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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지혜서 6,1-11
루카 17,11-19
<주님께서는 비극이나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현존하시고, 실패 속에서도 성공을 이끌어내십니다!>
젊은 수도자 시절, 삶 자체가 온통 회색빛이던 시절, 사방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쌓여 탈출구가 안보이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나혼자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방이 다 적군으로 둘러쌓인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마음 속은 분노와 불평불만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영적 지도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사려깊은 신부님께서는 꽤나 어려운 숙제를 하나 내주셨습니다.
우리 수도원의 장점, 경쟁력, 긍정적인 면을 한번 찾아보라고, 그리고 제 구체적인 삶속에 숨어있는 감사꺼리들을 한번 찾아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장점이나 긍정적인 측면, 감사꺼리는 찾아볼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도 신부님의 각별한 당부도 있고 해서, 기를 쓰고 노력했습니다.
두달 가까이 애써 찾아보고 또 찾아봤습니다.
그랬더니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자세를 완전히 낮추고,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니, 전혀 없을 것 같았던 작은 감사꺼리들을 하나 둘 발견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감사꺼리들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사방이 온통 은총과 축복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간 제 눈이 어두워 지천으로 널려있던 선물과 장점, 기쁨과 감사꺼리들을 미처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간단한 결론을 내릴수 있었습니다.
제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감사의 미덕의 결핍!' 이었다고.
그래서 지금은 자신있게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속적인 영혼의 평화와 행복의 비결은 항상, 그리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데 있다는 것을!
자신과 동료 이웃들, 공동체와 세상을 향한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분들에게 꼭 권장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축복 노트, 감사 노트를 한권 장만하라고. 불평불만들은 자비하신 주님께 모두 맡겨드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과 축복, 주님께서 주신 선물과 감사꺼리들을 하나 하나 적어보시라고.
모든 감사꺼리들을 다 적었다고 생각이 들면,
가장 아랫쪽에 굵고 빨간 매직으로 이렇게 써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아버지! 이 모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감사 리스트를 적는 과정에 유의할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감사 방식은 세상 사람들의 감사 방식과는 철저히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사형통, 승승장구 앞에서는 누구나 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감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바오로 사도는 고통속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옥중에서도 감사했습니다.
병고와 박해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죽음의 칼날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크게 감사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감사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참으로 신비스럽고 위대한 존재여서, 영적으로 충만해지는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견딜 수 없는 비극이나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감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비극이나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현존하시고, 실패 속에서도 성공을 이끌어내시고, 비극을 아름다운 결말로 변화시키신다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 안에는 주님의 인호, 주님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기에,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인생의 폭풍우를 아름다운 무지개로 바꿀 수 있습니다.
끝까지 그분을 믿고 신뢰한다면 언젠가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끔찍한 고통과 비극, 굴욕을 통해서 주님의 은총이 찾아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차 있다할지라도 지난 세월에 감사해야겠습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 대해서도 감사해야겠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모든 것에 대해서도 깊이 감사해야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
찬미 예수님!
경기도 성남시 단대동에는 작은 개척교회인 '샬롬교회'가 있습니다.
이곳의 김정하 목사님은 루게릭병을 앓고 계십니다.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굳어가고, 결국엔 숨 쉬는 근육마저 멈춰버리는 무서운 병입니다.
목사님은 이제 휠체어에 앉아 겨우 손가락 하나를
움직여 컴퓨터 마우스로 세상과 소통하십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에게는 아주 특별한 다섯 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와 필리핀 등지에 사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컴패션 후원 아동들입니다.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였던 그는 이 아이들을 도울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구두닦이’였습니다.
건강했던 시절, 그는 매일 새벽 기도를 마치면 구두 통을 메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의 구두를 닦아 번 돈, 그 피 같은 돈을 모아 아이들에게 보냈습니다.
루게릭병이 찾아와 손이 굳어가기 시작했을 때도, 그는 구두솔을 놓지 않았습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구두약이 온통 옷에 묻어도,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몸도 성치 않으신데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목사님은 어눌해진 발음으로,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한 눈빛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이 아이들은… 제 심장입니다.
심장이 멈추면 죽는 것처럼, 이 일을 멈추면 저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아이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 아이들이 목사님에게 무엇을 해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그들을 위해 자신의 ‘피’와 ‘땀’을 쏟았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아이들은 그에게 남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언제일까요?
그 사람이 나에게 잘해줄 때일까요?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을 위해 나의 ‘피’를 쏟을 때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목숨보다 사랑하는 이유는, 자녀 안에 자신의 피와 살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가르쳐 준 비밀도 바로 이것입니다.
어린 왕자가 지구의 수많은 장미꽃을 보고 실망했을 때, 여우는 말합니다.
“네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그 꽃을 위해 바친 시간 때문이야.”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에 있는 장미를 위해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고, 바람막이를 씌워주었습니다.
그 수고와 희생의 시간이 있었기에, 그 장미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과 ‘책임’이, 어린 왕자가 지구의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의 별로 돌아갈 수 있게 한 ‘구원’의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고, 모두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뛰어난 ‘치유자’, ‘문제 해결사’로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단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이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왜 그만 돌아왔을까요? 나머지 아홉 명에게 예수님은 그저 ‘병을 고쳐준 고마운 분’ 정도였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치유’라는 선물을 받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선물을 가지고 각자의 삶으로, 세상 속으로 바쁘게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사마리아인에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더러운 몸을 깨끗하게 해주신 분,
자신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을 그냥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치는 ‘예배’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선언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7,19)
아홉 명은 ‘치유’를 받았지만, 이 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치유는 육신의 문제 해결이지만, 구원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그분은 우리의 ‘문제 해결사’입니까, 아니면 ‘구원자’이십니까?
많은 신자가 성당에 와서 청합니다.
“주님, 이 병을 낫게 해주십시오.
이 사업이 성공하게 해주십시오.
우리 자녀가 잘되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치유자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단지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으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아홉 명의 나병 환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는 주님을 잊고 세상 속으로 떠나버릴 것입니다.
김정하 목사님의 후원 아동들이 목사님의 도움만 받고 끝난다면, 그들은 목사님을 ‘이용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목사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려면, 그들도 목사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편지를 쓰고, 기도하며,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땀’을 흘려야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신부님의 사랑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부님이 돌아가신 후, 그들은 신부님의 뜻을 이어받아 의사가 되고, 약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신부님을 위해 자신들의 ‘피’와 ‘땀’을 쏟았습니다.
그러자 그들 안에서 이태석 신부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전부’를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
내어드렸을 때, 비로소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관념적인 신’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살아계신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모든 피를 쏟으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심장’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그분께 응답하고 있습니까?
주일 미사 한 시간 참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감사, 예배, 봉헌, 기도는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분께,
나의 ‘피’와 같은 소중한 것(시간, 재물, 마음)을 쏟아붓는 시간입니다.
이것 없이는 우리는 그분을 ‘구원자’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문제 해결사’로 이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위대한 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도 중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구나.
내가 너에게 어떤 보상을 주면 좋겠느냐?”
세상의 부와 명예, 지혜, 무엇이든 청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Non nisi Te, Domine. (주님,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문제 해결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전부’였고, 그의 유일한 ‘구원’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당신이 베풀어 주신 치유와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선물보다, 선물을 주신 당신을 더 원합니다.
당신만이 저의 참된 구원자이십니다. 아멘.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7,11-19: 한센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만난 열 명의 한센병 환자의 치유 이야기를 전한다. 한센병은 단순한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 사회적·종교적 고립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치유는 단순히 병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회복, 공동체와 화해, 하느님과의 친교 회복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환자들에게 곧바로 “깨끗하여져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절) 하신다. 이는 율법의 절차를 따르게 하시면서 동시에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명을 요구하신 것이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도중에 깨끗해졌다는 사실은, 치유가 순명의 여정 안에서 주어진 은총임을 보여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순명은 모든 기적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순간, 이미 기적은 시작된다.”(Hom. in Mt. 25,2)
열 명 모두 병은 나았지만, 오직 한 사람, 곧 사마리아인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무릎 꿇고 감사드렸다. 그는 단순히 은총의 결과에 머무르지 않고, 은총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나아갔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선언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치유와 구원의 차이를 봅니다. 아홉은 육체적 회복만을 받았지만, 사마리아인은 감사의 믿음을 통해 전인적 구원에 이른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강조한다. “감사하지 않는 자는 이미 받은 은혜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 그러나 감사하는 이는 받은 은혜 위에 새로운 은혜를 더 받는다.”(Sermo 36,1) 감사는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은총을 굳건히 하는 신앙의 행위다.
교리서는 “감사는 교회 기도의 본질적인 차원이다. 감사하는 기도는 교회의 모든 전례와 기도 안에 스며 있다.”(2637항) 가르친다. 사실 우리의 중심 전례인 성체성사(Eucharistia)라는 단어 자체가 “감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감사의 성사적 실현이어야 한다. 또한 전례 헌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성체성사는 모든 감사와 찬미의 원천이며, 교회의 생활과 사명의 정점이다.”(10항 참조). 즉, 감사하지 않는 신앙은 이미 본질을 잃어버린 신앙이다.
아홉 사람은 치유되었지만, 기쁨을 자기 안에만 가두었다. 반면 사마리아인은 감사함으로써 공동체와 다시 연결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자리에 나아갔다. 감사하는 태도는 개인의 신앙을 성숙시키고,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다. 불평과 원망은 공동체를 무너뜨리지만, 감사는 공동체를 세운다. 성 바실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감사하는 마음은 은혜를 새롭게 하고, 불평하는 마음은 은혜를 죽인다.”(Hom. in Ps. 33,1) 따라서 감사의 영성은 단지 개인의 덕목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생명을 지탱하는 힘이다.
우리도 사마리아인처럼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며, 받은 은혜를 삶에서 증거하는 감사의 증인이 되어야 하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방송인 최화정 씨는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허리를 곧게 펴고 입꼬리를 올리면 세상에 못할 일은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자세 하나 바꾸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달라지고, 마음이 바뀌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변한다는 것입니다. 크게 공감되는 말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너무 추웠습니다. 그래서 이불에 들어가 누워서 책을 읽기도 했고 또 공부했습니다. 책상은 그저 책, 공책 등을 쌓아두는 곳이 되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무조건 책상에 앉아 공부해야 했습니다. 1, 2학년 때는 공동 침실(한 방에 16명이 잤습니다)을 사용해야 했고, 그래서 잠자는 시간 외에는 무조건 공동 연학실에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추우면 두꺼운 잠바를 입고, 더운 여름날에는 시원한 물을 채운 대야에 발을 담그고 책상에 앉아 공부했습니다.
이 습관 때문일까요? 이제 누워서는 책을 읽지 못합니다. 무조건 책상에 앉아 있어야 했고, 그래야 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자세가 중요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자세가 중요합니다. 미사 때,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분을 봅니다. 이분들은 대체로 계속 무엇인가를 합니다. 스마트폰을 보고, 주보를 보고, 또 두리번거리기도 합니다. 주님께 집중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손을 모으고 집중하시는 분을 보면, 온전히 주님 앞에 나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외적인 자세도 중요하지만, 내적인 자세도 중요합니다. 그 자세를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치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병 환자들이 율법에 따라 ‘멀찍이 서서’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그들은 부정한 존재로 낙인찍혀서 건강한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라고 말씀하시면서, 치유 자체보다 공동체에서의 회복을 위해 사제에게 보내십니다.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진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방인, 이단자로 취급받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신앙의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선물을 받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자기의 은혜받은 것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드리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의 구원이라는 더 큰 선물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오로지 사랑을 함으로써 사랑을 배울 수 있다(아이리스 머독).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11.12.수.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8)
모든 것에
영광을 돌리며
감사로이
내려앉는
낙엽입니다.
열 명 모두
치유되었지만,
단 한 사람만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치유는
우리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치유는 욕망으로
마무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돌아감을 잃어버린
우리들 삶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되돌아가야 할
감사의 삶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것을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치유의
완성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방식이
감사의 삶입니다.
감사는
교만을 녹이고,
공동체를 살립니다.
감사 없는 신앙은
죽어있는 신앙입니다.
감사는 신앙의
부활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감사가 진정한
믿음입니다.
감사는 존재의
회복입니다.
감사의 길로
돌아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렇듯
은총 안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감사의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진정한 감사는
오늘 이 순간에
깨어있는
가장 좋은
은총입니다.
가장 좋은 은총인
감사를 놓치지
마십시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이라는
독서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갈망하고 갈구하여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은혜인이 되기를
하여 “거룩한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소원하며 두 손을 모읍니다.
복음서에 담긴 가장 큰 주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는
세상 안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마저
‘언제’ 하느님의 나라가 임할 것인지에
관심을 두며 궁금해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답변은 한결같습니다.
‘이미’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소유한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에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나병을 치유 받은 기쁨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주님께로 돌아와 엎드려 감사드렸던 외국인처럼
주님의 자비를 증언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의 은혜에 탄복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하느님 나라를 이웃에게 보여주는
복된 복음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굿뉴스
지혜6,1-11 루카17,11-19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믿음
<찬양과 감사>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일어나소서, 하느님,
세상을 심판하소서."(시편82,8ㄱ)
오늘 화답송 시편 후렴입니다. 오늘은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성인은 1580년 우크라이나의 동방교회 가문에서 태어나 어머니를 통해 가톨릭교육을 받습니다. 훌륭한 상인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을 저버리고 성인은 바실리오회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품을 받고 수도원장이 되었고 수도회 개혁을 주도합니다.
성인은 러시아의 비탭스크 주교로 착좌한후 리투아니아에 있는 희랍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다가 1623년 라틴화되어가고 있다는 까닭에 이교도들 손에 목숨을 잃습니다. 도끼와 총탄에 순교의 죽임을 당한후 드비나강에 던저진 유해는 비알라에 안장됩니다. 이어 1867년 비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니, 동방교회에서 최초로 성인품에 오른분이 됩니다. 주교관으로 쳐들어온 군중들 앞에서 임종어와 같은 마지막 감동적 유언이 그의 믿음의 깊이를 말해 줍니다.
“여러분은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성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인 교황의 수위권을 위하여 또한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대로 평소 삶의 요약과 같은 유언입니다. 참으로 순교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믿고 교회를 사랑했던 성인으로, 교회지도자로서 손색이 없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 성 요사팟 주교입니다. 성인들의 삶은 희망의 표징,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어 우리의 믿음을 북돋우고 배우게 함으로 우리 삶의 좌표가 됩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지혜를 추구하라”는 주제하에 특히 지도자들이 지혜를 추구할 것을 간곡히 권합니다. 맹신이나 광신이 되지 않기 위해 <지혜의 눈>은 필수입니다. 비단 지도자들뿐 아니라 우리의 온전한 믿음 생활을 위해 지혜의 사랑과 추구는 절대적입니다.
지혜서 저자는 세상의 임금들에게 “들어라”, “깨달아라”, “배워라”, “귀를 기울여라” 촉구하며, 지혜를 찾는 자의 자세에 대해 말합니다. 역시 <공부하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너희의 권력은 주님께서 주셨고, 통치권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주셨다...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듣고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바로 오늘 복음의 치유받은 나병환자들의 믿음에서 부족했던 부분이 바로 이런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비송의 청원은 바로 믿음의 갈망을 표현합니다. 아마 이런 간청의 기도가 없었다면 주님의 치유의 응답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로 동방교회의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 즉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말마디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몸을 보여라”하고 이르셨고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 집니다. 그대로 믿음의 응답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에 있습니다. 치유받은 열사람중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이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의 발치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아홉과 하나중 어느쪽에 속합니까? 지혜로운 온전한 믿음에, 하느님 찬양과 감사는 필수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화두처럼 우리 모두의 믿음을 돌아보며 분발케합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하느님께 영광은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림으로 표현됩니다. “모든 일에 하느님은 영광받으소서”(성규57,9), 베네딕도회의 모토이자 수도원 정문 바위판에 새겨져 있는 성규 구절입니다.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지혜로운 믿음으로 주님을 만나 진짜 영육의 온전한 치유를 받은 이는 사마리아 사람 하나뿐이였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육신의 치유 반쪽의 치유에 불과할 뿐입니다. 자비송에 이어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온전한 치유와 구원의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선언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고 파견되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오늘의 말씀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17,18)
'얼마나 감사를 드리며 사는가?'
오늘 복음(루카17,11-19)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 와 소리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7,13)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17,14) 하고 이르십니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나병이 나은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자비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 한 사람은 외국인(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17,17-18) 그리고 외국인에게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5)
'이런 하느님께 나는 얼마나 감사를 드리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루에도 많은 것들을 하느님께 청하면서 사는 우리들입니다. 나병 환자들처럼,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청하면서 사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아니 매순간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다시 부활하는 우리들입니다.
배은망덕한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받은 은총에 감사드리며 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8 참조)
(~ 2열왕11,20)
복음말씀
제1독서
<임금들아, 들어라. 지혜를 배워라.>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6,1-11
1 임금들아, 들어라. 그리고 깨달아라. 세상 끝까지 통치하는 자들아, 배워라.
2 많은 백성을 다스리고 수많은 민족을 자랑하는 자들아, 귀를 기울여라.
3 너희의 권력은 주님께서 주셨고 통치권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주셨다.
그분께서 너희가 하는 일들을 점검하시고 너희의 계획들을 검열하신다.
4 너희가 그분 나라의 신하들이면서도 올바르게 다스리지 않고
법을 지키지 않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5 그분께서는 지체 없이 무서운 모습으로 너희에게 들이닥치실 것이다.
정녕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6 미천한 이들은 자비로 용서를 받지만 권력자들은 엄하게 재판을 받을 것이다.
7 만물의 주님께서는 누구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으시고
누가 위대하다고 하여 어려워하지도 않으신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
8 그러나 세력가들은 엄정하게 심리하신다.
9 그러니 군주들아,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듣고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10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것을 익힌 이들은 변호를 받을 것이다.
11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11-19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