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도 전각도 없던 노천 사찰
가끔, 남도 땅에 살면서 휑하니 마실 다녀오고 싶은 곳이 있다. 천불천탑(千佛千塔)과 대면할 수 있는 화순 운주사(雲住寺)다. 얼기설기 살다 보면 앞뒤가 꽉 막히거나, 일이 순조로워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러면 어김없이 운주사로 향하곤 한다. 그곳에 가면 넘치는 마음은 낮아지고, 부족한 에너지는 충족되기 때문이다.
운주사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그중에서 마음 편한 길은 나주땅 남평을 길머리 삼을 때다. 맑고 잔잔한 나주호를 끼고 돌면 초의 선사 발심 도량 운흥사와 국내 최대 규모의 우리 차 자생지 불회사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10리쯤 거리에 운주사가 자리해 있다.
운주사는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스님도 전각도 없던 노천 사찰이었다. 그렇다고 황량한 폐사지와는 격이 달랐다. 수많은 부처님과 탑 옆으로 중생들이 땅을 일구던 생산과 풍요의 도량이었다. 오래된 흑백 사진 속의 운주사는 논두렁이 스님 가사의 조를 나누듯 그대로가 복전(福田)이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운주사는 근래까지도 일반에 드러나지 않은 부처님 세계였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다. 당시 소설가 황석영 씨가 대표작 『장길산』의 말미에서 운주사를 등장시켰다.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던 노비와 천민들이 관군에 쫓겨 이곳에 왔고, 도선 국사의 계시로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조성한다. 드디어 천 번째 부처님이 조성되고 있는 순간, 멀리서 새벽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새로운 세상 건립은 후세의 몫으로 넘기게 된다.
소설 속 이야기는 운주 마을 사람들 입으로 전해지는 운주사 창건 설화다. 황석영 씨는 소설 집필에 앞서 수차례 운주 마을을 방문했고, 많은 이야기를 채집했다고 한다.
운주사에는 소설 속 이야기처럼 일어서지 못하고 누워 있는 부처님이 계신다. 이 부처님이 일어설 때 그토록 민초들이 염원하던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희망이 있다.
80년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좌절되던 때였다. 민주화를 염원하던 이들도 운주사 와불을 찾아 비통함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한 힘을 얻고서 돌아갔다. 이렇듯 운주사는 예나 지금이나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 잡고 있다.
한 석공이 단숨에 새긴 듯한 천불천탑
운주사는 천불천탑으로 대표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 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고 전하고 있다.

운주사를 폐사지면서도 노천 법당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록에서와 같이 석조불감(보물 제797호)이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석조불감은 그대로가 돌로 이뤄진 법당이다. 남북으로 향하고 있는 두 부처님을 중심으로 사방에 수많은 탑과 불상이 가람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누가, 언제, 왜 운주사를 건립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불교미술 전문가들에 따르면 운주사의 탑과 불상은 신라 말에서 고려 말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조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런데도 운주사 천불천탑은 마치 한 사람의 석공이 단숨에 새긴 듯 그 모양과 수법이 비슷하다.
기록에 따르면 정유재란 이전까지 운주사와 천불천탑이 실재했던 것 같다. 그 후 운주사는 폐사되어 석불과 탑은 마을 사람들이 가져다가 상석이나 주춧돌, 디딤돌, 구유통으로 썼다. 근래에는 문화재가 각광을 받자 전국 각지에서 탑과 불상을 통째로 가져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하루는 송광사에 주석하던 구산 스님이 운주사를 참배하게 되었다. 황폐한 운주사를 둘러본 스님은 운주사 복원을 발원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집 안에 있는 부처님과 탑을 제자리에 돌려놓도록 설득했다. 그 후 전남대에서 네 차례에 걸쳐 발굴 작업이 이뤄졌고, 운주사의 옛 모습이 다시 드러나기 시작했다. 운주사는 이제 송광사 말사로 경내에 탑 18기, 불상 96구가 자리해 있다.
물음도 정답도 없어
운주사의 탑과 불상은 골짜기에 구슬을 뿌려놓은 듯 널려 있다. 마치 경주 남산을 옮겨다 놓은 듯하다. 널따란 바위마당에 탑이 세워져 있고, 절벽마다 아무렇게나 불상이 기대 있다.

어찌 보면 무질서한 듯해도 각각이 오묘한 질서가 담겨 있다. 손이 가는 대로 툭툭 망치질하여 새긴 듯한 불상도 가까이서 바라보면 섬세하기가 이를 데 없다.
운주사의 탑은 신라의 정형탑이기보다 대부분 표현이 자유자재한 이형탑이다. 탑들 가운데 석조불감 북쪽에 자리한 원형다층석탑(보물 제798호)은 마치 기정떡을 올려놓은 듯 형태가 특이하다. 지금도 운주사에서 가까운 사평은 기정떡으로 유명하다. 누룩으로 발효한 기정떡은 여름에도 쉽게 상하지 않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떡이다.
그토록 서민적인 떡이 탑으로 형상화된 것만 보아도 운주사는 귀족적이기보다 서민들의 정서가 담겨 있는 듯하다.
새로 건립된 법당의 뒤편 산등성이에 불사바위가 있다. 바위는 딱 한 사람이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움푹 파여 있다. 이 자리에 앉아서 운주계곡을 바라보면 천불천탑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그래서 도선 국사가 이곳에서 운주사 불사를 지휘했다고 한다.
불사바위에 앉고 보니 참선 자리로 제격이다. 발 아래에 펼쳐진 운주 세계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온갖 시름이 사라지는 듯하다.
운주사 참배는 석조불감 서북쪽 산 능선에 자리한 와불에서 절정을 이룬다. 민중의 못다 이룬 꿈이 서린 곳이다. 훗날 다시 일어나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희망의 산실이기도 하다.
운주사 와불을 뒤로하고 내려오는데 건너편 산등성에 있는 거지탑이 말을 건넨다.
천불천탑을 세우고 남은 돌덩이로 쌓았다 하여 마을 사람들이 거지탑이라 부른다. 이름만큼이나 생김생김은 어설퍼도 천 년 세월과 태풍에도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켰다.
“여기 와서 뭔가 알려고 하지 마. 물음도 정답도 없는 것이여. 내 등에다 그냥 놓고 가. 그렇게 사는 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