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44
11월17일[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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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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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C2jrpEbgbs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ACN/고통받는 교회 돕기 한국지부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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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양승국_스테파노_신부님
2024년 11월 17일 일요일
[녹]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걷다 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는 유달리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들이 많습니다.
바로 작고 가난한 이들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진 난민들, 이주민들, 재소자들, 환자들, 노인들, 가난한 사람들...
이런 분들을 따뜻하게 품어 안고 동반하려는 교황님의 의지가 대단합니다. 교황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총애하시는 당신의 의지를 만천하에 드러내셨는데, 그것을 바로 오늘,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정한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2015년 미국을 방문하셨을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미국 의회 연설에서 강대국의 횡포를 신랄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야만적인 자본주의,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횡포로 인한 부의 불균형에 대한 개선을 강하게 촉구하셨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미국 상하원들은 마음 속으로 큰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연설이 끝나고 교황님과 함께 하는 만찬이 준비되지 않을까?
식사 후에는 교황님과 찍은 인생샷 사진 한 장 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교황님은 연설이 끝난 후 점심 약속이 있다면서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대체 어떤 사람과 점심 약속이 되었을까? 대통령? 아니면 미국 주교단? 모두 아니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성 패트릭 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300여명의 노숙자들과 함께 간소한 점심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자신이 작은 이들의 사목자요 동반자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함께 식사를 나눈 노숙자들을 만나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저도 이민자 가족입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낙담하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또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셨는데, 그곳은 교도소였습니다.
거기서 재소자들과 만나 시간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격려하셨습니다.
“걷다 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더러워진 발을 깨끗하게 잘 씻기 바랍니다.”
이혼 후 재혼한 가정과 그 자녀들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목적 배려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님은 단호하게 직진하십니다.
“실수와 죄악은 단죄돼야 하지만,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이해받고 사랑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바탕으로 현대 가정의 실제 삶과 현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들의 잘못을 단죄하기보다는, 이혼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가정들을 위해서 교회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합시다.”
“우리 교회는 야전병원입니다. 그 안에서 성체는 완전해진 자들에 대한 포상이 아니라 병자들을 위한 치료약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향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우선적 선택과 극진한 사랑을 얼마나 본받고자 노력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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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Qqe1KVQQ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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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법칙: 죽음의 법칙을 알면 생존 법칙도 보인다>
오늘 복음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적어도 이스라엘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죽음은 생각하기 싫은 주제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묵상 할수록 더 오래 살 수 있는 생존의 방법을 터득하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멸망의 징조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우선 세상의 한때 잘 나갔다가 망하게 된 여러 사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들에게서도 분명 태양과 달, 별이 빛을 잃는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먼저 한때 휴대전화 분야의 글로벌 리더였던 노키아 제국의 멸망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노키아는 자신의 명성과 기술에 안주하여 새롭게 개발되는 애플과 구글의 터치스크린 시스템을 거부하였습니다. 잠깐이었지만, 더는 그 기술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코닥의 멸망을 살펴볼까요? 코닥은 세계 카메라 필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디지털카메라는 결국 자기 이익을 갉아 먹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으로 그 기술을 묻어버렸습니다. 다른 회사들에서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하고 실용화하였을 때 그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반면 삼성 이건희 회장이 199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자사 제품을 사주는 고객들에게 불량품을 내놓는 게 부끄럽지도 않으냐고 호통을 치며, “아내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1995년 삼성 휴대폰에 심각한 결함이 발견된다는 말을 듣고는 이건희 회장은 공장에서 휴대폰, 텔레비전, 팩스기 등 불량품을 모두 폐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추정 가치 약 500억 원(당시 약 5,0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자신들이 만든 상품이 불타 없어지는 모습을 본 삼성 직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자기 이익만이 아닌 고객을 감동하게 하려는 마음을 회복했을 것입니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자는 이런 말들을 했습니다. “경영 합리화로 잉여를 많이 올려 궁극적으로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기업인의 본분이며 사회적 의무다.”(1976년 언론기고)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면 그 상품을 사용하는 사람의 이익은 잊히게 됩니다. 그러면 구매자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그러면 망하게 됩니다.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처음의 관심은 고객들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나약함으로 차차 자기 이익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홍익인간, 곧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라는 이념으로 생겼습니다. 이것이 잊힐 때는 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계명을 기억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조금은 희생하면서 본래의 정신을 회복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예배’라고 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계명을 위해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살려면 규칙적인 화형식을 해야 합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셋째 날에 땅에서 나무들이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 나무들이 인간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인간이 멸망하지 않으려면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존재임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습니다. 해는 하루, 달은 한 달, 별은 1년 주기로 돌아옵니다. 이 규칙적인 예배와 기도가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경에는 하루, 한 달, 1년 주기로 규칙적인 예배 규정을 수없이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 예배가 무시되는 날 종말입니다. 이것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일입니다.
대전 ‘성심당’을 모델로 삼읍시다. 창업자 임길순 씨는 “평생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라는 정신으로 ‘성심’(예수님 마음)으로 가게명을 지었습니다. 여기서도 화형식이 있었습니다. 사업 확장을 위해 무리하게 빚을 냈다가 공장에 불이 난 것입니다. 이때부터 다시 마음을 다잡고 후손들은 창업자의 홍익인간의 마음으로 시작하여 5개의 매장으로 순이익이 3,400개 대기업 파리바게뜨를 넘어섰습니다. 지금도 그분들은 성당에 나와 기도하며 하느님과 창업자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사용자가 만든 물품이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괜히 그것에 에너지를 쓰지 않기 위해 그것을 파기합니다. 제 역할 수행을 위해 우리의 태양과 달과 별빛이 흐려지지 않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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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며, 교황님께서 제정하신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셨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성서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습니다.” 착한 목자의 이야기도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가난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세품아(세상을 품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지금부터 16년 전인 2008년 명성진 목사님은 학교를 나와, 세상에 버려진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학생들은 소년원엘 들락거렸고, 본드를 흡입했습니다. 희망도 없고, 갈 곳도 없고, 고독한 아이들이었습니다. 명성진 목사님은 우연히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고, 학생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서 경찰서, 법원을 다녀야 했습니다. ‘중독은 중독으로 치료할 수 있다.’라는 신념으로 학생들에게 기타를 가르치고, 음악 공연을 했습니다. 자전거로 몽골 여행을 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걸었습니다. 목사님의 진심을 본 학생들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서 튕겨 나온 학생들이 이제는 세상을 품은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자전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전거는 바퀴가 있고, 페달을 밟아야 움직입니다. 페달을 멈추는 순간 자전거는 쓰러지기 마련입니다. 세상에서 버려진 것 같은 학생들이 ‘믿음과 희망’의 페달을 밟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학생들은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자전거를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의 인생과 같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목적을 잃으면 멈추게 되고 멈추면 자전거처럼 넘어진다고 합니다.
저는 1988년, 지금부터 36년 전에 ‘돈 보스코 센터’에서 1년 동안 일하였습니다. 돈 보스코 센터는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만든 청소년 자립 직업 학교였습니다.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청소년들이 찾아왔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청소년들이 왔습니다. 돈 보스코 성인은 청소년들을 사랑했습니다. 세상에서 버려진 청소년들을 모아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돈 보스코 성인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었고, 그것이 살레시오 수도회가 되었습니다. 1988년 군대에서 제대한 저는 복학 할 동안 돈 보스코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성소국에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학생들은 돈 보스코 센터에서 ‘선반, 조립’과 같은 기술을 배웠습니다. 주일에는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는 학생들과 함께 농구도 하고, 미사도 드리고,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주일에는 학생들과 함께 방송통신고등학교에도 갔습니다. 저는 돈 보스코 센터에서 학생들을 위해서 헌신하던 신부님, 수사님, 선생님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일하면서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그때 했던 영어 공부는 복학해서 대학원 시험 볼 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놀라운 일을 체험했습니다. 20년 후인 2008년 제가 본당 신부로 갔던 본당에서 그때 돈 보스코 센터에서 함께 했던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결혼해서 세 아이의 아빠가 돼 있었습니다. 본당에서는 청소년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20년 전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글을 모르는 사람도, 세상의 지혜를 모르는 사람도, 특별한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진리의 길은, 깨달음의 길은 구원의 길은 아주 평범한 곳에 밝혀 놓으셨다고 합니다. 하늘의 별, 구름, 들의 꽃,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하느님의 진리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내가 변하는 만큼 세상은 그만큼은 변한다고 생각하면 구원의 문제도 그리 큰 숙제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면 세상은 그만큼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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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3,24-32: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오늘의 전례는 만물이 어떻게 마지막 날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밝혀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역사를 외면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간성을 완전하게 성장시킬 수 있도록 역사 속에 깊이 잠기는 것을 말한다. 다니엘서의 내용은 육신의 부활을 긍정하는 구약의 문헌 중의 하나이다(2마카 7,9 참조). 이제 인간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을 자기 전 존재로서, 육체를 가진 자로써 만나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마르코 13장 전체에 걸쳐서 하신 종말론적 담화이다. 오늘의 이 대목은 예수님의 종말론적 메시지를 “아들”(32절)이신 예수님께도 알려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신앙의 차원으로 확대해 실현하게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먼저 예루살렘이 당할 재난을 말씀하시고, 당신이 마지막 날에 심판자로 다시 오시리라고 하신다.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26절)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시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시며(마르 16,19) 마지막 날에 영원히 계속될 하느님 나라에 뽑힌 이들을 모으기 위해 다시 돌아오실 분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27절)라는 말은 히브리 사상에서 기다림에 대한 응답이다. 구약에서는 이것을 오직 이스라엘 12지파의 재결합만을 생각했지만(신명 30,4; 에제 34,12~; 이사 27,12-13; 43,5-6; 즈카 2,10; 8,7-8 참조), 여기서는 모든 믿는 이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참조: 요한 11,52)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는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하시며 알려주시고자 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라고 할 수 있으나 복음사가가 의도하는 것은 오셔야 할 그분은 어느 때나 어느 순간이나 오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잠시도 긴장을 풀지 말고 깨어있어야 하는 ‘기다림’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29절)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28절), 주님이 문 앞에 다가온 줄을(29절) 알 수 있는 표징들이 있다. 예루살렘의 종말은 그 동시대인들에게 표징이 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건이 종말의 예표일 수 있었고, 예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32절). 그러기에 항상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마르 13,35-36 참조) 그러므로 종말론적 삶이란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일상 활동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온갖 사물과 이 세상을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더 합당한 요소가 되게 하고, 언제나 나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금의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언제나 오실 수 있는 그분을 맞이하는데 떳떳하고 기쁘게 나아갈 수 있는 삶을 사는 삶을 말한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해 계속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스러운 사제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면서 당신의 사제직을 수행하고 계시다. 즉 현재에도 실현되고 있는 사제직이다. 둘째는 종말론적 내용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히브 10,12-13)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때에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에는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지만, 또한 우리에게 대사제이신 분이시다. 그래서 지금도 아버지 오른편에서 수행하고 계신 사제직 때문에 더욱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닥칠지 모르는 마지막 때를 잘 맞이하기 위해서도, 그때가 되어 여러 가지 어려운 때가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이 잃지 말아야 할 희망을 간직하고 이겨내고,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깨어있는 삶은 우리를 더욱 자유롭게 해 줄 것이며 완성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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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교회는 오늘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기념하며, 가난의 의미를 되새기고, 가난한 이들과 깊은 형제애를 나누도록 촉구합니다. 그리스도와 가난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가난하게 되시어(2코린 8,9 참조), 가난한 이들에게 파견되셨습니다.(루카 4,18; 19,10 참조) 교회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바로 전 주일에 기념하는 것도 그리스도와 가난의 깊은 관련성 때문일 것입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가난의 의미를 잘 새기면서,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참되게 거행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헐벗고 모든 것을 빼앗긴 십자가의 가난에서 그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부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시면서 가장 낮은 자로서 세상을 섬기신 그리스도의 가난을 따라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난을 닮아야 한다고 천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가 되셨듯이 교회도 비우고 버려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방식으로 구원 활동에 참여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파견되셨듯이 교회도 고통받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통받는 모습을 알아보고,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함을 강조합니다.(교회 헌장, 8항 참조)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닮아야 합니다. 이러한 가난을 자기 것으로 할 때, 모든 것을 하느님 뜻에 맡기며 보호와 도움을 구하는 이웃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책임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난을 간직할 때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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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실감나지 않아도, ‘이제 곧’ 이루어진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 무렵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24-32)
1) 종말은, ‘우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사건입니다. 또 최후의 심판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입니다. 24절과 25절의 ‘해, 달, 별들, 하늘의 세력들’에 관한 묘사는, 종말의 모습을 나타내는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우주 전체가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묘사입니다. <지구를 떠나서 다른 별로 간다고 해도 종말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 심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교 신앙인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하느님입니다. 신앙과 종교가 달라도, 또는 종교가 없어도, 무신론자라고 해도, 종말과 최후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볼 것이다.”는 “모든 사람이 볼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재림하신 예수님께서 집행하시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선택한 이들’은 ‘구원받을 자격을 얻은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선택해 놓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할 것이다.”입니다.<억울하게 누락되는 경우는 없다는 뜻입니다.>
2) 여기서 ‘여름’은 ‘추수철’을 뜻하고, ‘추수’는 ‘최후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가까이 왔다.’는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따라서 ‘여름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종말과 최후의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라는 말씀은, 당신의 재림이 ‘곧’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때가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시작된 때라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종말 선포’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복음 선포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입니다.(마르 1,15) 이 선포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으니 ‘지금’ 회개하고 당신을 믿으라는 선포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선포할 때,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10).”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루카 10,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우리는 모두 ‘종말의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까지 가는 기차에 탄 사람들입니다. 종점이 분명히 정해져 있기 때문에, 기차가 출발할 때 이미 종말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 강조하시는 것은 ‘이제 곧’입니다. 곧 도착하니까 기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것이 종말에 관한 말씀들의 뜻입니다.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이 세대’가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지 확실하지 않은데, 어떻든 지금 강조되고 있는 것은 아무도 종말과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종말과 재림과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4)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라는 말씀은, 종말의 날과 시간을 정하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만의 권한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 날과 그 시간을 미리 계산하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알고 계시는 것은 모두 예수님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라는 말씀은, “아들은 말할 수 없고, 그것을 선포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직접 하실 일이다.”로 해석됩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이 언제인지 결정하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당신만의 권한으로 직접 하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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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호진 요한마리아비안네 신부님]
<지금 당장>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6년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며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지내도록 선포하셨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우선 선택하여 모범을 보이신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들과 연대하며 그들에게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기를 촉구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는 때에 앞서 큰 환난이 일어날 것입니다.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입니다.”(마르 13,24-25)
다니엘서는 “네 백성의 보호자, 미카엘 대제후 천사가 나서리라. 또한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다니 12,1)고 말합니다. 재앙의 때 ‘책에 쓰인 이들’에게는 구원의 때이며, ‘현명한 이들’에게는 영광의 때입니다.
이때가 오면 하늘과 땅은 사라질 것입니다. 사람이 기댈 곳은 오직 말씀뿐입니다. 하늘과 땅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이들을 만든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심판의 때, 주님 재림의 때에는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오직 말씀만 남게 될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한계를 지니지만 하느님 말씀은 영원하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걸 간과한 채 살아갑니다. 자꾸 ‘나중에 하지’라는 말로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지체합니다. 사람은 그때가 언제인지 모릅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십니다.”(마르 13,32 참조) 미루다 보면 그때를 결국 놓치고 말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에게 기회가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살아갈 기회가 아직 우리에게는 남아있습니다.
특별히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행하기로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는 이들입니다.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해결할 수 없어 거리를 떠돌며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이들입니다. 대부분 노력하지 않거나 게을러서 가난하게 살지 않습니다. 혹 그러더라도 인간이라는 이유로 최소한의 생계는 보장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을 먼저 돌보셨고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자비의 희년을 마치며 오늘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정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비와 연대, 형제애 실천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이 자비를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징조를 읽고 그때를 준비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은 내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뵙고, 그때에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서 영원한 기쁨과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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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도정호 바오로 신부님]
<지금, 여기에서>
온 마음을 다해 노래를 부르는 가난한 무명가수, 간절함으로 뛰는 운동선수들의 땀의 진심이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그 진심의 힘은 대단합니다. 나를 돌아보게 하고,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마음을 열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힘 있는 사람, 많이 가진 사람도 나를 움직이게 하고 나를 돌아보게 하지만 가진 것 없는 사람, 힘없는 사람, 작은 일에 변함없이 성실한 사람,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른바 날개 없는 천사, 얼굴 없는 천사들은 더 큰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가슴을 열게 합니다.
대림절이 가까우면 교회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복음, 자신의 삶의 흔적을 돌아보게 하는 복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복음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처럼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도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메시지보다는 천재지변으로 불바다가 된 세상, 까무러칠 정도로 온통 혼란한 모습 같은 무서운 장면에 시선이 머물 수 있습니다. 그 시기를 누구도 알 수 없는 세상 종말의 끔찍한 상황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우리는 들으려 해야 합니다.
하느님만 아시는 세상 종말(마르 13,32 참조)의 순간은 언젠가는 분명히 올 겁니다. 세상 종말의 상황이 무섭고 두렵기도 하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끔찍한 세상 종말을 내 눈으로 목격하기 전에 나의 죽음, 나의 종말이 먼저 올 겁니다.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배려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되새겨야 할 것은 세상 종말보다 먼저 나에게 오는 나의 종말입니다. 교회는 순서 없이 다가오는 각자의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살아있는 나’에게 완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는 계속 주어지고 있다고, 매 순간 진심으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 지금 그리고 여기가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일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나도 모르게 쌓여가는 나의 습관입니다. 나의 습관이 나의 일상입니다. 나의 일상 안에 하느님이 계십니까? 우리 안에 하느님, 하느님의 자리가 있어야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인해 완전함으로 갈 수 있습니다.
순간순간 선하게 하느님을 향해 가는 나의 노력과 실천은 계속 되어야 하고, 선하게 살아가려는 다짐도 지금 여기에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아름다운 종말을 맞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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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장윤수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위 돌아보기>
개인적으로 종종 축구와 관련된 영상을 찾아보곤 하는데 잘 못하는 선수들의 특징 중에 공통적인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변의 선수들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잘하는 선수들은 공을 가지고 있지 않는 순간에도 수시로 주변의 선수들을 파악하고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공을 가지고 있을 때 다른 선수들을 보려고 하면, 어찌 되었든 공에 시선이 분산되어 잘 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다른 선수들의 움직임을 파악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공을 가지고 있을 때에 빠르게 상황에 대처할 수도 있고, 패스도 더 잘 주고받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은 어쩌면 기적이라는 공을 받기만을 바라며, 다른 것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변의 이웃들과 상황들은 바라보지 못하고 오로지 공만 쫓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한 순간만을 위해서 말이지요.
하지만 하느님 나라 완성이라는 ‘결승골’ 을 넣기 위해서는 모든 선수가 유기적으로 잘 움직여야만 그 골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내 주변 이들을, 상황들을 수시로 바라보고 그들과 소통해 나가야지만 완성될 수 있습니다. 단 한 명도 배제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 한 번 만져보겠다고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 움직여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마지막 날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 무렵……할 것이다.’ , ‘그때에……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 즉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기 위해서는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게 되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표징을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 행동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례력의 마지막을 향해가는 지금, 우리 주변의 모든 것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활동하고 계시는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알아들을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는 시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 이들에게 늘 귀 기울이고 관심 가질 수 있는 신앙인 되도록 다시 한 번 결심할 수 있는 시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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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신부님]
<오늘을 위한 그날>
연중 시기의 마지막을 기다리면서 오늘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합니다. '가난하다'는 표현은 성경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억압당하거나 소외된 이들,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 등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아마도 현재의 관점에서 가난한 이들에는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사지로 내몰린 이들도 속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가난'이라는 말은 인간의 힘 때문에, 하느님께서 세우신 조화로운 질서에서 벗어나 있는 모든 이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연중 제33주일인 오늘의 말씀은 종말과 심판을 강조합 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종말을 어둡고 두려운 이미지 안에서 소개합니다. 대표적으로 오늘 복음 말씀이 그렇습니 다.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르 13,24-25) 마치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물이 모두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종말은 이 세상의 마지막을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예언서는 종말에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다니 12,2)고 전합니다. 이것은 종말 때의 심판에 관한 설명입니다. 종말에 이루어질 심판에는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선과 악, 생명과 죽음, 영광과 수치는 더 이상 공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상 에서의 선택이 마지막으로 드러나는 때입니다. 언제일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그날을 위한 준비는 일상에서의, 오늘의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비록 우리가 그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하지만, 종말에 관한 말씀이 우리에게 항상 두려움을 자아내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태도입니다. 언제인지 모르기에 지금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준비이기 때문입니 다. 지금 충실한 이들은 그날이 언제 오든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선을 선택하는 이들은 심판의 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종말에 관한 말씀은 미래를 걱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게 합니다. 다가올 언제가 아니라 오늘을 성찰하게 합니다. 우리의 삶은 매일의 선택으로, 지금의 선택으로 꾸며지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한 번의 십자가 사건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예 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께 죽음이라는 고통 후에 부활의 영광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이 세상의 마지막이란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종말과 심 판은 두려운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기쁨의 의미이기 도 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운 기쁨의 날을 깨어 기다리는 자세는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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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오, 예수님. 거룩해진다는 건 얼마나 쉬운지요. 선의만 조금 있으면 되니까요. 예수님은 영혼 안에서 매우 작은 선의라도 발견하시면 서둘러 당신을 영혼에게 주십니다. 그때는 영혼의 잘못도, 넘어짐도, 그 어느 것도 예수님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매우 관대하시며 아무한테도 당신 은총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시기까지 하는 분입니다. 성덕에 이르는 지름길은 성령의 영감에 충실히 머무는 것입니다.”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님의 일기 중 일부입니다. 성녀의 말씀처럼 성령의 은총에 힘입어 약간의 선의만으로도 거룩해질 수 있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약간의 선의에도 조건이 붙으면서 주님의 활동을 가로막아 자기의 거룩함은 물론이고 하느님의 거룩함을 세상에 알리지 못하게 됩니다.
악습에 빠진 사람이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생각을 바꾸는 것이라고 합니다. 남에 대한 비판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습관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만나면 먼저 비판부터 하게 된 것입니다. 비판할수록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변화를 위해, 비판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성호경을 그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느 순간부터 비판이 아닌 상대방의 좋은 점을 먼저 찾게 되었습니다.
성호경으로 주님을 초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를 변화시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신 것입니다. 성호경이 힘든 기도일까요? 성호경 하는데 5분에 걸쳐서 해야 한다면 힘들다고 인정하겠지만, 아무리 길어도 5초면 충분히 마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까? 이 조금의 선의를 통해 그 사람의 생각을 바꿔서 거룩해지게 된 것입니다. 참 쉽지 않습니까?
이 정도의 선의도 실천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전해주십니다. 얼마 안 있어 끔찍한 일들이 자기들 주변에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 말씀에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알고 싶은 것은 그런 일이 어디서 일어날 것이며, 특히 언제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불안해하고 걱정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약간의 선의만으로도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고 우리의 선의를 세상에 펼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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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더불어함께>
마르코 13,24-32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무화과나무의 교훈, 깨어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무렵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더불어함께>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르 13,27)
믿음의 벗이여
우리를 흩트려는
돈과 권력 그리고 스스로를
섬기라는 무리들을 거슬러
우리는
오롯한 믿음으로
더불어함께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심으신 믿음만이
온 누리를 이루실 그날은
이미 믿는 우리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우리는
늘 그렇듯 이렇게
더불어함께입니다
희망의 벗이여
우리를 흩트려는
무기력하게 제 자리에나
있으라는 무리들을 거슬러
우리는
새하얀 희망으로
더불어함께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안기신 희망만이
온 누리를 이루실 그날은
이미 희망하는 우리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우리는
늘 그렇듯 이렇게
더불어함께입니다
사랑의 벗이여
우리를 흩트려는
무관심으로 제 살길이나
찾으라는 무리들을 거슬러
우리는
뜨거운 사랑으로
더불어 함께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건네신 사랑만이
온 누리를 이루실 그날은
이미 사랑하는 우리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우리는
늘 그렇듯 이렇게
더불어함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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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전 생애를 통하여 천국갑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세상의 종말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생각하는 가운데 영생의 희망으로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당장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천국과 지옥 중에서 어느쪽이라고 생각 하시나요? 예, 다행입니다. 천국을 갈망하고 살아온 은총이 열매 맺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르13,27)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고, 끝까지 믿음에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서에서는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12,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은 순간순간이 선택입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 순간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죄우한다’는 광고문도 있었지만, 믿는 이들의 순간의 선택은 영원 생명과 직결됩니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버릴’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른다는 사실이 우리를 늘 긴장하게 만듭니다. 혹시라도 방심하면 하필 그때가 심판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리 준비된 사람은 구원의 좋은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올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구체적으로 정해 놓고 휴거를 기다린 사람도 있고 천년왕국을 얘기하며 세상의 대이변을 말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개인의 종말이든 인류의 종말이든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이고, 지금이 은총의 기회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마지막 날 하느님의 심판은 단죄가 아니라 ‘사필귀정’의 질서가 완성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종말은 저 멀리서 불쑥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던 삶의 행태를 훌훌 털어버리고 돌연 진입하는 저 너머의 세계가 아닙니다. 이 세상과 단절된 세계가 아니라 오늘 내가 살고 있는 모습 속에 미구에 내가 맞이하게 될 영원한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잘 살아야 합니다’(차동엽). 이 순간을 통하여 미래가 옵니다. 그 때에 의인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 날의 징조를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마르 13,24) 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선언합니다. “그 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없는 사람으로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2베드 3,13-15)
나중에 지옥 갈까 봐 두려워하는 분이 계시나요? 그러나 지옥도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지상에서 지옥을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의 뜻만을 고집하며 남을 바라볼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삶의 존재 방식 자체가 이미 지옥입니다. 요즘은 입시지옥, 취업 지옥, 지옥같은 부부생활, 생계 지옥, 솔로 지옥, 지옥 쭈구미, 지옥같은 경제위기에서 살아나는 방법, 지옥이라는 참담하고 어려운 것을 표현합니다. “ ‘지옥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다”고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의 주권’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는 자체가 지옥의 출발점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지옥을 만드셨겠습니까? 지옥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죽을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하느님과의 단절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며 심판입니다. 지옥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 지금 지옥을 만드시나요? 천국을 가꾸시나요?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았는데 죽어서도 지옥 간다면 너무 화나는 일이잖아요! 우리는 천국 모두 갑니다. 우리는 육신의 부활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중에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마르 13,31)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거나 읽지 말고 나의 구원을 위한 말씀이라는 믿음에 한 치의 흔들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천국을 바라시는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의탁하십시오. 말씀대로 사십시오. 그리하면 우리의 삶이 빛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하늘을 살게 됩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0-11)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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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낙엽이 우수수 지는 11월의 늦가을은 그 자체로 우리의 스승입니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도 그 자체로 우리의 스승입니다.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잎이 지고, 열매를 맺는 이 모든 것이 곧 하느님의 현존을 알리는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례시기>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종말”에 대한 ‘징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징표’는 미래의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종말’에 대한 예고와 더불어, 구약에서 처음으로 죽은 자에 대한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장면입니다. 곧 재앙의 시기와 더불어 박해받는 자의 구원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말은 재앙의 때이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받으리라는 위로가 약속됩니다. 이처럼, 종말사상은 부활과 직결됩니다. 그래서 재앙은 단순히 미래를 앗아가는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와 용기가 됩니다.
<제2독서>는 구약의 사제직을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제직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사제들이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한데”(히브 10,11) 반해, 신약의 사제 예수님은 “단 한 번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 쪽에 앉으셨음”(히브 10,12)을 말해줍니다. 곧 구약의 사제의 제물이 반복해서 봉헌되어도 결코 그 죄를 사할 수는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희생 제물은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말합니다.
“이미 죄가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히브 10,18)
오늘 <복음>에서는 종말에 대한 표상을 이렇게 드러내줍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발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린다.”(마르 13,24-25)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파괴될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이 지적한 대로, 세상의 ‘종말’은 집단적 죽음이나 멸망, 결별이 아니라, 하나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인간의 ‘종말’은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일치된 사고를 통해 시간과 공간 밖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곧 ‘종말’은 대재앙이 아니라, 정신적 역전이 될 것입니다. 사실상, 그것은 물질과 역사의 모든 조건을 초월하는 자유, 곧 하느님 안에서의 희열일 될 것입니다. 정신은 역전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계는 순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에서 그리고 있는 종말론적인 표현들을 우주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신학적인 표현으로 알아듣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는 시작되었고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종말’, 곧 ‘완성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언제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습니다. 사실 지금,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헨리 나웬).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과 영광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때”에 결정적으로는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듯이, 세상의 사건들을 통해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을 깨달아야”(마르 13,29) 할 일입니다. 곧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할 일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비가 올지 안 올지, 날씨가 추울지 더울지를 감지해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렇게 마련해주신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때 비로소 시대의 징표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깨달을 때,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모든 사건과 만물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부어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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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마르 13,28)
주님!
그날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찾아옵니다.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다른 곳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 입니다.
오늘의 결별에서 새롭게 변형되게 하소서.
오늘의 죽음에서 새롭게 탄생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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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난을 사랑합시다>
-가난하나 존엄한 품위의 삶-
“당신이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시편 16,11)
오늘 전례력으로 연중 제33주일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정한 ‘제8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아마 오늘도 교황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실 것이며 점심식사에는 매해 하는 것처럼 올해도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 1천여명을 초청해 함께 식사할 것입니다. 가난을 사랑했던 성 프란치스코를 닮은 교황이야 말로 현대판 예언자입니다. 교황의 엊그제 예술가들에게, 어제는 젊은이들에게, 도서관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주신 말씀도 멋졌습니다.
“너희는 하느님 창조활동의 협력자들이다.”
“삶에서 결코 물러나지 말고, 계속 꿈을 키워라.”
“너희 도서관이 만남의 오아시스가 되도록 하라.”
올해 교황 담화문의 주제 성구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는 하느님께로 올라갑니다.”(집회 21,5 참조)
바로 이 담화문을 교황은 ‘가난한 이들의 수호자, 파도바의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인 2024년 6월 13일에 발표했습니다. 가난을 사랑하는 이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예수님에 이어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주님의 참행복 서두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고”(루카4,18ㄴ) 역시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실 때 맨 서두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최우선의 관심사가 어디있는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하느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교황의 올해 담화문중 감동적인 부분을 소개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우리는 모두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우리는 모두 구걸하는 사람들입니다. 구걸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겸손한 마음이 요구됩니다. 참으로 가난한 이는 겸손한 이입니다. 참으로 가난하고 덕이 있으며 겸손한 사람이 되십시오. 의지가지없는 가난한 이는 하느님께 힘을 얻고 그분께 모든 신뢰를 둡니다. 기도의 진정성은 애덕 안에서 확인됩니다.”
가난은 인간의 본질이며 이를 깨달을 때 저절로 겸손입니다. 이런 가난한 인간의 본질은 미사시 주님의 성체를 모시기 위한 가난한 빈손의 행렬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늘 대할 때 마다 감동하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흡사 너나할 것 없이 하느님앞에 줄서있는 가난한 거지들같습니다. 담화문에서 인용된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의 유엔총회에서의 연설내용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는 기도하는 가난한 수녀일뿐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제 마음에 당신 사랑을 채워주십니다. 그리하여 저는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가난한 이에게 그 사랑을 전해 줍니다. 여러분도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면 여러분곁에 있는 가난한 이들을 알아봅니다.”
끝부분에는 베네딕도 요셉 라브로 성인에 대한 내용도 각별한 감동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로마로 순례를 온 그는 생애 마지막 몇 년을 가난한 사람들 가운에서 가난하게 지내면서 성체앞에 기도하고 묵주기도와 성무일도를 바치며 신약성경과 준주성범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방랑자로서 정주하는 곳 없이 콜로세움 폐허의 한 귀퉁이에서 잤습니다. 그의 삶은 하느님께 올리는 끊임없는 기도였습니다.”
마지막 결론 부분도 긴 여운으로 향기처럼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바뇌에서 발현하시어 ‘나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이다.’라는 잊지 못할 메시지를 남겨주신 지극히 거룩하신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께서 이 여정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가난을 사랑합시다. 베네딕도 규칙에 보면 정결을 사랑하라, 단식을 사랑하라, 거룩한 독서를 사랑하라 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수행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가난을, 겸손을 기도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조선시대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추구했던 선비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된 사치스럽지 않다), 백제의 미학이자 조선의 미학이며 한국인의 미학을 대변하는 이 말마디처럼 존엄한 품위의 가난을 살았던 옛 선비들의 삶이 참 그립습니다.
영정조 시대 추사 김정희를 보완하며 오히려 능가한다는, 또 겸재 정선을 보완하며 능가한다는, 평생 가난속에 살았던 시서화詩書畵의 대가 능호관 이인상(1710-1760)이 아내를 잃고 바친 제문이 너무 아름다워 길다싶지만 전문을 소개합니다.
“아아! 내가 세상과 맞지 않아
궁하게 지내기로 맹세했건만
자질이 순수하지 못해
도道에서 멀었지요.
숙인淑人은 나의 아내이면서
나의 사우師友이기도 했지요.
나의 어리석음 깨쳐주고 슬픔을 위로했거늘
그 낯빛은 순하고 말씨는 순후했지요.
이 때문에 내가 치욕을 면할 수 있었거늘
내 어찌 그것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아아! 숙인이 부지런히 힘쓴 덕분에
나는 집안일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굶주려도 책을 팔지 않았고
추워도 꽃나무를 때지 않았지요.
시어머니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나의 오활(迂闊;사리에 어둠)함을 열어 주었지요.
이따금 내가 산수에 노닐 때면
기분이 좋아 글이 번드레해졌지요.
돌아와 내가 글귀를 들려주면
문득 충고하며
말이 화려하면
도道가 높지 못함을 일깨워 줬지요.
규중의 즐거움이
옛 도에 있었으니
나의 두엇 단아한 벗은
우리의 금슬을 익히 알았지요.
아아! 여자가 훌륭한 건
크게 슬퍼할 일이외다.
지아비가 슬기롭지 못하니
누가 그 훌륭한 행실을 자세히 전하겠습니까.
숙인은 정숙하고, 굳세고, 따뜻하고, 은혜로워
타고난 본성을 잘 지켰으며
사리에 맞는 온갖 말들은
고인古人의 말을 끌어온 게 아니었습니다.
정성스레 내게 한 충고들은
당신의 죽음과 함께 가려져 버릴 테지만
차마 사사로움 꾸밀 수 없어
당신의 일을 적지 않습니다.
아아! 농사짓기는 갈산葛山이 좋고
낚시하기는 구담龜潭이 좋거늘
거기서 살자던 당신과의 약속
그만 무덤에 묻고 말았구려
머리는 희어지고 마음은 끊어질 듯해
남은 생을 슬퍼합니다.
아아! 내가 영결하는 말을 하니
그대는 길이 슬퍼하지 마오.
말을 가려 하고 병을 조심하며
사귐을 끊고 화려함을 거두어
끝내 도道에 돌아가
경전으로 자식을 가르침으로써
그대의 마음을 따르겠다는
내 진실한 마음을 고합니다.
아아, 슬프외다!”<능호과 이인상 서화평석 2서예,648-651;박희병>
제 강론에 이렇게 긴 글 인용하기는 처음입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평생 극심한 가난중에도 끝까지 고귀한 품위를 지켰던 지어미의 삶이 너무 아름다워 그 지아비의 제문을 고스란히 인용했습니다. 이인상이 맘놓고 그의 천재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아내의 높은 덕임을 깨닫습니다.
도道는 말씀이요 진리요, 도를 통해 하느님은 옛 조상들을 이끄셨습니다. 도에 충실했던 옛 선인들, 그대로 다니엘 예언자의 말씀에 해당된다 믿습니다.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바로 창공의 광채처럼 별처럼 빛났던 성인, 성녀, 군자들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언젠가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가난에도 불구하고 창공의 광채처럼, 별처럼 사는 것입니다. 언제나 종말과 같은 혼란이요 작금의 현실은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의 모두이자 길이요 희망이신, 구원자이자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히브리서 말씀이 더욱 우리를 용기백백하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새삼 떠오르는 “2027년 한국에서 개최되는 가톨릭 세계 청년 대회” 성서 모토요한복음 말씀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그러니 부화뇌동 경거망동하지 않고 희망의 그날을 앞당겨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러니 과거와 미래는 하느님께 맡기고 깨어 오늘 지금 여기서 구원의 현실을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가난중에도 깨어 품위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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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은 기쁘게, 죽음은 차분하게>
오늘 독서와 복음은 종말과 심판의 때가 옴을 얘기합니다. 선인이나 악인이나 누구나 죽듯 종말은 누구에게나 오고 심판도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 오늘 주일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이런 묵상을 하고 싶습니다. 나에게 오늘 것은 종말인가? 주님인가?
이쯤 얘기하면 이미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감이 잡히시겠지요?
많은 사람이 느닷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생을 끝냅니다. 그렇게 많은 죽음을 보면서도 자기의 끝은 멀리 있는듯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종말이 임박해 있음을 보지 못하거나 종말에 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고 무관심한 것입니다.
무관심이란 말이 그렇지 않습니까? ‘관한 마음이 없는 것’이 무관심인데 죽음에 관한 마음은 없는 것이지요.
다르게 얘기하면 무관심이란 죽음에 관해 진심이 없거나 진심이 아닌데 인간이 어찌 죽음에 관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안 볼 수 없는 인간이 아닙니까?
강 건너 불 보듯이 하지만 실은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거나 보면서도 못 본 체하거나 정면으로 직면하려고 하지 않을 뿐이지요.
그러다가 나이 먹어서 또는 병이 들어서, 서서히 또는 갑자기 직면하게 되는 것이고, 죽음이 덜컥 내 앞에 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죽음이 이렇게 덜컥 오는데 신앙인은 어떻게 다릅니까?
죽음이 안 옵니까? 죽음이 덜컥 오지 않고 부드럽게 옵니까? 믿지 않는 이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그런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차이는 아닙니다. 근본적인 차이는 죽음이 오지 않고 주님께서 오시는 겁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죽음과 함께 주님께서 오시거나 오늘 주님 말씀처럼 종말의 주님께서 오시는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도’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나도 그리고 우리도 예외는 아니라는 표현이며, 신앙인인 우리도 예외 없이 종말을 맞이하지만 우리는 주님이 문 가까이 온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죽음이 덜컥 문 앞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던 주님께서 오셔서 부드럽게 문 두드리시는 것을 듣고는, 주님은 기쁘게, 죽음은 차분하게 맞이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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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13,32)
<깨어 준비하자!>
오늘 복음(마르13,24-32)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한 말씀'과 '무화과나무의 교훈'입니다.
'마지막 때인 그리스도의 재림(다시오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지는 '종말이 가까우니 시대의 징표를 잘 읽고 대처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12,1-3)은 이 세상의 모습이 아닌 죽음 저 너머의 세상, 믿는 이들의 최종 목적지인 '천상 예루살렘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한 묵시록과 다니엘서인 묵시(黙示)의 말씀이 전하는 메시지는 '희망'입니다. 장차 들어가게 될 천상 예루살렘을 희망하면서 '인내하고, 회개하자'는 것입니다.
오늘은 '제8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11월에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면서,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내도록 선포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이들의 기도는 하느님께로 올라갑니다'(집회21,5 참조) 라는 주제 담화를 통해서, '가난한 이들의 기도를 우리의 것으로 삼자.'고 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를 우리의 것으로 삼자는 것'은 '가난한 이들의 고통과 어려움, 불편을 나 자신의 것으로 삼자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고, 그들과 끝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도 가난한 형제자매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도 그들에게 '하느님 자비의 얼굴'이신 '또 하나의 예수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선택한 사랑은 쉬운 사랑이 아니라 '어려운 사랑'인 '십자가 사랑'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이 '십자가 사랑'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십자가 사랑을 위해 기도합시다!
기도의 힘으로 우리도 십자가 사랑을 완성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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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르 13, 27)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시며.
가난한 이들
속에서
복음을
만드시는
주님이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친히
좋은 이웃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가난이
우리의
선물이 되고
복음이 됩니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할 수 없는
우리들 실존입니다.
가난하지
않고서는
결코 가난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뜬구름의 언어로
다가가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위로와 희망을
찾을 수 없다면
저기에서도
찾기 힘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부터
가난한 이들의
복음이 되십니다.
복음의 뿌리는
예수님의
가난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며
우리는
살아갑니다.
세상의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쏟아지는
하느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가난한 이들을
통한
복음화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도움과
사랑으로
더욱
풍요로워지는
사랑의 참된
선택이며
구원의
복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통해 우리가
복음화 됩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은총 가득한
주일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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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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