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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5일
이신칭의의 참된 의미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 구원론의 기본 구조
- 원죄➞자범죄➞죄값
- 칭의➞성화➞영화
- 믿음➞소망➞사랑
◆ 칭의의 우주적 중요성
- 인간에게 전가되는 하나님의 의(義)
- 영생부활로 가는 새 창조의 길
- 영화로운 새 우주의 참된 소망
◆ 이신칭의의 중심 원리
- 그리스도와의 본질적 연합
- 오직 그 마음과 그 정신으로
- 철저한 십자가의 도
구원론의 기본 구조
➜ 원죄(原罪, Original Sin)란 인류의 시조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생득적으로 죄성을 갖고 태어난다는 교리이다.
다시 말해 원죄는 인간이 창조된 후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지니고 살던 상태로부터 분리되어 인류를 비참한 실존 상태로
들어가게 만든 아담의 첫 죄로서 불순종의 발원이며 근본악(根本惡)이라고도 한다.
원죄는 아담의 죄로 인하여 세상이 저주받고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의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창2:17) 경고하셨다.
사탄은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알기 때문에 못 먹게 하신다.”는 취지로 (창3:5, 요8:44) 유혹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창조주 하나님의 성의(聖意)를 거부한 대가로 물려받는 생자필멸의 운명적 성향이다.
롬5:12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한다.
➜ 원죄의 교리는 사도 바울(Paul)이 가르쳤고(롬5:12-21), 어거스틴(Augustine)이 역설하였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롬5:15)이라는 말씀에서 죽음이란 하나님과 가졌던 생명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의미한다. 이 원초적 단절에서 결국 육체도 시들다가 죽게 되는 것이다.
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자기 일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인격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정욕 때문에 죄를 범했다. 하와가 “하나님처럼 된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교만의 결과라는 말이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 때문에, 그 의지의 방향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쪽으로 돌아간 것이다. 교만은 원죄의 근원이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이므로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된 것이다.(롬3:24)
펠라기우스(Pelagius, 360?-420?)는 죄를 자기결단의 개인 행위로 파악했으므로 이러한 원죄론을 거부하기도 했다.
개신교의 주요 사상으로 계승되고 있는 이 원죄론, 즉 어거스틴의 사상을 본질적으로 회복한 것은 종교개혁자들이다.
원죄의 결과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정욕을 따라 사는 존재방식 속으로 들어간 것으로 이것이 곧 영적 사망이다.
인간이 원죄 속에 머무는 한 이기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따라 자기 욕심대로 사는 길 밖에 없다.
이 사망의 상태는 인간으로 하여금 온갖 죄를 범하도록 부추긴다(롬5:12).
이 존재방식이 지배할 때 인간의 생각은 항상 합리적으로 시작하지만 그 결과는 항상 불합리한 상황으로 끝맺는다.
이 세상의 모든 비극적인 실존은 바로 이 원죄가 야기시킨 사망의 결론적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 구원의 3단계는 ➀ 칭의➞➁ 성화➞➂ 영화로서 죄가 가는 ➊ 죄성(罪性, 원죄)➞➋ 죄행(犯罪)➞➌ 죄값(刑罰)의
역순(逆順)이다. ➀번 칭의는 ➌번 죄값을 담당하고 ➁번 성화는 ➋번 죄행을 책임지며 ➂번 영화는 ➊번 죄성을
영원히 해결한다. 부활 이후에는 다시는 죄가 없고 죽음이 없는 세계가 도래한다는 놀라운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죄값으로 받을 형벌로부터 죄인을 구해내야 한다는 뜻이다.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죄를 간과하신다는 것은 죄값을 치루는 형벌을 일단 유보함으로써 영생으로 돌아갈 기회를 인간에게 주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영접할 기회를 얻은 자는 죄와 사망의 운명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어 영생불멸로 가게 된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고집대로 살다가 이 복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기회를 놓진 자는 끝내 제1차적 죄값의 세계인
지옥(地獄)으로 갔다가 최후의 심판 뒤에 제2차적 형벌의 세계인 불못으로 가야 한다.
이신칭의의 의미
➜ 칭의(稱義) 곧 의인(義認, Justification)은 하나님께서 죄 아래 있는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법적(法的) 선고이다.
곧 재판에서 무죄로 인정받는 일로서 법률적으로 무죄판결을 내리는 일을 말하며 이신칭의ㅁ(以信稱義)라고도 한다.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창조된 완전한 의에 근거한 것이며, 그 반대는 정죄(定罪, Condemnation)이다.
“의롭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희랍어 dikaiovw(디카이오오)가 이에 해당하는 술어이다.
성서에 있어서는 특히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있어서 의로운 자로서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칭의의 소극적인 면은 죄(罪)의 용서(容恕)이고 적극적인 면은 하나님의 자녀(子女)가 됨으로서(요1:12)
영생(永生)의 자격이 주어지는(롬8:17)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되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롬3:20-24) 가능하다.
여기에는 인간의 공로가 일체 인정되지 않는다.
➜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바울의 복음신앙의 중심이자 근본원리이다.
구약시대에는 인간의 의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율법을 준수하는데 있었다.
이에 반해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인간은 율법의 요구에 대해 바르게 응답할 수 없으며, 그래서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인간자력으로는 갱생할 수 없는 죄인임을 말해준다.(롬3:20)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전혀 새로운 방법을 취하신다.
그것은 오직 은혜의 사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신 일이다.
인간은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규정이다.
이 구원경륜에 의해 하나님은 자신의 의(義)를 관철하시고, 인간에게 영생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신(롬3:21-26) 것이다.
의롭다 하심은 하나님의 판결로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영접하셨음을 믿는 일로서, 이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용서받고 영접된다.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는 믿음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며, 믿음 자체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 의(義, Righteousness, Justice)는 인간이 행하여야 할 바른 도리로서 표준(標準)에 대한 일치(一致)로 정의된다.
언어(言語)의 의미의 범위와 그것에 의해 측량되는 규준과의 일치를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의 의는 삶의 문제이므로 사회적 관계성, 곧 윤리적 규준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성서적 용법에서의 의(義)의 표준은 시종일관 하나님의 의(義)이지 사회적 규준(規準)이나 정의가 아니다.
성서적 사유(思惟) 자체가 하나님 중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義)에서 시작할 때만 하나님을 향해 살 수 있는 까닭이다.
➊ 하나님의 의는 먼저 인격적 신성을 표상하는 것으로서 하늘공의와 하늘사랑의 하나 됨을 그 기본으로 한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관이시며(시11:7), 그분의 판단은 언제나 의로우시다(시119:144).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올바른 삶을 요구하시고 그 삶의 원리에 의해 그들을 다스리시는 것이다.
➋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행위이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에 그 의를 확립하시는 방법이다.
성서의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변호하시되 이를 위해 의를 수립하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의(義)의 윤리적 의미에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죄와 사멸로부터 해방하시는 구원의 개념이 추가된다.
➌ 셋째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행위에서 나타나는 사태(事態), 곧 그 목적의 성취이다.
이 표현은 종말론적 성격을 강조하고 이스라엘의 메시아적 희망인 “의가 거하는” 세계에의 동경을 구성한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하나님의 의의 계시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 말의 동적인 성격에 의한 것이다.
➜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보내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구원을 성취하시는 의의 행위 자체이다.
이것은 윤리적 요구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상수훈에서처럼 윤리적 감각을 예리하게 한다.
그것은 하나의 길이자 비전이며, 그것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의에 대한 요구가 만족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중심성 때문에 그에게 요구되는 진실한 예배와 봉사를 성취할 수가 없다.
인간은 다할 수 없는 요구에서의 죄책에 의해 고통 받고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만다.
하나님의 의의 성취는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대속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에 대해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가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는 말이다.
의는 이처럼 ➀ 제1차적으로 하나님의 의이며, ➁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하심에 합당하도록 인간에게 요구하는 일이자,
➂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 주어지는 동시에, ➃ 이 의를 이웃사랑으로 완성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다.
➜ 의인(義人, the righteous)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며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구약의 용어로서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살고 율법의 요구에 충실하고자 애쓰는 경건(敬虔)한 사람이다.
주로 노아(Noah, 창6:9, 겔14:14), 욥(Job, 욥1:1, 약5:11, 겔14:14), 다니엘(Daniel, 단6:7) 등을 들 수 있다.
둘째는 신약의 용어로서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 자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그 대표자로(롬4:3) 꼽는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은 성도들은 그분의 모범을 좇아 사랑과 의를 실행토록 힘써야(고전11:1) 한다.
‘의(義)’라는 것은 행위라는 옷을 입음으로 실존적인 증거를 보여주어야 한다.
➜「의인(義人)인 동시에 죄인(罪人)」이라는 표현은 루터가 그리스도인을 “믿음을 통해 은총(恩寵)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인정받은 사람”으로 표현할 때 사용된 내용이다. 의롭다 함을 받아도 인간에겐 여전히 죄성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루터의 견해에 의하면 의인(義認)이란 ➊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을 의미하고 ➋ 과거에 우리가
행했던 죄악된 행위와 여전히 우리의 본성에 남아 있는 죄성(원죄)이 우리를 불리한 처지에 몰아넣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➌ 우리가 성령의 첫 열매를 받았고 새로운 피조물의 징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➍ 우리가 성령과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죄 사이의 전쟁에 말려들게 되는 동시에 그 전쟁에서 죄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통해 사해질 뿐만 아니라 정복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➊번과 ➋번의 견지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전적으로 죄인이면서도 동시에 전적으로 의인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서는 죄인(罪人)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인(義人)인 것이다.
➌번과 ➍번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부분적으로는 의인이고, 부분적으로는 죄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죄가 있을 지라도 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한다.
다기 말해 그리스도인은 현실에 있어서는 죄인이나 희망 안에서는 의인이라는 것이다.
그 희망은 현세에서 완전히 성취되는 않을지라도 하나님 안에서는 성취되고 있다고 한다.
루터가「의롭다하심을 얻은 죄인」을 말할 때 그것은 인간에게 남아있는 죄의 본성을 말하는 것이다.
루터의 주장이 사실임인 이상 우리는 필히 계시록 2-3장이 말하는「이긴 자」가 되어야 한다.
➜ 성서적 관점에서 인간의 도덕적 필요성을 고찰할 때 칭의란 인간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해답임을 알게 된다.
가장 명확하게 의인(義認, Justification)의 교리를 완성한 이는 바로 사도 바울이다.
사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인간에게 행해진다고 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행위로서 공의는 죄에 대한 형벌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사5:13, 사10:22, 단9:7) 억눌린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변호로 나타날 수도(사42:6, 사46:13) 있다.
하나님의 문제는 그분의 백성들이 자주 죄를 짓는다는 것으로, 자신의 의로우심 때문에 그들을 저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로우심 때문에 히브리적 공의는 단순한 징벌이 아니라 궁극적인 구속행위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독생자의 희생을 통하여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이다.
➜ 선지자들의 주된 공헌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원시개념을 도덕화한 것이다.
바울의 율법에 있어서 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훼방하는 객관적인 세력이다.
그처럼 죄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단체적이고 객관적인 인간의 존재상태인(롬3:23)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율법, 즉 도덕적 의무는 죄악감을 일깨우는 사역적 요소가 된다.
그리하여 인간이 의롭게 되려면 단지 나쁜 양심에서뿐 아니라 불완전과 한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아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율법, 곧 도덕적 의무는 죄악성을 일깨우는 사역적 요소가 된다.
곧 바울이 롬8:21에서 썩어짐의 종노릇이라고 부른 것에서부터, 그리고 롬7:15-20이 말하는바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결심을 꺾는 구속력의 경험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대행자로서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 도구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이 구원을 창조하신 것이다.
➜ 율법은 모세의 법을 말하지만 선함을 얻을 수 있는 도구가 아니며, 창조주와의 관계성을 확립해 주는 것도 될 수 없다.
바울이 본 율법의 목적은, 자신이 겪은 경험에 의해, 선(善)을 만들어 내는 것이(롬3:21)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의 거룩성이 도덕적 거룩이라는 공리에 기초한 유대교인들에게 있어서 이 사실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어떻게 자신의 도덕적 고민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함으로서 풀렸는가에 대한(롬3:20) 바울의 해석이다.
율법은 진노를(롬4:15) 초래한다. 진노는 도덕적 타락이나 궁극적인 사망이란 벌칙을 넘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작용이다.
율법은 그러나 인간이 가진 문제에 대한 하나님 섭리의(롬7:12-16) 일부이다.
율법의 지배효과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에 대한 망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초월적
권능을 영접토록 하는 것으로 이 권능에 의해서만 인간은 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율법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구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인간을 예비시키는 일을(갈3:23) 하는 것이다.
➜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칭의를 받기 위해 나아가는 인간 편에서의 출발점이었다.
인간이 칭의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권(主權)에 달려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그 주권에 대한 인간의 긍정적인 응답에 달려 있다. 이 응답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하심을(롬3:24) 얻었고, 우리의 믿음으로 또한 의롭다하심을(갈2:16) 얻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경륜임을 믿고, 이 약속을 전인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그 중심을 두고 있으며, 특히 갈보리 십자가에서의 자기희생에(롬3:25) 중심을 두고 있다.
그러한 믿음의 결과가 의롭다하심이요, 성도가 영생으로 가는 구원의 출발점이다.
인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믿음을 통해 믿음에 전달된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간과는 무엇을 할 수 있지만 자기 의를 의지하는 인간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규정한다.
인간의 선행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바람에 날리는 낙엽이고, 인간의 공로는 아무것도 아닌 허상(虛像)일 뿐이다.
교묘하게 인간의 믿음을 행위로 바꾼다면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공로를 멸시하는 일이 된다.
반대로 살아있는 신앙의 열매인 사랑과 선행을 소홀히 하거나 배척한다면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성을 잃을 수 있다.
➜ 하나님의 의는 태도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조치이다.
그것은 의가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됨으로서 멸망으로 가는 인간의 존재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처신이자 대응책이다.
최선의 인간 윤리에서는 선한 삶이 행위로 이루어진다고(롬2:13) 가정한다.
그러나 인간이 배워야 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는(롬3:24, 롬5:17) 사실이다.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드릴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다. 하나님의 삶이 믿음 안에서 인간의 삶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래서 바로 인간의 도덕적 삶의 동기가 하나님의 뜻이요, 그 은혜에 대한 무한 감사라는 사실에 대한 긍정이다.
나아가 믿음이 바라는 믿음의 미래가 있다는 것을 성서는 말하고 있다.
성도들에게 앞으로 남은 것은 바로 구속받지 못했던 인류가 이르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광이다.(롬5:2)
그것은 인간에게 입혀주셨지만 죄에 가리워 인간이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는 소망을 말해주는 것이다.
롬9:30에서 사도 바울은 의(義)의 차원을 도덕적 차원에서 신학적 차원으로 옮겨간다.
신자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의가 신자의 노력 덕분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 덕분에 온다는 내용이다.
출처 : 천안 은하교회 www.eunhachurch.net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