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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지칠 줄 모르는 사목적 열정의 소유자,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동료 회원들, 사제들 가운데 정말이지 우러러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타고난 개척정신과 탁월한 선교 정신, 거기다 유창한 외국어 실력...
저는 한국어 하나도 제대로 안 되는데, 제가 잘 알고 지내는 한 살레시안은 구사하는 외국어 수가 엄청납니다.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불어, 독어...
그러다보니 당연히 중책이 주어져서, 전 세계를 안방 드나들듯이 드나듭니다. 틈만 나면 장거리 해외 여행이 잡혀있기에, 삶이 참 피곤해보이지만, 교회와 수도회를 위해 참으로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316~397)도 그랬습니다. 그도 다양한 달란트, 그 위에 영혼 구원을 위한 강렬한 에너지를 지녔으며, 이를 바탕으로 당시 유럽 전역을 다니면서 영웅적으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마르티노의 이력서는 참으로 특별합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습니다. 그는 원래 이교도였습니다. 헝가리 이교도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요청으로 군인의 길로 들어섭니다.
든든한 빽인 아버지를 생각한다면, 그는 평생 군생활을 하다가 편안히 정년퇴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군 생활 중에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말을 갈아탑니다. 힘과 권력과 출세의 말에서 내려 그리스도의 말로 갈아탄 것입니다.
사제로 서품된 마르티노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헌신합니다. 당시 다양한 이단들이 창궐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복음선포 활동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교도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추방되기를 밥먹듯이 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후일을 기약하며 깊은 산속으로 피신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하거나 지치지 않고, 또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 꿋꿋이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마르티노의 지칠줄 모르는 사목적 열정을 눈여겨본 사람들은 그를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추대하였습니다. 그는 감동적이고 명쾌한 강론으로 수많은 이교도들을 개종시켰으며, 방황하고 흔들리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마음을 다독여주었습니다.
이방인 군인 장교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로, 그리스도인에서 주님의 거룩한 사제로, 사제에서 주교로 직분이 바뀌었지만, 그의 마음속 갈망은 오직 한 가지 가난하고 겸손한 수도자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람, 마르티노여! 수고도 죽음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으니,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는 것을 거절하지도 않았으며,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눈과 손을 항상 하늘에로 드높인 채 그의 무적(無敵)의 마음은 기도에 굳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술피치노 세베로의 서한 중)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쓸모 없는 종의 행복
찬미 예수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일의 위대함과 그 허무함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은 84일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어부로서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먼바다로 나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배보다 더 큰 거대한 청새치를 만납니다.
그는 사흘 밤낮의 처절한 사투 끝에 그 물고기를 잡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성취해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는 상어 떼의 습격을 받습니다. 그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그의 배에 묶여 있던 것은 살코기 한 점 없는 거대한 '뼈'뿐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는 지쳐 쓰러져 잠이 듭니다. 이 노인의 모습은, 이 소설을 쓴 작가 헤밍웨이 자신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까지 받으며 세상의 모든 '일'을 성취했지만, 그 허무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엽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열정적인 '일'을 했지만, 세상은 그의 '일'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절망 속에서 자신의 귀를 잘랐고, 결국 스스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이토록 위대했지만, 왜 그 '일'은 그들에게 구원을 주지 못했을까요?
영화 ‘쇼생크 탈출’의 브룩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와 마트에서 '일'을 하지만, 그 '일'은 누구라도 '대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그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주지 못하고, 그저 생존을 위한 발버둥일 뿐이었습니다.
여기, 이들과는 정반대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세 시대, 무너진 성당을 재건하는 공사장을 한 여행자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똑같은 벽돌을 나르고 있는 세 명의 인부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소?"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보면 모르시오? 빌어먹을 벽돌을 나르고 있소." 그에게 '일'은 그저 고통스러운 노동이었습니다.
두 번째 인부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땀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에게 '일'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브룩스나 헤밍웨이의 일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비록 남루한 옷을 입었지만, 눈을 빛내며 환한 미소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께서 머무실 위대한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세 사람은 정확히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사람은 고통 속에서, 두 번째 사람은 의무감 속에서 일했지만, 세 번째 사람만이 완벽하게 행복했습니다. 그의 '일'은 더 이상 '대체 가능한' 노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는 "나는 하느님께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비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밭에서 돌아온 종에게 주인이 "얼른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하고 시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명령한 것을 다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 종에게 고마워하겠느냐? ...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7,9-10)
이 말씀은 언뜻 들으면 굉장히 차갑게 들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했는데, 고작 '쓸모없는 종'이라니?"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노예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언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일'을 합니다.
그 일이 그 자체로 즐거울까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압니다. 자신이 공부하는 그 '일'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임을 압니다. 그 '일'을 통해 자신이 부모님께 '꼭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100점 맞은 시험지를 들고 부모님께 달려가며 행복해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 번째 벽돌공이 "나는 성전을 짓고 있다"고 행복하게 외쳤을 때, 그가 나중에 하느님께 가서 "제가 이렇게 위대한 일을 했으니 상을 주십시오"라고 자랑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는 "주님, 당신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이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그 '일'을 하는 내내 제가 가장 행복했습니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는 고백의 진짜 의미입니다. "주님, 저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그 '일' 자체가 저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고 상급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일'을 통해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저는 아침에 눈을 뜨면, "주님, 오늘 제가 무슨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찾아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그날의 행복도는 매우 높이 상승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세 번이나 배신하고 '쓸모없는 종'이 되어버린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죄책감에 빠져 자신의 옛 '일', 즉 생존을 위한 고기잡이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실패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단 하나의 관계를 확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그에게 '일'을 주셨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17)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와 살아갈 힘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의 스승으로, 목자로 불림 받았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이, 설거지이든, 운전이든, 아이를 돌보는 일이든,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헤밍웨이의 허무함이 아니라 세 번째 벽돌공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7,7-10: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주인과 종의 관계를 비유로 드시며, 종이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 특별히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고 하신다. 이는 곧,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삼아선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한 모든 선행은 은총 덕분이다. 우리가 그것을 내세우려 한다면, 은총을 거부하고 자기 영광을 취하는 것이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8,31) 즉, 우리의 모든 선행은 하느님 은총의 열매이며, 우리는 그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10절)라고 말하라고 하신다. 이는 우리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낮추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봉사가 본래 하느님께 대한 의무임을 고백하는 겸손의 태도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권고한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 그것을 빚 갚음으로 여기라. 은총을 얻기 위한 흥정이 아니라, 주님께 진 빚을 갚는 것임을 잊지 말라.”(Homiliae in Matthaeum 25) 따라서 참된 제자는 자신이 행한 것을 자랑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리며, 더 큰 사랑과 봉사로 나아간다.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이 말씀의 완전한 모범이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필리 2,6-7)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종으로서 순종하시고,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셨다.
교황 프란치스코도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교회의 진정한 힘은 권세가 아니라, 봉사이며, 자기 자신을 낮추어 형제의 발을 씻어 주는 사랑이다.”(104항 요지)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다음을 묻는다. 나는 봉사할 때, 은근히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바라지 않는가? 내가 한 선행을 내 공로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봉사와 직무를 통해 그리스도의 겸손을 드러내고 있는가?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높여주는 태도이다. 우리가 맡은 일을 다하고도 “주님,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봉사는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귀한 향기가 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지금은 전쟁 중이라 갈 수 없지만, 이제까지 경험을 볼 때 성지순례 중의 최고는 단연 이스라엘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된 성지를 돌아보면, 예수님께서 직접 제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이 장소를 통해 주님을 더 뜨겁게 그리고 가깝게 느끼게 됩니다.
나자렛 거리를 돌아다니며 2,000년 전의 예수님 유년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며 장난도 치고 큰 소리로 웃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았을 때의 사건 이후부터 공생활 시작 전까지의 기록이 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완전히 우리와 똑같이 사셨기 때문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께 믿음을 보이지 못했던 것이 이해됩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이와 다를 바 없었던 어린 예수님을 기억하고 있기에, 현재 보이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렸을 때의 저는 ‘부수기 대장’ 소리를 들었습니다. 호기심이 많아서 무엇이든 뜯어보곤 했습니다. 문제는 머리가 나빠서 다시 조립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제 손만 다면 다 부서진다고 ‘부수기 대장’ 소리를 들었습니다. 또 장난도 많이 쳤고, 싸움도 했었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누가 커서 신부가 될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과거를 통해 미래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을 통해서는 미래를 알 수 있을까요? 이 역시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하느님의 일은 늘 뜻밖의 모습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향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쓸모없는 종의 비유 말씀을 하시면서, 겸손과 봉사에 관해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시대의 종은 주인의 소유물이었고, 그의 시간과 노동력은 온전히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힘든 노동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해서 쉴 수 있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주인의 식사를 준비하고 시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즉, 이 정도 했다고 어떤 보상을 기대하거나, 자기 공로를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신앙은 의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적 행위가 하느님께 무언가를 ‘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거래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의 복을 주셔야 한다는 거래가 아니라, 늘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성실한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지를 아는 사람만이 자기 삶의 모든 것이 사랑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리옹의 이레네오 성인).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11.11.화.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바람이 불고
때가 되면
가을잎은
저절로
떨어집니다.
떨어지는
단풍잎은
왜 자신을
밑으로
떨어뜨렸냐고
묻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길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먼저 바라봅니다.
쓸모없음은
무가치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의탁하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순수한
봉사의 자세를
회복하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충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신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비울 때
충만해지는
우리들 삶입니다.
억지로 성과를
만들려 하지 않고,
하느님께 맡기며
자연스럽게
흐르는 삶을
살아갑시다.
하느님께 맡기고
흘러가는 삶이
평화와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삶입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공로를
내세울 때,
우리는
스스로를
속박합니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낙엽이 또 하나
조용히 땅으로
내려앉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사랑 속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꿈을 꿉니다.
더해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온 삶을 투자합니다.
하여 주님의 전능하심에 찬미드리며
주님의 푸진 사랑에 찬탄하며
주님의 자비하심에 기대어
기쁘게 복되게 지내기를 열망합니다.
오늘 그 비결을 지혜서가 알려주는데요.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이렇게 뚜렷이
우리가 추구해 나아가야 할
삶의 목표를 알았으니
주저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저 힘을 내어 도전하면 그만일 터입니다.
주님을 믿는 것이 정답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굿뉴스
이사61,1-3ㄹ 마태25,31-40
최후의 심판
“심판의 잣대는 구체적 사랑의 실천”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에 전하리라."(시편89,2)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각별한 인연 때문에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의 기념일이 아닌 축일미사를 봉헌합니다. 성 베네딕도 이전 이미 서방의 수도승이자 주교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순교자가 아니면서 성인의 월계관을 쓴 최초의 인물이자 갈리아의 사도라 불릴만큼 특히 유럽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수도승 주교였습니다. 성인은 프랑스의 수호성인이자 군인, 재봉사, 가난한 이, 가축과 목동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성인의 삶을 엿볼수 있는 것은 그의 제자 술피치우스 세베루스가 쓴 <마르티노의 생애> 덕분입니다. 그 전에 성 아티나시우스는 <안토니오의 전기>를, 또 후에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베네딕도의 전기>를 썼습니다. 성 마르티노는 로마제국의 땅이었던 헝가리 사바리아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인 316년에 태어납니다.
성 마르티노는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15세에 군인이 되었고 그가 프랑스의 아미앵 근처에 주둔하던중 어느 추운 겨울 밤, 전설적 일화같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말을 타고 가던 마르티노는 추위에 떠는 초라한 행색의 거지를 보았을 때 그는 지체없이 칼로 망토를 잘라 반을 거지에게 주고 반은 자기 몸에 걸칩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긴 칼과 망토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날밤 꿈에 예수님께서 반쪽 망토를 입고 나타나 마르티노에게 말합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신자인 마르티노가 이 망토로 나를 입혀줬다.”
이 주님과의 결정적 신비로운 만남 직후, 그는 “날아가듯 달려가” 세례를 받습니다. 이 전설같은 사건과 함께 그는 세상의 군인이 아닌 그리스도의 군인이 되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세상의 군인이었다가 그리스도의 군인이 된 경우는 성 빠코미오, 성 프란치스코,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있습니다.
마르티노는 당시 프랑스 푸아티에 교구의 주교였던 높은 영성과 지성의 소유자인 성 힐라리오를 만나 사제품을 받고 수도생활을 시작하니 프랑스에서는 최초의 수도원이 됩니다. 스승인 힐라리오가 세상을 떠나자 투르의 주민들의 간청에 따라 마르티노는 투르의 주교가 됩니다. 거룩한 수도승이자 사목자로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활약했기에 그의 명성은 프랑스를 넘어 갈리아까지 널리 알려집니다.
그는 주교관 밖에 마련한 골방에서 다른 80명 제자 수도승들과 함께 기도와 사목에 전념합니다. 생애 마지막 임종어도 감동적입니다. 나이가 들고 죽음이 다가와도 그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자 기도하니 바로 임종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 당신의 백성이 여전히 저를 필요로 한다면. 저는 그 일을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냥 놔두시오. 땅보다 하늘을 더 바라보고 싶습니다. 이제 여행을 떠나려는 순간, 이 내 영혼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성인은 397년 11월8일 81세의 나이로 칸드에서 사망하였고, 11월11일 오늘 투르에 묻힙니다. 프랑스에서 그에 대한 숭배는 그에게 봉헌된 500개의 마을과 4000개의 교구교회에서 잘 드러나며 그의 무덤은 주요 순례지가 되었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자들의 유명한 기착지이기도 했습니다.
위령성월, 성 마르티노의 거룩한 죽음도 우리에게는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문득 4세기 이집트 사망의 한 원로 수도승의 죽음에 대한 일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임종 순간 제자들이 울자 갑자기 눈을 뜨고 세 번 크게 웃습니다.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묻자,
“먼저 나는 그대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웃었소. 두 번째는 그대들 가운데 아무도 준비된 사람이 없기에 웃었소.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의 노고를 벗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이기에 기뻐서 웃었소.”
이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간 이들에게 죽음은 불청객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요 벗이었음을 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구원의 기쁜 소식은 왜 주님께 치유받고 해방되어 자유로워져야 하는 인간인지, 바로 인간의 실상을 잘 보여줍니다. 치유 해방되어 온전한 삶을 누리는 길은 주님과의 만남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이사야서는 예수님의 사명을 요약한 것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시 선포된 내용(루카4,18-19)입니다. 흡사 예수님께는 출사표出師表와 같고 오도송悟道頌과도 같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선한 충격적 깨달음과 더불어 예수님 <삶의 지침>이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1.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2.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3.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4.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5.주님의 은혜의 때,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6.시온에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을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비로소 치유, 해방,구원되어 온전한 참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최후의 심판 잣대도 온갖 종교적 행위나 신심활동이 아닌 바로 구체적 사랑의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종파와 국적, 인종, 문화, 언어를 초월하여 모든 인류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른쪽 구원된 사람들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1.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2.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3.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 들였다. 4.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5.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6.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6개 항목중 몇이나 지켰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 마르티노는 4번 항복에 합격했고, 바로 오늘 복음이 인용된 이유입니다. 바로 이런 구체적 사랑의 실천이 최후심판의 잣대가 됩니다. 궁극의 최후심판에 앞서 날마다 점검해야할 사랑의 실천 사항입니다. 예수님은 인류 모두가 종교와 무관하게 당신의 형제들임을 천명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바로 이 말씀안에 환대의 진리가, 환대의 사랑이 환히 드러납니다. 주님을 맞이하듯 형제들을 맞이하는 환대는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합니다. 모두가 주님의 형제들이자 나의 형제들이요 주님의 현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주님의 형제답게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의 최후심판에 앞서 주님의 축복을 앞당겨 받는 복된 시간입니다. 늘 깨어 주님 앞에서 주님을 만나는 구체적 사랑의 실천에 충실한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축복선언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내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25,34).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17,5)
'믿음의 힘!'
오늘 복음(루카17,1-6)은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는 말씀과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는 말씀과 '믿음의 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복음을 듣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형제가 죄를 지으면 꾸짖으라.'고 하시고, '나의 형제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17,4)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사도들이 주님이신 예수님께 말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17,5)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17,8)
어떻게 너를 죄짓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너를 당당하게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나에게 잘못한 너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완전의 의미를 지닌 일곱 번씩이나.
믿음이 없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들입니다.
믿음의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믿음은 단순합니다.
단순하기에 그 믿음이 겨자씨 한알 만한 아주 작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 단순하고도 작은 믿음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지혜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를 위해 땀 흘리시고, 마침내는 십자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야 너를 죄짓게 하지 않고,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너를 당당하게 꾸짖을 수 있고, 너를 조건 없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 2열왕9,29)
복음말씀
제1독서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2,23―3,9
23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24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3,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7-10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7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8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