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9년 안동성당에서 가톨릭농민회 오원춘 사건 관련 강론하는 모습(위)과 그시절 플래카드(아래).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 사진은 광주 항쟁에 가담한 사형수들의 구명을 위해 윤공희 대주교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는 모습.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첫 부임지였던 안동본당과 그곳의 순박했던 시골 사람들은 김 추기경에게 유난히 애틋한 기억으로 남았던지 생전에 그 시절을 자주 회고하곤 했다. 당시 고해하러 온 주민들에게 몰래 돈을 나눠줄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이후 김천본당 근무를 포함해 2년 반 정도의 짧은 본당 사제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김 추기경은 밝히곤 했다.
김 추기경은 안동본당 주임신부를 거쳐 1953년 4월 대구교구장 최덕홍(요한) 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 그리고 1955년 6월 경북 김천 본당 주임 겸 성의중ㆍ고교 교장으로 전임됐다.
1년 남짓 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김 추기경은 웃을 때 코가 벌름거린다고 해서 '인자하신 콧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학생들과 장난을 쳐가며 격의 없이 지내다보니 붙은 별명이다.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1956년 독일 유학길에 오른 김 추기경은 뮌스터 대학에 적을 두고 7년간 그곳에 체류했다. 그 때 만난 요셉 회프너 교수에게 배운 '그리스도 사회학'은 김 추기경이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을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 사진출처:추기경 나의이야기>
김 추기경은 회프너 교수에게 배운 이론적 토대가 없었다면 이념논쟁 등으로 요동쳤던 1970-80년대 한국사회를 헤쳐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에게 회프너 교수를 소개해준 인물은 일본 상지대학의 은사이자 '영적 스승'의 역할을 했으며, 뒷날 서강대를 설립한 독일 출신 테오도레 게페르트 신부였다.
독일 유학시절은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가 열리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공의회 정신에 따라 시대에 걸맞은 교회를 만들기 위한 변화와 쇄신의 물결이 요동치고 있었다.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교회의 문을 활짝 열고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하려는 쇄신운동이었다.
이에 대해 김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가톨릭교회가 쇄신을 통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바람은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강한 바람이었다"면서 "독일에서 겪은 그런 체험은 훗날 주교와 추기경으로서 소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자신이 차분하게 앉아서 공부할 팔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은 고해성사와 미사는 물론 어려운 일만 있으면 김 추기경을 찾았다. "도와 달라'는 동포들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해 여기저기 불려다니다 보니 학업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가족제도'에 대한 논문주제를 붙들고 씨름하던 그는 결국 박사 학위를 포기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후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을 지내며 교회 언론의 초석을 다졌는가 하면, 1966년에는 신설된 마산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주교품을 받았고 그로부터 2년 뒤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것은 그로서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주한 교황대사 히폴리토 로톨리 대주교로부터 급히 상경하라는 전갈을 받고 대사관에 들어선 김 추기경은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직을 맡게 됐다"는 놀라운 말을 듣는다. 주교가 된 지 2년 밖에 안 된 주교단의 막내인 그에게 당시 빚에 쪼들리고 사제들이 분열되는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서울대교구는 무겁고 부담스러운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시골뜨기 주교'에서 일약 한국 천주교의 중심인물이 된 김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현대사의 한복판이 됐던 명동성당과 함께 한국사회의 영욕을 몸소 겪어야 했다.
서울대교구장 취임미사 강론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정신에 따라 '세상 속의 교회'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혔던 그는 이듬해인 1969년 우리나라 최초로 추기경에 임명된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로 전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그러나 추기경이 되었다는 영광은 잠시였다. 1970-80년대 격동의 시대 속에서 세상과 교회를 모두 돌보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특히 1970년대 가톨릭교회와 명동성당은 박정희 유신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으로 인식됐다.
김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당시 본의 아니게 여러 사건과 사태를 겪으면서 인권 사회 정의 운동의 한가운데 있었다"면서 "정부 압력은 물론 교회 안에서 쏟아지는 비판까지도 홀로 감수해야 하는 내 심경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힘들다"고 고백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출범하면서 교회의 현실 참여문제로 내부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1974년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지학순 주교를 비롯한 여러 사제들이 옥살이를 하는 등 교회와 정부의 골도 깊어져만 갔다.
그러나 이 시기에 김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회의 현실참여는 옳은 방향이라고 여겼다. 김 추기경은 1971년 성탄 자정 미사에서 장기집권으로 향해가는 박정희 정권의 공포정치를 비판하는 강론을 했고, 이듬해 8월에는 시국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박 정권과 충돌했다.
나아가 1980년대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해방구였다. 특히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때 명동성당은 권력에 맞서 싸우는 마지막 보루였다. 김 추기경은 당시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연행하려던 경찰 병력의 투입을 끝까지 막아냈다.
김 추기경은 당시 상황에 대해 "경찰 병력 투입과 학생 연행은 상징적으로 시국 방향을 바꿔놓을 수 있는 사안이어서 이 나라가 민주화의 길로 가느냐, 아니면 군사정권이 연장되느냐의 갈림길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살얼음판 같던 시대를 헤쳐오면서 얻게 된 불면증은 김 추기경을 30년 넘게 괴롭혔다.
그 시절에 대해 김 추기경은 "난 1970-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 했을 뿐이다"라고 회고했다.
김 추기경은 이 같은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도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지는 굵직한 행사를 치러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등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도약하는 계기를 만든 행사들이다.
종교인이자 사회지도자로서 시대의 한복판에 섰던 김 추기경은 교황청에 사임 의사를 밝힌 지 6년 만인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은퇴 이후 2002년 북방 선교에 투신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옹기장학회를 공동 설립하는 등 북한 선교를 위해 노력했고,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너와 너희 모두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처럼 '세상 속의 교회'를 지향하면서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종교인의 양심으로 바른길을 제시해온 김 추기경은 시대의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뒷사람들에게 남겨놓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출처:연합뉴스 기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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