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소유상…’ 잘못된 번역인가
상(相) 해석 놓고 공방…현실문제 거론 못해
2002-12-20
- 관념 형상 여래몸 세가지 뜻을 하나로 통일 -
구마라즙 번역 틀리지 않지만 의역 지나쳐
지난 7일 열린 세 번 째 논강의 주제는 금강경의 핵심인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는 잘못된 번역인가였다.
이 논강에서 계속해서 지적하는 것처럼
원전을 보지 못하고 한문본으로 공부해온 까닭에 부처님의 원래 사상이 잘못 전달되었다는
전제가 이같은 도발적인 주제를 끌어냈다.
금강경의 5장에 실린 이 내용은 불교를 인용할 때 가장 많이 그리고 중요하게 언급되는 구절이다. 한문본에서는 4구게로 되어있어 이 부분은 따로 떼어내 인용하기도 한다.
만약 각묵스님의 문제제기 처럼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면 지금까지 한국불교는 미망을 벗어나지 못한 셈이 될 것이다.
아마 금강경을 ‘주석’ 해온 수많은 고승과 학자들의 ‘사자후’는 폐기해야 할 지 모른다.
도올 김용옥은 그의 역저 ‘금강경 강해’에서
“무릇 있는 바의 형상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고 해석하며
“무아론이 강한 어조로 노출되어 있다.
허망이란 말은 곧 인간의 인식과 관련된 말로
존재 자체의 허망이라기 보다
우리가 존재를 인식하는 방법 수단이
모두 허망하다는 뜻”
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견(見)은 깨닫다의 의미가 내포된 말로 제상이 상 아님을 깨닫는다면
그제서야 여래를 보게 되리라는 뜻”
이라고 했다.
그는 이책에서 법정스님의 견해도 소개하고 있는데 “어느 선객이 이 구절을 제상과 비상을 같이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고 해석한 적이 있는데 문의의 맥락을 보면 바른 해석은 아니지만
종지에 어긋남은 없다”
고 밝혔다.
도올의 이같은 주해는 현재 한국불교에서 보는 뜻과 틀리지 않는다. 인터넷에 올라있는 여러 종류의 해석을 보면 “무릇 온갖 겉 모양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니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줄 알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혹은
“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했으니, 도무지 일정한 형상이란 없는 것이니 이것이 무상의 법이다. 다만 형상을 취하지 않으면 거룩한 뜻에 부합될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온갖 형상을 떠나면 곧 부처라 한다.’ 하였다.
”혹은 ”상(相)이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다. 상(相)을 상으로 보지 않았을 때 인간은 여래가 된다”는 등의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 각묵스님의 주장은 무엇인가.
각묵스님은 텍스트로 쓰는 ‘금강경 역해’에서 “(32가지 대인‘ 상을 구족(했으므로 여래라고 보면) 그것은 거짓이다. (32가지 대인)상을 (구족했으므로 여래라고 보지)않으면 그것은 거짓이 아니다.
참으로 이와같이 (32가지 대인)상과 (32가지 대인)상이 아니라는 (두 측면에서) 여래를 보아야한다
”첫 번째 두 번째 논강에서 이미 밝혔지만 각묵스님은 한문본에 나오는 상(相)이 범어에서는 인식을 의미하는 상(想, perception), 외관을 의미하는 니밋따(相,mark), 락카나(相, mark on the body) 세가지 뜻으로 구분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주장의 연장선에서 각묵스님은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는 32가지 대인상 즉 락샤나의 번역어이지
산냐의 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구마라즙이 정신적 영역인 산냐를 (想)으로 번역하지 않고
모양을 뜻하는 상(相)으로 번역한 것은
마음 속에 그린 생각도 형상(相)으로 본
탁월한 안목이지만
‘범소유상 개시허망’ 구절의 상은 한국불교에서 흔히 해석하듯
산냐나 니밋따가 아니라는 것이다.
금강경의 핵심구절로 ‘숭상’해온 그간의 해석은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내포되어 있다.
당연히 문제제기가 빗발쳤다.
청중석에 있던 한 스님은
“상을 단지 부처님 상호로 한정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며
“산하대지의 온갖 형상을 다 지칭해도 될 것”이라고 말했으며,
또다른 스님은 “중요한 것은 형상에 매이지 말라는 금강경의 뜻을 제대로 읽는 것이며
한국불교가 지금껏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또다른 스님은
“상은 연기적 관점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핵심은
반야”라고 주장했다.
각묵스님 역시 이러한 지적에 동의했다.
“단지 번역상 원전의 의미를 넘어선다는 것이지 구마라즙이 밝히고자 하는 뜻은 옳다”며
“의역을 통해 금강경이 설하고자 하는 근본을 멋지게 표현해 금강경을 대표하는 구절로 승화시켰다”고
높이 평가했다.
논강은 상(相)의 정의 해석을 놓고 오랫동안 토론이 이어졌다. 각묵스님은 “한문본으로만 보면 상을 단지 관념으로만 해석할 수있지만
구마라즙은 거기서 나아가 관념과 형상의 문제까지 지적했음을 원전을 통해서 알 수있다”며
원전의 중요성을 거듭 지적했다.
문제는 “모든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볼 때 여래를 본다”는 뜻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 가다.
논강이 열린 이유며 논강에서 반드시 밝여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불교계에서 전가의 보도 처럼 사용되는
“상을 갖지말라”는 뜻이 분명하게 밝혀질 때
정확한 의미가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 논강에서는 상의 원뜻을 잘 알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마라즙이 왜 상을 셋으로 구분하지 않고
상(相) 한단어로 통합했는지 그 의도를 놓고
토론을 벌였지 논강의 본래 취지에는
전혀 다가서지를 못했다.
사실 한국 불교계는
상(相)의 ‘과잉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넘치는 상은 결국 극도의 허무주의로 귀결된다.
모든 관념과 형상은 허망하다고 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미군장갑차에 치여 죽은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일도 허무한 것이며,
종단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도 허무한 일이다.
이 논리가 극단으로 치닫다보면
아무런 생각할 것도 행동할 것도 없다.
하지만 살아있으면서 사유하고 행동하는 한
상을 만들 수밖에 없다.
이 역설은 또다른 측면에서 ‘상의 과잉시대’로 귀결된다.
즉 모두가 상은 허망하다고 외치면서
실제로는 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상의 개념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해야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로운 시도는 자구해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금강경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읽는 데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역사를 통해 자구속에 감추어진 맥락을 읽는것,
이번 ‘법석’이 차려진 이유이기도 하다.
금강경은 단일한 경전이 아니라
반야경의 일부로 AD 1세기 초기에 불교승단에 불었던 새로운 운동,
대승불교의 사상을 밝힌 것이다.
인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상운동인
대승불교는 권위적이고 도식화된
초기불교를 혁신하기 위해 나온
혁명적 사상이라고 할 수있다.
소승 아라한에게 주어지는
실천덕목인 팔정도가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의 육바라밀로 변하고
붓다의 하위개념인 아라한에서
출재가를 막론하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있다는 대중운동으로 승화한다.
이 혁명에서 내세우는 새로운 인간상이 보살이며
그 사상적 근거는 연기설과 무아(無我)며
이를 가장 간결하고 명쾌하게 밝힌 것이
금강경이다.
금강경이 출현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떼어놓고
자구 해석에만 매달릴 때
금강경은 ‘아라한’의 권위와 아집으로 되돌아 갈 밖에 없을 것이다.
토론을 마치고 한 스님이
“논강에 참여할 때는 진지했는데 끝나면 공허하다”고 지적한 것도
바로 금강경의 본래 의미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자조였다.
남원=박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