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포의 가을
하 정 숙
구룡포의 가을은 하얀색이다.
농촌의 가을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노란색이고, 산촌의 가을이 울긋불긋 물드는 단풍색이라면 구룡포의 가을은 오징어의 속살이 바람에 나부끼는 하얀색이다.
동해안을 잇는 7번 국도를 살짝 벗어나 포항에서 울산으로 가는 31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구룡포의 상징인 과메기를 알리는 광고판이 보인다. 그 광고판을 안고 왼쪽으로 돌아 “어서 오십시오. 구룡포입니다.”라는 손님맞이에 답하면 ‘라곡서원’ 주변에 구룡포의 상징인 과메기와 갈매기 모양을 꾸며 놓은 잔디밭이 나온다. 과메기와 갈매기 몸체에 단추처럼 장식된 눈알이 하도 익살스러워 머물라치면 길녘의 코스모스가 어느새 부둣가로 길 안내를 나선다.
구룡포의 코스모스는 앙증맞다. 요즘은 개량종이 많아서 코스모스도 어른 키를 훌쩍 넘는 것도 많은데 구룡포의 코스모스는 걸음마를 갓 배우는 아이들이 손잡고 걸을 수 있을 만큼의 키로 옹기옹기 피어 있다. 그 코스모스 꽃길이 끝나는 곳에 구룡포항이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구룡포의 가을 바다는 가을 하늘빛을 닮았다. 그 바다에 부서지는 물비늘 속에 오징어가 널리기 시작하면 구룡포의 가을이 시작된다. 덕장을 가진 집에서는 오징어를 가지런하게 널어 말리지만 변변한 덕장을 갖추지 못한 집은 어디든 걸칠 때면 있으면 오징어를 넌다. 때론 빨랫줄에 덧걸어 말리는 집도 있어 눈에 띠는 곳에는 온통 오징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나신을 드러내고 해풍에 몸을 맡긴 채 ‘피데기(반건조 오징어)’로 말라가는 오징어가 바람에 펄럭인다. 말리는 데 하루면 된다고 해서 울릉도에서는 ‘하루바리’라고도 하는 피데기는 구룡포의 또 하나 명물이다. 두고 온 바다가 못내 그리워서일까. 갓 널린 오징어의 온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적을 만나면 뿜고 달아나려 준비한 먹물 주머니도 빼앗긴 채 무장해제된 포로처럼 축 처져 있다. 그러다 하루쯤 지나면 체념이라도 한 듯 몸에서 새파란 오기가 빠져나가며 꾸득꾸득 말라 가는, 오징어의 그 물 마르는 사연은 갯바위에 따개비처럼 따닥따닥 앉아 있던 갈매기들이 다시 바다에 전해 준다.
가을철 구룡포의 주점에는 안주가 필요없을지 모른다. 날이 저뭇해지면 소주 한 병 뒷주머니에 넣고 거닐다가 곳곳에 널린 오징어 한 마리쯤 슬쩍 서리하는 정도는 맑은 바람, 아련한 달빛, 귓전을 울리는 파도소리 탓이라고 변명해도 용서될 것만 같다. 기분 좋을 만큼 취해 가슴에 쌓인 이야기들을 쏟아 놓다가 구룡포 시장통에서 어탕 국수나 얼큰한 모리국수로 속을 달래면 바릊대며 사느라 답답하던 속들도 가분해질 것이다.
포구의 냄새에 아직 익숙치는 않지만 바다를 보며 자란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들로부터 오히려 바다를 배우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3년 째다. 불어오는 바람에 짠 소금기가 배어 있음도, 바닷가에서 비릿하게 나는 냄새가 생선의 비린내뿐이 아니고 향긋한 미역 냄새임도 알았다. 또 저 멀리 넘실대는 파도가 낭만의 유영만이 아니고 포구의 사람들에겐 삶이며 죽음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깨달았다.
오징어는 낮 동안엔 200~300m의 깊은 수심에 머물러 있다가 밤이 되어서야 20m 안팎의 얕은 곳으로 나들이를 나온다. 그러나 집어등 불빛에 모여 든 그 나들이는 형광빛으로 반사되는 새우 모양의 인공 미끼를 먹이로 착각하여 덥석 잡다가 그만 낚시에 꿰이며 끝이 나고 만다. 어부들이 낚싯줄을 당겨 올리면 긴 더듬이 팔 2개와 8개의 다리를 오므리며 감전된 것처럼 자지러져 보지만 짱짱하던 그들의 몸은 이제 더 이상 바다와 함께할 수 없다.
여름꽃들이 이운 자리에 해당화빛을 띤 파라킨사스 열매가 빨갛게 익어 간다. 자잘한 나무와 꽃들이 해풍에 잘 견디지 못하는 바닷가에서 그래도 튼튼히 자라는 파라킨사스 초록 가지에 빨간 열매가 앵두처럼 매달린, 녹의홍상 같은 나무 위에 오징어 속살을 뉘어 본다. 지난여름의 뜨거운 날들과 이별하는 한해살이의 그 하얀 떨림이 가을 햇살 아래 서러울 정도로 눈이 부시다.
어제는 바다에서 푸른 꿈을 안고 헤엄치다 오늘 눈물 흘리는 오징어처럼 언제까지나 머물 것 같다가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마지막까지 바다를 품으려 바동거렸을 오징어가 바람결에 하나, 둘, 수굿하게 고개를 숙이면 구룡포의 가을도 조금씩 조금씩 깊어진다. 그 구룡포의 가을에 아직 새물내 나는 내 포구(浦口)의 가을을 살며시 끼워 넣는다.(080920)
첫댓글 개여울님도 어느새 구룡포화 되어 있네요. 그 먼 곳으로부터 힘들게 출퇴근하지만, 내륙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삶의 체험을 바닷속 만큼이나 한꺼풀 한꺼풀 쌓고 계시는군요. 예쁜 글 직접 써서 실어 주시니 더욱 감사한 마음입니다.
선생님, 아직 구룡포를 알려면 한참 멀었습니다. 평생을 통영에서 사신 한 선생님이 아직도 바다를 다 모른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제가.... 하지만, 구룡포를 사랑한다는 것은 말할 수 있습니다. 습자지에 먹물 배듯 살며시 저며 오는 그 사랑이 먼 길을 다독입니다. 늘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룡포밤 ,포구의 오징어 배, 휘황찬 불빛은 잊지못합니다.가을이면 구룡포 입구의 앙징스런 코스모스길..., 등.. 어찌 잊을수가 있으리..,개여울님 동안 안녕 하셨지요? 구룡포의 향수가 묻어나오는 글 .행복함으로 잘 보았습니다.감사 합니다^^
부족한 시각으로 구룡포를 그렸습니다. 한 구절이라도 구룡포에 대한 향수를 전할 수 있음이 행복할 따름입니다. 밤의 집어등 불빛은 맘껏 보지 못해서 그것이 아쉽기는 합니다. 늘 퇴근 후 종종걸음치다 보니...^^.
바다내음이 짙게 풍기는 개여울님의 수채화 같은 좋은 글 가슴에 담고 갑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 하나 하나가 그림이라는 것을 요즘 와서 깨닫고 있습니다. 때론 수묵화로, 때론 수채화로, 때론 유화로...... 접사 촬영을 하듯 애정을 가지고 사물을 보려 합니다만, 마음이 투명하지 않을 때가 많아 답답할 때도 많습니다. 글에 마음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글 즐감하고 갑니다.
개여울님의 글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줍니다. 무의미하게 지나치던 사물에게 사랑을 느끼게 일깨워주는 매력이 있어 참 좋습니다. 구룡포가 마음 속에 정다웁게 다가 옴을 느끼며, 가을 속의 구룡포를 맞이하러 가야 할 것 같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