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양귀비
창원은 사십여 년 전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산업화의 기틀을 다져가고 있을 때였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우리나라 최초 계획도시였다. 요즘이야 계획도시를 건설하려면 수용토지 보상비가 많이 들어서 그렇지 정부의 의지와 입법만 뒷받침 되면 얼마든지 해결된다. 전국 곳곳의 혁신도시가 그걸 증명하고 있다. 행정 복합도시인 세종특별시도 마찬가지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계획도시로 건설된 창원의 교육단지에 소재한 여자고교다. 교육단지에는 초중고와 대학까지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한 개, 고등학교가 3개였다가 나중에 사립 여고가 추가로 신설되어 4개, 산업인력을 육성하는 기능대학이 1개였는데, 교명이 한국 폴리텍대학으로 바뀌었다. 교육단지 앞에는 창원대로를 사이에 두고 아주 넓은 녹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교육단지는 충혼탑 사거리에서 한국산업공단 경남지사에 이르기까지 꽤 너른 구역을 차지한다. 나는 충혼탑 사거리와 가장 가까운 학교에 근무한다. 충혼탑 사거리 대상공원 아래는 창원극동방송국 사옥이 위치하고 있다. 그 앞에는 꽤 넓은 나대지가 있다. 아마도 시청 소유의 미개발 부지거나 학교 용지로 남겨둔 땅인지도 모르겠다. 공원도 아닌 터가 사철 텅 빈 채 두고 있다.
공한지 길가 모퉁이에는 지역사회단체서 오래 전 커다란 빗돌을 세워두었다. 어디선가 남근석처럼 모양이 잘 생긴 자연석을 구해다가 한 변을 다듬어 국민교육헌장 전문을 음각으로 새겼다. 요즘 아이들은 국민교육헌장이 뭔지를 잘 모를 것이다. 중년을 지나는 사람들은 국민교육헌장이 무슨 내용인지 잘 알 테다. 산업화시절 ‘유신’이란 이름으로 자유와 인권이 유보된 시절이렷다.
그 당시 종이가 귀해 시험지는 재활용 갱지를 사용했다. 교과서 사진은 흑백으로만 실려 있었다. 그런데 내가 초등학교 4학년 겨울방학을 얼마 앞둔 때 담임선생님은 컬러도안 무궁화가 그려진 인쇄물을 학생들마다 한 장씩 나누어주었다. 그러면서 며칠 사이 그 인쇄물 내용을 모두 외우라는 숙제를 주었다. 나는 하룻밤 사이 393 자를 다 외워 이튿날 담임선생한테 칭찬받은 적 있다.
이러다 세월이 흘러갔다. 내가 교직에 들고 보니 교원들에게 년 두 차례 포상 기회가 주어졌다. 상반기는 스승의 날을 즈음해서고, 하반기에는 국민교육헌장 선포일이었다. 예전 권위주의시절 공식 의식에는 국민교육헌장을 낭독하기도 했다. 이후 군사정권이 물러가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시대 흐름에 따라 국민교육헌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교련복이 없어진 것과 같다.
내가 학교로 출퇴근길 걸어서 갈 때는 충혼탑 사거리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집에서 창원스포츠파크를 지나 폴리텍대학 후문에서 교육단지 관통해 그 끝 지점 학교까지 간다. 퇴근길 서둘러 집으로 가야할 때라든가 비가 오는 아침이면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그럴 경우 학교와 인접한 충혼탑 사거리로 나간다. 그곳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그 길가 흉물스런 빗돌이 우뚝하게 서 있다.
요즘 청소년들은 국민교육헌장이 무엇인지 알 일도 없다. 그렇지만 한 세대 전 교육자와 피교육자들에겐 금과옥조처럼 교육의 지표로 여겼다. 이제 국민교육헌장을 새긴 빗돌은 권위주의 시대가 남긴 부산물로 화석처럼 각인된 유물이 되고 말았다. 나는 그 지점을 지날 때면 씁쓸한 마음 지울 수밖에 없다. 내가 그 빗돌을 세운 주체가 아닌지라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처지도 아니다.
앞서 언급한 나대지는 겨울엔 무슨 싹을 볼 수 없었다. 봄이 와 벚꽃이 지고 나니 그곳 한복판에 유채꽃이 듬성듬성 피었다. 신록이 싱그러운 계절이 왔다. 웬만한 봄꽃들은 거의 피었다가 저물었다. 이제 가는 봄날을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화사한 꽃이 피어나고 있다. 놀라지 마시라. 양귀비꽃이 피었습니다. 그것도 떼 지어 무더기로 피었습니다. 꽃양귀비입니다. 개양귀비라고도 해요. 16.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