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0313. 묵상글 ( 사순 제1주간 목요일. - 당신께 문을 두드리고 찾고 청합니다 . 등 )
^ 김찬선 신부님 : 아직 / 04:10 추가
^ 호명환 신부님. 일부 : 아직 / 05:30 추가
^ 조명연 신부님 : 아직 / 08:05 추가
^ 이수철 신부님 : 아직 / 04:52 추가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께 문을 두드리고 찾고 청합니다>
당신께
문을 두드립니다
당신께서
여실 수 있는 문을
당신께서
여시고픈 문을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홀로가 아니라 함께의
밀침이 아니라 스밈의
죽임이 아니라 살림의
당신께
찾습니다
당신께서
지니실 수 있는 것을
당신께서
지니고픈 것을
가짐이 아니라 베풂을
가름이 아니라 이음을
버림이 아니라 품음을
누름이 아니라 세움을
당신께
청합니다
당신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을
당신께서
주시고픈 것을
무응답이 아니라 믿음을
무기력이 아니라 희망을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을
무모함이 아니라 용기를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13 04:03
- 에스델처럼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만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청하라고 하시며 그러면 하느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청하지 않으면 주지 않으시는가?
인간사의 경우,
말하지 않으면 상대가 알지 못하니
청하지 않으면 받지 못하고
찾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두드리지 않으면 문이 열리지 않겠지요.
그런데 하느님도 그러시느냐 이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다 아시지 않습니까?
말하지 않아도 샅샅이 다 아시잖습니까?
그리고 아실 뿐 아니라 주시잖습니까?
그런데 왜 청해야 하고 찾아야 하고 두드려야 합니까?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는 것이 오히려 불신의 표시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청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안 주셔서가 아니라
청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주셔도 받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주셔도 받지 않겠지요.
원하지 않으면 청하지도 찾지도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하느님께서 아무리 주셔도 도무지 받으려 하지 않겠지요.
아무런 원의가 없는 사람이 그래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아무런 원의가 없습니까?
가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가난하지 않고 배부른 사람은 밥을 주십사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가난하고 배가 고픈 사람입니다.
가난하고 배가 고파도 자기 힘으로 얻을 수 있으면 하느님께 청하지 않고,
인간에게 얻을 수 있는 사람도 하느님께 청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청하는 사람은 오늘 독서의 에스델처럼
하느님밖에 아무도 없는 외로운 사람이고,
하느님밖에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며,
나의 필요를 잘 아시고 꼭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오늘 에스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은 유일하십니다.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에스델처럼 하느님이 유일한 분이신가?
나는 에스델처럼 하느님밖에 없는 외로운 존재인가?
나는 에스델처럼 하느님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믿는가?
나의 필요를 다 아실 뿐 아니라 주시는 좋은 분이라고 나는 믿는가?
그런데 만일 이런 믿음이 내게 부족하다면
오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해방과 사랑!
하느님의 숨
2025.03.12. 16:41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12일 수요일 (호명환 번역) 열한 번째 주간: 지극한 은총
성경은 끝없는 위협이 아니라 낙관적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며 마무리됩니다.
리처드 신부는 포용의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이사야 예언자를 인용하시는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당신 자신을 처음으로 소개하시면서 직접적으로 인용한 히브리 예언자입니다:
+++++++++++++++++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18-19, 이사야서 6,1-2 인용)
+++++++++++++++++
예수님은 당신이 인용하시는 예언자처럼 당신의 자기-확신뿐 아니라 당신이 의도하셔서 당신 말씀을 들을 청중이 누구인지에 대해 드러내 주십니다. 그분이 전하시는 기쁜 소식의 메시지는 편안하고 안전한 이들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이 찾고 들을 내용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예수님의 공생활 전체에 걸쳐 그대로 설명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뭔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사야서의 마지막 문구 전체를 인용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십시오: "나는 마음속으로 복수의 날을 정하였다." 이런 모습을 보면 예수님은 하느님을 한계가 없으신 분이 아니라 제한하고 위협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에 진절머리가 나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이런 하느님은 이 구절에서도 당신이 언급하셨고, 이사야가 60장 전체에 걸쳐 묘사한 새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이야기를 경고와 두려움으로 마무리짓지 않게 하십니다. 다행히 우리는 이사야도 그런 수준에 머물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서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
묻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는 문의를 받아 줄 준비가 되어 있었고
나를 찾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는 만나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겨레에게 나는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하였다.
(이사 65,1)
+++++++++++++++++
하느님은 너무 과분하게 내어주시고 관대하신 것 같아 보이고, 우리에게는 과분한 희망이 주어지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실 이 말씀은 이사야가 나머지 마지막 예언을 위해 언급하는 복선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사야는 마지막 구절에서 지옥(게헤나)의 불을 암시하는 내용을 예언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가르침에서 불의 은유는 영원한 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를 볼 때 불은 거의 모두가 내세에서의 고문의 불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정화를 위한 "정제사의 불"로 나타납니다.
이사야서의 마지막 장은 우주적 해방과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의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고자들(eunuchs)과 이방인들로부터 시작해서(56,1-7), 반항하는 백성과 자기네 멋대로 좋지 않은 길을 걷는 자들(65,1-7)에 대한 언급,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구원의 선포(65장 나머지 전체), 그리고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65,17; 또 66,22)이 펼쳐지는 온전한 우주관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들은 신약성경의 마지막(묵시 21,1)에 다시 등장합니다.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성경의 메시지 전체는 균형 잡히지 않고 사랑과는 절대 거리가 먼 끝없는 위협의 메시지가 아니라 낙관적인 희망과 비전의 메시지로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 어머니는 로스앤젤레스의 산불 때 집을 잃은 후 100세가 되어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간 가족들과 함께 어머니 죽음과 관련하여 보험금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많이 겼었습니다. 특히 저도 이 산불로 제 집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서 알게 된 짧은 기도문을 계속 되풀이하여 외웠습니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를 청했으며, 이 둘의 다른 점을 아는 지혜를 청했습니다. 이 지혜를 되풀이하면서 저는 이 혼란한 시기 동안 온전한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마지막 한 해 동안 가진 것 전부를 잃으셨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Mimi J.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Tears of Things: Prophetic Wisdom for an Age of Outrage (Convergent, 2025), 123–12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Geentanjal Khanna, Untitled (detail), 2016,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의 노력으로나 공로가 아닌 거저 주어지는 자비는 우리 삶에서 그저 손을 벌리기만 하면 되는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하면서 알게 되는 하느님의 계시입니다. - 사실 우리는 물 한 방울처럼 별것 아닌 것 같고 때로는 계획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극히 혼란한 상황에서도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
숨영성 묵상글
날수 셀 줄 알기를 가르쳐 주시어, 저희들 마음이 슬기를 얻게 하소서!
하느님의 숨
2025.03.13. 05:22
예수님께서 청하면 받을 것이고 찾으면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을 듣거나 읽으면서 우리는 늘 어떤 "물질적인 선물"을 생각하지는 않는가요?! 예수님께서도 빵과 돌, 생선과 뱀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니까 더더욱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가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이 늘 물질적인 것일까요?
마태오 복음의 이 말씀이 루카 복음에서 조금 다르게 묘사되고 있는데, 이렇습니다.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루카 11,13).
성령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친교와 일치, 관계 맺음입니다. 친교와 일치 그리고 진정한 관계성 안에 있게 해 주는 선물은 어떤 물질적인 선물과는 다른 더 좋은 것, 즉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물질적인 선물은 어쩌면 하느님 사랑의 표지요 증거일 뿐이지 사랑 그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중 가장 큰 것은 사랑이고, 다른 선물들은 이 가장 위대한 선물을 상기하고 새기고 마음속 깊이 간직하게 해 주는 매개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신비주의자 장 귀용(1648-1717)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나 선물에서 멈추지 마십시오. 그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줄기일 뿐이지 하느님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분 어좌에까지 올라가 그분을 찾으십시오. 여러분이 그분의 얼굴을 찾고 진정한 복을 누릴 때까지 한결같이 그분의 얼굴을 찾으십시오."
시편 저자가 "주님을 찾는 이들은 기뻐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하고 노래하듯, 우리도 그렇게 주님을 찾고 그분의 얼굴을 찾아야 합니다.
몇 년 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관상수녀회들을 위해 내 주신 교황령(apostolic constitution)의 제목이 [하느님 얼굴 찾기](vultum Dei quaerere)였습니다. 관상이라는 말 자체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기에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얼굴을 찾으라는 의미로 이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것, 하느님과 만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거래적 관계성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진정한 인격적 만남이 우리에게는 요원한 이상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더 과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이 진정한 목표에는 별 관심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상거래적 관계성에는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최소한의 접촉만 있으면 됩니다. 여기에는 인격적 관계성이 희미하게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마저도 이런 상러래적 관계성 안에서 만나게 된다면 하느님께서 너무도 안타까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비근한 예를 들어 말해 봅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사랑의 진정성을 드러내기 위해 소중한 선물을 주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선물을 받은 사람이 그 사랑은 아주 조금만 마음에 품고 정신이 온통 그 값진 선물에만 쏠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이나 선물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이 바로 이런 식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증명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우리의 공로나 죄와는 아무 상관없이 거저 선물을 주시는데(은총) 우리가 이 선물에만 관심을 둔다면 하느님은 얼마나 허탈해하실지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을 소와 같이 여깁니다. 그들은 소를 사랑하듯이 하느님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외적인 부유함과 내적인 위안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을 바르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는 또 덧붙여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랑하는 것을 얻게 되면 이제 하느님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깊은 관상이나 무아의 경지에 이르더라도, 혹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만 그 상태에 머물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무언가를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목적인 그가 사랑하는 것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고 싶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분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위해 그분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저는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의 원천이시기에 우리가 이렇게 선물이라도 감사로이 받아들이기를 바라시는 분이실 거라고 믿습니다. 참으로 감사로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하느님의 그 참된 사랑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이유는 "우리가 정말로 오직 하느님 당신만을 위해, 그분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나'와의 친밀한 관계성을 맺기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을 이 은혜로운 사순시기에 한 번 해 보자고 제안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제 오늘 복음에 대해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바로 이런 것이었는데, 저도 가만히 제 삶을 뒤돌아 보니 저의 관심은 늘 하느님께서 참으로 '당신'과 '나'를 위해 바라시는 참되고 친밀한 인격적 관계성보다는 젯밥(?)에만 신경을 쓰며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위안을 삼는 것은 이 사실을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관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편 저자가 이야기하듯이, 우리 삶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 년"(시편 90,10)입니다. 요즘은 백세 시대라고들 하지만 이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십 년이나 이십 년 혹은 그 이상을 더 산다 한들 우리가 참된 것을 놓치고 산다면 다 소용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참된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근본 핵심점이기 때문입니다. 지복직관! 하느님과 서로 마주보는 극치의 복을 누리는 것 말입니다! 어떤 영성가가 말하기를 이 복은 계속 커지기는 하는데 영원히 과하지 않게 커지는 복이랍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이렇게 주님께 청합니다. "날수 셀 줄 알기를 가르쳐 주시어,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게 하소서!"(시편 90,12).
저는 사실 "날 수 셀 줄 알기를 가르쳐 주시어"라는 말을 수도원에 들어온 이래로 성무일도를 바치면서 계속 외웠지만,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몇 년전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날 수 셀 줄 알기를 가르쳐 주시어"를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저희가 저희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를 알게 하시어"로 되어 있더군요....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참으로 제대로 복되게, 참으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와 정말로 친밀하게 일치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그 다정다감하고도 애틋한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면서 말입니다!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3.13 05:47
가끔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90년대 이전의 생활상이 담긴 영상을 보게 됩니다. 학교 앞에서 팔던 불량식품을 먹고 싶어서 손수레 근처에 모여 있는 아이들, 초등학교 입학식 때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달고 있는 모습, 동네잔치와 같은 가을 운동회, 동네에서 딱지치기, 구슬치기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도 보입니다. 버스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산과 계곡에서 불을 피우고 밥을 해 먹는 등산객, 아무렇지도 않게 무단횡단하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이 시대를 직접 살았던 저로서는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었는데, 요즘의 어린아이들은 너무나 낯선 모습으로 비칠 것입니다. 그만큼 세상이 많이 변했고 또 성장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는 성장합니다. 과거의 불편함을 극복하면서 살기 좋은 곳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성장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과거의 나보다 못한 모습, 그냥 불편함을 간직하면서 어렵고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서 후회를 반복했던 것이 아닐까요?
세상이 성장하듯, 우리도 성장해야 합니다. 문제는 세상 기준으로의 성장만을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돈, 명예, 세상의 지위 등의 성장만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삶을 마치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적합한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사랑 가득하신 주님께서는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적합한 우리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을 잊지 말라고 하시지요.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이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사랑의 삶, 하느님과 일치의 삶, 평화의 삶을 사는 우리의 성장을 지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 뜻에 철저하게 맞추어야만 합니다.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진정한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순간이면 충분하다. 아무리 짧은 순간도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삶에 만족할 수 있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틀 전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우쳐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지 않겠느냐?”(마태 7,11)
이는 “우리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심을 밝혀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아버지께” 해야 할 바를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먼저, 기도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청하라’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해결사가 되지 말고, 구원자이신 주님께 희망을 두라는 말씀이요, 나아가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신뢰하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겸손하게 자비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귀먹은 이가 들을 수 있기를 청하듯, 눈먼 이가 볼 수 있기를 청하듯, 자신의 처지를 알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청하기도 전에 다 아시지만, 우리가 그 필요를 깨달아 알고 절실하기를 바라시며, 또한 그것을 당신께 바라고 당신께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다음에는, ‘찾아라.’고 하십니다. ‘찾는다.’는 것은 수고로움을 바치는 것이요, 믿음으로 찾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바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온 몸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하여 믿고, 믿는 분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내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다음에는, “두드려라”고 하십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가슴에 타오르는 한결같은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마음을 열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이토록, 주님께서는 우리가 입(말)과 몸(행동)과 가슴(마음)으로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있고 “아버지께 매달려” 있기를 바라십니다. 곧 말로 희망하는 바를 청하고, 행동으로 믿는 바를 찾으며, 마음으로 사랑하는 바를 두드리라 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듯이 우리도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행하라고 하십니다. 곧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고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진리이신 당신을 찾게 하시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시는 당신의 음성을 들으며,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9)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우리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3년간 있었던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전쟁의 끝은 언제나 비극입니다. 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하고 다쳤습니다. 도시는 폐허가 되고, 경제는 망가지고, 재건이라는 명목으로 외국의 기업들이 들어올 겁니다. 전쟁에 큰 비용을 제공했던 미국은 이미 우크라이나에 큰 이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어 참된 평화가 오면 좋겠습니다. 손자병법에도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겁니다. 한국도 지난 3개월간 큰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몸은 멀리 미국에 있지만 마음은 한국에 있었습니다. 그 시작은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였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해제를 결의했고, 비상계엄은 해제되었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결의했고, 대통령은 탄핵당하였습니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서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도 비상계엄의 진통을 넘어서 새로운 도약을 향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한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디언들의 기도는 꼭 들어 주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디언들은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가 오지 않아서 ‘기우제’를 드릴 때도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린다고 합니다.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보다는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배를 생각합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이 하고 싶을 때 노를 젓는다면 배는 험한 파도를 뚫고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배는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난파할지도 모릅니다. 파도가 거셀수록 함께 힘을 모아 같은 방향으로 호흡을 맞추어서 노를 저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자동차가 달리는 데는 속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방향’입니다. 방향이 틀리면 빠른 속도로 갈지라도 목적지와는 멀어질 뿐입니다.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향’입니다. 나의 욕망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청한다면, 타인의 재물과 명예를 억지로 빼앗으려고 한다면, 국가를 혼돈으로 몰아넣고, 국민을 도탄에 빠트릴 수밖에 없는 문을 열려고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들어 주시지 않을 겁니다. 설령 목적을 이룬 것처럼 보일지라도 끝은 늘 비극이 될 겁니다. 지향도 중요하지만 ‘인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르려야 할 것들은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재물과 장수를 청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재물과 장수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들은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 없이는 저희가 있을 수 없사오니 저희에게 성령의 힘을 주시어 언제나 올바른 것을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주님, 이 백성이 바라던 자비를 베푸시고 천상 은혜를 내리시어 청해야 할 것을 올바로 알고 또한 청한 것을 얻게 하소서.”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한 줄을 꼽으라면 이것일 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위의 말씀처럼 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의 이런 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한 번도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준 적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얻고자 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합니다. 우리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해줄 세상 것들을 청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삶이 없다면, 우리의 하루가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을 선물해 주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도 남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남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마음과 행동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다른 이를 도와주거나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누군가를 마음에 담아내는 것은 이렇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나보다 누군가를 더 소중히 여길 수 있습니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그대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인도 격언
-잘못 탄 기차가 때로는 목적지에 데려다준다.-
우리가 걷는 인생길이 내 마음대로 펼쳐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오히려 그렇게 된 적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만족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 중간중간 만난 것 안에 행복과 위로가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론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준다고 합니다.
우리 목적지가 ‘행복’이라면….
설령 잘못 탔더라도 그대의 기차는 결국 그곳에 데려다줄 것입니다.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03.13 04:19
믿음의 여정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응답하시고,
저를 당당히 세우시니, 제 영혼에 힘이 솟았나이다.”(시편138,4)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입니다. 참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특히 사순시기는 기도와 회개의 때입니다. 살아있을 때 기도지 죽으면 기도도 못합니다. 기도하라고, 회개하라고, 사랑하라고 연장되는 날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확증편향,무지의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고, 무엇보다 길을, 희망을, 빛을 잃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이 거룩한 사순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악습들을 멀리하고,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으로부터 우리나는 통회와 절제에 힘쓸 때,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성규49,3-4)
참으로 하느님 앞에 회개할 때 겸손과 더불어 본연의 참나를 회복합니다. 하느님 없으면 참된 겸손도 불가능합니다. 사람이라면 종파에 관계없이 겸손히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이요 우리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도올의 시국선언도 하나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서두와 끝부분만 인용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풍전등화와 같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런 위기가 덮여 있습니다. 나는 이땅을 사랑하고, 이 나라의 문화와 역사, 도덕과 장구한 질서의 가치를 존중하는 한 사람으로서 심중한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피 끓는 호소가 남녀노소, 이념과 관계없이 민족의 양심을 깨우기를, 우리의 시인 한용운의 시 한 구절을 읽습니다.
‘나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말하고 노는 때에 더 울게 됩니다. 님 있는 여러 사람들은 나를 위로하여 좋은 말을 합니다마는, 나는 그들의 위로하는 말을 조소로 듣습니다. 그때는 울음을 삼켜서 눈물을 속으로, 창자를 향하여 흘립니다.’”
저 또한 재작년 2023년 8.15 광복절부터 기상후 만세칠창으로 시작하고 만세칠창후 잠자리에 듭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
이어 자신의 신원을 새로이 확인합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 ‘사랑의 전사’이다.”
옛 현자의 충고도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알게 모르게 수없이 많은 용서를 받았다. 그러니 타인에게도 관대하라.”<다산>
“사람이란 어리석더라도 남을 꾸짖는 데는 밝고, 총명하더라도 자기를 용서하는 데는 어둡기 마련이다.”<송명신언행록>
타인은 물론 자신을 용서하며 자신에게도 관대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기도와 믿음, 삶에 대한 참 귀하고 필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결코 좌절이나 절망함이 없이 칠전팔기, 백절불굴의 투지로 자세로 항구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간절하고 항구하 기도요 믿음이요 삶의 자세입니다. 끝까지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부단히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이래야 비로소 영적 탄력좋은 삶입니다. 세월의 풍화작용을 겪지 않고 한결같은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진선미眞善美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간절하고 항구히 기도하고 살다보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바에 이르게 되고 그대로 응답됩니다. 우리 방식대로가 아닌 하느님의 참 좋은 최상, 최선의 방식대로 응답됩니다.
당장은 모르지만 삶의 뒤안길을 보면 저절로 응답된 삶이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가 청하는 분은 초월자 철학의 차가운 하느님이 아니라 너그럽고 인자하신, 다정하고 따뜻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아버지께 대한 한없는 신뢰와 사랑을 날로 깊이하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감사와 행복의 고백기도입니다. 몰라서 불만에 불행이지 알면 알수록 감사요 행복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믿습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감사와 행복의 자각에서 저절로 황금률의 지혜와 사랑에 이르게 됩니다. 참사람의 기초가 되는,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황금률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오늘 이런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믿음과 삶의 모범이 제1독서의 에스텔 왕후입니다. 언젠가 갑자가 이런 기도가 아니라 평소 기도로 축적된 내공의 믿음의 삶이 기도로 표출된 것입니다. 기도는 사람이요 삶입니다. 기도가 삶의 꼴을 형성하고 이런 믿음과 삶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을 압니다.
우리의 영원한 정주처이자 피신처이자 안식처는 주님뿐이요, 이런 주님께 바치는 에스텔의 기도가 참 절박합니다. 흡사 인격화된 “한반도의 대한민국”이 드리는 기도같습니다. 위기중에 있는 작금의 이 나라의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이 필히 바쳐야 할 기도입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몸은 위험에 닥쳐있습니다.
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원하소서.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핵무기를 능가 압도하는 기도의 힘, 믿음의 힘, 미사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미친 광신도狂信徒가 아닌 참 빛의 광신도光信徒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당신께 피신처를 둔 백절불굴의 기도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로 살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 주소서.”(시편51;12,14). 아멘.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7-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이 한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간단히 요약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덕의 정의는 간단하고 쉬우며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임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라고만 하시지 않고, “그러므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라는 말을 별 뜻 없이 쓰신 것이 아니라 깊은 의미를 담아 쓰셨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바란다면, 내가 앞서 말한 것들에 더해 이것도 행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덧붙이신 ‘이것’은 무엇입니까?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리는 그대로 해 주어라’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우리가 바라는 바가 우리 행동을 조심스럽게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해 주시기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이웃에게 해 주어라’고 하지 않으신 점을 새겨 보십시오. 따라서 여러분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기나 한가? 그분은 하느님이시고 나는 인간인데!’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의 동료 종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이보다 짐스럽지 않은 일이 있습니까? 이보다 공명한 것이 있습니까? 그에 대한 칭찬도 참으로 대단합니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라고 하시니까요. 이로 볼 때, 덕이 우리 본성에 맞게 규정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마음속 깊이 압니다. 이제 다시는, 몰랐다고 핑계 대며 피할 수 없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온전히 부인한 사람에게는 어떠한 것도 십자가나 슬픔이나 고난일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행복이고 기쁨이며 즐거움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에게로 나아가서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따릅니다. 하느님은 어떠한 사람도 슬프게 하거나 비탄에 잠기게 하지 않으십니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것도 그러한 사람을 불행하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은 고통과 고난을 개의치 않고 침착하게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기쁨은 가장 심원한 평심(平心)에 이릅니다. 그것은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너희 기쁨을 앗을 수 없다" 내가 신적인 존재로 바르게 변모될 때, 하느님은 나의 것이 되시고, 그분께서 지니신 모든 것도 나의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는 너의 주 하느님이다”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고통이나 괴로움이 여러분에게서 기쁨을 앗아 가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제대로 된 기쁨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고통이 발붙지 못하는 곳에서 나는 신적인 존재로 변모됩니다. 하느님 안에는 진노도 슬픔도 없고 사랑과 기쁨만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349)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성체의 예수님과 함께 희생이 되다
하얀 작은 무덤
원장은 소녀의 생전 희망대로 작은 시체에 첫영성체의 흰 옷을 입히고 하늘색의 띠를 띠어 주었다.
소녀의 죽음이 전해지자 리스본의 가톨릭 신자들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고향으로 유해 운송할 경비를 계속하여 기부했다.
알버야젤 남작은 역에서 파티마까지 수송 부탁을 쾌히 승락하고 우선 우렘 묘지에 있는 남작 가문 묘지에 가매장할 허가를 청했다.
장례식은 성 천사 교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극히 성대하게 이루어졌고 운구의 수속이 끝날 때까지 성당 제의실에 안치하게 되었다. 그동안에는 유해를 보고 그 유해에 성물을 대고 싶어하는 사람들뿐이라 관 푸껑을 열어 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임 신부는 유해를 성체 회의 사무소로 옮기고 장례식 담당자에게 유해를 지켜 주도록 부탁했다. 선남 선녀의 무리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져 최고의 경의를 나타내고는 떠나고 또 모이는 것이었다.
한 참배자는 말했다.
“소녀는 작은 관 속에 누워 있었다. 입술과 뺨은 생생한 장미빛을 띠어 정말 고왔다. 관에 가까이 가는 자마다 누구나 다 어떤 감명을 받았고 황홀한 천상척 분위기에 잠겼다.
진정 소녀의 유해에서는 형언키 어려운 아름답고 좋은 향기가 진동했다. 그 아무리 완고한 무신론자라도 이것만은 의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
리스보아 박사는 병이 전염성인데다 사흘하고도 반 나절이나 열어 둔 채였는데도 예상 밖의 결과가 일어나는 이 불가사의한 사실을 보고 경탄해 마지 않았다.
2월 24일 정오쯤 작은 유해는 규정대로 납관에 안치되어 수많은 장송자들의 행렬로 감동중에 역까지 운반되고 다음 기차로 티아오 드 미사스에 이르러 드디어 빌라 노바 드 우렘에 도착했다.(193)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설교가 과연 회개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강만연 [fisherpeter] 250312 02:10 ㅣNo.180676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복음 말미에 나오는 내용을 중점으로 해서 복음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개별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하는 묵상은 많은 훌륭한 신부님들의 묵상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제목에는 강론이라고 표현하려고 했지만 복음에 이미 설교라는 단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설교로 하겠습니다. 사실 설교라는 표현은 개신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묵상에 들어가기 전에 일단 설교와 강론이 비슷하긴 하지만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양쪽을 다 경험한 사람으로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양쪽의 공통점은 일단 성경을 바탕으로 구성한다는 사실은 동일합니다. 공통점은 이것 하나인데 차이점은 많이 다릅니다. 대체적으로 개신교 설교는 어떤 설교 주제가 있으면 성경의 어떤 구절을 설정합니다. 그 구절을 바탕으로 해서 요즘은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지만 대개보면 신약과 구약을 왔다갔다 합니다. 구약이 주제가 되더라도 신약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고 주제는 신약인데 구약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성경의 내용을 성경으로 그 내용을 해설하는 방식으로 설교를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목사님의 사견을 바탕으로 해서 첨가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보면 개신교 신자는 이런 설교보다는 철저하게 성경 말씀으로 설교의 내용을 대체해서 말씀 풀이를 해 주시는 설교를 은혜로운 설교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설교라는 것은 목사님의 입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개신교 성경이사야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여호아의 말씀을 자제히 읽어봐라. 짝이 없는 말씀은 하나도 없나니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실제 이 표현이 의미하는 행간의 의미는 성경은 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만 보면 반쪽짜리 말씀으로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그런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짝으로 보고 이해를 해야 완전히 하느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가능하면 이런 것 때문에 그런 독특한 방식을 사용하는 게 사실입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하면 인간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인간의 말을 전하지 않으려고 하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으로 이제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가톨릭은 설교라고 하지 않고 강론이라고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개종 후 들은 강론을 바탕으로 해서 강론이라는 것을 설명한다면 일단 가장 큰 대원칙은 복음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날 복음입니다. 그다음 확장을 한다면 독서와 같이 내용을 연계한 후 묵상해서 강론 자료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말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다른 세상적인 어떤 좋은 내용이 있다면 그것까지 가미해서 구성을 합니다. 경상도 표현을 하자면 조매 그렇게 하는 강론은 정말 보기 힘듭니다. 조매라는 표현 이것 좀 잘 이해를 못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 다시 언급을 하자면 개신교 목사님 설교는 엄밀히 말하면 묵상이 빠져 있다고 저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말을 목사님이 듣게 된다면 반박을 할 것입니다. 가톨릭과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가톨릭에 비해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묵상과 다른 개념으로 묵상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팩트가 있으면 그 팩트를 바탕으로 해서 뭔가 단순히 결과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의미만 건져올리는 것 정도만을 묵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개별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그걸 스토리텔링을 하듯이 연결시키는 것은 목사님의 개인적인 언어능력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걸 잘 연결하는 능력이 없으면 목사님의 설교는 그냥 죽을 쓰는 것입니다. 여기서 목사님의 설교 능력이 좌우됩니다. 개신교 목사님의 생명은 설교 능력입니다. 아무리 성직자로서 인품이 좋고 해도 설교 능력이 없으면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럼 가톨릭에서 신부님들의 강론은 묵상을 바탕으로 한다고 했을 때 이 묵상은 그럼 개신교 목사님들이 생각하는 묵상과의 차이가 있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물에 비유하자면 우물을 파는 범위가 좁다는 것입니다. 좁은데 그 깊이는 깊이 파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범위는 많은데 우물의 깊이가 얕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차이는 이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양쪽 종교의 시스템적인 차이 때문에 불가피한 현실입니다. 쉽게 말해 전례에서 구조적으로 생기는 차이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강론만 제외하면 전례가 다 거의 똑같은 구조로 돼 있습니다. 개신교는 그런 과정이 우리와 비교하면 거의 없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설교로 시작해 설교로 마무리되는 그런 과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넓은 범위보다는 좁고 깊은 방향으로 강론의 방향이 정해진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대체적으로 개신교 설교와 가톨릭 강론의 차이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이제 본격적으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일부분을 집중적으로 해서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의 대명사가 회개입니다. 제가 앞 묵상글에서도 언급을 한 적이 있지만 실제 원론적인 회개의 내용보다는 현실적인 실무에서도 적용이 되는 내용이 현실화되어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내용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젠 이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한번 파고 들어가보려고 합니다. 회개라는 것은 보통 보면 자기가 자신을 잘 성찰해서 회개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그렇게 회개하는 경우는 요즘 현실 속에서는 거의 희박합니다. 또한 그게 아마 누구나 봐도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외부에서 인식이 될 정도이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라면 평생 수도원 같은 곳에서 기도생활이 주가 되는 수도자가 아니고 현실이라는 세파 속에서 묻혀 사는 일반 보통의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기가 힘든 게 사실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그럼 우리는 회개를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가장 큰 대안 중 하나가 저는 바로 신부님의 강론이 아주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을 하게 되면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과연 강론이 회개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고 해도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강론으로 심지어 어떤 사람을 단순한 통회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등통회를 할 수 있을 정도의 회개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 있느냐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강론이 비수 같으면 그게 가능합니다. 강론이 비수가 될려면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할까요? 물론 필력과 문장력 등도 있으면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런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도 육비에 박힐 수 있는 강력한 메시지가 없으면 겉만 번지르르한 말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비수가 되기 위한 조건 하나만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깊은 묵상과 고뇌'입니다. 이건 만고의 진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700년 전 교부들이 저술한 설교를 한번 보시면 제가 드린 말씀이 증명이 될 것이고 수긍이 될 것입니다. 그냥 간단한 산술적인 계산만 해도 불과 예수님 승천 후 300년밖에 되지 않은 역사 속에서 신학이라는 학문이 학문으로서 자리를 잡는다고 해도 온전히 잡을 수 있는 시기인가 생각하면 그 역사는 미천할 것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그와 같은 설교나 강론이 나올 수 있었는가 하고 역으로 질문을 던지면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고민에 고민을 한 결과물입니다. 이 고민의 시간 때문에 바로 깊은 곳에 있는 우물인 영적 양식을 길어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개신교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은 목사님께 이상한 요구를 하는 걸 봤습니다. 우리가 회개를 할 수 있게 좀 무시무시한 하느님 이야기를 해 주시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얼핏보면 그런 설교가 회개를 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현대 심리학이라는 학문에서 보면 그런 것은 오히려 반발 효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한 사람의 영혼에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감동과 자극이 있어야 합니다. 이때 이런 자극은 그게 자극적인 내용이어야 자극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풍 같은 바람인데도 그 바람이 영혼을 향할 때는 강력한 허리케인 같은 바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미풍 같은 강론이 비수 같은 강론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잠시 어떤 신부님을 한 분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 신부님의 강론을 지금까지 몇 차례 들었습니다. 몇 번 듣지는 않았지만 제가 전 본당에 있었을 때 손님 신부님으로 오셔서 강론하셨습니다. 저는 그날 주일이었는데 쇼킹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탁월하셨습니다. 내용도 훌륭하셨습니다. 발음도 또 한몫하셨습니다. 여기서 좀 더 부연을 하자면 지난 주일에도 제가 이분 강론을 들었습니다. 이분 강론을 들었을 때 공교롭게도 몇 번만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제 판단으로는 일단 고민을 하신 흔적을 역력하게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건 어떤 다른 좋은 강론이 있다고 해서 그걸 표절해서 옮긴다고 그런 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표절을 한다고 해도 그게 일부분은 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논리적으로 문맥적으로 연결시켜 전체 강론 주제와 일관성 있게 통일성을 좌우하긴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능력과 함께 이분의 또 다른 능력이 있습니다.
사실 실제 이 능력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이런 능력이 출중하셔도 그 내용을 전달하는 형태에 따라 그 내용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이건 이렇게도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똑같은 강론 원고가 있습니다. 그 강론 원고를 만약 그대로 똑같이 국어책 읽듯이 그 내용을 강론하신다고 하는 전제를 해도 결과는 판이하게 다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몰라서 그런데요 영어에만 인토네이션 같은 게 있는 줄 아는데 사실 한국말에도 인토네이션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와 함께 끊어읽기를 잘 해야 합니다. 이게 잘 안 되는 분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건 신부님을 말씀드리는 게 아니고 일반적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제가 언어를 다루는 입장에서 보면 배워서 되는 게 아니고 원래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이분은 이런 게 뛰어나다는 것을 저는 처음 강론을 들을 때부터 느꼈습니다.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이분이 가진 이런 능력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 본당 신자들은 이분의 강론이 얼마나 훌륭한 강론인지는 그냥 잘하신다는 정도는 인식을 할 수는 있어도 얼마나 대단한 강론인지는 모를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평소 이런 데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 자체에 대한 생각조차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모를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본당 신자들에게 만약 제가 하나의 팁을 드린다면 다는 아니더라도 그분의 강론을 들을 때 간단한 메모는 하셔서 다시 한 번 더 댁에 돌아가셔서 그 의미를 음미하고 묵상해본다면 엄청 영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강론을 그냥 한 번 듣고 흘리기엔 아까운 강론이라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오늘 묵상글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둘입니다. 하나는 강론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와 강론을 통해서 한 영혼을 회개시켜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주옥 같은 강론을 많은 신부님들께서 해 주셨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담아 전해드리는 것입니다.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내가 바라는 만큼은 해주어야만 /
박윤식 [big-llight] 250312. 17:37 ㅣNo.180696
중세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다. 한 수도자가 성체조배 차례가 되어 성전에 들었다. 그런데 앞 조 수사가 코골며 자고 있었다. 화가 난 그는 감실을 향해 큰 소리로 “주님, 제대 앞에서 자는 이 형제를 용서하소서!” 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감실에서 “좀, 조용히 해라. 나까지 깨우는구나. 나도 자고 있다.” 라는 소리가 들렸단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배려다. 내가 하고픈 것을 그도 하고 싶어 하고, 내게 싫은 건 그도 싫어할 게다. 상대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건 배려 없이는 전혀 불가능이다.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비롯되었을 테니. 먼저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할 때에 나에게 꼭 그리 할게다. 배려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살맛나게 해 주니까.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걸 줄 줄 알거든,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걸 얼마나 많이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길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 황금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삶에서 가장 근본적인 계율이라 할 게다. 이렇게 남을 배려하는 삶은 주님 마음을 헤아리는 거다.
‘논어’에도 이와 비슷한 게 있다. 위령공 21 내용이다. 어느 날 제자인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실천해야 할 일을 한마디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공자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기소불욕 물시어인; 己所不欲 勿施於人).” 라고 대답을 했다나. 남의 마음을 헤아리기를 내 마음 헤아리듯 해야 한다는 말일 게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시기에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신다. 그러니 부탁하는 기도보다 그분 뜻대로 해 주십사고 드리는 게 평화롭고 행복한 느낌을 더 느낄 게다. 기도가 매번 어렵고 힘든 이유는 뜬금없이 달라고만 하기에. 부모님은 어떤 상황에도 자식을 좋게만 보시기에 사랑스러울 게다. 그렇지만 그걸 아는 자녀는 많지 않다. 대개는 또 간섭한다고 생각하기에 그 잔소린 이제 지쳤다는 눈치다. 그렇지만 주님은 늘 좋게만 보시어 언제나 좋은 걸 주시려 한다.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이시기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이라는 말에서 그분 마음을 잘 보여 준다. 아무리 미천한 부모일지라도 자식에 대한 사랑은 그토록 한이 없는데, 어찌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야 오죽하겠는가!
사실 다른 이가 너에게 원하지 않는 일을 너도 남에게 하지 마라는 것에 더 적극적인 것은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우리도 남에게 해 주는 것이다. 남에게 아무런 손해를 끼치지 않는 이는 남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을 수도.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악을 피하지 말고 선을 적극적으로 행하라신다. 우리는 법대로 살려하지만 그분께서는 무한한 사랑으로 살라신다. 남에게 용서받고 싶은 만큼 용서해 주고 다른 이의 칭찬을 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칭찬해야 할게다. 도움 바라는 그대로 반드시 도와주고 받길 원하는 그 이상으로 해야만 하리라.
그렇다. 우리가 바라는 그대로 우리도 반드시 남에게 해 주자. 특히 은혜와 회개의 이 사순의 시기만이라도 발 벗고 실천해보자. 우리 주위에는 하느님에게서 버림을 받았다거나 그분이 되레 고통만 안겨 주실 뿐 돌보아 주지 않으신다는 이가 생각보다 의외로 많다. 우리는 이런 이웃에게 그분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의 손길이 되어 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든 장본인이 바로 우리이기에. 내가 바라는 바 그대로를 꼭 해주자.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청하는 아들에게 돌을 주는 아버지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 주의해야 합니다. 자칫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빵을 청하면 거저 빵을 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청한 것을 무조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좋은 것을 우리가 바라지 않거나 피하고 싶은 방식으로 주실 때도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제 발목이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전날 발목을 삐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병원에 간 저는 간단한 약 처방만을 바랐습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은 제 발목에 깁스를 하고, 저에게 이틀에 한 번 병원에 와서 주사를 맞으라고 하였습니다.
저에게 더 좋은 처방을 준 의사 선생님의 말을 믿고 따랐습니다.
덕분에 저는 오랫동안 저를 괴롭혀 온 만성 염증을 관리하려면 발목 건강에 가장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을 그때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비록 십자가 죽음을 피하시고 싶었을지라도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믿음의 표본을 따라, 청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일상에서 키워 가야 합니다.
----------------------------------------------------
==========================================================
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15)
==========================================================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마태 7, 8)
우리를 향한
아버지
하느님의
노력과
정성을 만나는
사순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노력과 정성이
있기에 우리는
결코 겉돌지
않습니다.
이렇듯
친근한 아버지
하느님을 두고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가장 좋으신
사랑은
누구든지
아버지
하느님을
지향하게
만듭니다.
아버지
하느님이 계셔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청하면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는
닮아 갑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은
막연하지 않고
분명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누구든지
청하면 주시고
찾으면 얻고
두드리면
열립니다.
기도로 엮어가는
기도의
여정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의
교감(交感)은
기도로
깊어집니다.
청하는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드러내며
이 관계는
진심어린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
됩니다.
기도의 사순이며
마음의 사순이며
만남의 사순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좋은
때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청하는 기도로
하루를 엽니다.
무엇이나
나눌 수 있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셔
행복합니다.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매일 바치는 기도에도 성장과 쇄신이 필요합니다!
지난 세월 돌아보니, 정말이지 헛되고 부질없는 것, 청하지 말아야 할 것을 끊임없이 청해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또 전혀 의미 없는 노력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죽기 살기로 청하는 과정에서 응답없음으로 인해 절망하고 탄식하던 중에, 아, 내 청원이 그릇된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된 것입니다.
그 이후 다가온 작은 배움 하나는 정말 간절히 청해야 하는 바는 이 세상 그 너머의 것, 보다 이타적인 것, 보다 보편적인 것, 보다 공동체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폭이 넓어질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실뿐더러, 그 외의 작은 청들도 덤으로 들어주신다는 것을 자주 체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간절히 바치고 있는 기도의 질과 수준은 어떠합니까?
물론 절박한 현실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청도 아버지이신 주님께 열정적으로 청해야 마땅합니다.
나와 가족, 공동체 구성원들의 건강과 안녕, 평화와 성공도 열심히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오로지 그 방향으로 쏠리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기도 안에 함몰되어 있다면 많이 부족한 기도입니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 상태입니다.
우리가 매일 바치는 기도에도 성장과 쇄신이 필요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의연히 견뎌내며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모습, 정말이지 성숙한 기도 생활입니다.
희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우리의 시선이 늘 주님을 향해 있고, 부단히 절망 속에서도 희망한다면, 기도 잘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7,7-12: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려라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7-8절). 문은 청하고 구함으로써 두드리는 이에게만 열린다. 우리가 청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완수하는 힘을 청하는 것이며, 찾는다는 것은 복된 삶을 위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참된 지식은 복됨으로 가는 길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열렬한 마음으로 청하여야 한다. 찾으라는 의미가 이런 뜻이다. 무엇을 찾는 사람은 찾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며 주변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 두드리라는 말씀은 열정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곧 열어 주시는 것 같지 않아도 우리는 그곳에 남아 계속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분께 항구하게 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으로 설명하신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9-11절). 우리가 악하다 해도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골라 준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속이지 않듯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12절).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을 요약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덕은, 즉, 선행은 간단하고 쉬우며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너의 동료가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 주어라.’ 하신 것이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안다. 몰랐다고 핑계를 댈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할 때, 이중적으로 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현세적인 이익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에게 참된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는 것 같이 우리도 이웃을 대할 때 그런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가 청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지 않는가?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이웃에게 해주는 것이 주님께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청하는 것은 다 받는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받고 있나요?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남'은 이웃들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주님께 청하라고 하는 것이니 주님도 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께서 해 주시기를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해 주어야 합니다.
이웃도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때리고 와서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부모에게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형제에게 그것을 주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친구들을 위해 빵 세 덩어리를 청하는 비유에서 만약 친구들이 없이 그냥 빵만 청했다면, 그 친구는 밤에 일어나서 그가 원하는 것을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이기적인 거인'은 사랑과 자비를 통해 결국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거인은 거대한 성을 지닌 자랑스러운 거인으로,
자신의 정원을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고 혼자만의 공간으로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정원은 아름답고 넓었으며, 봄이 오면 꽃들이 피고 나무들이 푸르러지며, 새들이 지저귀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인은 자기를 위해서만 그 공간을 차지하며, 어린아이들이 놀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 버렸습니다.
어린아이들은 거인의 정원을 찾고 싶었지만, 그는 그들을 쫓아내기만 했습니다.
그 결과, 정원은 황폐해지고 봄의 기운도 멀어졌습니다.
나무들은 시들고 꽃들은 지고, 날씨는 추워지며, 정원은 겨울의 차가운 바람에 휩싸였습니다.
거인은 점차 외로움과 불행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거인은 한 아이가 그 정원 안에서 뛰어놀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앉아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에게 마음이 풀리면서, 거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이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그 아이에게 정원을 열어주기로 결심하고,
모든 아이들을 다시 초대합니다.
그 순간, 정원은 봄의 기운으로 가득 차고, 꽃들이 다시 피고 나무들이 푸르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거인은 이제 자신이 이웃에게 나누지 않았던 사랑과 자비가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은혜로 돌아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거인은 더 이상 그 아이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거인이 나이가 들었을 때 겨울임에도 흰 꽃이 핀 나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곳으로 갔을 때 그때의 작은 아이가 서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손과 발에는 못자국이 있었습니다. 거인은 그 아이가 봄이 오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아이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상처에요.
이제 내 정원으로 함께 가요 내 정원은 천국이랍니다.”
다음날 아이들이 정원에 와서 늙은 거인을 보았어요.
하얀 꽃이 가득 핀 나무 밑에 누어 깨지 않는 깊은 잠이 든 모습을 말이에요.
성당에 저에게 찾아오시는 분 중에서 정신적으로 아픈 분들이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아픈 분들은 물질적으로도 가난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는 시간이 아깝기는 하지만, 최대한 들어주려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들 특징 대부분은 신자들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신자들을 막 대하면 자신이 이야기하고 안수도 받으려는 사제가 자신들에게 그것을 해주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입니다.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그 사람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자신이 얻고 싶은 만큼
잘해야 합니다.
저는 ‘탕자의 비유’에서 돈을 다 탕진하고 온 둘째에게는 황소를 잡아주고, 자신을 위해 모든 노력을 한 첫째에게는 염소 한 마리 잡아주지 않은 것이 약간은 의아했습니다.
오늘 복음대로라면 형은 동생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마음도 몰라주고 동생을 비난한 형에게,
그가 비록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염소를 잡아줄 마음이 생길까요?
우리는 하느님께 무언가 청하기 전에 내가 형제들에게 무엇을 주기를 바라는지, 무엇을 주고 있는지부터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도는 ‘이미’ 주신 것을 잘 받으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7-12).”
1)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아버지께서 ‘이미’ 주신 것을 청해서 받아라.”이고,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는, “아버지께서 ‘이미’ 자물쇠를 풀어 놓으신 문을 열고 들어가라.”입니다.
‘기도’는 안 주시는 하느님께 달라고 떼를 쓰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것을 잘 받으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안 주셔서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받으려고 하지 않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분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그것과 내가 바라는 그것이
일치하는 사람은, 또 아버지께서 정하신 ‘그 때’와
내가 생각하는 ‘그 때’가 일치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
또 언제가 가장 좋은 때인지를 모를 때가 많습니다.
모를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 8,26-27).”
성령의 도움을 잘 받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분이고, 그것이 무엇이고, 그 때가 언제인지를 알려 주시는 분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 올바르게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끝까지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고,
인내하면서, 겸손하게, 끊임없이 기도하는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우리가 바라고 있는 것을 청하는 기도를 바치되, 결과는 하느님께 맡겨 드리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기도하는 동안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평화와 힘과 용기’를 얻는 체험을 하는 신앙인들이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소원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평화와 힘과 용기를 얻는 체험을 한다면, 그것은 소원이 이루어진 것보다 더 큰 은총을 얻은 것이고, 그 힘을 통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고, 또 주님께서 언제 주시든지 간에, 주시는 그것이
‘가장 좋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수많은 신앙인들의 생생한 증언입니다.>
3) ‘황금률’은 신앙생활의 ‘기본 원리’와 같은 계명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일은, “하느님은, 인간들이 당신을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그대로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이 당신을 사랑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당신이 먼저 인간들을 사랑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인간들을 사랑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내가 너희를 사랑하니 너희도 ‘나를’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9-11).”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로 실현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하나입니다.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이지만, 실천하는 입장에서는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황금률은, “다른 사람이 너를 사랑하기를 바란다면, ‘네가 먼저’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하기를 기다리면 안 됩니다.
언제나 항상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7,7-12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엊그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그 방법과 내용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깨우쳐주시지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선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보시니 좋았던’ 당신 피조물인 우리에게, 당신께서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시는 우리에게 정말 유익한 것을, 당신께서 주실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충만하게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토록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먼저 ‘청하라’고 하십니다. 청한다는 것은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서 이뤄주시기를 바라는 것을 그분께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다는 뜻입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스스로의 부족한 힘과 능력으로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무리하지 말고, 내 삶을 좋은 방향으로 이끄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당신을 향한 바람과 희망에 응답해 주리라고 믿고 맡겨드리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시기 전에 우리 편에서 ‘먼저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미 다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하기에, 우리가 참된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이 꼭 필요한지를 올바르게 식별하고 간절하게 바라며 당신 앞에 두 손을 뻗음으로써 당신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가득 담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다음으로는 ‘찾으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따뜻한 관심으로 늘 지켜보고 계시기에,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 시련과 고통으로 힘겨울 때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 곁으로 다가오시어 우리를 지켜보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하느님의 모습을 알아보고 그분께서 내미시는 손을 붙잡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사랑과 관심으로 우리를 찾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 사람을 통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내 안에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내 마음 안에 모시면 그분께서 우리 삶을 가장 좋은 길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돌 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넌다고 했습니다. 다리 하나를 건널 때에도 그것이 정말 안전한지 내가 지나가도 되는지를 확인하고 건너는 것처럼, 내가 지금 마음으로 바라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정말 나에게 유익한지 혹시 나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지, 그것이 정말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고자 하시는 게 맞는지, 혹시 그것말고 더 중요하며 더 필요한 것을 내가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하느님의 마음을 두드려보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하느님 뜻에 맞지 않는 잘못된 것을 선택하여 후회할 일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렇게 두드릴 수 있도록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 곁에 서 계시지요.
이렇게 하느님께 청하고 찾고 두드릴 때 우리가 지켜야 할 중요한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우리도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나의 청을 들으시는 하느님의 마음과 입장을 충분히 헤아리며, 내가 하느님의 입장이라도 지금 내가 청하는 것을 들어주고자 하시겠는지를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단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을 청하지 않게 됩니다. 남에게 피해와 상처를 입히는 것을 바라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은 하느님의 뜻과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구원과 행복이 있습니다.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정성을 다하는 기도”
바빌론 유배기간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크세르크세스 임금 왕 때에 내시는 유대인 모르도카이였는데 그를 견제하며
갈등을 빚게 하는 사람은 바로 재상 하만이었습니다.
그는 임금 측근으로 항상 모르도카이와 함께 그곳의 유다인들을 언제나 견제하며
괴롭히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크세르크세스의 부인 와스티가 폐위되고 새로 뽑인
여인이 바로 유대인이며 모르도카이의 양녀인 에스테르였습니다.
하만은 유대인들을 거슬러 음모를 꾸며서 임금에게 이스라엘 인들을 몰살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 순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에스테르는 너무 위급한 마음에 동포를 위해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에스 4,15)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모르드카이와 이스라엘 백성을 원수의
손에서 구해주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도 하느님께 기도할 때 간절한 마음으로 하라고 당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마태 7,7-8)
주님께서는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는 사람을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로 설명하십니다.
우리가 보통 부모의 자식 사랑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작은 티끌이나 눈섶이라도 눈에 들어가면 아픈데, 자식을 넣으면 그 아픔이
오죽하겠어요? 물론 너무 커서 눈에 들어 갈 수도 없지요. 그것은 지극한 부모의
사랑을 빗대어서 표현하는 것으로 세상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부모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10)
부모는 당신은 굶어도 자식을 살리려 하고 자신은 못배워도 자식은 공부
시키려고 합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고생을 자식에게 대물림 시키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주님께서 이런 부모의 사랑에 비교하며 그 보다도 더 사랑이 크신 하느님과
비교를 하십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누구이든
청하는 것을 안들어 주실 리가 있겠느냐?’는 뜻으로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그리고 주님께서 결론으로 황금률(黃金律 the golden rule)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사람에게도 ‘바라는 대로 해주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뜻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더 말할 나위없이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는 결론은 하느님께 기도를 하되 정성을 다해서 하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
250313.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삶
<2025.3.13> 아침을 여는 묵상 (눅 11:14~26절)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삶❞
❚ 인생의 주인을 분명히 정하고, 삶의 주권자가 되시며 왕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어야 합니다.
✔ 우리에게 어떠한 노력이 필요합니까?
➲ 불신의 장애물을 허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14~19절).
예수님이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자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라며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이들은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행하라고 요구합니다(14~16절).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지닌 분이라고 믿지 않는 불신앙으로 가득 차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무너지느니라...”(17절)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말이 옳다면 사탄의 나라는 망해야 하는데, 사탄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기에(18절) 그들의 판단에는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너희 아들들...” 당시 유대인들 중에서도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유대인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말씀(19절)하십니다.
의심으로 가득 찬 삶 가운데에는 참된 자유도 기적과 역사도 없습니다. 죄와 사망으로 죽음의 노예가 되었던 우리 자신에게 십자가 공로로 죄 사함을 얻어 참된 자유를 허락하셨음에도 우리 안에 있는 불신의 장애물이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죄악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상고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언제자 하나님을 향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만이 불신의 장애물을 허물어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온전히 모시고 살아가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감찰하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매일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불신의 장애물을 허물어 버리고 겸손히 주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온전한 믿음으로 헌신하길 노력해야 합니다(20~23절).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세상에 임했다(20절)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세상을 심판하시고 택한 당신의 백성들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시는 손입니다. ‘...이미...임하였느니라...’는 ‘도착했다, 다다르다, 앞에 있다, 선행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했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무장하고 자기 집을 지키는 사탄을 무장 해제시키시는 더 강하신 분(21~22절)으로 오셨습니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23절)...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고 함께하지 않는 자와 비판하는 자는 모두 사탄에게 속한 대적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모으지...헤치는...”(23절b)... 모두 양을 치는 목자와 연결이 됩니다. 목자는 양을 모으는 자이기에, 양을 모으지 않는 자라면 그 역시 양을 헤치는 삯꾼 목자요, 사탄에게 속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사탄 사이에 중립 지대라는 것을 있을 수 없습니다. 둘 중의 하나를 분명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뜨겁든지 아니면 차갑든지 하나를 택하라고 요구하시며, 미지근한 그들을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계 3:15,16)하셨습니다. 마찬가지고 하나님과 재물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예수님을 산상 수훈(마 6:24)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에게 주님은 ‘세상이냐 예수님이야... ’, ‘재물이냐 하나님이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온전하고, 진실한 믿음 아래에서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하며, 전적인 헌신을 결단해야 합니다. 어정쩡하게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진리 되시는 예수님을 우리 인생에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아가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받은 만큼 양이 흩어지지 않고, 헤침을 당하지 않도록 죽을 힘을 다해 헌신하는 목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내 자신을 부정하며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삶 그리고 온전한 믿음으로 헌신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주님의 통치아래 머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24~26절).
쫓겨난 더러운 귀신은 거처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다시 그 사람에레고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돌아와서 보니, 전에 있던 곳이 깨끗하게 청소되고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곧 영적으로 비어 있는 상태, 즉 마음의 주인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에 그 더러운 귀신은 나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거기에 들어와 살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야 하며, 누구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인을 정하지 않은 사람, 즉 누구에게 순종하며 살지를 결단하지 않으면 결국 사탄은 우리 인생에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주님의 특별한 이적과 은혜를 경험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믿음의 여부는 다를 수 있습니다. 문둥병에서 치유함을 받은 열 명 중에서 단 한 명만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 한 명만 구원을 얻었다는 말씀을 듣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을 주인을 섬겼던 옛사람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겨 예수님의 통치하심을 받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의 통치 밖에 머물 때 더 심한 고통과 황폐함에 빠질 수 밖에 없음을 명심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의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죄의 문제가 해결 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우리 삶이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받는 삶으로까지 나아갈 뿐 아니라 주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주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주님의 말씀으로 삶의 방향을 분명히 정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11:14~26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