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소룡(李小龍, 1940년~1973년), Bruce Lee(브루스 리)
미국 시애틀에 위치한 이소룡의 무덤. 묘비명은 절권도의 창시자(Founder of Jeet Kune Do). 오른쪽은 그의 아들 브랜든 리의 무덤.
이소룡은 중국계 미국인 영화배우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으며, 중국인 아버지인 유명 경극배우 이해천(李海泉)과 중국계+독일계 혼혈인 어머니인 하애유(何愛瑜)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하애유가 홍콩의 4대 명문 가족 중 하나인 하동가족(何東家族)의 자손 중 하나라고 한다. 명문가의 자손인 셈.
아버지 덕분에 이소룡도 매우 이른 나이에 데뷔했는데, 갓난아기 시절부터 영화에 나왔을 정도였고 아역배우로도 꾸준히 활동했다. 예명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소해천이라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 친구가 길을 지나다가 길거리 경극 공연에서, "…대룡이 소룡을 낳으니 곧 이어지는구나!"라는 대사를 듣고, 대룡이 이해천이라면 진번은 소룡이 어떻겠느냐고 권해서 지었다고 한다.
어릴 적에는 몸이 약해서, 7살 되던 무렵 신체 단련을 위해 태극권을 연마하는 것을 시작으로 무술에 입문하게 됐다. 이소룡의 아버지 이해천이 과거 홍가권(洪家拳)을 배웠던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이소룡이 본격적으로 무술 수련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무술의 기본이 된 영춘권(詠春拳)을 엽문에게 배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엽문에게 배운 적이 있는 것은 맞지만, 사실상 이소룡에게 영춘권을 가르친 것은 엽문의 제자인 황순량(黃淳樑)이었다. 그리고 이소룡을 영춘권에 입문시킨 사람은 황순량의 사제(師弟)인 장탁경(張卓慶)이었다. 황순량이 이소룡보다 5살 연상이었기에, 노사(老師)라기보다는 사형(師兄)에 가깝다 할 수 있었다. 그 외 같은 남권계열로 광동성의 유명한 권법이었던 채리불권(蔡李佛拳)을 익혔다. 원래 남권 유파들은 예부터 가족처럼 각별하게 지내던 풍속이 있던 분위기라서, 영춘권과 가까웠던 채리불권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실제로 이소룡의 하단 공격기술들은 영춘권이 아니라 채리불권의 초식에 가깝다는 말도 있다.
다만 쿵후의 고수라는 그의 이미지와는 달리, 어렸을 때는 끈기가 없어 금방 싫증을 내곤 하여, 한 무술을 깊이, 오래 배운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하며, 그나마 오래한 무술은 영춘권 정도였는데, 그나마 13세에 영춘권에 입문했으니,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약 4년 배운 것이다. 근시라서 접근전에 유용한 무술을 찾다보니 영춘권을 택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어릴 때는 TV 등에서 아역으로 얼굴을 알리기도 해서 인기도 있었지만 학교에서는 골목대장에 가까웠고, 중고등 시절에는 부모조차도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는 불량학생이며, 매일같이 다른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춤에도 일가견이 있어 당시 유행하던 차차차 댄스 콘테스트에서 일등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싸움질은 더욱 심해졌고, 삼합회 간부의 아들과 싸움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집에 경찰이 찾아와서, “한 번만 더 당신 아들이 싸움을 벌인다면, 녀석을 감옥에 처넣을 겁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1959년 4월, 부모는 이소룡에게 100달러를 쥐어주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이해천의 누나, 이추봉(李秋鳳, Agnes Lee)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이소룡의 어머니는 이소룡의 아버지 이해천의 본처가 아닌, 첩 같은 것이었다가 이후 본처가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그가 불량아가 된 것엔 이런 이유도 작용한 건 아닐까? 그리고 미국으로 보낸 것엔, 미국은 속지주의(屬地主義)이기에, 미국에서 태어난 이소룡은 미국 시민권이 있었던 점도 작용했다.
도미(渡美) 후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애틀로 옮겨가 고등학교 과정을 계속했고, 그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이충침(李忠琛)의 아내가 운영하는 식당, Ruby Chow에서 일하면서 마음을 고쳐먹은 듯하다. 고교 과정을 마치고, 1961년, 워싱턴 대학교 연극학과에 들어간다. 출처 이때부터 이후 알려진 독서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는지, 철학, 심리학 서적을 파고들었다고 한다.
영춘권을 비교적 오래 수련했을 뿐, 다른 무술들은 금방 싫증을 내곤 했던 어릴 때와는 좀 다르게 좀 더 본격적으로 복싱, 유도, 사바트, 태권도, 가라테, 말레이시아 권법 등 여러 무술을 접해 나아갔다. 나쁘게 말하면 산만하고, 좋게 말하면 한 곳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그의 면이 특정 무술의 형태나 한계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의 신체 특성이나 스타일에 맞는 프리스타일 파이팅을 추구하는 배경이 되었다는 말도 있었고, 나중에 절권도의 이념이 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1959년부터, Jun Fan Gung Fu(振藩功夫)라는 이름을 내걸고, 무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인근 가필드 고등학교에 쿵후[功夫] 시범 차 갔는데, 그때 이 학교 여고생들 중 린다 C. 에머리(Linda C. Emery, 1945~)가 있었다. 그녀는 이소룡의 쿵후 제자가 되었고, 교사가 되려고 이소룡과 같은 대학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1964년 8월 17일에 그와 결혼하면서, 졸업까지 몇 학점만 남겨둔 채로 대학을 그만두게 된다. 출처 그리고 1988년, 탐 블리커와 재혼했다가 1990년에 이혼, 1991년에는 브루스 캐드웰(Bruce Cadwell)과 결혼, 지금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그녀의 이름은 린다 리 캐드웰(Linda Lee Cadwell)이다.
이소룡의 20대 초반 시절, 진번쿵후의 주요 골격은 영춘권을 기반으로 채리불권, 홍가권 등등의 남권에 기반하고 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대의 다양한 무술에 비해 건설적인 변화와 발전이 부족했던 중국의 남파권법을 크게 개신(改新)한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어 기존의 체계를 없애버리고 새로 절권도를 만들 때는, 펜싱과 복싱, 레슬링을 조합한 뼈대를 바탕으로 재탄생시켰다고 한다.
2.3. 배우가 되려고 애쓰다
이소룡은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많은 영화에 얼굴을 내밀었었고, 대학에서 전공으로 연극을 택할 정도로 배우를 꿈꾸었다. 그러나 1959~1964년까지 열심히 노력했으나, 끼니를 걱정하게 될 정도로 난항을 거듭하여, 1964년에는 마침내 포기하고 무술에 전념하자고 결심하고, 자신의 무술을 홍보하려 인맥을 동원해 롱 비치 가라데 선수권대회에 시범자로 초청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무술시범을 본 윌리엄 도지어(William McElroy Dozier)가 1964년, 그의 기획 《Number One Son》의 배역에 오디션을 보게 해준다. 이는 불발되었으나, 밴 윌리엄스(Van Willams)와 함께 TV 시리즈, 《그린 호넷(The Green Hornet)》의 케이토(Kato, 加藤) 역 오디션을 볼 기회를 잡아 배역을 따낸다. 이는 1966~1967년까지 단 한 시즌만 방영되었을 정도로 반응이 신통찮았으나, 《배트맨》과의 크로스오버 에피소드에 몇 번 더 출연할 수 있었고, 이후 TV의 《아이언사이드(Ironside)》(1967), 《신부들이 온다(Here Come the Brides)》(1969), 《블론디(Blondie)》(1969)의 찬조출연(guest appearance)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당시 이소룡의 제자들 중 할리우드 각본가, 스털링 실리펀트(Stirling Silliphant)와 배우 제임스 코번(James Coburn)이 있었는데, 이 둘은 이소룡과 함께 1969년, 《소리 없는 피리(The Silent Flute)》 각본을 쓰고, 인도로 촬영지 답사를 가기도 했다. 이 각본은 무산됐지만, 1978년, 데이빗 캐러딘 주연의 《서클 오브 아이언(Circle of Iron)》에서 활용되었다. 1969년, 이소룡은 스털링이 각본에 참여한 덕에 《말로우(Marlowe)》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이소룡 팬들은 이를 이소룡의 흑역사로 평하기도 한다. 주인공 필립 말로우(제임스 가너 분)를 협박하기 위해 고용된 부하 역을 맡은 이소룡이 주인공을 상대로 깽판 치다가 결국 주인공의 꾐에 빠져 죽는다는 내용인데…
안습한 최후를 맞이하기 전 깽판 치는 장면에서, 영화감독은 이소룡의 재량에 맡겨 적당히 깽판을 부려달라고 주문했고, 이소룡은 앞차기로 전등을 부수는 등, 방 안에 있는 기물들을 온갖 몸놀림으로 박살내며 놀라울 정도로 그 역할을 수행해냈다. 이때 감독, 촬영 스탭, 배우들 등등 모두는, 듣도 보도 못한 방식으로 아스트랄하게 과격하게 때려 부수는 모습에 컬쳐쇼크를 받았다고 한다.
《Enter the office》
그리고 딘 마틴, 샤론 테이트 주연에, 척 노리스도 잠시 나오는 《The Wrecking Crew》에서, 실리펀트의 도움으로 무술지도를 맡을 수 있었고, 역시 실리펀트가 각본을 쓴 덕에, 잉그리드 버그먼, 안소니 퀸(Anthony Quinn) 주연의 《봄비 속을(A Walk in the Spring Rain)》(1970)의 격투장면 연출도 맡을 수 있었다. 1971년, TV 시리즈 《롱 스트리트(Long Street)》에서, 주연 마이크 롱스트리트(제임스 프랜시스커스 분)의 무술교사로 얼굴을 내밀었다. 제자인 실리펀트가 각본을 맡았기에, 이소룡은 자신의 무술철학을 일부나마 자신의 대사로 넣을 수 있었다.
이소룡이나 린다 리 캐드웰에 의하면, 1971년, 이소룡은 《전사(The Warrior)》라는 제목의 TV 시리즈를 구상했고, 이는 워너 브라더스도 확인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1971년 12월 9일, 《The Pierre Berton Show》에서 이소룡의 주장에 의하면, 파라마운트와 워너 브라더스는, 서구적인 부분이 결여되었으니, 그런 면을 더 넣어서 현대적으로 다듬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의 아내의 말에 의하면, 이소룡의 그 구상은 이후 다듬어져 《쿵푸(Kung-Fu)》로 개명되었지만, 워너 브라더스는 이소룡에게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워너 측의 말은 공식 입장은 이와 다른데, ‘그들이 우리 작품과 동일한 컨셉을 잠시 구상했기는 했지만, 우리 작품은 다른 각본가들과 제작자들, 즉 에드 스파일먼(Ed Spielman)과 하워드 프리들랜더(Howard Friedlander)에 의해 창작된 것이다’.
여러 증언들과 증거들을 검토해보면, 이소룡이 캐스팅되지 못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가 동아시아인이라는 것도 있긴 했겠지만, 주된 원인은 그의 투박한 영어발음 때문이라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서부시대의 소림승 역할은 데이빗 캐러딘에게 돌아갔다는 것. 《The Pierre Berton Show》에서 이소룡은, 워너 브라더스의 입장을 이해한다며, 사업에서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으니, 자신은 그들을 탓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만약 미국인 스타가 홍콩으로 왔고 그가 제작비를 대는 입장이었다면, 그 역시 그런 걱정을 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렇듯 이소룡(李小龍)은 인맥을 동원하고 각본을 쓰는 등 여러 가지로 애썼지만, 조연이나 찬조출연이 다였기에, 실망하고 좌절하던 차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작자 프레드 웨인트라웁(Fred Weintraub)이 이소룡에게 충고한다. 홍콩으로 돌아가서 여기 할리우드 제작사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장편 극영화를 찍어보라고. 결국 홍콩에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도 있고 해서, 이소룡은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고 홍콩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홍콩으로 돌아와 대성공한 뒤, 떠나다
당시 홍콩, 대만, 일본 등에서는 왕우(王羽) 주연의 《용호투(龍虎鬪, The Chinese Boxer)》(1970)가 대성공하며, 예전의 무협영화, 검술영화가 아닌, 맨손, 맨몸으로 싸우는 무술영화가 뜨고 있었다. 친구인 소기린도 이소룡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홍콩으로 돌아올 것을 권유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소룡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린 호넷》의 케이토 역이 중국인이라는 것이 홍보되었기에, 인기가 없어 한 시즌 방영에 그친 미국과는 달리, 중국식 제목은 《청봉협(青蜂侠)》이었지만, 홍콩에서 비공식적으로는 《Kato Show》로 알려질 정도로 성공했었다. 이소룡은 이후 자신이 막 홍콩에 돌아왔을 때, 홍콩에서 사람들이 그를 알아봐서 놀랐다고 술회했다.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이소룡은 홍콩 최대의 영화사인 쇼 브라더스(Shaw Brothers: 소씨제편창邵氏製片廠)로 가서 면접을 보았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웬 바짝 마른 건달 비슷한 놈이 미국물 먹었답시고 예의도 안 차리고 건들거리면서 들어와서는, 자기를 주연으로 해서 영화 찍으라고 해대니, 사장이 불쾌해 하면서 화를 내며 내쫓았다고 한다. 그런 이소룡을 잡은 게 쇼 브라더스에서 독립해 나와, 가화오락유한공사(嘉禾娛樂有限公司), 즉 골든 하베스트(Golden Harvest)를 세운 추문회(鄒文懷)였다. 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와 두 편의 영화계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이소룡은 《당산대형》(1971)으로 흥행기록을 세워 스타가 되었고,연이어 《정무문》(1972)으로 그 기록을 경신한다. 골든 하베스트와의 계약을 마무리한 이소룡은 협화전영공사(協和電影公司, Concord Production Inc.)를 설립하고, 스스로 각본, 감독, 주연, 무술지도, 제작까지 맡은 《맹룡과강》(1972)으로 다시 신기록을 세운다.
1972년, 골든 하베스트와 함께 《사망유희》를 기획한다. 그때 워너 브라더스에서 《용쟁호투》를 골든 하베스트와 합작으로 제작하자는 제안이 들어온다. 당시 이소룡은 스타시즈(Starseas) 영화사와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영화 《기린장(麒麟掌, Fist of Unicorn)》 때문이었는데, 이 영화는 그의 어릴 적부터의 친구 소기린이 주연한 영화로, 이소룡은 무술지도를 도와주기로 슬쩍 동의만 해주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제작사가 마치 이소룡 주연인 것처럼 홍보한 것. 소기린 역시 이에 분노했다고 한다.
《용쟁호투》 촬영을 마무리하고 몇 개월 후, 7월 26일 개봉을 6일 앞둔 1973년 7월 20일, 그의 애인이라고 소문이 파다했던 여배우 정패(丁珮 Betty Ting Pei)의 집의 침대 위에서 만 3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그녀는 이소룡이 두통을 호소해서 진통제를 주었는데, 이소룡은 그걸 먹은 후 잠든 뒤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3. 죽음과 그에 얽힌 소문
그의 갑작스런 죽음의 원인은 공식적으로는 복용 약품 부작용이지만, 부검의나 다른 전문가들에 의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는 등 상당히 논란이 많았기 때문에 복상사라느니 마약중독사라느니 등등 각종 소문이 무지하게 많다.
• 중국 무술계 또는 삼합회에서 보낸 암살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 쌍절곤 연습 중 급소를 맞아서 숨졌다.(…)
• 복상사다.
• 은둔 권법가와 싸움이 붙었는데 그 은둔 권법가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이소룡을 장풍으로 쏴서 죽였다. 이쯤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 이소룡 가문의 저주다.
• 이소룡의 친구였던 이준구는 누군가가 그를 살해한 거라고 주장했다.
• 쇼 브라더스에 스카우트되었다가 나중에 골든하베스트로 이적한 정창화 감독은, 이소룡을 붙잡아 두기 위해 제작자 레이몬드 초우가 미인계와 마약까지 사용하다 부작용으로 숨졌다고 주장했다.
• 아시아인이 할리우드에서 주연으로 성공하는 걸 용납할 수 없는 할리우드 백인우월주의자가 살해했다는 주장도 있다. 비슷한 맥락의 얘기는 《고르고13》에서도 나온다.
상당히 신화적인 인물이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버려서 허황된 음모론들이 양산됐다.
이소룡이 자신이 오래가지 않아 세상을 떠날 것을 예상했다는 주장도 있다. 《용쟁호투》 기획 이전부터 심한 두통을 호소했고, 기절해서 몇 시간씩 정신을 못 차린 적도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용쟁호투》 출연 당시 악당 두목 한을 맡은 석견에게, "아저씨(석견은 이소룡 아버지와 친구였음), 아무래도 제가 아저씨보다 먼저 죽을 것 같아요" 라고 했다고 한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죽기 몇 달 전에 거액의 생명보험을 들었고 아내에게는 내가 죽으면 프랭크 시내트라의 《My Way》, 블러드, 스웻&티어스의 《And When I Die》 등등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장례식 때 틀어달라고 했다. 실제 장례식 때 그가 좋아하던 노래들이 울려 퍼졌다.
2006년, 의학계 일각에서, '돌발성 간질로 인한 급사'(SUDEP)를 그의 사인으로 내세운 적도 있다. SUDEP는 그가 쓰러진 지 22년 뒤인 1995년 의학계에 처음 알려졌기 때문에 그의 사망 당시에는 제시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궁금해 하지만, 나는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기억하고 싶다.(People still wonder about the way he died. I prefer to remember the way he lived)"
주요 출연작
• 《그린호넷(The Green Hornet)》(1966) - TV 드라마로 명탐정 그린 호넷의 조수이자 운전수인 케이토(Kato) 역으로 출연. 당시 이소룡이 처음으로 맡은 큰 역할로 작중 내 비중도 높았으나대부분 검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녀야 했기에, 얼굴이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것을 꽤나 억울해 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린 호넷》이 유명한 작품으로 남은 것은 이소룡의 열연 덕분이나 다름없었다는 말도 있고, 《Kato's Revenge: featuring Green Hornet》이라는 색칠공부책이 나올 정도로 주/조연 전도가 심했다는 주장도 있다. 극을 휘어잡는 이소룡의 카리스마는 이미 이때부터 끼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조연인데 너무 튄다고 발차기를 못하게 윗분들이 제제를 가했다는 말도 있다. 이때 제작자가 이소룡을 하인 취급해서 같이 있던 여배우가 괜찮냐고 묻자, "겨우 저 정도에 열 받으면 내가 Bruce Lee가 아니죠"라고 대답했다 카더라.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후 이소룡이 대스타가 된 덕에 재평가 열풍 속에 새로 이런 말들이 덧붙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상기(上記)했듯 최초 방영 당시, 이소룡이 케이토 역으로 나온 시리즈는 한 시즌 방영으로 그쳤을 뿐이다.
• 《당산대형(唐山大兄, The Big Boss)》(1971) - 이소룡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각인시키는 것에 성공한 첫 번째 작품. 당시 홍콩에서 역대 흥행 1위이던 《사운드 오브 뮤직》을 제치며 319만 홍콩달러를 벌어들였다고 한다. 이소룡 작품치고 상당히 잔인한 묘사가 많고 이해가 안 되는 장면, 코믹스런 장면, 짧지만 이소룡의 베드 신도 있을 정도로 이소룡 작품들 중 희귀한 작품이랄 수 있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데, 그의 최초 주연작이었기에 그의 영향력이 클 수가 없었다. 감독은 무술영화를 많이 감독한 유명 감독, 라유(羅維)였는데, 그는 당시부터 촬영 도중 경마중계(…)를 듣는 등 태업을 일삼았고, 이로 인해 이소룡과도, 이후 성룡과도 결별한 것으로 알려졌다.
• 《정무문(精武門, Fist Of Fury)》(1972) - 여러 번 리메이크된 작품으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쌍절곤이나 괴조음 등이 등장한다. 추정제작비 약 10만 달러, 흥행은 홍콩에서 443만 홍콩달러(HK$ 4,431,423), 미국에서는 340만 달러.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경찰이 극장상영을 미뤄달라고 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성룡은 자신이 이 영화에서 이소룡의 발차기를 맞고 집 밖으로 날아가는 스즈키 관장의 대역을 했다. 영화에서는 전혀 얼굴이 드러나지 않아 이후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 《맹룡과강(猛龍過江, The Way of the Dragon)》(1972) - 콜로세움에서 척 노리스와 1대1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게임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패러디되었다. 추정 제작비 13만 홍콩달러, 흥행은 홍콩에서 530만 홍콩달러, 미국, 캐나다에서는 520만 달러.
• 《용쟁호투(龍爭虎鬪, Enter The Dragon)》(1973) - 이소룡이라는 배우를 전 세계에 알린 작품으로 워너브라더스사에서 배급. 85만 달러라는 저렴한 제작비를 들여, 홍콩에서 330만 홍콩달러, 미국에서 2,500만 달러, 전 세계적으로는 9,0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흥행기록을 수립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성룡이 엑스트라로 출연한 영화로도 유명한데, 이소룡은 이 영화를 통해서 성룡을 발굴해냈다고도 전해진다. 《정무문》에서 성룡은 이소룡에게 맞고 날아가 죽는 일본인 관장의 스턴트를 했었는데, 당시 한 사람이 장비 없이 날아간 거리로는 최고였고, 《용쟁호투》에서는 경비원 중의 한 명으로 등장했는데, 이소룡의 실수로 실제로 너무 세게 맞아서 부상까지 입자, 이소룡이 사과의 의미로 다음 영화에서는 성룡을 꼭 조연이라도 영화에 출연시켜주겠다고 약속까지 했을 정도로 성룡은 뛰어난 실력의 스턴트맨으로 유명해졌다는 설이 있다.
• 《사망유희(死亡遊戱, Game of Death)》(1973) - 무술고수들과 탑에서 벌이는 마지막 결전이 인상적인 작품. 사망한 이소룡의 대역을 했던 사람은 당룡이며, 원표도 참여하였다.
5. 절권도(截拳道, Jeet Kune Do)
절권도는 무술이라기보다는 개념에 가까운 것으로, 이소룡은 이 개념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싫어했으며, 심지어는 과학적인 길거리 싸움이라 부르려 했다. 개념 자체는 다분히 실전 격투기인데, 문제는 수련 체계가 제대로 잡히고 제자들이 어느 정도 실력에 다다르기 이전에 이소룡이 사망하는 바람에, 현재에는 상당히 복잡한 사정을 갖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이소룡은 어느 날 자신이 가르치던 도장에 온 도전자와 싸우게 되었다. 당시 중국인들은 비(非)중국인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이소룡을 못마땅하게 여겨 도전자를 보내곤 했다고 한다. 때문에 이때도 대수롭지 않게 승부에 임했지만, 상대방을 쓰러트리는 것에 3분이나 걸렸다는 것에 이소룡은 충격을 받고, 금방 승부를 내지 못한 것은 자신의 몸 상태가 최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생각, 웨이트 트레이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절권도 개발에 힘썼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모 다큐멘터리에서의 이소룡의 아내의 말에 따르면, 이소룡은 금방 싸움을 끝내지 못한 것은 절권도의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전면 개편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소룡의 아내, 린다 리의 증언도 때와 장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그녀의 문제인지, 그녀의 말을 전달하는 매체의 문제인지는 교차검증되지 않았음도 덧붙여둔다.
그러나 과도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척추를 크게 다쳤었는데 이후 무술 스타일을 변화시킨 것도 포함된다. 여담으로, 이 척추부상에도 부인인 린다의 증언이 있는데, 1970년 8월 13일, 과도한 중량으로 굿모닝 리프트 운동을 하다가 척추4번 천골신경에 심각한 손상이 왔다고 한다. 이로 인해 6개월간 입원하는 등 고통을 겪었고, 주위에 그 운동의 위험성을 열성으로 전파했다고.(…) 상당히 큰 부상이었던 듯한데, 주치의로부터 다시는 발차기를 할 수 없을 거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소룡은 꾸준히 재활하여 결국 부활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소룡의 주연작 다섯 편의 촬영기간은 모두 이 부상에서 벗어나고 1~2년 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운동 한 번 잘못해서 일어난 부상이 그렇게 큰일인가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자칫하다가는 허리가 뽀각날 수 있을 위험성이 데드리프트보다 높은 운동이니 함부로 하지 말자. 61kg으로 굿모닝을 하다가 일어난 일이라고 하는데, 이소룡 본인의 몸무게 만큼이다. 굿모닝 리프트를 해봤다면 알겠지만, 이걸 자기 몸무게로 반복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린다의 말에 따르면 평소에도 이 정도 중량으로 운동을 하긴 했는데, 어느 날 준비 운동 없이 웨이트를 하다가 허리운동을 할 차례가 되어 평소처럼 굿모닝 리프트를 했는데, 8번째 동작에서 뚝하는 소리가 체육관에 울리더니 그대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흠좀무. 재활운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동양철학 책을 읽곤 했다고.
수련한 무술들과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동적인 방어보다 능동적인 공격으로 우선권을 잡고 최대한 빨리 상대를 쓰러트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이소룡은, 곡선보다 직선, 복잡함보다 단순함을 강조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간단한 예를 들면, 손목이 잡혔을 때에 팔을 비틀어 꺾거나 몸을 움직여 빠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발을 밟거나 낭심을 차버리는 식으로 간략하고 경제적인 움직임을 선호한다.
6. 현실적인 평가
그가 영화인으로서 보여준 모습은 지금도 회자되고, 철학적 면모는 물론, 웨이트 트레이닝을 무술에 도입한 선구자라는 말도 있다. 그의 실제 무술실력은 아직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떡밥이다. 그리고 철학적 면모라는 것도 냉정하게 검토하면 그리 개운하지는 않으며, 웨이트 트레이닝에 관해서는 선후가 뒤바뀌거나, 왜곡 혹은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 영화 속의 인상적인 모습과 각종 대중매체에서 비롯한 유명세 때문인지, 그는 최강자 논쟁에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소룡 vs'로 검색해보면 그 떡밥의 위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키보드 워리어라는 말이 이소룡 최강론을 주장하던 사람들 때문에 나왔다고 할 정도이다. 항목 참조.
6.1. 철학가
그의 철학은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며, 생각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행동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처럼, 능동적인 삶을 더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물이 되십시오와 같은 말을 미국의 방송에서 언급하며, 유연한 사고와 행동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후술(後述)하겠지만, 그의 사후에 재조명된 것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양철학, 특히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고도 하는 도가(道家)의 '상선약수(上善若水)'는 그렇게 이소룡의 입을 통해 북미에 전파되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학자들이나 전문가, 명상 수련자, 독서가 등에게는 이전부터 도가사상 등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관련서적들도 여러 선진국들에는 이미 많이 출판되어 있었다. 다만 이소룡이 영화배우로 인지도가 높았던 덕에, 이소룡을 통해 북미(北美)의 일반대중들에게도 도가사상이 알려졌다는 게 맞다. 이에 이소룡은 철학가/철학자라는 주장도 나오는데, 그는 노장사상(老莊思想) 등을 자신의 무술에 맞게 인용하거나 각색했을 뿐, 새로운 해석을 하거나, 새로운 철학을 정립했다거나, 철학적 연구 성과를 낸 사람이 아니다. 학원가의 유명 과학강사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공인된 연구 성과가 없으면 그를 과학자라고 하긴 곤란하듯, 그를 철학가라고 칭하는 것은 무리다. 다만 당시에 무술가나 영화배우로서는 드물게도 철학적인 면모가 있는 사람이었다거나, 무술 철학가라고 하는 게 좀 더 공정한 평가일 듯. 그의 저서나 사후(死後) 출판된 책들을 읽어보면, 동양철학을 새롭게 해석했거나 정리한 것과는 거리가 있으며, 자신의 이상, 주장, 기술에 맞는 동양철학의 경구(警句)나 구절들을 인용하거나 짜 맞춘 정도이다.
동양철학 전공자나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1960~80년대 동북아(東北亞)권에서 정규교육을 받았거나, 그 방면에 좀 관심 있는 사람들, 그리고 북미, 북유럽 지역에서도 전문연구가나 독서가, 명상 수련자 등에게는, 이소룡이 말하는 철학적 경구(警句)들은, 대부분 다 한 번쯤은 들어봤거나 이미 아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북미(北美) 대중들에게는 당연히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이런 철학적 면모가 조명된 것은, 이소룡의 죽음 이후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소룡 이전부터 시작된 동양무술 열풍에 이어, 이소룡이라는 불세출의 스타의 등장 덕에 부쩍 더 커진 무술시장이지만, 죽은 이소룡이 신작(新作)을 낼 수는 없기에, 각계의 반응은 크게 아래와 같이 나눌 수 있을 것이다.
3번은 긍정적인 면도 있다. 이소룡 본인이 기록, 정리에 꼼꼼한 것도 있었지만, 이런 상업주의로 인해 이소룡 관련 자료, 사진, 영상 발굴이 이어져, 관련 동영상과 사진이 넘쳐나게 하는 결과를 낳았으니까. 최고 전성기에 급사(急死)한 동양의 무술영화배우라는 소재는, 특히 서구권의 대중들에게는, 동양적이고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덧씌워 홍보전략으로도 삼기에도 안성맞춤이었으리라. 게다가 당시 북미에서는 대형 소매 체인점 등의 등장과 함께, 이전까지 사치품 취급 받았던 카메라, 컬러TV 등이 1960년대부터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던 호재도 있었기에, 이소룡 관련 영상물, 출판물, 잡지 등이 쏟아져 나왔다. 이소룡의 대표적인 저서(著書)라는 《절권도의 도(Tao of Jeet Kune Do》의 첫 출판은 1975년(이소룡의 죽음은 1973년)이란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동양무술 + 이소룡 + 오리엔탈리즘 + 북미 절대다수 대중들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었을 동양철학 = 좋은 신상”이었을 거라는 게 상식적이다. 그리고 이는 미국 등에서 일어난, 서구의 물질문명에 대한 반성과 함께, 동양의 정신문화와 동양철학을 배우자는 움직임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최근까지도 이러니까.
이는 이소룡 유족(遺族)의 이해(利害)와도 부합되는 면이 있었다. 그의 부인이었던 린다는 남편의 유산(遺産) 및 재산관리에서 자신이 손을 떼던 2001년까지 이소룡의 절권도를 홍보하는 데 열심이었고, 지금은 그녀의 딸 섀넌 리가 그 재산을 관리하면서, 그녀의 남편 키슬러(Keasler)와 함께 비영리단체인 이소룡 재단(Bruce Lee Foundation)을 운영하며, 무술에 대한 이소룡의 철학과 철학에 대한 그의 정리노트 등을 홍보, 보급하는 데에 열심이다.
각자의 사정과 이해타산(利害打算) 등이 서로 어우러져 만개(滿開)한 이소룡 사후(死後)의 상업주의는 북미에서 이소룡 신격화, 영웅화를 불렀고, 한국 등에서 인터넷 시대가 열려 이런 정보가 들어오면서, “(저 대단한) 서양 백인들이 이소룡을 이리 높게 평가하네?! 이소룡은 정말 대단한 무술가이자 철학자였구나” 하는 일부 심리에, 이종격투기가 인기를 끌던 시류와 합쳐지면서, 북미에 비하면 한참 뒤늦게, 우리나라에서 이소룡 신격화 열풍이 일기도 했었다.
그 발단과 과정은 어쨌든 간에, 그 결과, 이소룡은 여러 분야에 영감(靈感)을 준 셈이 되었다. 무술인은 물론, 배우, 영화감독, 음악가, 프리러닝 선수들까지 "나는 이소룡의 영향을 받았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북미권에서는 액션스타는 물론 정신적인 스승으로도 인식되기도 한다. 한 예로, 기타리스트인 잭 와일드가 기타 잡지에서 "이소룡이 말하길, '자주 쓸 동작이 아니면 잊어버려라'라고 했다" 라며 인용하는 등 이소룡의 문화적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2005년에는 보스니아에서 내부의 민족 갈등을 치유할 상징적 인물로 이소룡을 선정하여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 조선일보 기사보기 그러나 하루 만에 훼손당했고, 그 뒤로도 총격을 당하기도 하고 낙서와 오물이 버려지면서 동상을 철거해야 했다고 한다. 사실 상관도 없는 동양인 동상은 왜 만드냐는 반발이 엄청나게 거셌다.
또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로서 추앙되기도 했다. 실제로 어록 중에 적극적인 삶이나 자신에 대한 구속을 푸는 자유 등을 중시하는 말이 많은데, 이는 특히 북미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말이 많기에 영감(靈感)의 보고(寶庫)로 여겨지기도 한다. 최소한 대중에 널리 알려진 무술 철학가로서는 공이 크다. 그러나 다른 무술 철학가들은 없었고, 있었다 해도 이소룡보다 수준미달이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수준이 더 뛰어난 다른 이들도 있었지만, 이소룡은 베스트셀러였고, 다른 이들은 망했어요 수준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6.2. 실전 무술가?
무술적인 면을 보면 그는 가라데 대회에서 공연시간을 얻어 두 손가락만으로 한팔 팔굽혀펴기를 하거나, 원인치 펀치를 시전한 것이 유명하다. 당시 롱 비치 무술대회 등에서의 시범영상이나 사진 등을 보면 두 손가락으로 하고 있다. 다만 개인수련 등에서 두 팔로 할 경우는 한손가락만으로 하기도 했다. 참고로 극진 가라데 등의 실력자들 중에서는 헤비급 체중인데도, 한팔, 한손가락만으로 팔굽혀펴기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 연예인 장혁도 방송에서 한팔 엄지로만 팔굽혀펴기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소룡 대련 영상이나 영화를 보면, 상대의 공격을 물처럼 자연스레 받아넘기는 그의 실력을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승부를 가리는 대련이나 시합이 아닌, 시범/시연(試演)으로 실제 기량을 판단하는 건 좀 곤란하다. 또한 《다이 하드》 시리즈가 브루스 윌리스의 실전능력(?)을 증명하는 근거가 될 수 없듯이, 이소룡의 영화를 근거로 사용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결론부터 정리하자면 이소룡은 싸움에 능한 편이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인과 비교해서프로 파이터들과의 우열은 알 수 없다이다. 매일 규칙적으로 시행하던 실전적인 연습, 몸을 학대하는 것에 가까운 웨이트 트레이닝 등은 그가 훈련된 격투가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증명이 가능한 건 딱 거기까지다. 이 이상으로 그가 강한 파이터라느니, 프로 파이터를 이길 수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따져볼 때 이소룡의 강함을 증명하려고 하면, 무엇보다 증거자료가 부족하다 못해 없다고 해도 될 정도다. 이소룡의 강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근거는, 이소룡의 지인들에게서 나온, “이소룡이 누구와 싸우는 것을 봤는데 대단하더라” 식의 카더라에 불과하고, 그의 영상 역시 기술 시연(試演: 시범, 공연, performance)일 뿐이다. 심지어 영화 속의 모습을 예로 들면서 이소룡의 강함을 주장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소룡이 활동하던 60년대엔, 이미 많은 격투기가 체계를 잡아가거나 체계를 완성한 시점으로, 근대 격투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복싱은, 20년대부터 라이트급(이소룡의 체급) 세계 챔피언전을 치를 정도였다. 레슬링도 20세기 초부터 체계적으로 전해져왔다. 복싱과 레슬링은 19세기부터 프로대회는 모두 기록되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본에도 미후네 코죠나 사이고 시로, 기무라 마사히코 등의 유도 영웅들이 있었고, 1961년에는 최영의가 자신만의 가라데를 완성하여 극진회관을 설립했으며, 그 이전부터 마에다 미츠요를 비롯한 많은 무술가들이 세계각지에서 본인의 무술을 홍보하거나, 실제 시합으로 자신이 강자임을 증명하려 해왔다. 태국 같은 동남아에서는, 소년 시절부터 무에타이나 렛웨이, 프레달 세레이 등을 익혀 온 선수들이 목숨을 걸고 치고받고 있었고, 브라질에선 그레이시 가문이 타 무술 선수들을 박살내고 있었으며, 다른 곳에선 발리 투도의 초석을 쌓고 있던 시대였다. 이렇듯, 격투기를 업으로 삼고, 오직 승리만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며, 피 튀기는 실전과 시합을 하던 무술가, 격투가들이 이미 즐비하던 시대에, 사실상 영화배우로 활동하며 공식 전적(戰績)은 없는 이소룡을 최강자라 칭송하는 것은 다른 격투가, 무술가들에 대한 모욕이다.
이소룡과 교류가 깊었다는 미국의 무술가, 조 루이스(Joe Lewis, 1944~2012)를 이소룡이 가르쳤다든지, 미국의 많은 가라데인들과 교류할 때 그들은 이소룡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든지 하는 말도 전해진다.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당시 이소룡이 교류한 사람들은 진짜배기 실력자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최영의의 초인적 활약 이후 동양무술 열풍이 불었지만, 그때만 해도 최영의가 실제 북미의 실력자들과 교류를 가진 적은 거의 없었다.
미국식 킥복싱 선수로 일류 수준에 오르기도 했던 조 루이스는, 사실상 독학으로 무술을 시작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독학으로 시작한 단 22개월의 수련만으로, 1966년, 제1회 전미(全美) 대회에서 우승했고, 1966~1969년, 미국 챔피언이었다. 척 노리스를 이긴 적도 있다. 그러나 이후 척 노리스는 조 루이스를 꺾고, 빅터 무어, 스티브 샌더스 등 당시 유명 무술가들을 패배시키며, 조시학(S. Henry Cho, 1934~2012)이 주최한 무술대회(All American Open Tae Kwon Do/ Karate/ Kung Fu Championship)에서 2회 연속 우승하기도 했다. 이소룡은 거기에서 처음 척 노리스를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척 노리스는 한국에서의 군복무 시절, 태권도(당시에는 당수)를 2년 남짓 배운 것에 불과했고, 당시 척 노리스는 이소룡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고 평가되었다. 그런 조 루이스, 그리고 그보다 실력이 낮은 무술가들에게는 이소룡이 고수로 보였을 테니, 절로 고개를 숙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는 극진공수도 미국 지부장으로 조일삼(오오야마 시게루大山茂, 1936~2016)이나 나카무라 타다시(中村忠, 1942~) 등의 일류 가라데가들이 있었으나, 이소룡이 그들과 교류한 흔적은 없다.
물론 UFC 헤비급 챔피언 출신, 바스 루텐은 인터뷰에서, 이소룡이 UFC에 데뷔하면 처음에는 당연히 패배하겠지만, 시간을 주어 현대식 훈련을 한다면 경량급에서 꽤 영향력을 보여줄 것이라고 얘기한 바영상 링크 있는데, 《용쟁호투》에서 초반에 보여준 암바는 정확히는 암바가 아니었고, 그런 부분을 보강하면 잘 싸울 것이라고 평가했었다. 그런데 생전 이소룡은 스스로 강함을 추구했고, 자신의 근육이나 기술 등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자랑하는 걸 즐겼다는 증언이 많은데, 정작 진짜 격투에서의 강함을 증명하는 실제적인 행위, 즉 대회 출전, 공식 시합 등을 단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없었으며,
이소룡은 여러 격투기를 혼합하여 자신만의 격투기를 만들어낸다는 사상을 통해 현대 격투의 토대를, 자신의 배우로서의 유명세 덕에 대중들에게 공개적으로 인식시킨 결과가 되었다는 것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지, 이소룡 자신의 강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토대를 만든 게 이소룡이 최초라거나, 이소룡 한 명뿐인 것도 아니다. 이소룡이 배우로서 유명해져 다른 격투가들보다 인지도가 높았을 뿐이다.
이소룡의 유명세와 그의 관련 콘텐츠를 팔아먹으려는 상업주의의 합작으로, 그의 저서나 작업 등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졌을 뿐, 그보다 더더욱 앞서거나, 더 뛰어난 토대를 구축했던 무술가들이 즐비했던 것 또한 현실이다. 다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소룡이 아닌, 그런 선구자들이 구축한 토대 위에서 현대 격투기가 꽃을 피웠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 격투와 실전을 치르며, 실제 무술가와 무술, 격투계에 여러 영향을 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소룡과 그들은 대중적인 인지도에서 달랐을 뿐이다. 물론 이소룡이 그들 중 몇몇에게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그런 주장의 큰 근거는 데이나 화이트 같은 UFC 관련 인물들이 이소룡을 현대격투기의 아버지라고 간간히 코멘트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소룡의 북미(北美) 등지에서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홍보효과를 위해 그를 언급한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UFC 등이 주류에 남기 위해 벌이는 악전고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반론이 있다. 이소룡이 그 모든 토대를 만든 건 아니지만, 이소룡 덕분에 일반인들이 그런 격투기를 쉽게 받아들이게 되었으므로 그 공이 크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는 거리가 좀 있다. K-1이나 프라이드, UFC 등이 방송 등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고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후반이다. 근데 이소룡이 죽은 것은 1973년이다. 20년도 더 지난 후에 그의 업적이 꽃을 피웠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 그리고 방송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전술(前述)했듯, 현대 이종격투기와 비슷한 경기나 대회 등은 이소룡 이전에도 세계 곳곳에 있었다.
6.3. 웨이트 트레이닝의 선구자
1960년대 당시 일반 대중들에게는 미지의 분야였던 웨이트 트레이닝을 이소룡이 무술 훈련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것은, 적어도 일반인들에게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소룡의 몸은 아직까지도 남자들이 선망하는 멋진 몸의 좋은 예로 꼽히며, 보디빌더들 중 이소룡의 몸에 감명 받아 보디빌딩을 시작한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 아놀드 슈워제네거라는 말이 인터넷 상에 널리 퍼졌기도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는 이소룡을 띄워주려다 보니 왜곡된 게 많다. 단적인 예로, 현대 보디빌딩의 아버지나 마찬가지인 유진 샌도우(Eugen Sandow: 1867~1925)가 중량을 이용한 훈련을 정립하여 보급한 것이 1880~90년대였다. 항목 참조. 당시 《유진 샌도우의 아령 교범》 같은 팸플릿은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당시 많은 청년들이 이 교재를 보면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는 기록이 많다. 그리고 그의 고향인 독일(당시 프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초빙되어 간 그는 엄청난 인기를 끌어, 수많은 남성들과 여성들에게 선망과 흠모의 대상이 된 때가 1890년대이다. 여성들에게는 현대의 팝스타나 영화배우를 떠올리게 하는 인기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회사를 차리고 체육관도 만들었다. 그리고 보디빌딩 잡지까지 만든 것이 1898년이다. 1901년, 런던에서 그는 보디빌딩 대회를 주최했으며, 그 대회의 심사위원으로는 코난 도일까지 초청되었다. 1911년에는 영국 국왕의 체육 특별코치로 위촉될 정도의 명성을 누렸다. 세계 최고 권위의 프로보디빌딩 대회라는 ‘미스터 올림피아’ 수상트로피가 그의 모습을 형상화했을 정도이다. 참고 그리고 그의 저술 일부는 아직까지 출판되고 있다.
그리고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발굴했고, 미스터 올림피아 대회를 출범시켰으며, 《머슬 앤드 피트니스 앤드 플렉스》 등 보디빌딩 관련 출판물도 다수 창간했던 조 와이더(혹은 웨이더 Joe Weider 1920~2013)가 국제보디빌딩연맹을 창설한 것이 1946년이다.
이소룡은 기교와 형식에 빠져 기본적인 신체단련을 게을리 하는 전통무술가들에게 몸을 가꾸라며 질타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이소룡을 띄워주려다 보니 지나치게 왜곡된 면이 있다. 사실 근육과 단단한 골격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체를 단련한 사람들의 필수요소였고, 엉터리들을 제외한, 정통의 무술문파 대부분에는 석쇄공(石鎖功), 천근력(千斤力), 석련공(石練功/石鍊功), 석단공(石担功) 등등 이름은 문파마다 다르지만, 3~40kg 정도 되는 역기를 한 팔로 들고 이리저리 돌릴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을 기본 단계에서 통과해야만 하거나, 각종 웨이트 트레이닝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훈련법을 정말 지독하게 반복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현대 웨이트 트레이닝에서 피스톨이라고도 하는 훈련법은 단각굴신(單脚屈伸) 등의 이름으로 행해진, 많은 동양무술의 필수 수련법이었다. 또한 현대의 코어 트레이닝 어쩌고 하는 훈련법들은, 거의 모든 전통의 무술문파들에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과정이었던 경우가 많다.
실제 정통의 제대로 된 문파에서는 이런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기술을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다만 동양무술 열풍에 편승한 사이비들과, 편하게 강해지려고 하는 수련생들이 결합되어 이런 단련법이 누락되어 전해지는 등 크게 왜곡된 탓이다.
이소룡이 유명해지기 이전, 이미 실제 시합에서의 강함으로 전 세계에 유명했던 최영의는 벤치 프레스나 스쿼트(squat) 등의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한 근육단련의 중요성을 굉장히 강조했다. 실제 극진가라데에서는 승단 심사에서 100~120kg 벤치 프레스가 포함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일반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은 데 비해, 이소룡은 영화배우로 워낙 유명해졌기에, 그의 사후(死後)의 상업주의 열풍 덕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접목한 그의 훈련법을 일반대중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사실 현대에도 근육이 있으면 몸이 둔해져서 싸움을 못한다는 개드립을 치는 무술가가 적지 않은 판이다.
근육이 많으면 많을수록 몸은 둔해지기는커녕 더 빨라진다. 애초에 인체의 속도라는 개념 자체가 '근력으로 몸을 움직이는 속도'이다. 물론 아놀드 슈워제네거처럼 등 뒤의 검집에서 칼도 못 뽑을 정도로 근육량이 많으면 좀 곤란하겠지만 그런 경우에서조차도 문제가 되는 것은 약간의 유연성 희생이지 속도가 아니다. 실제 《코만도》 영화를 찍을 때, 겉보기와 달리 매우 빠른 아놀드의 움직임을 보고 스탭들이 다들 놀랐다 한다. 그리고 무술가라고 하기에는, 근육은커녕 지방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아 보이는데도 유연하고 기민한 움직임을 보여준, '날아다니는 돈까스'의 원조 홍금보나,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듯한 보디빌더형 근육으로, '중국의 헤라클레스'라는 영화 제목 겸 별명까지 얻은 볼로 영(Bolo Yeung: 양사楊斯)같은 무술가들이 좋은 예이다.
물론 근육이 많을수록 빨라진다면, UFC헤비급이 가장 빠르고 플라이급이 가장 느리다는 말이 된다. 달리기도 힘들 비리비리한 몸보다는 적당한 근육을 붙여주는 게 속도가 빨라지지만, 그게 어느 한도를 넘어가버리면 상대적으로 느려지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격투가가 상위체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증량(增量)을 할 때, 속도 손실을 최소화하고 증량하면 성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만 수준에 오른 격투가들이라면 지금까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와 기술에 적합하게 근육이 짜여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증량한다면 아무래도 속도 손실이 좀 있는 건 당연하다. 물론 위력은 증가한다. 근육이 붙으면 몸이 둔해진다는 말은 아무래도 격투가들이 증량하면 속도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또한 보디빌더처럼 둔해 보이는 근육덩어리들을 보고 나온 얘기인 듯한데, 이건 어디까지나 이미 적당한 근육이 있는 파이터들의 예니까 그런 것이지, 비실한 일반인 입장에선 적당하고 탄탄한 근육을 갖게 되면 속도가 증가한다. 실제 벌크업을 통한 증량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속도보다는 지구력, 흔히 말하는 체력, 혹은 스테미너다. 헤비급 중에서도 평체가 110kg대인 선수와 120kg를 딱 맞춰서 계체하는 선수들이 있는데, 평체가 110kg대인 선수들이 무리하게 증량해서 평체를 130kg대에 맞춰서 경기에 나오면, 가장 눈에 띄는 게 체력저하와 몸이 뻣뻣해지는 거다.
이소룡은 근력을 키우기 위해 당시로서는 꽤나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한 모양. 당시에는 단백질 가루나 비타민제 같은 게 거의 없어서, 일일이 여러 가지 재료를 먹어보며 그 효과를 실험했다고 한다. 그의 중국인 친구들은, 그가 집에서 생고기와 계란 등을 갈아서 먹는 걸 보고 기겁했다고.(…) 과일이나 한의학에서 쓰는 약초 등을 섞기도 했다고 하는데, 린다 부인은 도저히 먹을 엄두가 안 나서 입에 대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근육을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 전기충격을 가하는 방법도 썼다고 하는데, 이는 후에 북미에서 손상된 근육을 회복시키는 치료법으로 쓰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소룡 이전에도 비슷한 방법이 있었고, 이소룡 역시 의료계에서 논의되고 사용되던 방법 등을 보고, 이를 응용하여 자신의 몸에 실험해본 것이다. 이를 거꾸로 뒤집어서 주장하면 곤란하다. 여하간 자신의 육체능력 향상을 위해, 당시 보통 사람은 잘 안하는 방법을 이것저것 시도해본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로 인한 부작용도 꽤 겪었다고도 한다.
이소룡은 몸집을 불리기보단, 자신의 몸무게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한도에서 근육의 강함을 키워 몸매를 가꾸는 방법을 연구했고, 속도와 힘이 가장 조화를 이룬 몸무게라고 스스로 판단한 61Kg 정도의 몸무게를 항상 유지했고, 등근육이나 팔뚝근육 등의 강화에 집중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근육에 대한 그의 이론이나 주장을 맹신해서는 안 된다. 이소룡도 그걸 믿었다기보다 실험삼아 행한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그는 체육학에도, 생리학에도, 의학에도 문외한이었던 사람이다. 게다가 당시 조 웨이더 등을 비롯한 선구자들이 웨이트 트레이닝의 방법론을 정립시켰던 때였지만, 아직 체육생리학적으로 완전히 검증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시도들 중에 의미 있었던 것도 있지만, 틀린 것과 터무니없는 것들이 많다. 당연하다. 그는 생물학자도 의학자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영화 속 모습에서 감명 받은 것인지는 몰라도, 이소룡에 대한 왜곡된 환상으로 치달은 결과, '실전근육', '압축근육' 같은 떡밥이 탄생했다. 이소룡은 보통 사람 몇 배나 되는 밀도의 압축근육을 가진 사람이라는 주장 자체가 의학적, 생물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유사과학이다. 물론 의학적, 생물학적으로 근형질과 근원섬유의 발달은 구분되며, 선천적으로 일반인 대비 근원섬유 밀도가 높은 사람도 존재하기는 한다. 근력은 근육 크기가 아니라 근원섬유와 근신경의 발달에 비례한다. 그리고 근밀도, 골밀도 등은 선천적으로 혹은 생활환경, 영양상태, 단련상태에 따라 개인차가 매우 크다. 이소룡이 절대근육이란 것은 아니지만 일반인과 플란체푸시업을 몸풀기정도로 하는 체조선수들의 근력을 비교해보면 절대근력 소리가 나올 수 밖에 없다. 근비대 위주로 훈련한 보디빌더와 체조선수를 비교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만큼 훈련의 방향이 근력에 치우쳐 있다면 사람들의 시선에는 '절대근력 처럼' 보일 수 있다. 특히나 그 시대에는 근력훈련이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가능성이 높다.
동일한 크기의 근육에서 더 큰 힘을 낼 수 있을까? 이는 이미 몇 십 년째 스트렝스 관련 스포츠의 이론에서 고찰되어왔다. 역도 경기에서는 두 선수가 같은 무게를 들어 올리면, 체중이 단 1kg이라도 가벼운 사람에게 메달이 돌아간다. 체중은 격투기에서도 민감한 문제이다. 권투는 플라이급(48kg이상~51kg미만)이면 플라이급끼리만 경기를 하지, 51kg만 넘어도 밴텀급이 되어 플라이급과는 경기를 하지 않는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정말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체중 2~3kg차이가 이렇게 중요하게 취급된다.
그런데 이소룡과 관련해서 압축근육이라는 말이 나오면, 위와 같은 고찰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이소룡 광신도들의 작품이라는 게 설득력이 높다. 이소룡의 근육은 압축근육이기 때문에, 60kg의 체구로도 100kg 이상의 효도르 같은 격투가를 이길 수 있다는 그들의 믿음을 정당화하려고 만들어낸 개념이라는 게 정확할 것이다.
보다 과학적으로 정리하면, 단련에 대해 지식과 견문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는, 체중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이 엄청나게 센 것으로 보였다 정도가 정확할 것이다. 다수 일반인들에게는, 120kg의 데드리프트를 하는 사람도 괴력의 소유자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파워리프팅 챔피언들의 경우, 여성도 70kg대 체중에서 250kg 이상의 기록이 나온다. 체중 79kg의 아네타 플로어첵의 경우, 스모데드리프트로 250kg을 들어 올린 바 있으며, 바벨 높이를 높인 경우 310kg까지 들어올렸다. 스트렝스 스포츠도 아닌 유도선수 최민호의 경우, 체중 65kg으로 데드리프트 230kg을 들어 올린 바 있다. 그러므로 근력단련이 흔치 않던 과거에, 이소룡이 60kg대의 몸무게로 200kg 이하의 무게를 들어 올렸다 하더라도, 당대 사람들이나 현대의 일반인들에겐, 수 체급 위의 힘을 가진 '절대근육'으로 보일 수도 있다.
비슷한 예로 기계체조 관련 훈련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플란체 푸쉬-업 등을 몸 풀기로 하지만, 까마득한 아랫단계인 스트래들 플란체조차도, 이런 데에 지식과 견문이 없는 사람들이 보면 '불가능한' 자세로 보일 수도 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말그대로 '절대근육', '압축근육' 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
이소룡의 근원섬유 밀도가 일반인보다는 많이, 취미로 운동하거나 무술을 하는 사람들보다는 조금 높았을 가능성은 있다. 사실 파워리프터나 그리퍼, 스트롱맨, 역도선수 등이 행하는 근력 위주의 훈련은 근형질보다 근원섬유와 근신경을 발달시키므로, 근비대 위주의 보디빌더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더 작은 크기의 근육으로도 더 강한 근력을 낸다. 최상급 선수들이 지방을 찌우는 것은, 그들이 다루는 중량의 시합에서는 추가된 지방의 무게로 인한 페널티보다, 지방의 부피로 인해 생기는 역학적(力學的) 이점이 더 많기 때문이다. 발달한 근육 위에 지방을 찌워 근육이 커보일 수 있지만 결국 지방을 찌운 것이다. 스트렝스 스포츠 선수들은 근비대훈련을 전혀 하지 않는다. 또한 역학적 이점이라는 것은, 근력이 세졌다는 것이 아니라 근력이 같더라도 출력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같은 근력으로 더 큰 무게를 들어 올리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근력위주 훈련을 하더라도 인간의 생체구조상, 겉보기에 날씬해 보이지만 누구도 감히 따르지 못하는 엄청난 파괴력이나 괴력을 뿜어내는 사람이 이소룡이었다는 주장은 판타지이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견문이 짧은 일반인들의 눈에, 이소룡이 자신의 체급을 한참 뛰어넘는 근력을 가진 것으로 보여서 그런 말이 후대에 덧붙여졌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또한 근력 자체뿐만이 아니라, '근력으로 착각되는 퍼포먼스'의 관점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같은 체중이더라도 키가 작을수록 신체의 지렛대(모멘트-암moment-arm / 레버리지leverage)가 짧고 근육의 길이도 짧다. 그러므로 같은 출력을 내는 데 필요한 근력과 에너지가 적다. 같은 체중임에도 키 작은 사람들이 기계체조 등의 퍼포먼스에 능하며 리프팅 기록도 좋은 것은 이 때문이다. (키가 작은 사람이 골격근의 양이 조금 작아도 마찬가지다. 근육의 출력은 양보다는 발달의 방향의 차이이다. 키가 큰 사람이 작은 사람과 같은 퍼포먼스를 낼 정도로 구성이 비슷한 골격근의 양이 차이가 나려면 엄청난 차이가 필요하다.) 다른 요소들도 있지만, 작은 키 역시가 큰 역할을 한다. 이소룡의 경우 키가 작은 편이므로, 이로 인해 실제 근력이 아닌 '출력 자체'가 상대적으로 강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최근 국내 무술 지도자 몇몇에 의해 퍼지고 있는, '같은 힘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들 역시 고려해야 한다. 그런 '신체사용법'의 경우, 대부분이 중국, 일본무술에 기인하며, 권투, 중국무술 다수를 익히고 절권도를 체계화 시킨 이소룡의 경우 상당히 효율적으로 몸을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당대에 흔치 않던 '스트렝스 훈련'과 '짧은 몸으로 인한 역학적 이점', '효율적 신체사용'의 세 요소가 합쳐져 나오는 퍼포먼스(혹은 결과치)가 '스트렝스 스포츠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의 시각에서는, 엄청난 힘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로 보였을 수도 있다.
현실은 이렇다. 상술(上述)했듯, 이소룡 이전에도 보디빌더는 존재했고, 이미 웨이트 트레이닝도 대단히 체계화되어 있었다. 이소룡이 최초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도입했다거나 크게 발전시켰다는 게 아니라, 당시에 동양무술과 웨이트 트레이닝을 이질적으로 보던 북미지역의 대중에게, 그 두 가지가 대립되는 것이 아닌, 상호조화적인 관계라는 것이, 이소룡의 유명세로 인해 비교적 잘 알려졌다는 것이 맞다.
여러 선구자들에 의해, 웨이트 트레이닝이 꽤나 알려진 이후에도,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힘과 근육을 키운다는 게, 무슨 속임수 같은 것으로 여겨지던 시대나 문화권도 일부 있었지만, 사실 2,500년 전 이집트에서는 청년들 사이에 무거운 중량을 드는 운동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고, 기원전 6세기 무렵, 육체단련이 미덕이던 그리스에서는 송아지를 어미 소가 될 때까지 매일 어깨에 짊어지는 훈련의 중요성과 효과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렇듯 고대, 중세를 막론하고, 무력을 사용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역기와 비슷한 형태의 도구나 여러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옮기거나 하는 훈련이 있었다.
그리고 경험과 시행착오 등을 거쳐 정립된 것들이 각국의 전통무술의 단련법 등에 많이 녹아있다. 저마다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제대로 된 전통무술문파, 유파들은 어떤 형태로든 웨이트 트레이닝과 연관된 훈련을 강조하지 않는 곳이 드물다. 이소룡 시대에 북미 등지에 범람했던 독학파나 사이비들이 아닌, 이소룡이 유명해지기 이전, 심지어는 출생 이전에 실전이나 시합을 통해 검증된 진짜 무술가들이나 운동선수들의 단련법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다.
사이비나 엉터리들은 이런 것들을 모르기도 했고, 스스로도 하기 싫어했을 터이며, 힘든 수련을 기피하게 마련인 수련생들로부터 돈을 우려내기 위해 이런 것들을 필요 없다고 하거나, 신비주의 등을 활용해 왜곡한 결과물이, 당시 동양무술 불모지(不毛地)였었던 북미나 유럽 등지에 널리 퍼졌을 뿐이다. 실제 극진공수도의 최영의 총재라는 불세출의 고수의 초인적인 활약을 통해, 미국 등지에서 동양무술 열풍이 분 것은 이소룡이 유명세를 타기 이전이다. 최영의 총재 이후 미국 대륙으로 건너간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무술가들 중 실제 격투나 시합을 통해 강함을 입증한 고수들도 있었기에, 동양무술에 대한 열광은 더 커졌다. 단적인 예로, 당시 영화 등을 통해 유명해진 철포삼(鐵布衫)을 가르쳐준다는 한 중국무술인에게, 5만 달러라는 수련비를 가져온 백인 수련생이 있었을 정도다. 당연히 돈이 되기에 수많은 엉터리들이 난립한다. 최영의 총재도 이런 엉터리, 사이비, 사기꾼들에 대해 여러 차례 개탄한 바 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실력을 신비주의와 페쇄주의로 눈가림하곤 했다. 이런 것이 60~70년대 미국의 상황이었고, 이 엉터리들로 인해 잘못된 정보가 퍼지는 것도 당연했다. 예를 들어 1970년대 홍콩무술, 무협영화의 인기와 함께 중국무술이 일본에 널리 보급될 때는, 중국의 북파무술은 근육단련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까지 일각에서 나올 정도였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된, 일본인 무술연구가 마츠다 류우치(松田隆智, 1938~2013)와 오오야나기 마사루(大柳勝)가 저술한 칠성당랑권 관련 무술서적에서도 비판적으로 평할 정도로 심했다.
요즘도 영화, 만화 등에서 종종 나오는데, '악역'인 격투가나 운동선수는 뭔가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과학적 훈련"을 하고, 주인공은 대자연 속에서 통나무를 톱질하고 도끼로 장작을 패는 등의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시적이지만 환경친화적(?)인 훈련을 한 주인공은, 온갖 인공적이고 비자연적인 훈련을 한 악역을 물리치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 영화 《록키》를 들 수 있겠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이 되면서, 각종 스포츠에 과학적 분석이 도입되었고, 이는 스포츠의학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오늘날 스포츠의학의 중요성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신체조건의 중요성은 모든 격투기, 무술 등에서 실제 시합을 통해 입증된 지 오래다. 오늘날 어떤 무술, 어떤 격투스포츠도 '전통적인 방식'만을 고수하진 않는다. 그 효과가 입증된 전통적인 훈련, 단련 방법들도, 의학과 과학을 통해 개량되거나 보완되었다. 그러나 실제 격투시합 등이 목적이 아니라, 전통문화 등으로 전수되는 유파, 단체 등의 경우에는 전통을 고수하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의 전수가 목적인 단체이니까. 다만 그런 곳에서도 스포츠의학 등의 검증을 거치는 추세이다.
오늘날 체계화된 훈련, 단련 방법은, 시합 등을 뛰며 부족한 것들을 찾으면,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어떤 훈련을 해야 할까 고심하여 다시 훈련한 후, 다음 시합이나 대회에서 피땀 흘려가며 검증하고, 부상이나 부작용 등의 문제가 있다 싶으면 의학 전문가 등을 찾아 상담하고, 그들의 조언, 지식 등을 적극 차용하고 상호 의논하는 등의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서, 검증되고 확실한 지식과 정보를 하나둘 쌓아가며 서로 나눈 실제 전문 운동선수들, 무술가들, 격투가들의 피와 땀으로 정립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노고가 일반대중에게 알려질 일은 그리 없지만, 이소룡은 한창 뜨던 때에 갑작스레 죽었기에, 새로운 상품이 없어서 안달하던 관련 매체들에 의해 그의 사소한 것들까지 널리, 심지어 과장, 왜곡되기까지 하며 알려진 것에 차이가 있다. 그러니 일반인들 중 이소룡의 숭배자들에 의해 기존 훈련, 단련 방법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도입하는 데에 이소룡이 선구자 역할을 했다거나, 초기 스포츠의학의 태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소리까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단련법이 체계화되기 시작하고, 스포츠의학 등이 태동하여 자리잡아가고 있을 때, 이소룡도 그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훈련법에 도입하며 여러 가지를 실험했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상술(上述)했듯 웨이트 트레이닝을 적극 차용한 훈련법에 대한 서적이나 논문은 이소룡 출생 이전에도 많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웨이트 트레이닝과 과학적 훈련법을 도입한 무술가, 운동선수, 격투가들은 이소룡 이전에도 이미 많았다. 그중 일반인들에게도 유명한 사람은 최배달이 대표적이다. 최영의 선생은 승단자라든지 해외로 파견 보내려는 제자들을 뽑을 때는, 적어도 벤치 프레스로 100~120kg 이상 들어야만 합격시켰을 정도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강조했었다. 간단히 요약한다면,
이소룡 이전에 이미 무술가나 격투가, 운동선수들 중 웨이트 트레이닝을 적극 차용한 사람들은 많았다. 다만 이소룡의 유명세로 인해, 일반 대중들에게 무술과 웨이트 트레이닝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특히 북미 등지에) 비교적 잘 알려졌다고 볼 수 있을 뿐이다.
6.4. 무술의 대중화에 끼친 영향
그가 영화를 통해 무술의 대중화를 촉진시킨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용쟁호투》 이후 무술 도장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영화 등이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면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왕우(王羽)의 《용호투(龍虎鬪)》(1970)가 대박을 터뜨렸을 때,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왕우가 영화 속에서 사용한 단련도구들과 비슷한 것들이 불티나게 팔렸고, 무술도장에 입문문의가 쇄도했었다. 성룡의 《취권(醉拳)》(1978)이 그야말로 기록적인 대박을 기록했을 때는 한국, 홍콩, 대만, 일본 등에서 취권을 배우겠다며 중국무술도장이 북새통이 되었었고, 한국에서는 성룡에게 취권을 가르친 고수라고 알려진 대만의 무술가, 장극치(張克治)를 초빙, 시범공연을 하여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용비운(龍飛雲, 1955~2007)이라는 무술가가 취권을 내세워 돈을 벌고, 무술서적도 출판했었으며,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되었다.
이소룡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그의 무술실력 덕분이라고 하기엔 무리다. 사실 그는 영화를 본격적으로 찍기 전부터 TV 영화, 드라마 제작사 등과 접촉하며 무술을 내세워 자기홍보에 적극적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을 배우로 써달라고 홍보하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스스로도 말하길, 미국에 있을 때는 연줄을 만들고 여러 곳에서 무술실력을 내세워 홍보하며, 할리우드 영화, TV 등에 출연하려고 여러 가지로 애썼다고 술회한 바 있다.
노력 끝에 만든 연줄을 통해, 《그린 호넷》뿐 아니라 TV 토크쇼나 드라마의 게스트 출연 등의 기회를 잡고 무술 철학에 대해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소룡은 무술을 통해 단순히 강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철학적 깊이를 부여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소룡의 업적을 따질 때 그의 강함이 아니라 철학적 깊이를 따져야 되는 게 이런 이유이다.
반론도 있다. 이소룡이 실전에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고 누차 강조하는데, 그렇다면 그 무술을 익혀 강해지느냐 아니냐를 따져야지, 철학적 깊이를 따진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술이건 다른 운동종목이건, 그런 걸 수련하고 연습하는 데 있어서 중심철학이 없으면 결코 어느 수준 이상 올라가지 못한다는 것이 많은 숙련자들의 의견이기도 하다. 생각을 하며 하는 축구와 그냥 무조건 열심히 뛰고 차는 축구를 떠올려보면 어느 정도 통할 듯.
그 전까진 중국무술 등이 너무나 신비화되었고 폐쇄적이었던 데 비해, 이소룡은 절권도를 처음에 과학적인 길거리 싸움으로 부르려 했을 정도로 신비주의와는 거리가 먼 노선이었다. 한편으론 복싱 등의 서구 무술은 불한당들이 깡패 짓하면서 쓴다는 부정적인 인식도 있었지만, 그가 30대 넘어서 가장 중요시 생각하던 무술은 공교롭게도 복싱이었다. 이런 와중에, 이소룡은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무술 체계를 제기하여 무술이 대중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가 영화배우로서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것이 크게 작용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그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간, 그렇고 그런 액션배우였다면, 그의 저서나 철학 등이 오늘날까지 이리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릴 수 있었을까?
사실 이소룡은 전통적 무술이 난장판이 되기 쉬운 길거리 싸움에는 불리하다는 의견이었기에, 그런 혼잡한 상황에서도 쓰일 수 있는 무술 체계를 원했고, 그 결과가 절권도라고 전해진다. 시각에 따라선 이소룡의 궁극적 목표는 자기가 최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무술이 전파되어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하간 이렇게 이소룡이 영상매체에서 무술가를 Bad Ass한 히어로로 만들자, 《용쟁호투》 이후 무술 도장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는 등 가시적인 효과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절권도 철학은 이종 격투기의 철학과도 잘 어울리는 것이었기에, UFC의 데이나 화이트 등은 이소룡을 이종 격투기의 아버지라고 극찬하기까지 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홍보 효과 등의 맥락으로 하던 말일 가능성이 크다. 데이나 화이트는 UFC 자체를 이종 격투기와는 다른 종합격투기로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니깐.
즉, 자신이 최강이 되는 것보다 모두가 최강이 될 수 있는 길을 추구함으로써 불멸로 남았다고 볼 수도 있다.
오늘날에는 중국에서도 그를 진정한 무술가로 칭송하는 이들도 많아졌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자본주의에 눈을 뜬 중국인들이, 돈 될 만한 것이면 뭐든지 가져다 써먹다가 이소룡까지 써먹기에 이르렀다는 게 더 정확하다. 중국에서 이소룡은 마약중독의 불량배 정도로 백안시(白眼視)된 적도 있었고, 문화대혁명으로 무술과 무술가들을 완전히 개발살냈으면서도, 지금 중국은, 무협소설과 무협영화가 돈이 된다는 것에 주목해,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무술문파로서의 무당파(武當派), 화산파(華山派), 아미파(蛾眉派) 등등을 만들어 무술 흉내를 내는 사람들을 배치하고, 외국인 관광객들이나 수련지망생 등을 대상으로 무슨 무슨 코스 해서 제자로(?) 받거나 하며 돈을 버는 게 현실이다. 일부 기업이나 무술인들이 하는 짓이 아니라, 중국정부, 혹은 정부가 내세운 기업들이 뒤에 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사실 이러한 돈벌이의 원조는, 밥 짓던 스님과 늙어서 어디 갈 데도 없는 스님들까지 포함해 단 4명만 남았고, 건물은 다 무너졌던 소림사(少林寺)를 중국정부—당시는 중화인민민주주의 공화국, 즉 중공—가 눈독을 들여 모조리 개축한 후, 은퇴한 우슈 선수, 이연걸을 주연으로 《소림사》(1982)를 만들어 짭짤한 재미를 본 것이 그 시작일 것이다. 실제 소림사의 방장(方丈) 석영신(釋永信)은 초기에 자신과 중국정부의 연줄을 이용, 소림사 주변에서 그 이전까지 관광객 등을 대상으로 돈을 벌던 무술관, 기념품, 서적 판매상 등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자신이 허가해준 것 외에는 자리 잡지 못하게 했었다. 그리고 소림사는 다양한 수련과정, 체험코스 등에 많은 외국인들과 수련생들을 끌어들여 많은 돈을 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