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 9: 12.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13.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 9: 12.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
병자에게 의사 선생님이 필요하듯이, 죄인에게는 구주가 필요하다.
1]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들으신 예수는 그 당시 흔히 통용되던 본문의 속담을 그들에게 들이대셨다. 이는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그런 복잡한 대답이 아니다. 바리새인들 중에 어느 누구도 이를 반박할 수 없는 정확하고도 명쾌한 답변이었다.
병든 자만이 의원의 도움이 필요하므로 의원이 있어야 할 자리는 병자들 곁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죄인들을 구하려고 오셨으며,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이 자신의 임무임을 말씀한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에게는(절대 의인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예수의 도움이 필요가 없다.
* 롬 3: 10 –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오늘날 우리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자신이 죄인임을 안타깝게 여기고 절망에 빠진 자들에게 필요한 분으로서 그들과는 언제나 함께 있다.
자신의 영적인 질병인 죄를 깨닫지 못하고 의인인 체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인에게는 예수가 함께 있을 수가 없다.
한편 본문에서 간과치 말아야 할 사실은 죄인들이 예수를 반가이 맞이했기 때문에 예수가 그들에게 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에게 가셨다.
마 9: 13.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단순히 형식적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우리가 남에게 긍휼 베푸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 예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셨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
회개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던 자들이 돌이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회개는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고,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늘의 영광의 처소를 버리고 이 누추하고 죄와 슬픔이 많은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이 일을 위해서이었다. 이것이 그의 사명이다.
* 딤전 1: 15 -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은 교회의 최대 사명이다.
1] 너희는 가서
랍비들이 성경을 공부해야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고자 할 때 흔히 사용하던 상투어이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능통하다고 자위하면서, 참 종교의 핵심 내용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게을리하였다. 외적인 의식과 형식에만 매달려 모양만 갖추면 종교적인 임무를 다한 것이라고 착각하였다.
예수는 이점을 지적하기 위해,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던 이 말을 빌어 바리새인들의 자만을 질타하셨다.
2] 내가 긍휼을 원하고
이 말은 구약에서도 가끔 눈에 띄는 구절이다.
* 호 6: 6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긍휼'(mercy, 사랑, 자비)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헤세드'(*)인데 '인자하심', '자비'등으로 번역된다. 이 말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에 준한 사랑을 뜻한다. 여호와의 종교는 여호와의 사랑과 긍휼을 실천하는 종교이다.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의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호세아 당시, 종교의 핵심은 잊고 형식적인 의식에만 치중했던 제사장들같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등한시 하였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현상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은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불행한 일을 당한 자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서 그리스도의 긍휼의 정신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러한 예수의 사랑을 보이지 않고 그가 이방인이며 불신자란 이유로 외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바리새인들처럼 기독교의 외형적 상식에만 어긋나도 마치 그를 사탄의 자식인양 질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3]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이 말은 제사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의식보다는 소외된 자에게 베푸는 사랑과 자비를 우선적으로 여기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긍휼과 제사는 필요하고 선한 것이지만 긍휼이 제사보다 먼저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제사 같은 희생 제물은 타락한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을 표출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따라서 제사의 핵심과 내용은 긍휼과 사랑이며 이것들이 결여된 제사란 아무런 실체가 없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4]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예수께서는 인간을 의인과 죄인 두 부류로 나누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모두가 죄인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래부터 의롭지 못하다.
* 시 14: 3 -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 롬 1: 18-32 –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 롬 3: 10-18 –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스스로 의인인 체하였던 바리새인들도 역시 죄인이다. 이들이 죄인이지만 예수께서는 이들을 부르려고 온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의 사역을 오히려 방해하고 죄를 뉘우치려고 하지 않은 자칭 의인이었기 때문이다.
5]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메시아로 오신 예수 자신의 사역의 본질, 곧 죄인에게 은혜를 베풀며 버려진 죄인들을 구원키 위해 오셨음을 밝히신 말씀이다. 누가는 이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 32)고 기록하고 있다.
'부르다'는 말의 원어 '칼레사이'(*)는 '초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예수는 죄인들을 불러 천국의 기쁜 잔치에 초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외된 무리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예수의 고유한 사역이며, 이런 무리들을 구하고자 오신 것이다.
전통 본문에는 누가복음과 같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로 되어 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상태에서 이 낮고 비천한 땅에 오신 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함이었다.
회개는 하나님 없이 살고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던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여기에 회개의 중요성이 있다. 회개는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다. 죄인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과정이다. 죄인을 회개시키기 위해 예수께서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인을 회개시키는 일은 교회의 최대 사역이다. 그것이 전도의 목적이다.
죄인을 회개시키려면 죄인들과 접촉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격리된 삶을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원하는 자는 죄인들의 세계속에 들어가 그들과 만나야 한다. 물론 여기에 부패의 위험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로만 구성된 사회에는 전도가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다.
사람을 구원시키기 위한 교회의, 그리고 우리의 전도적 접촉은 어떤 대상에게도 개방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죄인들과 접촉하려면, 우리는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긍휼을 본받아야 한다. 긍휼한 마음이 없이는 죄인들을 접촉할 수 없다. 긍휼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한두 명이라도 하나님께로 인도하려고 애쓰자.
6] 위대한 치료자 예수
주의 사역은 죄인을 회개시켜 의에 이르게 하고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죄인만을 부르셨을 뿐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을 외면하셨다. 이러한 사실을 주님은 본문에서 병자와 의사와의 관계를 예로 들어 설명해 주셨다.
(1) 우리는 환자다.
자에게 '당신은 환자요'라고 선언한다면 오히려 그 말을 하는 자를 미친 사람 취급하여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중환자다. 비록 우리의 육체가 아무런 질병이 없는 건강한 육체라 할지라도 영혼은 죄의 질병으로 오염된 중환자다. 문제는 이 질병이 눈에 보이지 않아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과 그 상처가 너무 깊고 중하여 치료가 불가능하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의사이시다.
① 그의 치료는 신속하다.
아무리 명의라 할지라도 예수님만큼 빠른 치료를 하는 의사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치료는 그가 명하거나, 손을 얹거나 만지기만 하면 대는 즉시 완치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자 그녀가 즉시로 일어나 예수께 수종든 사실(마 8: 14-15)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증거다.
뿐만 아니라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의 겉옷 가를 만지는 것만으로 그녀가 오랜 난치의 병에서 즉시 구원함을 받은 사실은 (마 9: 20-22) 예수의 치료가 신속하며 확실한 것임에 대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병이 아무리 깊고 중하며 오래 된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그 즉시 구원을 받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② 그의 치료는 완벽하다.
예수의 치료는 재발하는 법이 없다. 그에게 치료함을 받은 자는 다시 그 병으로 인해 고민하거나 고생하지 않았다. 이것이 주님의 치료와 세상 치료의 차이다.
죄에 대한 그의 치료 역시 마찬가지다. 한 번 용서받은 죄는 다시는 기억지도 아니하시고 그 죄로 인해 우리로 하여금 고통당하지 않도록 하신다. 그의 치료는 영원하며 용서함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 의롭다고 함을 인정받는다.
③ 그의 치료에 불가능이 없다.
그는 모든 병을 고치셨다. 그가 고치지 못하는 병은 한 가지도 없다. 그 앞에서는 죽음까지도 굴복하며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능력의 의사였다. 이것은 그가 천지 만물과 인간까지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이에게 어떤 병이 감히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주저하지 말고 그에게 나아오라. 그에게 아룁시다. 아뢰기를 주저하거나 능력을 제한하거나 가로막지 말고 털어놓자. 그리할 때 우리가 당한 모든 문제와 고통, 죄의 짐과 질병을 해결 받을 수 있을 것이다.
(3) 주님이 우리에게 오셨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3절) 죄인을 향해 나아오심. 이것이 주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적인 소경이며 앉은뱅이인 우리가 그에게로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이다.
① 그는 사랑이시다.
그의 나아오심은 심판 때문이 아니다. 그의 나아오심은 어두움에 갇혀 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나아오신 것이다.
② 그는 용서하기 위해 오셨다.
죄인 된 우리는 서로서로 비판하며 힐문하기를 좋아하지만, 주님은 오점투성이요 죄로 얼룩진 우리를 질책하거나 비난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비난보다는 위로하시며 책망보다는 용서를 앞세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러한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여러분을 찾아가신다.
③ 그는 십자가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셨다.
이것이 그가 우리를 찾아오신 근본적인 목적이었다. 그의 사랑은 용서와 위로의 말로 그친 것이 아니라 직접 자기 몸을 대속물로 내어주는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4) 그리스도가 있어야 하는 자만이 그 은혜를 덧입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그리스도라 할지라도 무조건적으로 아무나 구원을 베푸시는 것은 아니다. 그의 구원은 자신이 영적인 중환자임을 아는 자, 그리고 주님만이 만병의 치료자임을 알고 겸손히 그에게 간구하는 자에게만 임하신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돌이켜 깨닫는 자가 됩시다. 그리고 교만한 마음으로 그를 거부함으로 영벌에 떨어지는 자가 아니라 겸손히 그를 구하고 영접하여 그의 무한하신 사랑과 구원의 축복을 덧입는 자들이 됩시다.
|
첫댓글 귀한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인에게는 구주가 필요하다.
^~^사랑의 향기는 만리를 가고도 남습니다. 오늘도 건강과 함께
좋은 사람들과 좋은 향기로 좋은 인연 이어가는 날 되시기 기원 합니다.^~^
죄인에게는 구주가 필요하다.
설교 감사합니다.
죄인에게는 구주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