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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창세기 11: 1-9 “ 바벨탑 ”
모든 사람들은 다들 자기의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바벨탑을 쌓지 않는데요 하시는 분 있습니까? 건축물의 바벨탑이 아니라 자기 이름에 가치와 의미를 두고 사는 것이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에 가치와 의미를 두지 않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이름이란 자기의 전 인격과 전 존재를 나타내는 기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이름이 무가치 해진다는 것은 자기의 존재가 무가치 해지는 것이기에 어느 누구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바벨탑을 쌓는 이유는 자기들의 이름을 내는 것과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 이후에도 창세기의 그 축복의 말씀을 노아의 언약에 기초하여 다시 주셨습니다. 땅에 충만하라 그리고 편만하라는 것은 갖기 흩어져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들의 힘과 기술로 결집된 도시문명을 하나님이 싫어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싫어하고 스스로의 보호를 원하여 가인으로 시작된 도시와 성읍의 건설은 필경 하나님을 배척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흩어져서 살라는 이런 명령을 정면으로 거절하면서 나오는 것이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국가적인 거대한 공사를 하려면 반드시 뛰어난 통치자의 지배아래 효율적인 조직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통치자로서의 자격은 영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탑을 쌓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니므롯이 하였다고 봅니다. 우리가 영웅되기를 원하고 또 다른 영웅을 찾는 이유는 결국 그런 영웅을 통하여 자기세계를 더욱 공고히 구축하자는 것입니다.
바벨탑은 시날 평지에 세워지는데 시날이란 두 강이 나뉘어 지는 곳이라는 뜻이랍니다. 그러니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의 강이 흐르는 비옥한 지역입니다. 이곳에 거대한 탑을 세우는 것이 바벨탑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공사를 보시고서는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 싶어서 언어를 혼잡케 하였습니다. 그러니 공사가 이루어 질수 없고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흩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이란 혼잡케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바벨탑을 쌓는 것을 하나님이 흩어 버리심으로 원래 말씀하신 땅에 편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온 인류가 다 뭉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자 하여도 하나님이 약속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바벨탑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우리 이름을 드러내는 그런 사람인가를 확인하고 회개하면서 오직 주의 이름만 부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의 개인적인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이 사람들의 속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이름을 아담에게 지어 주신 것은, 아담이 이름을 지어 주신 주인의 말에 순종하는 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최초로 무엇을 발겨하면 자기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이름을 지음으로 이름 지어 주신 분의 솜씨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 이후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름에 손해가 오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입신양명(立身揚名)이지요. 출세하여 이름을 날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이름만 날리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이름도 덩달아 날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효도라 하여 족보 책에도 다른 사람보다 페이지를 더 많이 할애하여 그 업적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가 자녀를 닥달하면서 공부하라고 하는 것도 말이야 다 너 잘되라고 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 자녀의 잘 됨은 자기 이름과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도 저도 아니라도 아무 이름 낼만한 업적이 없어도 아들 하나는 두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딸이 아무리 많아도 아들을 두어야 한다는 것은 자기 이름을 이어줄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는 죽어도 자기 아들이 자기의 이름을 이어주기에 자기 존재의 끈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고 나서라도 자기 이름을 두고 제사라도 지내주기를 바라기에 아들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개인의 일평생은 자기 이름 하나 제대로 내어보자는 그런 바벨탑을 쌓다가 한평생을 보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탑을 쌓았다가 비참하게 죽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사울과 압살롬입니다. 사무엘상 15:12절에 사울은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웁니다. 전쟁의 승리는 여호와의 전쟁으로 승리 한 것을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사울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하였는지 우리가 압니다. 사무엘하 18:18절에는 압살롬이 자기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자기 기념비를 세웁니다. 자식 없는 사람이 사회에 기부금을 내든지, 공적으로 자기 비석을 세우는 것도 결국은 자기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개인적 바벨탑 쌓기가 좀더 확대되어 나타나는 것이 창세기의 바벨탑과 같은 국가적인 차원의 바벨탑입니다. 결국 인간들이 힘을 합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 바벨탑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그러지요. 이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뭉쳐야 산다는 것은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종교에서도 서로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기독교 연합회 또는 불교 연합회 등의 이름으로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조계종 사태에 대하여 신문의 광고를 보니 2천만 불자여 모여서 힘을 모아달라고 합니다. 기독교 연합과 별 다를 바 없는 문구입니다. 절이란 세속을 등지고 산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들이 세속의 힘을 원하는 것 자체가 불교의 이단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기에 예수님은 이 땅의 힘과 세력을 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들이 세상의 힘을 원하고 있다는 것은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속고 있으면서도 속는 줄도 모르고 힘을 가지기 위하여 안달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멀리 볼 것 없이 우리 자신의 속을 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 결국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기에 이러한 개인이 모인 것이 사회요 국가입니다. 그러니 단체가 구하는 것도 결국은 바벨탑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속한 가정, 단체, 국가는 이유 없이 잘되어야 하는 것이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곳에 내 이름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른 교회는 다 망해도 우리 교회는 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 이름 때문입니다. 개인이 자기 이름에 가치를 두고서 바벨탑을 쌓는 것이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망하는 길입니다. 마찬가지로 단체나 국가가 자기 이름을 내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에 망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바벨론의 멸망은 예레미야 50장과 5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이름을 내고 자기 힘으로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 자력으로 구원을 이루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벨탑을 쌓는 자들의 사상입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지구의 자원의 고갈을 염려 합니다. 벌써 인구가 60억을 넘었습니다. 지구의 자원이 고갈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면서 우주를 개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어린이의 장난감에도 인류의 우주를 개척하는 우주 항공모함을 만들어 우주를 개척하자는 꿈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인류의 종말을 받아들이지는 아니합니다. 그래서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지면 솟아날 구멍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늘과 지구가 함께 불타면 어떻게 할까요? 그래도 자기는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 이름을 포기하지 못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이 만들어 낸 지금까지의 가장 최고의 바벨탑은 국가입니다. 이 땅의 어린이들이 자라면서 무엇을 배우고 자라는지 아십니까? 이 대한민국의 잘됨을 위하여 교육받고 있는 것입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하는 것이 애국가 가사입니다. 사람들의 한계가 자기 국가입니다. 그 이상도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세계를 연합하는 모임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엔이나 다른 세계적인 협약단체들이 많이 있지만 이들도 결국은 인간의 나라 인간의 이름을 위하는 단체들입니다. 결국 자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 인류의 종말을 우리의 힘으로 막아내자 라는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다니엘서에서는 어떻게 보는 지 찾아보겠습니다. 다니엘 2:31-45절입니다. “봉독”
바벨론왕이 꾼 꿈을 다니엘이 해석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바벨론인데 바벨론의 왕을 누가 세웠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왕이 꾼 그 꿈의 내용이 큰 신상인데 금과 은과 놋과 철과 철과 진흙이 섞인 그런 신상을 본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있는데 다니엘이 알게 하고서 해석을 합니다. 금은 임금이고 그 다음에 은 같은 나라, 놋 같은 나라, 철 같은 나라, 철과 진흙이 석인 나라가 일어날 것과 그 신상이 결국은 사람이 손으로 하지 않는 산에서 뜨인돌이 날아와서는 그 신상을 부수고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34절과 35절에서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상에 가득 하였나이다” 즉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낸 모든 국가와 세계를 호령하고 통치하는 나라들도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은 뜨인 돌에 박살이 나서 다 사라지고 그 뜨인 돌만 태산으로 우뚝 서는 것입니다. 그 뜨인 돌로 이루어진 나라가 44절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히 망하지 아니하는 나라에서 살려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한 나라에 속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아들의 나라입니다. 사람의 손이 가미되지 않은 주님 홀로 십자가 지신 그 나라만 영원히 망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으로 세운 것은 흔들어 무너 뜨려 버리고 흔들리지 안하는 나라만 남기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6-29절입니다. “봉독” 흔들리지 아니할 것만 남기시기 위하여 땅 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흔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별들도 익은 무화과가 떨어지듯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때에 흔들리지 아니할 나라의 위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아들의 피뿌림으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 들어간 자는 이제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의 이름만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4:12절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도다” 이 말씀은 예수 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을 말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이름을 내세우는 자도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여 행한 설교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 이름의 권세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쳤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1절에 이 예수는 건축자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느니라 라고 합니다. 사람의 손에 버리워 졌기에 사람의 손이 가미되지 아니한 돌로서 이제 모퉁이 돌이 되어 새롭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내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만 불러내시지만 어쨋던 우리의 자격 우리 이름의 자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고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자기의 이름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자기의 바벨탑을 쌓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 우리 이름을 내자 이러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합니다. 오직 주의 이름만 높아져야 하는 나라에서 어찌 죄인의 이름을 드러낸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구원받은 자의 이마에 누구의 이름이 있는가를 보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계시록 3:12절입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이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기는 자 곧 적은 믿음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한 이긴 자에게 이름을 기록해 주시는데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록 22:4절에서는 한가지로 나타납니다.
천국에서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게 되는데 그 종들의 이마에 그의 이름에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이름과 자존심 그만 챙기도록 합시다. 언제까지 바벨탑을 쌓겠습니까? 언제까지 자 우리 이름을 내자고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이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은 주의 이름에 있음을 아시고 나의 이름 챙기지 말고 주의 이름에 관심을 두고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7. 창세기 11: 10-31 “ 택한 백성 ”
창세기 11:9절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자 힘을 모아서 바벨탑을 쌓는 자들을 흩어 버리셨습니다. 이제 언어가 같은 사람들끼리 흩어져서 살게 됨으로 바벨탑과 그 성읍의 건설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하는 결과는 이처럼 폐허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잘 분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힘을 들이고 공을 들여서 이루어 놓은 일평생의 업적이 바벨탑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택한 백성을 분별하여 내는지를 살펴보고 우리도 그 길로 따라 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바벨 즉 혼잡케 함으로 온 땅에 사람들을 흩어버리시고 난 후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따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바벨탑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심판 이후에 한사람을 선택하여 불러내신다는 것은 부름을 받는 자의 자격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온 천지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셈의 후손을 선택하시는 것은 노아와의 언약에 따라 덮어줌의 은혜를 아는 자의 후손에서 한 사람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이 족속이 바로 셈의 후손입니다. 이러한 셈의 후손의 족보가 창세기 10장에서 노아의 후손 가인과 야벳과 함께 소개 됩니다만 바벨탑 이후에는 셈의 후손을 다시 거론함으로서 이 계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셈의 후손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이름만 알지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였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이름이 10절에서 23절까지 나타납니다. 셈은 압니다만 셈의 아들 아르박삿이 무엇을 하였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아르박삿은 10:22절에 보면 셈의 다섯 아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10:22절의 기록이 서열 순서라면 아르박삿은 다섯째 아들 중 셋째입니다. 그러므로 셈의 모든 아들이 아니라 그 중의 한 아들의 후손을 통하여 셈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그 선택을 받아 셈의 후손을 이어 가지만 그 사람의 일한 내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활동이 없었지만 이들도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중요한 통로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의 정신은 자 우리 이름을 내자 하는 사상입니다만 그러나 셈의 후손들의 이름은 아르박삿뿐 아니라 셀라, 에벨, 벨렉, 르우, 스룩, 나홀-이 나홀은 데라의 아들이 아니라 데라의 아버지 나홀입니다. 이러한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업적이나 공적이 없습니다. 단순히 결혼하고 아이 낳아 기르고 평범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속에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른 이름을 남기지 못하여도 그저 예수믿는 한 사람이라는 이름만 있어도 이것이 얼마나 복되고 좋은 일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유명한 이름이 나는 사람이 위험한 인물이거나 아니면 죽도록 고생하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밋밋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하는 그런 이름이라도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이름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에 가치를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믿는 사람답게 참으로 조용하게 잠잠히 살아 갈 수 있다면 이것이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족보를 이어 오신 하나님께서 드디어 아브람의 직계가족으로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26절에서 데라는 세 아들을 낳는데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입니다. 아브람은 사래와 결혼하였으나 자식이 없고, 나홀은 밀가와 결혼하여 바벨론에 계속 살았고, 하란은 아들 롯을 낳고 바벨론에서 아버지 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바벨론이 갈대아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갈대아 우르라는 말은 바벨론의 우르지역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갈대아 보다도 바벨론이 익숙하니 바벨론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이러한 아브람의 가족이 바벨론에서 살다가 하란으로 옮기게 됩니다. 바벨론에서 하란으로 옮기는 주도적인 역할은 31절에서 보면 데라가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셨는데 어떻게 데라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의 가능성을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브람이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가는 도중에 데라가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가지 않고 머물렀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2-4절에 보면 아브람을 하나님이 하란에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갈대아 우르 즉 바벨론에 있을 때 부르신 것입니다. “봉독” 바벨론을 메소보다미아 라고도 합니다. 여기에서 보면 아브람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가다가 하란에서 데라가 죽고 나서 다시 가나안으로 갔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데라가 바벨론에서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하란으로 떠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데라는 바벨론에서 무엇을 하던 사람입니까? 여호수아 24:2절입니다. “봉독” 데라는 다른 신들을 섬기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데라, 사라, 밀가의 이름이 달의 신을 가리키는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데라라는 이름은 가장 눈에 띄는 달의 신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대아 우르와 하란 이 지역은 달숭배의 중심지였는데 데라가 바벨론을 떠난 것은 바벨론에 이 당시에 적의 침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데 고고학적이 자료에 의하면 주전 1,950년에 엘람이라는 나라가 바벨론의 우르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데라가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여 하란으로 피하였으나 하란에서 머문 것은 그곳도 달숭배의 중심지였기에 그곳에서 가나안으로 가지 않고 머물렀다고 보는 것입니다.
복잡하지요. 그러므로 성경이란 해석하기에 따라 여러 가지 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해석의 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지지 아니하면 한참 가다보면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보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길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실 땅을 바라보고 떠난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떠나라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첫 번째 내용입니다. 바벨론땅에 그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셔도 되실텐데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생존의 조건이 가장 좋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로 올라 갈수록 씨족사회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은 이미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출애굽에서도 하나님은 애굽에서 떠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출애굽이란 애굽에서 떠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말씀하실 때는 어디에서의 구원이신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영어로 하면 from 이지요 어디로부터 구원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를 향한 구원인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에서 가나안으로의 부름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디서 어디로의 부르심입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영벌에서 영생으로의 부름입니다. 이러한 방향성이 분명하지 않으면 구원을 단지 현재의 상태보다 더 나은 상태를 말하게 되는 것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부자 되는 것, 병든 자가 건강해지는 것, 이런 식의 구원을 말하게 되면 하나님이 아브람을 바벨론에서 불러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시는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벨론이 살기 좋습니까? 가나안이 살기 좋습니까? 애굽이 살기 좋습니까? 가나안이 살기 좋습니까? 세계 4대 문명 발상지라는 곳이 어디 입니까? 다들 강을 끼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인도와 중국이 다 강을 끼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을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문명발생지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나오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아브람을 따라 함께 떠난 자들이 누구인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다음주에 계속하여 보겠습니다만 아브람에게 붙어 있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고생길입니다. 비옥한 바벨론을 두고서 알지도 못하는 낯선 곳으로의 떠남이 얼마나 망설여지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기에 이들을 인도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비록 그 과정은 힘들고 어려움이 중첩되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나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인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동일하게 세상이 좋고 세상에서 좀더 행복한 삶을 추구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게 하시고 그 아들의 나라를 찾아 나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는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름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라 나선 자는 직접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람과 함께 떠난 자들의 모습을 봅시다.
우선 데라입니다. 다른 아들도 있었지만 아브람과 함께 바벨론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31절에 보시면 데라가 아브람과 롯과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하란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출발을 하였는데 도중에 머무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갈 길은 험해 보이고 현재의 삶은 좋아 보이니 머무는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일하였던 데마라는 사람은 디모데후서 4:10절에서 이렇게 말씀 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세상이 좋아서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데라는 하란에 머문 것입니다. 우르에서 우상을 섬겼는데 하란에서도 우상을 섬기는 것이 많았기에 그곳에 적응하기가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안전하다 안전하다 하는 곳이 위험의 지경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떠날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롯입니다. 롯은 고아입니다. 어디 갈 곳이 없습니다. 삼촌 아브람이 거두어 주니까 롯은 싫던 좋던 아브람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이것이 롯에게는 복인 것입니다. 비록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불행이 그에게 있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복의 통로로 세우신 아브람에게 붙어 있었던 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래입니다. 물론 아내이기에 따라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래는 어떤 여인입니까? 아이를 못 낳는 여인입니다. 요즈음이야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하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아이를 못 낳는 것이 수치였습니다. 그러한 사래가 그런 동네를 떠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는 것이 좋다고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래가 아브라함을 따라 나섰다가 나중에는 열국의 어미가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12장 5절입니다.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그리고 누구입니까? 얻은 사람들 아브람의 종들입니다. 종들이란 주인에게 속하여 진 사람들입니다. 주인의 소유이기에 주인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 가야하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아브람의 종들이 된 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편입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7: 12-14절을 봅시다. “봉독”
할례를 받는데 돈으로 산 자든지 즉 종이라도 할례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표로 구약시대에 주어진 것입니다. 할례란 사람의 실력이 아님을 증거하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되는 것이 아브람의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라고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잘난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대하여 가치를 둘 필요가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환경이나 처지를 탓하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 아브람처럼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과 그 뜻을 더욱 풍성히 알아감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강과 복을 누리시고, 그러한 복을 은혜로 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