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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서봉/ 서울 출생. 2005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 외. 사진 산문집 『있는 힘껏, 당신』.
시인의 말 / 천서봉
불행이 기다릴까 자주 버스에서 내리지 못했다.
존재를 증명해내는 불행의 기이함에 끌린 것도 사실이지만
그 가치는 종종 무의미했으며 위로가 되지 못했다.
다시 십여 년의 세월을 보내고 겨우 두번째 시집을 낸다.
의미를 두자니 변명에 가까웠고 여백으로 남기자니 공허했다.
나의 말들은 웬만해선 잘 뭉쳐지지 않았고 그래서 멀리 던질 수도 없었다.
비틀거리며 날아 가는 나비와,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고등어
또 발목이 사라져버린 사람까지,
그 유령 같은 이음동의어들을 간신히 한데 모아두었다.
이제
가운데 선을 긋고 오 엑스로 나누어지는 게임,
그 게임에서 나는 무리를 버리고 혼자 그 선을 넘어온 것만 같다.
두렵지만 두렵지 않게,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가볍게,
부디 목요일에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나의 생일 다음날을 골라 떠나신 어머니가 보고 싶다.
2023년 여름
천서봉
2 월 / 천서봉
길옆 사시나무가 떨고 있어 품에 안고 돌아왔으나
집으로 돌아와 펴보니 한 잎 낡은 여자였다
여자를 씻겨 저녁의 옷걸이에 걸어두었는데
젖은 말투가 바닥을 적셔 내내 겨울이었다
열린 창을 닫고 마저 내 귀를 닫고 북어의 몸에
불 꺼진 문자의 옷을 입혀주었다 달빛을 입고
노랗게 구워지는 물신(物神)을 바라보다가
깨어나니 여자는 사라지고 낡은 편지가 놓여있었다
잃어버린 2월의 이틀이 거기 곱게 접힌 채 들어 있어
미치지 말자 미치지 말자 주문을 외워보는 밤마다
한 움큼의 구름과 맹세가 텅 빈 천장을 떠돌았다
2월엔 어떤 불립(不立)의 무늬도 거짓이 아니었다
고갈비 굽는 저녁 / 천서봉
죽음이, 이렇게나 달다니.
그러나 이 저녁은 생선의 것도 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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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시선
한 사석에서 정진규 시인은 “현재의 나의 시에 끝없이 의문을 가진다.”라는 말을 하면서 자기 점검의 필요성을 피력한 바 있다. 그 자리에서 고희를 넘긴 원로시인이 시적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이 들수록 시가 깊고 원융해지기 위해서는 냉철한 성찰과 엄정한 자기 판단이 중요하다. 대개 일정한 위치에 이른 시인들이 조로하여 동어반복을 일삼거나 자기 세계에 안주하여 갱신의 노력을 하지 않고 더 이상의 변화를 보여주지 못할 때 독자는 눈을 돌리게 된다. 한때의 명망에 눈이 멀어 자기 작품이 최고인 줄 아는 착각 속에서 시는 퇴기처럼 비루해지고 한 순간에 98년 정도 퇴보하는 것이다.
최근에 펴낸 천서봉의 시집 『서봉 氏의 가방』을 읽으면서 신인과 원로 모두 시를 쓰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천서봉의 시 「고갈비 굽는 저녁」은 2행의 짧은 시다. 요즈음 시단의 일각에서는 짧은 시를 지향하는 움직임이 있다.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지만 간혹 삶과 세계에 대한 탐구의 정지, 치열하게 시의 세계를 열어가고자 하는 의지의 결여, 설득력 없는 선적 제스처 등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인용한 천서봉의 시는 시적 사유와 기교가 예사롭지 않다.
화자 앞에 놓여 있는 것은 고갈비다. 고갈비를 화자는 죽음과 등치시키고 ‘달다’라고 말한다. 이 시에서 죽음은 일상의 인식을 뛰어넘는다. 어둡고 무겁고 절망적이지 않은 신종의 죽음이다. 그리하여 ‘달다’라는 역설적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익숙한 삶의 풍경에서 낯선 삶의 일면을 읽어내는 시인은 2행에서 다시 비약적 상상력을 펼쳐 보여준다. 화자의 시선이 ‘고갈비’에서 ‘저녁’으로 껑충 건너뛰는 것이다. 여기서 정서적 충격이 돌발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좋은 시의 미덕 중의 하나이다. 답답하고 옹색한 시들은 언어와 언어 사이의 불꽃을 잡아내지 못한다. 정형화 된 틀을 부수지도 뛰어넘지도 못하는 것이다. 교과서적인 시작법에 충실한 시들이 저지르는 잘못이다.
2행에서 생선은 곧 화자이다. 다시 말하면 죽음과 화자가 등가를 이룬다. 그리고 ‘저녁’을 바라본다. 그러나 ‘저녁’은 ‘생선의 것도 내 것도 아니다’라고 진술한다. 그렇다. 천 년 후에도 ‘저녁’은 그대로일 것이다. 생선과 화자는 유한적 존재로 소멸될 것이지만 ‘저녁’은 남는다. 단 2행의 짧은 시가 생사의 문제를 이처럼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 누구도 ‘저녁’의 주인이 될 수 없다.
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시로 여는 세상』주간)
감정의 경제 / 천서봉
표정을 지우고 하루를 결제합니다 슬픈 날은 기쁜 날을 위하여 남은 고요를 저축합니다
아껴두었던 웃음이 때로 殘錢(잔전)처럼 흩어지기도 합니다 그 소리들은 너무나 자잘해서 잘 더해지지 않습니다
원금에 이자를 더해 어느 날 토마토는 기록적으로 폭발하고 그런 날은 붉은 눈물로 빚을 갚습니다
울음 때문에 좁은 골목이 붓고
기침같은, 탄식의 문장을 말리듯 나는 종일 햇살 아래 서서 깨문 입술의 복리(福利)를 계산하기도 합니다
어딘가로 이체된 층층의, 불연속적 불편, 그 심급의 계단을 오르다가 오래 전 접어둔 한 장의 창문을 생각해 냅니다
저 하늘, 살 수 있나요? 구름은 어제보다 상승해있고 오늘도 우리의 감정은 고독의 하한 근처를 서성거렸는데요
바닥났던 잔고의 겨울나무들이 꽤 살만해진 여름입니다
가을까지 좀 기다려주겠습니까? 당신에 대한 나의 氣色(기색)은 근처 단풍나무에 넣어두겠습니다
플라시보 당신 / 천서봉
저녁이 어두워서 분홍과연두를 착오하고
외롭다는 걸 괴롭다고 잘못 적었습니다 그깟
시 몇 편 읽느라 약이 는다고 고백 뒤에도
여전히 알알의 고백이 남는다고 어두워서 당신은
스위치를 더듬듯 다시 아픈 위를 쓰다듬고
당신을 가졌다고도 잃었다고도 말 못하겠는 건
지는 꽃들의 미필이라고 색색의 어지럼들이
저녁 속으로 문병 다녀갑니다 한발 다가서면
또 한발 도망 간다던 당신 걱정처럼 참 새까맣게
저녁은 어두워지고 뒤를 따라 어두워진 우리가
나와 당신을 조금씩 착오할 때 세상에는
무업 / 천서봉
나는 오후를 조금 만들었다 귀퉁이를 허물어서 소멸을 접어보다가 무슨 청승인가 싶어
그만두었다 고요를 고요로 만드는 길은 가물다 귀신은 주기적으로 관목 숲 근처를 서성거렸고
나는 격覡으로서의 아름다움이 염소를 끓여내는 뒷마당의 슬픔보다 더 뜨겁다고 생각했다
아침에는 아침을 입고 밤에는 밤의 문장으로 태어나는 것이 시신(詩身)을 위로하는 내 유일한 춤
그리하여 모든 배꼽이 부적처럼 불온할 때 우리의 병력은 우리를 진심으로 끌어안아 주었다
오후는 이따금 병들고 나는 그런 오후를 만지작거리며 소일했다 오후가 나를 조금 만든 건가
생각할 때 겨울은 시린 발을 내밀며 묘지주변을 동동거렸다 업은 발가락보다 머리가 많았다
K의 부엌 / 천서봉
이제, 불행한 식탁에 대하여 쓰자 가슴에서 울던 오랜 동물에 대하여 말하자
가령 상어의 입속 같은 검은 식욕과 공복의 동굴 속에서 메아리치는 박쥐의 밤들
들개의 허기, 늪처럼 흡입하는 아귀의 비늘과 그 비늘이 돋는 얼굴에 대하여 말하자
하여 그 병의 딱딱한 틈에서 다시 푸른 순(筍)을 발음하는 잡식성의 세계사에 대하여
말을 가둔 열등한 감자와 그 기저의 방 속에서 끝내 다복할 주검에 대하여 말하자
기어이 모든 숨을 도려내고야 말, 아름다운 칼들 가득한 K의 부엌에서
딱딱하게 굳어 기괴한 신탁의 소리를 내고야 말 우리의 혀에 대하여 말하자
간이나 허파 따위를 담고 보글보글, 쉼 없이 끓어오르는 냄비 속 레퀴엠에 대하여
말하자, 우리가 요리하고픈 우리의 부위, 왼손이 끊어내고 싶던 그 왼손에 대하여
목요일 혹은 고등어 / 천서봉
—가령 사람만한 고등어 두 마리가 카페에 마주 앉아 있는 그런 풍경.
사람들은 그 신기한 풍경에 놀라 사진을 찍어대고
둘은 아랑곳없이 서로의 대화를 이어가는, 그런 목요일
몸에서 물이 흘러 바닥을 적시듯 그렇게 만납시다 사탕이 잔뜩 묻은 권련을 쥐고
수요일은 이르고 금요일은 조금 늦고, 그러니 목요일쯤 만납시다 새벽이 고인 사발을 들고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우리가 너무 늙어 있을 터이니, 그러니 목요일쯤 만납시다
어제까지의 등푸른 이별 이야기를 나누고 희롱 받은 혀와 살 몇 점을 술잔 두어 개에 나누어 담게
반쯤 마시고 또 반쯤은 거기 남겨둘 수 있게, 추분이나 동지 같은 근심의 귀를 열어두게
수요일까지 우리가 살아남은 기적에 대해, 그건 거의 마법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의뭉 떨게
그렇게 우리 목요일쯤 만납시다 사랑이 아니었거나 혹은 사람이 아니었거나 그러나
사랑이거나 사람이어도 괜찮을 목요일에, 마치 월요일인 것처럼, 아니 일요일의 얼굴로
흘러내린 표정이 바닥에서 말라가듯, 유통기한이 딱 목요일인 씁쓸한 통조림처럼 우리,
신혼記 / 천서봉
김밥처럼, 내 근심들은 먹기에 좋네. 밤새 달군 연둣빛 씨앗들을 보자기에 싸서 나 소풍가네. 시즙(屍汁) 같은 관습이나 다락의 혁명 따위는 두고 가네. 사람들, 묘목이 담긴 제 그림자만한 배낭을 준비하네. 흔들리는 잎새마다 서약은 풍성하고 짙은 소나기도 오늘만은 달콤하네.
날카로운 삽날의 끝에서 더욱 날카롭게 자랄 절망의 뿌리들을 나는 사랑하네. 부케의 꽃들은 화려한 근심의 날들을 기약할 것이고 바람은 그 추억을 앞세워 떠돌겠네. 찰칵, 침묵의 형장들을 양지쪽에 세워두네. 완벽한 그늘을 꿈꾸었으므로, 죽음의 완성에 이르기엔 나는 너무 젊고 다만, 아이들은 아직 햇살의 편이네.
화창한 봄날, 벌거숭이 둔덕 위에 꽃씨를 뿌리겠네. 나의 신부는, 따뜻한 무덤으로 부풀겠네. 몇 개, 의혹의 씨앗들도 함께 묻어두네. 무럭무럭 근심은 자랄 것이네. 망각의 흙더미 위에서 천국과 지옥은 아름드리 대칭을 이루겠네. 丸처럼, 내 근심들은 나눠 심기에 좋네.
발목이 없는 사람/천서봉
영혼에 관해 말할 때, 우린 자주 발목을 잃어버리곤 했습니다
발목이 사라져간 자명한 어제를 이제 상징이라 부르겠습니다
어디선가 물이 끓는데, 돌고 도는 목성의 얼음띠 같은 영혼들
낯선 곳에서 잠을 깨는 일은 소멸에 가까워서 아름다웠습니다
문턱을 넘지 못하는 생각은 무너지고 나서도 다시 무너지겠죠
깊어지는 모든 것은 철학이 될 테고 자정은 비밀과 닮아갑니다
골목이 소매와 닮았습니다 점점 더 소문에 가까워지는 우리들
알아보겠습니까, 이제 물은 끓어오르다 못해 넘치고 있습니다
당신을 설득할 생각이 없는 나는 당신 병이나 함께 앓았으면 했습니다
닫히지 않는 골목 ㅡ0
천 서 봉
바람이 불지 않는다 높은 곳에 올라가보았지만 너는 없다
더이상 설레지 않았다 슬픈 건 없지만 슬프지 않을 것도 없다 편평한 대지처럼, 얇고 흰 종이처럼 나는 지구 위에 놓여
새로울 것 없는 슬픔을 느낀다 부재는 평화롭고 그리고 더없이 위태롭다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선 거의 모든 것을 견뎌야 하므로, 당신 없는 꽃들이 핀다 당신 없는 비가 내리고 당신 없는 계절이 바뀌고 이렇게까지 환할 필요 없는 소리들이 당신 없이 창궐한다 모든 예보에선 불명열(不明熱)이 빠져 있고 당신과 나 사이의 등고선은 이제 없다 이 정도면 슬프지 않을 것도 없지만 슬플 것도 없다 바람이 잠든 후 아무것도 잠들지 못했다
목요일 혹은 고등어 / 천서봉
-가령, 사람만한 고등어 두 마리가 카페에 마주 앉아있는 그런 풍경,
사람들은 그 신기한 풍경에 놀라 사진을 찍어대고
둘은 아랑곳없이 서로의 대화를 이어가는, 그런 목요일
몸에서 물이 흘러 바닥을 적시듯 그렇게 만납시다 사탕이 잔뜩 묻은 궐련을 쥐고
수요일은 이르고 금요일은 조금 늦고, 그러니 목요일쯤 만납시다 새벽이 고인 사발을 들고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우리가 너무 늙어있을 터이니, 그러니 목요일쯤 만납시다
어제까지의 등푸른 이별 이야기를 나누고 희롱 받은 혀와 살 몇 점을 술잔 두어 개에 나누어 담게
반쯤 마시고 또 반쯤은 거기 남겨둘 수 있게, 추분이나 동지 같은 근심의 귀를 이제 열어두게
수요일까지 우리가 살아남은 기적에 대해, 그건 거의 마법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의뭉 떨게
그렇게 우리 목요일쯤 만납시다 사랑이 아니었거나 혹은 사람이 아니었거나 그러나
사랑이거나 사람이어도 괜찮을 목요일에, 마치 월요일인 것처럼, 아니 일요일의 얼굴로
흘러내린 표정이 바닥에서 말라가듯, 유통기한이 딱 목요일인 쓸쓸한 통조림처럼 우리,
우울상점의 목록 / 천서봉
낡은 일기
지우고 싶은 단어들을 지우다보면 백지만 남았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 그랬다 모래가 가득해서, 모래만 가득해서 그곳엔 유려한 문장보다 무늬가 어울렸다 바람의 손톱이 긁고 지나간 흔적을 유년이라 부르고 축종이라 쓰기로 했다 나는 그 때부터 이미 나를 싫어하기로 되어있었고 나는 낡은 문자들을 주워 오늘에 닿았다
외로운 호수
팔레오기의 꽃들이 모두 자살한 것에 대해 우리는 밤마다 이야기했다 생식을 포기하는 죽음의 조건합은 무엇이었을까 의문보다는 부러움에 가까웠고 나는 간신히 우리의 바닥에서 흘러 다니는 어떤 덩어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불이나 물이 아닌, 정오보다는 자정에 가까운 그래서 그랬구나, 우리라는 것은 축축한 하나의 별
금요일 밤의 탱고
이상하지 않다면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는 詩란 그런 것, 내가 아는 사랑도 그런 것, 어머니는 수없는 자교를 내게 남기셨다 춤추고 싶어 하는 건 네 이모를 닮아서다 참 이상하군요 사람이란 것은, 제가 아직도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보단 식물의 언어를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부끄럽습니다 붉은 음료가 넘쳐흐르는 밤, 차라리 태몽을 다시 꾸어야겠습니다
무한에 가까운 밤
나는 나에게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금씩 더 멀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사명, 가끔 ‘수학의 정석’을 펴고 펼친 자리의 문제를 푼다 시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나에게서 더 멀어지기 위해서, 이상하지 않다면 그건 우리가 아니다 무한한 목록의 상점에서 나는 이름을 건네고 낡은 일기를 돌려받았다 내 후생의 이름이 적혀있지만 읽을 수 없었다
복자福者 / 천서봉
복자는 아팠고 무엇보다 복자는 자신이 복자라는 사실을 몰랐다 복자는 늘 미끄러졌고 복자의 오른손은 왼손이었으므로 해가 다 사라질 때까지 다만 우리는 우리를 눈여겨보았을 뿐이다 희극을 보았고 비극을 보았지만 그건 아침이나 저녁 같은 것이었고 소리를 내지 않는 악기나 소리를 내는 악기의 의지는 같은 거였다 구저로 만든 돌가루 저녁에 우리가 행복해 할 때 빠진 이빨이 데려갈 검은 미래는 슬거웠다 미끄러질 때마다 내 모세혈관 끝까지 미끄러졌기에 복신이나 역병신 같은 어른들의 단어를 듣는 날은 유난하게도 잠이 색색으로 달았다 뼛가루처럼 먼지 날리던 헛간의 웃음소리는 음악으로 남았다 정삼각형 그리기를 포기하고 그날 처음으로 나는 나를 조금 만들었다
접경 / 천서봉
봄이 왔다가 그냥 갔다고 했다 등을 맞대고 앉아있던 햇살이 사라지고 어둠속에서는 또 새로운 어둠이 보인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을 그리워해도 될까 가까워졌다가 천천히 멀어져가는 우리의 관계는 그 보다 아름다울까
빗물은 거기 고여 있지 못하고 다 흘러가 버렸다 잠깐 스쳤을지도 모르지만 그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지리도 흐르고 멸렬도 흐른다 나를 알거나 알지 못해서 흐른다 떠나기 위해 흐르고 다시 돌아오기 위해 흐른다
태어나 처음 보는 문자처럼 그것을 어떻게 발음해야할지 모르는 순간처럼 나는 가까스로 당신을 지나가고 있다
무덤을 끌어안고 울던 기억이 함께 기다렸다고 했다 봄이 갔는데 여름은 아니라고 했다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
낙담 / 천서봉
오후가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것 앞으로 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 그리하여 지금 생각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무엇인지 몰라서 자꾸 그림자처럼 길어지는 것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꼬리가 조금 더 휘어지는 것 당신에게 전할 수 없는 것 전할 수 없는 것들이 쌓여서 새벽을 만들고 검은 안개를 나의 방으로 불러들이는 것
한 두 번이 아니어서 배고프지 않은 것 여러 번이었지만 늘 마지막 같았던 것 하지만 또 마지막이 아닐 것을 아는 것 하지 말라는 말로는 아니할 수 없는 것 그리하여
나를 내려놓는 것 울기 전이었거나 이미 울고 난 이후인 것 나도, 당신도 아닌 것 도무지 아무것도 아니어서 쓸쓸한 것 단지 바닥에 뒹구는 오후를 조금 이해하게 되는 것
시월의 PC / 천서봉
Enter.
두드릴 수 있는 건, 모두 門이다.
가슴 가장 밑바닥을 두드리며 시월이 오고
동심원의 파장이 나무를 흔들면
생각난 듯, 나무는 오래 지녀온 제 손금들을 버린다.
문을 열면 철사 같은 활자들이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다.
고해할 만한 뿌리나 바늘로 찔러 터뜨리고 싶은 열매는
어디에도 매달려 있지 않다. 윈도우의 시작음처럼
뻥 뚫리는 心肝.
Shift.
구름이 하늘을 건너뛴다. 나뭇잎들이
횡단보도를 건너뛴다.
세상은 모양새 좋은 다리다.
박약한 나는 늦은 저녁의 마당을 바장였다.
F1.
사과나무, 빈방에서 둥근 메아리와 놀다.
구걸 혹은 구원.
Control.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 한 번,
손금을 펴 그대를 향해 내 지도를 흔들어 보이는 것.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창들에게선
빵 냄새가 난다. 돌이켜 보면
빵나무가 가득한 길만을 걸어왔으니
이 풍성한 허기들, 때가 되면 모두 버릴 수 있는가.
Alt.
"보고싶었어요" 메일을 열면
모르는 여자의 꽃잎들이 붉은 낙엽처럼 쏟아졌다.
아름다웠지만, 어떤 여자도 좀체 몸에 맞지 않았다.
타닥 타닥, 문자들이 태어난다. 타닥 타닥,
낙엽이 탄다. 묻지 않아도 같은 길이다.
나는 이제, 이 네모난 창문을 하늘 쪽으로 옮겨 단다.
대안이란 결국 망명과 길이 통해있다.
북쪽엔 여전히 이 지구를 돌리는 일에 몰두하는
한 개의 빛나는 눈이 있다.
연어 / 천서봉
수원에 가보신 적 있나요. 저녁이면, 아이가 아이를 업고 별을 파는 곳. 팔다가 팔리지 않은 별들이 업둥이의 눈동자 속으로 다시 돌아가 박히는 곳. 견고한 성곽처럼 어둠 켜켜이 쌓이면, 밤의 驛舍가 취한 불빛 켜들고 멍터구리배로 떠가는 곳, 머리 내민 여 같은 지붕들 다닥다닥, 슬레이트에 매달린 고드름은 도무지 힘겨운 노젓기 같았습니다. 방바닥에 귀대고 누우면 밤새 네모난 장판지를 끌고 가던 물소리.
수원행 막차를 타보셨나요. 사람들 떠밀릴 때마다 솨아아 소금내 밀려오는 곳, 역전 지하도를 어둠이 밀물처럼 건너갈 때 빌딩숲이며 내림 같은 골목들, 그 고만고만한 기억의 잡목들을 젖히면 아, 이제 아주 오래 전, 이녁들 말달리던 들판과 황금 빛 박차와 다시 어디선가 水原, 水原, 물 흐르는 소리, 누이의 팔리지 않은 별들이 졸며 졸며 새벽으로 흘러가는 곳, 그 작은 시내를 따라 먼길 거슬러 오르는, 당신.
과잉들 / 천서봉
그해 겨울엔 속죄하듯 폭설 내렸고 별처럼 나는 여러 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밤거리, 고깔모자의 가로등을 쓰고 걷다가 어느새 내가 어두워졌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평생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때마다 한 겹의 옷을 더 껴입었던 셈입니다
하루는 따뜻한 걱정들을 불러다 거한 저녁을 먹이느라 나는 한 숟가락도 뜨지 못했습니다
길을 잃은 문자들을 수소문하다가 내 마음에도 골목의 무늬 같은 더딘 손금이 여럿 생겼습니다
웃을 때도 울 때도 항상 곁에 살던 수많은 엄마들, 엄마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랑그인 적 없었습니다
망상과 식욕 사이 봄비가 붐빕니다 참 많은 당신인 것을 알겠습니다 아픔이 몰라볼 만큼 나는 살찌겠습니다
몸이 되기를 거부하는 거대한 결핍으로, 당신이 의식하지 않는 소소한 배경으로 천천히, 나를 소멸해가겠습니다
나비 운용법 / 천서봉
나비 운용법#b나비는 죄가 없으나침묵과 놀며 창문을 존경하고 요절을 동경하다가버스 한 번 타면 갈 수 있던 당신에게 못 간 시간을이제 나비라고 불러야겠다호명하기 어려워 꼭 쥐고 있던 성대와붙잡을 수 없어 귀가하던 손금의 불안한 무늬조차이제는 나비라고 하자 나비라 부르면왼편에서 당신의 월요일이 시작되고동시에 오른편에서 나의 일요일이 저물 것이므로갑상(甲狀)의 아이들이 돌멩이처럼 졸고 있는 사원과슬픔으로 부풀어가는 사거리 가로등 사이에서나는 저울 같은 잠으로 오래 경련할 것이니내가 당신에게 못 가던 발작의 시간들을간단하게 나비라 쓰자봄의 이곽을 떠도는 추억의 고요를 나비라 읽자용서는 바라지도 않을 이번 생엔영원히 마음의 정처를 얻지 못할 것이므로그러니 나비라 부르자 당신과 나 사이창궐하던 층계를, 찬란히 피던 실패의 전부를
슬픈 수비학/천서봉
‘이퀄’이라는 기호에 대하여 생각하는 저녁이다
기호를 사이에 두고 왼쪽과 오른쪽이 같아지는 일,
저울이 정지하듯 나와 당신이 하나가 되는 일,
그런 일도 일종의 평등인 것일까
문제를 풀며 함께 수학하던 친구는
문제를 풀고 또 문제를 풀다가 어느 순간
문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친구는 사라지고
문제들만 가득한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남아…
아뿔싸, 이제 우리는 우리가 만났던 사실조차 잊어버렸구나
이런 오늘을 우리는 평화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카페 ‘마스’에서 나는 ‘비너스’같은 당신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다
나는 죽기 전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기도하는 나를 숫자로 쓴다면 그건 6에 가깝지 않나
생각할 때, 등수에 익숙한 사람들은 차례차례 줄을 서서
일용할 양식을 받아들고 저마다의 저녁 속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런 작은 슬픔을 나는 행복이라고 적어둬야겠다
내가 기호가 되고 기호에 감추어진 비의를 당신이 찾아낼 때까지
數祕적으로, 아니 조금만 더 守備적인 삶을 살기로 한다
나무 호텔/천서봉
그러므로 나는 오늘 지루한 사막을 가득 메운 모래가 아니다
백자의 비명, 귀가 자라 작년의 소리를 듣는 나는 그러나 로비가 아니다
잘 지내느냐고, 차마 물어볼 수 없는 낙엽의 손끝은 나이테가 아니다
객실은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둔 무기력이 아니며, 혹은 끝없이 자라나는 허공도 아니다
일단 새들은 내가 아니다 바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심정으로 나는
나무 꼭대기에 걸린 단 하나의 죄에 대해 읍소했지만, 사실 그것도 詩는 아니었다
그러나 저기서 하룻밤 묵어가는 별이 미쳐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므로
너무 작아서 너에게 가 닿지 못한 내 목소리가 내일의 모래는 아니다
나무 호텔은 나무도 아니고 호텔도 아니다 아닌 것들의 밤이 넓고 유순하다
윤달/천서봉
1. 유년
묘지에는 꽃눈들, 은밀한 말들을 밀어 올린다. 바람은 무슨 전령인 듯 쉴 새 없이 오갔으며 그때
마다 가지들은 흔들리거나 스스로 제 이파리를 날려 보내는 일로 有心하였다. 세월은 믿음직스럽
지 못했다. 계절이 계절과 살 섞으며 슬그니 빠져나간 시간들, 뿌리들은 가끔씩 못 다한 말들을 혹
처럼 매달기도 했다.
2. 당신에게로
나는 더듬거리며 자주 어두운 공원의 행간으로 들어갔으나 둥글게 웅크렸으나 봉분 마다 벼린 변
명들이 웃자라 있었다. 칼날 같은 그대 뼛조각에 보란 듯 베인 적 많았다. 내 대부분의 날들은 行不
의 편지 속에서 늙어갔으므로. 슬근슬근 활자를 지워내던 사립문 밑, 쓸쓸한 先王, 당신의 한때를
나는 안다.
3. 한아름
빗줄기의 은유는 질기다. 휘파람을 불자 유빙처럼 떠돌던 고양이 한 마리가 구조신호를 보내온
다. 성긴 집채들의 이빨사이로 누추가 젖은 길을 만든다. 잃어버린 애인이나 구름은 꼭 그만큼의
질량으로 비를 만든다. 얼지 못해 겨울로 내리는 비, 고막마다, 상처를 품은 골목마다 지그시 흘러
드는 기억들.
4. 나에게로
투항하듯 돌아온 시간이 악취 풍긴다. 검게 들끓는 시궁쥐들은 이 저녁의 오랜 내력이므로. 썩은
달이 웅덩이마다 가득 고이면, 먼데 가슬가슬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棺이 완성될수
록 사람들은 허기가 더했다. 제 그림자들을 짊어진 채 移葬을 서두르고 있었다.
매독을 앓는 애인/천서봉
秋.
예감들이 가렵다 지난여름 물이 차올랐던 흔적이 누워있던 당신 배꼽부근에 선을 그었다 세
월이 나를 여기 이앙(移秧)한 날들로부터 수없이 흘러간 바람의 지문들, 숨어있기 좋지요 숨어
있기 좋다는 건 나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어둠과 제일 가깝다는 말이니까요 근친은 가진 구름
이 많아 비와 바람이 잦습니다 저는 사업자가 아니니 양도세만 물겠어요 구청을 돌아 나오며
우리가 물려받은 가장 아름다운 유산은 병이 아닐까 생각했다
冬.
태양은 책 속에서만 빛났다 금방 사라진다 공포가 기능하지 않는 악마는 내가 끼적이던 문장
을 닮았다 서럽게도 그러고 보니 대체로 화분에 꽂힌 식물은 말이 적다 생각지도 않았던 생각
들이 피어나는 감염의 계절, 병을 가지거나 혹은 잃은 다음에야 병은 온전한 우리의 것이 될
것이므로, 네게 달라붙어 있는 수많은 구름들을 나는 경배한다 너의 다리에 붉은 꽃 피어오를
때 눈 내리는 창문은 사랑하는 매미의 복안(複眼)처럼 흔들렸다
메모들/천서봉
詩의 이곽(耳郭)과 가장 유사한 것은 모래 아닐까,
말로 도강할 수 없는 정념, 災의 문장, 그건 유령인가?
냉장고에 불고기 재워놓았다 사랑한다
후문 쪽으로 돌아나가는 눈 덮인 운동장의 배후는?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만드는 사람의 행태
사람에 대한 관찰은 미음처럼 적어도 디귿처럼
날씨 흐림, 서정이던 것들은 이제 다시는 서정 아닌 건가?
아이스크림은 모래가 되고 싶고 질문은 위로가 되고 싶지
우리는 조금씩 느꼈다 아무 것도 변화하지 않는 것을
안개를 이해하는 새벽의 나무들, 불면 아니면 불멸
정도 많고 병도 많은 지구에서 조급하지 말기
덜컹거리는 뒷문의 긍정을 듣네, 오늘 저녁은 불고기
유령아 나는 네가 올까 가끔 창문을 열어두고 잔다
물한년한 이 식탁, 최초의 말후구(末後句), 불가촉적 函
갈라파고스, 서울 / 천서봉
이정표가, 무성한 갈대처럼 돋아 바람의 향방을 읽어보지만
따라가보면 모두 한 곳이다. 화살의 직관을 버리고 고향을 물어보면 사람들,
다 파도처럼 살았다. 밤을 밀려 가거나 혹은 저기 밀려오는
취객들의 출렁이는 이마 아래 곤한 갈매기, 숨은 그림처럼 아득하다.
또륵또륵 알등은 모의(謀議)처럼 빛나고, 춥다. 회빛의 거대한 숲이
검은 구름들을 목젖 아래까지 당겨 덮는다.
온몸이 휜 저녁의 빗줄기가 한바탕 환한 우산꽃들을 몰고 간다.
은밀한 피리 소리가 제 안의 짐승들을 불러내면
철벅거리는 밤의 우듬지에 모여 어른들, 서럽게 알을 슬고
멧새 부리 같은 당신의 입술은 꾹꾹 낡은 비애를 되씹는다.
비릿하고 촉촉한 슬픔이 유전된다. 입에서 입으로 건너온,
경계에서 피고 진 이곳의 오랜 기원에 관해서는 서로 모른 체하기로 한다.
변종(變種)의 사이렌 소리가 급히 창밖 도로에 금 긋는다. 놀라 갈라서는,
군상들의 섬 사이를 실뱀처럼 미끄러져 가는 바람, 바람에게 빌린
한 칸의 방에선, 당신도 너무 멀다.
처서處暑라는 말의 내부 /천서봉
골 진 알밤, 무딘 칼날 세워 보늬¹ 긁는다. 겨의 주름 깊이 길이 나있다. 더위가 물러가는 길, 길을 따
라 또 길이 돌아오는 길.
죽은 할미도 달의 오래된 우물도 모두 내 안구 속으로 돌아와 박힌다. 깊어가는 수심의 습지에서 남
보다 더 오래 우는 개구리의 턱이 깊다.
지나간 애인들의 뒤통수가 전봇대마다 건들건들 매달려 있다. 울음소리를 참아 온 나무들이 투명
한 손바닥을 여름의 뒷등에 비빈다.
앵앵거리는 추억은 다만 비틀어져갈 뿐, 하나도 안 아프다. 그런 모기의 주둥이처럼 저녁이 오고,
한두 겹의 내력을 더 견디며 나는, 고요의 중심으로 천천히 내려가리라.
더위가 물러가는 길, 파르라니 깎은 몇 개의 알밤을 바가지에 담그면 달의 손바닥들이 내 오래된 뇌
腦를 쓰다듬는다. 서늘한 나의 카르마.
혹시 오타가 아닌가 싶어 찾아봤다. ^^
1. 순우리말 보늬
보늬'는 도토리, 밤, 호두, 땅콩의 속껍질을 일컫는 순우리말 표현입니다. 겉에 위치한 껍질이 아닌,
속의 얇은 껍질을 뜻 하는데요. 순우리말 보늬는 약한 알맹이를 감싸는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아
이의 이름을 지을 때 약한 사람을 감싸는 따스함을 지니라는 뜻으로 '보늬'를 이름으로 짓는 부모님
도 종종 있습니다
강박들/천서봉
그날이
그날의 당신이 버스가 꽃이 프랑소와즈 아르디가 스타킹이
프렉탈이 원숭이띠가 어떤 범론이 개론이 개목걸이가
요코 다와다가 바다가 이민이 파도가 너울이 두통이 호흡이
그렇게 울음을 제유하는 묵언들이 왈칵,
쏟아져 내리는 나의 본가(本家)엔
당신이 버리고 간 구두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돌아가는 지구가 있고
여전히 한 척의 배를 띄우지 못해 얕은 강가에서 놀고 있는 아버지가 있다
머리 흔들고 손 저어도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몇 편 검은 햇살 같은 절망이 있고
그런 당신의 오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자진하여 부근이나 근처가 되어가는 발 저린 풍경이 있다
대문 밑 혓바닥처럼 밀려들어오는 고지서들, 참 더딘 고독들, 온다 안온다 온다 안온다……
아직도 나의 현관엔 모든 결심을 물시(勿施)하려는 외풍이 다정하고
홀수를 점치는 저녁이 이토록 서늘한 것은 열어둔 채 떠나온 당신의 마음 때문이겠다
2005년 작가의 세계 당선작
그리운 습격 / 천서봉
파편破片처럼 흩어지네, 사람들
한여름 처마 밑에 고드름으로 박히네. 뚝뚝,
머리카락 끝에서 별이 떨어지네.
흰 비둘기 신호탄처럼 날아오르면
지상엔 금세 팬 웅덩이 몇 개 징검다리를 만드네.
철모도 없이, 사내 하나 용감하게 뛰어가네.
대책 없는 시가전市街戰 속엔 총알도 원두막도 그리운 敵도 없네.
마음 골라 디딜 부드러운 폐허뿐이네.
빵 냄새를 길어 올리던 저녁이
불빛 아래 무장해제 되네. 사람들,
거기 일렬의 문장처럼 서서 처형되네.
교과서 깊이 접어 둔 계집애 하나 반듯하게 피었다
지면 사랑아, 모든 첫사랑은
아름다운 패배였을까.
나는 홀로 건너가는 殘兵처럼 남아,
빵집 앞 사거리 침묵이 침묵을 호명하는 낮은 소리 듣네.
어둠이 빵을 굽고 그리움 외등처럼 부푸네.
소나기의 습격을, 누구도 피할 수 없네.
나무에게 묻다 / 천서봉
나는 나의 아무것도 나무와 바꿀 생각이 없으나
그가 꿈꾸는 것들을 물어 본 적도 없다.
스님들은 일찍부터 禪房에 들었단다.
지나가던 보살에게 위치를 묻자
낮지 않은 돌담, 속세를 막아서는데
천천히 고개 돌려보니
담장 위로 낯을 내민 대숲이 오히려 나를 보고 있다.
앉았던 돌무지 위를 추스리며 내가 다가가자
대숲은 바람 지는 곳을 가리키며 이내 서걱거리고
사백 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는 그저
소소한 웃음만으로 제 주름 누르고 섰을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 이곳에 처음 뿌리 내렸을까.
나뭇잎만큼의 자잘한 햇살 밑으로
세월의 갈피를 펼치고
섬세한 잎맥들의 반흔을 짚어 가면
뒤바뀐 생의 主語들이 왈칵 쏟아져 내린다.
언젠가 내가 게워내던 순한 연둣빛
마른 가지를 닮은 사람 하나
정갈한 싸리비 자국을 밟고
한 번쯤 뒤돌아보며 스쳐가던 기억,
하늘에 닿지 않아도 가늠할 수 있던 내 오래된 궤도의 연원
위를 까치 한 마리 선 긋고 달아난다.
적요한 오후, 적멸궁에 매달린 물고기가
제법 소금기 가신 투명한 파동을 일으킨다. 이제,
나는 묻고 싶다. 우리의 모든 길은
어떻게 圓을 그리다 다시 그 자리에 숨쉬게 되는지.
슬쩍 돌아앉는 나무가
둥근 햇무리, 後光 아래로 들고 있었다.
청동기마상 / 천서봉
자주 머리가 무겁다. 11월의 거리는 내게 금지된 약물을 권하거나 혹은 침묵한다. 플래카
드가 아니다. 저 나무와 나무의 귀에 걸려 있는 흰 마스크, 아무래도 좋다. 거리에 관하여
나는 그 일부만을 긍정하므로. 끄덕끄덕 햇살을 털어 제 뿌리를 덮는 나무들, 그러나 한때의
빛나던 은빛은 금방 사라진다. 나의 계통수는 검고 자잘한 그늘의 맛에 익숙하다. 나무는 가
끔씩 마른 시위를 당겨 하늘 높이 새들을 쏘아 올리지만 화살 따위는 차라리 관념에 가 깝
다.
한 연대의 슬픈 계보처럼 풍경은 바람을 거느리고 바람은 속도를 거느리고 죽음을 거느리
고 다시 죽음은 죽음의 종복을……, 느릿느릿 구름 거푸집들이 녹슨 풍경을 낳는다. 거리마
다 딱딱한 고치들, 바람을 덮고 잠이 든다. 둔부를 들썩거리면서, 움켜 쥔 손아귀의 밤을 당
기면서, 세월은 꼭 그만큼의 보폭을 늘려왔을까.
그러나 11월, 거리는 아무런 말이 없다. 뾰족한 손가락 끝에 오소소 바람 긁힌다. 말 타는
소리도 없이 나무들은 그리움 자꾸 쏘아 올린다. 무거운 투구를 쓰고 밤은, 텅 빈 家族史의
안쪽을 걸어다닌다.
한꺼번에 발산하는 푸른 새들, 흩어진 家系처럼 어지럽다.
폭설 / 천서봉
1.
길이 낮게 들썩인다. 폭설이 시작되자 밤의 나무들은 모두 街燈 아래로 모여든다. 먼 곳의
숲이 어진 나무들을 모아 이름 없는 산이 되고 스스로의 경계를 지우는 동안 나는 점찍을
수 없는 어떤 나라의 낡은 지도를 펼치곤 하였다. 어머니, 제발 엔카 좀 그만 부르세요. 그
립지 않는 것도 가끔은 그리운 밤, 화해나 용서 같은 말에 밑불을 놓고 창 밖으로 혀 내밀
면, 닿을 수 없는 공중에서부터 눈발은 거친 둔덕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와르르 무너졌다가 다시 튕겨 오르는 白髮, 틈새마다 바람이 푸르르 끓다 간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만 자려무나.
2.
쉬 붉어진 알등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밤새 더러워진 문자들을 닦거나 숨 죽여 지도
를 그리는 일, 길은 마른 오징어 같았다. 쪼그라든 빨판 같은 어머니 기침 소리에도 기억은
총총 토막 나곤 하였다. 가령, 지면 위로 손바닥 흔드는 낙엽의 고별이나 어머니의 잠 속을
퇴각하는 늙은 군인들의 발자국 따위, 그 위를 덮으며 눈은 가등 아래서 한 번 더 내린다.
고단한 主語들이 부드럽고 아픈 묘혈 짓는다. 희고 둥근 창 밖으로 밤새 미완의 빛들이
절뚝이며 흘러 다녔다. 무례한 손전등처럼 더듬어보는 아랫목 어머니 모로 누우신 능선 본
다 길이, 아득하다.
바람의 목회 / 천서봉
붉은 창문들 저무네. 거리엔 부옇게 물길이 번지고 벗겨진 대지의 표면이 비늘처럼 흘러
가네. 햇살의 따가운 못질 뒤에도 나무들은 자꾸만 제 잎 쥐고 휘청거리네.
버려진 오르간처럼 켜켜이 쌓인 공사장 파이프들이 저녁을 연주하네. 노을 따위를 발음하
면 삶은 늘 뿌리부터 뒤척인다고, 저기 어깨 둥글게 웅크려 철야기도를 준비하는 가로수.
공중을 만지는 평화로운 연기를 보네. 바람은 오후 6시를 읽는 기술, 혹은 복음. 흔들려야
지. 흔들려야지. 깃대처럼 골목에 나를 꽂아두네. 떨어져 빈 나뭇잎 자리까지, 다만 모든 것
이 바람의 영역이네.
늦은 상점의 문이 스르륵 밀렸다가 절로 닫히네. 누구일까. 누구일까. 어둠의 긴 목이 자
꾸 기울고 사람들은 정물처럼 늙어가네. 모두가 바람의 존재를 믿었지만 아무도 그의 뼈마
디를 보지 못하네. 푸르르,
저마다의 십자로를 건너는 시간, 허파꽈리처럼 웅크려 핀 생의 바람꽃들, 지천이네. 자라,
자라, 잠들지 않는 한밤의 환한 集會를 보네.
당선소감
내가 뱉은 수많은 글, 혹은 말들 때문에 괴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끄러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또한 심히 괴롭다. 한때 행복과 고통이 암수딴몸의 것이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적어도 그것들이 연속선상에서 운용된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다만 퍼지 이론과 같이 무수한 점들이 겹치고 부딪히고 반목하며 덧대어지는 시각적 변용일
뿐.
그러니 모두는 별자리 같은 거였다. 나 또한 붉게 타올라 잠깐 빛나다가 서서히 공중으로
사라질 것을 안다. 거기 부재의 외연을 끌어 모으고, 문자의 나사로 조근조근 조이는 일, 그
일련의 작업이 내게 주어진 숙제며 詩라고 믿는다.
별을 줍는 마음으로 쓸 것이다 그리고 모두에게 고맙다 모두란,
바로 당신,
살았거나, 죽었거나, 혹은 먼 훗날 오래된 서고에서 나를 꺼내게 될 당신, 수줍게도 세상
밖으로 처음 속죄하는데 나를 살펴주는 당신이 있어 기쁘다. 감사한다.
이제 나는, 올록볼록 솟은 상추의 근육처럼, 잘 익은 가등을 따서 가슴의 중심에 얹어도
좋겠다 라고 늦은 밤 중얼거린다. 여전히 불가해한 문자중독에 시달리는 것도 언젠가 당신
이 보내온 한 줄기 빛 때문이었을 거다. 나무의 붉은 손바닥이 허공을 비비는 습속도, 깔깔
거리는 여고생들 입 속으로 스미던 쓸쓸한 저녁도, 내 기억이 당신이라는 형식과 부딪혀 만
들어 낸 행복이고 고통이라 믿는다. 아름다운 동반자 희정이, 형님들과 형수님들, 상현이, 송
현이, 세현이, 친구들, 온시동인, 시산맥 선생님들, 윤성택 시인을 비롯한 지인들, 만화가 아
비 씨께 감사한다. 모든 이름을 호명할 수 없다. 다 쓰려면 작가세계 겨울호를 당선소감으로
만 채워야 하리라. 물론 모든 영광은 재능을 주신 어머님, 늘 文字의 안쪽에 계시던 아버님
의 몫이다. 마지막으로 작가세계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의 감사를 표한다.
심사평
2005년 『작가세계』신인상의 시 부문에는 800여편에 이르는 많은 작품이 투고되었다. 전
체적으로 일별할 때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문제의식과 시적화법이 표나게 드러나고 있었다.
2000년대도 벌써 5년이 지나면서 전통적인 시의 관습과 제도를 탈피하여 당대적 시대정신을
섭수하면서 새로운 시적 감성의 언어를 연마하는 연금술사들이 경향 각지의 도처에 산재하
고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선자들의 분주한 손길을 거쳐 최종심에 오른 작품으로는 배두순의 「고로쇠」외 10편, 이인
주의「茶山에 기대어」외 10편, 송기영의「실험실에서 보낸 한 철」외 9편, 천서봉의「그리운
습격」 외 9편 등이었다.
배두순의 작품은 매우 싱싱하고 건강한 상상력을 힘차게 뿜어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
적 특장이 될 수도 있는 이러한 도약적 상상이 시 의식의 내적 심화보다는 오히려 시적 절
조와 밀도를 떨어트리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시적 상상의 사다리가 좀 더 참신하고 견
고했으면 한다. 이인주의 작품은 시적 호흡이 길고 유장한 내공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너무
서술적이고 설명적인 어투가 전면에 드러나고 있다. <말하지 않기 위해 말한다>는 시적 언
어의 속성을 좀 더 깊이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송기영의 작품은 매우 감각적이고 섬세한
감수성이 돋보인다. 특히 시적 대상을 자신의 고유한 시적 어조와 화법으로 견인하여 육화
시켜 내는 능력이 수준급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시적 주제의식을 좀 더 깊고 끈덕지게 밀
고 나가는 승부근성이 요구된다. 이때 그의 시적 방법론도 더욱 빛날 것이다.
천서봉의 시적 어조와 화법은 명주실처럼 매우 여리고 섬세하면서도 강한 견인력을 지니
고 있다. 그의 시편은 견인의 힘으로 시적 대상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 탐사해내고 있다.
「그리운 습격」의 경우 <소나기의 습격>을 묘사하는 언어들이 소나기의 파괴력과 속도감
은 물론 <어둠이 빵을 굽고 그리움 외등처럼 부푸>는 뒤안길의 감성의 정황까지도 동시적
으로 감각화하고 있는 능력이 매우 높이 평가된다. 이와 같이 시적 대상을 온유하면서도 끈
덕진 감성의 언어를 통해 입체적으로 감각화하고, 그 의미를 적요한 시적 울림으로 전하는
능력이 투고 작품 전반에 걸쳐 고르게 드러나고 있다. 천서봉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그의 당선을 축하하며 문운이 있기를 기원한다.
(이경호 홍용희)
불심검문(不審檢問) / 천서봉
1.
정류장마다 절망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버스에서 내릴 수 없었다.
절망을 만나러 가던 길 아니었으므로. 그런 날,
돌아오는 길은 끝을 확인할 수 없는 전전(戰戰)이었고
막다른 긍긍(兢兢)이었다. 고단한 잇몸을 가진 버스들이
입 벌린 채 잠들어 있었고 그런 입 속에 들어가
순한 먹이가 되어도 되겠냐고, 아직
계절 속으로 돌아가지 못한 새에게 묻곤 했다.
2.
숲이 어디까지 짙어질 수 있는지,
위험한 짐승들을 키우기에 불신은
또 얼마나 적당한 온도였는지 알지 못했다.
너는 어디로 가는 길이지? 길을 막고
두 팔 벌린 붉은 십자가들이 물었다.
나무는 시월 같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런 날,
밤은 수없는 논리를 내게 던졌고 가등은
샴쌍둥이처럼 서서 하나의 뿌리에 관해 질문했다.
뒷골목엔 또 다른 절망을 낳는 여자들
신음이 아무렇게나 길이 되고 있었다.
3.
정류장마다 절망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담을 넘듯,
당신과 내가 겹치듯, 세월을 건너뛰면 안 되나.
겨울 정류장 부근엔 주민증(住民證)처럼 얇아진 사람들이
자주 버스를 놓치거나 버스에서 내리지 못한다.
콜타르 / 천서봉
문장이라 부르기엔 너무 작은 알갱이들이 소녀들처럼 반짝거렸고 어른들의 입에선 약현성당 비탈길 같은 과거가 흘러나왔다 어둠이 바닥을 메워가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밟고, 사람을 먹어치우던, 신열 가득한 어제가 진심처럼 누워있어서 우리도 급하게 어두워졌다 반박할만한 추억도 없이, 길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항복하듯 우리는 걸었다 구름이나 안개로 만든 저녁을 배급받았다 무슨 소리든 내야했으므로, 어떻게든 조금 더 목소리를 아꼈다 우리라고 불리는 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끈적끈적한 행과 열 속으로 녹아들었다 고독을 두껍게 바르고 잠든 소년의 눅눅한 꿈이었다
알코올/천서봉
김창비와 이문지는 친구다.
삶이 그렇게 어려워만지냐고 창비는
문지를 나무라지 않는다.
영혼이란 게 어디 팍팍한 화두만 같냐고,
문지는 창비에게 묻지 않는다. 슬프게도
백 년 동안 단 몇 줄의 상처만이 대물림되지.
계절이 쓰고 불현듯 날아가는 늙은 새가 쓰고
각인된 너의 얼굴이 나를 쓴다. 그러니
너와 나는 친구였을까, 근원이었을까, 그런데
왜 우리는 모두 무언가 되어야만 하지?
김창비와 이문지와 천서봉이 나란히 앉아
신경증적인 겨울 해의 투신을 지켜본다.
거울이 거울을 어루만질 수 있을까?
미끈거리는 바람의 질감 속으로 망명하고 싶다.
속도로부터 이탈하는 잔상들이
갓길에 심어놓은 슬픈 나무들 묘묘(杳杳)하다.
차라리 저렇게 라도 서 있는,
서서 끄먹끄먹한 하늘에 수없는 잔금이라도 그어보는
나무의 불온한 심지 속으로,미끄러지고 싶다.
언제나 저녁이면 와장창
하늘이 깨어져내릴 것만 같다.
여태껏 나는 살아
어둑한 카페 구석에서 생일 파티의 주인공을 기다린다.
폭죽 같은 고해를 준지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두 권의 시집*이 증발하기 전에 나는
조심스레 흐르는 내 안의 나지막한 생식(生殖)을 여기 기록해둔다.
삼발이처럼 견고한 시간,
이 기다리는 건 친구 아니다. 침묵이다.
침묵의 커다란 입이다. 입속에 숨겨진 가공할 잎이다.
다닥다닥
빙점의 서늘한 별들이 유리창에 달라붙는다.
불씨는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고
오늘은 죽은 자들의 생일,
*최영숙의 [모든 여자의 이름은], 기형도의[입속의 검은 잎]
시네도키, 詩* / 천서봉
우리는
지나간 사람이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병을 앓았다
종종 낙엽이 무엇의 일부인지 생각했고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도 서슴지 않았다
아름답지 않나요? 어긋나는 사람들
그것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어떤 우리에 조용히 가두어졌고
어떤 대의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할까?
그런 생각만으로 삶을 탕진하는 건
사람밖에 없다는 것을
아마 빵이라면 조금 알겠지
이제 구름이라면 나도 조금 느끼니까
이룰 것 없어 잠 못 이루는 날이면
종종 안개가 무엇의 일부인지 생각했고
단지 우린 모두 미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을 뿐이지
라고 말하는 가슴 속 타인과 대화한다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지나간 사람이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병을 앓았다
아름답지 않아요, 어긋나는 사람들
人類는 의연한데 나는 조금 슬퍼졌다
나는 무엇의 일부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
* Synedoche,, New York, 2008 찰리 카우프먼 감독 영화의 원제에서 뉴욕을 시로 바꾸어 놓는다.
거짓으로부터 / 천서봉
나는 왔다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조금 미쳐있는 사람들로부터
술이 되어가는 침묵으로부터
버릇없는 아이들의 부모로부터
7시 이전의 6시로부터
출구가 기억해내지 못하는 입구로부터
비가 되기 전의 구름으로부터
내가 사랑하기 전의 당신으로부터
입이 되기 전의 귀로부터
그만하자
그만하기 전의 분열로부터
소용 전의 불용으로부터, 그전부터
거짓말처럼 나는 이미 도착했다
유령 / 천서봉
내 목숨을 버릴 수 있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사라진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내 사랑이었다
주머니에서 상처를 꺼내 보여주던 물가에서 물빛들 끓어오르는 것 말고도 분명 무언가를 보았다
삼촌은 죽었지만 족보에 없었다 목소리가 사라진 후경의 나무처럼 바람을 빌려 울어볼 수 있을까
대답하기엔 우린 이제 너무 투명해졌구나 구두가 소리를 밟고 사라진 이후 비로소 시작된 이야기
발목을 잃은 사람을 가끔 만났고 밥을 나누고 고갤 끄덕였지만 새들은 우리를 피해 멀리 날아오른다
도처에 죽어있는 삶, 다가오지 마, 나는 있는 힘껏 돌을 던졌지만 추억은 어떤 상처도 입지 않았다
각성 / 천서봉
어느 순간 그릇이 손을 이탈하여 깨어지는 일, 그렇게 당신을
보내고 나는 비로소,
오늘까지 보던 것을 이제 오늘로 끝내는 일, 부레 없는 물고기
가 되어,
돌아보면 외로움을 견디는 것이 나의 시작이자 끝이었다고, 그
리하여 흙으로 돌아가고 싶던 그릇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그런
온순한 일 따위는 아니고
가령 그것은 어둔 하늘을 반으로 가르는 번개의 일, 손목이라
도 그어,
불이 되고 싶은 아이들이 공터에 모여 비를 맞고 있다 어른들
이 모두 사라지기를, 나는 여러 번 기도했었고 그런 내가 아직
도 살아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오늘, 나는 그렇게 당신을 보내고 어쨌든 비는 구름의 각성
雨中散策 / 청ㅣ천서봉
누이야, 빗소리가 내 귀를 파먹는 밤이네. 이런 밤엔
머리에 아름다운 꽃 한 송이 꽂아보고 싶어.
온몸에 미친년 치맛자락 같은 실밥 두르고
나도 한번쯤 흐드러지고 싶어. 꽉 찬 지푸라기 업고,
더욱 꽉 찬 결핍의 사타구니로 앙앙 울어대는
베개를 낳고 싶어. 누이야, 오랜 건조주의보는
빗살의 완곡한 철창 안에 갇혀 난처한 얼굴이네.
빗물이 안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어. 활활
타올라 보지도 못한 채 가로수들은
잎과 가지를 뒤섞으며 둥글게 일그러지고 있어.
매직아이처럼 어느 순간 떠올라 둥둥 흘러가는
산책이여, 조난 당한 우중의 외도여.
눈 어두운 길 위의 애무는 배꼽 같은 가등 밑에서
아득한 피안의 표정으로 서로를 적셨지만,
머리에 꽃을 꽂은 여자는 미친 여자
라는 상징은 아직 유효한가. 머리엔 처녀치마꽃,
안테나 높이 올리고 빗소리가 파먹은
상처의 둥근 귓바퀴 따라 걸어보고 싶어.
도저한 빗물 받아먹고 돌멩이 맞아 죽은 아들 하나 잉태하고 싶어.
바벨의 도서관* / 천서봉
책속엔느물느물종이가살고위로겅중겅중활자가뛰어다니고
보란듯이여백은생을탕진하고죽은몸의잉크가풍화에시달리고
먹다남긴식빵이버석버석말라가고식빵속잼이입에거품을물고
잼속의딸기씨가별처럼외롭고먼빛이어린나무들을키우고
붉은숲속엔저녁의회한이자라고나이테가거침없이파문을찍고
자진하여세월이갇히고거기잊혀진것들이모여살고
잊혀진것들끼리아이를낳고아이가소용돌이를만들고
소용돌이가바빌론언덕을세우고거기책속으로사라지는내가있고
도서관에는없는것이없고영원히영원한것은없고
텅빈방안에그대가없고노랗게웃는은행잎은앞니가없고
영원한부재속에영원이있고어린혼돈이쑥쑥커가고
담쟁이가끝없이자라나고다만책속엔느물느물종이가, 내가.
* Jorge Luis Borges
Snake Paths / 천서봉
뒷마당 대숲이 피리 불었다. 매미의 날개 밑에서 여름이 공명했다. 날개가 없는 것들은 길 위를 헤매었으나 없는 길에 웅크려 사람들, 독(毒)을 짓기도 했다. 치명적인 건 뱀만이 아니었다. 춤꾼이 된 삼촌은 피리의 음계를 넘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햇살 밑, 새까맣게 타들어 가던 작은 엄마, 대신 해바라기가 왈칵, 이빨들을 모두 쏟아내던 그 해 가을, 댓잎은 하나 둘 우리를 풍경의 길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굽은 허리를 마지막으로 펴며 할미가 죽고,
겨우 십 년이 흘렀다고 뒷마당 대숲이 허리 꺾으며 또 울었다. 기실 소리의 내력이 길을 불러들였던 것. 모여든 혓바닥들이 텅 빈 고향집 가득 똬리 틀었다. 잠시 뒤엉켰다 다시 흩어질 것이다. 세월은 모두 혀 내두르며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이므로, 풀들은 잠깐 누웠다 바람 소리에 깨어 우리가 지나온 흔적을 지웠다.
행성 관측 / 천서봉(1971~ )
불행이 따라오지 못할 거라 했다.
지나친 속도로 바람이 지나갔고 야윈 시간들이
머릿속에서 겨울, 겨울,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일찍 생을 마친 너를 생각했다.
대개 너는 아름다웠고 밤은 자리끼처럼 쓸쓸했다.
실비식당에서 저녁을 비우다 말고 나는
기다릴 것 없는 따스한 불행들을 다시 한번 기다렸다.
하모니카 소리 삼키며 저기 하심(河心)을 건너가는 열차.
왜 입맛을 잃고 네 행불의 궤도를 떠도는지.
콩나물처럼 긴 꼬리의 형용사는 버려야겠어.
말하던 네 입술은 영영 검은 여백 속으로 졌다.
그래도 살자, 그래도 살자.
국밥 그릇 속엔 늘 같은 종류의 내재율이 흐르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건 여전히 사람이지만
나는 더 이상 사람을 믿지 않는다.
나의 늙은 군대는,
—詩의 나라
천서봉
나의 늙은 군대는, 사람들 가끔씩 올려다보는 저녁의 추억,
그 추억을 일시에 점령하는 붉은 구름의 영혼 같은 거
착한 상인들을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저녁의 셔터음처럼
드르르륵 발사되는 단호한 외침 같은 거
나의 군대는, 수명을 모르는 빈 마당의 촉수 낮은 전구와
그 전구가 지배하는 평상의 낡은 네모와
네모가 만들어내는 엄격한 그림자에 놀라 커엉컹 짖는
개 한 마리, 누렁이가 지키는 놋쇠그릇의 둥근 상처 같은 거
후회스러운 것은 때때로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거
점호 나팔 혹은 그 소리를 닮은 노트에 적힌 긴 주어들을
자꾸만 잃어버렸으므로, 달큰한 잠이 조금씩 회군하던
내 머릿속 위태한 연안으로부터의 어떤 망명—
그리하여 홀로 남겨진 외로운 抒情의 가치가
시월의 빽빽한 숲 속으로부터 우리를 이끌었다는 거
그러나 나의 늙은 군대는, 그 숲의 백양나무처럼 서서
낡은 고독을 기억하고 고독의 처음 느낀 입술을 기억하네
언제든 불러 모을 수 있는 이 가난하고 슬픈 기운들,
나는 지금 노을 지는 쪽에 자리 잡은 어떤 작고 오래된 제국을 보네
사랑에 관한 짧은 몸살 / 천서봉
지렁지렁, 사인곡선처럼 반복되는 환청 듣는다 별들이, 머리맡에 모여 묻는다 그립냐, 그립냐고 발음하는 그 발긋발긋, 열꽃들 이마에 필 때마다 창문은 제 흐린 예감이 가렵고 믈컹믈컹한 살 금방이라도 허물 듯 나는 헛땀 쏟는다 이제 곧 비가 오리라 살기 위해 머리 내미는 가느다란 기억의 농담(濃淡)들, 몸을 허락하는 것보다 사랑한다 말하는 일이 더 어려웠던 여자가 있어서 꼬물꼬물 콩나물 대가리처럼 피는 아픔 있어서 힘겹지만 아름다운 진흙 향기 하늘까지 오른다 머리가 끊어지면 꼬리가, 꼬리가 끊어지면 머리가 대신하는……, 추억의 몸, 몸들 왜 만질 수 없는 강박의 방들은 모두 환형(環形)인가
내 머릿속 황토밭, 지렁지렁 당신을 앓는다
고구마라는 말이 / 천서봉
어느 날 고구마라는 별이 우리 집 가장 가까운 곳을 스치고
네모난 집만 그리던 나는 어느 날 네모난 집이 그만 싫어지고
구근처럼 골목골목 혜집으며 저녁이 집으로 돌아 올 때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어느 정류장에서 찬란을 기다리나
솥에는 김이 오르고 생각만으로도 싸늘하게 식어 버리는 나의 사랑
한 입 더 먹을수록 비어가는 각자의 별이, 심장 가까운 곳을 스치고
나는 네모난 창에 붙어 우물우물 적갈색 럭비공의 뽀족한 끝을
교회 붉은 십자가의 중앙 정조준도 하고, 아직 나의 기도는 너무 멀고
마침내 집은 사라지고 네모난 창과 네모의 노란 허기만 남을 때
캄캄한 서녘, 불빛을 내며 추락하는 기별이, 나에게서 가장 먼 당신을 스치고 다시 어느날 자궁처럼 나를 가두는 고구마라는 별이
관상어 가게를 지나는 산책과 검열 / 천서봉
밤은 입을 벌려 무언가 종용한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낮에 만난 사람들은 사라지고 없다
주변을 배회하는 것들을 먹어치우고 입은 또 입을 만들어낸다 파릇하게 신호가 바뀐다
생각은 왜 아무렇게나 길을 건너가나 지느러미를 옮기며 유유히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당신을 데려다가 기르고 싶었던 적이 있다 가령 행복의 종말까지 함께 걸어가 보는 일
미끄러운 입을 붙잡아 한데 꿰어두고 더 이상은 고독이 자라지 않는 시간을 만드는 일
늘 젖어서 젖을 일 없는 길이 시드니까 관념어들은 작은 기척에도 벌레처럼 모여든다
밤의 입김이 피어오르고 그 캄캄한 입은 이름을 묻고 나이를 묻고 사랑에 대해 묻는다
만질 수 없는 산책길에서 낮에 만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사라진다
봄밤을 위한 에스키스
-역사에서
천서봉
가로등이 제 아랫도리를 비추었다. 땅 위에 번져가던 어
둠이 흠칫 놀라며 멈추어 섰으나 이내 성큼성큼 그 무거
운 빛깔을 옮겨갈 때 나는 불씨 하나 손에 쥔 사내가 쓰레
기통에 불을 놓고 가는 것을 보았다. 가끔씩 터져서 튀어
오르는 무엇이 몇 개의 별을 공중에 박아놓기도 했지만
누구도 이 어둠을 흔들어놓지 못했으므로, 사소한 나무의
떨림을 다스하게 덧칠하는 연기자락, 生은 흐렸다. 사람
들의 입 막으며 저녁이 선로의 빛나는 침묵 위를 종단한
다. 덜컹거리며 다가올 열차는 무엇으로 스스로의 이정표
를 찾아가는지, 주머니 속 차표를 만지작거렸다. 희망은
닳거나 구겨져 있었다.
감자 먹는 사람들 / 천서봉
모두 방 하나씩을 쥐고 있다 감자의 살은 여리고 기도祈禱는 멀지만
울퉁불퉁한 살 한 입 베어 물면 베인 반달은 차거나 이지러져야 한다
설탕이나 소금을 더하는 일이 취향인 것처럼 감자는 각자의 방이고
각자의 밤이다 둘러앉아 감자 껍질을 벗기는 식탁이 별처럼 차갑다
우물거리는 입은 고요하지만 개구리 볼 같은 복화술을 이해하는 밤
바구니엔 아직 소란한 감자가 여럿 남아 있고 이런 맥락을 건너려면
목이 메는 건 당연하다 일용할 각자의 감자는 감자의 각자이므로
멀리서 보면 불 밝힌 식탁이 하나의 감자다 그러니 감자가 밤을 먹고
또 먹으면서 새로 방이 자란다 유비는 위태롭지만 감자는 모래의 적자다
서걱거리는 음자音子도 공자도 영자 엄마까지도 모두가 사막의 감자다
청량리, 灣 / 천서봉
구불구불 뇌 속, 웅크린 상점의 여자는 뜨개질 중이네. 너울너울 나
비처럼 순한 춤처럼 그녀의 입속에서 길들이 흘러나오네.
모든 길은 꽃 피우고 거기 나무 세웠네. 거미의 꽁무니로 빠져나가
는 저녁, 탄식의 갓길 위로 나를 걷게도 했네. 돌아가기 너무 먼 곳
은 쉽게 잊혀졌네.
바람은 순결하지 못하네. 누대의 주름이 병든 대지를 양탄자처럼
띄우며 노는 동안 청량, 청량, 내 낮은 단잠의 수위를 웃돌던 파도소
리.
올올 흩어져 흘러가는 홍진은 모두가 놓친 길이었으므로, 늘 유심
한 문장이었네. 함몰과 범람의 엉킨 타래를 잦는 낡은 물소리를 나
는 읽네. 머릿속,
좀체 완성되지 않는 波浪을 그녀는 뜨개질 중이네. 흘러서 끝이었을
까. 한 땀 한 땀 견디며 건너는 灣이 거기 다 있네.
門을 위한 에스키스 / 천서봉
낙원을 찾아 헤매다 이렇게 늙어버렸다 수많은 문을 닫고 문에서 나왔다
소슬한 사람과 몸을 섞다 배워버린 키스 때문에 내 문장은 사막이 되었다
똑같은 사랑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은 모든 신음을 문에게서 배운 까닭이다
聞에 가만히 귀 대보면 그 반대편에 누군가가 숨죽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들어왔으니 나온 것이고 당신을 떠나 비로소 당신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이 밤에 별자리 하나 찾아들지 못한 것이 문이 내게 준 유일한 절망이다
그러니 낙원이 아니길 바라며, 불완전한 11월은 끝내 불완전하길 바라며
쓴다 문밖에서 외로이 나를 기다리는 낙타는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의 問,
악한 짐승과 조우하거나 열등했고 당황했던 순간이 모두 문이었음을 안다
이렇게 늙은 밤에, 모든 문에는 神이 살고 있다는 말을 가까스로 생각한다
문고판 하이틴 로맨스
—주원에게
천서봉
책마다 영혼이 들어 있었다. 몸은 작고 내부는 두터워서 늘 숨어 있기에 좋았으므로, 애인이 책갈피에서 떨어져 꽃을 피우기도 했다.
영혼이라는 말에선 언제나 구름 냄새가 났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지상에 디뎌야할 발들이 보이지 않았다. 깨어나면 키가 한 뼘씩 자라 있었다.
슬픔 아니면 기쁨이었다. 우리의 아름다운 주인공은 죄가 너무 많아, 다만 모든 게 억울했고 바람이 엮어준 플라타너스 그늘은 꼭 셋이나 일곱 명을 무리 지어주었다. 백마 아니면 흑마였고 시험에 나오거나 혹은 나오지 않는 계절이었다.
커서 뭐가 되겠냐는 질문이 많았고 강물은 자주 도로를 덮쳤다. 그때마다 문고판을 하나씩 사모았다. 견고한 바람벽 속에서 무언가 되겠다는 생각이 생각들을 버리고 있었다. 때로 텅 빈 동공을 가진 나무들의 수화가 아름다웠다.
교과서 위에 포개어 읽으면 허벅지가 허벅지 위에 겹쳐 늘 아찔한 시너 내음이 났다. 꿈의 대부분은 휘발하기에 좋았다. 모든 게 단편이었고 한권이 끝나면 우리는 쉽게 잊혀졌다. 세월은 겨우 몇 개의 목차로 요약된다는 걸 몰랐다.
사회책 속의 푸른 사과 / 천서봉
자꾸 부르는 소리 들려 나가보면
희망이나 진통 같은 단어가 버려져 있었다.
누가 자꾸 내 뒤란을 다녀가는 건지,
뾰족하게 돌아보는 고양이의 눈동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간 넝마주이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자유주의의 탓은 아니다.
늦은 새벽의 안개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추억이
과거로 처형될 것을 미리 알았으므로
모든 삶이 미필적 고의였다.
중앙선 가로등은 왜 샴쌍둥이처럼 서서
우리의 얼굴을 환히 비추는가.
건축가들은 병적으로 하이브리드에 집착했으나
유행에 둔감한 가족들은
병이 없어도 아팠다. 검은 비닐봉지가
뻔한 허풍으로 거듭 날아오를 때 방치된 드럼통 속에선
날마다 수상한 증거들이 태워졌다.
모두 사라졌는데 자꾸 부르는 소리 들려 나가보면
아삭아삭, 고양이들의 미소가 달았다.
아직은, 쓸 만한 단어들이 자꾸 버려져 있었다.
소한(小寒) / 천서봉
눈 날린다. 당신에 대한 사랑은 수없는 문지방을 풍각쟁이처럼 떠돌다 서른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몰랐다. 저 푸른 눈밭의 현현이 텅 빈 네 부재와 같은 종류였음을. 피안은 더 큰 창을 내달아 그 풍광 속에 나를 세워두는 일임을. 바람은 혀를 세워 빈 거리의 밑바닥을 핥고 사람들은 제 입 막으며 추억 견딘다. 대지의 엉덩이에 꽂힌 가등 위로 낡은 잎 쥐고 끙끙거리던 나무가 말한다. 조금은 너도 견디고 있구나, 저녁의 긴 다리가 미끄러진다. 환각 위로 또 눈이 엎어진다. 이미 녹은 눈이 어린 눈을 안아 녹인다. 괜찮다 괜찮다, 소한 소한 눈 날린다.
사랑에 관한 짧은 몸살 / 천서봉
지렁지렁, 사인곡선처럼 반복되는 환청 듣는다 별들이, 머리맡에 모여 묻는다 그립냐, 그립냐고 발음하는 그 발긋발긋, 열꽃들 이마에 필 때마다 창문은 제 흐린 예감이 가렵고 믈컹믈컹한 살 금방이라도 허물 듯 나는 헛땀 쏟는다 이제 곧 비가 오리라 살기 위해 머리 내미는 가느다란 기억의 농담(濃淡)들, 몸을 허락하는 것보다 사랑한다 말하는 일이 더 어려웠던 여자가 있어서 꼬물꼬물 콩나물 대가리처럼 피는 아픔 있어서 힘겹지만 아름다운 진흙 향기 하늘까지 오른다 머리가 끊어지면 꼬리가, 꼬리가 끊어지면 머리가 대신하는……, 추억의 몸, 몸들 왜 만질 수 없는 강박의 방들은 모두 환형(環形)인가
내 머릿속 황토밭, 지렁지렁 당신을 앓는다
만일의 방 / 천서봉
오늘 방을 생각하는 방의 입장에 대해 생각한다 하루치의
방과 그 방의 체적이 감당해내는 우울
우각과 우각 천장과 바닥이 대치하는 저녁들 바람의 이탈
을 돕고 허공에 안주하는 일들, 아는가?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방의 고
독을, 만일 방을 뒤집는다면 그것은 다시 방인가?
어제의 햇살과 오늘의 햇살이 다르게 말하는 것을 방은 진
실로 견딜 만한지, 방이 방에게 살해되거나
문득 자결하는 결심하는 그런 방들, 가능하다면 그런 방에서
더 멀리 있는 만일의 방을 생각하자
이제 그만 문을 닫고 방을 열어보자 나를 담고 어두워져
가던 그런 방 말고 방이 방을 생각하는 입장에서,
방의 계절과 방이 모여 만든 도시에서 누구도 불법점거하
지 않는 그런 방, 방이 태어나기 전의 아마도 윤리적인 방
구름 편력 / 천서봉
셀 수 없는 구름들을 나는 지나왔으니,
서해 어디쯤이거나 차가운 사막의 귀퉁이쯤이 태생이었을
구름의 먼 행보는 모르는 것으로 한다.
석 달 열흘 동안 먹장구름이 눈물로 떠나지 않았다거나
나와 어느 달콤한 오월의 구름 사이에
보름달 같은 아이가 자란다는,
뜬소문들이 연기처럼 자라나 헐한 저녁을 짓곤 했다.
그러나 이제 시월,
하늘은 생각의 高度를 조금 높인다. 실상은 늘
비가 되어버린 구름의 후일담 같은 것.
나는 구름을 위해 몇 편의 시를 짓거나
시절의 아름다운 증거를 사진 속에 가두었으나
대부분 먼 배경이었으며 알고 보면
구름 모자들이 한번쯤 쓰윽 나를 써보고 간 것뿐이었다.
뒤를 삶이 들러리처럼 걸었으니,
변덕스럽고 지독했던 체위가 내 이력의 전부였구나.
내가 가졌던, 그러나 위독했던 한 떼의 구름들,
그녀들이 알선해 준 내 몽상의 일터엔
한 줄로 선 토끼나 양떼들이 슬픈 톱니바퀴를 돌리고 있다.
구름이 나를 망쳤다.
너무 많은 하늘이 나를 스쳐지나 갔다.
스포이드 / 천서봉
낡고 좁은 골목을 걷고 있습니다 스무 살은 금방 깨질 것만 같았습니다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스물다섯에는 넓은 바다로 나갈 수 있을 텐데, 자고 나면 점점 더 벌어지는 어깨, 위에 누군가 뾰족한 목마라도 태우고 싶었습니다 애인은 투명한 것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되고 싶어, 저 너머에서 이곳은 보이지 않아, 말하고 싶었지만 우리는 곧 나무가 될 몸이었습니다 여린 풀잎들이 어지럽게 머리맡을 돌아다녔습니다 우리는 물살을 타고 어딘가 빠르게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각기병/천서봉
할 수 있는 것 없어 바닥을 뒤졌습니다 장롱 밑, 소파 밑, 냉장고 밑, 도롱이
벌레처럼 웅크려 썩는 기미들,
먼지와 놀게 두었어야 할 문장들, 비 오는 어느 날 수수빗자루를 뒤집어 그
것들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딱지나 구슬, 주사위 같은 것으로 시작된 발굴은 차츰 먼지나 바람,
그림자 같은 것들도 괜찮아,
더글더글, 긁어내던 구멍이 내가 누울 수 있을 만큼 커져버렸을 때, 대체 이
슬픔은 어디가 끝인 것이지?
소호 발굴 소장품 전시회에 초대 받았을 때 나는 다락 서까래 사이에 끼여
있던 굴욕을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빛을 들고 왔다는 한 사람 주목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펼쳐 보이는 손
바닥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쌀밥이나 퉁구스카 대폭발, 아나톨리 金, 무엇보다, 점
점 야위어만 가는 다리들은?
이제 그만 그들을 그들에게 돌려보내고 빗자루를 마당에게 돌려주고 투명한
저녁 아래 몸을 누이기로 합니다
어지러운 구름들이 기립 박수를 받고 있었습니다 비로소 11월이, 11월을 앓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한아름/천서봉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막대기로 찔러보고 전등으로 비추어보고 저마다 검은 구멍을 열어보려 웅성거렸으나,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구멍을 안아보거나 빨아보거나 함부로 제 머리를 집어넣고, 때로 모자를 만들어 쓰기도 했으나,
나는 그 앞에 천막을 짓고 밥을 짓고 시와 바람을 지으며 너른 저녁의 품 속에 들어 당신과 한 천년쯤 살 섞어도 괜찮겠다
고......
해가 기울자 붉은 녹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서쪽이 하루에 대해 말하는 동안 내 안에서 나보다 더 커져 있는 한아름의
구멍.
일생이란, 가령 츄파춥스를 가득 실은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간 것뿐이다. 나는 통통한 볼을 가진 소녀의 이름을 다시금 생각
했다.
맹목/천서봉
아무것도 질문하지 않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내게도 당신이
전부인 날이 있었다 그것은 땅으로 내리꽂히는 빗줄기와도
같아서 어제와 내일이 다르지 않다는 말, 농아의 웃음처럼
아침과 밤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말, 어디로 가도 같은 길이고
어디로 가도 막다른 길이므로 다른 곳을 돌아보지 않는 짐승,
그 짐승의 아가리 속으로 반복의 먹이가 되는 즐거움 아니리,
그렇게 내게도 눈 가리고 당신에게로 가던 날이 있었다
의심이 없는 나라에선 생극(生剋)이 매한가지였다 미침과 사랑이,
당신과 내가 겹쳐 그 여름 내내 일식이었다 길가에 도열한
나무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고 나는 슬프지 않다고 고백했다
다만 나만 슬프지 않았다
잠복기/천서봉
나도 사람이라고 입 밖으로 무언가 色을 꺼내고픈 가을
이다 저 수군대는 가을은, 가을의 공기들은 사실 나를 한낱
먼지쯤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부정하고 싶은 것들이 아직
남았니? 不淨한 것들은 여전히 충분하지 내 더러움을 모두
터뜨리기까지 몇 번의 계절이 바뀌어야 할까 이른 나무들은
잎을 떨어뜨리며 더 먼 곳을 보여주었지만 땅은 조금 딱딱
해지는 것으로 침묵한다
지하수처럼 흘러서 당신에게 가곤 했다 별을 생각할 시간
은 없었다 웅크려 하늘을 바라보면 얼룩들이 몹시 가려웠다
곧 터질 것 같은 비구름이 마중 나와 나도 사람이라고, 나
도 사람이라고, 소리 없는 입들이 물길을 터줄 것만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