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수업 2> 일체중생을 구하는 길? 결국 나를 구하는 길!
입보살행론 2
2. 겸손하게 목적을 밝힌다
1:2 이전에 부처님이 설하시지 않은 것을 여기에 말한 것은 없으며,
저에게는 능숙한 문장력도 없으니
따라서 저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는 생각보다
단지 제 마음에 익숙하게 하기위해 이것을 짓나이다.
1:3 제가 이것을 지음으로써
선업을 행하려고 하는 저의 신심과 깨달음이 증가하고,
저와 선연이 같아 함께 하는 사람들도
이것을 본다면 이익을 얻게 될 것이나이다.
#법문의 주체와 청중 그리고 주제
<입보살행론>은 샨티데바 '보살'이 나란다대학의 학인스님들을 대상으로 법문한 내용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법문의 주제와 내용을 고려할 때 주청중으로 고려한 대상은 인연 닿는 모든 '보살'입니다. 아직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은 이들이라면 미래의 보살로 바라봐야 할 것이고, 이미 보리심을 일으킨 이들이라면 현재의 보살이며, 보리심 수행을 지속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과거의 보살일 것입니다.
주청중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보살입니다. 그렇다면 주제는 명확합니다. 보살이 되는 법, 보살에게 어울리는 삶과 보살의 수행을 완성하는 길까지를 모두 담고 있는 '보살행'이 바로 주제입니다.
보살을 위한 보살행을 설법하는 것이 이 논서라면, 보살을 꿰뚫는 정체성이 중요해집니다. 보살은 곧 중생구제를 하는 존재입니다. 보살의 길을 수행할 때 가장 많은 의심을 일으키고, 가장 큰 부담감이 되며, 가장 큰 걸림돌로이 되는 오해가 바로 일체중생을 구제한다는 개념입니다.
#나를구제하는길이 곧 중생구제의 길
보리심을 일으킨 후 현실 속에서 수행을 하다보면 누구나 느끼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철 없는 선택을 했구나!'
보살 수행을 이어갈수록 일체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에 압도되기 마련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 없는 존재가 그저 성불이 욕심나서 또는 붓다의 중생구제가 고귀해 보여서, 별 생각 없이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서약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습니다. 내 습관 하나 바꾸기도 힘들고, 친한 사람 한 명을 아주 조금 돕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친하지 않은 이와 모르는 사람 그리고 원수에 해당되는 이들까지... 이들을 모두 돕는다? 심지어 성불의 길을 완성하도록 책임을 진다? 이 의미를 모르고 약속을 했으니 이 얼마나 철 없는 선택이 아니겠습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보리심을 일으키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한 공능이 있습니다. 다만 중생구제를 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 때 부담감에 압도되어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스님은 <입보살행론> 전체 구성을 통해 일종의 '스몰스텝' 전략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중생구제의 시작과 끝만을 생각한다면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겨우 보리심을 일으켰고, 수행을 한 바는 거의 없으며, 나 자신도 구제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일체중생을 구제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중간과정에 대한 무지에 의해서 일어나는 착각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간다고 해보겠습니다. 이것만보면 숨이 막히겠죠? 그런데 그 중간과정을 알면 조금 부담이 줍니다. 논전이 총 10장으로 구분되는 것은 중간목적지를 알려주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중생구제를 하기 전에 먼저 보리심의 공덕을 알고 공감하며 열정을 일으켜 건강한 원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에만 도달하면 됩니다. 그럼 총 10Lv 중 1Lv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어떤가요?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것과 비교할 때 부담감이 훨씬 줄어들죠?
심지어 이 1장의 원보리심을 일으키는 여정조차 또 다시 스몰스텝 전략으로 세분화 됩니다. 서울에서 용인을 가는 길이라는 것도 가장 작은 단위로 나누면 결국은 그저 한 걸음을 더 걷는 것 뿐이니까요. 일체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은 궁극의 목표입니다. 이 장기목표를 이루기 위해 중기목표가 필요하고, 이 중기목표를 또 다시 단기목표로 세분화합니다. 그리고 이 단기목표를 또 다시 초단기목표로 나누면 결국 지금 이 순간의 말과 행동 그리고 마음을 바꾸는 것, 보리심을 향해 한 발자국 나아가는 것이 바로 보살의 길입니다.
부산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자각이 있다면 지금 서울 시내에서 걷고 있는 한 발자국이 곧 부산을 향한 걸음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한 걸음은 지금 나 자신의 삼업을 아주 조금 개선하는 노력입니다.
'일체중생을 구제한다?'
이것은 허상입니다. 실상은 현찰라의 삼업을 할 수 있는만큼 맑히는 정진 뿐입니다. 그렇기에 보살의 중생구제는 '나'라는 중생을 구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구하는 이 과정을 통해 일체중생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보살행의 일석이조입니다. 아니 일체중생을 구하니 일석만조인가요?
흔히 이 게송을 해석할 때 샨티데바 보살이 겸손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겸손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보살의 길을 진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본래 중생구제는 타인을 구하겠다는 환상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괜시리 부산까지 걸어간다는 착각에 빠져 포기하지 마시고, 지금 한 걸음 걷는 것에 몰두해야 합니다. 물론 부산을 간다는 방향성, 일체중생을 구제하여 성불에 이른다는 궁극의 목적은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선연이 같다는 의미
나라는 중생을 구함으로써 타인을 구한다? 이것이 어떤 원리로 가능할까요? 붓다는 일체지를 성취했습니다. 이는 보살행을 완성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중생이 사라졌나요? 만약 중생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일체중생을 구하는 미션이 완료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불에 이르렀을까요?
일체지를 이룬 붓다조차 '인연 없는 중생'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초전법륜을 위해 녹야원으로 떠날 때 만났던 훔훔 바라문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붓다에게 질문했고, 붓다는 훌륭한 답변을 하셨지만 그는 그저 고개를 흔들며 떠났죠. 심지어 붓다와 동시대의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붓다라는 말조차 듣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인연이 닿지 않은 이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결국 중생구제는 인연이 닿는 이들과 선연이 같은 이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샨티데바 보살은 이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일단 논전을 수지하여 이 게송을 읽고 있다는 것은 보살과 인연이 닿았다는 뜻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모든 사람이 끝까지 논전을 읽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덮어버리고 인연을 끊을 것이지만 끝까지 읽고 감동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선연이 같다는 의미입니다. 이 선연이 바로 중생구제의 핵심 원리입니다.
보살행은 결국 나를 구하는 길입니다. 동시에 이는 선연이 같은 일체중생을 구하는 길입니다. 결국 나를 온전히 구해낸다면 일체지를 이룬 성불에 도달합니다. 남은 일체중생은 누가 구할까요? 성불의 길로 나아간 보살의 가르침이 구합니다. 이것이 고귀한 담마의 힘입니다. 이 가르침을 뒤따르는 선연이 있는 후배보살들이 역시 일체중생을 구합니다. 그들의 후배들이 또 구합니다. 이 무한 생성되는 보리심의 열매가 결국은 일체중생을 끝없이 구해냅니다. 상상이 되시나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위대한 결과를 내는 보리심의 실천은 결국 지금 이 순간 나를 구하는 작은 노력으로 실천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이 스몰스텝 전략을 정말 잘 활용하신 뛰어난 교육자입니다. 하지만 샨티데바 보살의 시대에는 이미 천년이 넘게 붓다의 가르침에 사족이 붙어 있던 시기입니다. 보살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담마의 사족을 추려낸 후 성불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모든 여정의 핵심을 담은 커리큘럼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논전은 인간완성을 이루고 싶은 모든 존재가 반드시 익혀야 하는 인류의 교과서입니다.
첫댓글 보리심의 실천은 지금 이 순간 나를 구하는 작은 노력으로 (스몰 스텝 전략) 실천 하라는 것이다.
밝게깨어있기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