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로 온 봄 / 김나영
매년 부쳐주시는 제주의 봄, 올해도 고스란히 잘 받았습니다 상자 안 몇 겹의 봉지로 꼭꼭 여민 당신 손길을 거꾸로 풀어가는 동안 당신 마음이 내 손끝으로 찌르르_전해왔습니다 봉지를 여는 순간, 제주 들녘의 달짝지근한 바람과 그 바람이 키우던 민들레와 말똥비름과 바늘엉겅퀴와 창질경이와 겟쑥부쟁이와 그 푸른 잎새에 맺혀있던 이슬방울과 그 이슬을 먹고 살던 무당벌레와 그 무당벌레가 밟고 다니던 반질반질한 길과 그 길에 엎질러져 있는 들큰한 흙내와 그 길을 가로지르던 꼬마꽃벌과 제주꼬마팔랑나비와 그 날것들을 밤낮으로 키우던 햇빛과 달빛이 압축파일 풀리듯 한꺼번에 터져 나왔습니다 그때였지요 봉인된 내 그리움을 풀어헤치고 아부오름과 다랑쉬오름과 한라산 자락과 제주 앞바다가 붐붐붐붐 서울 창공을 날아 우리집 거실로 통째로 건너오는 게 아니겠어요 몇 번을 데쳐먹고 볶아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고사리를 삶을 때마다 내 그리움이 몇 번이나 몸을 부풀렸던지요 이 고사리가 내게 오려고 올해도 얼마나 많은 제주 봄볕을 끌어모으고 몸을 뒤척이곤 했을까요 그런데 당신, 고사리를 보내면 제주가 몽땅 덤으로 딸려 오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늘 챙겨주시는 제주의 봄, 맛있게 울궈 먹겠습니다
- 시집 『수작』 (애지, 2010) ............................................................
아직 만발까지는 아니었으나 제주의 봄을 알리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만큼 무리지어 핀 유채꽃이 푸른 바다와 검은 돌담 사이에서 넘실댔다. 지금부터 치닫기 시작해 한 달 후면 섬 전체를 노랗게 물들일 것이다. 이때쯤이면 땅속 정기와 햇살과 제주의 비바람이 쑥쑥 키워낸 고사리가 지천에서 돋아난다. 제주사람들이 기다리는 진정한 봄이 시작되는 것이다. 제주에서 고사리를 꺾을 수 있는 시기는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딱 한 달간이다. 고사리를 꺾느라고 온 섬이 난리법석을 뜰 고사리 철이 되어야 봄이 완성된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유채 밭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수백만 장 양산되고, 보리가 짙은 녹색으로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야생 고사리가 본격적으로 유혹의 손짓을 보내기 전인 지금은 국토 최남단 제주에도 아직 이른 봄인 셈이다. 국산 중에서도 최고로 쳐주는 제주 고사리는 예로부터 ‘귈채’라 불리었으며 쫄깃쫄깃한 식감과 뛰어난 향기를 자랑한다. 제주도의 품질 좋은 자연환경이 키워낸 고사리이기에 명품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잘 말린 제주고사리는 100g당 2만원을 호가하여 제주산 한우등심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몇 번을 데쳐먹고 볶아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정도의 양이라면 최소한 500g은 넘지 싶은데 그 고사리를 채취하기 위해 얼마나 봄의 들판을 헤매 다니는 수고를 하였을까. 고사리 채취 장소는 대부분 오름이나 한라산 중턱 등 수풀이 우거진 곳이다. 고사리를 잡아채 톡톡 꺾는 손맛의 짜릿함에 취해 자꾸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길을 잃기도 한다. 특히 외지인의 경우 일행과 떨어져 휴대폰이 안 터지거나 배터리라도 아웃된다면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 고사리 철이면 119에 잦은 실종신고가 접수된다고 한다. 야생 고사리 한 줄기가 사람의 눈에 띄기까지에는 ‘제주 들녘의 달짝지근한 바람’과 ‘들큰한 흙내’와 따사로운 햇빛과 교교한 달빛과 푸른 파도소리가 쉼 없이 그들을 어르고 달래고 들쑤셨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의 농축이 ‘압축파일 풀리듯 한꺼번에 터져 나왔’던 것인데 제주 고사리는 한 자리에서 아홉 번이나 순이 돋기도 한단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고사리 삼매경에 빠져드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금은 잠시 망치소리가 멈추었지만 한라산 중산간 곶자왈까지 들판과 산을 중국자본의 개발바람이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사드 후폭풍은 한국과 중국 모두를 딜레마에 빠져들게 한 것 같다.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이 빠져나간 제주의 초봄은 썰렁했지만 한편으론 분답하지 않아 좋았다. 이런 조시라면 고사리를 꺾어 말려 육지의 친지들에게 봄을 택배로 보내는 일을 멈추지 않아도 될 것 같고, 뭍에서 ‘제주의 봄’을 ‘맛있게 울궈먹는’ 즐거움도 계속되리라. 놀멍 쉬멍 제주의 이른 봄을 즐기기엔 나쁘지 않았지만 일찍 간판 불을 끄는 식당주인의 시름에 찬 모습을 보니 마음은 편치 않았다. 나야 온몸에 봄을 제법 묻히고 돌아왔으나 두고온 제주의 봄은 내내 시무룩해 보였다. 권순진 A Breath Of Spring - Samuel Reid |
출처: 詩하늘 통신 원문보기 글쓴이: 제4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