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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다시 이순신
너희들이 역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서,
괜찮은 콘텐츠가 없나 찾아보다가
유튜브에서 황현필이라는 분을 알게 되었단다.
이 분은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시는 분인데,
아빠랑 역사적 성향, 정치적 성향이 비슷하시고
말도 시원시원하면서 재미있게 해주신단다.
그래서 가끔 그의 영상들 찾아보곤 해.
그의 영상 중에 이순신 관련 강의를 하신 것이 있는데,
그 영상들을 모아 9시간 넘은 하나의 영상으로 올려주신 것이 있는데,
그야말로 명품 영상이라고 할 수 있단다.
그리고 그 강의 영상과 연계하여
<이순신의 바다>라는 책을 냈는데,
아빠도 뒤늦게 알고 이제서야 읽었단다.
황현필 님의 동영상에서도 다루었던 내용을 활자로 다시 한번 되새기는 좋은 기회가 되었단다.
이 책에는 이순신의 생애와
이순신이 참여해서 이겼던 스물세 번의 전투에 관해서
이야기해주고 있단다.
아빠가 전에 다른 역사책을 읽으면서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도 있으니,
오늘은 그의 생애를 따라 이야기하는 것보다
아빠가 이 책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것 등을 위주로
간단히 이야기를 해줄게.
그리고 시간이 되면 황현필 님이 설명해 주는 이순신님의 강의를 같이 보자꾸나.
중간중간 욕을 하시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이제 너희들도 넘겨줄 만큼 컸으니 말이야.
1. 거북선
아빠는 지금까지 이순신 장군이 한 번의 패배가 있다고 알고 있었어.
많은 역사가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그런 줄 알았지.
그 한 번의 패배는 바다가 아닌,
함경도 녹둔도라는 곳에서 일어난 전투라고 알고 있었어.
하지만, 황현필 님은 그곳에서 전투가 결코 패배가 아니었다고 했어.
이순신도 다음과 항변했다고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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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8)
이순신은 항변했다.
“병력이 부족하니 군사를 증원해 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음을 기억하오. 그 공문이 바로 나에게 있소이다. 조정에서 만일 이런 사실을 안다면 죄가 나에게 있다 하지 않을 것이오. 또 내가 힘껏 싸워서 녹둔도를 지켰고, 바로 추격하여 잡혀간 백성들을 여러 명 구출해 왔거늘, 이것을 패배로 치는 것이 옳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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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전투를 마치고 백의종군을 하던 이순신을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천거하여 전라좌수사가 되었단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이때 유성룡이 그를 천거하지 않았고,
천거를 하더라도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되지 않았다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완전히 점령당해서
나라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르고,
이 이후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었단다.
이순신이 역사에서 사라질뻔한 아찔한 일은 그 뒤에도 여러 번 일어나는데,
그가 있어서 우리나라의 백성으로 정말 다행인 일이란다.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그는 전쟁 준비에 돌입하게 된단다.
그러면서 그때부터 나중에 유명하게 되는 ‘난중일기’도 쓰게 된단다.
아마 그의 밑에 있는 병사들 중에는 불만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었을 거야.
전쟁 준비를 왜 하냐고 말이지.
그는 조선의 대표적인 배인 판옥선과 그것을 개량한 거북선을 만들었고,
거북선의 진수식까지 마친 것이 1592년 4월 12일이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이 우리나라에 쳐들어 온 것이
그 다음날인 1592년 4월 13일이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구나.
이순신은 혹시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닌가?
…
우리가 이 거북선의 위대함에 대해서 많이 듣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 거북선 안에서 배를 조정하고
포를 쏘던 당시 우리 백성들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구나.
그곳에서는 온몸을 다해 전투에 참여했던 우리 조상들이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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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110)
전투 시 거북선의 실내는 아수라장이었을 것이다. 자욱한 먼지와 함께 어두웠을 것이고 바닷물은 계속해서 새어 들어왔을 것이다. 실내에서 쏘는 포의 소리와 진동은 갑판 위에서 함포를 쏘는 판옥선과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전투원들의 귀는 먹먹함을 넘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적선과 부딪히면서 생기는 진동으로 몸이 붕 뜨고 온몸을 여기저기 찍혀가며 피를 흘린 채 노를 젓고 포를 쏘았을 것이다. 공포감이 치열함으로 바뀌고 노를 젓는 틈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바다에 떠다니는 일본군들의 시체와 먹먹해진 귓속을 뚫고 들려오는 살려 달라는 일본군의 아우성에,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무적의 전사가 되었을 것이다.
거북선을 바라보며 외관의 멋스러움만 생각하지 말고 거북선에 탑승해서 전투를 치렀을 선조들의 처절함도 생각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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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의 꿈을 허물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은 그들의 작전대로,
어쩌면 작전보다 더 수월하게 진행된다고 생각했을 거야.
순식간에 한반도 전체를 휩쓸었고,
무능한 왕 선조는 나 몰라라 도망을 가버렸으니 말이야.
하지만 일본의 계획이 하나 둘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이순신과 전투에게 지기 시작하면서였어.
첫 번째 출전인 옥포해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에서 완패를 당한 일본,
특히 이번 전쟁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대단했을 거야.
처음에는 방심해서 졌다고 위안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철저히 준비한 이후 전투에서도 일본은 계속 지고 말았지.
전반부 전투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한산도대첩으로
일본의 계획은 완전히 틀어진 것을 깨달았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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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그러나 한산도의 패전으로 일본의 수륙병진작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일본은 서해 바다로 10만 병력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올려 보내지 못했다. 증원병과 군량미, 무기 등 보급이 완벽하게 끊긴 고니시는 평양에 발이 묶이며 의주를 공격할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한산도대첩은 이순신이 조선의 임금 선조를 살려준 전투였고, 바다의 재해권을 완전히 조선이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된 전투였으며, 육지로 북상해 있던 일본군이 장기간 굶주리며 춥고 불안에 떠는 계기를 마련한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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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조와 원균
그 이후에는 연전연승을 한 이순신은 전라도 바다뿐만 아니라 경상도 바다, 충청도 바다까지
모두 통솔하게 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단다.
일본은 연속된 해전에서 패배로 인해 휴전 이야기가 오가고
전쟁도 소강 상태가 되었단다.
그런데 그렇게 전쟁의 소강 상태에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짜증나는 일들이 일어났어.
왜 당시 왕이 선조였으며,
왜 원군 같은 자가 있었는가.
선조는 바다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순신에게 무리한 공격 지시를 했고,
그것은 일본이 파 놓은 함정이라는 것을 알고
선조의 공격지시에 따르지 않았단다.
바다는 그 누구보다 이순신 장군이 가장 잘 알았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속 좁은 선조는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이순신을 파직하고,
서울로 압송하여 고문했단다.
심지어 이순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하기까지 했단다.
우의정 정탁을 비롯하여 몇몇 신하들이 선조를 극구 말려
사형은 면할 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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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우의정 정탁은 엎드려 아룁니다.
이 모(이순신)은 몸소 큰 죄를 지어 죄명조차 무거우나 성상께서는 얼른 극형을 내리시지 않으시 두둔하여 문초하시다가 그 뒤에 엄격히 추궁하도록 허락하시니 (중략) 성상께서 인을 베푸시는 한 가닥 생각으로 혹시나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으시고자 바라심에서 하심이라 신은 이에 감격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중략) 이 모는 참으로 장수의 재질이 있으며, 수륙전에도 못하는 일이 없으므로 이런 인물은 과연 쉽게 얻지 못할 뿐더러, 이는 변방 백성들의 촉망하는 바요, 왜적들이 무서워하고 있는데, 만일 죄명이 엄중하다는 이유로 조금도 용서해줄 수가 없다고 하고, 큰 벌을 내기기까지 한다면 공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내키지 않을 것이요, 능력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옵건대 은혜로운 하명으로 문초를 덜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 있게 하시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 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갚으려는 마음이 반드시 저 명실 장군만 못지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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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파직 당하고
그 자리는 원균이 차지했어.
사실 원균도 그 전에 이순신과 함께 전투에 계속 참여를 했단다.
그렇게 옆에서 봐 온 것이 있어서
바보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지휘를 할 수 있을 텐데,
일본군의 첩자인가 싶을 정도로 무능함과 고집불통을 보였단다.
전투를 앞두고 부하들이 면담을 요청했지만 다 거절당하고
경상우수사였던 배설은 결국 진영까지 이탈했다고 하는구나.
그의 항명이 나중에 반전의 계기가 되었지만 말이야.
결국 무능의 대명사 원균은 철전량 해전에서 대패하고 말았단다.
자신이 죽은 것은 물론,
이순신이 훈련시켜 레벨업한 유능한 부하들도 많이 죽고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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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다른 지휘관들 역시 칠천량에서 머무르는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원균에게 면담을 청했으나 원균은 분노의 술만 들이킬 뿐 소통을 거부했다. 이 상황에 대해 원균에게 항명을 했던 이가 경상우수사 배설이었다. 배설은 칠천량에 진을 치는 상황이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한산도로의 회군을 주장했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이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자 12척의 판옥선과 함께 칠천량의 조선권 진영을 이탈했다. 배설의 행동은 분명한 항명이었고, 칠천량에 남은 조선 수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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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반전
겁쟁이 선조는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남아 있는 것은 판옥선 12척.
앞서 이야기했던 배설이 원균의 진영에서 이탈해서 살아남은 12척.
배설이라는 인물도 이순신에게 그리 호의적인 사람은 아니었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니까 자신보다 상사이긴 하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대.
아무튼 남아 있는 12척으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회의적으로 생각할 때,
이순신은 희망을 보았단다.
그 유명한 명량 해전의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졌단다.
12척의 배로 300여대에 맞서 싸우고 100여대의 일본군 배를 침몰시킨,
전세계 역사를 통틀어 찾아봐도 유례를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전투.
이순신은 천운으로 생각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아빠가 생각하기에 모두 다 이순신의 덕분이라 생각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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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명량해전 이전에도 이순신은 조선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명량해전 승리 이후 이순신은 성웅이 되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이 끝나고 이렇게 말했다.
“명량해전 승리는 실로 천운이었다.”
칠천량의 대패를 보고받은 선조는 이렇게 말했었다.
“이 패배는 하늘의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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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량 해전 한 번의 전투로
재기를 노리던 일본군은 큰 좌절을 느꼈을 거야.
이런 일본군의 패배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도 앞당기지 않았을까 싶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이순신이라는 이름까지 외쳤다는 이야기도 있대.
아무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죽으면서 유언으로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라고 했다고 하는구나.
이로서 전쟁은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어.
하지만 이순신의 생각은 달랐단다.
그들을 곱게 보내준다면 그들은 다시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생각했어.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군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단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
그 전투에서 조선은 마지막 대승을 하고,
이순신 장군이 이야기한 것처럼 일본은 조선을 오랫동안 침략할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어.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의 총탄에 맞고 돌아가신단다.
그렇게 길고 긴 전쟁이 끝이 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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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명나라에서도 조선을 도와준다고 왔었는데,
그 중에 명나라 장군 진린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웠는데
나중에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면서
진린의 자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터를 잡았다고 하더구나.
나중에 진씨 성을 가진 사람을 알게 되면 한번 물어봐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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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
조선의 명나라 제독으로 참전하여 이순신과 깊은 전우애를 맺고 돌아간 진린의 자손들은 청나라 오랑캐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 하여 대거 조선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그들이 이순신과 진린이 함께 있었던 고금도까지 왔고, 그 옆 해남에 터를 잡고 살아가니 이들이 광동 진씨이다. 지금도 해남에는 광동 진씨 집성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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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위인 중에 한 명만 고르라고 하면
세종대왕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을 기념하는 현충사를 곳이 있단다.
하지만 그곳을 가는 이들은 극히 적다고 하는구나.
사실 아빠도 ….
너희들과 함께 이순신 장군 묘소와 현충사에 한번 꼭 가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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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369)
이순신 장군 묘소에 가본 적이 있는가?
갈 때마다 항상 혼자였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는 평일에도 사람이 북적거린다.
그러나 현충사는 한적함이 좋다.
그게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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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는 정말 많단다.
이번 여름에도 한산도 대첩을 영화화한 <한산>이라는 영화가 개봉한다고 하는구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관객수를 모았던 <명량>이라는 영화의 후속작이기도 하지.
시간적으로 보면 <한산>이 먼저이긴 하지만…
이번에 <이순신의 바다>라는 책을 읽고 났더니
이 영화도 보고 싶더구나.
기회가 되면 너희들도 함께 같이 보자꾸나.
PS:
책의 첫 문장: 이순신은 덕수 이씨이다.
책의 끝 문장: 이순신은 지금 우리들의 이순신이고, 우리 후손들의 이순신일 것이다.
책제목 : 이순신의 바다
지은이 : 황현필
펴낸곳 : 역바연
페이지 : 405 page
책무게 : 806 g
펴낸날 : 2021년 12월 16일
책정가 : 22,000원
읽은날 : 2022.06.21~2022.06.24
글쓴날 : 2022.07.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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