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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신 몸
함영연
“좋은 모습으로 만나세.”
사기장은 백자들을 조심스럽게 가마 안으로 옮겼다. 백자접시도 그곳에 놓여졌다. 가마 안이 서서히 데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기운으로 가득 찼다. 백자접시도 열기에 휩싸였다.
“아앗, 뜨거워!”
저도 모르게 찡그렸다.
“흠흠, 끝까지 견뎌야 한다.”
가마가 일러주는 말이 웅웅 울렸다. 백자접시는 안간힘을 써서 버텼다.
그렇게 견디고 있자니 가마 문이 열렸다. 시원한 공기가 몰려와 후끈한 기운과 섞였다. 희미하게 사물들이 보였다. 잘 견딘 것에 대해 환호할 순간이었다.
“쯧쯧, 저걸 어쩌나!”
분위기 깨는 소리였다. 백자접시는 누군지 궁금했다. 앞에 백자병이 보였다. 매끈하고 수려했다.
“날 보고 그러는 건 아니지?”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맞아, 너 말이야.”
“뭐라고?”
“금이 갔잖아. 안됐다, 쯧쯧.”
백자병은 빈정거리기까지 했다. 뜨거움에 찡그렸던 게 생각났지만 마음에 두지 않았다. 대신 산중턱에 흙으로 있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임금님이 쓰실 그릇을 만든다지?”
“그려, 이곳 양구백토가 우수하다는 건 다 아는 일이지.”
“얼씨구, 산 좋고 물 좋고 백토도 좋고!
사람들은 백토를 칭송하며 정성껏 담았다. 그렇게 담겨 와서 물레에 돌려지고 가마에서 초벌구이한 뒤, 유약을 바르고 또 구워지기를 거쳐 여기까지 온 것이다.
가마 안의 열기가 수그러들자, 백자들이 하나 둘 소중하게 들려 밖으로 나갔다. 백자접시도 사기장의 손에 들렸다.
“아깝구먼. 임금님이 쓸 그릇, 어기가 실금이 가서는 안 되지.”
사기장은 망설임 없이 바닥에 던졌다.
“쨍그랑!”
백자접시는 떨어지며 한 쪽이 깨졌다. 가늘게 금이 간 곳이었다.
‘아아,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백자접시는 정신을 잃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간질이는 느낌에 눈을 떴다. 직박구리가 떡갈나무 가지에 앉을 때 이파리가 떨어져 내린 것이다.
“안 됐군, 안 됐어.”
처음 보는데도 직박구리는 대놓고 한심스러워했다.
“난 임금님이 쓰실 그릇이었어!”
욱신거리는 걸 참으며 말했다. 백자접시는 바닥에 뒹구는 자신의 처지를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면 뭐하냐? 네 모습을 봐.”
직박구리는 백자접시의 깨진 부분을 부리로 콕콕 찔렀다.
“험험, 그만 해라.”
지켜보던 가마가 말렸다. 직박구리가 꼬리를 살짝 들었다 내리며 날아올랐다.
“심 사기장은 워낙 철저해서 빈틈이 없지. 그래도 할 일이 있을 게다. 저기 봐라.”
주위에 깨진 백자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 중에는 흙이 쌓여서 풀이 자라고 있는 것도 보였다.
“전 아무나 담을 수 없어요. 임금님 음식 담을 몸이었는데요.”
백자접시는 바람에 낙엽이 떨어져 담길세라 몸을 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사기장이 손볼 데가 있는지 가마를 살펴보고 있었다. 갑자기 주위가 시끄러웠다. 조총을 든 험상궂은 사람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그들은 사기장을 에워쌌다.
“무슨 짓이냐?”
사기장이 호통을 쳤다.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기장을 잡아가려고 했다.
“이 팔 놓지 못하겠느냐?”
사기장은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저, 저 왜구들!”
직박구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떡갈나무 가지에 내려앉았다. 주위의 나무들이 바람에 파르르 떨었다.
“왜구들이라고?”
자신의 문제로 힘겨워하던 백자접시도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바다 건너에서 쳐들어온 아주 무시무시한 놈들이지. 그놈들이 사기장이나 도공을 마구 잡아간다더니 사실이었어.”
“왜 그러는데?”
“도자기 만들 기술이 없어서 뛰어난 기술자들을 잡아가는 거래. 왜놈들이 눈이 시뻘겋게 찾는 사기장이 있다고 했어.”
마을에 내려가 들은 이야기인 것 같았다.
“누군데?”
“그게…… 아!”
직박구리가 말하다가 탄식을 했다. 주위에 슬픈 침묵이 흘렀다. 심 사기장이 바로 뛰어난 기술자였던 것이다.
사기장이 끌려간 뒤 가마는 점점 온기를 잃어갔다. 백자접시는 활활 기운을 주던 가마를 떠올리며 바라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
가마의 웅숭깊은 소리가 나른한 햇살로 퍼졌다.
“저를 품어주던 가마님 생각을 했어요.”
“열을 골고루 품어야 균열이 생기지 않는데 넌 너무 품으려고 하더구나. 그래도 세상에 나온 이유가 있을 게다. 맡겨진 일이 있을 게야.”
가마는 그 말을 또 했다. 백자접시는 견디려고 그랬다고 항변하고 싶었다.
“아, 특별한 백자를 품었던 일이 생각나는구나.”
가마는 자신에게 맡겨진 지난 일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특별한 백자요?”
“지금 사기장님 말고 전에 있었던 사기장님 때 일인데 발원을 담은 백자를 품었지.”
“발원이요?”
“부처님에게 비는 소원을 백자에다 새긴 거였어.”
“소원을 이뤄주는 백자였네요.”
“그렇지. 긴장되었지만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껏 품었다.”
가마의 목소리가 단단하게 느껴졌다. 소원을 새겼다는 가마의 말이 백자접시의 마음에 스미고 있었다.
그런데 가마 둘레의 풀들은 하루가 다르게 우거지고 가마 한쪽 귀퉁이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담담하게 견디던 가마도 점점 힘을 잃어갔다.
“힘내세요. 가마님이 곁에 있어서 얼마나 든든했는데요.”
“힘을 내야지. 그래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폭우가 내리는 날, 가마는 형체를 알 수 없게 무너져 내렸다.
“아, 안 돼요.”
백자접시는 무너진 가마와 자신의 처지가 겹쳐 다시 팽개쳐진 기분으로 며칠을 보냈다. 임금님 그릇으로 쓰일 몸인데 이렇게 될 줄이야. 앞으로 어찌 지낼지 아득했다.
문득 가마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맡겨진 일이 있을 거라고?’
백자접시는 그 말을 붙잡았다.
“제발 제게 맡겨진 일이 무언지 알게 해주세요. 이렇게 끝나고 싶지 않아요.”
백자접시는 스스로 의미를 새기며 간절하게 하늘을 우러렀다. 몸에 뜨거움이 번졌다.
“아휴, 시끄러워. 편하게 쉴 수 없네.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 네 처지를 봐.”
마침 직박구리가 날아와 떡갈나무에 앉으며 지청구를 했다.
“내 소원까지 뭐라고 하지 마라. 난 양구백자거든.”
“알아, 양구백토로 빚은 양구백자란 걸. 임금님 그릇이라며?”
직박구리가 날개를 파닥였다.
“이젠 중요하지 않아. 다만 내게 맡겨진 일을 찾고 싶을 뿐이야.”
그렇게 기원하는 나날이 깊어졌다. 흙바람이 불어와 흙을 쌓아도 백자접시의 심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날이 더욱 맵차지더니 풍성풍성 눈이 내렸다. 허물어진 가마 위에 눈이 쌓이고 백자접시에도 쌓였다.
‘안 돼. 이렇게 끝나고 싶지 않아.’
백자접시는 서서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의 세월이 흘렀을까. 고요가 머물던 곳에 사그락 사그락, 두런두런 소리가 들렸다.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누군가의 신발이 흙 속으로 푹 들어와 백자접시의 귀퉁이를 건들었다. 그 바람에 흙 속에 묻혀 있던 백자접시 귀퉁이가 흙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백자접시는 긴 잠에서 깨어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전 사람들과 옷매무새가 달랐다. 가마 쪽을 보았다. 터가 어디인지 가늠조차 어려웠다. 떡갈나무도 보이지 않고 끊임없이 쪼아대듯 말하던 직박구리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지나가며 또 백자접시를 건들었다. 신경 쓰이는 건 뒷전이고 품었던 소원이 폴폴 살아났다.
“잠깐만요. 전 양구백토로 만들어진 양구백자예요. 거슬러 올라가면 소원을 이루어주는 백자도 있었대요. 저도 소원을 담았어요. 제가 세상에 나온 이유를…….”
백자접시는 온 마음을 모았다. 그때였다. 마지막으로 지나가던 사람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백자접시 주변의 흙을 걷어냈다.
“이리 와 보게나. 이것 보게나.”
“연구원님, 뭔데요?”
앞선 사람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드러난 백자접시를 살폈다. 바짝 긴장이 되었다.
“백자잖아요.”
“흙에 묻혀 있어도 흰 구름 같은 색을 보니 양구백토로 구운 것 같은데.”
“양구 백토가 우수해서 광주 분원에서도 흙을 가져갔다는 기록도 있으니 양구백자면 소중한 자료가 되겠는데요.”
“양구백자의 역사를 또 찾은 건가요?”
사람들이 흥감스러워했다.
“가마터도 있지 않을까?”
“이런 곳에요?”
“깨진 백자가 있는 걸 보면 있을 것 같은데. 양구에서 백자를 구웠다는 사실은 금강산에서 발견된 이성계발원사리구를 봐도 알 수 있잖아.”
가마가 얘기한 특별한 백자를 말하는 듯했다.
“맞아요.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어요. 정말로 부처에게 비는 소원 내용에다 방산사기장 심룡이라고 새겨져 있던데요. 이곳 양구 방산면에서 백자를 구웠다는 자료지요. 조선백자의 시원이 양구라는 것도 증명해주는 거고요.”
“아하!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기 전 만 명의 발원을 담아서 구운 백자들 말이지요? 다음 해에 조선을 세웠으니 대업을 이룬 거네요. 양구백자에 소원을 담으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그때 생긴 건가 봐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소원을 이루었군요. 저도 양구백자니까 소원이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저에게 맡겨진 일이 무언지 알고 싶어요.”
백자접시는 절실했다.
얼마 뒤에 백자접시는 학술포럼에 소개되었다. 백자접시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다른 백자 조각들도 찾을 수 있었고 가마터까지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깨진 백자접시가 큰 역할을 하네요.”
“그러게 말예요.”
학술포럼을 마치고 백자접시는 사람들에 의해 어딘가로 옮겨졌다.
“이젠 여기서 지내세요. 귀하신 몸!”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곳은 양구백자박물관 전시실이었다.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양구백자의 역사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출처 : <<양구 백자 그 순수의 시간 ( 강세환 등 25인 글/ 양구백자박물관 >> 중에서
첫댓글 백자조각의 소중한 꿈 덕분에 오늘 날, 양구백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되었네요.^^
귀하신 몸, 백자조각 화이팅~!
깨진 백자조각이 큰 일을 했네요. 감동어린 동화 한 편으로 양구백자의 역사까지 알 수 있게 되었어요.
깨진 백자 조각이 소원을 이루고 양구백자 박물관에 귀한 몸이 되었네요.
감동적인 동화 잘 읽었습니다.^^
사기장에 내쳐졌지만 그 숱한 세월을 이겨낸 양구백자. 감사합니다.
양구백자에 대해서도 알 수 있으면서 재미 있게 잘 읽었습니다.
양구백자...부끄럽게도 처음 접한답니다. 알게 되어 기쁩니다. 더 많은 배경지식들을 쌓도록 노력해야 겠네요.
양구백자에 대해 청탁받아서 쓴 원고예요. ㅎㅎ
귀한 작품 공유해 주셔서 감사해요!^^
역사 동화를 찾던 중 우연히 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양구백자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