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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폐하......!”
황후 처소의 궁인들이 채 인사를 할 새도 없이 황제가 문을 열어 재끼고 들어서니, 장막이 내리워진 황후의 침소 곁에 태의들이 침통한 얼굴로 진맥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황제의 얼굴 또한 이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였다. 비록 황후에 대한 애정은 없었다 하나,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부인이 아닌가. 그런 이를 해하려 한 것은 감히 황제에 대한 도전이자 역모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저 분노에 그치지 않고 가슴이 무너지는 듯 참담한 심경인 것은, 황후를 해하려 한 이가 다름 아닌 황제의 친모이자 태후이고, 실로 태후가 해하려 한 것은 황제의 아이를 가진 화비였다는 것에 분노와 참담함이 뒤엉켜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려웠다.
“어찌.”
분노로 낮게 떨리는 황제의 목소리에 태의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넙죽 엎드려 예를 갖추니, 황제가 한 손으로 태의 한명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들어올렸다. 태의의 발끝은 땅 위에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살리라.”
황제가 말하였다.
“아니면, 그대들의 목을 내 손으로 직접 벨 것이다.”
황제가 태의의 멱살을 잡은 손을 펴니, 태의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곧 돌아선 황제가 황후전의 궁인들을 보며 말하였다.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황후가 깨어나지 못한다면, 산채로 묻어줄 것이다.”
황제의 말에 궁인들도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두려워하였다. 황제는 등 뒤에 황후의 침소를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그대로 황후의 처소를 나섰다. 성난 걸음을 따르지 못해 내관과 궁인들이 넘어질 듯 다급한 걸음으로 황제를 따르기 바빴다. 황후 처소 다음으로 황제가 향한 곳은 화비의 처소였다. 황제의 등장에 호위가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니, 그를 내려다보던 황제가 차가운 시선으로 말하였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화비의 처소로 출입을 허락지 말라.”
“예, 폐하!”
호위의 답을 들은 황제가 마침내 처소 안으로 들어서니, 온통 꽃향기가 가득한 화원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진정되는 듯 하였다. 하지만 이내 곧 꽃보다 고운 부인의 안위가 걱정되어 굳어진 얼굴로 처소 안으로 향하였다.
“화비야!”
“폐하!”
황제가 안으로 들어서니, 온통 눈물범벅의 화비가 한 걸음에 지아비의 품으로 안겨 들어왔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무너져 그야말로 죽을 만큼 아프다는 말을 통감하였다.
“화비야.”
“폐하......!”
떨고 있는 작은 몸을 가득 안아주고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주고 눈물범벅인 뺨을 쓸어주고 입을 맞춰주며 달래주어도 화비의 떨림은 좀처럼 잦아들 줄 몰랐다.
“폐하, 황후 마마께오서……. 저 때문에…….”
“아니다, 아니야. 그리 생각지 말거라.”
“하오나, 폐하…….”
“내 지금 황후 전에 들렀다 오는 길이다.”
황제의 말에 화비가 조금 진정을 하였으나, 더욱 긴장한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황후가 무탈하지 못하다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 했다. 허니, 살려낼 것이다.”
“폐하…….”
화비의 눈에서 영롱하게 반짝이는 수정 같은 눈물이 또르륵 흐르니, 황제가 손가락으로 그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대는 괜찮은 것이냐? 놀라지는 않았느냐?”
“소첩은 괜찮습니다……. 소첩과…….”
화비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또 눈물을 흘리니, 황제가 그저 품에 안고 또 보듬어주었다.
36.
[대장군.]
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윤호가 몸을 일으켜 앉으니 맨몸에 우람한 상체가 드러났다. 옆을 살피니, 연정은 기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창백한 하얀 어깨가 어쩐지 시린 듯 하여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대니 차고 보드라운 결이 손에 닿았다. 이불을 덮어 고운 어깨를 가려주고는 결이 좋은 새카만 머리카락도 쓸어보았다. 밤새 머금고 또 머금었던 붉은 입술을 보니, 또 배 아래가 알싸해지는 듯 하였다.
[대장군, 좀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다시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든 윤호가 침대 아래 떨어진 가운을 걸치고는 나와 처소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사내종이 궁에서 온 급한 전갈이라며 윤호에게 귓 말을 전하였다. 얘기를 전해들은 윤호의 눈빛이 날카롭게 굳어졌지만 눈에 띄는 동요는 없었다. 윤호는 곧 걸음을 옮겨 자신의 방으로 가 입궁할 채비를 하였다. 늙은 행수가 윤호의 시중을 들며 말하였다.
“부인을 보지 않고 가시렵니까?”
“깨우지 말 거라. 피곤할 것이니.”
“…….”
“…….”
잠시의 적막 후 윤호가 머쓱한 얼굴로 말하였다.
“그런 뜻이 아니다.”
“소인은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늙은 행수가 옅은 웃음을 숨기며 말하니, 윤호가 헛기침을 하며 방을 나섰다. 늘 그렇듯 호위 없이 홀로 대문 밖을 나선 윤호가 말에 올랐다. 윤호가 타고 있는 검은 말과 윤호가 입고 있는 붉은 의복이 하나처럼 잘 어울렸다. 이른 아침이라 저자에 사람이 드물었다. 눈에 닿는 곳곳을 살피며 궁으로 향하는데,
“아니, 이게 뉘십니까?”
“…….”
윤이 윤호를 보며 반갑게 아는 척을 하고는 이내 대장군에 대한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이니, 윤호가 말에서 내려 윤과 마주서서 고개를 숙여 황실 인척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이른 시간부터 어디를 가십니까?”
윤호가 물으니, 윤이 대답하였다.
“가는 것이 아니라, 다녀오는 것이지요.”
“…….”
능글능글 웃으며 말하는 윤에 윤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에 윤이 윤호에게 물었다.
“대장군께서는 가시는 길입니까?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입궁하는 중입니다.”
“이리 이른 시간에요?”
“…….”
윤호는 잠시 동안 윤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하고는 곧 말에 올랐다. 그 모습을 보던 윤이 과하게 호들갑을 떨며 말하였다.
“이야~ 가히 대한남국의 대장군입니다! 저 위용을 보세요!”
“허면, 이만.”
윤호가 가니, 윤은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곧 표정을 굳히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런, 이런. 하마터면 큰 일이 날 뻔 하였구나.”
윤은 곧 놀란 가슴을 다잡고는 걸음을 서둘러 화향으로 향하였다.
“오셨습니까.”
윤이 화향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기다리고 있던 행수가 윤을 마중하였다. 가히 한남국 최고의 미인이라, 이른 아침에도 눈이 부실 정도로 화사한 자태에 윤이 헤벌쭉 웃어보이니 행수가 말하였다.
“이리 하셔도 마음은 일편단심인 분인 걸 알고 있습니다.”
“일편단심이라? 나 같은 이가?”
윤이 능청을 떨며 말하니, 행수는 살랑 웃을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이쪽입니다.”
행수가 안내하는 곳을 따라 가니, 화향의 안 쪽에 작은 방이 나왔다. 열린 창가에는 새하얀 종이 나비가 팔랑팔랑 흩날리고 있고, 그 안에 초이란의 황자, 이제는 김시현이라는 상인으로 다시 살게 된 이가 초연한 얼굴로 서서 종이 나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저희 집에 있던 아이가 머물던 방입니다.”
행수의 말에 윤이 물었다.
“허면, 그 아이는 어디 가고? 이리 방을 내주어도 괜찮은가?”
“속량하여 나갔습니다.”
“그렇구먼? 기생이 속량을 하였다는 것은 서방이라도 생긴 모양이구나?”
“좋은 분을 만났지요.”
“그것 참 다행이구나.”
“예. 허면, 소인은 이만.”
행수가 곱게 인사를 하고 물러나니, 그 모습이 그저 진심으로 보기 좋아 흐뭇하게 바라보던 윤이 다시 고개를 돌려 시현을 바라보았다.
“저리 편안하신 모습은 처음이구나…….”
윤이 시현을 보며 혼잣말로 하였다. 윤의 말처럼 시현의 얼굴에는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팔랑 팔랑하는 종이 나비를 바라보는 얼굴에 미소가 평화롭다 못해 천진하였다. 윤은 그런 시현을 보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하늘이 황자마마를 가엽게 여기시어,
이 생에서 다시 환생할 천금의 기회를 주신 것이라.
그리 생각하겠습니다.
허니, 훗날 모든 것이 밝혀져
마마께서 소인을 벌한다 하시어도.
소인은 그 벌을 달게 받을 것이옵니다.
“마마의 그 미소를 보니, 백번 그리 생각하옵니다.”
+
“폐하, 대장군 들었사옵니다.”
“들라 하라.”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양쪽 미닫이문이 열리고 윤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황제는 그저 윤호의 모습만 보아도 한결 마음이 놓이는 듯 하였다. 윤호가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충성스러운 신하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벗이었다. 세상 천하 누구와도 동등할 수 없는 지존인 황제가 그 외롭고 고독한 자리에서 잠시라도 내려와 보통 또래의 사내로 있을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이였다.
“내 너무 이른 시간에 부른 것인가.”
황제가 윤호를 보며 친근하게 농을 건네듯 물으니, 그런 황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윤호가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내 그래도 간밤에 부르지 않은 것은, 대장군이 아직 신혼이기 때문이야.”
황제의 농에 윤호도 옅게 미소를 지었다. 혼례를 크게 치룬 것도 아니었고, 마치 보쌈을 해오듯이 들인 신부였다. 그럼에도 황제에게 만큼은 벗으로써 내 정인을 부인으로 얻었노라고 말하고 싶어 고하였더니, 황제가 말하길 ‘역시 이 세상에 대장군을 마다할 여인은 없었노라.’ 하였다.
“간밤에 일이 있었사옵니까.”
황제가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한 얼굴로 장난스럽게 웃고 있어도, 윤호는 황제의 심기가 불편함을 눈치 채고 있었다. 이른 시간에 자신을 궁으로 불러들인 것도 그러했지만, 미묘한 표정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윤호의 물음에 황제의 얼굴이 이내 굳어졌다.
“황후가 위독하다.”
“어찌.”
윤호가 짐짓 놀라 물으니, 황제가 길게 한 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어마마마께서 화비의 뱃속에 있는 나의 황자를 노리셨으나, 이를 눈치 챈 황후가 화비를 대신 하여 독을 마시려 하였다.”
“황후께서 어찌 아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윤호가 차분하게 물으니, 황제가 날카로운 눈으로 윤호를 응시하며 말하였다.
“대장군, 그대 지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가.”
“…….”
황제의 말에 윤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황제는 그런 윤호를 잘 알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저 그 표정만 보아도 윤호의 대답은 충분했다.
“황후는 기민(機敏)하고 총명(聰明)한 여인이다. 궁에 들어온지 언 4년이 되어간다. 누가 귀띔하지 않아도 돌아가는 상황을 읽었을 것이다.”
황제가 말하였다. 그 목소리는 낮고 은밀하나, 그 안에 분노를 애써 참아내고 있었다.
“황태자비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그 자의 첫 번째 목표요, 딸의 남편인 황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그 자의 두 번째 목표. 그리고 황후가 황자를 낳으면 나를 죽이고 황자를 황제로 세워 그 황제를 제 꼭두각시처럼 만들어 천하를 그 자의 손 안에 넣고자 하는 것이 그의 최종 목적이겠지.”
황제의 말에 윤호의 눈빛도 날카롭게 번쩍였다.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나의 숙부들과 그들의 아들까지 모조리 제거한 것도 승상이며, 또한 그 배후에는 내 모후인 태후마마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옵니다.”
윤호가 대답하니, 황제의 표정이 더욱 참담해졌다.
“이번 초이란 정벌 또한 이미 그 자가 다 손을 써 놓은 것이다. 우리는 그 자가 그려 놓은 그림대로 움직여준 것이나 다름없단 말이야.”
“허나 저희 또한 그것을 이용한 것이 아닌지요.”
윤호의 말에 황제가 힐끗 윤호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하였다.
“그 말, 참으로 듣기 좋구나.”
“무엇이 말씀이옵니까.”
“저희.”
황제가 말하였다.
“그대가 나와 그대를 하나로 불러 주는 것이 나는 참으로 듣기 좋구나.”
“황공하옵니다.”
윤호가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니, 황제가 돌아서 윤호를 마주고보는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잡아오며 말하였다.
“강장군.”
“예, 폐하.”
“이 생(生)에서 내게 허락된 유일한 벗이 그대이니,”
황제의 말에 윤호가 고개를 들어 황제를 마주보았다. 그 얼굴에는 황제의 위엄과 존엄은 내려놓고 오롯이 괴롭고 참담하여 위로가 필요한 또래의 사내가 있었다.
“나를 떠나지 마시게.”
“…….”
윤호는 잠시 말이 없이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추며 말하였다.
“예, 폐하.”
+
“일어나셨습니까?”
연정이 눈을 뜨니, 연정의 수발을 드는 계집 종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연정을 맞이하였다.
“그래…….”
연정이 대답을 하며 옆을 보니, 윤호가 있던 자리는 진즉에 식어 있었다. 그런 연정을 바라보던 몸종 아이가 말하였다.
“대장군께서는 아침 일찍 입궁하셨습니다.”
“그렇구나.”
“아침 식사를 올릴까요?”
“아니다. 별로 생각이…….”
없다고 말하려 했는데, 어쩐지 실망한 듯한 아이의 기색에 연정이 가만히 한 숨을 내쉬었다. 본래도 아침에는 입맛이 돌지 않는 편이었는데다, 밤새 시달린 몸이 불편하여 더욱 그러했다.
“가져오너라. 조금은 먹는 것이 낫겠구나.”
“예!”
아이는 방긋 웃으며 종종 걸음으로 달려 나가더니, 금세 준비된 아침 식사를 가지고 돌아왔다. 아이 혼자서는 들 수 없을 정도로 진수성찬이라 계집 종 서너 명이 커다란 쟁반에 받쳐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연정이 놀라 크게 떠진 눈으로 탁자에 차려진 것을 보다 말하였다.
“이것이, 내가 혼자 먹을 것이냐?”
“예!”
아이가 방긋 웃으며 말하니, 연정이 살짝 이마를 짚으며 말하였다.
“너는 아침을 먹었느냐? 내 일어나는 시간이 늦어 시간이 벌써 이리 되었구나.”
“…….”
연정의 말에 아이는 그저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이에 함께 아침 시중을 들기 위해 왔던 계집 종이 말하였다.
“몸종은 부인께서 식사를 하시기 전까지는 결코 식사를 할 수 없는 것이 이 나라 예법이 아닌지요.”
“그런 법이 있었더냐?”
연정이 놀라 말하였다.
“내 몰랐구나. 다음부터는 내가 일어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챙겨주거라.”
“예, 부인.”
“나가보아라.”
연정의 말에 계집종이 나가고 몸종 아이도 따라 나가려는데,
“너는 이리 오거라.”
연정이 몸종 아이를 부르니, 아이가 힐끔 눈치를 보다가 연정의 앞으로 다가갔다.
“앉거라.”
연정의 말에 몸종 아이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니, 연정이 손을 뻗어 아이를 잡아끌어 앉히었다.
“함께 먹자. 내 혼자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구나. 게다가 혼자 먹자니 입맛도 없다.”
“하오나…….”
“대장군의 명만 명인 것이냐? 내 명은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이야?”
“아, 아니옵니다! 그럼…….”
아이가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들고 나물을 집어 먹으니, 연정이 직접 그릇을 들고 고기와 같은 기름진 음식들을 담아주었다.
“자, 먹거라.”
“예, 감사합니다!”
아이가 환하게 웃는 것을 보니, 화향에 두고 온 몸종 아이의 생각이 났다.
“이것을 먹고 함께 마실도 나가자구나. 내 가고 싶은 곳이 있으니.”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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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습하면서도 솔솔 부는 바람이 좋은 날씨에 파란 하늘과 푸른 들판과 흐드러지게 핀 꽃을 바라보며 화향의 터 좋은 곳에 대낮부터 술상을 봐 놓고, 윤과 시현이 마주 앉았다.
“이보시오, 친구.”
시현이 윤을 부르니, 윤이 가만히 고개를 돌려 시현을 보았다. 총명한 눈빛은 여전하였고, 전에 볼 수 없었던 생기마저 도니 사람이 달라 보이는 듯 하였다. 그리하여 관상마저 달리 보였다.
“…….”
시현의 관상을 보던 윤이, 이내 묘한 얼굴이 되었다.
“내 수완 좋은 장사꾼이었소?”
시현이 조금 들떠 물어보니, 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하였다.
“수완이요? 허허허! 공자는 나를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소!”
“허면, 내 형편없는 장사꾼이었소?”
시현이 실망한 듯 조금 뚱하게 물어오니, 윤이 웃으며 말하였다.
“형편없었지요. 초이란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지요?”
“내 그곳 출신이라 하지 않았소. 지금은 멸망하여 없어졌다 하였고.”
“참으로 추운 나라였습니다. 서민들의 삶도 궁핍하였지요. 공자께서는 그런 이들에게 자주 종종 한 푼 받지 않고 물건을 내어주곤 하셨습니다. 본인이 입고 있던 옷까지도 내어주셨지요.”
“내가 그리하였소?”
“예. 그러니 남는 게 있겠습니다. 형편없는 장사꾼이셨습니다.”
윤이 그리 말하고 술 한 잔을 입 안에 털어 넣으니, 시현이 웃으며 말하였다.
“하하하. 내 형편없는 장사꾼이었으나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구먼!”
윤이 웃는 시현을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얼굴에 웃음의 여운이 남은 채로 가만히 무언가를 응시하던 시현이 앞섬을 뒤적여 창문에 달려 있던 흰 종이 나비 하나를 꺼내 보였다. 윤은 그런 시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현이 말하였다.
“허면 말이오.”
“…….”
“그대는 혹 정인이 있소?”
시현이 윤을 보며 물으니, 그새 태연한 얼굴로 표정을 고친 윤이 말하였다.
“있지요. 이 나이 되도록 정인도 없겠습니까?”
“허면 어찌 혼인하지 않는 게요?”
시현의 물음에 술잔을 기울이는 윤의 웃음이 씁쓸하였다.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윤이 대답하니, 시현이 미안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윤은 그런 시현을 힐끗 보고는 잔을 들어 권하며 말하였다.
“헌데 갑자기 정인 얘기는 왜 하시오? 왜, 그새 여기 어디 맘에 드는 계집이라도 생기신 게요~?”
장난스럽게 물으니, 시현이 조금 풀어진 얼굴로 말하였다.
“그것이 아니라…….”
시현은 손에 들린 흰 나비를 만지작거리며 말하였다.
“내 이상하게 요 며칠 꿈을 꾸는데 말이오.”
윤은 그런 시현의 표정과 손에 들린 흰 나비를 기민하게 살펴보았다.
“자꾸만 한 여인이 나온단 말이지.”
“이쁘오?”
윤의 능글맞은 물음에 시현이 가만히 웃다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이쁘오. 마치 이 하얀 나비처럼 아주 곱고 어여쁜데, 어쩐지 마음이 아프오.”
“혹 그 여인이 기억을 잃기 전 정인인 듯 싶소?”
윤은 얼고 있었다. 초이란의 탐욕스러운 늙은 황제가 혹여나 황자에게서 후손이 생겨 자신의 자리를 위태롭게 할 것이 두려워, 약관(弱冠)이 넘은 황자를 혼인조차 시키지 않고 평생을 홀로 살다 가게 하려 했다는 것을. 황자 또한 할아버지인 황제의 속을 알고 있기에 자신에게 애정을 보이는 궁인이 있어도 품지 않았다. 혹 궁인에게 아이라도 생기게 된다면 배가 갈려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다.
“아니오.”
시현이 웃으니 그 웃음이 너무도 처연하여 마음이 아파 볼 수가 없었다. 꿈에 나온 여인이 그리도 좋았는가 싶어 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니, 시현이 말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꿈이오.
“어찌 장담하시오?”
윤이 물으니,시현이 윤을 보며 말하였다.
"날더러 '마마'라고 부르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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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주셔서 감사해요~^^
재미있네요 꾸준하게 보구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