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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균
나는 나에게
가끔은
손님이고 싶어한다
살아온 날들을
남처럼
보고 싶어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보여주는 것이
보여지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내가 때로
너무 아름다이
보였을 때
그에게는 그러했는가
自我...
그는
나에게
가장 가깝고
두려운 손님이었다
그가
떠나고 싶어할 때가
가장 두려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손님을
들이지 않았다
내 정원의 꽃들이
흔들리고 있다
이름을 잊고
다른 빛깔을
옷입기도 한다
그래서
좋을 때도
가끔은 있다
손님없는
마음대로 정원
주인만 있는 정원
꽃들도
마음대로
자태를 흐트러뜨리고
나도
마음대로
어질러 놓으면서
시간이 지나니
엉망이 되기 시작하는
나의 xanadu
잡초만 무성하고
쓰레기가 생겨났다
다시
그 손님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그를 다시
불러내려하니
그가
보이지 않는다
찾아 다니다
그를 찾았다
그리고 놀란 건
내가 그림자없이
살고 있었다는 것
그는
슬피 울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
얼른
내게 그림자가
되어주었다
그와 나는
더이상
주인과 손님이 아니다
그와 나는
하나이고
나는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
정원은
나만의 꽃들을
자신있게 피워냈다
그리고
나는
고요하다
한없이
고요하다
1956
2 월 10일 충남 대덕군 반석리 (지금은 대전시 반석동 )에서 아버지 오희철씨와 어머니 박태임씨 사이에 10남매 중 7번째로 태어났다 .
1964-69
외삼 국민학교 졸업. 국민학교 시절 그림을 좋아해 방학 숙제 이상으로 그림을 그려낸 기억은 있지만, 그 흔한 미술대회 상 한번 받지 못해 본인 스스로도 재능이 특별하다 여긴 적이 없다. 공부는 전 과목이 고루 우수해 늘 1등을 도맡아 하는 모범생이었다. 몸이 허약하고 사교성이 없어 놀자고 찾아오는 친구도 마다하고 집안에 틀어 박혀 공상을 즐겼다.
1969
유성 중학교 . 충남 고등학교 졸업 . 중학교 때부터 미술반에 들어 취미로 나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 다소 재능이 눈에 띄었던지 고교 때는 미술 선생님이 미술반에 들기를 권유하였다
1975
우수한 학과 성적을 믿고 의대에 지원하였으나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재수 중 뚜렷한 이유는 없으나 운명적으로 미대 진학을 결정하였다. 훗날 생각 해 봐도 이 드라마틱한 진로의 전환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여겨진다. 시골 출신으로 거의 입시 훈련을 거치지 않고도 서울 미대에 응시하여 덜컥 합격하였다. 시골 분이셨던 부모님은 서울대는 자랑스러워하셨지만 ‘화가’가 되는 것은 별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1976-80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뒤늦게 시작한 그림이 너무 좋아서 열심히 많이 그렸다. 스스로는 나만큼 그리는 사람도 없다는 강한 자부심 이면에 변변한 미술 교육의 밑받침도 없는 시골 출신이라는 콤플렉스와 권위적인 교수들의 무관심 속에서 소외감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머리도 빡빡 밀어보고, 요란한 복장으로 몸부림을 쳐 봤지만, 늘 불만이 가득했다. 미술사적 지식이 빈약하여 서양대가들의 영향을 깊게 받지 못했지만 고야, 렘브란트, 자코메티, 고흐, 잭슨 폴락, 프로이드, 특히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좋아하였다.
1980-82
ROTC로 경기도 포천에서 군복무를 하였는데, 매우 고된 기간이었다.
1982-85
재대 후 화실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유학을 준비하였다. 1984년 2월 10일 화가인 이명순과 결혼하였다
1985
첫 번째 개인전. 유학을 떠나기 전 서울 종로구 관훈동 백악미술관에서 열었다. 대형 캔버스에 돌고래, 코끼리 등 역동적인 이미지들을 덕지덕지 유화물감으로 두텁게 바른 작업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욕구, 투지 등의 발산이었다.
1986
뉴욕 브루클린 컬리지 대학원에 입학. 한국과 전혀 다른 미국대학의 풍토에 크게 고무되었다. 전혀 선입견 없이 작품 자체의 독창성과 가능성 만으로의 평가로 대학원 실기 장학금의 Charles G. Shaw Scholorship Award를 87년 88년 연속으로 수상하는 등 큰 용기를 주었다.
1987
뉴욕에서의 첫 개인전. 작품 슬라이드를 만들어 화랑을 돌아다닌 결과 소호에 있는 핀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게 되었다. 비록 순수 상업 화랑도 아닌 회원제로 운영되는 코-압 갤러리였지만 세계미술의 중심인 뉴욕, 소호 무대에 그림을 걸었다는 자긍심에 뿌듯하였다..
1988
핀다 갤러리에서 두 번째 개인전. 어두컴컴한 실내에 홀로 켜진 TV, 형광 빛 인공조명에 비춰져 드러난 앙상한 인체, 뉴욕 지하철 속의 거지, 어둡고 차가운 지하 세계의 회색 풍경을 그렸다. 외롭고 힘든 외국생활이 그래도 반영된 그림들이었다.
1988
뉴욕 브루클린 대학 대학원 졸업. 석사학위 취득.
1990
전문 상업화랑인 C&A 갤러리에서 초대전. 상업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1990
뉴욕 시에서 운영하는 비영리 화랑인 BACA 다운타운 갤러리에서 개인적. 슬라이드 심사를 거쳐 얻게 된 이 전시에는 모노로그 시리즈와 홈리스 시리즈를 통해 현대인의 지치고 고통스러운 삶을 표현했는데 NEW YORK TIMES와 NEW YORK OBSERVER의 ART REVIEW를 받았다.
1992
가나화랑 개인전. 가나 화랑과 전속계약을 맺고 활발한 활동을 하며 경제적 안정도 얻었다. 세검정, 무악 재, 절두 산, 현저동 등 당시 서울의 풍경을 새로운 시선으로 그렸다. 또 연필, 파스텔로 집에서 기르던 개, 부암동 골목, 철거 중이던 현저동 모습 등을 그렸다.
1992
뉴욕 The Gallery There Zero 화랑에서의 개인전. 개인전 준비 차 다시 뉴욕으로 갔다. 맨하탄 다운타운에 작업실을 정하고 뉴욕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전과 전혀 다르게 뉴욕풍경이 비쳐졌다. 초고층 빌딩 숲이 만들어 내는 기하학적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커다랗게 연필 드로잉 작업도 했다.
1993
딸 진이가 태어났다. 어렵게 태어난 딸이 염려되어 예정보다 더 머물기로 했다.
1993
FIAC 아트 페어에 참가하였다.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며 파리 시내 풍경을 그렸다. 파리는 뉴욕과 달리 아담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진 도시였다.
1994
뉴욕 57번가 마리사 델 레 화랑에서 개인전, 월드트레이드 센터에서 내려다 본 맨하탄 풍경, 이스트 빌리지, 소호 등을 그렸다. 광활하고 대담한 뉴욕의 이미지를 그대로 떠내고 싶었다. 위에서 내려다 본 시점으로 파노라마의 빌딩 군으로 뉴욕을 표현했다.
1995
가나화랑 개인전. 뉴욕에서의 생활이 안정되고 익숙해지면서 맨하탄 구석구석 정감 어린 풍경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 중엔 예전에 그렸던 홈리스들도 있지만 까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 출근길의 맨하탄 거리 등 마천루의 숲 속에 존재하는 평범한 현대인의 군상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미국 앤틱 액자 또는 오래된 문짝 등을 작품의 일부인 오브제로서 도입해 활용하기도 했다.
1995
부산 공간 화랑에서 개인전을 했다.
1995
뉴 멕시코 주 산타페로 이사하였다. 산타페는 사막 한가운데 고원지대에 펼쳐진 찬란한 빛을 가진 도시이다. 그 곳에선 꽃 한 송이, 구름 한 조각도 황홀한 빛을 발한다. 인디언의 땅을 스페인과 미국이 통치하면서 유럽문화와 토속 인디언 문화가 혼합되고 사막과 협곡의 대자연이 천연 그대로 남아 독특한 매력을 가진 곳이다. 뉴욕이 시멘트의 회색 도시인데 비해 산타페는 마른 흙의 황토 빛 도시이다. 수 많은 미국 서부영화의 배경장소가 되기도 했고 화가 죠지 오키프가 산타페 근처 야비큐에 화실을 장만해 말년을 보냈다.
1996
뉴욕 마리사 텔 레 화랑에서 개인전. 눈이 엄청나게 많이 왔던 해의 뉴욕을 그린 그림들이다. 겨우내 눈에 덮인 뉴욕은 자연의 모습이었다. 눈발 속의 자동차 불빛은 생존을 위한 동물의 눈이다.
1997
가나화랑 개인전. 산타페를 끝으로 외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였다. 뉴욕 풍경, 설경, 산타페의 설경들 중 일부를 모아 전시하였다.
1998
4개 도시 순회전 - 부산 공간화랑, 대구 맥향화랑, 광주 신세계화랑, 인천 신세계화랑, 홈리스 시리즈부터 뉴욕, 산타페 등 10여 년의 작품을 모아 여러 도시에서 전시를 가졌다.
2002
가나화랑 인사이트 갤러리 개인전. 사북을 소재로 한 작품전 이었다. 사북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늘 그렇듯 생각하고 떠난 길이 아니었다. 우연히 TV를 보다가 산나물 장이 정선에 선다길래 강원도에 갔다. 간 김에 태백 사는 작가 황재형을 만나러 가던 길에 우연히 본 사북마을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나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싶은 강렬한 욕구로 여러 차례 그곳을 방문하여 2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나중에 보니 그곳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사북이었다. 슬픈 과거사와 새로운 변신으로의 진행이 산타페와 많이 닮았다. 높은 지대에 자리 잡은 지역 특성도 그렇고 사북에서 보는 꽃, 하늘, 구름, 페인트 색도 산타페의 그것들처럼 많고 눈부시다. 산타페의 황토색이 사북에선 검은 탄 색이다.
2003
광주 신세계 화랑 개인전. 사북 그림으로 전라남도 광주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2003
갤러리 아트링크에서 초대 개인전. 나는 유난히 겨울을 보내는데 애를 먹는다. 추운 것이 싫다. 겨을내내 봄을 기다리다 처음으로 봄 소식이 들리면 그 곳을 찾아간다. 아직도 추운 겨울인데 슬며시 피는 산수유, 얼음장을 뚫고 나온 듯 야무진 매화에서 난 봄을 맞는다. 애타게 기다리는데도 조금만 이르거나 늦으면 보여지지 않는 삶의 희망-봄 꽃들… 봄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 만으로 기획된 전시이다. 이른 봄에 새로 문을 연 갤러리 아트 링크의 개관전이기도 하다.
2003
대구 맥향화랑에서 이명순과 2인전
2003
03 ‘감’전. 갤러리 아트링크
1998년부터 그려오던 시골풍경 중 감, 감나무가 들어간 작품만을 모아 전시.
강원도 깊은 산골, 까치도 먹지 않는 다닥다닥 붙은 토종 감나무, 곶감이 매달린 시골집 툇마루, 청명한 가을하늘을 이고 있는 단풍 든 가을 감나무가 정답다.
2003
‘파스텔’작품전. 갤러리 아트링크
탄 가루로 뒤덮인 검정색 도시 사북. 사막으로 둘러싸인 황토색 마을 산타페, 이 두 곳을 그린 파스텔 작품 50여 점을 전시. 사북에선 내 어린 시절 보았던 담장 아래 민들레, 처마보다 큰 키의 해바라기, 시골집 안방 같은 정경에 시선이 끌렸고, 1996년 일년 남짓 머물렀던 산타페에선 변화무쌍한 하늘, 표정이 다른 창문들, 인디언교회 등에 눈길이 갔다.
2005. 2
부산 도시 갤러리 개인전
도시 갤러리 관장 이혜경이 선택한 30여 점-뉴욕 시기의 작품,사북,산타페 그림, 파스텔 화 등을 전시하였다
2006. 3
부산 도시 갤러리 개인전
산타페를 그린150여 작품 중 최근작 30여 점과 변화무쌍한 산타페의 하늘을 그린 파스텔화 10여 점 전시. 1996년도 산타페 작품에 비해 최근작은 사물이 구체적이면서 강렬한 원색 조의 그림이다
2006. 4.
“Windows"전 갤러리 아트링크
1986년 내가 살던 부르클린의 아파트 창밖, 붉은 벽돌 사이로 이웃집 창문들이 보였다. 외로움을 달래 주기도 했고 향수병을 더 자극하기도 했던 그 창문들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창문들을 그려왔다. 뉴욕 할렘가의 깨진 창문, 자취방을 생각나게 했던 사북의 창문들, 수채화 물감이 번진 듯 빛을 드리우고 있던 산타페의 창문들. 홈페이지를 오픈하면서 창문을 소재로 한 20여점을 선정해 전시를 구성했다.
디지털 windows와 나의 windows 와의 만남이다.
2007.9
갤러리현대 개인전.
진달래와 사북의 겨울을 그린 작품 40여점을 전시하였다.
겨울의 끝에서 만난 있는 듯 없는 듯 그래서 더 반가운 진달래.
이제는 급속한 지역개발에 밀려 빛바랜 추억처럼 소외된 옛 사북, 그곳에 어김없이 겨울은 찾아왔다.
우리 야산에 핀 진달래와 옛 사북의 겨울은 유난히 말이 없다.
2007.12
파스텔전 갤러리 H.
1997년과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작업한 30여 점의 파스텔 작품을 전시.
수채화 물감을 뿌려 놓은 듯 매우 아름다운 산타페의 하늘과 사북의 겨울은 신비롭다.
2008
뉴욕 첼시 미술관에서 "풍경의 정의"라는 제목으로 뉴욕, 사북, 산타페를 그린 풍경과 파스텔화등 50여점 전시.
2009
갤러리현대 개인전
"소외된 인간"
그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열정이 많은 화가이다. 거의 돈키호테처럼... 그림에 돌진하는 투우처럼... 실제로 코끼리...라는 그림에서처럼 그는 삶에서도 화폭에서도 돌진하는 화가인 것 같다 삶을 관조하는 유형도 있지만 그는 인생에서 자신이 발견한 어떤 것들이 오브제가 되어 넘어갈 장애물처럼 본능적으로 뚫고 나가는 사람 같다. 그래서인지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 아닌 현실적인 그에게 현실은 하나의 그림으로 변모한다. 우연히 사북을 발견한 그에게 잠도 못자고 달려갈 정도로 뭔가 가슴을 두드리는... 사북은 그에게 절실한 인생들의 역사가 담긴 풍경... 가슴의 안테나가 그에게 느끼게해주는 풍경에 담긴 슬픔의 색채랄까... 그는 그것을 감지해내고 힘차게 담아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슬퍼진다고 하던 그... 어느 동영상에서 본 억새밭인지 풀밭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왜 나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옷을 다 벗고 싶지... 하며 훌훌 벗고 달리던 그... 그는 자유인이다. 자신이 있는 어느 지점에서도 어떤 가감도 없이... 합리화나 미화도 없이... 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오치균으로 부딪혀 하나의 작품속에 담아낸다. Y
계곡마을 / Acrylic on Canvas 112 x 162 1999 파란집 노란집 / Acrylic on Canvas 70 x 70 2000 할머니 / Acrylic on Canvas 100 x 80 2000 집으로 / Acrylic on Canvas 87 x 130 1999 고한읍골목 / Acrylic on Canvas 80 x 80 1999 삼거리 가게집 / Acrylic on Canvas 67.5 x 100 2001 퍼런벽돌 / Acrylic on Canvas 116.5 x 78 2001 우리가 여태껏 보아오던 오치균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계절감은 겨울이다. 그의 그림에서 겨울과 상대되는 봄이 전혀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따뜻한 계절감이 드는 그림이 없지는 않았다.
힘겨워 하는 사람이나 자동차가 보이는 혹독한 겨울, 그것이었다. 두텁게 발라 올린 화면 질감과도 잘 어울렸다고 여겨지는 이런 분위기는 오치균의 그림이 우리에게 처음 선보인 이래 지금까지 10년 남짓 동안 그의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품는 느낌일 것이다. 누구보다도 왕성하게 발표되었으니 만큼 강하게 각인된 면모이다.
좀은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드디어 봄 같은 상투적인 것을 제대로 삼게 되었나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어두운 분위기를 떨치고 밝음을 찾아간다는 점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법이다. 아무리 혹독한 겨울이었더라도 살아있기만 한다면 봄은 멀지 않은 것이 아닌가? 겨울을 이겨내고 맞는 봄! 오치균이 봄 그림을 그렸다고 했을 때, 나에게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세계, 그리고 오랫동안 춥고 쓰라린 겨울을 겪고, 그리고는 드디어 겨울을 이겨냈다! 이렇게 봄을 맞는 다면 그 봄은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오치균이 선보일 봄 그림에는 분명 남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가졌던 유토피아적인 바람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 어느덧 디스토피아적인 불안으로 바뀌었다. 오치균은 사실 겨울 분위기를 자주 다루었던 점 때문에라도 디스토피아적인 느낌이 강했던 화가다. 그런 그가 다른 길을 가는 것인가? 지난 2002년에 열린 사북 그림 전에는 봄이나 여름의 사북을 그린 그림이 꽤 눈에 뜨였다. 오치균이 사북에 눈길을 맞추고 이를 그리기 시작한 때는 1999년이다. 내 짐작으로 그 해 봄부터 사북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는 겨울 분위기 속에서 봄을 이미 보았다. 사북을 그리기 시작한 첫 해에 해바라기가 등장하고, 계곡마을의 봄을 그린 것이 있었다. 그는 겨울 느낌 그 자체로도 여겨지는 사북을 겨울로 보다는 봄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석탄 캐기로 흥성하던 곳이 이제는 사람마저 떠나 비다시피 했다. 사람이 없어지자 살아나는 자연을 그는 그리고 싶었을까? 사북 그림 전을 열면서 낸 그림모음에 스스로 쓴 작품설명을 보면 그가 봄 그림을 느끼도록 그리게 된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 계곡마을에도 봄은 찾아와 겨우내 덮었던 눈을 녹여 주니 폐허 같은 마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봄은 역시 잔인하다....” (계곡마을-봄 , 1999) 겨울, 특히 눈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오치균의 생각은 매우 다르다. 군대에 징발되어 생활하면서 그는 눈을 아름답다느니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봄 역시 ‘잔인하다’고 표현했다. 이런 인식에, 이런 실감이 없다시피 한 나도, 듣고 보면 동의할 수 있다. 그래, 상투화된 감각은 멀리 던져라. “... 폐허 속에서 홀연히 핀 봄꽃은 가히 신성하기까지 하다. 언제 봐도 흥분되는 그리고 싶은 소재다. ” (봄소식, 2000) 남다르게 봄을 그리워하면서, 봄을 그리는 그의 마음은 다음 진술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난 유독 화분에 담긴 화초를 좋아한다. 어려웠던 시절에도 새 화초를 키우며 행복을 느꼈다... 단칸방 뒤엉킨 살림이었건만 화분을 정성스레 가꾸는, 인간은 참으로 가엽도록 나약한 것 같다. 그러나 얼마나 아름다운가! 허름한 담 벽 아래 화분도 아닌 아무런 그릇들 속에 가난한 주인의 손길로 소박하게 자라고 있는 화초들이!” (화분, 2000) 이런 진술 속에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애써 이를 승화하는 심정, 곧 겨울 속에서 봄을 보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겨울 속에서, 겨울을 사무치도록 맛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욱 애타게 봄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수도가 옆 한 그루 개나리가 아름답다. 무엇보다 부드러운 봄 햇살이 감싸준 공기를 표현하려 애썼다. 찬 기운은 완전히 없어진 정오, 아직 초록은 뒤덮이지 않았지만 완연한 봄이다.” (고향집, 2000) “작업실 가는 길, 갈마 터널 지나 오른쪽 창밖을 보면 어릴 적 살던 고향 닮은 동네가 나온다. 이른 봄이면 밭 중앙에서 활짝 핀 목련 덩이가 나를 반겼다...” (목련, 2000)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처음 오치균의 화실을 방문했고, 제대로 된 인사를 처음으로 나누었다. 그의 그림을 열심히 보았지만 인사는 스쳐 나는 정도로 그쳤던 것이었다. 깡말랐던 인상에서 살쪄 보이고, 더욱이 근육질로까지 보이게 변한 것처럼, 늘 겨울 분위기의 그림을 그렸다고 여겨지던 그의 입에서 나온 봄에 대한 생각은 내 흥미를 자극했다. 나는 어느 때, 봄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수년 동안 불안해했던 적이 있었다. 한겨울, 추위와 끝도 없이 오가는 자동차의 매연과 시끄러운 소리에 시달리는 나무들, 뿌리 내린 땅조차 단단한 껍질로 싸여 끝내는 목말라 죽은 것일까? 끝을 꺽으면 맥없이 부러지는 겨울의 나뭇가지는 마치 죽은 모습이다. 워낙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도 나는 안심하지 못한다. 봄이 오지 않으면, 침묵이 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아직 따른다.
그런 그를 보고 나는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사실 이런 불안 속에 맞고 했던 봄이야말로 실로, 나를 미치게 했다고 할까, 나는 누구보다도 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어렸을 때는 봄마다 맥이 풀렸고, 눈이 너무 부셨기 때문에 봄이 싫다는 느낌을 가졌다. 봄만 되면 나는 늘 어머니의 손에 끌려 병원이나 한약방으로 다녔다. 성장하여 이런 상태가 극복되자 나에게는 봄이 반갑고, 새롭고, 신나는 계절이 되었다.
이 땅을 방문한 먼 나라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봄을 맞아 이 땅에서 피는 꽃이 매우 아름다운 것과 가짓수 많은 것을 예찬했다. 이런 진술을 보면서 이 땅의 봄의 남다름을 실감했다. 자라면서 건강을 되찾은 내가 신나 하는 것이 당연하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풀 한 포기 자랄 것 같지 않은 까만 동네이다. 생명이 담겨 있을 법 하지 않은 거친 담벽들 사이로 힘차게 개나리가 피어올랐다.” (개나리, 2001) “겨울 끝, 살포시 봄은 찾아온다. 한없이 적막했던 마을에 봉고 트럭이 들어왔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철죽꽃 아래 술렁술렁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봄소식, 2001) “보송보송 털이 난 조그만 고양이가 앉아 있는 것처럼 앙증맞게 피어 있는 민들레...” (민들레, 2001) “... 창문 아래 노란 민들레, 주인 없는 창 아래 홀로 피었다. ... 빨리 봄 산으로 다가가고 싶다.” (돌아가는 길, 2001) 사북을 그리면서도 뱉은 이 말들에서 우리는 오치균이 곧 봄의 전령사로 발벗고 나설 것임을 물씬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는 봄을 왕성하게 그려냈다. 화실을 방문한 나에게 그 동안 준비했던 그림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그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었다. ‘오치균은 그림 그리기에 정말 열심이다! 봄 대지의 생산력 처럼.’ 우리가 느끼는 계절에 대한 느낌은 온전한 것일까? 이 엉뚱해 보이는 의문은 아무리 자명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온당하다. 누가 봄을 제대로 그렸는가? 안견이 그런 꿈속에서 본 복숭아밭 그림을 우리는 안다. 김홍도의 잘 알려지지 않은 한 그림에 봄이 오는 강물 위에 언덕 위 난 나뭇가지에 돋는 순을 보는 사람을 그린 것이 있다. 김홍도 특유의 봄 느낌을 물씬 풍기니, 노래로 치면 절창이다. 박수근이 그린 봄 그림도 봄의 느낌이 물씬 하다. 박수근 특유의 겨울 느낌을 주는 소재와 화면을 거쳐 그가 도달한 봄 느낌은 남다른 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아무리 좋은들 뭐하나? 이것들은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봄을 그린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느끼는 봄은 아직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젖먹이와 어린이, 소녀, 소년, 청춘 남녀, 신혼의 남자와 여자, 중년 남녀와 인생의 황혼을 맞은 노인들이 느끼는 봄, 버려진 콘크리트나 아스팔트 더미 사이에서 싹트는 싹이 있는 봄은 아직 그려지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가난뱅이 젊은이의 봄 느낌은 그려지지 않았다. 가까이 100년 이상 이어진 진저리 처지는 곤란을 거치고 있는 우리들의 느끼는 봄은 아직 그려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수만 점의 봄을 제각기 달리 그렸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다른 봄 그림이 기대된다. 여지가 아직, 너무나 많은 것이다. 이런 느낌을 그려 남기는 일은 아직 제대로 시도조차 되지 않았건만, 우리들은 다른 세계를 그리워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가장 흔한 소리가 이런 것은 인상파 화가들이 다했다. 서양 사람들이 다했다는 종류의 말이다. 과연 그럴까? 과연 다해 놓아서 할 일이 없는 것일까? 우리가 온전한 존재로 바로 서고자 했을 때, 우리를 둘러싼 갖가지 물상과 느낌에 대한 감각이 온전해야 한다. 한 가지의 사물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은 모두 다르지만 공감각을 바탕에 둔위에 제각기의 다른 감정을 허용한다. 오치균이 애써 이루려고 하는 바는 먼저 사물이다. 현상에 대해 의당 가질 만한 느낌을 나타내는 일이다. 이런 것 없이, 어찌 고등한 감각이 생길 것인가 하는 의문이 늘 든다.
이들의 작업 바탕은 사랑이다. 대상이 사물이건 생물이건, 이 점에서 오치균의 작업은 시대착오적이기는 커녕,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백인백색, 천태만상의 변화를 통해서 우리는 진실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오치균이 그리는 봄 풍경은 그러나,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더는 봄을 단지 아름답게만 그릴 수 없는 시대에 도달한 것 같다. 무조건적인 유토피아적인 전망은 존재할 곳이 더는 없다. 아름답다는 느낌에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을 때 조화임을 알고 씁스레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심지어는 아름다운 무엇 인줄 알았는데, 확인해 보니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안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우리 국토도 이제 더는 금수강산이 아니다. 국토는 허리만 동강이 난 것이 아니다. 어부가 건져 오린 그물에는 물고기보다 비닐과 유리조각 같은 쓰레기가 더 많이 걸린다. 경치도 어느 한 곳 눈길 줄 곳이 드물다. 이 괴로운 시대에, 짐짓 꾸며 아름다운 경치를 연출해 봤자 그것은 거짓이고, 사기다. 오치균은 봄을 그리는 여느 그림 그리는 사람과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그는 우리주위, 망가져 황폐하기까지 한 풍경에 눈길을 주고, 손길을 주어서 쓰다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그린 봄 그림을 보면 마치 그가 손으로 보듬으며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의 구도잡기는 어떤 명 너무나 곧이곧대로인 느낌이 강한 것도 많으며, 다소 쌩뚱맞은 것도 적지 않다. 이런 점으로 하여 이른바 현대적인 느낌을 자아내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의 풍경은 결코 억지로 꾸민 풍경이 아니다. 그는 있는 그대로에서 자기가 마음줄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정착시킨다. 이것이 오치균의 남다른, 중요한 점이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대문부터 무너지더니 본채마저 돌보지 못해 내 고향집은 빈터로만 남아 있다. 보잘 것 없는 마을에 봄이 찾아와 꽃을 피워 주니 더욱 귀하다.” (고향 닮은 마을, 2001) “... 자랄 새도 없이 잘려 나가는가 싶은데 그래도 살아남아 있던 가지가 꽃까지 피웠다. 거칠디 거친 나무 마디가 피운 꽃에 봄볕이 가득 하니 눈이 부시다. 그런 나뭇가지를 표현할 수 있을까...”(늘 잘리는 나무, 2002) 오치균을 비롯한 뛰어난 미술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바는 무엇일까? 내게는 흡사 한 계열의 그림쟁이로 여겨지는 화가들이 있다. 밀레와 박수근 그리고 오치균이 그들이다. 이 이름들에 우리는 줄을 그으면 된다. 밀레와 박수근 사이에 반 고흐가 있지만 조금은 다르니 넘어가기로 하자. 밀레가 자신이 애써 두텁게 마련한 바탕을 통해서, 농부들, 더욱이 제 땅도 없이 가난하디 가난한 이삭 줍는 거렁뱅이 여인들에게까지 정성을 다한 물감 쌓아 올리기를 통해 부여하고자 한 것은 위엄이다. 박수근은 많게는 아홉 번이나 덧발라 가면서 질감 만들기를 자신의 목표인양 그토록 몰두했던 것이다. 오치균의 목표도 같을까? 나는 그렇다고 여긴다. 단 그 방법은 다르다는 것이고, 이 것은 매우 중요한 차별 점이다. 밀레가 밀레답게 그렸듯이, 박수근이 박수근답게 그렸듯이, 오치균은 오치균답게 그린다. 오치균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오치균스러운 것일까? 이 질문은 계속 열어두고 궁금해 하자. 아무튼 오치균은 존중할 만한 ‘그림쟁이’다. 오치균이 그려낸 봄은, 그의 다른 그림이 그렇듯 우리와 우리 주위의 것에 위엄을 부여하는 일이 아닐까? 그렇다. 그는 우리의 봄에 위엄을 더하여 그려냈다고 여겨진다. “살짝 돋은 새싹은 희망의 미소이다. 아직 겨울의 죽음이 남아 있지만 이제 살았구나 기지개를 펴도 된다. 대세는 봄이며 새싹은 생의 징표이다. 특히 쓰레기 더미 속의 새싹은 더욱 귀하다. 고통스런 몸부림 끝에 아물어 가는 상처와 같다. 이런 대세는 통쾌하다.” (봄소식, 2001) 그의 봄 그림은 그러므로 대세다! 그의 봄 그림으로 하여 우리가 앞으로 맞는 봄은 더욱 풍요한 봄이 될 것이다.
최석태 | 미술평론인, 한국현대미술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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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분의 삶자체가 아름다운작품 입니다.
삶의조각 실상에서의 친근한 느낌 그 자체인듯 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