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46
11월19일[연중제33주간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eK5AX67mhM8
[살레시오회 이현진 바오로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혹시라도 지금 인생의 최저점(最低點)에 서 계십니까?>
자캐오 회개 사건은 아주 짧은 스토리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리코라는 도시를 들르셨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그분의 동선을 뒤따르기도 하고 길가에 나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천천히 걸어가시던 예수님께서 큰 돌무화과 나무 앞에 딱 멈춰서셨습니다. 숨어있던 자캐오를 보신 것입니다.
당시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당시 자캐오는 예리코에서 무시 못할 존재였습니다. 죄인으로 소문난 사람이었지만, 지역 유지였습니다. 그런 자캐오가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아마도 그냥 모르는체 하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를 뚫어지게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꽤나 짖궂은 분이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끄럽고 송구스러웠던 나머지 애써 몸을 숨기고 있던 그였는데,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셨으면 좋으련만, 굳이 멈춰서서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의 시선과 자캐오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자캐오의 심정이 어떠했을 것인지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긴장감이 밀려와 숨이 멎을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아니, 생면부지의 저분이 왜 내 앞에 서시는 거지? 왜 나를 빤히 바라보시는 거지? 저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데, 내 어두운 과거를 모두 알고 있을텐데, 오늘 이러다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인 창피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자캐오의 걱정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언성을 높이지 않으십니다. 화를 내지도 않고 야단치지도 않습니다. 세상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복음 19장 5절) 자캐오는 ‘존귀하신 분이 내 집에 머물겠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생각하며, 다람쥐처럼 조르르 나무 아래로 내려섰습니다.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하신 예수님의 배려 앞에 자캐오의 눈에서는 쉼없이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크신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어둡고 스산했던 자캐오의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하고 찬란한 봄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반전은 그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주님 사랑 앞에 수전노 자캐오는 자신도 모르게 지갑을 활짝 열어버립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복음 19장 8절)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반전, 세상 사람들은 그의 구원 가능성을 0퍼센트로 봤는데, 주님께서는 그에게 100퍼센트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복음 19장 9절)
예리코는 해저 258m에 건설된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로 유명합니다. 서쪽 40㎞에 위치해 있는 예루살렘과 무려 1000m 넘는 고도차를 보입니다. 그런데 가장 높으신 예수님께서는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에서 살아가던 가장 키 작은 사람, 가장 짙은 어둠 속에 살아가던 자캐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의 집에 머무르시며 그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회개하는 그를 칭찬하시며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자캐오에게 베풀어진 즉각적인 구원의 선포,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자캐오는 열렬히 예수님을 뵙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가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열렬히 바라보고, 간절히 기다리고, 진지하게 들음을 통해 다가옵니다. 혹시라도 지금 인생의 최저점(最低點)에 서 계십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 크게 먹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머지 않아 기적처럼 그분께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 옛날 자캐오에게 하신 것과 똑같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snXUbWNCOa0
++++++++++++++++++
<욕망의 종말: 아버지의 인정>
세관장 자캐오는 부자였습니다.(루카 19,1-10 참조)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 정성을 보시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 중에 자캐오의 집에 가서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캐오는 자기 집에 ‘기쁘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으기만 했던 삶에서 내어주는 삶으로의 전환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였는데 재물을 좋아하는 욕구를 동시에 지니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캐오는 왜 굳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려 했을까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없애고 싶었을까요? 돈에 대한 욕심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욕심을 제어할 수 없는데 욕심은 자아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욕심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아를 버리면 나를 움직일 선장이 없어집니다. 따라서 자아를 밟고 내 주인이 되실 분을 내 안에 모시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욕심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인정받지 못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인정해 줄 때 자녀들이 굳이 돈 욕심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님이 다 책임져 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사정이 바뀝니다. 부모가 자신의 참 부모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눈을 다시 넣어줄 수도 없고 생명을 다시 줄 수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불안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감을 채우기 위해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이 커지는 시기가 사춘기입니다. 참 창조자, 참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 이 욕구는 그래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구는 결국 ‘아버지로부터의 인정’으로 종말을 맞습니다. 자캐오는 아버지의 인정이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자 곧 부모는 자녀 앞에서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쫓지 않습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같은 욕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인정받을 때를 생각하며 부모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의 위로를 기대합니다.
로빈 윌리엄스와 멧 데이먼이 주연한 영화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의 줄거리입니다. 고아인 ‘윌(멧 데이먼)’은 양부모에게 길러졌지만, 양아버지에게 학대만 받고 컸습니다. 지금은 MIT 공대에서 청소부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윌은 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 수학, 법학, 역사,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천재입니다. MIT공대에 노벨 수학상을 수상한 램보 교수가 복도에 써 놓은 문제를 단숨에 풀어버립니다. 누가 그 문제를 풀었는지 찾아내기 위해 그 교수는 더 어려운 문제를 복도 칠판에 써 놓았고 윌이 그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목격합니다.
하지만 반항기 어린 윌은 교수까지도 무시합니다. 그리고 지나가다가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가 보이자 달려가 마구 두들겨 팹니다. 그러다 자신을 말리는 경찰까지 폭행합니다. 이전까지는 천재적인 머리로 자신을 변호하여 풀려났지만, 경찰 폭행은 수천만 원의 보석금이 아니면 영창을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램보 교수는 노벨상을 타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내어놓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재 윌을 빼내기 위해 두 가지 제안을 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여 램보 교수를 도와줍니다. 그러나 정신과 치료는 잘 안 됩니다. 정신과 치료를 하는 사람들보다 윌이 한 수 위였기 때문입니다.
램보는 마지막 희망으로 자신의 친구 숀에게 부탁합니다. 숀은 얼마 전 아내와 사별하여 거의 폐인처럼 사는 시골 대학 심리치료 교수입니다. 숀을 본 윌은 그림 하나를 보며 숀을 다 파악합니다. 배 위에 있는 외로운 남자의 그림입니다. 그러며 아내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함부로 말을 합니다. 역시 숀도 화가 나서 윌에게 폭력을 쓰려 합니다. 그러나 어쩐 이유에서인지 숀은 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만나겠다고 합니다.
숀은 다른 정신과 의사들과는 다르게 그가 함부로 말한 아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말해줍니다. 천재인 것은 알겠지만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아픈 면을 말했으니 윌도 마음을 열라고 합니다.
윌은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이 어렸을 때 부모에게 버려지고 양자로 입양되었으나 그 집에서도 양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던 것을 말합니다. 윌은 어쨌건 그런 환경 때문에 자신이 지금 망나니처럼 사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었습니다. 숀은 말합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윌은 자신도 안다고 말했고 자꾸 그러니 화를 내다가 정말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전까지는 이런 위로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잘난 척하며 남을 깔보며 사는 삶이 합리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위로를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빼낸 램보 교수보다는 아버지와 같이 자기를 안아주는 숀에게 위로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누구도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 아프게 했던 여인에게 용서를 청하고 그녀를 찾아 떠나며 영화가 끝납니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 것에 욕심을 내는 사람은 나의 창조자가 될 수 없음을 압니다. 부모님은 자녀 앞에서 그런 것들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우리는 참된 창조자, 곧 세속-육신-마귀에서 멀어져 순결한 사랑만을 간직한 이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부모, 혹은 창조자의 위로만이 나를 모든 욕망에서 자유롭게 해 줄 참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체는 바로 이런 목적으로 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인정하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당신과 하나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임을 믿게 해 주십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가 욕망의 덫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세상에 이런 위로와 인정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욕심을 부리며 사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미사의 목적은 이렇게 내 안에 자아와 생존 욕구를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하시게 하기 위함이지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치 맛있는 음식과 몸에 좋은 음식을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욕심과 인정,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세(代洗)’를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대세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세례를 받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세례입니다. 대개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교리를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는 분에게 줍니다. 병의 증세가 위중해서 하느님 품으로 갈 수 있는 분에게 줍니다. 형제님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대세를 위해서 형제님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형제님은 외견상 매우 쇠약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뚜렷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본인이 세례명을 직접 정하였습니다. 2년 전에 세례를 받았던 아내와 중학생 때 세례받았던 딸과 아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저는 형제님과 가족들에게 천주교회의 4대 교리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형제님은 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 하느님은 삼위일체라는 것,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 착한 이에게는 상을 주고 나쁜 이에게는 벌준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형제님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2년 전에 은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은 예전에 성경을 2번 읽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시간 되면 성경을 써 보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필리포스는 일어나 길을 가다가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로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면서, 자기 수레에 앉아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 그때 성령께서 필리포스에게, ‘가서 저 수레에 바싹 다가서라.’ 하고 이르셨다. 필리포스가 달려가 그 사람이 이사야 예언서를 읽는 것을 듣고서,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서, 필리포스에게 올라와 자기 곁에 앉으라고 청하였다.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 이렇게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 내시가 말하였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마음을 다하여 믿으시면 받을 수 있습니다.' 하고 필리포스가 대답하자, '나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하고 그가 말하였다. 필리포스와 내시, 두 사람은 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다.” 저는 세례를 받고 싶어 하는 형제님의 의지를 보았습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아버지 곁에 있는 딸의 사랑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자캐오’의 이야기입니다. 자캐오는 필리포스에게 세례를 받았던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권위와 세상이 주는 재물로는 영적인 목마름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자캐오는 바람 따라 들려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표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꺼이 자캐오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대세를 청하였던 레오 형제님, 세례를 받고자 했던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 타는 목마름으로 예수님을 찾았던 자캐오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정입니다. 진리를 찾았다면 다른 것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우리들 또한 주님께 대한 목마름으로, 주님께 대한 열정으로, 주님께 대한 희망으로 주님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9,1-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셨을 때 자캐오를 만나신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소외당한 이 자캐오는 예수님의 자비를 입는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2절) 그는 세관장이었다. 그는 탐욕에 찌들고 재산 증식이 유일한 목표인 사람이었다. 세리들이 거의 다 그러한 사람이었다. 이 가운데서 자캐오는 주님의 자비를 얻는 사람이 되었다. 자캐오가 회심한 과정을 보자. 그는 예수님을 보려는 간절한 마음에서 돌무화과 나무로 올라갔다. 그 안에서는 구원의 씨앗이 싹텄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고는 자캐오에게 손길을 뻗으신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절) 여기서 “군중에 가려”(3절)라고 했는데, 군중은 그의 죄를 가리킨다. 그는 군중을 떠나, 즉 죄를 떠나 나무 위로 올라갔고 거기서 군중의 방해 없이 예수님을 볼 수 있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는데 장애가 되는 군중을, 죄를 무시하고, 대신 “바보 같은 열매”를 맺는 돌무화과나무 올라갔다. 우리도 끊임없이 죄를 벗고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뵙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오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본 것만도 큰 은총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게 되었다. 은총이 쏟아져 내리고, 사랑으로 마음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8절) 절반을 내놓겠다는 것은 절반은 갖겠다는 것이 아니라, 갚을 것이 있다면 갚기 위해서이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9절) 자캐오는 칭찬 들을 만한 사람이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가 천국의 문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많은 재물이 그를 하늘 나라의 입구로 데려다주었다. 재물이란 장애가 아니라, 영광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유가 아니라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 죄이다. 예수님은 자캐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재산을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러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0절) 모두가 잃은 이들이며 죄 없으신 유일한 분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소설가인 C. 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설정과 내용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주인공 스크루테이프라는 노련한 악마가 젊고 미숙한 악마인 조카 웜우드에게 영혼을 유혹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통하여 악마가 어떻게 인간을 유혹하고, 어떤 상황을 즐거워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환자(영혼)에게 모든 일에서 중용을 지키라고 말해 주어라. ‘종교는 지나치지 않아야 좋은 것’이라고 믿게만 하면 그의 영혼에 대해서는 마음 푹 놓아도 좋아. 중용을 지키는 종교는 우리한테 무교나 마찬가지니까. 아니, 무교보다 훨씬 더 즐겁지”(『스크루테이프의 편지』, 8편). 빠짐 없이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그의 신앙이 점잖게 중용을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신앙이 없는 것보다 오히려 더 나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요한 묵시록에서 주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안타까워하십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3,15)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지만, 그 말씀에 온전히 헌신하여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이와 반대로 복음의 자캐오는 아주 차가웠지만, 예수님을 만난 뒤 아주 뜨거워진 사람입니다. 그는 세리이고 죄인이었지만, 그리스도를 자기 집으로 맞아들인 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고 자기 죄를 네 곱절로 기워 갚겠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하느님께 온전히 나를 맡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삶의 방향을 정하고, 그 삶에 헌신하겠다는 뜨거운 결단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르심에 응답했다면, 당연히 회개와 보속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10)
1)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부르시고 자캐오가 그 부르심에 응답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자캐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인 일은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예수님께서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캐오의 문을 두드리신 일과 같습니다. 아마도 자캐오는 예수님의 소문을 이미 들었던 것 같은데, 그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쓴 일을,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모든 사람’을 향해서 하신 일이고, ‘모든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 일이고, ‘모든 사람’을 부르신 일입니다. 자캐오만 따로 특별히 부르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자캐오만 부르신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부르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자캐오가 응답한 이야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데, 그 부르심에 ‘모든 사람’이 응답하는 것은 아니고, 무시하고 외면하는 사람들도 있고,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 응답했더라도 온 마음과 온 삶으로 응답하지는 않고, 겉으로만 응답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몸만 따르고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미사 참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몸만 성당에 있고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다면, 그것은 미사 참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콜로 3,1-4)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ㄴ-10)
자캐오가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혹시라도 횡령한 일이 있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자신의 온 삶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겠다는 결심을 말한 것입니다.
3) 우리는 그의 직업이 세관장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는 그것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했고, 어떻게 변화했고, 어떻게 ‘새 인간’이 되려고 노력했는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기 위해서 새롭게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응답’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보속’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회개’와 ‘보속’은 ‘낡은 삶’을 버리고 ‘새 삶’으로 나아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새 인간’으로 변화되지는 않고, 그 ‘삶’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다르지 않다면,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 아닙니다.>
4)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이라고 예수님을 비난했던 사람들은, 자캐오의 직업만, 또는 과거만 생각하면서, 그의 변화는 보지 않으려고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직업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자캐오의 변화를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직업이나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모습만, 즉 그의 변화된 삶과 마음만 보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라는 말씀은, 자캐오의 응답과 회개와 보속을 인정하신 말씀이고, 그가 ‘구원의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인정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오늘’이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바로 ‘오늘’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 내용은 루카 복음서에만 등장하는 일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여정 가운데 예리코에서 일어납니다. 등장인물은 예수님, 자캐오, 군중입니다. 자캐오는 로마 제국의 위임을 받아 국경 도시인 예리코의 세관 업무를 담당하던 세관장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자캐오를 ‘민족의 반역자’, ‘동족의 고혈을 빨아먹는 자’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 자캐오는 예수님을 직접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키가 작아 군중에 가려 그분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에 오릅니다. 예수님께서 위를 쳐다보시고, 자캐오의 집에 머무르시기로 하십니다.
자캐오는 기쁨에 넘쳐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군중은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며 투덜거립니다. 유다교 전통에 따르면,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 행위는 방문자도 부정하게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자캐오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다른 이의 재산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말합니다. ‘네 곱절’은 구약의 율법이 명하는 것 이상의 배상일 뿐 아니라, 로마법도 명백한 절도 행위에만 ‘네 곱절’의 배상을 적용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캐오는 동족의 편견과 단죄에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시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캐오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자캐오의 회개 이야기로 ‘예수님께서는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라는 루카 복음서의 중심 주제가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죄인’이라고 단정한 이웃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죄인의 회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수 있습니다.
=====================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자캐오는 세리이며 부자였습니다. 실제로 당시 세리들은 세금을 징수하면서 부당하게 이득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로마는 세금을 효율적으로 거두어들이려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세금 징수원으로 고용하고 세금이 덜 걷히면 세리들이 물어내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제도는 자연스럽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결과를 가져왔으나, 세리들은 사람들에게 외면받았고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던 로마를 이롭게 하는 민족의 반역자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자캐오를 가리켜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데에서 이미 그가 사람들에게 큰 죄인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큰 어려움 없이 살았을 그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은 인생의 전환점이 됩니다.
그의 집에 머무르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자캐오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기쁨은 벌써 자캐오를 변화시킵니다.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자캐오가 변화되는 중심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자캐오가 이전의 삶을 바꾸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결국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기쁨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은 이전의 것을 바꾸어 이웃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힘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에서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19,9)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선뜻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 앞에 나서지 못하고 망설이게 하는 자신의 그림자, 곧 열등감을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때론 그 열등감이 외적인 신체적 조건이나 외모, 내적인 성격이나 능력, 학벌이나 직업 혹 신분 등에서 기인하며, 그로 인해 삶의 태도나 행동 방식이 자연스럽지 않거나 자유스럽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의 자캐오는 바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상이었지만, 숨은 열등감에서 벗어나 참된 자신을 회복해 나가는 내적 치유와 구원의 아이콘입니다.
‘자캐오’란 이름은 바르다 혹은 깨끗하다, 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관장 자캐오의 삶은 자신이 지닌 이름처럼 바르거나 깨끗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그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도 자신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그림자를 부정하고 그림자를 다른 것으로 치장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삶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으며, 키가 작았다고 소개됩니다. 당시에 멸시받던 세리라는 직업으로 보나, 신체적으로 보나, 그는 온통 열등감을 안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의 여정은 한마디로 우왕좌왕하면서 부정부패, 중상모략, 권모술수, 이중적인 생활, 착취로 얼룩진 흠이 많은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세월이 흐르면서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취득하고 소유했지만, 그 어떤 것 심지어 돈으로도 그의 열등감은 벗어 버리거나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겁니다. 오히려 그의 삶은 갈수록 공허해졌으며, 소외감은 더욱 커져만 갔으리라, 짐작합니다. 넓고 화려한 집에 호사스러운 실내장식과 고급 가구들로 넘쳐나는 집이라 할지라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집은 싸늘한 무덤과 같은 곳이고, 그에 반해 외로움과 공허감은 더 깊어지기만 했을 겁니다.
삶의 진정한 행복은 따뜻한 가슴으로 서로 사랑을 나누고, 눈을 마주 보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웃을 수 있는 곳에 참 행복이 있습니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고 사람이 머문 흔적이 없는 곳에 아무리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부귀영화와 향락을 누린다고 해도 그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사막의 영성가 까를로 까레또는 『우리가 하느님의 심연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죄악에서다. 악의 심연 밑바닥에 도달할 때 우리는 가까이 있는 은총의 심연에 눈뜨게 된다.』라고 자신의 영적 체험을 바탕으로 고백합니다. 이는 곧 인간이 비참의 심연에 떨어졌을 때보다 인간의 눈에 하느님이 분명히 보이는 때는 없다는 공통된 경험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캐오 역시도 자기 내면에서부터 이것은 진정으로 내가 원하고 바라는 삶이 아니다, 는 처절한 고뇌와 의문으로 길을 묻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자기가 사는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모든 일은 다 때가 되어야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한창 잘 나갈 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자케오가 관심을 가졌겠습니까? 이미 그가 알고 있던 소문,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동료 세리 마태오도 제자로 부르실 만큼 아무런 편견을 가지시지 않았다는 소문도 예수님을 향해 달려 나가는데 작용하였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분을 보려고 달려갔지만, 키가 작은 그는 군중 때문에 볼 수가 없자 예전 같았으면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을 행동을, 주저함이 없이 나무 위로 올라가서 마침내 예수님을 눈여겨 바라봅니다. 나무에까지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을 뵙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니 마음 부듯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좀 더 그분께 가까이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 듯 예수님께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자신의 열등감이 치밀어 올라옴을 느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자캐오의 절박한 마음을 알아보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19,5) 하고 먼저 말씀하십니다. 비록 겉은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집이었지만 싸늘한 무덤과 같은 자기 집에 주님께서 오늘밤 머무르시겠다고 말씀하시니 그는 마치 꿈을 꾸는듯싶었을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이 담긴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허황한 가슴은 벅찬 감동으로, 움츠렸던 몸은 따뜻한 온기로 충만해져 감을 느꼈을 겁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는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사랑받는다는 것이 이토록 행복하다, 는 느낌을 처음 느끼면서 주님을 기꺼이 자기 집으로 모셔드립니다. 이토록 큰 사랑을 받고, 상상해 보지도 못한 일, 곧 주님께서 먼저 주저함 없이 자기 집에 머무르시겠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모든 배려에 감격해서, 그는 그 자신도 놀랄 만큼 선 듯 일어서서 예수님께 “주님! 제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의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19,8) 하고 고백합니다.
이런 자캐오의 고백의 의미는 그만큼 자캐오가 자신을 짓눌려 왔던 삶의 근본적인 전환 곧 물질에서부터 하느님으로, 자신으로부터 타인을 향한 놀라운 내적 태도와 삶의 방식의 전환인 회심하였음을 드러내 보인 겁니다. 사랑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고, 이 힘은 단지 남에게 베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늘 부자연스럽게 하고 부자유스럽게 하는 내적 열등감을 이겨내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19,9) 하고 축복을 내리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순간 자캐오는 구원받았으며, 이 구원으로 말미암아 자캐오를 내외적으로 자유롭게 하였으며 오랫동안 짓눌려 왔던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자캐오의 이야기의 메시지이며, 앞으로 우리가 이제부터 살아가야 할 신앙의 이야기이고,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으며, 오늘 잃었던 자캐오와 그의 집안을 구원하신 것처럼 저희와 저희 가정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아멘.”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지속적으로 회복해야 하는 길>
+찬미예수님
제가 단연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름아닌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입니다. 사실 신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교황님께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원에 진학하고 공부를 거듭하면 할수록 교황님의 신학 세계와 빈틈없는 이론에 굉장한 매력을 느꼈고 존경어린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로마에 가서 공부를 할 때, 혹시라도 베네딕토 16세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설렜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은퇴를 하신 상태였으므로 멀리서라도 뵐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어렵겠구나 싶어 마음을 완전히 놓고 있던 순간 실제로 교황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염수정 추기경님의 서임식을 축하하기 위해 바티칸 미사에 갔는데 이례적으로 전임 교황과 현 교황 모두가 참석하신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미사 전 후에 베네딕토 교황님께 깍듯이 인사함으로써 현존하는 최고의 신학자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했습니다. 특별히 퇴장 전에 함께 포옹하며 한참을 인사 나누시는 교황님의 모습을 멀리서나마 직접 바라보며 참으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세속화된 이 시대를 짊어지고 계신 두 노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가톨릭 수장으로서의 권위 있는 만남보다는 그저 하느님을 위해 오랫동안 살아온 할아버지들의 만남과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직접 바라보며 나 역시 언젠가 저분들처럼 사제로서 아름답게 늙어 함께 나이가 든 동기와 맑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시점에, “회개했다” 라는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아니, 잘못한 것도 없고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갑자기 교황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회개했다는 것이 의아하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회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그 순간 제가 다시금 마음을 일으켜 “성소를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히브리어로 '슈브’ 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뜻은 ‘돌이키다’, ‘회복하다’라는 것입니다. 희랍어로는 '메라노니아'로써 '전환, 방향을 바꾸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다시금 성소를 돌이켜 보며 사제로서의 삶을 회복하였으니 교황님을 바라보던 저의 입장을 자연스럽게 회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관장 자캐오의 모습은 바로 이 회개하는 사람, 즉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이의 올바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장면이 펼쳐지는 “예리고” 라는 곳은 지역적으로 볼 때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비옥한 땅으로, 종려나무 숲이 크게 우거져 있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삼 향나무의 산지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과 요르단을 이어 주는 교통 요지였기에 세금을 가장 많이 징수하는 지방이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일반 세리도 아닌 세관장으로써 활동 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돈을 많이 착복한 죄인이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있었으며 이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자신의 죄를 씻어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예수님을 보고자 무화과나무에 오릅니다. 이 행위는 자캐오가 그만큼 지나온 과거를 후회하고 부끄러워하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깨끗한 모습으로 돌아가겠다는 강력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캐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그리고 자캐오는 고민하지 않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자신이 지금껏 남들로부터 착복한 금액의 몇 곱을 되돌리리라 마음 먹게 됩니다.
이렇게 그의 행동이 공식적으로 선포되는 그 순간, 이제 그의 과거는 사라집니다. 남은 것은 온전히 회복된 주님과 자캐오의 사랑의 관계 뿐입니다. 이 회개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캐오의 마음 속에는 항상 죄책감이 있었을 것이며 그것이 행동으로 드러나기까지 꽤나 많은 성찰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이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동력으로 삼아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소 얼마나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는지, 얼마나 회개하며 살고 있는지 돌이켜 봐야 하겠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어떠한 잘못이 있을 때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더욱 잘 알아들을 수 있기 위해 꾸준히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회개는 끊임없이 이뤄져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빼앗기므로 그 관계를 지속적으로 회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꾸준한 노력을 기울일 때, 주님께서는 사랑의 눈빛을 담아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아멘.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자석을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막대자석의 경우, 같은 극일 때는 서로 밀어내고, 다른 극일 때는 서로 붙는 모습이 정말 신기했습니다. 또한 그냥 평범한 못이 자석에 붙으면 다른 못을 잡아당기는 자성이 생긴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철 자체에도 자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자석이 되지 않습니다. 자석에 붙어서 자장을 걸어줄 때 비로소 자석이 됩니다.
이를 떠올리며 우리가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아버지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거룩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 붙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주님께 붙어 주님 뜻에 맞게 사는 것을 하나의 걸림돌, 짐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처럼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세상에만 붙어 있으려고 하니, 하느님의 뜻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포도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 떨어져 나가면 주님께서 인정하신 열매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세상 것에 꽉 붙어 있으려고 하면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욕심을 과감하게 버릴 때, 주님께 꼭 붙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우리도 하느님처럼 거룩해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캐오를 보십시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동포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가져다주고 있으면서 벌어들인 세상의 부입니다. 세상 것에 꽉 붙어 있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노력도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세관장이고 부자였음에도 앞질러 달려가 아이처럼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갑니다. 예수님을 보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노력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부르셨고 자캐오는 기쁘게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재산을 내려놓습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한 것을 네 곱절로 갚겠다는 것은 모든 재산을 포기한 것입니다. 주님께 붙어서 주님처럼 거룩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붙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세상 것인가요? 아니면 주님인가요? 주님께 붙은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얼른 내려오시게>
루카 19,1-10 (예수님과 자캐오)
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얼른 내려오시게>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얼른 내려오시게
어느 누구도
자리를 내주지 않아
급히 오른 나뭇가지 위
외롭게 휘청거리며
어떻게든 함께하려는
갸륵한 나의 사람아
얼른 내려오시게
나와 함께하고픈 그대와
내가 함께할 수 있도록
그대 품고픈 나를
그대 품을 수 있도록
홀로 머문 자리 박차고
함께 머물 너른 곳으로
얼른 내려오시게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비움으로 주님을 만납니다>
사람은 각기 자기 위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그에 맞는 처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접은 크게 받기를 원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잘 대해주기를 바라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하고 주위에는 나무도 새소리도 없습니다.
사해는 물이 흘러나가는 강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인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썩어버렸습니다. 반면에 갈릴래아 호수는 요르단강에서 물을 받아들인 만큼 사해로 흘려보내기 때문에 언제나 생명이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면 결국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세관장이라는 위신과 체면을 포기하고 나무에 올랐습니다. 주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 때문입니다. 갈망이 큰 만큼 키가 작다는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고, 따라서 나무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의 정성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5). 하시며 그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그가 세리였기 때문에 그를 죄인 취급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을 찾아주시고 품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처신을 보고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9-10)
만약 자캐오가 부자라는 것에 대한 자만이 있었더라면, 세관장이라는 위치를 고집했더라면 그 위신과 체면 때문에 나무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돈에 눈멀었던 그였지만 가난한 이를 위해 재산의 반을 내놓을 마음이 생겼고, 혹시라도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라도 갚아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무리 풍요하더라도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가 나무에 오르지 않더라도 자캐오를 부르실 수 있으시지만,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10). 고 하신대로 모든 이를 구원에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모두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선물이지만 주님 때문에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이에게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자캐오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나무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예수님과의 깊은 입맞춤으로 삶의 쇄신을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1티모 1,15)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자캐오 이야기로,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나서는 거대한 역사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앞 장면>(1-4절)이 자캐오가 예수님을 찾는 이야기라면, <뒤 장면>(5-10절)은 예수님이 자캐오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앞 장면>에서, 자캐오는 ‘키 작은 세관장이고 부자’였지만 동포의 조롱과 멸시를 받아야 했고, 매국노의 혐오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작다’는 말은 그가 외면적으로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그처럼 초라했고 ‘작은 자’였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래서 깊은 자괴심과 열등감으로 황폐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보려고 앞질러 달려가 무화과나무 위에까지 올라갔습니다.
<뒤 장면>에서 자캐오는 ‘아브라함의 자손’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사람의 아들’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무화과나무 위에 걸린 죄인 세리 자캐오와 나무 아래 있는 예수님 사이에서 드러납니다. 마치 그것은 십자가 아래 있던 백인대장의 고백처럼,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아셨는지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치 이곳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한 이를 부르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곳이 당신께서 자캐오를 불러내신 약속 장소였습니다.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장소요, 자캐오가 구원을 얻는 장소요,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분은 그의 이름을 알고 계시고, 그의 아픈 마음도 이미 다 헤아려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당신이 그를 약속 장소로 이끄시고, 당신이 그 약속장소로 찾아오셨습니다. 마치, “내가 당신을 찾았다면, 그것은 당신께서 저를 먼저 찾으셨기 때문입니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
그렇습니다. 이제 나무 위에서 얼른 내려와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사람이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는 까닭입니다. 하늘에서 이미 인간이 되어 내려오시고, 먼저 나무 위에 달리셨던 그분이 이제 우리 안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캐오처럼, ‘일어서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하고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19)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이 ‘자캐오 이야기’는 예수님의 구원사건이 자동적이거나 법칙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적이고 창조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에 대한 순명으로 자동적이고 법칙적으로 구원이 온다.’는 당시의 신학을 뛰어넘어, 자캐오와 같이 실존의 변화라는 창조적 행위를 통해서, 구원은 비로소 역동적으로 체험되고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오늘, 이러한 역동적인 실존의 변화를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얼른 내려오라”고! 아멘.
-----------------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루카 19,6)
주님!
당신은 숨어있는 저를 훤히 아십니다.
사람들 위에 드러냄으로 숨어 있음을 보시고
당신이 계신 아래로 불러 내리십니다.
주님, 제가 얼른 내려와 엎드리게 하소서.
사람들 아래로 내려가게 하소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지 말고 올려다보게 하소서.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 우리를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사랑의 하느님!>
오늘은 이런저런 감동스런 일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일어나는 감동스런 사건을 발견합니다. 너무나 감동을 잊고,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감동도 능력입니다. 정말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이, 사랑의 사람들이 감동합니다. 무엇보다 찾고 키워야 할 감동의 능력입니다.
“수사님! 여자 손님 화장실이 크게 막혀 억망입니다! 가능한 속히 손봐줘야 하겠습니다! 너무 불편하고 혐오스럽습니다! 속히 급합니다!”
끝기도 후 화장실에 들리자 마자 수도형제에게 긴급 메시지를 발송했고 새벽 잠깨어 열어보니 오후 8:30,
“되었습니다!”
답신 메시지가 도착했었고 신속한 조치에 감동했습니다. 늘 감동을 선사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수도형제입니다. 제 주변에는 감동을 선사하는 좋은 분들이 참 많습니다. 순수할 때 아름답고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우리를 정화합니다. 없는 돈, 없는 시간을 내어 꽃을 사들고 허리에 파스를 붙인 불편한 몸을 이끌고 바람같이 수도원에 들려 꽃꽂이를 한 자매 역시 멧시지와 더불어 은은한 향기같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세상사 복잡하여 오늘 꽃시장에 들려 꽃을 삽니다. 마음이 험악하여 지기전에 다스려봅니다.”
옛 어른의 지혜도 우리에게 깨달음과 더불어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생각하기를 포기하면 살아가는데 급급해진다. 그러니 삶이 사납게 닥쳐올수록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다산>
다산 정약용 역시 감동의 현자입니다. 생각하는대로 살지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정말 깊이 공부하고 생각하여 스스로 분별의 지혜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굶주린 자는 달게 먹고, 목마른 자는 달게 마신다. 굶주림과 목마름이 본래 맛을 가리기 때문이다.”<맹자>
진리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진정 행복합니다. 진리이신 주님맛을 비로소 알겠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6,35)란 주님 말씀이 귓전에 생생합니다.
어제부터 시작된 연중33주간 동안의 수도원 연피정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만추의 단풍과 잘 어울리는 고즈넉한 고요와 침묵의 분위기를 마련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했습니다. 어제는 온종일 ‘감동’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만 생각하다가 후에 소스라친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바로 우리를 끊임없이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하느님을 잊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복음의 아름다운 예수님을 통해 얼마나 우리를 감동시키는지요! 감동의 하느님을 닮을수록 우리 또한 감동의 사람이 됩니다.
어제 하루는 19년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 생각을 하며 많이 감동하고 회개한 날이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평생 일상이 감동의 연속이었는데 지금서야 깨닫고 감동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한번도 매든 적 없고, 한번도 화낸 적 없고, 한번도 아버지와 싸우거나 다투거나 하는 것을 적 본 적도 없습니다. 삶이 고단한 탓이었던지 어머니 얼굴에 웃음은 거의 없었고 삶자체가 고요한 순종이었습니다. 참으로 어쩌다 아버지와 다툴 때 보면 어머니는 안방에서 아버지는 윗방에서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싸웠습니다. 험악하게 다투거나 싸우는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소위 말하는 가정폭력은 한번도 목격하지 못한 두분은 참 지혜롭고 인내심 많고 젊잖은 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부족했어도 어머니는 절대 아버지에 대해 늘 두둔하셨지 부정적으로 말한 적은 한번도 없었으니 지금 생각하건데 어머니는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며 신뢰했던 것입니다. 간혹 제가 아버지에 대해 불평하면 “네가 아버지없이 어디서 나왔느냐?”한 마디로 저의 입을 닫았습니다. 지금서야 어머니의 한없이 강인하며 부드럽고 깊고 고요한 마음을, 사랑과 지혜를 깨닫고 감동합니다.
성경은 주님을 감동시킨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의 일화로 가득합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가난한 과부의 기도가 주님을 감동시켰고, 어제는 눈먼 걸인의 간절한 갈망이, 오늘 복음에서는 자캐오의 기발한 행동의 연속이 주님은 물론 우리를 감동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 넣습니다. 이런 감동이 저절로 회개로 이끕니다. 참으로 주님은 물론 우리를 즐겁고 행복한 감동에 젖게 하는 자캐오입니다.
복음의 정수요 요약같은 오늘 주님과 자캐오의 만남입니다. 자캐오뿐 아니라 예수님의 아름다운 사랑도 우리를 감동하게 합니다. 사실 시편들은 거의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한 시인들이 들려준 노래들입니다. 시편을 노래하면서 하느님 사랑에 감동을 배우는 우리들입니다. 주님 은혜에 감동하고 감사하는 것도 배우고 훈련하고 습관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선입견이나 편견을 넘어 자캐오의 순수한 아름다운 행위에 감동한 주님은 돌무화과나무위에서 자기를 보고 있는 자캐오를 쳐다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정말 전무후무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정말 이심전심 두분간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마음과 마음의, 눈길과 눈빛의 만남입니다. 이어지는 두 분간의 대화는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니 환대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이런 자캐오처럼 기쁘게 환대의 사랑으로 미사중 주님을 마음 깊이 모셔야 함을 배웁니다.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 군.” 투덜 거리는 참 딱한 철부지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한 자캐오는 환대의 사랑에 이어 재산을 아낌없이 나눌 것을 선언하니 회개의 진정성이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자캐오의 회개에 감동한 주님의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엄한 구원의 선언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자캐오는 물론 예수님이,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이 우리에게 끝없는, 한량없는 기쁨의 감동을, 아름다운 감동을, 구원의 감동을 선사합니다. 자캐오에 감동한 예수님이요 예수님께 감동한 자캐오입니다. 주님께 참으로 본능적으로 기민하게 응답한 자캐오는 참 행복한 은총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묵시록의 주님의 초대에 참으로 멋지게 응답한 자캐오요 우리 모두 자캐오처럼 회개의 응답으로 실현되는 축복의 미사잔치임을 깨닫습니다.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는 주님의 참 아름다운 감동의 미사잔치 은총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타오르게 하소서!>
성체 분배하며 자주 마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자캐오 얘기를 묵상하면서 떠올랐습니다.
성체를 모시러 나오는 분들 가운데서 마뜩잖은 모습을 자주 접합니다. 걸음이 불편하지 않으면서도 제게 가까이 와 성체를 받지 않으십니다. 제가 다가가거나 손을 내뻗어야만 할 정도로 떨어져 받으시는 겁니다. 또 어떤 분들은 손 높이가 너무 낮아 제가 낮춰야만 영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하시기에 제가 불편한 것도 있지만 그렇게 영할 거면 뭐 하러 영할까 생각도 됩니다.
혹시 성체를 별로 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지. 열망은 없고 네가 주고 싶으면 주라는 식은 아닌지.
그런데 제가 왜 이 얘기를 오늘 길게 하냐 하면 오늘 묵시록에서 이렇게 나무라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이렇게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자캐오와도 비교되기 때문입니다. 묵시록의 말씀에 비춰볼 때 자캐오는 한때 차디찬 인간이었습니다. 돈을 끌어모으기 위해 사람들에게 냉혹했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관한 관심과 열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자캐오가 오늘 주님을 뵙기 위해서 나무 위로 올라갈 정도로 대단한 열성을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캐오처럼 주님을 만나 뵙고 내 집/안에 모셔 들이려면 이 정도의 열성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열성은 어느 정도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팬이라면 어떤 팬이고 어느 정도로 열광할까요? 유명한 가수의 공연에 가려면 몇십만 원의 표가 아깝지 않고, 그렇게 주고라도 공연에 갈 수 있는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고, 공연장에 가서는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손길이라도 스치기를 바랄 정도로 열광하는데 우리는 그 정도로 주님께 열렬한 팬이고 뵙고자 합니까?
그런데 저 자신을 들여다보면 애초부터 저는 뜨겁지 않았고, 온돌로 치면 저는 뜨끈뜨끈한 돌이 아니라 차디찬 돌이었습니다.
온돌이 본래 그렇습니다. 불을 때기 전에는 차디찬 돌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뜨거운 불로 달궈지기 전의 우리는 본래 차디찬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차디찼던 자캐오를 주님께서 뜨겁게 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먼저 주님이 당신의 뜨거운 불로 달궈주시길 바라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고 겸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저를 오늘 뜨겁게 하소서! 주님, 제가 타오르게 해 주소서!
+++++++++++++++++++++
<(2)구원, 열림>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어제, 오늘 우리는 예리고에서 일어난 구원사건을 듣습니다. 눈먼 이가 보게 되면서 영혼이 구원에 이르는 얘기를 어제 들었고, 오늘은 자캐오가 구원을 받는 얘기들 듣는데 자캐오의 경우는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집안이 구원받는 얘깁니다. 헌데 구원받은 집이라면 구원받기 전에는 어떤 비구원 상태일까요?
추측컨대 세 가지로 비 구원의 상태였을 것입니다. 가족 간의 불통이 그 하나이고, 이웃과의 불통이 그 두 번째이며, 하느님과의 불통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집안의 불통과 비구원과 불행의 진원지는 자캐오였을 겁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가정에서 가장의 비중은 절대적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자캐오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소설을 쓴다면 그가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는 것과 세관장이었다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실마리를 풀어볼 수 있을 겁니다.
작은 키의 열등감을 그는 세속적인 성공으로 극복하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키 작은 자기를 무시할 수 없도록 그는 돈을 많이 벌기로 작정했을 겁니다.
그런데 돈을 버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어떤 때는 더러워도 참아야 하고 심지어 비굴하게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어떤 때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짓밟아야만 합니다. 어떤 때는 돈을 벌기 위해 거짓말도 해야 하고, 사기도 쳐야 합니다. 어떤 때는 돈을 걷어들이기 위해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오직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이고, 이것이 자기가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쳐 집에 들어오면 그는 집안일에는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고,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짜증을 부리고 막 화를 냈습니다. 그럴수록 아내와는 자주 다투고, 아이들은 무서워서 슬슬 피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은 친하게 지내는데 자기만 점점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돈만이 이 세상에서 자기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가족들만이 유일한 사랑이고 의미였기에 거기서 위안을 받으려 했는데, 그래서 남을 짓밟고, 하느님마저 모르는 체 오직 가족을 위해 살았는데 가족이 이것을 몰라주니 너무 야속하고 삶의 회의가 왔습니다.
이 인생 최대의 위기에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마침 예수님께서 예리고에 오셨고 풍문으로 들은 것이 정말인지 예수님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키 작은 그가 군중에 가려 주님을 볼 수 없으매 주님이 지나가실 길을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에 오릅니다.”
그의 키 작음이 나무를 오르게 하고, 나무에 오르는 열망과 열성이 그를 주님 눈에 띄게 하였습니다. 작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산 것, 어쩌면 이것이 그가 일생 살아온 거였습니다.
그런 그를 주님께서는 역시 무시하지 않고 올려다보실 뿐 아니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고까지 하십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도 허용치 않고, 아무도 드나들지 않던 문이 열립니다.
이렇게 한 번 문이 열리자 마음이 열리고, 곳간 문도 열립니다. 하늘로 향하는 문이 열리자 이웃으로 향하는 문도 열리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이렇게 꽝꽝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따라 성무일도 초대송 시편이 마음에서 메아리칩니다.
“성문들아 너희의 머리를 들라. 영원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의 임금님이 듭시려 하시나니.”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
<얼른 돌아가자!>
오늘 복음(루카 19,1-10)은 '예수님과 자캐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실 때,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 당시 자캐오는 로마제국을 위해 유다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세관장이었고, 또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로부터 버림받은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키가 작은 자캐오는 군중에 가려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보려고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고 그를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5)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고, 이렇게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그러자 예수님께서 자캐오에게 이르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9.10)
오늘 복음은 '소외된 이들과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크신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주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자비의 얼굴이신 주님께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얼른 주님께로 돌아가, 몸과 마음으로 다시 시작합시다!'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다시 하여라."(묵시 2,5ㄱ)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5-16)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루카 19, 5)
내려오는
마음과
믿음이
기도가
됩니다.
순식간에
계절이 변하고
추워졌습니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길이
있습니다.
가벼워지는
그 길은
사람을 만나는
낮은 곳이며
우리가
내려오는
길입니다.
낮은 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내려오는
그만큼
귀한
우리들입니다.
올라가는
길보다
내려오는 길이
더 힘이 듭니다.
얼른 내려와야
얼른 열리고
얼른
해결됩니다.
높은 데로
올라가 있는
우리를
불러내어
내려오게
하십니다.
우리를
내려놓아야
우리 삶에서
주님을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내려오는만큼
다시
편안하여질 수
있습니다.
내려와야
과거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고맙고 행복한
길은 내려오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려오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얼른
내려오는 것이
우리의
회개입니다.
내려오는
기쁜 오늘
되십시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