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웅태 신부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오늘 복음[루카 9:18-22]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질문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질문에 과연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시험문제에 대한 정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 것이며,
각자 자기 삶을 통해 체험된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는 몇 가지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질문을 하시는 순간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에 하셨는데
예루살렘에서는 무엇이 예수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예수님은 알고 하신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알고 있었던 것은 이제 십자가상에서 자신이 죽으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가시기 전에 알고자 하신 것은
"누구든지 당신의 존재를 진실되게 알아듣고 발견한 사람이 있는가?"
를 살펴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 대답은 오늘 복음에서 보면, "세례자 요한, 엘리아, 예레미아" 등 각기 다르게 나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 안에서 발견하고 알아들은 진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그리스도)"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셨을때
지금까지 당신의 모든 가르침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즉, 당신이 십자가에 죽더라도, 당신의 존재를 알아들은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이어서
그 사명을 이행하리라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그 뒤에 또한 나오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발견한 사실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도 알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측근의 제자들마저도 그들이 바라고 기대했던 그리스도라는 분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이 세상을 주름잡고,
자기들에 의해서 세상이 이끌어져 나가야하는 현세적인 그리스도,
정복자요, 만방의 왕을 그들은 기대했고 꿈꾸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베드로의 그러한 발견과 고백에 이어서
예수께서 지적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들이 기대했던 현실적 메시아가 아니라,
이제 십자가에서 죽어가야 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일깨워 주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들이 바라고 희망하던 그리스도의 본 모습을 깨우쳐 주시고
그 길을 가야한다는 것을 밝혀주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구세주는 인간을 위해 봉사하고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참으로 올바른 길이며,
가치있는 것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점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행복과 더불어 타인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것의 보람과 가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때때로 이웃과 타인의 행복을 위해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신의 행복까지도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 알았다면
그 그리스도는 인간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희생하신다는 것,
그것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생활 속에 어떠한 하느님,
어떠한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고 어떤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그 길을 따르려고 하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이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내 생활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하고 물으시고 이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즉, 이러한 물음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내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진 말이나 생각에 대하여 시험을 치룬다면,
정답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답을 썼다해서 그것이 참다운 믿음을 가진 것과는
또한 다른 차원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는 이 예수님의 물음에
자기 생애를 통해 발견한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어야 하겠으며
그 대답은 자기 실존과 생명을 건 삶의 발견이며 대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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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현 신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잘 모르는 어떤 사람과 함께 있는 친구를 길에서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먼저 친구와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는 친구와 함께 있는 처음 보는 사람과 겸연쩍게 인사를 나누고 나서,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잠시 나눈 뒤에 헤어집니다.
그 후에 다시 그 친구를 만나게 되면 그 때 함께 있던 사람이 누구냐고 묻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친구는 그때 그 사람은 누구누구이고, 자신과 어떻게 아는 관계이며,
또 고향은 어디이며, 하는 일은 무엇인지, 인간성은 어떤 사람인지를 대충 이야기해 줍니다.
이 때 나는 그 사람이 대충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이렇게 모르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는 과정을 보면 우선,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야?",
또는 "저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이야?"하고 묻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서 설명을 해줍니다.
그 설명은 주로 그 사람의 이름과 나이, 고향, 집안 배경, 가족 관계, 하고 있는 일,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들은 정보를 가지고 그 사람에 대해 1차 인식을 합니다.
그러나 1차 인식은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정보 때문에
선입견을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1차 인식만 가지고는 그 사람에 대해서 제대로 된 인식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1차 인식만을 가지고 그 사람을 평가해 버리고
단정지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사람을 만나보고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나서,
곧 그 사람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그 사람을 알게 되는
2차 인식의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만 그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2차 인식의 단계에서도 1차 인식의 단계에서 들은 출신배경 등에 대한 선입견이
계속 작용하기 때문에 2차 인식에서 중요한 것은
1차 인식 단계에서 얻은 선입견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선입견에는 다른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자 기도하시다가 곁에 있던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러자 제자들은 "대개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마는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옛 예언자 중의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평가한 것은 1차 인식의 단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찾아가서 구세주를 만났다고 말했지만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1차 인식의 단계에서 생기는 선입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을 직접 와서 보라고 대답합니다.
직접 와서 본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이렇게 직접 와서 보는 2차 인식을 통해 1차 인식에서 지녔던 선입견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1차 인식에서만 끝날 것이 아니라 직접 와서 보고 체험하는
2차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1차 인식만으로 잘못된 평가를 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2차 인식의 단계에 있는 당신 제자들은 실제로 당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하신 이 질문은 당신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1차 인식을 성서와 성전을 통해서
또 신앙선조들의 체험을 통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1차 인식에서만 끝날 것이 아니라
2차 인식의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대한 2차 인식, 곧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보려 해도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서는 1차 인식을 통해 알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을
근거로 한 묵상과 기도를 통해 그분을 우리 마음속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그럴 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신 예수님의 물음에 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할 것입니까?
남들이 말하는 대로 대답할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체험한 그분에 대해서 답할 것입니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부산교구 김주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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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한영 베드로 신부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메시아 고백은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실 수도 있고,
훌륭한 ‘멘토’가 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출세를 보장하는 ‘현자’가 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주님께서는 참된 메시아가 어떠한 길을 걷게 되는지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피에트렐치나의 비오 성인은
예수님의 오상을 받으신 분입니다.
1911년 비오 신부의 오상은 시작되었고,
1918년 9월 20일 비오 신부가 고해성사를 집전하던 중에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오상에서 흘러나온 피에서 꽃향기가 났다고 합니다.
비오 성인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예수 그리스도처럼
가시관과 채찍질의 고통을 실제로 느꼈습니다.
1968년 성인은 오상을 받은 50주년 기념 미사를 장엄하게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9월 23일에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선종하였습니다.
우리도 성인처럼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 안에 지니는 영광을 소망해 봅시다.
2016,9,23 류한영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