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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mtlj02DfUp4
윈스턴 처칠 경
(Rt Hon. Sir Winston Churchill)
※ Rt Hon.: Right Honorable, 후작 이하의 귀족에게 주어지는 경칭
윈스턴 레너드 스펜서처칠
(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군인 출신 제61대·63대 영국 총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영국 총리이자 엘리자베스 2세시대의 초대 총리이다.
오늘은 위스턴 처칠의 명언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Success is not final, failure is not fatal:
It is the courage to continue that counts."
"성공은 영원하지 않고, 실패는 치명적이지 않습니다.
계속하는 용기가 중요합니다."
위스턴 처칠은 이 명언을 통해 성공과 용기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우리는 종종 성공과 실패에 과도하게
중요성을 부여하곤 합니다. 하지만 위스턴 처칠은 성공이 최종적인 결말이 아니며, 실패도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만나더라도 용기를 가지고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변화하고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도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용기 있는 선택과 지속적인 노력이 우리를 더 나은 결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위스턴 처칠의 명언을 기억하며,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통해 학습하고 성장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려움에 물들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나아가는 당신의 모습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과 도약을 기원합니다.
또다른 처칠의 유머
■유머 1
청중 앞에서 연설을 할 때는 항상 청중들이 빽빽하게 모여서 환호를 지른다.
그 장면을 본 미국의 여류 정치학자가 쳐칠에게 "총리님은 청중들이 저렇게 많이 모이는 것이 기쁘시겠습니다"
"기쁘지요, 그러나 내가 교수형을 당한다면 두배는 더 많은 청중들이 모여들 거라는 생각으로 정치를 합니다"
■유머2
항상 늦잠을 잔다는 처칠에게 노동당 후보가 선거시에 "늦잠꾸러기에게 나라를 맡길 겁니까?"
"저는 새벽4시에 못 일어납니다" "예쁜 마누라와 살다보니 늦잠을 잡니다. 저도 못생긴 마누라와 결혼 했다면
4시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유머3
의회 출석이 있는 날에 늘 지각을 하는 처칠에게 야당의원들이 질책을 하자 "예쁜 마누라와 같은 침대에서
자보십시오. 담부터는 의회출석 전날은 각방을 쓰겠습니다"
■유머4
처칠은 칠칠 맞아서 잘 넘어졌다고 한다.
연설을 하려고 연단에 올라가다가 넘어지자 청중들이 박장대소를 하고 웃었다.
처칠은 곧바로 연단에서 "여러분이 그렇게 좋아 하신다면 또한번 넘어져 드리겠습니다"
■유머5
쳐칠이 80세가 넘어서 은퇴를 한 후 한 여자가 젊었을 때의 처칠의 유우머를 상기하며...
"처칠경 바지 단추가 풀어졌습니다"
"네 부인 안심 하십시오. 죽은 새는 새장이 열렸어도 도망가지 못합니다"
■유머6
처칠이 "대기업 국유화"를 주장하던 노동당과 싸우고 있던 때였다. 어느 날 처칠이 화장실에 소변을 보러 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라이벌인 노동당 당수 '애틀리'가 볼일을 보고 있었고, 빈자리는 그의 옆자리 뿐이었다. 하지만
처칠은 그곳에서 볼일을 보지 않고 기다렸다가 다른 자리가 나자 비로소 볼일을 보았다. 이상하게 여긴 '애틀리'가 물었다.
"내 옆자리가 비었는데 왜 거긴 안 쓰는 거요? 나에게 불쾌한 감정이라도 있습니까?" 처칠이 대답했다. "천만에요. 단지 겁이 나서 그럽니다. 당신들은 큰것만 보면 국유화를 하려 드는데, 내것이 국유화 되면 큰 일이지 않소?"
'애틀리'는 폭소를 터뜨렸고, 이후 노동당은 국유화 주장을 철회했다.
■유머7
처칠이 총리가 되고 첫 연설을 하고 난 1940년 어느 날, 연설을 마친 처칠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만세를 하는 것처럼 손을 벽에 붙이고 볼일을 보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이 이유를 묻자 처칠이
말하길, "글쎄, 의사가 무거운 물건은 들지 말라고 해서 말이오."
■유머8
처칠이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에 가 있던 때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그와 대화를 하기 위해 그가 묵던
호텔방으로 들어갔다. 처칠은 알몸으로 허리에 수건만을 두른 채였다. 그런데 루즈벨트가 들어올 때 그만
그 수건이 풀려 스르르 내려가 버렸다. 루즈벨트는 매우 난감해 하며... "이거 미안하게 됐소."라고 말했다. 그런데 처칠은 루즈벨트를 향해 두팔을 벌리고 웃으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우리 대영제국은 미국과 미국 대통령에게
숨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소이다."라고 말했다.
역시 대정치가의 위트답습니다. 웃지 않고 보낸 날은 실패한 날이랍니다.
처칠과 같이 담대하고 위트 넘치는 멋진 지도자가 우리나라에서도 나타나면 치유 불가능해 보이는 한국의 저질 정치문화 개선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램입니다.
불독처럼 생긴...
대사9회 재구 동기 구산 김규호 교장이 카톡으로 보내준 글 편집
처칠은 1874년 11월 30일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테어났다.
14년 뒤에... 14살때에 해로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5년 뒤에...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2년 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병의 소위가 되었다.
제4대 경기병 연대에 배속
쿠바 전쟁에 참가를 했다.
4년 뒤에... 보어 전쟁에 종군 기자로 참가.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을 했다.
1년 뒤에 보수당 후보로 하원 의원에 당선 되었다.
5년 뒤에... 자유당으로 당선된 후에
식민지성 정무차관이 되었다.
3년 뒤... 상공의 장관이 되었다.
클레멘타인 호저와 결혼을 했다.
3년 뒤... 해군 장관이 되어서 해군력을 강화했다.
4년 뒤... 해군 장관을 그만두었다.
육군에 복귀하여서 프랑스 전선으로 갔다.
2년 뒤... 로이드 조지 내각의
군수의 장관이 되었다.
6년 뒤에... '제 1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출판했다.
1년 뒤에... 볼드윈 내각의 제무의 장관이 되었다.
15년 뒤에... 체임벌린 내각의 해군의 장관이 되었다.
1년 뒤에... 보수당,노동당,자유당
연립 내각의 수상이 되었다.
8년 뒤... '제 2회 세계대전 회고록'을 퍼냈다.
3년 뒤에... 총선거에 승리하여 수상이 되었다.
2년 뒤에 노벨문 학상을 받았다.
12년 뒤에... 1965년 1월 24일 런던 하이드 파크에세 돌아가셨다.
윈스턴 처칠의 생애와 유머
위스턴 처칠은 1965년 1월 24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보통 처칠하면 영국의 수상으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정치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좀 더 들어가보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인문학자이고 많은 유머를
만들어낸 긍정적인 사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난세에 영웅으로 볼 수 있는 처칠의 일생과 유머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생: 1874. 11. 30, 잉글랜드 옥스퍼드셔 블렌엄 궁,
사망: 1965. 1. 24, 런던
2차 보어전쟁 당시 초급 장교였던 처칠
클레멘타인 오길비 스펜서 처칠
혼전성 호지에, Hozier,
Clementine Ogilvy Spencer-Churchill,
윈스턴 처칠은 2개월 먼저 태어난 조산아였습니다. 처칠이 태어난 블렌엄 궁은 존 처칠(말버러 공작 1세, 1650~1722)이 스페인 계승전쟁에서 세운 전공으로 나라에서 하사받은 것이었습니다. 윈스턴 처칠의 가문은 유명한 정치가 가문이라 한 수 있는 말버러 공작 1세 존 처칠의 후손 가운데 한 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처칠이 어렸을 때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비서로 일했습니다. 처칠 7대 선조인 선덜랜드
백작 3세 찰스 스펜서 전 영국 총리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8대 선조이기도 합니다. 또한 아버지인 랜돌프 처칠
(Lord Randolph Henry Spencer-Churchill)은 재무장관을 역임할 정도로 유명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어머니 제니 제롬은 미국인으로서 뉴욕의 은행가이며, 한때 「뉴욕 타임스, New York Times」의 대주주였고,
아메리칸 재킷 클럽을 창립한 경마 애호가 레너드 월터 제롬(1817~1891)의 딸이었습니다.
◇ 처칠의 순발력(유머)
사관학교 시절의 처칠
윈스턴 처칠은 어린 시절을 더블린에서 보냈으며, 그후 잉글랜드의 예비학교를 거쳐 12세에 해로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해로 학교 교사의 심술 사나운 처사와 사교에 바쁜 부모의 무관심으로 그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고 전해집니다. 게다가 처칠은 라틴어와 희랍어에는 전혀 흥미를 느낄 수 없었음에도 해로 학교의 다른 모든
하급생들과 같이 같은 문장을 몇 번씩이나 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훗날 그는 그 덕분에 영어의 기초를 완전히 습득할 수 있었고, 그것이 그의 유명한 연설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처칠은 다행히 독서를 좋아한 덕분에
문학과 역사에 소질이 있어 영문학과 역사 성적이 좋아서 입학을 허락받았습니다. 결국 친척동생들과 전쟁놀이를
하면서 뛰어놀다가 다쳐서 1년간 치료받은 일을 계기로 라틴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브라이튼 학교로 옮긴 그는 학과공부에 비로소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군인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부친의 권유로 3수 끝에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합니다. 사관학교에 있을 땐 독서, 수영, 승마 등을 익히면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했으며, 중대장이 모범을 보이는 모습을 보면서 리더십과 공동체의 규칙 존중을 배웁니다.
왼쪽부터 윈스턴 처칠, 해리 S. 트루먼, 이오시프 스탈린
졸업 후 기병 소위로 임관하여 보어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서 수용소생활을 했는데, 수용소에서 겨우
탈출한 처칠은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로 변장하여 돌아다니다가 영국인의 도움으로 숨어지낼 수 있었습니다.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장관을 맡았습니다. 처칠은 전쟁이 일어나기전부터 군함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어 속도를 빠르게 향상시키는 등의 국방개혁을 열정적으로 하고 있었으나, 독일이 잠수함을 개발하는
바람에 개혁은 실패하고 맙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무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영국군을 파병한
작전도 인명과 재산피해가 커서 사실상 실패한 작전이 되었습니다. 작전실패에 대한 문책으로 장관직을 사퇴한
처칠은 처제의 권유로 우울증을 잊기 위해서 시골에서 수채화를 그렸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중령으로 복귀하여 참전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유머를 활용하고 복지를 개선하여 군인들의 사기를 높였는데, 모든 장병들을 목욕을
하게 하여 만연해 있던 피부병을 치료하게 했습니다.
군인에서 정치인으로
보수당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보수당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꿨다가, 다시 보수당에
입당하였습니다. 때문에 당시 보수당계 정치인들에게 처칠은 배신자로 낙인찍혔습니다. 이후 정계에서
퇴출되었지만 다시 정치에 복귀하였습니다.
처칠은 한때 나치 독일이 영국을 공습할 것을 염려해 과거 공군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던 일이 있었는데
당시 정계에서 무시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이 진짜 영국을 공격하여 처칠의 견해가 맞다는 것이 입증되자
영국 정부는 처칠을 다시 해군장관에 임명하였습니다. 이후 네빌 체임벌린이 외교문제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조지 6세의 승인으로 처칠이 총리에 임명됐습니다. 이 후 처칠은 영국 본토 항공전을 막아내고 연합국의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승리의 날(VE Day, 1945년 5월 8일),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서.
엘리자베스 공주, 엘리자베스 왕비, 윈스턴 처칠, 조지 6세, 마거릿 공주
※ VE Day: Victory in Europe Day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승 기념일인 1945년 5월 8일
처칠의 은퇴 후 생활
1953년의 대관식에 즈음하여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처칠에게 기사작위를 부여하고 가터 훈장을 수여했으며,
같은 해 그는 노벨 문학상도 수상했습니다. 1953년 5월 스탈린 사후 처칠은 서방측과 소련 지도자의 정상회담을
희망하여 이를 논의하기 위해 버뮤다 회담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회담은 취소되었으나
건강이 회복되어 1954년 6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했습니다. 1955년 4월 5일 노령과 건강의 쇠약 때문에 총리직을 사임했는데 이후에도 처칠은 계속해서 하원에 의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의회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었고, 1955년 선거에서도 84세의 고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1956~58년에 또 하나의 주요저작인 『영어 사용 민족들의 역사, A History of the English-Speaking Peoples』(4권)를 출판했습니다. 1963년 4월에는 미국 의회의 결의에 따라 명예 미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1965년 1월 24일 런던에서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은 왕족 이외에는 금세기 최초로 국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조사를 보냈습니다.
그는 블렌엄 궁 가까이 있는 블래든의 교회 묘지에 양친과 나란히 묻혔습니다.
처칠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영현을 호송하는 해군 수병들의 모습.
처칠의 국장에 참석한 엘리자베스 2세, 필립 공, 엘리자베스 왕대비, 찰스 3세
처칠 부부의 무덤
◇ 처칠 명언
1. 돈을 잃는 것은 적게 잃은 것입니다. 명예를 잃은 것은 크게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용기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입니다.(한국에서는 '용기를' 대신에 '건강을'을 쓴다)
2. 경쟁의 세계에는 두 마디 말 밖에 없습니다. 즉 ‘이기느냐, 지느냐’라는 말 밖에 없습니다.
3. 과거의 일을 과거의 일로서 처리해 버리면, 우리는 미래까지도 포기해 버리는 것이 됩니다.
4. 남에게 무례한 짓을 하지 말고, 남이 나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 것도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예절 바르고, 많은 사람에게 붙임성 있게 지내고, 몇 사람과는 친밀하게 지내고, 한 사람에게는 벗이 되어야 하고,
아무에게도 적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위에 있으면서 교만하지 않으면 아무리 지위가 높아져도 위태하지 않습니다. 예절과 법도를 삼가해서 지키면 아무리 재물이 가득해도 넘치지 않습니다. 냉정한 눈으로 사람을 보고, 냉정한 귀로 말을 듣고, 냉정한 마음으로 도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5. 내가 의무감과 신념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는 한, 어떠한 욕을 먹더라도 아무렇지가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욕을 먹는다는 것은, 나에게 해가 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나에게 유익하다고 느낄 정도입니다.
6. 모국을 사랑하는 자는 인류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7. 비판이란 것이 별로 달가울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체에서 고통이 하는 일과 똑같은 기능을 갖는 것입니다. 잘못된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고 환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게 비판입니다.
8.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를 해야 하고, 어떤 공포 속에서도 승리를 해야 하고,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승리해야 합니다. 승리 없이는 생존이 없기 때문입니다.
9. 우리는 정부가 국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국민이 정부를 소유하는 나라라면 어느 나라든지 즐거이
환영합니다.
10. 위험이 다가왔을 때 도망치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리어 위험이 배가가 됩니다. 그러나
결연하게 위험에 맞선다면 위험은 반으로 줄어듭니다. 무슨 일을 만나거든 결국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11. 전쟁을 할 때에는 결단이, 패배를 했으면 반항이, 승리를 했을 때에는 아량이, 평화시에는 선의가 필요합니다.
지금 보여주는 사진은 현대에는 처칠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되었지만, 원래 톰슨 기관단총, 시가, 중절모 3종 세트는 금주법 시대 전형적인 미국 마피아들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옮겨온 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