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3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마르코 2,1-12
우리가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았다고 믿어야만 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 (마르 2,10)을 보여주십니다. 중풍 병이 고쳐지는 것도 성령의 힘이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성령께서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시며 사람에게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주어질 수 있음을 명확히 하십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하느님께서 당신 살과 피, 곧 당신 생명을 직접 양식으로 주실 수 있다거나
혹은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까지는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교회에, 혹은 인간에게 ‘많이’ 주시기는 하지만 ‘다’ 주신다고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이는 하느님을 온전하지 못한 부모로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음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율법 학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이런 말은 겸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을 증명할 뿐입니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만약 부모가 자녀에게 다 주지 않고 어떤 것은 제한해서 준다면 자녀는 부모의 진정한 자녀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다 받았다고 믿어야 부모처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 못하여 그 못 받은 것을 더 받으려고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덜 받았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덜 주어도 된다고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만약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교회에 주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교회는 남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어차피 자신이 믿는 하느님은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받지 못했다고 믿으면 교회는 이웃의 죄를 용서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하느님처럼 되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덜 받았다고 믿었고 그래서 선악과를 바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처럼 되는 길이 막혔습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는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하여 자신도 자녀를 칭찬할 줄 모르는 엄마가 나옵니다.
안타깝기만 합니다. 아이는 엄마를 아줌마라 부르고 새엄마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엄마는 최선을 다하지만 아이는 사랑받는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받아야 줄 수 있는데 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또 자신도 못 받았으니 그렇게 하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합리화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덜 받는 만큼 덜 인간이 됩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내어주는 일이 용서입니다.
부모로부터 덜 받았다고 믿는 자녀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아도 당연하다 여깁니다.
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 받은 자녀는 자신이 다 받았기에 용서하지 않으면 이율배반이 되기에 형제를 다 용서합니다.
전에 눈 큰 콤플렉스를 가진 여인이 이무석 박사를 찾아온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을 두고 술집 여자와 바람을 피운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받았다고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쌍꺼풀이 있는 자기 동생을 더 사랑하고 눈이 작은 자신은 덜 사랑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고 여전히 아버지에게 사랑받으려고만 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녀가 꿈을 꾸었을 때 남편과 바람을 피운 여자의 눈이 엄청나게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덜 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이 덜 사랑하는 것을 그 믿음으로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완전한 사랑이 되려면 다 받았다고 믿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사람의 아들에게도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 고유의 권한이 주어져야만 했는지를 강조하셨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받았다고 믿지 못하면 하느님의 온전한 자녀가 될 수 없고 그리면 하느님처럼 되지 못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합당하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모든 것을 받았다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셨음을 아셨습니다(요한 3,35; 13,3 참조).
그래서 온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셨습니다. 모든 것을 받으셨기에 모든 것을 내어놓으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은 만큼만 줄 수 있고 그만큼만 하느님을 닮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목숨까지 내어놓습니다. 그러려면 모든 것을 받았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면서도 혹은 고해성사를 받으면서도 부족하게 받았다고 느낀다면 더는 하느님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항상 나는 하느님의 모든 권한을 다 받은 사람임을 잊지 않으려 노력합시다.
그래야 하느님을 빨리 닮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13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마르코 2,1-12
고통을 없애주지는 못하겠지만, 고통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도와줍시다!
기적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치유의 은총을 입은 중풍 병자를 바라보며 제 자신의 발밑도 내려다보게 됩니다.
오랜 세월 중풍으로 온몸이 경직되고 마비된 채 살아온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낫게 해주겠다!’가 아니라,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코 복음 2장 5절)였습니다.
중풍 병자는 몸이 아프기 전에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영혼과 정신이 아팠던 것입니다.
무엇인가에 강하게 억눌리고 짓눌려, 마음이 마비되고 몸이 마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대상이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사건일 수도 있고 죄일 수도 있습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오랜 세월 홀린 듯이 무엇인가로부터 억압받고 구속받고 마비되어 살아왔습니다.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다는 강박 관념 속에 스스로 빠져나오기란 불가능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이 늘 지지부진하고 부자유스러웠습니다.
이런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을 건네십니다.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오늘 우리는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는지?
우리를 속박하고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는 완벽주의로 인해 힘겨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어떤 한 사람 때문에 온몸과 마음이 마비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때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하는 깊은 후회나 상처, 트라우마로 인해 온 몸이 경직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자유로움의 원천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 각자가 그 무엇에도 억눌리지 않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아갈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상처로부터, 죄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부조리한 제도나 관습으로부터, 비인간적인 조건으로부터...
예수님께서는 단기간에 걸친 증상치료가 아니라 심층적인 원인 치료를 행하셨습니다.
사목자인 동시에 치유자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기적같은 능력을 기대합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완벽한 해결책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에게는 그런 역량이 없습니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처럼 우선 근본적인 치료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대하는 시선을 바꾸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고통을 없애주지는 못하겠지만, 고통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며, 대 죄인들이며, 중증 장애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런 조건 속에서도 하느님 현존 안에서 기쁘고 충만히 살아갈 수 있도록 동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심각한 고통과 상처를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까이 늘 현존하시면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가 일어설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고무하고 격려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의 사람아>
2023. 01. 13 연중 제1주간 금요일
마르코 2,1-12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하느님의 사람아>
참으로 그대가
하느님의 사람이거든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맡기신 일을
이런저런 까닭으로
하느님께 미루지 말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대가 기꺼이 이루어
그대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몸소 일하시게 하게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