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45
11월18일[연중제3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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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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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CCbTa7uvXJ4
[작은형제회 박희전 루케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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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의 절박한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
이스라엘의 지형은 독특합니다. 해발 천미터 남짓되는 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가 있는가 하면, 해수면 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도 있습니다. 다양한 꽃들과 식물들로 온화하고 풍성한 지역이 있는가 하면 황량하고 척박한 광야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들르신 지역도 정말이지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예리코! 지구 상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자리한 도시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 예리코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심각한 시각 장애를 안고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간의 세월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비장애인인 우리는 상상도 못할 고통을 그는 겪고 살아왔습니다. 앞이 조금도 안 보이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눈 떠도 깜깜 눈 감아도 절망! 그 삶이 참으로 혹독하고 절망스러웠습니다.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에서 살아가던 그,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히 살아가던 예리코의 시각장애인에게 어느 날 뜻밖의 행운이 찾아옵니다. 해방자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코앞으로 지나가시는 소식을 전해 들은 깃입니다.
그는 직감으로 느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수많은 군중의 말소리에 파묻혔을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절박하고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의 간절함을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그의 평생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오늘 우리를 향해서 주님께서는 자상하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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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8OheL-iL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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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자기 합리화의 도구가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의 소경은 구걸하며 앉아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소리 지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네가 뭔데 그렇게 소리를 질러?”하며 나무랍니다. 그러나 소경은 더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으시고, 소경은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당시에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할 일이 없었고 그러면 가난해서 구걸하는 신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요즘 그런 상황이라면, “예수님도 가난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니, 너도 네 처지를 받아들이고 수긍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눈을 떠서 일해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려는 그에게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즘에도 신앙이 약간은 지금 자신의 처지에 수긍하고 안주하게 만드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어떤 신자분들은 정말 사명을 깨닫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불쌍한 처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닮았다면 위안하기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신앙은 모든 것을 희망하고 모든 것을 믿고 믿는 것을 위해 지치지 않는 노력을 함을 의미합니다. 고 정주영 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은 노력, 끈기, 그리고 위험을 감수할 용기의 결과다. 성공의 열쇠는 포기하지 않고 항상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다. 성공으로 가는 여정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지만, 항상 가치가 있다. 성공한 사람은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저는 이 모습이 오늘 복음의 믿음으로 구원받은 소경의 모습과 더 닮았다고 봅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란 책이 있습니다. 1913년 이 책을 쓴 사람은 프랑스 한 마을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나무를 잘라 숯을 만들어 파는 동네였습니다. 당연히 산은 벌거숭이였습니다. 그리고 각자는 경쟁과 미움, 술과 향락 등에 빠져 전혀 행복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벌거숭이 산을 지날 무렵 한 양치기를 만납니다. 그는 도토리를 땅에 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1910년부터 나무를 심어왔고, 3년 동안 매일 좋은 도토리만 골라내서 심어 10만 개의 도토리를 심어두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쉰다섯 살의 ‘엘제아르 부피에’라는 이름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와 자녀를 잃고 이 시골로 내려와 양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도토리를 심기 시작한 이유는, 그곳에 나무가 없어서 그 땅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땅은 그에게 어쩌면 아내와 아들과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 땅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밤에 매일 좋은 도토리 100개씩 골라내어 낮에는 양을 치며 곳곳에 그 도토리를 심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토리 10만 개 중 2만 개가 싹을 틔웠고 그중 만 개가 조금씩 자라고 있었습니다.
지은이가 마지막으로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난 건 1945년 6월이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어느덧 여든일곱 살이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예전의 그 황무지가 있던 그 지역에 있었지만, 그곳은 더 이상 황무지가 아니었습니다. 버스가 빠른 속도로 지나다니고 사람 사는 냄새,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부는 소리, 샘물이 흐르는 소리가 있는 살아있는 곳이 되어 있었습니다.
베르공 마을에서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고, 공동작업을 한 희망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채소밭에는 열매들이 맺혀 있었고, 그곳에는 젊은 부부 네 쌍을 포함한 스물여덟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살아있는 곳이자, 살고 싶은 곳이 되었던 것입니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여전히 예전의 그 황무지가 있던 자리에서 아직도 황무지인 것처럼 그곳에 묘목을 심고 있었습니다.
2023년 4층에 살던 두 아이의 아빠가 아래층부터 화재가 발생하여 7개월 된 아기를 안고 뛰어내리다가 아이는 살았지만, 아빠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 일이 있었습니다. 아래에서 쓰레기 분리 수거장의 푹신한 포대를 깔아놓고 큰 아이를 던졌는데 살았습니다. 그 다음은 아내가 뛰어내렸고 가벼운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안고 뛰려던 아빠는 아래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고 뇌진탕으로 죽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와 같습니다. 아기에게 아빠와 같이 죽음의 십자가로 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빠가 널 위해 죽었으니, 넌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야!”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보며 그분의 가난과 희생의 삶을 내가 꿈을 갖고 노력하지 않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처럼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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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일 미사 마치고 교우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한 형제님과 자매님이 면담을 청했습니다. 저는 사목회가 있었지만, 저를 찾아온 부부와 면담했습니다. 10년 전에 달라스 성당에서 아들과 함께 세례받았다고 합니다. 필라델피아로 이사 갔다가 다시 달라스로 왔다고 합니다. 세례는 받았지만, 곧 성당을 멀리하였다고 합니다. 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성당에 다니지 않아서 벌 받았습니다. 제 둘째 아들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부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형제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염치가 없이 어찌 그런 청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신부님께라도 이렇게 말을 하지 않으면 괴로워서 죽을 것 같아서 왔습니다.” 아드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간 것은 형제님이 성당에 오지 않아서가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비록 형제님이 성당에 다니지 않았을지라도 이렇게 청하면 기꺼이 장례미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슬픔이 가득했던 부부는 위로받았고, 아들을 위한 장례미사를 청하였습니다. 그렇게 아들은 모든 성인 대축일에 장례미사를 하였습니다. 모든 성인의 전구 함으로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믿습니다.
살면서 ‘왜 나만’이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시험을 볼 땐 꼭 자신이 공부하지 않고 지나친 곳에서만 문제가 출제됩니다. 물건이 없어져 한참을 찾다가 결국 같은 물건을 사고 나면 찾게 됩니다. 기계가 고장 나서 기술자를 부르면 갑자기 잘됩니다. 세차하면 비가 옵니다. 예전에 엠피쓰리를 잃어버린 줄 알고 새것을 샀는데 나중에 가방에 들어있던 엠피쓰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소경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경은 ‘왜 나만’이라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소경은 즉시 다시 보게 되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저항과 열정, 인내와 신념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처음에 지녔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회개입니다.
예전에 엘리베이터의 게시판에서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더욱 푸르다.’ 모든 것이 푸르른 여름에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시련의 때, 고난의 때에는 유독 그 푸르름이 돋보이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주변을 보면 그렇게 자신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서 흘러가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줄 아는 용기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흘러가는 삶은 살아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살아도 결국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소경의 간절함을 보시고, 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들은 빠르고 편하고, 쉬운 길만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느리고,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당신의 힘과 능력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에 따라야 한다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선택과 결정을 전적으로 본인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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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8,35-43: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누가 지나가느냐고 눈먼 사람이 묻자, 사람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37절)고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38절) 매일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구걸하던 그 사람이 이제 하느님의 선물을 받게 된다. 그는 하느님께 나아가듯 예수님께 나아간다. 이렇게 청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가 믿음이 구원을 주었고, 그다음에 시력을 되찾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41절) 예수님께서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42절) 이 말씀은 인간의 권한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권위를 보여준다. 주님은 하느님께 기적의 능력을 청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그의 시력을 되찾아 주셨다. “다시 보아라!” 이 한마디가 눈먼 이에게는 그대로 빛이었다. 참 빛이신 분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보게 된 그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43절) 그는 이중으로 눈먼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육신의 눈먼 상태뿐 아니라, 마음의 눈이 먼 상태에서도 벗어났다.
그에게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 군중도 모두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오늘의 눈먼 이가 그토록 부르짖어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받았다면 우리의 눈은 어떠한가? 사물을 쳐다보는 눈은 볼 수 있다 해도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은 얼마나 밝은가? 우리도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기도를 자주 바쳐야 할 것이다. 우리의 눈이 이제 주님의 참모습을 볼 수 있고, 그 신비를 깨달아 알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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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리코의 눈먼 이에게 하신 말씀은 이웃에게 호의를 베풀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묵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자비를 청하는 눈먼 이를 곧바로 고쳐 주시지 않고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십니다. 눈먼 이는 예수님께 자신의 바람을 아룁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8,41) 예수님께서는 그가 바라는 것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는 형제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할 때, 먼저 그가 바라는 것을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주게 됩니다. 그것은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 내 만족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애덕의 행위는 자신의 만족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상대를 위한 행위여야 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에는 상대의 마음을 살피는 세심한 배려와 겸손이 필요합니다. 도움을 주려는 선의가 자칫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상대가 필요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것을 받도록 강요할 때입니다.
살레시오회의 설립자인 요한 보스코 성인은 사랑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방식으로 사랑할 때 상대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상대를 중심으로 사랑할 때 비로소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통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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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구원의 빛을 받아 빛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루카 18,35-43)
1) 어떤 눈먼 이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입니다.(마르 10,46) 바르티매오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바르티매오가 눈이 멀었다는 것은, 어둠 속에 앉아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의 경우에, ‘어둠’은 죄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메시아를 아직 만나지 못했음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바르티매오가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다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인생을 살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의 경우에, ‘죽음의 그림자’는 구원의 길을 아직 모르고 있음을 뜻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그래서 구원의 길을 모르고, 인생의 허무함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들은 ‘빛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고,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2) 바르티매오의 상황에서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도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1-5)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라는 말씀에서, 코린토 2서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8-10)
<우리는 어떤 질병이나 신체장애 같은 고통과 불행을 함부로 ‘죄’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는 주님 말씀대로, 그 고통과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들보다 더 주님의 권능과 은총을 드러낼 수 있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
3) 바르티매오는 메시아를 만나기를, 또 메시아의 구원을 얻기를 갈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소문만으로도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었을 것이고, 예수님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처지에서 예수님을 만나러 갈 수는 없었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오시기를, 또는 그의 앞을 지나가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39절의 ‘더욱 큰 소리로’ 라는 말은, 그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4)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몰라서 하신 질문이 아니라, 바르티매오 자신이 자기의 믿음을 능동적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은 사람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요한 2,25)>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은, 겉으로만 보면 ‘시력 회복’을 간청하는 말이지만, 전후 상황을 모두 생각하면, 이 말은 예수님을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로 믿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메시아께 구원을 간청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그의 시력이 회복된 것은, 예수님 덕분에 ‘구원의 길’을 알게 된 것을 나타내고, 눈을 뜬 다음에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은, 그 자신이 간절하게 원했던 그대로 ‘구원의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은 곧 ‘구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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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부터 두 주간에 걸쳐 제1독서로 요한 묵시록을 읽습니다. 유사 종교에서 그릇된 해석으로 혼란을 일으키고는 하는 요한 묵시록은 과연 어떤 책일까요? 요한 묵시록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 책이 어떤 ‘문학 유형’인지 파악한 다음 그에 맞추어 읽어야 합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는 뉴스, 드라마,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가 있습니다. 뉴스는 정확한 사실을 전달해야 하고, 드라마는 허구의 내용으로 시청자에게 감동과 공감을 끌어내며, 코미디는 과장된 방식으로 웃음을 유발합니다.
각각의 프로그램을 제대로 시청하려면, 우리는 각각의 장르마다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묵시 문학’이라는 특별한 문학 유형으로 집필된 책입니다. 묵시 문학은 악의 세력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박해, 세상 권력, 하느님과 반대되는 가치가 현실에서 득세함으로써 독자가 절망의 상황에 놓여 있음을 전제합니다. 이러한 구체적 상황에도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느님께서 ‘마지막 때’ 곧 종말에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승리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 결과, 묵시 문학은 근본적으로 위로의 메시지이며, 독자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꿋꿋이 견뎌 내며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한편 묵시 문학은 환시, 상징적 숫자와 짐승, 우주적 재앙 같이 추상적이고 모호해 보이는 상징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묵시 문학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그러나 묵시 문학을 마치 미래를 점치거나 길흉화복을 알려 주는 책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유사 종교에서 그러하듯 요한 묵시록을 잘못 이해한다면, 신자들은 구원의 길이 아닌 혼돈과 파멸의 길로 이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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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눈먼 이가 예수님께 청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 복음의 이 장면은 유일하게 예수님을 직접 다윗의 자손으로 표현합니다. 메시아를 나타내는 이 표현에는 임금의 모습으로 다스리시러 오시는 구원자의 표상이 담겨 있습니다. 이 호칭을 통하여 우리는 오늘 복음의 내용이 단순히 눈을 뜨게 하는 치유가 아니라 믿음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눈먼 이의 모습에서도 믿음을 드러내는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주위의 만류, 아니 좀 더 강하게 말한다면 주위의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시어, 눈먼 이는 다시 보게 됩니다. 다시 보게 된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고, 사람들도 그 모습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위하여 예수님께 청하고 부르짖습니다. 또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며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삶을 충실하게 따르는 우리의 모습을 통하여 다른 이들도 하느님을 경험하고 그분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된 눈먼 이의 이야기는 우리를 위한 믿음의 이야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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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8,41)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15,14)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 이 땅의 현실 상황을 두고 말씀하신 듯싶어집니다. 인도하는 눈먼 이야 어차피 눈먼 사람이니 그렇다고 하자고요. 문제는 멀쩡한 사람처럼 보이는 데 따르는 사람은 왜 눈먼 이를 따르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가지며 살아왔는데 요즘의 세상을 보면서 이해가 됩니다. 아마도 따르는 자 역시 눈먼 이, 영적 소경이기 때문일 것이며, 결국 눈먼 이이기에 눈먼 사람의 인도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따르는 사람 역시 눈먼 사람이기에 눈먼 사람의 인도를 받게 되고 결국에는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신세가 되는 게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눈먼 사람을 예전에는 盲人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맹인을 파자하면 눈目이 망亡했다는 뜻이며, 눈이 망했기에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는 분명 그릇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흔한 표현으로 아는 만큼 보인다, 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곧 모르기에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며, 결국 보지 못해서 영적으로 눈먼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 이 말까지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다음엔 귀머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말소리는 들리나 말의 본질과 의미, 더 나아가서 참뜻을 헤아려 알아듣지 못한다면 귀머거리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눈먼 이에게 광명을 되찾아 주신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배경이 되는 곳은 바로 예리고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던 예수님께서 그 도시에 당도하셨다는 소식을 어떤 사람이 눈먼 이에게(=마르10,46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18,37)하고 알려 주자, 그가 주저함이 없이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18,38)하고 부르짖음으로 예수님과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됩니다. 물론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본디 그는 태중 소경이 아니라 볼 수 있었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언급이 없지만, 시력을 잃게 되었음을 다음과 같은 표현 곧,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8,41.42.43)라는 언급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태중 소경과 볼 수 있었던 사람이 시력을 잃었을 경우, 어느 쪽이 더 고통과 아픔이 더 클까, 라고 묻는 게 어리석을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제 생각에는 후자가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성서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만, 그는 지금 상태에선 볼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지만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감각을 상실하면, 상대적으로 다른 감각이 더 발달하고 민감해지는 경우를 종종 심신 장애인들에게서 봅니다. 그는 분명 들을 수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는 꾸짖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큰소리로 울부짖음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지적하고 싶은 점은 성서가 우리에게 신앙 곧 믿음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하는 감각 기관은 귀이며 귀는 청각 기능을 의미합니다. 귀는 곧 들음을 말합니다. 곧 구원은 들음에서 시작한다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눈먼 이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 바라느냐?”(18,41)라고 묻자, 그는 거침없이 즉시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물론 그에게는 아쉬운 것이 너무 많고 필요한 것도 너무 많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여러분에게 만일 지금 예수님께서 동일한 질문을 던지면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하시렵니까? 분명 예수님은 그 눈먼 이가 무엇을 필요한지를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필요한지를 아시지만 무조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를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질문하시는 예수님과 대답하는 눈먼 사람 사이에 이미 내적 교감을 통해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며, 이는 또한 그 한 사람에게 향한 질문이나 대답이 아니라 당신을 믿고 따를 우리 모두에게 향한 도전이자 선택이며 믿음이라고 봅니다. 예수님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요14,6),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8,12)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 예리코의 눈먼 이는 예수님과의 만남과 예수님께 신뢰에 찬 믿음의 고백으로 이미 주님의 빛 속에서 생명의 길을 걷게 된 참된 제자이며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리코의 눈먼 이는 눈으로 비록 볼 수는 없었지만 이미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있었기에 그에게, 예수님은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8,42)하고 말씀하신 깊은 의도를 한번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기적 사화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따름과 보상”(18,28~30) 그리고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심”(18, 31~34)을 언급하셨지만, “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다.”(18,34)하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 예리고 소경의 치유는 단순한 치유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참된 제자의 표상임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음을 오늘 복음의 마지막,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18,43)에서 잘 드러납니다.
뜬 눈目을 가졌다고 다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눈 뜬 장님 곧 영적 장님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처음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볼 수 없을 때 제대로 듣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은 볼 수 있었지만,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고, 들을 수 있었지만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했다는 사실이며 이런 상태는 결국 우리의 신앙의 현실입니다. 예리코의 눈먼 이는 시력의 상실을 통해서 얼마나 볼 수 있다는 게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고, 비록 부족하지만,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해서 믿음을 고백하게 되고 제대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봐야 하는 가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다고 봅니다. 우리 모두도 예수님을 만나서 영적 소경의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제대로 볼 수 있는 하루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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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식복사 없이 생활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주로 대형 할인 매장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이 안에는 없는 물건 없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카트를 끌고 다니다 보면,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라는 생각으로 카트 안에 넣게 됩니다. 특히 ‘원플러스원’ 상품의 경우는 큰 이득이라는 생각에 지금 별로 필요하지 않음에도 카트 안에 넣곤 했습니다.
산 것을 집에 와서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한숨을 짓게 됩니다. 찬장, 창고에 1년은 거뜬하게 살만한 물건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사는데 이 많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었습니다. 필요한 것이 아닌, 필요할 것 같은 것을 필요 이상으로 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너무 많아져서 때로는 골치까지 아파집니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으로 집을 어수선하게 만들고, 유통기한이 지나 ‘아깝다’라는 생각을 하며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필요할 것 같은 것을 필요 이상으로 사면 안 됩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사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물건만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우리 감정도 그렇습니다. 필요한 감정만 가져야 하는데, 불필요한 감정까지 품고 삽니다. 미움, 원망, 판단, 걱정, 불안, 절망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우리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갖는 우리가 아닌, 필요한 것만을 갖는 우리가 될 때 현명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물건도 그렇고 또 감정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필요한 것만을 가지려고 할 때, 주님께도 필요한 것만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모두 다 달라는 욕심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겸손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에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사실 보통 구걸하는 사람이 주로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빈곤함을 해결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요구를 하지 않을까요? 아마 “한 푼 줍쇼~”를 말하는 것이 정답처럼 보이는데, 그는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르느냐?”라고 묻습니다.
눈먼 거지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이르셨고, 그는 즉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저것 다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또 어떤 것이 필요한지도 모른 채 알아서 해달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불필요한 것은 제외하고, 필요한 것만을 청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주님으로부터 응답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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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걸음을 멈추신 그분처럼>
루카 18,35-43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걸음을 멈추신 그분처럼>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루카 18,40)
걸음을 멈추신 그분처럼
버젓이 있음에도 어떻게든
없어야만 하는 벗 하나
애틋이 찾기 위하여
걸음을 멈추는 겁니다
걸음을 멈추신 그분처럼
뭇사람들 눈길 비켜가는
보잘것없는 벗 하나
애써 보기 위하여
걸음을 멈추는 겁니다
걸음을 멈추신 그분처럼
숨넘어가는 울부짖음마저
짓밟힌 벗 하나
기꺼이 듣기 위하여
걸음을 멈추는 겁니다
걸음을 멈추신 그분처럼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오히려
사람일 수 없는 벗 하나
오롯이 품기 위하여
걸음을 멈추는 겁니다
걸음을 멈추신 그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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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시력이 6.0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주 멀리 있는 것도 잘 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늘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기도 하지만 볼 것, 안 볼 것 다 보면 마음은 오히려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잘 보지만 혹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육신의 눈이 중요하지만, 내면의 세계를 보는 마음의 눈은 더 소중하고 하느님 나라를 보는 영혼의 눈은 더욱더 고귀합니다. 우리는 감겨 진 영혼의 눈을 떠야 합니다.
어떤 눈먼 이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이웃사촌’이라 했는데 아무래도 눈먼 소경은 이웃을 잘못 만난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의 표현으로 자비라는 것은 애간장, 애타는 심정을 말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8)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간장이 녹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눈먼 이는 바로 그 자비를 간절히 청했습니다.
절박한 부르짖음을 외면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눈을 가졌다 할지라도 마음의 눈은 뜨지 못했으니 정작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외쳐야 할 사람은 눈먼 소경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웃의 마음을 읽고 그의 부족함을 채워야 할진대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고 있었으니, 그들이 소경입니다. 자비는 적선이 아닙니다. 함께하면 손해 볼 것 같아도 주님의 마음으로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의 필요를 절박함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는 이들에게 형제애로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 때 그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눈먼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꾸짖음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외쳤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믿음은 군중이라는 장벽을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군중의 손가락질도 마다하는 예수님께 대한 일편단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따랐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이웃의 요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영혼의 눈이 뜨여, 내가 변하면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기 전에 그의 처지와 절박한 마음을 공감하게 되고, 오히려 주님을 불러 세우고 주님께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시력을 키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나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하게 합시다.
“착각하지 맙시다. 자선은 단순히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선을 베풀 때 가장 큰 은총을 받는 이는 그 손을 내민 사람입니다. 그 순간, 주님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은총을 받기 때문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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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의 여정>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오이다.”(시편 119,105)
날마다 등불에 불을 켜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어린왕자의 점등인點燈人을 이해합니다. 어린왕자는 예전 초등학교 6학년 제자들과 나눴을 때 참 좋아했던 책이었습니다.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그 별에 발을 들여 놓으며 어린왕자는 점등인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안녕 아저씨, 왜 지금 막 가로등을 껐어?”
“명령이다. 안녕.”
점등인이 대답했다.
“명령이란 무어야?”
“가로등을 끄라는 명령이다. 안녕.”
“그런데 왜 다시 가로등을 켰어?”
“명령이라니까.”
“알아들을 수 없는데.” 하고 어린왕자가 말했다.
“알아듣고 어쩌고 할 것이 못돼. 명령이야, 안녕.”-
명령에 복종하듯 쓰는 날마다 쓰는 강론입니다. 이유가 필요없습니다. 진리이신 주님 명령에 복종할뿐입니다. 얼마전 새롭게 읽은 한용운의 시 ‘복종’이 생각납니다. 순명, 순종 말마디보다 요즘 부쩍 좋아진 복종이란 말마디입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라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의 명령에 기쁘게 복종하는 마음으로 쓰는 강론입니다. 오늘 복음은 소복음서라할 만큼 내용도, 상징도 풍부합니다. 이 복음을 대할 때는 늘 새롭습니다. 강론 제목은 언제나 제가 좋아하는 ‘개안의 여정’입니다. 날로 눈이 열려가는 눈밝은 개안의 여정인 우리의 영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점차 눈이 열려가는 개안의 여정중에 날로 자비롭고 지혜롭고 자유로워지는 인생입니다. 개안하면 떠오르는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오늘 복음은 한폭의 살아있는 아름다운 그림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어떤 무명의 눈먼 이’가 상징하는 바, 바로 눈이 가려 방향을 잡지 못한 가련한 인간 존재를, 또 길가에 앉아서 길이신 주님을 갈망하는 인간 존재를 상징합니다.
어찌보면 우리 인간은 도인道人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복된 운명의 도인들일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은 닫혀있지만 영적 갈망에 마음의 귀는 활짝 열려 있는 눈먼 걸인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말에 본능적으로 반응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부르짖습니다. 잠자코 있으리는 꾸짖음에 아랑곳 없이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그야말로 영혼의 절규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마 이렇게 부르짖지 않았다면 주님은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간절히 찾을 때 응답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어지는 주님과의 문답은 불가의 선문답을, 또 사막교부를 찾았던 제자와의 문답을 연상케 합니다. 진실하고 간절하면 말도 글도 행동도 짧고 순수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단도직입적 질문에, “주님, 제가 다시 보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제대로 잘 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여기서 문득 법정의 스승이었던 효봉선사가 그의 스승 석두 스님을 만나 제자가 된 경우가 생각납니다. 정처없이 떠돌던 효봉이 석두스님 소식을 듣고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을 찾습니다.
-“어디서 왔는가?”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몇 걸음에 왔는가?”
스님의 물음에 “이렇게 왔습니다.” 대답하며 큰 방을 한 바퀴돌고 앉습니다. “10년 공부한 수좌보다 낫다.”-
감탄하며 바로 계를 주고 원명이라 법명을 내립니다. 진리를 찾는 열망이 간절했기에 이런 동작으로 답했고 이에 화답한 석두 큰 스님입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는 일화입니다. 예수님의 눈먼 걸인에 대한 즉각적인 구원의 응답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의 은총의 말씀에 전제되는바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영적 믿음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다시 보게된 눈먼 걸인의 믿음은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다시 보게 된 눈먼 걸인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라나섰고 이를 본 군중도 고무되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니 이들의 믿음도 한층 고양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린 그는 이제 더이상 눈멀지도 않았고, 더 이상 걸인도 아니고, 더 이상 길위에 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길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만나 길의 방향을 잡았고 주님과 함께 여정에 오르게 됩니다. 삶의 방향, 삶의 목표,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주님과 함께 날마다 새롭게 펼쳐지기 시작한 인생입니다. 말그대로 개안의 여정이요 그의 마음의 눈은 날로 밝아지고 맑아졌을 것이며 영적시야는 날로 넓어지고 깊어졌을 것입니다.
과연 개안의 여정은 잘 진행되고 있는지요?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물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에서 주님께서 에페소 교회에 주는 말씀이 흡사 우리에게 주는 말씀이듯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개안의 여정에 충실하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시작하여라.”
초발심을 회복하여 주님 사랑을 다시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개안의 여정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은총이 열정에 불을 붙여 우리 모두 개안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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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다시>
오늘 묵시록의 시작과 복음에서 우리는 “다시”라는 말을 공통으로 발견합니다. 묵시록은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을 나무라며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 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그래서 오늘 먼저 다시 사랑하는 것에 관해 성찰하고 묵상코자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했던 사랑을 다시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이해해야겠습니다.
그것은 못 이룬 첫사랑을 다시 찾아 만나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부부간에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 정말 사랑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그래서 그때의 사랑을 다시 하라는 그런 뜻도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아서 사랑했던 그 사랑을 다시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제 와 다시 좋아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좋아서 사랑했던 그런 사랑은 오히려 풋사랑이라고 내동댕이치고, 볼 것, 못 볼 것을 다 보고 난 뒤의 싫고 좋은 것을 넘어서 사랑하는, 그런 성숙하고 참된 사랑을 다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우리 인간 사랑도 이렇게 다시 해야겠지만
오늘 묵시록이 다시 하라는 사랑은 조금 다른 차원일 것입니다.
아예 사랑 자체를 잃어버렸다면 그 사랑을 다시 찾으라는 뜻이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다면 그 사랑을 다시 찾으라는 뜻일 겁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사랑한다는 것을 사치스러운 생각이라며 제쳐놓았습니다. 먹고 사느라 지쳐서 사랑이 완전히 메말라버렸는데 그 무슨 사랑 타령이냐고, 고목에서 싹이 나겠냐고 냉소적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나 사랑 타령은 젊었을 때나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고, 무엇보다 하느님 사랑은 나이 먹어 새로이 시작하고 나이 먹을수록 더 오롯한 사랑을 하고 더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우리 생각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유행가에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라는 기막힌 가사처럼 우리는 나이 먹을수록 하느님 사랑하기에 딱 좋은 나이라고 생각을 바꿀 것입니다.
다음으로 다시 보는 것에 관해 성찰하고 묵상해보겠습니다.
다시 본다는 것은 눈이 먼 적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욕심에 눈이 머는 것이고, 더 친절하게 풀이하면 세상 욕심에 눈이 머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 욕심에 눈이 멀었었고 안경에 세상 때가 많이 꼈었습니다.
그런데 살 만큼 산 지금 눈에서 욕심을 벗겨낼 때가 되었습니다. 그놈의 욕심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불행했습니까?!
그러니 우리도 복음의 눈먼 이처럼 눈을 멀게 했던 욕심을 벗겨내고 다시 보고자 하는 갈망이랄까 열망이 마음에서부터 솟아나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오늘 복음의 눈먼 이처럼 주님을 따라 아버지 계시는 하느님 나라로 가야겠습니다.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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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ㄱ)
<간절함!>
오늘 복음(루카18,35-43)은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눈먼 거지가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는, 곧 즉시 다시 보게 되는 '기적사화'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가 예수님께 부르짖으며 나눈 대화는 이렇습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9ㄴ)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ㄱ)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18,41ㄴ)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눈먼 거지의 간절함'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곧 메시아로, 주님으로 받아들인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간절함은???
지금 꼭 필요한 크고 작은 간절함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간절함도 있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간절함'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 '영의 눈을 뜨는 것', 곧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새똥에 눈이 멀었던 토빗이 하느님의 천사 라파엘의 도움을 받아 다시 볼 수 있게 된 후, 죽음을 앞두고 아들 토비야와 며느리 사라에게 유언을 합니다.(토빗 14,3-11 참조)
"이제 얘들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섬기고,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하여라."(토빗 14,8)
하느님을 건성건성 믿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믿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일, 곧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게 하는 일들을 지금 여기에서 하는 것이 '하느님의 간절함'입니다.
나의 간절함이 하느님의 간절함으로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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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 42)
믿음은 볼 수 없는
우리 자아의
가장 확실한
해답입니다.
믿음으로 다시
세상을 보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우리의 절박함과
가난함에서
믿음은 더욱
뜨거워집니다.
눈 먼 우리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자비를 청하는
믿음의 시작입니다.
자비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게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제대로 보게 되고
제대로 사랑하게
제대로 따르게
됩니다.
주님께
우리자신의
볼 수 없는 부분을
청할 때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찬미와 따름의
놀라운 삶입니다.
다시 보듯
다시 찾은 것이
우리의 잃어버린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주님을 향한
믿음은
새로워집니다.
다시 보게 되는
믿음의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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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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