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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설립자, 신부(6.26)◀
1. 가톨릭 굿 뉴-스 성인록 ▷
성인명: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Josemaria Escriva)
축일:6월 26일
신분: 설립자, 신부
활동지역:
활동연도: 1902-19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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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설명 :
•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1902년 1월 9일 에스파냐의 바르바스트로(Barbastro)에서 아버지 호세 에스크리바(Jose Escriva)와 어머니 마리아 돌로레스 알바스(Maria Dolores Albas)의 여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나 그 해 1월 13일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굳건한 신앙과 그리스도인다운 덕행, 잦은 고해성사와 영성체, 기도를 향한 굳은 의지, 동정 마리아께 대한 신심에 기초한 삶의 모범을 통해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활기차고 건강하며 정직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언제든지 마음을 열고 모든 근심걱정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호세마리아를 격려해 주었고, 항상 그의 질문에 애정을 갖고 다정하게 응답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는데, 1910년에서 1913년 사이에 그는 세 명의 누이동생이 사망하는 슬픔을 겪었고, 소규모 사업을 하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에 따른 재정적인 문제로 1915년 그의 가족은 인근 마을인 로그로뇨(Logrono)로 이주하였다.
· 1917-1918년 겨울에 호세마리아는 자신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어떤 일을 경험했다.
그 해 성탄절에 로그로뇨에는 많은 눈이 내렸는데, 어느 날 그는 눈 위에 얼어붙은 발자국을 보았다.
그것은 맨발의 카르멜회 수도자들이 남긴 것이었는데, 그것을 보고 호세마리아는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어떻게 희생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에 말씀하시기 시작한 것으로, 그는 어렴풋이나마 가장 위대한 사랑을 갈구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사제가 되려는 결심을 했고, 그러면 하느님의 뜻을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그래서 그는 로그로뇨의 신학교에서 사제직을 위한 과정을 시작했고, 1920년 사라고사(Saragossa)에 있는 교황청립 신학대학에 들어가 사제품을 위한 준비를 마무리했다.
동시에 그는 아버지의 제의와 장상의 허락으로 사라고사의 대학에서 시민법도 함께 전공하였다.
그의 관대하고 활기 있는 성품과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정직하고 침착한 성격은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그의 경건한 생활은 동료들에게조차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학문적 열정 또한 동료 신학생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1922년, 20살의 나이에 사라고사의 대주교에 의해 신학교의 감독 또는 학사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많은 시간을 성체 앞에서 기도하며 보냈고, 이는 그의 영성생활이 성체성사에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는 매일같이 필라르(Pilar)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찾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달라고 성모님께 전구하였다.
· 1924년 11월 27일 그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을 접했고, 그해 12월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3월 28일 사라고사의 성 카롤루스 신학교 성당에서 디아스 고마라(Diaz Gomara)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이틀 후 그는 필라르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경당에서 첫 번째 장엄미사를 집전하였고, 3월 31일에는 보좌신부로 발령받은 교구의 작은 시골마을인 페르디게라(Perdiguera)로 이동하였다.
1927년 4월 그의 대주교의 승인을 받고 시민법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마드리드(Madrid)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이 학위는 에스파냐 수도에 있는 중앙 대학에 의해서만 주어졌었다.
마드리드에서 그의 사도적 열정은 그를 다양한 계층의 학생, 예술가, 노동자, 학자, 사제들과의 만남에로 인도했고, 많은 시간을 어린이들과 도시 외곽의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보내게 했다.
동시에 그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법률을 가르치며 여러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도 했다.
·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일상적이거나 비범한 분야 모두에서 풍부한 은총을 주셨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교회와 신자들에 대한 봉사를 통해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1928년 10월 2일 마드리드에서 피정을 하던 호세마리아 신부는 지난 몇 해 동안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내적인 움직임을 기록했고, 그러면서 어렴풋이 알던 자신의 소명을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오푸스 데이’(Opus Dei, 하느님의 사업이란 뜻)라는 재속 수도회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교회 안에서 새로운 소명의 길을 열어주셨고, 그것은 세상 한가운데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의 노동을 성화함으로써 사도직의 거룩함과 실천에 응답하도록 전파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몇 달 후인 1930년 2월 14일 하느님께서는 또한 오푸스 데이가 여성들 안에서도 전파될 수 있도록 그를 일깨워주셨다.
· 그 순간 이후 호세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남녀들이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도록 양육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는 자신을 혁신가나 개혁가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압도되고 교회에 지속적인 활력을 주시는 성령에 의해 쇄신되어 이웃을 사랑하고 일상생활 안에서 거룩함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오푸스 데이의 존재 이유라고 보았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그의 뜻을 따르기 시작했는데, 특별히 대학교의 학생들과 교수들이 그러했다.
그는 그들의 마음 안에 모든 이에게 봉사할 수 있는 진정한 결심을 굳히도록 도와주었다.
이 세상의 지식과 문화가 사회 전체를 복음화하기 위한 열쇠가 됨을 깨달은 그는 1933년 대학 안에 ‘DYA 아카데미’라는 센터를 열고 이듬해 사회 복음화를 위해 ‘영성적 고려’라는 책을 처음 발간했으며, 그 이후 372권의 책을 더 출판하였다.
· 이렇게 오푸스 데이가 그 첫 걸음을 내디디는 동안 1936년에 에스파냐 내전이 발발했다.
마드리드에서도 심각한 종교 박해가 일어났지만 호세마리아는 기도와 인내 그리고 사도적 열정으로 이에 맞서 나갔다.
이 시기는 교회에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영성과 사도직이 성장하고 희망이 빛을 발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1939년 내전이 끝나자 그는 에스파냐 반도 전역에서 사도직 활동에 대한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그는 많은 대학생들과 함께 사회의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를 모셔다주며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깨닫도록 해주었다.
특히 내전으로 인해 야기된 에스파냐 사회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용서와 사랑, 평화의 정신을 강조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많은 주교들이 교구의 성직자와 평신도들 위해 그의 강의를 청했고, 수도회 장상들 역시 그러했다.
그는 1941년 에스파냐 동북부 레리다(Lerida)에서 사제들을 위한 피정 강의를 하던 도중 오푸스 데이의 사도직 안에서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어머니의 선종 소식을 듣기도 했다.
· 1943년 그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오푸스 데이의 정신을 교구사제들의 삶에 육화시키기 위한 성 십자가의 사제회(Priestly Society of the Holy Cross)를 오푸스 데이 안에 설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1944년 6월 25일 세 명의 기술자가 사제로 서품되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인 알바로 델 포르틸로(Alvaro del Portillo)는 설립자를 계승하여 오푸스 데이의 대표가 되었다.
성 십자가의 사제회는 교구사제와 사제직을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영성적 형성과 활동에 있어서 지역교회의 사목자들과 조화를 이루었고, 교구사제로 머물며 오푸스 데이의 정신을 실천하는 성 십자가의 사제회에 참여하는 교구사제들은 더욱 많아졌다.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호세마리아는 오푸스 데이의 정신을 보편교회 전역에 전파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의 사도직 활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46년 그는 오푸스 데이에 대한 교황청의 승인을 얻기 위해 로마로 본부를 옮겼고, 1947년 2월 24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로부터 ‘데크레툼 라우디스’(decretum laudis, 특별법)에 의거해 가승인을 받았으며, 3년 후인 1950년 6월 16일 교회의 최종 승인을 받아 교황청 직속 재속 수도회가 되었다.
이로써 자신의 노동과 자선 그리고 기도로써 오푸스 데이의 사도적 활동에 동참할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 비가톨릭 신자와 심지어 비그리스도인까지도 오푸스 데이의 협력자로 참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 호세마리아 신부는 오푸스 데이 본부를 로마에 안착시킨 후 교회가 원하는 곳에서 봉사하며 사도좌와 교계제도에 더욱 일치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건강상의 어려움에 직면해서도 전 세계로 사도직 활동을 확장했고, 이로 인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증인으로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행하는 것이 참된 덕목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위대할수록 세상은 작아지기 마련이다. 세상 모든 곳에서 주교의 부르심에 따라 자신의 사도직 안에서 복음화를 위한 사명을 수행하고,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이 흘러넘치도록 하려는 그의 소망은 더욱 커졌다.
그래서 매우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시행되었다. 전문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 농업 종사자를 위한 학교, 대학교,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병원과 의료센터 등 그의 활동은 종종 끝도 없는 바다와도 비교되었다.
·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소집을 발표했을 때 호세마리아는 이 공의회가 만족스런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다.
공의회의 심의 결과로서 교회의 교도권은 거룩함에로의 보편적 부르심, 거룩함과 사도직을 위한 방법으로서의 전문적인 일, 현세의 노동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가치와 합당한 제한, 내적 생활의 중심이자 기초로서의 거룩한 미사 등 오푸스 데이 정신의 기초적인 측면들을 확인했다.
호세마리아는 공의회의 자문위원으로서 수많은 교부와 전문가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공의회에서 선구자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오푸스 데이의 활동을 통해 공의회의 가르침과 일치하여 공의회의 정신을 촉진하도록 부지런히 일했다.
하지만 그는 조직적인 활동도 중요하지만 내적인 생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가르쳤다.
· 그는 일상생활을 통해 성성(聖性)을 얻을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기도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깊은 내면의 생활을 위해 투쟁하는 것뿐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살 때 모든 것은 기도가 되고 또한 모든 것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기 때문이다.
즉 모든 종류의 일이 기도가 될 수 있고, 또 실제로 기도가 되고 사도직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호세마리아가 생각한 사도직의 기초는 세상 한가운데서 얻은 그의 내적인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기도와 성사로써 자라나고 성체성사를 위한 강렬한 사랑으로서 표현되었다.
· 그는 생애의 마지막 몇 해 동안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많은 일정을 수행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항상 단순하고 친밀한 목소리로 하느님과 성사, 그리스도인의 헌신, 노동의 신성함, 그리고 교회와 교황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다.
1975년 6월 26일 정오 호세마리아는 작업실에서 심장 발작으로 선종했다.
그 당시 오푸스 데이는 이미 모든 대륙에 전파되었고, 80개 나라에서 6만여 명이 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선종 이후 많은 사람들이 교황에게 그의 시복시성을 청했고, 1981년 심사가 시작되었다.
1992년 5월 17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수많은 순례자들 앞에서 그의 시복식을 거행했고,
2002년 10월 6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교황은 30만 명이 운집한 시성식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일상생활의 중심이자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새 성인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이 알바스(Josemaria Escriva de Balaguer y Albas)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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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 성인록 ▷
< 6월26일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
......... (안젤라 | 2010.06.21 Ud.)
▷ 축일:6월26일
<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사제 >
- ST. JOSEMARIA ESCRIVA
- San Josemaria Escrivá de Balaguer Sacerdote, Fondatore dell"Opus Dei
(-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 바라게르의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사제, 오푸스 데이 설립자)
- Born:9 January 1902 at Barbastro, Spain
- Died:26 June 1975 of natural causes in his office in Rome, Italy;
body at Prelatic Church of Our Lady of Peace at Viale Bruno Buozzi 75, Rome, Italy
(- 출생:1902.1.9;스페인 바르바스트로에서
- 사망: 1975.6.26; 이탤 로마의 본인사무실에서 자연사;
유해는 이탈리아 로마, Viale Bruno Buozzi 75, 평화의 성모 성당에 안장)
- Beatified:17 May 1992 by Pope John Paul II
- Canonized:6 October 2002 by Pope John Paul II
(- 시복: 1992.5.17; by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성: 2002.19.6; by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Josemaría = composto di Giuseppe e Maria
(- 호세 마리 아 = 요셉과 마리아의 합성어)
*注: 위(한역韓譯/ '18.6.26 -아타시 韓)
△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성인
•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JOSEMARIA ESCRIVA) 몬시뇰은 1902년 1월 9일 스페인 바르바스트로에서 출생했다.
누님 까르멘 (1899-1957)과 동생 산띠아고(1919-1994) 외에 3 여동생들이 있었으나 어린 나이에 모두 사망하였다.
그의 아버지 호세와 어머니 도로래스는 자녀들에게 깊은 그리스도인 교육을 시켰다.
1915년 그의 부친의 방직사업이 실패하자 가족을 데리고 부친의 새 일자리인 로그로뇨(스페인 북부)로 이사하였다.
바로 이 로그로뇨에서 호세마리아는 처음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그는 어느 수도자가 지나간 뒤 남겨둔 눈위의 맨발자국을 보고나서 하느님께서
그에게 무엇인가를 원하신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사제가 되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아
로그로뇨와 사라고사에서 사제가 될 준비를 하였다.
1924년 그의 부친이 돌아가신 후 그는 가장이 되었다.
1925년 사제가 된 후 그는 사라고사 교구의 벽촌에서 사목을 시작했고, 나중에는 사라고사에서 사목했다.
1927년 사라고사 대주교의 허락을 받고 시민법 박사학위를 취득하려고 마드리드로 옮겼다.
거기서, 1928년 10월 2일 피정 도중에 하느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바를 분명히 알았다.
그는 오푸스 데이를 창설했다.
그때부터 그는 특히 환자들과 빈민들 속에서 사목을 계속하며 오푸스 데이의 발전을 위해 일하였다.
그러면서도 마드리드 대학에서 공부를 하며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학원에서 가르쳤다.
스페인 내전이 터지자 종교박해가 심해져 그는 여러 장소로 피난을 다녀야했다.
스페인 수도권에서 탈출할 수 있을 때까지 그는 은밀히 사제직을 수행했다.
험한 피리네오산맥을 넘어 탈출하여 북부 도시 부르고스에 머물었다.
스페인 내전이 끝난 1939년에 마드리드로 돌아가 드디어 시민법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그후 몇 년동안 수많은 평신도와 사제와 수도자들을 위한 피정강론 신부로 활동하였다.
1946년부터 성 호세마리아는 로마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곳 라테란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교황청 신학학술원 명예회원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자문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비오 12세에 의해 교황의 명예 고위성직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오푸스 데이의 발전을위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1970년에는 멕시코)순방하였다.
1974년과 1975년에도 중미와 남미를 순방하여 수많은 사람과 모임을 가졌다.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1975년 6월 26일 선종했다.
전세계 주교 3분의 1이 넘는 1300명 주교들을 포함하여 세계 각지 수천 명의 사람들이
교황에게 에스크리바 몬시뇰의 시복시성심사를 청원하였다.
교회법에 따라 1981년 시복시성조사성성에서 심사가 개시되었다.
1992년 5월 17일 오푸스 데이 창설자의 시복식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으로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그 시복식에서 교황은 이렇게 강론 하였다
"복자 호세마리아는 초자연적 시각으로 만인이 성성의 추구와
사도직에로 부름심을 받고 있다는 메시지를 지침없이 강론하였다."
2002년 10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성인의 저서들
●<길>은 그의 저서중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1939년 초판에 이어
오늘날까지 38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 되었고 4천만권 이상이 발행되었다.
●<영적 성찰> (1934)
●<거룩한 묵주의 기도>(1934)
●<우엘가스의 여자 수도원장>(La Abadesa de las Huelgas)(1944)
●<에스크리바 몬세뇰과의 대화>(1986)
●<그리스도께서 지나가고 계시다>(1973)
●<하느님의 친구들>(1977)
●<십자가의 길>(1981)
●<교회와 사랑>(1986)
●<밭고랑>(1986)
●<대장간>(1987)
▷ 오프스 데이(Opus Dei)
• 특징과 사명
오푸스 데이(Opus Dei)는 가톨릭 교회의 praelatura personalis 중 하나입니다
(한국어판 교회법전 제2권 1편 4장에 성직자치단으로 번역 되어있음).
"오푸스 데이"는 "하느님의 사업"이라는 뜻입니다.
완전한 이름은 "성 십자가 와 오푸스 데이" 입니다만,
줄여서 "오푸스 데이회" 또는 "오푸스 데이"라고 부릅니다.
오푸스 데이는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에 의해 1928년 10월 2일 마드리드에서
창설되었습니다 (본서 1.4참조).
전세계 8만여명의 사람들이 소속되어 있습니다.
본부는 로마에 있으며, 본회의 중앙성당도 거기 있습니다.
오푸스 데이의 사명은 세상 한복판에 있는 모든 사회 계층의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하고도 일관성있게 믿음 생활을 하도록 촉구하고
또 모든 사회 영역을 복음화시키는데 이바지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신자들이 성성의 추구와 복음 전파의 소명을 받고 있다는 메시지를 퍼뜨리는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메시지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교회헌장, Lumen gentium 32, 33)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본회는 회원들에게 영성적, 목자적 교육배려를 제공하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 이를테면 "세속의 각기 다른 신분, 직업, 환경에 놓여있는
각자에게"(오푸스 데이의 정관 2.1)도 이런 도움을 줍니다.
이런 목자적 배려의 도움으로 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녀야 할
덕의 수련과 일의 성화를 통해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도록 고무됩니다(정관 2).
본회 신자들이 하는 일의 성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기
● 법을 철저히 지키고,윤리적 요구에 따라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
● 그 일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하기
● 자신의 동료 시민들에게 봉사하고 사회의 진보에 공헌하려는 갈망으로 일하기(정관 86.1)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서약하는 수많은 사람들로 해서 세상은 성화될 것이고,
모든 활동과 현세적 삶속에 복음의 정신이 스며들게 될 것입니다
(오푸스 데이의 교회법내 행로 34-41쪽 참조, Scepter Publishers, Princeton, NJ, 1994).
본회 신자들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부분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사도직은 특수 분야, 이를테면 교육, 환자 간호, 혹은 장애인 돌보기와 같은 일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본회의 사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몰두하고 있는 어떠한
현세적인 활동에서든지 그리스도인의 방법으로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협력해야만 하고, 또 믿음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오프스 데이홈에서)
▷ 오푸스 데이의 정신
• 오푸스 데이는 만인이 성성에로 부르심을 받고 있는다는 메시지를 세상 한복판에 퍼뜨리는 일을 추구합니다.
성 호세마리아가 1939년에 이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그대는 자신을 성화시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대도 말입니다!
누가 이 의무를 사제들과 수도자들만의 관심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한 사람도 예외없이,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길 291)
30년 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인이 되려고 분발해야 하고
그리스도를 보여줘야 한다고 되풀이했습니다.
오푸스 데이의 정신은 특별한 방법으로 평범한 신자들, 즉 사제들과 평신도들에게
이 이상을 실천하도록 도와줍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요약될 수가 있습니다.
영적 부자(父子)관계.
일상생활의 성화.
일의 성화.
자유를 사랑함.
기도와 희생의 삶.
애덕과 사도직.
생활의 일치.
▷ 성 십자가 사제회
• 성 십자가 사제회는 오푸스 데이와 결속되어 있는 사제회입니다(정관 57-68 참조).
이 사제회는 오푸스 데이 사제들과 거기 속하고자하는 교구 사제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사제회의 회장은 오푸스 데이 단장입니다.
이 사제회에 속해 있는 교구 사제는 오푸스 데이 정신에 따라 영적 도움을 구하며
자신의 성직을 통해 성성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오푸스 데이의 사제단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각자 자기 교구에 종속되어 오직 자신의 주교를 따라야 합니다.
자치단은 그들에 대해 법적 관할권이 없습니다.
성 십자가 사제회는 고유 목적 달성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직일 뿐입니다.
교회 당국과 제2차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형태의 사제회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사제회가 제공하는 영적 도움은 그들의 성직 의무 수행을 통해 성성을 촉진시키는 방향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사제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주교와의 일치를 촉구하며 사제들간의 우애를 돈독하게 해줍니다.
오푸스 데이의 영성지도신부는 자치단의 통치에 관계하지 않고
오직 성 십자가 사제회의 영적 활동들에 대한 책임만을 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 약 2000여 교구 사제들이 성 십자가 사제회에 속해 있습니다.
1902년 1월 9일 스페인의 바르바르또르에서 태어나 1925년 사라고사에서 사제로 서품된 그는
1928년에 성령의 영감을 받아 회적 임무를 수행하면서 스스로가 축성된 자로 생활하는
새로운 형태의 ’오뿌스 데이’를 창설하였다.
1930년에는 여성 사도직으로 발전시키고, 1943년에는 십자가의 사제회를 창설하였다.
’오뿌스 데이’는 1950년 교황청으로 부터 승인 받고, 1982년에는 추기경의 직속 단체로 승격되었다.
항구한 기도와 모든 덕에 대한 과감한 실행으로 ’오뿌스 데이’를 세계적으로 성장하게 하고 계속 교회를 위해 일하였다.
1975년 6월 26일 운명하여 로마에 있는 평화의 모후 성당에 안치되었다.
이 무렵 ’오뿌스 데이’ 회원은 5개 대륙 80개국에 6만 명이 넘었다.
1992년 5월 17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고, 2002년 10월6일 시성되었다.
* ’오뿌스 데이’란 "하느님의 일"이라는 뜻으로 기도와 회개와 성무 활동을 열심히 하여 나날을 성화 하자는 운동이다.
(우표로 보는 성인전에서)
• "여러분들의 모든 영적, 물질적인 필요에 성 호세마리아에게 간청하시라고 권고 합니다"
지난 2003년 6월 26일, 로마 교구 성 호세마리아 본당에서
오푸스데이 단장 하비에르 에체바리아 주교님의 강론.
•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성 암브로시오께서 "성인들의 탄생은 보편적인 기쁨을 가져옵니다.
그들이 우리 모두에게 속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 암브로시오, 루가 복음의 해설 II, 30).
오늘 6월 26일, 성 호세마리아의 축일도 전 교회에게 기쁨의 날이고,
세계의 큰 도시들의 대성당들과 작은 마을들의 작은 성당들에,
"항상 성인들을 통하여 찬미 받으실" (시편 67/68, 6 참조) 하느님께
이 친구와 보호자를 주심에 감사하려 모일 수백만 명의 신자들에는 환희의 날입니다.
이 성인 사제에 대한 애착은 세계에 퍼져 있지만,
오푸스데이의 창설자께서 당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바치신 이곳 로마에서의 이 축일은 더욱 특별한 힘을 얻는다 할 수 있겠습니다.
평화의 성모 마리아 자치단 성당에 그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지난 10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시성 하셔서,
올해 처음으로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님의 축일을 성인으로서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분의 영혼과 모범으로 보여주신 가르침을 신앙생활에 가득히 물어 놓으려고 하고,
당신의 전구를 통해 많은 은혜와 은총을 받아 신세를 진 우리에게 특별한 축일이라는 색조를 가집니다.
성 호세마리아께서 우리에게 가까운 인물이었고 항상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 중요한 그분의 인격뿐만이 아니라, 매일 평상 생활에서 작고 큰 필요에 그분의 도움을 청하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그분의 부성, 아버지임 을 보고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희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같이 하시고, 뒷받침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가신 지가 아직 많이 지나지 않았으니 진정 가정적인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 몇몇은 개인적으로 그분과 같이 생활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친밀한 마음으로 그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거룩함을 찾음과 사도적 작업의 의무의 길에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그분을 우리의 마음의 깊은 곳에 놓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Gratias tibi, Deus, gratias tibi: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하느님, 감사드립니다.
우리들의 감사함은 오늘 특별한 강도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세상과 성 교회에게 이 성스럽고, 기쁨을,
또 깊은 사도적 열성을 가지신 봉사자를 보내주신 삼위일체이신 천주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또 모든 은총이 모성적인 중재로 오기 때문에 성모님께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 성실하시고 하느님께서 영원에서부터 맡겨주신 사명에
몸과 마음을 바치신 성 호세마리아 에게도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세계에서 수많은 이들이 전구 기도를 드릴 때 빌 듯이,
그 사명이란 각자 자신들이 직업 안에서, 일상적인 의무들을 지킴에서,
즉 이 세상에서 거룩함을 찾는 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은 사회 모든 신분의 남자와 여자가 걸을 수 있는 길이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걷고 있는 길입니다.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하느님, 감사드립니다.
2. 오늘 미사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심을 한번 더 묵상할 기회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각자 직업 안에서 찾으러 가셨습니다.
배를 빌려서 땅에서 조금 떼어놓게 하신 다음 군중들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씀이 끝나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고 하십니다.
시몬 베드로는, 처음 가졌던 저항을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이기고, 극히 이례적인 고기잡이 기적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너는 이제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루가 5,10) 라고 하시는 주님의 초대를 받아
영원히 예수님을 따를 결정을 다른 열한명의 제자들과 함께 하게 됩니다:
"그들은 배를 끌어다 호숫가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루가 5,11).
성 호세마리아는 이 복음 말씀을 자주 묵상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께서 맏겨주신 사명, 즉 모든 이들 에게 직업이,
세상의 일들이 그리스도와 만나는 기회가 될 수 있으며,
모든 이들이 거룩함과 사도작업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려야 함에 대한 확인을 찾으셨습니다.
그분이 쓰신 "길" 에 한 항목에 "당신이 그렇게 놀라워하시는 것이 제게는 당연한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직업 안에서 당신을 찾으려 가셨다고요?
마찬가지로 첫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베드로를, 안드레아를, 요한 과 야고보를 그물 근처에서,
마테오를 수금원의 자리에서, 그리고 (놀래십시오!)
바오로를 그리스도인들의 씨를 말리려고 하는 일에서 찾으셨습니다" (성 호세마리아, 길, 799).
1928년부터, 오푸스데이의 창설자께서는 이 메시지를 쉬지 않고 설교하셨고,
전도하시고, 자신부터 실천하시려 노력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삶의 목적이 되었고 모든 힘과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적인, 또 초자연적인 재능을 헌납하셨습니다.
지금은 천국에서, 많은 남녀들이 모든 자력을 다해 예수님을 가까이 따를 수 있도록,
또 바로 성성(聖性)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와의 동일함을 상소한 일들에서 찾을 수 있도록,
하느님의 왕위 앞에 전구 하면서 이 사명을 계속해서 달성하고 계십니다.
오푸스데이의 창설자께서 천국에 가진지가 28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자치단의 심의회에 십이 만이 넘는 성 호세마리아의 전구를 통한 은혜를 알리는 편지를 세계 모든 곳에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존의 삼림 지에서부터 남극근처의 눈이 가득한 마을에서 부터까지에서 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산더미 같이 쌓인 증언들을 살펴보면, 그분에게 부탁되는 은혜가 부여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먼저 각 신자에게 영적 적인 은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이 세상에서 사실 때, 특별히 돌아가시기 다수년전에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만날 때가 되어 가는 것을 생각하실 때
"하늘에 있으면 더욱 여러분들을 잘 도와줄 수 있습니다" 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으시는 여러분께 저는 물적이거나 영적이거나,
중요한 것이거나 사소한 것이거나 필요하실 때 성 호세마리아를 부르시라고 권고 드리고 싶습니다.
빠드레께서 여러분들을 다정하게, 세심하게 지키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바라시는 것보다 훨씬더 조흔 것들을 하느님께 서부터 얻어 내 드릴 것입니다.
믿음과 인내를 갖고 청하십시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여러분의 뜻처럼 이루어지게 원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성 호세마리아의 전구를 통해서 은총의 채널인, 성사를 더 가까이 하십시오.
3. 1928년 10월 2일, 하느님께서 성 호세마리아에게 그 거대한 사업을 보여주셨을 때부터
그분은 그 사명이 한 곳이나 시간에 묶이지 않고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매일 평상의 삶, 가족, 직업, 사회생활들이 영구적인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시성식 날에 성 호세마리아의 메시지를 요약해서 교황 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직업과 어떤 다른 일들도, 은총의 도움을 가지면 거룩함으로 가는 평상적인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시성식 미사 강론, 2002/10/6).
성 호세마리아의 인물과 가르침의 보편적임은 명백하게 존경받는 장소가 다양함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이나 멀지 않은 날에 다섯 대륙에 수백 도시와 마을에서,
대부분이 각 교구의 주교 님이 집전하시는, 성 호세마리아를 기념하는 미사가 행해질 것입니다.
"깊은 곳으로 가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복음 말씀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교황 님께서 그리스도교 적인 발자국을 새로 시작된 이 세기에 새기라고 하신 초대가 한번더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2001년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나아 갑시다.
제이천년대가 교회 앞에 그리스도의 도움을 가지고 모험을 할 거대한 바다처럼 열립니다.
이천년전에 인간을 사랑하셔서 사람이 되신 성자께서 오늘도 그분의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예리한 눈빛을 가지면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희가 그리스도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큰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새천년기" Novo millennio ineunte, 2001/1/6, 58).
시성식 미사 강론때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성 호세마리아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께 하셨던 초대를 의심 없이 받아드리셨다" 하시고,
"깊은 곳으로 가십시오 (Duc in altum) 라고 그의 영적 가족이 성 교회에게 일치와 사도직 봉사로서 기허할수 있도록 전했습니다.
이 초대는 오늘 우리에게도 전해지는 것입니다. 깊은 곳으로 가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십시오 (루가 5,4)."
(요한 바오로 2세,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시성식 미사 강론, 2002/10/6).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이 가족, 직업, 사회 안에서의 신분을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회 활동이든지 그 작업 안의 깊은 곳으로가 무서움 없이 그물을 쳐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진실된 사도가 되어 예수님께서 우리의 배,
즉 우리의 삶에 올라오시어 다스리시게 해야 하겠습니다.
성 호세마리아의 전구를 통하여,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심어주신 요구를 들어 주시라 빕니다. 아멘.
▷ 영혼을 일깨우는 다이너마이트 - 라몽 로페즈 몬시뇰
(...) 그곳에서 저는 "길"이라는 작은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제게 마치 ‘영혼을 일깨우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았습니다.
(한국 가톨릭다이제스트 2003년 4월호 "내가 만난 가톨릭"에서)
저는 과거를 회상하는 것을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한국 "가톨릭다이제스트"의 상냥하지만
끈질긴 요구에 못 이겨 스페인에서 보냈던 젊은 시절의 기억을 거슬러 더듬어 봅니다.
1968년이 되던 해, 저는 고등학교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지긋지긋한 수학, 화학, 물리 등의 과목을 공부하고 또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저의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반 친구가 자기와 함께 오푸스 데이 센터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저를 이끌었습니다.
사실 저는 오푸스 데이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요.
그곳에서 저는 "길"이라는 작은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제게 마치 ‘영혼을 일깨우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았습니다.
“그대의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지 마십시오. 유익한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나중에 올 사람을 위하여 길을 내십시오. 그대의 믿음과 사랑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십시오.
불순한 미움의 씨를 뿌린 자들이 남긴 더럽고 비열한 흔적을 그대의 사도적 삶을 통해 지워버리십시오.
그리고 그대 가슴 속에 간직한 그리스도의 불꽃으로 세상의 모든 길을 밝히십시오.”("길" 중에서)
그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어떤 느낌이 아니라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어떤 것과도 다른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한 인간이 하느님의 계획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에 마주하였을 때
그의 영혼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 지…. 그것은 밝고 눈부신 깨달음이었습니다.
반드시 굉장한 이적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계획과 마주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생생한 각성을 통해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 사제나 수도자에게만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느님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열려있다는 것을 그 때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베드로, 안드레아, 요한, 야고보 그리고 그 밖의 제자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결코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세상은 엄청난 변화를 겪어왔지만 삶의 핵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가족과 일과 친구가 바로 그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유익한 일을 했고, 그들이 속한 마을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았으며,
설령 그들이 몰랐다 할지라도 국가에 기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저는 의사라는 직업이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품위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면서
의대진학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던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오푸스 데이 센터에 처음 발걸음을 하고 난지 바로 얼마 안 되어 저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성인, 즉 진정한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의 놀라움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혹은 이후 제가 원하는 무엇을 하는 동안이라도
제가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아신다면….’, ‘하느님께서 내가 얼마나 바쁜지를 아신다면….’
그런데 주님께서는 저의 개인적인 처지와 가능성을,
또 저의 꿈과 한계를 잘 알고 있는 바로 그때 저에게 성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면서도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5,48)는 말씀을 여러번 읽었습니다.
저는 매사에 신중을 기했고 저의 일상생활을 하느님께 봉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좀더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들을 통과하는 것이 어떤 새로운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왜 내가 그러한 일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새로운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드리드에 있는 의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학교와 병원을 오고 가며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의학 공부를 마친 후, 다른 전공의처럼 의사로서의 앞날을 준비하고 있던 중,
저는 일본에 있는 오푸스 데이의 사도직사업을 위해 일본에 갈 것을 부탁 받았습니다.
저는 그전까지 단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 그대로 멀고 먼 나라 극동아시아의 일본에 가게 되었습니다.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15년이 흘렀습니다.
일본어를 배우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으며,
또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수 많은 개종자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인생은 언제나 모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호세마리아 성인께서 말씀하셨듯이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하느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모험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어떤 사람의 꿈보다 더 크고 더 흥미진진합니다.
먼 과거는 아니지만, 1975년 당시 저는 일본에서 문자 그대로 정말 ‘외국인’이었습니다.
거리에서 저와 마주친 일본인들의 놀라움은 대단했습니다.
특히 시골일수록 그 정도는 더 심했지요.
그때까지 스페인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저를 당연히 미국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성패는 하느님께 달려있다.”는 의미를
그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던 시간들은 늘 아름다웠습니다.
이 시기에 오사카, 교토, 나가사키, 오이타 등의 도시에 오푸스 데이 센터가 지어졌고
선교사업도 확장되었습니다.
성스러운 믿음의 씨앗이 모든 곳에서 싹을 틔우고 이질적인 문화적, 정신적 전통에
융화되어 가는 것을 보는 것은 즐거움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제 인생의 ‘모험’은 완성되었다고 생각했으며 거기에 전혀 후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더 많은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성직자로서의 저의 소명을 받아들이고 로마에서 은총의 귀중한 3년을 보내고
다시 일본에 돌아왔을 때 제 친구들은 온통 검은색 사제복 차림으로 바뀐 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의 겉모습이 조금 바뀐 것만으로도 저는 그들에게 이미 멋진 교리 교육을 한 셈이지요.
새로운 책임을 맡게 되어 저는 필리핀으로 갔고 지금은 홍콩에서 살고 있습니다.
과거를 다시 돌아보아도 모든 시간 제 손을 잡고 이끌었던 분은 바로 하느님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성서에서 다음 구절을 읽을 때면 거기에서 언제나 압축된 제 인생을 발견합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잔치 시간이 되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자기 종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전하였다.”(루가14,16-17)
고귀하고 아름다운 파티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거절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느님이 계획하고 불러주신 모든 초대에
“예”라고 대답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기도 하셨지만 또한 베다니아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기도 하신 것처럼
우리 모두는 일이 잘 안 풀려 어려울 때나 혹은 순조로울 때나 아주 작은 일에서 거룩한 의무를 다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호세마리아 성인께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은 정말로 성인이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매 순간 작은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십시오.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열중하십시오.” ("길" 중에서)
하느님께서 부르시지 않는 사람은 없으며 거룩함은 전 우주의 보편적 소명입니다.
“하느님이 직장에서 그대를 찾으셨다고요?
그대는 놀랄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이것이 아주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하고 있는 일 가운데서 저를 찾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물질하고 있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요한과 야고보를 부르셨고 세관에 앉아있던 마태오를 찾으셨던 것과 같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바울로는 그리스도인의 씨를 아주 없애버리려고
박해 활동에 열중해 있을 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길" 중에서)
일상의 노동과 평소 수행하는 직업이야말로 완전함에 이르는 우리의 거룩한 소명의 한 부분입니다.
오푸스 데이는 이렇게 우리를 거룩함에로 이끄는 보편적 소명을 깨우쳐주고,
정직하게 직업활동을 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만 제 글을 마무리해야겠군요. 지금까지 제 자신의 나약함과 투쟁하고
저의 소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노력해온 시간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과연 거룩함이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스스로 답하면서 글을 맺습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대답은 하느님과 그가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과 친구가 되는 것,
그리고 우리를 이루고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와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았던 과거 어느 날,
아마도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저와 나누고 싶어 오푸스 데이 센터로 절 초대했던 친구처럼 말입니다.
♬3.Credo-빈소년합창단
https://youtu.be/NSJ0F4mW9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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