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살이 / 신서영
하루 일과 거의가 동선이 정해져 있다. 집안의 잡다한 일부터 바깥 볼일과 일터로 가는 것까지 동선 따라 부지런을 떤다. 아니 족쇄에 묶었다. 날마다 같은 일정을 싫다고 손사래 칠 수도 없고, 억지를 부릴 수도 없다. 그날 주어진 대로 그냥저냥 동선에 의해 하루를 흘러 보내기 때문이다. 내게 필요한 일로 행해진다는 것도, 필요 없는 일에는 무관심할 뿐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다른 그 무엇이 그리운 건 나로선 어쩔 수 없다.
이십수 년 동안 안락동에서 해운대의 일터로 가는 동선이 세 번째 바꿨다. 오랫동안 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사시장철 집에서 나서는 시간은 같으나 가게 도착 시간이 들쭉날쭉하였다. 교통체증이 심한 도로 사정은 사람 마음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항상 심신은 좇기면서 남편과의 약속인 가게 교대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다. 약속을 소홀히 여긴다는 낙인이 찍히기 십상이지 않은가.
도시철도 사호선이 개통된 이후부터는 충렬사역까지 십 분 이상 걸어서 지하철을 이용했다. 버스 정류장 가는 거리에 비해 두 배다. 거기에 미남 종착역에서 삼호선으로 환승하고 또 수영 종착역에서 이호선으로 환승했다. 환승할 땐 무엇에 홀린 듯 몸과 마음이 재빨라진다. 잠자는 세포가 일제히 일어난다고 할까. 그때의 내 출근길 동선을 지도처럼 그리면 완전 지그재그다. 그래도 그 동선을 고집한 것은 일터로 가는 시간이 버스보다 조금 단축됐고 제시간에 도착하는 이득이 있었다. 그때 “도시철도는 약속을 지켜드립니다” 라는 광고가 새롭게 와 닿았다. 또 다양 층의 승객들 인생사를 엿보는 덤도 즐겼다.
지하철 승객 대부분 핸드폰을 보느라 서로 본동만동이지만 앞이나 옆에서 주고받는 이야기가 친근하게 들린다. 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지기도 하고, 연민이 일기도 한다. 날마다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재미도 크다. 나 역시 그들에게 그 대상이니 피장파장이랄까. 무엇이든 연속적이면 지겹기 마련이듯 나도 때로는 계절이 보고 싶어 굳이 버스를 타고 기분전환을 하기도 했다. 역시 사람은 시원한 눈 맛도 중요하다는 내 지론을 못 말렸던 것이다.
도심 어느 대로변의 동네든 변하지 않은 곳이 별로 없다. 그래도 해운대로 가는 길의 주변만큼 변화가 큰 데도 드물다고 본다. 전에는 원동교 지나서부터 도로 가로 센텀까지 작은 동산이 쭉 이어져 있었다. 크고 작은 나무들과 온갖 꽃들이 어우러진, 폭이 조금 넓고 잘 다듬어진 동산이었다. 나는 동산을 낀 그 길이 옥실옥실 하여 정이 푹 들었다. 그 힘에 오래전 <나무가 있는 거리>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그게 내 첫 수필집의 제목이 된<<나무들의 왈츠>>다. 그만큼 매일 일터로 오가며 자연과의 교류가 끈끈하게 이루어진 그 애정이 아직도 내 가슴에 진득하게 품고 있다.
그 동산을 오래 전 동해선 전동열차 철길 공사에 내 주었다. 공사가 완공 된 후부터 쭉 뻗은 철길엔 띄엄띄엄 스쳐가는 기차와 자주 오가는 전동열차가 동산대신 주인공을 꿰찼다. 전동열차의 쾌적한 실내는 희생된 그 자연들이 준 선물이 아닐는지. 남은 건 도로 가의 도열한 느티나무 가로수만 옛 정취를 붙들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큰 둥치에 키 높은 두 그루의 미루나무가 사라진 게 못내 아쉽다. 유난히 이파리가 반짝거리는 미루나무를 바라보며 어릴 때 꿈을 키웠던 추억을 되새겨 주었는데. 가슴 한 구석에 간직한, 이루지 못한 그 꿈마저 데리고 갔다고 할까.
언제부턴가 마천루로 급부상한 센텀 말고도 운촌에서 해운대 도시철도역, 좌동 들머리까지 높은 키를 자랑하는 빌딩들이 즐느런히 솟아있다. 마치 이국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가로수 사이로 불어오는 해풍이 가슴을 쏴하게 쓸어주기도 했다. 이제 푸른 바람은커녕 밀집된 건물들이 넓은 하늘 공간을 훔쳐가 갑갑할 지경이다.
도시 철도에서 두 번 환승한 교통수단은 몇 년 만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작년부터 내 동선이 바뀌었다. 동해선 전동열차 노선의 안락동역이 있는데서 시작됐다. 집에서 도시 철도역보다 전동열차역의 거리가 오 분이나 빠르고 벡스코역까지 칠분이면 도착한다. 환승도 한 번이면 되는데다 차창 너머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행운도 따랐다. 거기에 일터 도착 시간이 정확하다. 덕분에 살짝 금 갔던 내 신용이 회복됐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집에서 전동열차 역까지 가는 길이 대로라는 점이다.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역으로 가는 샛길에는 골목을 친구하여 나란한 낮은 집들이 제 각각 사뭇 다른 분위기다. 다세대 주택의 화단에 애초롬하게 돋아나는 새순을 시작해서 단독 주태의 난간에 철따라 핀 종깃거리는 꽃들이며, 담장을 목마 삼아 웃자란 나무에 노란 비파 열매, 붉은 대추와 감이며, 소방도로에 트럭을 정착해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야채와 과일 장수, 생선장수가 가득 실고 온 들내음 바다내음의 정서들이 소소한 즐거움으로 애당겼다. 그걸 다 멀리하고 앞뒤로 달리는 자동차가 벗인 듯 덩달아 마음도 걸음도 삭막한 자동차를 닮았다. 늘 그날이 그날이니만큼 자연과의 소통을 갈망하는데 대로는 눈길이 머물 곳도, 마음을 뺏길 곳도, 발걸음이 멈춰질 곳도 없으니 말이다.
남편의 동선도 동해선 전동열차 개통과 동시에 바꿨다. 전동열차로 하는 출근길에 운촌의 장산 초입에서 봉수대(간비오산)를 넘어 해운대 여고 뒤편으로 둘러 가게로 간다. 사 오 십 분의 짧은 산행을 하니 날마다 건강까지 챙기는 계기가 됐다. 그전에는 자동차로 출근해서 늦은 저녁 때 나와 함께 귀가했다. 남편이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탓에 늘 음주운전 걱정을 떠안고 있었다. 그 일로 옥죄였던 마음이 해방된 셈이다. 여기에 퇴근길, 남편과 나란히 걷는 시간이 주어져 다정하게 손을 잡고 다닌다. 처음엔 물론 내가 먼저 손을 잡았지만. 걸음이 느리고 요통이 있는 나를 이끌어 준다고 해야 맞겠다. 전에 없었던 자상한 면이다. 전동열차가 사랑의 매개체다.
동선은 삶의 길이자 동반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