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9: 10. 마태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 11. 세리와 죄인들과 잡수시느냐?
마 9: 10. 마태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 -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
이 구절은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카이 에게네토' (*, and it came to pass, 그리고 다음과 같이 되었다)란 말로 시작되고 있다(7: 28-29).
마태가 독창적으로 사용한 어투로서 어떤 사건이나 내용의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device)한 문장이다.
마태는 자기 집을 방문하신 예수께 식사 대접을 하였다. 그때 그는 그의 친구들도 다 청했다. 예수께서는 마태의 집에 앉아 음식을 잡수셨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다.
교제는 목적과 동기가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그들과 함께하셨다.
1]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엔 테 오이키아)
원문에는 단순히 '그 집에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가와 누가는 이 집을 분명하게 '마태의 집'으로 규정하고 있다.
2]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누가는 이 부분을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눅 5: 29)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자신의 집을 그냥 '그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가의 기록에 나타나는 '큰 잔치'란 말을 표현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그가 자화자찬에는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앉아 잡수신다'는 말은 유대인의 전통 식사법에서는 식탁에 거의 눕다시피 기대어 먹는 상태를 가리킨다.
3]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마태가 예수를 위해 베푼 잔치는 일종의 송별회 성격을 띤 것 같다. 마태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옛 생활을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함과 동시에 예수를 따라다니는 제자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태는 이 자리에 옛 동료들과 세속적 친구들을 초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말씀을 듣도록 의도했던 것 같다.
'죄인들'이란 실정법에 따라 사법적 제재를 받는 죄수(prisoner)는 아니지만 유대 사회의 도덕 규범과 구전 율법인 할라카(Halacha)및 랍비들이 주의 깊게 규정해온 전통과 규례를 지키지 않고 무시하던 의식법상의 죄인(sinner)으로서 여기에는 창기와 포주, 그리고 세리가 대표적인 부류였다.
4]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유대 사회에서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상호 인정과 우의, 평화와 사랑, 언약 공동체의 확인을 의미하는 표시였다. 예수와 제자들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들이 멸시하며 상종조차 하지 않던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한 것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관점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행동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과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라면 이들과는 자리를 같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자유 함을 주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의 공동 식사에서 얻는 교훈은
(1) 예수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구주요 친구다.
(2) 보통 사람들은 죄인들과 함께함으로써 죄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는 오히려 그들의 악을 선으로 정화 시켰다.
(3) 주님은 의인으로 착각하는 바리새인들보다 자신의 죄로 갈등하고 연민하는 영혼들에게 먼저 찾아가셨다는 점에서 깊은 교훈을 준다.
마 9: 11. 세리와 죄인들과 잡수시느냐? -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
바리새인들은 그 광경을 보고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잡수신다고 비난하였다.
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당시 바리새인들은 식사에 초대된 것 같지는 않다. 대신 그들은 자칭 율법의 수호자들로서 예수의 기이한 행동에 따른 율법의 파괴 여부를 관찰,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다.
자기 의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 또는 이방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율법을 더럽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2]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바리새인들은 어처구니없는 잔치를 끝까지 지켜보며 예수의 결점을 확보해 두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죄인들과 어울리는, 따라서 죄인과 동류인 그를 어찌하여 선생으로 두고 따르느냐는 듯이 비난하면서 선생과 제자 사이를 이간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들은 권능을 행하신 예수께(2-6절) 직언(直言)할 수 없을 만큼 용기가 부족했던 자들이었다.
3]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이 말은 예수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패거리들과 함께 어울리는 이상, 그는 결단코 의인이 될 수가 없다는 논리이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뿐만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불의를 도모하는 자들과 교제를 나누어서는 안 되며 단지 세속적인 문제로 거래를 해야 할 경우만은 예외였던 것 같다.
(1) 예수를 경멸하는 바리새인들의 저의
① 그들의 마음속에는 비판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유대인들은 예로부터 선민의식이 강한 민족이었다. 이러한 선민의식은 자기들만이 의롭다는 자기 중심적 사고를 형성케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지 옳고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틀린다는 자세로 비판의식이 커졌고, 그러한 비판의식은 그들로 하여금 재판관의 입장에 서서 남을 판단하며 비판하기를 좋아하게 하였다.
죄인과 함께 식사하는 예수님을 경멸하고 헐뜯은 그들의 힐문 역시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의 사람은 비판적인 사람이 되기 쉬우며 남의 잘못을 드러내어 책망하는 것만을 좋아한다.
그들은 설령 타인이 옳다 하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에 맞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틀렸다고 단정하며 힐문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모든 것을 비판하고자 하는 비판의식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나 역시 불완전한 죄인이며 욕심 많은 자이고 허물투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눈과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를 향한, 그리고 그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 어서 속히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 마 7: 1-2 –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② 그들의 마음속에는 권세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문제에 관한한 유대인들에게서 가장 존경받고 그 권위를 인정받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공생애를 시작하고 백성의 마음이 예수께로 쏠리자 그들은 자신들의 인기와 권위가 예수에게로 빼앗기는 줄로 생각하여 예수를 미워하고 질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사건건 예수의 말과 행동에 꼬투리를 잡았고 결국에는 이러한 시기심 때문에 만왕의 왕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자기의 마음속에 물질이나 명예(인기) 권세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찬 자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진리가 그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짐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도리어 진리가 그들을 빈털털이로 만든다는 착각 속에 빠져 진리를 외면하고 진리를 선포하는 자를 경멸했다.
스스로를 돌이켜 보면 그것은 분명 자신에게조차 숨기려 하는 자신만의 비밀, 즉 자신의 이익이나 이권(어떤 형태로든)에 관련된 문제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진실을 진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한다.
(2) 예수님의 사랑
① 그는 사랑을 실천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사랑을 비난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을 실천하셨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주님과의 근원적인 차이다. 주님은 천대받고 버림받은 자, 소외되고 가려진 자들을 찾아가고 위로하셨다.
그분의 사랑은 말보다 실천이 앞서며, 사랑이 절실히 요구되는 자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초월적인 사랑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를 사랑하기는 커녕 도리어 판단하고 질책하며 경멸하고 정죄하지는 않았는가?
이런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다. 주는 것, 값없이, 대가 없이, 주어야 할 자들에게 주고 빛을 그리워하며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빛을 비추며 기댈 곳을 그리워하는 자들에게 기댈 벽을 제공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② 그의 겸손 하였다.
사람들은 남보다 높아지고자 한다. 높은 자는 낮은 자를 깔보고 엎신여기며 압제하는 것이 오늘의 사회다. 그러나 주님은 그리하지 않으셨다.
그는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이시고 천지와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에도 불구하고 나약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외되고 억눌린 자와 친구가 되는 겸손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겸손, 이것은 사랑에 대한 최상의 표현이다. 내가 남을 사랑한다면 어찌 그 앞에서 교만하게 행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게 아직도 교만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자신에게 참된 사랑이 부족함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을 배우라. 우리가 겸손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높여 주시는 진정한 존귀의 자리에 들림을 받게 될 것이다.
첫댓글 귀한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복된 자가 됩시다.
^~^사랑의 향기는 만리를 가고도 남습니다. 오늘도 건강과 함께
좋은 사람들과 좋은 향기로 좋은 인연 이어가는 날 되시기 기원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복된 자가 됩시다.
설교 감사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복된 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