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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또다나 사야도 법문
뱀독비유 경에 대한 법문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집중수행
2007년 7월 23일 ~ 27일
이것은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에서 2007년 7월 23일부터 27일까지 5일간
진행되었던 집중수행 중에 미얀마어로 우 또다나 사야도께서 법문하신 것을
마 수 먓 퇴(Ma Shu Myat Htwe)의 한국어 통역을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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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핫또 삼마삼붓다사
세존이시며 아라한이신 정등각자께 예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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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법문 1. 위빳사나 수행법…
법문 2. 뱀 이야기(1)…
법문 3. 뱀 이야기(2)…
법문 4. 사대가 없는 곳…
법문 5. 친구였으나 지금은 원수인 것…
법문 6. 회향 법문…
법문 1. 위빳사나 수행법
수행자 여러분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러분은 ‘나는 수행자다’라고 생각하십시오.
위빳사나 수행은 신념처,수념처,심념처,법념처 모두 네 가지인데, 신념처부터 시작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마하시 사야도께서 배의 부풂 꺼짐으로부터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아는 것입니다. 몸을 물질이라고 아십시오. 대상을 느끼는 마음은 정신입니다.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주시해서, 몸과 마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야합니다. 몸이 먼저 있고 마음이 그 다음에 있는지, 마음이 먼저이고 몸이 따라 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 중에 어느 것이 스승이고 어느 것이 제자인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 중에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업원인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마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사실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몸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몸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몸을 보십시오. 그래야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좌선할 때 배의 부풂 꺼짐부터 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배가 부푸는 것을 시작부터 중간, 그리고 끝까지 알아야 합니다. 배가 부푸는 움직임과 그것을 아는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풀기 전에 알아도 안 되고, 일어난 다음에 알아도 안 됩니다. 배가 부풂과 아는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풀기 시작할 때부터 끝까지 아십시오. 처음에는 부풂 꺼짐을 주시하지 못합니다.
좌선할 때 마음이 집에 가고 있으면 ‘감, 감’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부모나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면 ‘보임, 보임’으로 아십시오. 그게 끝나면 다시 배의 부풂 꺼짐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배의 부풂 꺼짐을 아는 것이 신념처입니다.
생각이나 마음이 방황하는 것을 아는 것이 심념처입니다. 좌선할 때 행복함이나 실망함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도 심념처입니다.
좌선할 때 엉덩이가 뜨거운 것, 몸이 가려운 것도 주시해야 합니다. 허리가 아픈 것도 아십시오. 이런 것들은 수념처입니다.
좌선할 때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그것도 아십시오, 이는 법념처입니다. 경행할 때 보이는 것을 ‘봄, 봄’으로 아는 것도 법념처입니다. 냄새를 맡고 좋은 냄새라고 아는 것도 법념처입니다. 식사할 때, 먹고 싶은 마음을 아는 것, 음식으로 손이 나아감, 입에 넣음, 씹음, 삼킴을 아는 것도 법념처입니다. 육근(눈, 코, 귀, 혀, 몸,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아는 것이 법념처입니다.
좌선하다가 자세를 변경할 때, 손과 몸의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알아야 합니다.
좌선할 때 생각에 몰두하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수행입니다.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면 안 됩니다.
경행할 때 여기저기 둘러보지 마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눈이 있어도 장님처럼 행동하라고 하셨습니다. 장님이 안 보여서 옆을 못 보듯이, 경행할 때 옆을 보지 마십시오. 오른발, 왼발만 아십시오. 이것이 경행의 1단계입니다. 2단계는 발을 드는 것과 딛는 것 두 가지를 아는 것입니다. 3단계는 들어서 앞으로 나아가고 딛는 것 세 가지를 아는 것입니다. 빨리 걸을 때는 1단계, 천천히 걸을 때는 3단계로 아십시오. 밖에서는 빨리 걷더라도 수행 중에는 천천히 걸으십시오.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부처님이 출현해야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옥에 있으면 고통이 너무 심해서 수행할 시간이 없습니다. 또한 부처님이 출현했는지도 모르고, 뵙지도 못하고, 스님도 못 만납니다. 삼보가 뭔지도 모릅니다.
지옥의 불은 아주 뜨겁다고 합니다. 수행 중 더위를 느끼면 사띠하십시오.* 참을 수 없으면 ‘지옥불은 이것보다 더 뜨겁다.’고 생각하면서 참으십시오. 그래야 위빳사나 지혜가 향상됩니다. ‘날씨가 너무 덥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더운 사람 없다.’고 생각하면 병이 생깁니다.
*주: 사띠: 빠알리어 ‘sati(사띠)’를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 것으로 ‘새김. 관찰. 주시. 알아차림, 마음챙김, 염(念)’ 등으로도 번역하는데, ‘대상에 마음을 붙임, 기억, 마음 기울임, 마음 깨어 있음’이라는 뜻이다. 아름다운 마음과는 언제나 함께 생기는 19가지 마음부수 중의 하나이며, 불선한 마음과는 함께 생기지 않는다.
‘내가 너무 괴롭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신견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통증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심하면 심한 대로 사띠해야 합니다. 제가 수행할 때 방석이 없고 얇은 천을 깔고 수행을 했기에 엉덩이가 너무 아팠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하면 부풂 꺼짐을 보지 말고 통증을 보십시오. 부풂 꺼짐을 볼 수 없으면 통증을 알아야 합니다.
통증이 심하면 몸이 고통이라는 것, 고통이 모여 몸이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으면서 사띠해야 합니다. ‘참으면 열반에 도달한다.’는 미얀마 속담이 있습니다. 참지 못하면 열반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배고픔, 졸림, 아픔을 참아야 하는데, 그냥 참는 게 아니라, 사띠하면서 참아야 합니다. 아픈 것은 열반에 가라는 것과 같습니다. 참지 못하면 화가 납니다. 화는 우리의 지도자입니다.
경행할 때 끝까지 가십시오. 끝에 도착해서 ‘서 있음’을 아십시오. 돌면서는 ‘돌고 있음, 돌고 있음’을 알고, 다 돈 다음에는 다시 ‘서 있음’을 아십시오. 이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마음으로 보면서 아십시오.
좌선하려고 앉을 때 ‘앉고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몸이 앉아 있는 것, 즉 앉아 있는 모습을 ‘앉아 있음, 앉아 있음’으로 아십시오. 그 다음에 배의 부풂 꺼짐을 알아야 합니다. 사띠하지 않으면서 앉으면 유신견이 들어옵니다. 엉덩이가 바닥에 닿아 있는 것도 아십시오. 좌선할 때, 부풂, 꺼짐, 앉아 있음, 닿아 있음, 모두 네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생각이 많으면 네 가지를 알도록 하십시오. 생각하지 말고 부풂 꺼짐만 아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 수행 즉 누워서(와, 臥), 앉아서(좌, 坐), 서서(주, 住), 걸으면서(행, 行) 수행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수행하는 동안에는 누워서 하는 수행은 하지 마십시오. 누워서 수행하면 잠들어 버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잠 잘 때 연기가 나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연기는 생각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잠 잘 때 생각이 안 나옵니까? 잠들 때 사띠하면서 잠들면 위빳사나 수행이 되어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생각이 떠오르면 몸과 마음에 고통이 생깁니다.
좌선할 때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좌선할 때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게 하실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언지 지금 생각해 보십시오, 집중해서 법문을 들은 사람은 다 압니다. 지금 대답해 보십시오.
수행자 : 부풂 꺼짐을 보는 것입니다.
사야도 : 그것이 전부입니까?
수행자 : 무엇이든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 알아야 합니다.
사야도 : 자연스럽게 부풂 꺼짐을 알아야 합니다. 동작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틈이 생기지 않습니다. 틈이 없으면 생각이 생기지 않습니다. 부풂과 꺼짐을 알 때 틈이 없어야 합니다. 부풂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띠하는 중에 왜 과거가 생각이 납니까? 과거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 그 생각이 날까요?
수행자 :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됐기 때문입니다.
사야도 : 좀 부족한 대답입니다. 과거에 행동할 때 사띠하지 않아서, ‘내가 본다. 남자다. 여자다.’ 등으로 대상들을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인지한 대상들이 마치 사진 찍고, 녹음하는 것처럼 기억 속에 저장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 기억이 지금 나옵니다. 마음이 왜 미래를 생각할까요? 마음이 지금 현재에 있지 않고 왜 미래를 생각할까요? 수행 중에 왜 미래를 생각하는지 각자 알아내십시오. 위빳사나 수행에 답이 있습니다. 모든 대답이 몸과 마음 안에 다 있습니다.
사띠가 이어지고 사마디가 이어지면 위빳사나 지혜가 저절로 생깁니다. 사띠, 사마디, 지혜를 얻기 위해서 열심히 수행하십시오. 제일 중요한 것이 노력입니다. 노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언제까지 노력해야 할까요? 도과를 얻을 때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한 번 사띠하면 열반에 가까워집니다. 오른발 왼발을 한 걸음씩 딛는 것이 열반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띠하지 않으면 열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오른발 왼발이 열반으로 가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열반으로 가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부지런히 수행하십시오. 굳게 결심하고 수행하십시오. 굳게 결심하지 않으면 열반으로 갈 수 없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주: 사두: 훌륭합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되어지이다. 옳습니다.
법문 2. 뱀 이야기(1)
오늘은 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는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어서 뜻이 깊고 어려우니, 생각하지 말고 집중해서 들으십시오. *
*주: 참고: ① 각묵 스님 옮김, 『상윳따 니까야 4』, 초기불전연구원, 2009, 372-378쪽, 독사 경(S35:238 Āsīvisa-sutta).
② 전재성 역주, 『쌍윳따니까야』 제6권, 한국빠알리어성전협회, 2001, 581쪽[4. 뱀독의 품 238) 뱀의 독].
“이 세상에는 뱀이 네 마리 있다.”
뱀은 보기만 해도 징그럽고, 무섭고, 독이 있고, 손이나 다리가 없으며, 몸의 길이가 깁니다. 땅에 몸을 붙이고 기어 다닙니다. 독이 있는 뱀에 물리면 치료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뱀이 4마리 있습니다. 여러분은 뱀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큰 뱀을 보셨습니까? 제가 천안 호두마을, 경주, 전주의 수행처에서 뱀을 봤는데, 다 작은 것들이었습니다. 미얀마에는 사람의 허벅지처럼 굵은 뱀이 있습니다.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있을 정도로 큽니다. 그래서 뱀은 아주 무섭습니다. 뱀이 무섭지 않은 분 계십니까?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들이 확실하게 알도록 뱀에 비유해서 예화를 만들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왕이 죄를 많이 지은 용의자를 잡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왕이 그에게 뱀 돌보는 일(사육사)을 맡겼다.”
여러분은 뱀을 돌보는 일을 맡겠습니까?
“왕은 ‘뱀을 잘 지켜라. 아침이면 뱀을 깨우고, 목욕시키고, 먹이 주고, 산보시키고, 밤에는 재워주면서, 뱀이 만족할 때까지 잘 키워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왕은 뱀에게 말했다. ‘그가 너희들을 잘 보살펴 줄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안심하고 편안하게 살아라.’ 뱀들은 행복해 했고, 신이 났다. 그래서 뱀들은 만족스러워하면서 사육사의 몸에 앉아 있었다.”
뱀은 누구이고 사육사는 누구입니까? 이 이야기는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집중해서 들으십시오. 대답해 보십시오. 뱀은 누구이고 사육사는 누구입니까?
수행자 : 사육사는 ‘사람’이고 뱀은 탐진치와 유신견입니다.
사야도 : 사람은 맞았지만 탐진치는 틀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 알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예화를 만들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뱀들이 말을 듣는 것이 진짜인가?’라고 생각할 것 없습니다. 예화일 뿐입니다.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을, 수행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를 만들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여부를 생각하지 마십시오.
뱀들은 신나서 사육사의 몸에 앉아 있습니다. 이 몸에 올라가 있는 모습을 어떤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머리는 오른 쪽 귀 위에서 자고, 다른 한 마리는 몸을 사육사 몸 옆으로 늘어뜨리고 왼쪽 귀 위에서 자며, 또 다른 한 마리는 몸으로 사육사의 목을 감고 머리 위에서 자고, 마지막 한 마리는 몸으로 사육사의 몸통을 칭칭 감고 어깨 위에서 자고 있다.”
여러분, 상상을 해 보십시오. 사람 허벅지만큼 굵은 큰 뱀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이렇게 뱀에게 감겨 있을 때, 여러분은 ‘나는 뱀이 좋고 멋진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이 모든 상황을 아는 천신이 내려와서 뱀 사육사에게 말했다. ‘너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왕이 너를 죽이기 위해 뱀 보호하는 일을 맡겼다. 죽는 것도 모르고, 뱀 돌보는 일을 좋아하지 말고 자랑하지 말라. 언젠가는 뱀에 물려 죽을 것이다. 그러니 빨리 도망쳐라.’ 이 말을 듣고 자기 잘못을 깨달은 뱀 사육사는 뱀이 자고 있을 때 도망쳤다. 잠에서 깬 뱀은 사육사를 추격했다.”
여기서 뱀 네 마리는 지수화풍 사대입니다. 뱀 네 마리 중 어느 것이 물어도 죽듯이, 사대 중 어느 것이 소멸해도 사람은 죽습니다. 사대는 몸의 안팎에 있습니다. 병은 뱀 네 마리 중 한 마리에게 물려서 생기는 것입니다.
좌선 시작한지 15분만 지나면 엉덩이가 뜨거워질 것입니다. 화대라는 뱀이 문 것입니다. 허리가 아프기도 할 것입니다. 지대가 문 것입니다. 온몸은 사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마리 중 어느 것이 물어도 죽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사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압니까?
수행자 : 네 압니다.
사야도 : 정말 압니까?
수행자 : 말로만 압니다.
사야도 : 여러분은 말, 용어, 명칭(관념, 빤냣띠)만 압니다. 실재(實在, 빠라맛타)는 모릅니다. 실재를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두통은 뱀이 문 것입니다. 배 아픈 것도 뱀이 문 것입니다. 여러분은 뱀이 문 것은 모르고, 아프다고만 합니다. 눈, 귀, 코, 입에도 뱀이 있습니다. 몸에 안 맞는 음식을 먹으면 병이 생깁니다. 이것도 뱀이 문 것입니다. 뱀이 머리를 물면 두통이 생깁니다. 심장을 물면 심장병이 생기고, 위를 물면 위장병이 생깁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뱀이 무는 것을 눈에 보이게 하라.”
뱀 네 마리가 몸을 아프게 하고 마음에 고통을 줍니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힘들지 않습니까? 몸이 아프면 마음이 힘듭니다. 뱀 네 마리가 물어서 그렇습니다.
좌선할 때 몸이 아프면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통증이 생기면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뱀 네 마리가 물어서 아픈 것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병원의 환자들은 뱀 네 마리, 사대가 물어서 아픈 것입니다.
모든 병은 사대가 파괴되어서 생기는 것입니다.
늙는 것도 사대가 파괴되어서 생기는 것입니다.
죽는 것도 사대가 파괴되어서 생기는 것입니다.
몸에 사대가 없으면 벼락에 맞아도 안 죽습니다.
칼에 찔려도 안 죽습니다.
사자나 호랑이에게 물려도 안 죽습니다.
총과 칼은 사대를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불은 바람으로 더 커집니다.
죽는 것도 사대 때문에 죽습니다.
총으로 사람을 죽이면 경찰이 범인을 잡아서 감옥에 넣습니다. 그러나 사대 때문에 죽은 것일 뿐입니다. 경찰은 범인은 잡지만 사대는 잡지 못합니다. 사대를 알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 사대는 위빳사나 지혜로만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부처님 법을 소화한 후에 여러분께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머리를 하얗게 만드는 것은 화대입니다. 머리가 흰 것을 보고 모양만 늙었다고 알 뿐, 늙는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화대 때문에 늙어간다는 것을 보통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위빳사나 지혜로만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백발이 생기면 염색하고, 이가 아프면 치과에 갑니다. 검은 반점이 생긴 피부를 아름답게 하려고 돈을 가지고 피부과에 가지만, 화대는 모릅니다. 이는 뱀에게 먹이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먹이를 많이 주면 뱀의 힘이 세져서 사람을 더 뭅니다. 그러면 돈이 더 많이 듭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것을 다 이해하셨습니까? 자기 몸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을 많이 쓰게 마련입니다. 눈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려고 10만원, 100만원 들여서 수술하는 것은 뱀에게 먹이 주는 것입니다. 뱀 사육사가 뱀이 자기 몸을 칭칭 감고 있는 것을 좋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몸을 위해서 매일 먹여 줘야 하고, 물마시게 해 주고, 다리 아프면 산책시켜 줘야 하고, 날씨가 추우면 옷 입히고 더우면 벗는 것, 이것이 사대를 키우는 것입니다. 뱀 사육사는 누구입니까? 나도 뱀 사육사이고, 통역도 뱀 사육사이고, 모든 사람이 뱀을 지키고 키웁니다. 뱀 네 마리를 언제까지 키워야 합니까?
부평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오는데, 사람들이 바삐 다니고 있었습니다. 모두 사대를 키우느라고 몹시 바쁩니다. 뱀을 좋아하는 사람만 있습니다. 모두 뱀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한 시간이 다 됐으니 그만하고 내일 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법문 3. 뱀 이야기(2)
어제 하던 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뱀 사육사가 뱀 네 마리를 좋아하듯이 사람들은 자기 몸을 좋아합니다.
부처님께서 “자기 몸을 좋아하는 것은 뱀 사육사가 뱀을 좋아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몸을 좋아합니까, 싫어합니까? 자기 몸을 매우 좋아합니다. 자기 몸만 좋아합니까, 다른 사람 몸도 좋아합니까? 자기 몸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 몸도 좋아합니다. 자기 몸은 뱀 몇 마리입니까? 네 마리입니다. 사람들은 네 마리는 너무 적다고 생각하고 뱀을 더 원합니다. 그래서 뱀이 네 마리 있는 다른 사람 몸을 구합니다. 그래서 자기 몸에 있는 뱀 네 마리, 다른 사람 몸에 있는 뱀 네 마리, 모두 여덟 마리가 됐습니다.
이것이 너무 많습니까, 적습니까? 적다고 생각하고 뱀 네 마리가 있는 몸을 새로 낳습니다. 모두 몇 마리입니까? 12마리입니다. 이것도 적다고 생각하고 뱀 네 마리가 있는 몸을 하나 더 낳습니다. 모두 16마리가 되어야 만족합니다.
사람은 자기 몸이라는 뱀 네 마리, 그리고 다른 사람 몸에 있는 12마리, 모두 16마리의 먹이를 구하느라고 바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일해야 합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자기 몸이라는 뱀 네 마리, 다른 뱀 12마리에게 먹이를 줘야 합니다. 매일 뱀 키우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행복해하면서 먹이를 구하러 다닙니다.
뱀 네 마리에게 먹이를 안 주면 자기 몸이 아픕니다. 이것이 뱀이 무는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배고프면 먹이를 줘야 합니다. 목이 마른 것은 뱀이 목이 마른 것입니다. 졸린 것은 뱀이 자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뱀 네 마리는 언제부터 키우기 시작한 것입니까? 끝이 없는 윤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키우고 있습니다. 갈애(갈망, 탐욕)가 있는 동안은 뱀 네 마리를 키워야 합니다. 우리는 뱀 네 마리에 물려 죽은 전생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전생의 시체를 볼 수 있습니까? 볼 수 없습니다. 왜 볼 수 없습니까? 죽을 때 뱀이 삼켜버리기 때문에 볼 수 없습니다. 지금의 몸도 언젠가는 뱀 네 마리가 삼켜서 없어질 것입니다. 시체만이 아니라 이름도 사라집니다. 다음 생에 얻은 몸도 뱀 네 마리가 삼킬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왜 사대에 대한 법문을 하셨을까요? 몸은 28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네 가지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가지만 알아차리면 위빳사나 지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념처 수행을 하려면 사대에 대해서 사띠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라훌라에게 법문하셨습니다. “우리 몸에는 사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지대이다. 지대는 몸 밖에도 있다. 몸의 안이나 밖에 ‘흙의 요소’라는 지대만 있다.”
몸 안에 있는 지대는 알 것입니다. 몸 밖에 있는 지대도 알아야 합니다. 땅, 흙, 나무, 산, 학교, 집, 건물에도 지대가 있습니다. 바람 속에도 지대가 있습니다. 빛 속에도 지대가 있습니다. 달빛이나 햇빛 속에도 지대가 있습니다. 수행하지 않으면 밖에 있는 지대를 지대라고 알지 못합니다. 수행 초기에는 햇빛이나 달빛이 지대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명칭으로만 압니다.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학교를 볼 때 ‘학교를 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는 지대를 보는 것입니다. 지대만 있는 것을 ‘여자, 남자’라고 생각합니다. 법문의 뜻이 너무 깊으니, 다른 생각하지 말고 집중해서 들으십시오. 집 생각하지 말고 들으십시오.
보통 사람들은 관념(빤냣띠)으로 ‘학교, 남자,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실재(빠라맛타)를 보면 ‘학교, 남자, 여자’가 없습니다. 사대만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라훌라에게 “몸 안과 밖의 사대는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묘지에서 흙 한 줌을 가져오십시오. 지금 묘지에 가라는 것이 아니라 상상으로 가져 오십시오. 마음으로 가져 오십시오. 그 흙은 시체가 변해서 생긴 흙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자기 몸의 지대를 생각으로 가져다 놓으십시오. 두 가지를 비교하십시오. 어느 것이 좋습니까? 사람들은 묘지의 흙을 싫어합니다.
묘지의 지대와 몸의 지대는 다릅니까, 같습니까? 묘지의 흙은 딱딱하거나 부드럽습니다. 우리 몸의 지대도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특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머리 위에 무엇이 있습니까? 머리카락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져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딱딱하지요? 이는 묘지의 흙과 같은 특성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좋아합니까? 싫어합니까? 좋아합니다. 그런데 머리카락이 자신이 먹는 음식 위에 떨어져도 좋아합니까? 고급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에 머리카락이 빠져 있으면 다시 만들어 오라고 호통을 칠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묘지의 지대는 싫어하고 자신의 머리카락은 좋아합니까? 왜 그렇습니까? ‘내 것, 내 머리’라는 갈애 때문입니다. ‘머리카락은 나’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 사견입니다.
부처님께서 “머리카락을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면서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을 해서 위빳사나 지혜가 생기면 지대를 싫어하게 됩니다. 머리카락을 원하는 마음을 보게 되면 탐욕이 사라지게 됩니다. 탐욕이 없어질 때까지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몸 밖에 있는 사대의 특성과 몸 안에 있는 사대의 특성은 같습니다. 내 몸 안의 사대를 싫어하면 몸 밖에 있는 사대도 싫어하게 됩니다.
원래의 뱀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뱀 사육사는 자기 몸이라는 뱀을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합니다. 천신이 와서 ‘너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뱀 네 마리가 화가 나면 너를 물어 죽일 것이다. 빨리 도망쳐라.’고 말했습니다.
뱀 네 마리는 원수입니다. 사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사대를 원수라고 생각합니까, 친구라고 생각합니까? 친구라면 목욕시켜 주고, 밥 먹이고, 산책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뱀이 뭅니다. 그래서 천신이 도망치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예화입니다.
부처님께서 “사대와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라. 사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위빳사나 수행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천신의 “빨리 도망쳐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듣고 제자들과 수행자들은 사대를 싫어하기 위해 수행을 합니다. 수행하는 것은 뱀 네 마리가 무서워서 도망치는 것과 같습니다.
여자는 뱀을 보면 도망갑니다. 그런데 여기는 뱀을 본 여자처럼 도망가는 수행자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도망가도 사대는 있습니다. 항상 쫓아옵니다. 수다원은 7생 동안 사대가 쫓아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일곱 번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태어나면 죽어야 합니다. 사다함은 한 번 더 태어납니다. 아라한이 되면 사대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습니다. 아라한이 안 되면 사대가 쫓아옵니다. 뱀 네 마리가 쫓아옵니다. “뱀 네 마리는 사대이다.”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법문 11개 중에 1개가 끝나고 10개가 남았는데, 수행일은 2일밖에 안 남았습니다.
뱀은 다섯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① 뱀은 기어 다니니 더럽습니다. 우리 몸도 더럽습니다. 우리 몸이 깨끗하지 않은 것을 아십니까? 지혜로 봅니까? 몸은 32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몸은 깨끗하지 않습니다. 몸의 32가지 부분에 대한 혐오감을 일으킴에 관하여 관찰하는 것을 ‘몸에 대한 사띠(kāya-gatāsati)’라고 합니다.
② 뱀은 냄새가 납니다. 우리 몸도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목욕하고 화장해야 합니다.
③ 뱀이 물면 상처가 나듯이 우리 몸도 병들고 아픕니다. 어떤 수행자는 면담할 때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아프다고 호소하기도 합니다. 이는 뱀 네 마리가 무는 것과 같습니다.
④ 뱀에는 독이 있습니다. 우리 몸도 늙어가야 합니다. 오늘보다 내일 더 늙습니다. 이번 달보다 다음 달에 더 늙습니다. 올해보다 내년에 더 늙습니다. 젊어지지 않습니다. 젊어지는 법을 알고 싶습니까? 이번 생에 죽으면 다음 생에 젊게 태어납니다. 늙은 몸이 죽어야 애기로 태어납니다. 한 가지를 원하면 다른 한 가지는 주어야 합니다. 안 주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⑤ 뱀에 물리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대가 소멸하면 죽어야 합니다.
몸을 좋아하면 깨닫지 못합니다. 몸을 싫어하고 무서워하게 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법문하신 것입니다. 무서워야 수행합니다.
이제 뱀 네 마리에게 먹이를 줄 시간입니다. 수행자들도 뱀 네 마리에게 먹이를 주어야 합니다.
법문 4. 사대가 없는 곳
사대가 없는 곳은 열반입니다. 오늘은 여기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부처님 시절에 어떤 스님이 가만히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사대가 없는 곳이 어디인가? 아마도 천상에 사는 천신들은 알 것이다. 거기 가서 물어 봐야 하겠다.” 그래서 사천왕천에 가서 천신들에게 물어 봤더니 “우리도 모른다. 더 높은 천상에 가서 물어봐라.”고 대답했습니다.
삼십삼천에 가서 제석천(帝釋天)에게 물어봤더니 “나도 모른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속으로 ‘부처님께서 생존해 계신데 왜 우리에게 묻지?’라고 생각하면서 “더 높은 천상에 가서 물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대범천을 찾아가서 사대가 없는 천국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이 대범천은 주변에 다른 범천들이 많이 있는데 모른다고 대답하기가 창피해서 “세상을 내가 만들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스님은 “제가 물은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대가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대범천은 다른 범천이 한 명도 없는 곳으로 스님을 데리고 가서 “나도 모른다. 부처님께 가서 물어 봐라.”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부처님께 가서 여쭈었더니, “사대가 없는 곳은 열반뿐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누가 물으면 열반에는 사대가 없다고 대답하십시오.
뱀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11가지 이야기 중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뱀 네 마리에게 쫓기는 사육사는 누구입니까?
수행자입니다. 왕이 사육사가 도망갔다는 보고를 들은 왕은 내 명령을 거역했다고 간주하고 사육사를 죽여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5명을 뽑아서 사육사를 쫓아가서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사육사에게 5명의 원수가 생긴 것입니다. 5명은 누구일까요? 부처님께서 “오온, 즉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오온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온이 있어서 우리는 태어나고, 태어나면 죽어야 합니다. 오온이 없으면 죽음이 없습니다. 아라한이 반열반에 들면 다시는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여러분 중 열반에 가고 싶은 분 손들어 보십시오. 20명 중 4분만 손을 드셨습니다. 왜 열반에 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범부는 열반을 싫어합니다. 열반에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범부라고 생각하십시오. 열반에 도착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한 가지만 어렵습니다. 한 가지가 무엇일까요?
수행자 : 수행이 어렵습니다.
사야도 : 가깝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몸과 마음을 싫어해야 열반에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몸과 마음을 너무 사랑합니다. 그래서 열반에 가기를 싫어합니다. 수행자는 좌선하다가 몸이 불편하면 요가로 몸을 풉니다. 무릎이 아프면 산책합니다. 이것은 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반에 갈 수 없습니다. 꿈속에서도 열반은 모릅니다. 열반에 가는 것은 쉽지만 몸과 마음을 싫어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 이해하셨습니까?
중생은 몸과 마음이 있으므로 죽어야 합니다.
천신도 오온이 있으므로 죽어야 합니다.
범천도 오온이 있으므로 죽어야 합니다.
동물이나 사람도 오온이 있으므로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온이 죽이는 것입니다. 오온이 원수입니다. 오온은 항상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다. 매일 오온에게 먹이를 주고 목욕시켜야 합니다. 친구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키우는 셈입니다. 오온을 키우려고 매일 일해야 합니다. 돈 버는 것도 오온을 위하는 것입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잠도 자야하고, 잠자기 위한 집도 마련해야 합니다. 추위와 더위에 따라 옷을 맞춰 입어야 합니다. 아프면 약을 먹어야 합니다. 오온을 키우면서도 여러 가지 병이 생깁니다.
병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다 합치면 번뇌 한 가지로 요약됩니다. 혹은 갈애와 무명 두 가지입니다. 건강한 사람이나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치료받아야 하는 병이 무엇입니까?
배고픔이라는 병입니다. 하루에 3끼를 먹고, 그 사이에 커피와 과일도 먹습니다. 위가 이만하기 망정이지, 위가 더 크다면 더 많이 먹어야 하고, 잠 잘 시간도 없이 먹어야 할 것입니다. 제일 힘든 것이 배고픔이라는 병입니다.
제가 만달레이에 있을 때 매일 탁발해야 헸습니다. 아침식사는 굶고 물만 마시고 탁발을 나가면, 배가 고파서 손과 발이 덜덜 떨렸습니다. 배고픔 병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봤습니다. ‘왜 배가 고픈가? 배가 있기 때문이다. 배가 없다면 배고픔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배가 없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고픔이라는 느낌이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습니다. 느낌도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들었습니다. 위는 물질이고 느낌은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물질과 정신이 없으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안 먹어도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남의 집 앞에 가서 밥 달라고 안 해도 될 것입니다. 미얀마에서는 탁발이 가능합니다. 한국에서 탁발하면 거지라고 할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있는 한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는 것도 몸과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온이 있음을 사실대로 알기 위해서 수행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풂과 꺼짐을 사실대로 알기 위해서 좌선해야 합니다.
부풂과 꺼짐은 풍대입니다. 그것을 아는 마음은 정신입니다. 일어남을 알아차릴 때마다 물질과 정신만 있다고 알 수 있도록 수행해야 합니다. 꺼짐을 알아차릴 때마다 물질과 정신만 있다고 알 수 있도록 수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알 때마다 사람, 중생, 동물, 명칭은 사라집니다. 알아차릴 때마다 이렇게 두 가지만 있다고 알면 유신견이 사라집니다. 행선할 때 걷는 동작과, 그것을 아는 마음 두 가지만 있다고 알 수 있도록 수행해야 합니다.
법문을 계속하겠습니다. 11가지 이야기 중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사육사는 마치 5명의 원수가 쫓아오는 것처럼 오온이 무서워서 도망가야 합니다. 뱀 네 마리와 원수 5명이 쫓아오니 사육사는 무서워서 도망갑니다.
왕이 또 생각했습니다. “뱀 네 마리가 무서워서 도망가는데, 원수 5명까지 쫓아가니 사육사가 너무 무서워하면서 빨리 도망간다. 그러니 사육사 옆에 다가가서 죽이는 사람을 한 명 뽑아야 하겠다.” 왕은 사육사와 친했던 친구 한 명을 뽑아서 돈을 많이 주고 사육사를 쫓아가서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친구였지만 지금은 원수가 된 사람이 사육사를 죽이러 뒤에서 쫓아가서 사육사에게 말했습니다. “왜 도망 가냐? 나를 오해하지 말라. 나는 너의 오랜친구다. 내가 진정으로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 너의 가족들이 집에서 기다린다. 아무런 재앙이 없도록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
이때 천신이 내려와서 사육사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너를 죽이러 온 사람이니 조심해라. 전에는 친구였지만 지금은 원수이니 그의 말을 듣지 말고 도망쳐라.”
뱀 네 마리, 오온 5가지, 과거의 친구 1명, 모두 합해서 원수는 모두 10명이 되었습니다. 11시가 되었습니다. 배고픔 병을 치료하러 갈 시간입니다. 법문은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법문 5. 친구였으나 지금은 원수인 것
오늘은 수행을 시작한지 5일째인 마지막 날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위빳사나 수행의 기초인 배의 부풂 꺼짐을 보는 것부터 가르쳤습니다. 이는 마하시 사야도의 가르침이며,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배가 왜 일어나는지, 왜 꺼지는지 그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왜 숨을 쉽니까?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 몸이 있기 때문이며, ② 코가 있기 때문이며, ③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가 있기 때문에 배가 일어나고 꺼집니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 합니다. ‘꺼짐’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수행자 : ‘일어남’이 ‘꺼짐’의 원인입니다.
사야도 : 조금 틀립니다. 호두마을에서 수행 지도할 때, 어느 수행자가 “일어남 사라짐을 발견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무엇이냐고 묻자, “배가 불러오는 것이 일어남이고, 배가 꺼지는 것이 사라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배가 불러오는 것에도 일어남과 사라짐이 있고, 배가 꺼지는 것에도 일어남과 사라짐이 있습니다.
숨을 내쉬고 싶은 마음이 ‘꺼짐’의 원인입니다. 마음이 원인입니다. 마음이 있기 때문에 호흡의 부풂과 꺼짐이 있습니다. 부풂과 꺼짐이라는 물질이 원인이 되어서 정신이 생깁니다. 노력해서 사띠와 사마디가 생긴 수행자만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전생에 원인이 있었고, 다음 생에도 원인이 있겠구나.’라는 것도 추론으로 알 수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없는 것이 열반입니다. 열반에는 과거, 현재, 미래도 없습니다.
수행자는 어디에서 수행을 합니까? 땅이나 산에서 찾습니까? 몸과 마음에서 찾습니다. 연기법은 어디에 있습니까? 책 속에 있습니까? 책 속에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책은 단지 잊지 않기 위해서 기록해 놓는 것일 뿐입니다. 연기법은 몸속에 있습니다.
수행자는 형상이 보일 때 ‘보임, 보임’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알아차릴 때, 눈과 시각대상이라는 물질을 원인으로 하여, 정신인 아는 마음이 생깁니다. 눈이 있고 대상도 있기 때문에 보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아는 마음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보여 주는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게 만드는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이 있기 때문에 보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눈과 대상은 물질이고, 이 물질이 있기에 정신인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어떤 존재가 만들어 준다는 유신견이 사라집니다.
수행자가 ‘보임’이라고 알 때, 원인과 결과 두 가지만 있음을 알게 됩니다. 과거부터 원인과 결과 두 가지만 있었음을 추론으로 알게 됩니다. 현재에도 원인과 결과만 있고, 미래에도 원인과 결과 두 가지만 있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이 세상에는 원인과 결과 2가지만 있다고 사실대로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원인과 결과를 아는 위빳사나 지혜입니다.
소리를 들을 때 ‘들음’을 알면 원인과 결과만 있다고 알게 됩니다. 이는 부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소리를 들을 때, 소리와 귀라는 물질과, 그 소리를 아는 마음인 정신, 이렇게 두 가지만 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소리를 들을 때, 원인과 결과를 수행자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이는 위빳사나 수행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법문만 듣거나 공부만 해서는 지혜가 생기지 않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지혜가 생깁니다. 위빳사나 지혜가 생길 때까지 직접 수행해야 합니다. 수행을 시작한지 4일이 지났습니다. 왜 수행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뱀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전에는 친구였지만 지금은 원수가 된 것은 누구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몸 안에 있는 탐욕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탐욕이 생기면 집착하게 됩니다.
좋은 현상이 생기면 집착하게 됩니다. 나쁜 현상은 싫어합니다. 탐욕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행복한 것들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 하고, 좋은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고, 아름다운 형상을 추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 일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합니다. 우리는 탐욕이 일어나게끔 노력합니다.
영화를 보는 것은 탐욕을 생기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영화 보는 것과 파티에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탐욕이 있는 곳입니다. 영화관에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수행센터는 사람이 많습니까?
범부에게는 수행이 못 마땅합니다.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떠내려가는 것은 쉽지만,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수행자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수행은 어려운 것입니다. 악행을 하기는 쉽습니다. 그냥 앉아만 있어도 나쁜 생각이 많이 들어옵니다. 수행자가 좌선할 때, 나쁜 생각이 들어오면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 흐르는 방향으로 떠내려가듯, 마음이 가고 싶은 대로 이리저리 방황하게 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렇게 하면 고통이 따라옵니다. 몸과 마음이 괴로워집니다.
어디 가면 고통 받는 사람을 볼 수 있는지 아십니까? 감옥에 가면 됩니다. 지옥이 나쁜 생각의 과보입니다. 아귀가 나쁜 생각의 과보입니다. 아수라가 나쁜 생각의 과보입니다. 열반으로 가는 것도 마음 때문입니다. 종류가 다른 마음입니다. 악처로 인도하는 것은 나쁜 생각이며, 선처로 인도하는 것은 좋은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선처에 가고 싶습니까, 아니면 악처에 가고 싶습니까? 선처에 가려면 수행해야 합니다. 법문도 듣고 공부도 해야 합니다. 수행은 쉽지 않습니다. 수행이 쉬우면 모두 열반에 갈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아직 열반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부족합니다. 무엇이 부족한지 그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친구가 말립니다. 친구가 누구입니까? 탐욕입니다. 탐욕이 말리기 때문에 열반에 못갑니다. 여기서 예화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미얀마에 어떤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절에 가서 부처님께 매일 “저를 열반으로 보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불상 뒤에는 어떤 게으름뱅이가 숨어서 자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매일 와서 기도하니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 할아버지가 정말로 열반에 가고 싶은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할아버지가 “저를 열반으로 보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불상 뒤에서 부처님 목소리로 “너는 정말 열반에 가고 싶으냐?”라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진짜 부처님인 줄 알고 “네, 부처님.”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게으름뱅이가 “그러면 따라오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부처님,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집에 가서 집사람과 상의해 보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 가서 할머니에게 “여보, 부처님께서 나를 열반으로 데려 가시겠다는데,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고 묻자, 할머니는 “어서 가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없어도 괜찮아? 아이들과 손자들은 어떻게 하고?”
“그런 걱정 마시고 어서 부처님 따라 가세요.”
“여보, 더 생각해 보구려.”
“생각하고 말고가 없으니 당신이나 빨리 가세요.”
“당신은 생각 안 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나는 좀 생각해 봐야겠소.”
할아버지는 그날부터 더 이상 절에 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범부는 열반의 필요성을 못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탐욕이라는 친구가 가지 말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탐욕(갈애)과 무명 때문에 태어납니다. 무명(어리석음, 무지)이 먹고 싶으면 먹을 수 있고, 자고 싶으면 잘 수 있으니, 사람으로 태어나면 아주 좋다고 탐욕에게 힘을 실어 줍니다. 그 부추김을 받아 탐욕이 ‘그래, 맞아. 사람으로 태어나야 해.’라고 하기 때문에 태어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려면 보시해야 합니다.
탐욕이 중생의 친구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우리를 죽입니다. 그러므로 탐욕이 친구가 아니라 원수입니다. 탐욕이 생기면 선업이 사라집니다. 영화 보고 파티에 가서 먹고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은 것이라고 계속하다 보면 사띠도 없어지고, 사마디도 사라집니다. 수행하려고 하는 노력도 사라집니다. 삼보에 대한 믿음도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선업이 생기지 않습니다.
탐욕으로 인하여 우리는 태어납니다. 태어나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것은 탐욕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탐욕을 우리의 원수라고 알아야 합니다.
수행 중에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면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탐욕을 없애는 방법입니다. 11가지 이야기 중 세 번째 이야기였습니다. 이것으로 법문을 끝마칩니다.
법문 6. 회향 법문
이 집중수행을 마련하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법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교수님께서 이번 집중수행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없었다면 법문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5일간 집중수행에 참가한 수행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저와 교수님과 여러분은 과거생에 어떤 부처님께 인간으로 태어나서 법문을 듣고 수행하고 싶다고 서원을 세웠기 때문에 이번 수행기간 동안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집에 가서 세속의 일을 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께 네 가지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① 어리석은 사람들과 싸우지 말고 화목하게 사십시오. ② 남의 재산을 빼앗지 마십시오. ③ 자기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④ 남이 잘 사는 것을 질투하지 말고, 내가 잘 사는 것처럼 기뻐하십시오.
이것이 성자들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를 요약하면 오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오계를 잘 지키면 성자들처럼 살게 됩니다.
5일간 수행을 한 효과가 좀 있습니다. 성자의 도 4가지, 성자의 과 4가지, 열반 1 가지, 모두 9가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회향할 때, “이마야 담마누 담마 빠띠빳띠야 붓당 뿌제미(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 수행하는 것으로써 부처님께 예경 올리는 것을 대신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수행자가 9가지를 성취하도록 수행을 해서 부처님께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이마야 담마누 담마 빠띠빳띠야 담당 뿌제미(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 수행하는 것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에 예경 올리는 것을 대신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수행자가 9가지를 성취하도록 수행을 해서 법에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이마야 담마누 담마 빠띠빳띠야 상강 뿌제미(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 수행하는 것으로써 스님께 예경 올리는 것을 대신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수행자가 9가지를 성취하도록 수행을 해서 스님께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이당 메 뿐냥 아사와까 야와항 호뚜(저의 이와 같은 수행 공덕으로 번뇌로부터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라는 것은 선업을 지어서 번뇌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당 메 뿐냥 닙바나싸 빳짜요 호뚜(저의 이와 같은 수행 공덕으로 열반을 성취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라는 것은 위빳사나 수행은 열반으로 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당 메 뿐냥 아사와까 야와항 호뚜(저의 이와 같은 수행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합니다.)”라는 것은 위빳사나 수행을 한 선업을 모든 중생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반열반이 들기 3개월 전에 부처님께서 “나는 3개월 후에 반열반에 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라한인 스님들은 “아,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들어가시겠구나. 물질과 정신이 더 이상 없겠구나.”고 생각하고 화도 안 나고 슬픔도 없었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걱정하고 슬픔에 잠긴 것은 아직 아라한이 되지 못한 스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탁발한 후에 항상 모여서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시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해서 회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아라한이 되지 못한 어떤 스님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멀리 떨어진 나무 밑으로 가서 앉아 있었습니다.
다들 모여서 걱정하는데 이 스님만은 걱정도 하지 않고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으니, 다른 스님들은 이 스님이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스님을 부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처님, 저희들은 부처님의 반열반 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매일 회의를 합니다. 그런데 이 스님만은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혼자 멀리 떨어진 나무 밑에 앉아 있습니다. 이 스님은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 스님에 물으셨습니다. “너는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혼자 멀리 떨어진 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냐?”
스님 “네, 그렇습니다. 부처님.”
부처님 “왜 혼자 멀리 떨어진 나무 밑에 앉아 있었느냐?”
스님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들어가시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아직 번뇌가 있기 때문이며, 그 전에 제가 아라한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무 밑에 가서 위빳사나 수행을 했습니다.”
부처님 “그 말이 맞다. 나를 믿으려면 법을 믿는 것이 좋다. 나에게는 법으로 공양을 올리는 것이 제일 좋다. 음식이나 꽃으로 공양을 올리는 것보다 법공양이 제일 좋다. 내가 가르친 대로 실천하는 것이 제일 좋은 공양이다. 내가 반열반에 들면 너희들은 내 가르침대로 수행해야 한다.”
위빳사나 수행은 법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바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법공양을 제일 좋아하십니다. 부처님께 법을 바치는 수행자가 계속 있어야 법이 영원히 살아있게 됩니다. 법이 있으면 부처님이 살아계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반열반에 들어가지만 경율론 삼장이 항상 너희들을 가르칠 것이다.”
삼장이 있으면 부처님께서 살아계신 것입니다. 아직 삼장을 가르치는 스님이 계십니다. 이는 삼보가 아직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신 지 아직 5,000년이 안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법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속에 법을 항상 간직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속에 법을 항상 간직하는 것일까요? 항상 공부하는 것입니다. 스승들은 가르쳐야 합니다. 불교대학원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항상 가르치고 항상 공부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법을 항상 간직해야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 스스로도 직접 공부해야 합니다. 위빳사나 수행도 해야 합니다.
공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가르침을 알아야 하고, 안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 실천하는 것이 바로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알아야 실천합니다. 실천해야 얻는 것이 있습니다. 얻는 것은 도 4가지, 과 4가지, 열반 1가지, 모두 9가지를 얻는 것을 말한다고 경전에 쓰여 있습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원인입니다. 9가지는 결과입니다. 결과를 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원인인 실천을 하십시오. 부처님께서 열반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띠를 실천하는 수행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띠를 실천하여 원인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삼장은 모두 8만4천 가지입니다. 이를 하나로 요약하면 사띠입니다. 부처님의 유언은 “아빠마데나 삼빠데타”입니다. 이는 “물질과 정신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도록 아는 수행을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수행자는 사띠하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사띠 하나만으로는 안 됩니다. 노력(위리야)이 있어야 합니다. “생기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에 대해서 사띠하겠다.”라고 굳게 결심하고 노력하십시오. 노력해서 아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입니다.
사띠할 때마다 몸의 움직이는 동작과 마음이 하나가 되면 집중이 된 것입니다. 위리야, 사띠, 사마디 세 가지가 있으면 위빳사나 지혜가 생깁니다. 지혜가 생기면 부처님 말씀이 맞는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정신과 물질 두 가지만 생기고 사라진다고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부처님 말씀이 맞는다는 믿음이 생기고, 법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가르치는 스님과 승가에 대한 믿음도 생깁니다.
이렇게 계속 수행하는 수행자는 도과를 얻어서 수다원이 될 것입니다. 수다원이 되면, ‘아,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 수다원이 있었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도 있었겠구나.’라고도 상상이 가능해집니다.
자신이 수다원이 되면 믿음이 생깁니다. 이는 자신이 석사가 되면 석사인 다른 사람들도 어떤 재능이 있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박사가 되면 내가 노력을 해서 박사가 됐다는 것을 압니다. ‘다른 사람도 이런 노력을 해서 박사가 됐겠구나.’라고 압니다. 박사가 아닌 사람은 박사의 능력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식이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는 위빳사나의 기초입니다. 전생에서 윤회할 때에는 갈애, 자만, 사견으로만 살아왔습니다. 이 세 가지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개념(명칭, 빤냣띠)의 나라에서만 살았습니다. 실재(빠라맛타)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사람, 남자, 여자, 건물로만 보는 나라에서 살았습니다.
실재를 보게 되면, 사람, 남자, 여자, 건물은 없습니다. ‘대상과 보는 것이 있어서 아는 마음이 생기는구나.’라고 수행해서 알아야 합니다. 법이 있으면 우리는 실재의 뜻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봐서 아는 것입니다. 개념도 실재도 모두 있습니다.
수행 중에는 실재의 나라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집에 돌아가면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고, 먹고, 자고 하는 개념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수행하지 않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수행 중에는 수다원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수다원은 항상 오계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삼보를 항상 마음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수행 중에 여러분은 수다원과 같은 수준의 삶을 살았습니다.
도과를 얻을 때까지 수행하면 수다원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직은 가짜 수다원입니다. 가짜지만 수행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낫습니다. 금생에 열심히 하면 이번 생에 수다원이 될 수 있습니다. 수다원이 되면 지옥문이 닫힙니다. 아귀나 동물, 물고기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금생에 수다원이 못되면 범부로 죽습니다. 시장에 가면 돼지고기, 쇠고기, 생선 등이 있지요? 다음 생에 동물로 태어나면 사람들에게 잡혀서 고기로 팔릴 것입니다.
수행하면 금생에 수다원은 못 되더라도 천신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천신으로 태어난 다음에, 금생에서 수행한 힘이 있기 때문에 법문을 들으면 수다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벽지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미래의 부처님 시대에 태어나서 성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고 열심히 수행하십시오.
회향
이마야 담마누 담마 빠띠빳띠야 붓당 뿌제미
이마야 담마누 담마 빠띠빳띠야 담당 뿌제미
이마야 담마누 담마 빠띠빳띠야 상강 뿌제미
앗다 이마야 빠띠빳띠야 자띠 자라마라낭하 빠리무찟사미
이당 메 뿐냥 아사와까 야와항 호뚜
이당 메 뿐냥 닙바나싸 빳짜요 호뚜
이당 메 뿐냥 아사와까 야와항 호뚜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 수행하는 것으로써 부처님께 예경 올리는 것을 대신합니다.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 수행하는 것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에 예경 올리는 것을 대신합니다.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 수행하는 것으로써 스님께 예경 올리는 것을 대신합니다.
정말,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 수행하는 것으로써 태어남과 죽음의 윤회로부터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저의 이와 같은 수행 공덕으로 번뇌로부터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저의 이와 같은 수행 공덕으로 열반을 성취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저의 이와 같은 수행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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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뱀독 비유경(Āsīvisopama sutta)
saḷāyatanavaggasaṁyutta pāḷi(380)
2008년 7월 호두마을 교재
우 또다나 사아도 법문
1.첫 번째 비유
seyyathāpi bhikkhave cattāsīvisā uggatejā ghoravisā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큰 뱀 네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 네 마리 뱀에게는 매우 빨리 퍼지는 독, 매우 강력한 독, 매우 독한 독이 있다고 한다. 어떤 뱀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무섭다. 잡기도 무서운 동물들이다. 뱀이라는 것은 다리도 없고, 팔도 없이, 긴 모양으로, 땅 위에서 꿈틀대며 흙을 몸으로 밀면서 가는, 매우 두렵고 혐오스러운 동물이다. 또한 그러한 네 마리의 독사에게 물리게 되면 독들이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빨리 퍼져서 약으로도 치료할 수가 없다. 이정도로 매우 독이 강력한 네 마리의 독이 있다고 하자. 이 네 마리의 독사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네 마리의 독사와 같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은, 다음 계속해서 법문을 들으면 확실히 알 것입니다.
비유로써 설명하자면, 어떤 한 나라에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있다고 합시다. 그 왕은, 자기 나라에서, 그 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은밀하게 죄를 감추고 있는, 매우 나쁜 한 사람을 법에 따라서 기소한 후, 확실한 처벌을 내릴 수 없어서 뱀에 물리게 해서 죽게 하려고, 독사 네 마리를 가둬놓은 곳으로 뱀 사육사의 소임을 맡겼습니다.
그러고 나서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여봐라, 그대를 뱀 사육사로 임명하느니라. 그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하면, 그 네 마리 뱀을 보호하고 돌보는 것이다. 뱀을 잘 보호하고 돌본다면 그대에게 매월 월급과 양식도 먹을 만큼 줄 것이다. 이 뱀들을 정성스럽게 돌봐야 하느니라. 아침에 일어날 시간이 되면 깨워야 한다. 목욕할 시간이 되면 목욕시켜 주어야 한다. 먹을 시간이 되면 먹여 주어야 한다. 잘 시간이 되면 재워야 한다. 건강을 위해서 산책해야 할 시간이 되면 산책도 시켜주어야 한다. 뱀들을 즐겁고 기쁘도록 돌봐주어야 하느니라.’라고 말하면서 뱀 사육사로 임명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뱀들에게도, ‘이 사람이 너희들을 돌보고 보살펴 줄 사람이다. 너희들이 행복하게 지내도록 저 뱀 사육사가 그대들을 돌보고 보살필 것이다. 너희들은 행복하게 안심하고 지내라.’라고 말해 놓았습니다. 뱀들도 그 말을 이해하고 ‘우리들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라고 하면서 행복하게 그 사육사의 몸에 꽈리를 틀고 지냈습니다.
비유라는 것은 이해시키도록 표현한 것
이것은 비유입니다. 비유라는 것은 다음에 설할 법들의 의미를 좀 더 잘 이해시키도록 표현한 말입니다. ‘이러한 뱀들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고 뱀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등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비유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던, 옳든 그르든, 실제로 있건 없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알게 하도록, 이해시키도록 표현하는 말일 뿐입니다. 또한 비유는 비유일 뿐입니다. 비유라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비유도 있고, 과거에 없었으나 이해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비유도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는, 법문에서 설하고자 하는 의미를 잘 알게 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비유로써 생각하여 만들어내어 설하신 것입니다. 비유자체의 의미만을 자세하게 생각하게 되면, 말하고자 하는 근본 법문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말하고자 하는 근본 법문을 계속해서 설하겠습니다.
그 뱀들이 뱀 사육사의 몸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서, 그 사육사는 ‘멋지구나, 아름답구나, 좋구나, 행복하구나.’라고 하며 즐거워했습니다. 행복한 마음이 넘쳐났습니다. 그 때, 그 뱀 사육사의 이익을 바라는 천신이 인사하러 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보시오, 뱀 사육사여. 그대는 매우 나쁜 사람이었소. 왕이 그대를 뱀에 물려 죽게 하려고 이 뱀들을 지키고 돌보도록 시킨 것이오. 아, 좋은 것 아니오. 이 뱀들을 좋아하고 예뻐하면서 지내게 되면 언젠가 왕이 이 뱀들을 시켜서 그대를 물게 할 것이오. 이 뱀들로부터 빨리 벗어나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 말을 듣고 정신이 버쩍 차려져서, 뱀 사육사는 다음과 같이, ‘맞다, 이 뱀들이 나를 물면 바로 죽을 것이다.’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뱀 사육사는 그 매우 무서운 독사들이 잠자고 있을 때, 또한 ‘이 뱀 사육사가 뱀들을 잘 돌보는가, 돌보지 않는가?’라고 감시하고 있던 사람들도 없을 때에, 자기 몸에 꽈리를 틀고 있던 뱀들을 살며시 내려놓고 도망쳤습니다.
뱀들도 ‘우리들을 돌보던 이가 도망쳤다! 쫓아라, 쫓아라.’라고 말하면서 지내던 곳에서 그 사육사를 죽이려고 슉, 슉 하면서 냄새를 쫓아 끊임없이 쫓아갔습니다.
여기서 한 부분이 끝났기 때문에, 비유와 비유가 말하는 바를 비교해서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모습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대가 네 마리 독사와 같다
cattāro āsīvisā uggatejā ghoravisāti kho bhikkhave catunnetaṁ mahābhūtānaṁ adhivacanaṁ
매우 강력한 독을 가진 네 마리의 뱀이라는 것은 비유로 설한 것입니다. 설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욕계천신, 범천들이라는 중생들의 무더기에 존재하고 있는 pathavi, āpo, tejo, vāyo라고 하는 네 가지 요소의 이름입니다. 네 마리의 독사 중에 어느 한 마리에게 물리면 죽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네 가지 요소 중에 어느 한 가지가 무너지면 죽게 됩니다.
세상에서 중생들의 몸속에는 여러 가지 질병들이 생겨납니다. 그 네 가지 요소라고 하는 독사들에게 물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독사들의 독이 퍼져서 결국 죽게 됩니다. 이 네 가지 요소들 중 어느 하나가 무너져서 고통스러운 느낌이 생긴 후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요소는 독사 네 마리와 같습니다.
이 독사들은 머리, 귀, 코, 입속, 입 등의 온 몸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 온 몸에 머물고 있는 네 마리 독사들이 적합하지 않은 기후나 영양분과 만나게 되었을 때, 매우 심하게 온 몸이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열병 등의 여러 병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네 가지 요소라고 불리는 네 마리의 독사가 몸rūpakāya라고 부르는 몸의 무더기에 phoṭṭhabba라고 부르는 접촉-독니를 만나게 되어, 그리고 정신nāmakāya라고 부르는 마음속에 phassa라고 부르는 닿음의 독니를 만나게 되어 고통스러운 느낌들이 생겨납니다.
머리에 머물고 있는 독사 네 마리는 머리를 물어서 머리가 아프고 머리에 관련된 여러 질병들을 생겨나게 합니다. 가슴에 머물고 있는 독사 네 마리는 가슴 속의 심장, 간, 장, 위 등을 물어서 여러 질병들을 생겨나게 합니다. 눈에 머물고 있는 독사 네 마리는 눈을 물어서 눈에 관한 여러 질병들을 생겨나게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귀에 머물고 있는 독사 네 마리는 귀를 물어서 귀에 관한 여러 질병들을 생겨나게 합니다. 코에 머물고 있는 독사 네 마리는 코를 물어서 코에 관한 여러 질병들을 생겨나게 합니다. 이러한 등으로 온 몸 전체에 걸쳐 볼 수 있도록 지혜의 눈으로 한 번 살펴보십시오.
세상에서 병이 생겼다는 것, 늙음, 죽음이라는 것은 네 가지 요소가 무너졌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몸속에 존재하는 네 가지 요소의 무너짐이라는 것이 없다면 번개에 맞더라도 아프거나 죽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번개에 맞아서 죽는 것, 칼, 창, 무기에 찔려서 죽는 것, 총에 맞거나, 폭발로 죽는 것, 뱀이나 호랑이, 사자에 물려 죽는 것 등의 모든 것이 몸 내부에 있는 네 요소가 무너져서 죽는 것입니다.
번개에 맞는 것 등의 외부의 위험들이라는 것도 내부의 네 가지 요소의 기폭제 역할일 뿐입니다. 힘을 싣고 북돋아 주는 것뿐입니다. 죽게 하는 것 일체에서 내부의 네 가지 요소들이 확실히 항상 사람들을 죽이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요소가 네 마리의 독사와 같습니다.
뱀 사육사가 처음에는 독사들을 ‘멋있고 훌륭하다’라고 좋아하고 사랑하고 마음에 들어 하는 것처럼, 사람들도 네 마리의 독사라고 하는 각자의 몸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마음에 들어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들은 독사를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하고 있는 뱀 사육사와 같습니다.
그 뱀 사육사의 이익을 바라는, 그 사람을 지키는 천신이 와서 ‘친구여, 그대는 진짜 어리석소, 이것들은 독사들이오. 그대에게 좋은 결과를 주는 것이 아니요 그 독사들이 마음이 상해서 화가 나면 그대를 물도록, 그래서 죽게 하도록 할 것이오. 이 독사들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마음에 들어 하며 돌보지 마시오. 그대를 죽게 하도록, 물어서 죽일 원수들이오. 그러니 빨리 도망치시오.’라고 주의를 주며 말하듯이, 부처님께서 당신의 아들 같은 제자들에게, ‘각자의 몸에 존재하는 네 가지 요소라고 불리는 나쁜 법들과 친근하게, 가깝게 마음 놓고 가까이 지내지 마라. 그 나쁜 법들을 알아차려서 그 나쁜 법들로부터 벗어나도록 노력하여라.’라고 설하셨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시는 것이- 뱀 사육사에게, 그를 지키는 천신이 와서 주의를 주는 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들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제자가 이 네 가지 요소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싫어해서 네 가지 요소로부터 벗어난 곳인 열반의 법을 얻도록 네 가지에 대해 사띠하는 위빳사나 수행을 열심히 노력합니다. 이것은 네 마리 독사를 두려워해서 도망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도망치는 것으로 수행의 법을 노력하고 있지만, 자신의 몸속에는 여전히 네 가지 요소가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뒤에게 계속 여전히 쫓아오고 있습니다. 수다원 도에 이르러 수다원이 되어도 네 가지 요소는 다음 일곱 생까지 여전히 따라옵니다. 사다함이라고 하면 다음 두 생까지 따라옵니다. 아나함이라면 한 생까지 따라옵니다. 아라한이 되면 뒤에 따라오지 않습니다. 즉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이 네 가지 요소가 뒤를 여전히 따라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네 마리의 독사가 여전히 뒤를 쫓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알게 하려고 제일 요약한 비유로 ‘독사 네 마리와 네 가지 요소가 같다’라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입니다.
2.두 번째 비유
그 뱀 사육사의 비유에서, 뱀 사육사가 도망치자 독사들도 그 뒤를 쫓아가야지 하며 뒤에서 따라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뱀 사육사가 독사들이 기대지 못하도록 몰래 도망치고 있다’라는 소식을 왕이 듣고서는, ‘뱀 사육사가 나의 명령을 어겼다. 뱀을 돌보라고 했는데 돌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를 명령불복종의 죄로,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을 파견해서 죽여야겠다.’라고 하면서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을 고르고 있을 때, 그 뱀 사육사와 어릴 때부터 관계가 좋지 않고 껄끄러웠던 원수 다섯 명이 나타났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항상 찾아다니고 있던, 철천지원수 다섯 명이 온 것입니다. 그들 살인자 다섯 명에게 포상금 등을 주어서는 ‘만나면 장소와 방법을 가리지 말고 죽여라. 그 뱀 사육사 뒤를 쫓아서 그 자리에서 칼로 찔러 죽여라’라고 명령을 하며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제 독사 네 마리도 뒤에서 쫓아옵니다. 원수 다섯 명도 머무는 곳, 만나는 곳에서 죽이려고 뒤에서 쫓아오기 때문에 뱀 사육사는 쉴 수조차 없이 피곤하게 도망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열한 가지 비유 중에 두 번째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그를 죽이려는 다섯 명의 원수라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pañcavadhaka paccatthikāti kho bhikkhave pañcannetaṁ upādānakkhandhānaṁ adhivacanaṁ
비구들이여, ‘만나면 장소와 방법을 가리지 말고 죽일 것이다. 만나는 곳에서 칼로 찔러 죽일 것이다. 시체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라고 하면서 뒤를 조금도 사이가 멀어지지 않고 쫓아오고 있는 원수 다섯 명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중생들(사람, 천신, 범천이라고 하는 중생들의) 몸 안에 존재하고 있는 오취온upādanakkhandhā이라는 법이다.
색취온rūpakkhandhā, 수취온vedanākkhandhā, 상취온saññākkhandhā, 행취온saṅkharakkhandhā, 식취온viññāṇakkhandhā 라고 하는 오취온의 법입니다. 이 오취온의 법이 있기 때문에, 중생들은 이르는 생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오온이라고 하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죽음이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라한 들이 반열반에 드신 이후에는 이 오취온이 없기 때문에 전혀 죽음이라는 것이 없고, 죽음이 소멸된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열반에 이르지 못한 31천의 존재들인 인간, 천신, 범천들은 오취온의 법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이 되었을 때는 사람의 오취온의 법이 무너져서 죽어야 합니다. 천신이 되었을 때는 천신의 오취온의 법이 무너져서 죽어야 합니다. 범천이 되었을 때는 범천이 되어서 죽어야 합니다. 다른 축생 등의 악처 네 곳에 태어난 중생들도 관계되는 오취온의 법들이 무너져서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몸에 존재하고 있는 오취온의 법들은 (만나면 장소와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려고, 만나는 곳에서 바로 죽이려고, 시체를 만들어 버리려고 하는 원수, 철천지원수들과 같다고 마음에 새겨서 그 오취온을 있는 그대로 알도록 관찰 수행하게 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보였듯이, 뱀 사육사가 다섯 원수들을 두려워하여 달아나고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오취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오취온들을 실제대로 알도록 네 가지에 대해 사띠하는 위빳사나 수행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이 장에서 훈계하고 있습니다.
3.세 번째 비유
그 다음 세 번째 비유가, 이렇게 네 마리의 독사도 쫓아오고, 다섯 명의 원수도 뒤에서 쫓아오고 있어서 뱀 사육사가 매우 놀라 달아나고 있을 때, 왕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오, 이 자는 네 마리의 독사라는 것도 무서워하고, 다섯 원수도 이전부터 원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서워해서 가까이 하려 하지 않고 도망치고 있구나. 그렇다면 가까이하여서 죽일 수 있는 청부업자 한 명을 다시 찾아봐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수소문하고 있을 때, 그 뱀 사육사와 어릴 때부터 같이 놀던, 매우 가깝게 지내던, 사소한 것까지 다 아는 소꿉친구 한 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소꿉친구에게 포상금을 주면서, 뱀 사육사의 뒤를 쫓아서 만나게 되면, 즉시 시체로 만들도록 죽여 버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절친한 친구였고, 지금은 원수인 그 사람이 뱀 사육사를 따라 가서, ‘친구, 너 왜 도망치고 있느냐? 도망치지 마라. 잘못 생각하지 마라. 내가 너와는 어릴 때부터 절친한 친구 아니냐? 내가 잘되기를 네가 바라듯이, 나도 네가 잘되기를 바란다. 서로서로의 연유를 서로서로 알지 않느냐? 전혀 의심할 필요 없다. 나와 함께 돌아가자. 네 가족, 친지들 모두도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위험이 없도록 내가 다 책임지겠다. 나와 함께 돌아가자.’라고 속이며 유인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뱀 사육사의 이익을 원하는 친구가 나타나서는, ‘여보시오, 뱀 사육사, 주의하시오. 이전에는 이 사람이 그대의 친구였지만, 지금은 친구가 아니오. 원수가 되어서 그대를 죽이려고 뒤따라와서는 가까이 다가와서 죽이려고 하고 있소. 그 사람 말 듣고, 멈추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마시오. 계속해서 달아나시오.’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이것에 관해서 부처님께서는 비유와 비유가 뜻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chaṭṭho antaracaro vadhako ukkhittāsikoti bhikkhave nandīrāgassetaṁ andhivacanaṁ
비구들이여, 매우 친밀한 친구로서 가까이 와서는 죽이려고 따라오고 있는 그 원수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중생들 각각에게 존재하고 있는 nandīrāga(기쁨과 욕망)이다.
여기서 기쁨과 욕망이라는 것은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 바라는 것, 애착하는 것이라고 하는 taṇhā갈애입니다. 그 갈애가 좋은 대상들과 만날 때마다 좋아하고 즐기고는 바라고, 애착합니다. 이렇게 좋아하고 즐기고 애착하는 ‘기쁨과 욕망’을 중생들은 마음에 들어 하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좋지 않은 대상들, 좋지 않은 것들은 바라지 않습니다. 좋은 대상들과 만나서 좋아하고 바라며 즐기고 있는 것만을 ‘좋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쁨과 욕망이라는 좋아하고, 바라고 즐기는 것들을 세상에서는 ‘행복하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모양, 좋은 소리, 향기로운 냄새, 맛있는 맛, 부드러운 감촉 등의 여러 대상들,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렇게 즐길만한 것들을 얻기 위해 좋은 것, 마음에 드는 것들, 아직 생기지 않은 것들을 생기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영화, 연극, 노래, 파티 등을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기쁨과 욕망이라고 하는 즐기는 것, 마음에 드는 것을 더욱더 많이 누리려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러한 장소에만 자주 가곤 합니다. 이것이 친구로 가장하여 가까이 다가와 죽이려고 하는 원수입니다.
이러한 기쁨과 욕망, 좋아하고 바라는 것이 생기는 것과 함께 선업의 법들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무너져 갑니다. 그리고 saddhā믿음, sati사띠, samādhi사마디 등의 선업의 법들이라는 것은 생길 수가 없습니다. 기쁨과 욕망이 존재하는 한, 생기는 기간 내내, 거듭거듭 새로운 생을 받아야 합니다. 태어날 때마다 그 태어난 생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렇게 누가 죽이는가라고 한다면 기쁨과 욕망이 가까이 다가와서 죽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쁨과 욕망이라는 것은 친구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가까이 다가와서는 죽이려고 하는, 여섯 번째 원수라고 라고 알고서는 그 기쁨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물질과 정신의 법을 관찰하며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이 기쁨과 욕망이라는 것이 혹시 또 생겨나더라도, ‘좋아함, 마음에 들어 함’하는 등으로 관찰하며 수행하여 제거해 나가야한다고 부처님께서 이 가르침을 설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비유11가지 중에서 세 번째 비유입니다. 다음 네 번째 비유도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4. 네 번째 비유
뱀 사육사가 독사들도 두려워하고, 다섯 명의 원수들도 두려워하고, 가까이 다가와서 죽이려고 하는 여섯 번째 원수도 두려워해서 쉬지 않고 도망가고 있을 때, 어느 한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집이 여섯 가구만 있었습니다. 그 마을도 사실은 사람들이 지낼 수 없는, 살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버려진 마을이었으므로, ‘이 마을에는 아무 것도 없구나. 하지만 이 마을에 이르러 피곤하기도 피곤하고, 배고프기도 하므로 마을에 먹을 것, 마실 것들이 좀 있는가?’라고 생각하고서는 한 집 한 집 찾아다녔지만 어느 한 집에서도 먹을 것, 마실 것, 좋아할 만한 것을 하나도 찾지 못했습니다.
여기서도 비유와 그 비유가 뜻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suñño gāmoti kho bhikkhave channetaṁ ajjattikānaṁ āyatanānaṁ adhivacanaṁ(saḷāyatana saṁ, 383)
비구들이여, 사람들이 살지 않는, 버려진 마을, 황폐한 마을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존재하고 있는 안의 여섯 감각장소(ajjattikāyatana)이다.
안의 여섯 감각장소라는 것은 빠알리어로는 cakkhu, sota, ghana, givhā, kāya, mana 입니다. 의미는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라고 하는 여섯 문의 법입니다. 여기에서 비유와 비유가 뜻하는 바를 비교해서 보이자면, 중생들 자신에게는-
(1)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하는 버려진 집, 황폐한 집, 폐허인 집이 하나,
(2)귀로 듣는 것이라고 하는 버려진 집, 황폐한 집, 폐허인 집이 하나,
(3)코로 냄새 맡는 것이라고 하는 버려진 집, 황폐한 집, 폐허인 집이 하나,
(4)혀로 맛보는 것이라고 하는 버려진 집, 황폐한 집, 폐허인 집이 하나,
(5)몸으로 감촉하는 것이라고 하는 버려진 집, 황폐한 집, 폐허인 집이 하나,
(6)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는 버려진 집, 황폐한 집, 폐허인 집이 하나,
라는 버려진 집, 황폐한 집 여섯 가구가 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들은 위빳사나 지혜의 눈으로 보지 않고서 일반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좋아하고 즐기고 마음에 드는 것들일 뿐입니다. 눈도 자신의 눈으로서,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합니다. 마찬가지로 귀, 코, 혀, 몸, 마음 전부다 좋아하고 마음에 들 만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좋아하므로 애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 설하신 사띠빳타나 위빳사나 수행으로 관찰, 수행하여 보게 되면, ‘눈도 좋아하고 즐길 만한 것이 아니다, 항상하는 어떤 것도 없다, 행복한 어떤 것도 없다, 좋은 어떤 것도 없다, 개인·중생이라고 할 만한 어떤 것도 없다. 귀, 코, 혀, 몸, 마음이라고 하는 여섯 가지 문 모두에서 어떠한 좋아하고 즐길 만한 것이 없다. nicca라는 것, sukka라는 것, atta 라는 것이 없다. subha라는 것도 전혀 없다. 어떠한 실체라고는 완전히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경험하여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버려진 마을, 황폐한 집이라는 것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라고 하는 자신 내부의 여섯 가지 감각장소라고 알고서는 여섯 문에서 생겨나는 대상들에 좋아할 만한 것은 어느 하나도 없이, anicca, dukkha, anatta, asubha 로 생각하도록 관찰, 수행해야한다고 이 가르침의 장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입니다.
5.다섯 번째 비유
이 뱀독의 비유경에서 다섯 번째 비유에 대한 가르침의 장에 이르렀습니다. 이 장에서는 뱀 사육사가 그 버려진 마을, 황폐한 마을에서 한 집, 한 집 찾아다녔지만 먹을 것, 마실 것, 사용할 것이라고는 어느 하나도 구하지 못해서 잠시 동안 피곤을 풀며 휴식하면서 머물고 있는 사이에, ‘이 마을을 약탈하려고, 그 마을의 재산을 훔치려고,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도 죽이려는 목적으로 외부로부터 도적 여섯 명이 마을로 오고 있다.’라는 소식을, 역시 그 뱀 사육사의 이익을 원하는 친구가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여섯 도둑들이 마을도 약탈하고 재산도 훔치고 사람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무서워하여 마을에서 급히 뛰쳐나와 도망쳤습니다. 그래서 네 마리의 독사도 뒤를 따라오고, 원수 다섯 명도 뒤에서 쫓아오고, 예전의 친구였던, 그가 믿던 이도 그를 죽이려고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중에, 이제 덧붙여 마을을 약탈하고 강탈한 후 사람도 죽이려는 여섯 도적들도, 그 뱀 사육사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서는 ‘저 사람도 죽여야 한다.’라고 하면서 뒤에서 매우 가까이 쫓아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마을의 외부에서 온 도적들이라는 것은 무엇을 대상으로 설하셨는가 하면,
corā gāmaghātakāti kho bhikkhave channetaṁbahirānaṁ āyatanānaṁ adhivacanaṁ
마을을 약탈하는 도적 여섯 명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여섯 문에 이르러 다가오는 외부의 여섯 감각장소이다
라고 설하셨습니다. 빠알리어로는 rūpāyatana, saddāyatana, gandhāyatana, rasāyatana, phoṭṭabbāyatana, dhammāyatana입니다. 이 외부의 여섯 감각장소가 도적 여섯 명과 어떻게 같은가라고 한다면, 모양, 소리, 냄새, 맛 등의 여섯 대상들은 눈, 귀, 코 등의 여섯 문에 이르게 되었을 때, 좋아하고 즐길 만한 대상을 좋아하고 즐깁니다. 좋아하고 즐기는 rāga, lobha가 생겨남과 동시에 그 사람에게 존재하고 있던 saddhā, sati, hirī, ottappa, vīriya, bahussuta, paññā 라고 하는 선한 법들이 무너져 갑니다. 이러한 대상들의 뒤를 따라서 좋아하고 즐기는 것, lobha가 심해져서 말하고 행동한다면, 출가자라면 출가자의 계율을 범할 수 있습니다. 재가자면 선하지 않은 행위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겨나서, 이러한 선하지 않은 행위들, 잘못들이 결과를 미치게 될 대, 악처에도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여섯 대상이라고 하는 여섯 도적들이 강탈하고 죽여서 괴로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좋아하지 않은 대상이 생기더라도, 그 대상을 조건으로 해서 성냄이라는 번뇌가 생겨납니다. 이렇게 성냄이 생기더라도 선한 법들이 무너져서 불선업들이 생겨나서 늘어갑니다. 이렇게 ‘여섯 대상이라고 하는 도적의 무리들의 무기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탐욕, 성냄, 어리석음, 갈망abhijjā, 갈애taṇha, 자만, 사견, 질투, 인색 등의 번뇌들이다’라는 것도 이해해 놓으십시오. 좋아하는 대상도 아니고, 좋아하지 않는 대상도 아닌, 중간의 무덤덤한 대상을 조건으로 해서도 그 대상을 무상, 고, 무아로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서 영원한 것, 행복한 것, 자아인 것 등으로 생각하고 집착하여서는 무명이 생겨납니다. 이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도 불선업들이 늘어갑니다. 이러한 불선업들이 결과를 미칠 때에는 사악처에 떨어져 갑니다. 이것도 여섯 대상이라고 하는 도적들이 강탈하고 죽여서 괴로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섯 대상은 마을 밖에서 마을을 강탈하러 오는 도적들과 같다.’라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을 밖의 도적들에 의해 강탈당하지 않고 죽음을 당하지 않으려면 여섯 대상에 이르게 될 때마다 잘 보호하고 삼가야 합니다. indriya saṁvara sīla (감각기관을 보호하는 계)로써 여섯 문에서 번뇌들이 생기지 않도록 잘 보호해야 합니다. 그리고 몸에 관한 사띠kāyagatāsati, 부정관asubhabhāvanā 등의 수행을 많이 하여서 번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미리 막아두어야 합니다. 그 보다 더 수행하고자 한다면, 여섯 문에 이르는 대상들이 생겨날 때마다 사띠빳타나 위빳사나 수행으로 관찰 수행하여서 무상, 고, 무아의 성품들을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매우 열심히 수행해서, 사띠와 사마디의 힘이 좋아졌을 때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물질과 정신들을 무상, 고, 무아로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알 때마다 여섯 문에 이르는 모든 대상들에 밀착해서 관찰하여서,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알 때마다 그 대상들이 즉시 무너져 버리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은 법들일 뿐이구나, 고통인 법들일 뿐이구나, 개인, 중생일 아닌 성품의 법들일 뿐이구나.’라고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알아가고 알아가면 대상과 관련하여 번뇌들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번뇌들이 생겨나지 않으면 나쁜 행실들도 생겨날 기회가 없습니다. 이렇게 번뇌들과 나쁜 행실들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 마을 밖의 도적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섯 문에 이르는 대상들을 감각기관을 보호하는 계로써, 혹은 사띠빳타나 위빳사나 수행으로써 관찰, 수행하여 보호해야 합니다.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알게 하기 위해 ‘여섯 대상이 마을을 약탈하려는 여섯 도적과 같다’라고 부처님께서 설하셨습니다.
6.여섯 번째 ~ 열한 번째 비유
또 그 마을을 약탈하려는 도적들도 따라오고, 그 전에 네 마리 독사도 따라오고, 다섯 원수도 따라오고, 여섯 번째인, 친구로 가장한 원수도 죽이려고 계속해서 따라오고 있기 때문에, 그 뱀 사육사는 그 황폐한 마을에서 도망쳐서 매우 넓고 긴 큰 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강의 이쪽 강가에서 계속 있다면,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원수들에게 따라잡힐 것입니다. 따라잡히게 되면 그들의 괴롭힘을 당하고 결국은 죽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강의 반대편 강가로 건너간다면, 위험이 완전히 사라져서 행복해 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넓은 강을 건널 수 있는, 미리 준비된 배도 없고, 그렇다고 천천히 갈 수도 없이 빨리빨리 건너가야 하기 때문에, 보이는 대로, 집히는 대로 가지, 나무막대기, 넝쿨 등을 있는 대로 엮어서 딱 한 사람이 탈 수 있는 정도의 땟목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땟목을 만들어서 손으로, 발로 저으면서 저쪽 언덕에 이르려고 도망쳐 건너갔습니다. 그리고는 저쪽 언덕에 이르게 되어서, 그 뒤를 따라오던 여러 위험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원래 있었던 왕에 대한 의무도 완전히 남김없이 없어져서, 깨끗하고 청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섯 번째 비유
이 비유에서 넓은 강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mahāudakaṇṇavoti kho bhikkhave catunnetaṁ oghānaṁ adhivacanaṁ.
여기서 넓은 강이라는 것은 네 가지 폭류ogha 이다.
ogha오가 라는 것은 세상에서 사용하는 말로 하자면 폭류, 격류, 심하게 요동치며 흐르는 강물 등의 의미입니다. 그러한 격류에 떨어지게 되면, 건너갈 수 있으면 건너가지만, 건너갈 수 없으면 그 격류에 휩쓸려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생들 자신에게 존재하는 kāmogha감각욕망의 격류, bhavogha존재의 욕망의 격류, diṭṭogha사견의 격류, avijjogha무명의 격류 라고 하는 본뇌의 법들도 그것들의 흐름에 떨어진 중생들을 휩쓸어 가서 죽게 합니다. 그것들의 흐름에 떨어진 중생들을, 불선업의 법들, 불선업의 업이 증장하게 하여서 사악처에 빠져 죽게 합니다. 사악처에 빠져 죽게 하지 않더라도, 선업의 법들, 선업의 업이 증장하게 하여서 선처에 태어나게 해서, 사람의 생, 사람의 몸, 천신의 생, 천신의 몸이 된 후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일부의 격류의 법들은 사악처의 흐름에 빠져들게하는 격류와 같습니다. 그렇게 사악처의 흐름에 빠져들게 하는 격류에 빠지게 되면 사악처에 빠져죽게 됩니다. 일부의 격류의 법들은 사람의 세계, 천신의 세계에 빠져들게 하는 격류와 같습니다. 그렇게 사람과 천신의 흐름에 빠져들게 하는 격류에 빠지게 되면, 사람의 생, 천신의 생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천신으로서 죽게 됩니다. bhovogha존재의 욕망의 격류라고 하는 일부의 격류는 범천의 세계에 빠져들게 하는 격류와 같습니다. 그 존재의 욕망의 격류에 빠진 존재는 범천의 생에 이른 후, 범천으로서 다시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감각욕망의 격류, 존재욕망의 격류, 사견의 격류, 무명의 격류라고 하는 격류 네 가지도 넘어갈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라고 부처님께서 이 가르침의 장에서 설하고 계신 것입니다.
일곱 번째 비유
그리고 이 언덕에는 아직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하면,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orimaṁ tīraṁ sāsaṅkaṁ sappaṭibhayanti kho bhikkhave sakkāyassetemā adhivacanaṁ
비구들이여, 의심saṁsaya도 있고, 두려워할 만한 위험도 있는 이 언덕이라는 것은
sakkāya라고 부르는 upāsānakkhandhā오취온을 말한다.
이쪽 언덕에서 지낼 것 같으면 지금 뱀 사육사 뒤를 쫓아오고 있는 원수들이 다가와 그들에게 죽음을 당하는 위험에 직면하게 되듯이, sakkāya라고 하는 법이 존재하는 한은 중생들은 항상 위험에 직면해야 합니다. sakkāya 라고 하는 오온이 존재하면, 그 사람은
•네 마리의 독사와 같은 사대가 무너져서도 죽을 수 있습니다.
•오온이라고 하는 다섯 원수가 죽여서도 죽을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로 친구로 가장한 적과 같은 nandīrāga 에 의해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마을 밖의 여섯 도적들과 같은 여섯 가지 대상들을 조건으로 해서 불선업의 법들을 행하고, 나쁜 행실들을 증장시켜 새로운 생에 이르러 죽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sakkāya 라고 하는 물질과 정신의 무더기가 존재하는 한은 항상 늙음, 병,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sakkāya 라고 하는 오취온이 있으면 죽어야 할 때에 이르면 죽어야만 합니다. 매우 수명이 긴 범천의 세상에 태어나더라도, 그 범천의 수명이 다하게 되었을 때 죽어야 합니다. 가장 높은 세상인 비상비비상처천이라는 범천의 세계가 이 세상에서 수명이 제일 깁니다. 하지만 팔만사천 대겁이라는 수명에 이르게 되면 그도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sakkāya 라고 하는 오취온이 존재하면 지금까지 말한 네 마리 독사와 같은 사대, 다섯 원수와 같은 오온, 친구로 가장한 적과 같은 nandīrāga, 여섯 도적과 같은 여섯 대상이라고 하는 그러한 법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죽음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sakkāya 라고 하는 이 언덕을 넘어서 sakkāya 라고 하는 오취온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저족 언덕으로 넘어 가야지만 행복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덟 번째 비유
저쪽 언덕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pārimaṁ tīraṁ khemaṁ appaṭibhayanti kho bhikkhave nibbānassetaṁ adhivacanaṁ
비구들이여, 위험이 사라진 저쪽 언덕이라는 것은 열반이다.
열반이라는 것도 오취온이 완전히 잠재워진 성품입니다. 오취온이 완전히 잠재워지면 어떠한 위험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이라고 하는 저쪽 언덕에 이르게 되면 네 마리의 독사와 같은 사대도 따라와서 괴롭힐 수 없습니다. 다섯 원수와 같은 오온도 따라와서 괴롭힐 수 없습니다. 친구로 가장한 적과 같은 nandīrāga 도 따라와서 괴롭힐 수 없습니다. 마을 밖 여섯 도적과 같은 여섯 대상들도 따라와서 괴롭힐 수 없습니다.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이라는 것이, 위험이 잠재워진 저쪽 언덕과 같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입니다.
아홉 번째 비유
그리고 저쪽 언덕에 도달하도록 강을 건너기 위해 탔던 뗏목은 무엇인가 하면
kullanti kho bhikkave ariyassetaṁ aṭṭhaṅgikassa maggassa adhivacanaṁ
비구들이여, 뗏목이라는 것은 성자들의 여덟 가지 실천수행법(성자의 팔정도)이다.
성자의 팔정도라라는 것에는
(1)sammāvācā정어, sammākammanta정업, sammājīva정어 라고 하는 계의 도지 3가지,
(2)sammāvāyāma정정진, sammāsati정념, sammāsamādhi정정 이라고 하는 정의 도지 3가지
(3)sammādiṭṭhi정견, sammāsaṅkappa정사유 라고 하는 혜의 도지 2가지,
이렇게 모두 8가지의 도의 구성요소를 말합니다. 이 팔정도라고 하는 뗏목을 타고서 열반이라고 하는 저쪽 언덕에 이르도록 건너가야 합니다.
열 번째 비유
팔정도라고 하는 뗏목으로 저쪽 언덕으로 가기 위해 건너갈 때, 손, 발로써 열심히 저어야 한다는 것이 무엇과 같은가 하면 sammappadhāna vīriya 정진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tassa hatthehi ca pādehi ca vāyāmoti kho bhikkhave tīriyārambhassetaṁ adhivacanaṁ
저쪽 언덕이라고 하는 열반에 이르려고 한다면, sammappadhāna vīriya 라고 하는 정진을 해야만 이를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서도 도달할 수 없습니다.
열한 번째 비유
또한 저쪽 언덕에 이르러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와 같은가 하면,
tiṇṇo pāraṅgato thile tiṭṭhati brāhmaṇoti kho bhikkhave arahato etaṁ adhivacanaṁ.
저쪽 언덕에 이르러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라는 것은 아라한을 말한다.
이 팔정도의 실천법을 sammappadhāna vīriya 정진으로 실천 노력할 것 같으면, 마지막 어느 날에 아라한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아라한이 되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은 이 가르침에서 설하고 계신 것입니다.
7.결어
이 가르침은 매우 심오한 법입니다. 진실로 노력할 것 같으면 아라한이 될 수 있는 법들의 성품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 이 뱀독의 비유경āsīvisopama 에 나타난 비유와 비유가 의미하는 바를 비교하여 설한 가르침을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이 뱀독의 비유경을 정성을 다해 경청한 dhammasavana 청법의 선업 의도의 힘으로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선한 대중 모두에게 모든 위험이 완전히 사라지고 잠재워지고, 팔정도라고 하는 뗏목을 잘 지녀서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이라고 하는 열반으로 도달할 수 있도록 열심히 실천수행하여서 위빳사나 지혜의 단계, 도의 지혜의 단계를 거쳐 모든 고통이 잠재워진 열반의 행복을 빠르게 증득할 수 있기를!
sādhu~ sādhu~ sādhu~
첫댓글 사두사두사두
사두 사두 사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