고 아무리 사목을 잘해도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으면 그는
권위를 잃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성직자라는 자들이 거짓말이나 하고 돈이나 밝히며 선하게 살지 않는다면 성직자로서의 그의 생명은 끝장난 것입니다.
평신도들에게도 이것은 굉장히 중요 합니다.
어떤 본당이 있는데
재정이 넉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의 열심과 기도로써 받은 은혜가 너무 컸습니다. 2백만 불짜리 집 을 거저 얻었습니다. 그래서 본당
신부가 우리가 한 푼도 안 주고 거저 성전을 얻었으니 우리가 모은 돈에서 십분의 일을 떼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묘한 일 이
일어났습니다. 의대 교수였던 회장과 신문사 사장이었던 어떤 형제가 들고일어나서 신부를 비난하고 신자들을 선동해서 악착같이 반대해서 본당을 아주
난장판으로 만들었습니다. 신자들이 그때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진 것을 나눈다는
것은 신앙을 떠나서도 꼭 실천해야 할 인간 의 과제입니다. 더구나 그가 신앙인이고 의술을 펴는 의사요 또한 언론인이라면 당연히 그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남들이 반대해도 그 들은 사람들을 설득해서 불쌍한 이웃으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런데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사랑을 펴야 할 사람들이 거꾸로 반대를 하게 되니 과연 하느님의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의사가 아니고 언론인이
아니라 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는 신앙을 떠나서도 한 인간으로서 끝장이 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불쌍한 이웃 들이 많습니다. 아니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이 많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바로 하느님을 배척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삽시간에
퍼진 예수님의 소문은 없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복음이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래서 예수님의 소식을 그렇게 전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말씀을 실천할 때 우리 안에 그리고 이웃에 예수님의 소문은 삽시간에 사회를 밝힐 것입니다. 가진 것을 나눕시다. 거기에 사랑의 권위가
있습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나라에서 판을 치는 악마를 내쫓자
-박영식신부-
2007년
1월 어느 날 모스크바 북동쪽에 위치한 관광지 야로슬라블에서 기념품을 파는 바추리나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에게는 막노동을 하는 남편과
요리사인 큰 아들, 군인인 둘째 아들, 초등학교 6학년생, 세 아들이 있다. 막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날마다 일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내가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을 팔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춥거나 덥거나 가리지 않고 날마다 애견을 데리고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2007년 1월 어느 날 애견이 산책을 나왔다가 바추리나씨를 향해 짖었다. 왜 그러는가 싶어 그 쪽으로 가보니 애견이 큰
가방 하나를 발견하고 짖고 있었던 것이다. 가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많은 명함들이 들어있었다. 또 가방 안에는 또 다른 작은 가방 하나가 더
있었다. 그 안에는 현금 30만유로, 3억 6천만 원이나 되는 현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 거액은 러시아에서 77년 치 월급에 해당했다.
바추리나씨의 머리 속에는
“이제
날품팔이를 하지 않고 평생 넉넉하게 살 수 있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뒤에는 난감한 생각도 들었다. “이 거액을 잃어버린
사람은 얼마나 걱정하고 울고불고 하겠는가?” 바추리나씨는 전직 경찰관인 이웃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 이웃은 “돌려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고
대답했다.
바추리나씨는
즉시 전화기를 들고 명함들에 적힌 전화번호로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혹시 돈 잃어버리지 않으셨나요?” “아닌데요.” 이런 대화가 몇 번 오간
뒤 드디어 어떤 사람이 당황하는 목소리로
“제가
야로슬라블에서 돈 가방을 잃어버렸는데요.”라고 말했다. 바추리나씨는 “그럼 이곳 야로슬라블로 와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생업이 있어서
모스크바로 가긴 힘이 듭니다.” 하고 약속장소를 정했다.
3시간
쯤 지나자 자기와 통화한 가방 주인의 비서가 찾아왔다. 바추리나씨는 주저하지 않고 가방을 건네주었다. 이 비서는 가방 주인의 지시를 받았는지
바추리나씨에게 1만 5천유로, 1,800만원을 사례금으로 제시했다. 이 사례금은 러시아에서 대충 4년 치 월급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그 비서는 한사코 이 사례금을 바추리나씨의 손에 쥐어주었다. 바추리나씨는 몇 번이나 거절하다가 그 비서가 돈을 받지 않자,
“그럼
좋아요. 이 돈의 딱 10분의 1을 루블로 주세요.”
단돈
1500루블, 5만 5천 500원을 받겠다고 했다. 그 비서는 가방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한 뒤 5만 5천 5백 원을 건네주었다. 바추리나씨가
이 돈을 받겠다고 한 이유를 나중에 이렇게 설명했단다.
“그렇게
큰 돈 3억 6천만 원은 내게 필요 없지요. 그 많은 돈은 내와 내 가족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어요. 제가 직접 벌어야 보람 있다고
생각했죠. 사실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않았어요. 5만 5천 5백 원은 큰 아들과 남편에게 셔츠를 하나씩 사주려고 받은 거예요. 이 돈을 안
받는다고 했으면 그 비서분이 가지 않을 것 같기도 했구요.”
주위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오이
두라!”(‘이런 바보 같은 이’라는 뜻의 러시아어).
“그
돈이면 평생을 안락하게 살 수 있는데 왜 돌려 주냐?”하는 것이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이 바추리나씨를 칭찬했다. 바로 기념품 가게에서 함께
일하는 처녀가
“저는
언니의 행동이 옳았다고 믿어요.”라고 했단다.
바추리나씨는
남편과 큰 아들의 셔츠를 사고 남은 돈으로 개 사료를 사서 돈 가방을 발견한 애견에게 줬다. 바추리나씨의 사연이 방송을 타고 모스크바로
보도되자, 러시아 시청자들이 감동했다. 사실 빈부격차가 워낙 큰 러시아에서 3억 6천만 원이나 되는 거액은 구경하기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 시민들이 자기들 생각으로는 돈 주인을 찾아 돌려주기에는 더더욱 어렵다는 점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전
지금도 제 행동이 썩 마음에 듭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이 가방을 주웠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라고 말하며 바추리나씨는 수줍게
웃는다.
바추리나씨는
물욕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다. 사례금으로 자기 옷을 사기는커녕 남편과 아들을 먼저 생각했다. 그와 반대로 그 거액을 돌려준 것을 애석하게,
아깝게, 바보짓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물욕에 매여 사는 자들이다. 그들은 돈 주인이 애통한 마음으로 슬피 우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눈물로
제 욕심을 채우려는 이기주의자들이다.
“새는
가는 실에 묶여도 날지 못한다.”(십자가의
성 요한)
우리는
무엇엔가, 어디엔가, 누구에겐가에 매여 산다. 병리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자유에는 심각한 한계가 있다. 우리는 늘 어딘가에 갇혀 있고, 무엇인가에
씌어 있다. 우리는 물욕, 제각기 다른 사고방식, 가치관, 인생관, 버릇과 성격, 자기만의 문화적 배경, 한정된 인생체험과 지식, 선입견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처신한다. 우리는 이러한 틀 안에 갇혀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우리 각자 안에는 내적 힘, 억압관념, 고정관념, 열등의식
들이 있어서 우리의 본심과는 다르게 말하고 처신하곤 한다. 우리가 제 기준에 따라 살면 그 기준에 매여 노예가 되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온갖
선입견과 강박관념에 마음을 빼앗기기 일쑤이다.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우리를 사로잡거나 묶는 힘을 악마라 한다. 바오로 사도도 인간의
자유에는 심각한 한계가 있다고 가르쳤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기 때문입니다.”(로마
7,19)
우리는
죄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선 대신에 악을 저지르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가 놓여 있는 이러한 처지를 ‘원죄’라 한다. 원죄는 이기심에 빠지게 하는
충동이다. 원죄는 우리 각자가 하느님께 반항하는 방향으로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데서 드러난다(로마
7,15-20).
인간의 자아는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지만 그 사람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악을 저지르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악마 때문에 우리가 선택한 것을 행할 자유를 자주 상실하고 만다. 그래서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결정을 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스스로 자기 묘혈을
파는 결정을 하고 만다. 이따금 우리가 자신을 해치는 적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없을 만큼 우리의 자유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세례로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아 원죄를 용서받기 전에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면서도 악을 저지르고 말아 내적 갈등을 겪는 연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온전한 인간성을 잃어버려 죄를 짓고 죽어야 하는 운명이다. 우리는 온갖 선입견과 강박관념과 이기적 욕망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살기 어렵다고 느낀다. 예수님은 악마의 힘을 분쇄함으로써 죄악과 죽음으로 점철되는 인간세계를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세계로
변화시키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악마의 지배에서 해방되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고 하느님의 생명을
누린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 우리 가정과 공동체와 나라에 어떠한 악마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가? 악마는 우리가 지닌 성격상 결함, 열등의식, 이기심을 이용하여
우리를 쉽게 사로잡는다. 나를 얽어매는 것은 현세생활에 대한 집착, 자존심, 남을 깔보는 근성, 기회주의, 별것 아닌 말이나 무관심으로 쉽게
상처를 입는 마음, 자기를 과시하려고 거짓말을 습관적으로 하는 경향, 자기 뜻을 따르지 않는 이웃을 욕하는 악습, 게으름 들이 아닐까? 오늘 전
인류를 괴롭히는 악마는 인류형제애, 공동선, 진리, 법이라는 하느님의 뜻과 이웃의 권익보다 물욕과 이기심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충동질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온갖 불행과 빈부격차와 테러와 전쟁이 자행되고 있다.
악마를
내쫓으시는 예수님을 충실히 믿고 따르는 사람은 바추리나씨처럼 이기심과 물욕에서 자유롭게 되어 남의 삶을 고달프게 만들지 않고 남의 권익을
살려주고 남을 행복하게 하는 힘을 받는다. 가족들이 함께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이 이 그들을 사랑과 행복과 기쁨을 전하는 사도로
만들어주신다.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어느 안식일에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쳤고,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신원(身元)에
대해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함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더러운 영을 내어 쫓아서 그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고
경탄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오늘의 신문 기사와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정신 질환자를 지칭합니다.
복음서들이
기록된 시대에는 자기 사상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만들어 그 안에 자기가 전하고 싶은 사상을 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또
다른 이들에게 옮기면서,
그
이야기 안에 있는 저자의 사상에 공감하고 자기 것으로 삼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도 마르코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그리스도 신앙을 담아서 각색한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서는
그 시작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초기 신앙인들이 믿고 있는 복음을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끝내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자,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고
신앙고백을 한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말하는 신앙고백을 그 시작과 그 마지막에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기록하겠다는 의도로 저술한 복음서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문제들을 흔히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단어로 요약합니다.
사는
것,
늙는
것,
병고
그리고 죽음,
인생의
네 가지 현실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대단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일들이지만,
불가사의(不可思議)하여,
인간
번뇌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
추앙받는 고오타마 싯달다 태자(太子)가
일찍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出家)하여
수도(修道)를
시작한 것도 이 네 가지 번뇌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류역사가
있으면서 각양각색의 종교들이 발생하고 번창한 것도 바로 이 네 가지에 대한 해답을 인류는 꾸준히 찾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해를 보고,
혹은
달을 보고 빌기도 하였고,
정화수를
떠놓고 정성을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모두가
이 불가사의한 주제들에 대한 해결 혹은 극복을 원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이야기의 무대는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이는 회당입니다.
그
곳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자 소리를 지르며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함구령을 내리면서 그 더러운 영을 그 사람에게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나았습니다.
이
복음서는 이 이야기로 더러운 영이 지배하던 세상에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하신 분,
곧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더러운
영은 벌써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사람들이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
믿음이 근거가 되어 오늘의 세례 성사 의례 중 마귀를 끊어버린다는 신앙고백을 하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하느님이
아니면서 사람을 지배하는 모든 것을 세례에서 끊어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더러운 영에게 함구령을 내렸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함구령을 자주 언급합니다.
더러운
영들에게,
혹은
기적적으로 치유된 이들에게,
또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이
복음서는 사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혹은 거룩하신 분 등,
신앙고백의
성격을 지닌 말을 할 때마다,
예수님이
함구령을 내리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자 이 복음서는 백인대장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모르면서,
예수님에
대해 올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십자가의 죽음을 시야에서 잃지 않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서는 십자가를 포함하여 예수님을 인식해야 하고,
그
인식을 기반으로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하는 상징입니다.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에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결말이 십자가였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그 사실을 모르면,
예수님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끝을 맺은 그분의 삶이 하느님의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지극히
높으시다는 우리의 통념에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 혹은 하느님을 믿어서 인간이 더 잘 살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더 많은 재물과 더 존경스런 지위를 얻도록 해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류역사가 하느님을 생각하며,
계속
품었던 염원입니다.
그
염원은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더러운 영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
염원을 성취해주는 것이 신앙이라고 망상하는 것은 예수 귀신의 힘으로 팔자 한 번 고쳐 보겠다는 인간의 염원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합니다.
생로병사의
인간 현실을 살면서 이웃을 보살피는 섬김을 위해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은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실천에서 참다운 인간의 자유를 읽어내고,
그것을
배우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그것이
재물이든,
지위든,
자기
한 사람 잘 될 것을 약속하는 더러운 영이 물러나는 곳에,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신앙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며 살아,
그분의
자녀 되게 하는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는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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