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6년 동로마황제 레오 3세는 왜 성상 파괴령을 내렸을까?
이슬람군 격퇴 내부 불만 잠재우고 황제 지위 공고화
비잔티움제국 재정 상태 악화일로
슬라브족 등 이민족 침입 이중 고통
레오 3세, 농민 아들로 태어나 출세
뛰어난 처세술과 외교술로 승승장구
테오도시우스 3세 밀어내고 황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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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제국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상상도. 필자 제공 |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다. 하지만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불붙인 종교개혁 이전만 하더라도 서방의 로마가톨릭과 동방의 그리스(러시아)정교로 대별됐다. 그렇다면 ‘보편적(Catholic)’이란 단어의 의미처럼 원래 하나였던 그리스도교가 언제 그리고 왜 둘로 분열됐을까? 그 직접적 계기가 된 사건이 바로 726년에 반포된 성상(聖像) 파괴령이다. 그렇다면 당시 동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레오 3세(Leo Ⅲ·재위 717~741)는 왜 성상 파괴령이란 극단적 조치를 했을까? 이 글은 바로 이에 대한 답을 초기 그리스도교 형성사라는 관점에서 찾으려는 한 시도다.
레오 3세와 그의 시대
476년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에게 숨통이 끊기면서 ‘영원한 제국’ 로마도 그 기운이 다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는 역사 전개의 한쪽 면일 뿐이었다. 제국의 동부에서는 콘스탄티노플에 뿌리를 내린 동로마제국(이하 비잔티움제국)이 이후 1000년 동안이나 더 버텼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재위 518~527) 통치기에는 적극적인 서진정책으로 발칸·이탈리아 반도, 나아가 북아프리카까지 탈환해 로마제국의 옛 영광을 재현하는 위세를 보였다. 아쉽게도 유스티니아누스 이후 점차 세력이 약화돼 7세기 중반 이후에는 중동지역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이슬람 세력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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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3세의 초상화. |
원래 아라비아 사막에서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은 초기에는 별다른 위협세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점차 강성해져서 비잔티움제국의 숙적이던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어 비잔티움제국의 소아시아와 이집트 영토를 잠식해 갔다. 이후 북아프리카를 거쳐 모로코까지 이르렀고, 급기야 710년에는 내분에 휩싸인 서고트 왕국의 지원 요청을 빌미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넜다. 상륙하기 무섭게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 할거하던 대소(大小) 왕국들을 차례로 점령해 갔다. 8세기 중엽엔 피레네 산맥 이남의 대부분 영토를 차지한 것도 모자라 그 너머 갈리아 땅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동부에서는 두 차례(668~669, 716~718)에 걸쳐서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직접 공격을 시도했다. 비밀병기인 일명 ‘그리스 불’의 도움으로 이슬람군의 침략을 간신히 막은 비잔티움제국은 이후 1453년 종곡을 고할 때까지 이슬람 제국과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제국 북부에서는 또 다른 이민족들이 끊임없이 비잔티움제국의 영토를 노렸다. 결국, 발칸 반도 및 다뉴브강 남부 영토는 북방 이민족의 수중에, 그리고 시리아·이집트·북아프리카 등은 이슬람 군대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았다.
비잔티움제국의 약화는 직접적으로는 이슬람 제국의 흥기와 그에 따른 위협이라는 외부요인에 있었으나, 최전성기라고 하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부터 이미 쇠퇴의 조짐이 싹터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역사에 남을 만한 업적들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는 모두 막대한 비용을 요구하는 과업들이었다. 예컨대, 성(聖) 소피아 성당 건설, 국경지대에 수많은 요새 건설, 서방 원정, 무엇보다도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평화조약 체결 조건으로 지불한 막대한 조공금 등의 지출로 인해 튼실했던 제국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늘어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 항목들이 늘면서 제국 주민들의 부담은 커졌고, 이와 비례해 비잔티움 황제의 통치에 대한 불만도 고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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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제국의 영역. |
이처럼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제국을 재정 불량 상태로 남겨 놓으면서 그의 후계자들은 제국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9세기에 이르러 재정 능력이 어느 정도 회복될 때까지 비잔티움제국은 내우외환에 시달리게 됐다. 7~8세기에 제국은 빠르게 쪼그라들었다. 용병에 기반을 두고 있던 군사조직은 재정 부족으로 와해됐다. 그러다 보니 제국의 북방에서 가해 오는 아바르족·슬라브족의 위협과 남방에서 올라오는 이슬람군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민족의 침략은 비잔티움제국엔 이중고로 작용했다. 왜냐하면, 6세기에 대외교역을 주축으로 번성하던 제국의 상공업은 이슬람 군대가 곡물의 주 생산지인 이집트와 동방 물산의 집결지인 시리아를 점령하고, 이어서 크레타섬까지 차지한 탓에 해상무역이 거의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제국의 북방 및 서방과의 교역까지 단절된 것은 아니었기에 그럭저럭 견디기는 했다. 현상유지 상황에서도 거래 품목과 거래량의 감소 및 교역 지역의 축소는 불가피했다.
바로 이처럼 대내외적으로 제국이 어려운 시기에 레오 3세가 비잔티움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원래 그는 시리아의 로마 도시 게르마니키아(현 터키의 마라시)에서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제국의 이주정책에 따라 어린 시절 트라키아 지방으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 큰 재산을 모은 그는 재력과 정세변화를 간파하는 처세술로 출세 가도를 달렸다. 715년에는 소아시아 지방 최대 군관구(전국을 몇 개로 나누어 통치한 행정·군사 단위)인 아나톨리콘의 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이후 뛰어난 외교 솜씨를 발휘해 이슬람군의 소아시아 침공을 저지하면서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이러한 명성을 등에 업고 비잔티움제국 내 정치파벌 간 알력을 십분 활용, 마침내 717년 3월 테오도시우스 3세 황제를 밀어내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황제로서 그가 만난 첫 시험대는 이슬람군의 콘스탄티노플 침략이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등극한 첫해 여름, 그동안 제국의 이집트 및 시리아 지역을 차지하면서 기세등등해진 8만 명에 달하는 이슬람 대군이 이번에는 제국의 심장인 콘스탄티노플로 쇄도했다. 이들은 거의 1년 동안 도시로 통하는 모든 길을 봉쇄한 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이미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소아시아에서 이슬람인들을 상대해온 레오 3세는 당시 대내외적 요인들을 적절히 활용해 이슬람 대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그의 명성이 올라간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왜 성상 파괴령이라는 악수(惡手)를 두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