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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이 책에서는 종교의 역사가 곧 예언자(豫言者)와 현자(賢者)들이 시작한 운동이거나 그들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였다. 저자의 종교 여행은 현재까지도 살아 있는 종교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복잡한 힌두교로부터 시작한다. 시간의 바퀴로부터 해방을 얻으려고 생을 살면서도 자기 망각에 빠져야 하는 힌두교,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궁전을 나와 걸인처럼 45년 동안 여행한 붓다, 다신교에서 일신교로의 변화를 보여준 아브라함, 개종한 뒤에 예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도가 된 바울, 마지막 예언자 무함마드까지 그들의 이야기다.
저자인 리차드 할러웨이는 뉴욕 유니온 신학교를 나온 뒤 미국, 영국, 스코틀랜드의 여러 교구에서 목사로, 1986년부터 스코틀랜드 성공회 에딘버러 주교로 2000년도까지 활동했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제기되는 복잡한 윤리적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지역공동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었다. TV와 라디오에서는 평론가로, 작가로, 활동하기도 하고 〈더 타임스〉와 〈가디언〉지에 기고도 한다. 베스트셀러가 된 회고록 『알렉산드리아를 떠나며 : 믿음과 회의에 대한 기억』을 비롯하여20여 권의 책을 저술했고 지금은 스코틀랜드에서 살고 있다.
영어 God, 그리스어 theos인 신(神)을 믿는 사람을 유신론자(theist)라고 부르고, 우주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고 우리는 이 우주 안에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믿는 사람을 무신론자(atheist)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 신학(神學)이다. 죽음 이후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물을 수밖에 없는 커다란 질문이아닐 수 없다. 죽으면 끝인가? 아니면 다른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다시 태어난다면 과연 어떤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가 ‘종교’다. 삶을 넘어 다른 실재, 다른 차원의 무엇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을 초자연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자각할 수 있는 세계, 즉 자연 세계 밖이라는 것이다.
신이라고 부르는 초월적 실재에 대한 믿음이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그런 믿음을 촉발한 것은 무엇이고 또 그것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아마 인간은 우리가 사는 세계 너머에 초자연적 어떤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던 때는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의문이 그런 믿음을 촉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동물은 모두 죽는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죽은 이를 그 자리에 버려두지는 않는다. 추적할 수 있는 역사 범위 내에서 보면 인간은 죽은 자를 위해 장례를 치러주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 위해서는 국제표준 달력 혹은 날짜 계산법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은 기원후 6세기 무렵 기독교에 의해 만들어졌다. 종교가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행사하는지 보여주는 예다. 거의 2000년 동안 가톨릭은 세상을 움직이는 강력한 세력 중 하나였다. 전 세계인이 사용하는 달력을 만들 정도로 말이다. 그 종교의 창시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달력 제작에서는 핵심적 사건이었다. 그의 탄생이 기원 원년이 된 때문이다. 예수 탄생 이전에 일어난 사건은 모두 주전(主前), 즉 BC(Betore Christ)라 하고, 이후의 일은 주후(主後), 즉 AD(anno Domin)가 되었다. 요즘 BC는 BCE로, AD는 CE로 대체되었지만 나는 구세대라 그런지 그전의 것을 알고 있고 쓰고 있다.
십자가를 그리스도로, 성조기를 미국으로 알듯이 상징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라면, 공동체의 성스러운 것이라면 훨씬 더 심각해진다. 그런 경우 상징을 모독한다면 살의가 가득한 분노를 촉발할 수도 있다. 죽은 사람을 매장한 상징의 대표적 예는 인류가 만든 가장 멋진 기념물인 이집트 가자의 피라미드다. 그것은 무덤인 동시에 거기 묻힌 주인의 영혼이 불사(不死)로 나아가는 도약대다. 점점 매장 의례는 정교해졌고 어떤 지역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잔인해졌다. 다른 세상에서도 안락함과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부인과 노예들을 함께 매장했다. 초창기 일부 종교들은 일부 사람들의 생명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종교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죽은 영혼이 찾아가는 목적지에 대해서는 추측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는 천당과 지옥을 만들기는 했다.
그들은 자신이 저 세계를 방문했고, 저 세계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저 세계의 말을 들었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주라는 명령을 받았다고도 했다. 그들은 자기가 받은 메시지를 선포했다. 그리고 자기 말을 믿는 사람들을 모아서 가르침에 따라 살기 시작했다. 예언자(prophe) 또는 현자(sage)라고 부르는 그들을 통해 종교가 탄생했다.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추종자에 의해 암송되고, 전해졌으며 종이에 기록되었다. 그것은 소위 신성한 문서로 - 성스러운 기록(성서) - 유일한 책이 되었다. 그것은 그 종교의 가장 중요한 ‘상징물’이 었다.
물리적으로 한 권의 책에 불과하고 여러 사람이 쓴 것이지만, 기록의 역사를 추적할 수도 있으니 그 책을 통해 저 너머, 그들에 의한 세계에서 온 메시지는 세상에 전해졌다. 그 책은 영원과 시간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었다. 인간을 신성한 존재와 연결하였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경외심으로 숭배하고 또 열심히 연구했던 이유다. 그러나 그 책이 조롱당하거나 파괴될 때 분노했던 이유기도 하다. 예언자와 현자들이 환상을 보고 목소리를 들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예언자 중 한 사람이 모세(Moses)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기원전 1300년경에 살았다. 종교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예언자 중 한 사람이고, 유대교 창시자다. 그는 ‘자신의 신’이 이집트 시나이 사막에서 자유를 찾아 노예를 이끌고 ‘약속의 땅’팔레스타인으로 가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했다.
모세가 들었던 그 목소리를 우리는 들을 수 없다. 그것은 신의 정신과 모세의 정신이 직접 소통하여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그것은 다른 실재와의 진정한 만남이었다. 그 사건을 우리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얼마나 쉽게 오해하는지 잘 알기 때문에 신을 만났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의심과 신중함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가진 비판적 능력을 종교적 주장에 적용해야 하고, 그들의 주장을 단순히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신앙적 또는 비판적 신앙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입장이라면 왔다 갔다 하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법은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종교의 역사에 접근할 때 엄격한 연대기적 접근법을 취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 거기에는 다른 사건들이 동시에 다른 곳에서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연대기적으로 때론 지리적으로 역사를 바라본다. 그런 접근 방식은 인류의 시초부터 물어왔던 커다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종교마다 얼마나 다르고 다양했는지를 보여준다. ‘저 너머에 누가 있는가? 죽음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종교 여정의 출발은 종교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여러 면에서 복잡한 힌두교(Hinduism)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겠다.(유대교도 오래됐지만 저자의 생각이다.)
생각해 보면 어느 하나의 일에 다른 일이 따르고 그 연쇄법칙이 묶여 우리가 한 일의 결과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 힌두교는 이것을 ‘카르마(karma)’, 즉 행위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삶이 끊임없이 굴러가는 바퀴에 올라타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인도의 예언자들도 아주 멀리 보면서 사람이 죽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놀라운 답을 찾아냈다.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 사람은 존재하기를 완전히 멈추지 않는다. 죽음 너머에 있는 다른 형태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일 뿐이다. 카르마의 명령에 따라 다른 생명의 형태로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원인에 결과가 따르는 것처럼 영혼은 삼사라를 거치고 최종의 단계인 모크샤에 도달하기까지 무려 800만 번 형태를 바꾼다. 하나의 빗방울이 바다에 떨어져 사라지듯이 존재로부터 해방되어 영원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것이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회전하는 존재의 바퀴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힌두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다. 세계의 많은 종교가 재생(환생), 혹은 부활을 믿었지만 인도의 종교는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카르마(행위 법칙), 모크샤(해방), 삼사라(윤회)등의 언어는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언어는 북쪽에서 온 난폭한 침입자들이 인도에 가져왔고, 힌두교는 그들이 인도에 들어온 기원전 2000년 무렵에 시작되었다.
기원전 2000년 무렵에 인도 북쪽 중앙아시아 스텝 목축지에서 살았던 한 무리가 남쪽 인도로 내려왔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의 동포, 즉 ‘아리안’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빠른 이륜마차를 타는 전투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더스 계곡을 휩쓸고 들어왔으나 거기에는 이미 세련된 문명이 존재했다. 불청객으로 뛰어든 아리안 침입자들은 자신들의 용감함과 에너지를 세련된 문명으로 보완하기 시작했다. 이들 둘을 구분하는 데는 침입자들의 피부가 조금 더 옅었다는 것뿐이었다. 피부색의 차이가 오늘날까지 긴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침입자들이 가져온 것은 피부색만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던 신과 종교문학인 ‘베다(vedas)’를 가져왔다.
베다는 아리아인들이 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기원전 1200년 무렵에 만들었다. 베다는 슈루티, 즉 ‘들은 것’을 말하는 데 과거의 현자들이 들은 것을 반복해서 들려주었고 제자들은 스승이 들려주는 것을 암송했다. 오늘날 베다를 소리 내어 읽는 것이 힌두 경전을 배우는 것으로 여겨지듯이 힌두사원에서는 성서나 쿠란 같은 것은 없다. 의례 안에서 말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 베다다. 지식을 의미하기도 하는 이것은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완성된 의례 우사니파드로 ‘스승 가까이에 앉는다’는 의미지만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특정 인물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몽상가들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들이 말한 것만 전하고 있다. 그것은 4가지 종류가 있는데 베다 가운데 리그베다는 ‘저 멀리 무엇이 있는가’라는 종교적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시작된다. 어둠 속에서 고요히 응시하며 말을 한다기보다 노래하듯이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때는 존재도 비존재도 없었다.
그 너머에는 공기도 없었고, 하늘도 없었다.
그 유일자는 숨도 쉬지 않고, 그러나 그 자체가 숨이 되었다.
그것과 동떨어져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신들은 이 세상이 만들어진 다음에 나타났다.
그렇다면 누가 아는가?
그것이 어디로부터 처음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가 이 최초의 창시자가, 그 모든 것을 만들었는가.
아니면 그것을 만들지 않았는가.
그의 눈, 가장 높은 하늘에서 이 세상을 지배하는
그의 눈은 정말로 아는가 혹은 알지 못하는가.”
신들은 세상이 만들어진 다음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놀랍다. 시간의 바퀴 순환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그들도 왔다 간다 한다. 그러나 몽상가는 모든 변화하는 형상 뒤에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준다. ‘그 유일자’라는 존재가 바로 그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유일자의 대리인인 신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아리안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최고의 신분제도를 실재의 명령에 따른 질서라고 정당화했다. 그리고는 그 제도의 기원을 말하는 경전을 만들었다. 최고의 실재인 브라흐만은 자신의 이름과 혼동되는 창조신인 브라흐마가 세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브라흐마는 최초의 남자 ‘마누’와 최초의 여자 ‘사타루파’를 만들고, 둘 사이에서 인류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종교는 인간을 동등하게 창조하지 않았다. 네 가지 카스트가 만들어져 최상층에 브라민이 있고, 왕과 귀족 전사 계급인 크샤트리아와 장인 계급인 바이샤가 있고, 그 밑에는 노예와 노동자 계급인 수드라를 만들었다. 브라민은 피부색이 옅고, 크샤트라는 붉고, 바이샤는 노란색이고, 수드라는 검다. 그리고도 모자라 변소를 청소하거나 더러운 일을 하는 계급인 ‘만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불가촉천민)’이 있다. 이는 견고하고 확고한 체제였지만 카르마와 삼사라에 대한 믿음이 절망감을 완화시켜 준다. 카르마가 결정해 준 자신의 위치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하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브라흐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들은 수백만에 이르는 신들을 창조했다. 그 신들은 ‘형상 없는 유일자’가 취하는 여러 형상 중 하나였다.
《힌두교》는 시간의 바퀴로부터의 해방을 확실하게 약속한다. 그러나 구원을 얻기까지 필요한, 무한히 계속될 생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심장이 멎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완전히 자기 부정적인 삶을 살기를 선택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에 묶어두려는 신체적 욕구를 억제하고 유일한 진실이라고 하는 유일자 안에 자신을 버리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불교》
브라만교라고 불리기도 하는 힌두교의 복잡하고 다채로운 종교적 진화가 일어나고 1500년이 지났을 무렵 환생의 고리를 의심스럽게 바라본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근본적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영혼의 삼사리를 묶어두는가? 그가 얻은 대답은 새로운 정신적 운동이라야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기원전 580년 무렵 인도 북동부 히말리야 산맥 기슭에서 태어났다. 그는 크샤트라 계급인 왕족이었고,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로 그의 아버지는 슛도다나, 샤카족 왕이었고 어머니는 마야 왕비로 그녀가 쉰 살 때 아들을 싯다르타를 낳고 죽었다. 그는 이모에 의해 길러졌다. (너무 길어서 파일 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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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