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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르페브르의 <현대세계의 일상성>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앙리 르페브르의 <현대세계의 일상성>
마르크시즘에 대한 일상성의 승리
이미지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분석이 이미 60년대에 나왔다는 것이 놀랍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의 60년대가 후진적 가난의 시대였을 뿐 서구 선진국에서는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여 문명에 대한 자신감과 위기감이 싹트기 시작하던 때였다. 소련의 가가린이 역사상 처음으로 우주 비행을 했고, 미국의 아폴로선이 처음으로 달에 착륙했으며, 칼라 TV가 보급되고,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가 운항을 개시했다. 말하자면 우리가 88 올림픽 이후 갑자기 진입하여 경험한 선진국적 분위기가 서구에서는 이미 60년대에 일어났던 것이다.
이념적으로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고, 중국의 문화혁명, 쿠바의 체 게바라, 체코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칠레의 아옌데 정권, 서 유럽의 유로 커뮤니즘, 프랑스의 공동강령 등이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르페브르가 책의 결론 부분에서 조심스럽게 ‘일상성’의 대안으로 문화혁명을 제시한 것은 이런 시대의 소산이며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그의 한계이기도 하다. 『현대세계의 일상성』이 쓰인(1967) 다음 해에 서구 현대사의 흐름을 크게 바꿔 놓은 68년 5월 혁명이 터졌으며, 그 후 70년대 중반까지 중국의 문화혁명에 열광한 젊은이들 사이에 마오이즘의 열풍이 휘몰아쳤었다. 그러나 그것은 반환점이 되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출간과 함께 68세대의 대대적인 사회주의 이탈이 시작되었다.
일상의 비참함과 위대함
축제든 모험이든 모든 비일상적인 것들을 삼켜버리는 일상성의 위대함이 공산주의 역시 하나의 모험으로 돌리면서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 모험은 어디까지나 모험으로 끝나는 것이며, 일상만이 묵묵하게 진행되며 영원한 삶을 살고 있다. 르페브르는 일상의 비참함과 위대함에 주목한 탁월한 혜안의 소유자였다.
일상성은 우선 보잘 것 없다. 지루한 임무, 모욕적인 인간관계, 언제나 반복되는 사물들 혹은 상품들과의 관계, 늘상 해결되지 않는 돈이나 욕구와의 관계 등등. 요컨대 궁핍의 존속이고, 부족함의 연장이며, 박탈, 억압, 채워지지 않는 욕망, 비천한 인생의 반복이다. 이것이 일상성의 비참함이다.
그러나 일상성에는 비참함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온갖 창의성과 기쁨, 쾌락도 들어 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는 것도 지루한 어느 일상적 하루 중에서였고, 위대한 예술작품이 만들어지는 것도 어느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성의 가장 위대한 측면은 그 완강한 지속성이다. 영원히 지속되는 인간의 삶처럼 일상성은 땅에 뿌리박고 영원히 지속된다. 일상에서 탈출하여 여행을 다녀와도, 일상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축제를 벌여도, 그것들이 끝나면 다시 일상성은 집요하게 계속된다. 혁명도 마찬가지이다. 비참한 일상을 끊기 위해 혁명을 해봐도 그것 역시 어느새 다시 제도, 관료주의 등의 딱딱한 일상적 틀 속으로 굳어진다.
이것이 일상성의 위대함이다. 모든 것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무심한 듯 힘없는 듯 완만하게 제 갈 길을 가는 그 완강한 지속성. 데모가 매일같이 반복되던 80년대에 학생들이 던진 돌로 뒤덮인 종로 거리가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깨끗이 청소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이제 혁명은 더 이상 일어 날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일상이 지속되는 사회에서 혁명은 불가능하다.
공산주의를 살리려는 60년대의 온갖 시도들이 다 실패하고 20년 후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도 붕괴했지만 마르크스주의적 소외 이론에 기초를 둔 르페브르의 분석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정통 마르크시즘의 분석틀에서 벗어나 언어학적 모델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의 논지는 오늘날의 사회에 그대로 적용해도 좋을 만큼 현대적이다. 사르트르와 같은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60년대에 주류 학문으로 떠오른 구조 언어학을 흡수하여 사회 분석의 모델로 사용한 탁월한 유연성이 그의 학문적 수명을 21세기까지 연장시킨 셈이다. 현대의 모든 문제가 일상성 속에 들어 있다는 그의 예리한 분석은 현대 사회를 해석하는 일종의 원형이 되어, 앞으로 몇 십년간은 유효할 전망이다.
상호텍스트성
가상이 현실을 압도한다는 시뮬라크르 이론으로 영화 「매트릭스」의 이념적 원천이 된 보드리야르는 앙리 르페브르의 가장 충실한 후계자이다. 그의 『소비의 사회』에는 현대 사회에 대한 탁월한 분석과 시니컬한 문명 비판이 들어 있어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그러나 보드리야르의 책에 감탄하는 독자들은 르페브르의 『현대 세계의 일상성』에서 그 원형을 발견하고 놀란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분리라든가, 사물 속에는 실재와 상상이 함께 들어 있어 이것이 광고의 이데올로기를 가능하게 한다든가, 상품만이 아니라 관광, 문화, 폭력까지도 소비되는 현대 사회의 특징을 유행, 패션, 여성성, 젊은이, 광고, 자동차, 도시문제들을 통해 보여주는 르페브르의 인식이 좀 더 심화되고 확대된 형태로 보드리야르의 책에 나오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소비자에게 보여주는 친절과 미소 뒤에는 냉혹함과 이윤추구, 그리고 폭력성이 감추어져 있다는 보드리야르의 사회적 ‘배려’ 이론(『소비의 사회』제3부 4. 배려의 성사)은 르페브르의 ‘친절하고 이로운 사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냉소적 묘사와 너무나 흡사하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항상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는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무슨 옷을 입고 무슨 가구를 들여놓으며, 어떻게 살 것인지를 말해 준다. 그런 식으로 당신은 프로그래밍 된다. (...) 친절하고 이로운 사회 전체가 당신 곁에 있다. 아주 주의 깊은 모습으로. 사회는 당신에 대해서 생각한다. 아주 친밀하게. 사회는 당신을 위해 특별히 개인적인 물품을 준비하고, 이 개인적인 물품들은 안락의자, 부품조립, 침대시트, 속옷 같은 생활용품의 모습으로 당신의 개인적인 자유에 양도된다. 저것이 아니고 반드시 이것이다. 우리는 사회를 잘 모르고 있었다. 사회란 누구인가? 모든 사람이다. 그것은 어머니요 형제다. 가시적인 현실의 가정(家庭)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훨씬 효율적이고 우수한 이 가정, 즉 보호자적 매력과 세심한 보살핌으로 우리들 각자를 감싸주고 있는 이 소비사회와 두 겹의 한 쌍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불안이 존속할 수 있는가? 이 무슨 배은망덕이란 말인가? (<현대세계의 일상성> 개정판 본문 p.213 )
뜻하지 않게 푸코의 낯익은 주제들을 발견하는 것도 책을 읽는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각자가 스스로를 검열하며 자기 억압을 행하는 사회에 대한 언급은 『광기의 역사』(1961)에서 튜크와 피넬의 최초의 정신병원을 다룬 부분과 비슷하고, 성 담론이 범람하여 마치 비교(秘敎)처럼 에로스의 종교가 온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는 부분은 『성의 역사』제1권「앎에의 의지」(1976)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예술 작품이 되게 하라는 르페브르의 권유는 푸코의 『성의 역사』 제3권 「자기에 대한 배려」(1984)의 중심 주제와 너무나 똑같아 당황할 정도이다. 푸코는 AD 1~2세기 그리스 로마 교양인들이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킬 만큼 자기 수양이나 존재의 품격화에 힘썼다는 것을 보여주며 삶의 예술작품화를 『자기에 대한 배려』의 중심 주제로 삼았다. 그런데 『... 일상성』의 다음 구절은 푸코가 여기서 자신의 주제를 여기서 따오지 않았을까 여겨질 정도로 그의 텍스트와 비슷하다.
정신적으로 ‘작품’이란 예술적 사물이 아니라 자신을 알고, 자신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들의 조건들을 재생산하고, 자신의 자연과 조건들(육체, 욕망, 시간, 공간)을 전유하고, 스스로 자신의 작품이 되는 그러한 행위를 말한다. (본문 p. 355 )
더구나 푸코가 존재의 ‘품격화’(stylisation)라고 할 때의 style이 르페브르가 책 전체에서 강조하는 양식(style)과 같은 단어여서 두 사람의 상호텍스트성이 한층 더 돋보인다.
테크노 사회
르페브르의 '소비조직의 관료사회' va 보드리야르 '소비 사회'
르페브르는 「현 사회를 어떻게 명명해야 할까?」라는 소제목 속에서 산업사회, 대중사회, 풍요로운 사회, 여가사회, 소비사회 등을 검토한 뒤 현대 사회를 ‘소비 조작의 관료 사회’로 명명했다.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소비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소비의 방향이 유도된 채 소비하는 사회라는 뜻이다. 그러나 긴 명칭은 대중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것일까, 그의 명명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보드리야르의 간결한 ‘소비(의) 사회’가 강한 호소력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1970년)가 나온 지도 어언 35년, 현대 사회를 지칭하는 새로운 명칭이 나올 때도 되었다. 소비의 사회이며 동시에 모든 것이 컴퓨터와 관련이 있고, 모든 것이 기계와 연관이 있는 현대 사회는 테크노 사회가 아닐까, 라고 나는 막연히 생각해 본다. 예술도 이제는 팝 아트(pop-art)보다 테크노 아트가 우세하고, 철학도 인간을 ‘욕망하는 기계’로 간주하는 들뢰즈의 철학이 영토를 확장해 가고 있으니 말이다.
테크노 시대의 일상은 기계의 소음 속에서 게임이 주는 짜릿한 흥분과 함께 인간을 더욱 소외시키고 있다. 축제의 복원, 품격의 복원, 결국 따뜻한 인간성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앙리 르페브르의 저술이 시대를 초월하여 생명력을 갖는 참된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2005년 10월 박정자
<현대세계의 일상성> 개정판 서문
책 속으로
우리는 철학에서부터, 철학의 언어에서부터, 그리고 가장 정교한 그 개념들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철학과 비철학적 세계를 대립시키는 사변적 체계화는 피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아무런 개념적 명확성도 없이 극도로 제한된 존재 속에 갇혀서, 눈이 먼 채 손으로 더듬으며 철학자의 소외와 비철학자의 소외를 동시에 극복하려 노력할 것이다. 일상성의 개념은 철학에서부터 나왔고, 또 철학이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이 개념은 철학에 의한, 그리고 철학에 대립된 비철학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사유는 철학의 비판의 과정을 통해서만 이 개념을 고찰할 수 있다. 일상성의 개념은 일상에서 오지 않고, 일상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철학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간주된 일상의 변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고립된 철학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 개념은 비철학적인 것을 숙고하는 철학에서 생겨난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철학이 자기를 지양하는 가운데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완결일 것이다! - 본문 61쪽
출판사 서평
앙리 르페브르는 일상성 속의 광고, 소비, 자동차, 여성 등의 문제를 언어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현대성을 예리하게 비판한 프랑스의 사회학자이다. 1990년에 번역 출간된 그의 역저 『현대세계의 일상성』은 현대성에 관심을 가진 한국의 많은 광고 전문가와 지망생들에게 반성적 성찰을 제공했고, 또 한편으로는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었던 젊은이들에게, 계급투쟁 이론만으로 현대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 주었다.
이 책을 처음 번역했던 박정자 교수(상명대)는 더욱 상세한 용어 설명과 풍부한 이미지 자료를 삽입한 개정판을 출간하여, 일상성에 대한 결코 쉽지 않은 철학적 성찰을 한층 더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었다. 이 책이 처음 프랑스에서 나왔던 해인 1967년으로부터 무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저자가 언급한 현대성과 일상성에 대한 지적은 과거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의 이 시점, 그 어느 나라보다도 정보화가 빠르게 진척된 한국사회에서 깊이 공감하고 이해하고 생각할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개정판 출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상성은 무엇인가?
일상성은 우선 보잘 것 없다. 지루한 임무, 모욕적인 인간관계, 언제나 반복되는 사물들 혹은 상품들과의 관계, 늘상 해결되지 않는 돈이나 욕구와의 관계 등등. 요컨대 궁핍의 존속이고, 부족함의 연장이며, 박탈, 억압, 채워지지 않는 욕망, 비천한 인생의 반복이다. 이것이 일상성의 비참함이다. 그러나 일상성에는 비참함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온갖 창의성과 기쁨, 쾌락도 들어 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것도 지루한 어느 일상적 하루 중에서였고, 위대한 예술작품이 만들어지는 것도 어느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일상성의 가장 위대한 측면은 그 완강한 지속성이다. 영원히 지속되는 인간의 삶처럼 일상성은 땅에 뿌리박고 영원히 지속된다. 일상에서 탈출하여 여행을 다녀와도, 일상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축제를 벌여도, 그것들이 끝나면 다시 일상성은 집요하게 계속된다.
한 가지, 르페브르가 주목한 것은 오늘날 옛날의 귀족계급과 그대로 일치하고 또 귀족의 잔재를 물려받기도 한 상층 부르주아지에게는 일상생활이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 고정된 주거지도 없다. 그들은 돈의 힘으로 호사스럽게 자유로운 유랑생활과 유목생활을 즐긴다. 요트에서 살기도 하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성(城)에서 저 성으로 옮겨 살기도 한다. 그들은 주민의 개념 위에 있다. 이들에게는 더 이상 주거의 개념이 없다. 하지만 보통의 주민들은 일상에 포위당하고 일상 속에 잠겨 흐느적거린다. 그러면서 별다른 의식도 없이 게으른 포만감 속에 편안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뭔지 막연하게 도둑맞은 느낌이다. 그들이 가진 영향력이라고는 그림자처럼 실체 없이 희미한 것이고, 갖고 있는 부(富)라고는 부스러기 같은 미미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손톱만큼의 권력이나 위엄도 없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층 부르주아지에게 봉사하는 중간계급의 구성원들은 소비사회에서 소비자 역시 소비되는 현상을 재촉할 뿐이다. 소비 문제를 통한 계층 분석에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계급 문제를 바라보는 르페브르의 비판의식을 읽을 수 있다.
보드리야르와 조르주 페렉의 스승, 앙리 르페브르
앙리 르페브르는 가상현실(시뮬라크르) 이론으로 영화 「매트릭스」에 이념을 제공하는 등 현대 문화 이론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로 떠오른 장 보드리야르의 스승이다. 보드리야르는 1966년에 『사물의 체계』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지도교수가 앙리 르페브르였다.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현대세계의 일상성』과 겹친다. 한편 Oulipo(잠재문학 공동 작업실)의 일원으로 실험적인 소설을 많이 쓴 조르주 페렉도 르페브르를 사사하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명품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광을 꼼꼼하게 묘사한 소설 『사물들』은 르페브르의 일상성 이론을 그대로 소설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고
이 책에서 앙리 르페브르는 광고가 사람들의 욕구에 정보를 제공해주는 소박한 중개자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문학, 수사학, 미술 등 예전의 예술을 대체하고 있다는 것을 씁쓸하게 확인해 주고 있다. 과연 오늘날의 광고는 단순히 소비자에게 상품을 알리는 매개 수단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감상하는 문화적 소비재가 되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비디오 광고에서 영화적인 줄거리를 즐기고, 신문이나 잡지의 평면 광고를 회화적으로 감상하며, 편지 체의 기업 이미지 광고 혹은 보험회사 광고 카피에서 문학적 감동을 느낀다. 그러나 아무리 예술적 감흥을 주는 문화적 1차 소비재가 되었다 해도 감동적인 문안 밑에는 기업의 이름이 나오고, 회화 작품 같은 이미지 밑에는 조그맣게 기업의 로고가 박혀 있게 마련이다. 결국 그것은 우리에게 상품을 강제하는 교묘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니까 정교한 광고문안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상품의 구매를 강요하는 구체적인 부추김일 뿐이다. 선택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러이러한 상표를 선택하라, 이 기구(가전제품)는 여성을 해방시킨다. 이 에센스는 좀더 당신 곁에 가까이 있다, 등등. TV의 드라마와 뉴스 중간에 끼어드는 명령들은 이 부추김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신은 편안하게 당신 집에 있는데 그 집에는 작은 화면(화면에 의해 전달되는 메시지보다는 화면이 중요하다고 맥루한은 주장한 바 있다)이 있고 누군가가 당신을 사로잡고 있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항상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는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무슨 옷을 입고 무슨 가구를 들여놓으며, 어떻게 살 것인지를 말해준다. 그런 식으로 당신은 프로그래밍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광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기 까지 우리는 수백 건의 광고에 알게 모르게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광고는 모든 것을 결정한다. 현대 사회에서 모든 재화(財貨)는 광고적 후광이 있을 때만 진정한 재화가 된다. 이때 광고란 그것이 문안이건, 이미지건 간에 기호학적 의미에서의 기호이다. 따라서 재화는 기호의 모습을 띠었을 때만 재화가 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대부분의 소비는 재화 없이 단지 재화의 기호만을 목표로 삼기도 한다. 명품을 사는 사람은 단순히 면이나 실크의 원단으로 만들어진 구체적 재화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명품이 주는 사회적 위세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재화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재화의 기호만을 소비하는 셈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인물도 광고적 후광이 있을 때만 유명한 인물이 된다. 연예인의 팬이나 정치적 유권자들은 인물의 실체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그 인물을 장식하는 기호만을 소비한다.
광고는 이렇게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 끊임없이 우리의 실천에 간섭하고 욕망의 한 가운데에 끼어들며 우리 사회의 언어와 문학과 사회적 상상에 침투하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광고의 방법을 모방하는 프로파간다가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근엄한 학문의 전당이었던 대학들도 광고 전선에 뛰어든 지 오래 되었고, 나라의 장래를 결정하는 대통령 선거에서 조차 광고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광고는 상품의 이데올로기이면서 동시에 철학, 도덕, 종교, 미학이 예전에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빼앗았다. 우리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제공하고, 결국 그 자체가 이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광고전문가는 현대사회의 조물주이고, 의기양양하게 욕망의 전략을 짜는 전능의 마술사가 아닌가?’라고 르페브르는 묻는다.
별장, 유행, 요리, 여성, 여성잡지
현대 사회에서는 수많은 물건들이 실제와 상상을 가르는 문턱을 넘고 꿈과 정서를 떠맡는다. 그것들은 비록 구체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소비되더라도 실은 상상적인 혹은 사회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중의 어떤 것들은 우리를 높은 신분에 올라가게 하고, 또 어떤 것들은 이데올로기적 무게를 갖는다. 예컨대 별장은 부동산 소유의 기회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꿈과 이데올로기의 대상이기도 하다. 의상(유행하는 스타일, 값싼 기성복과 고급 기성복)과 요리(보통 요리, 고급 요리, 축제나 잔치의 요리)도 각기 그 나름대로 각 수준의 이미지와 언어적 주석과 함께 꿈과 이데올로기의 대상이다. 글자 그대로 상상은 일상의 한 부분이다. 모든 사람들은 매일같이 상상을 소비하고 있다. 구체적 사물을 소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다.
사회적 상상의 가장 극명한 예시를 우리는 어떤 영화나 공상과학 소설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잡지에서 발견한다. 여성지 속에는 상상과 실재가 중복되어 들어 있다. 독자들은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똑같은 책 속에 사물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있는가 하면, 이 사물들을 꾸미는 멋진 수사(修辭)는 그것들을 상상의 사물로 만들어 버린다. 여성잡지 속에는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모든 옷들이 있고, 가장 간단한 것에서부터 전문적 기술을 요하는 것까지 모든 요리와 상차림이 있으며, 하찮은 기능을 수행하는 가구에서부터 궁전이나 성을 장식하는 가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가구들, 모든 집들, 그리고 모든 아파트들이 있다.
아름다움, 여성성, 유행 등을 떠맡은 여성은 일상성 속에서 주체인 동시에 희생자이며, 구매자이고 소비자이며, 상품인 동시에 상품의 상징(광고에서의 심한 노출과 미소)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은 일상성과 현대성의 가장 전형적인 요소이다.
자동차
르페브르가 현대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동차를 꼽은 것은 매우 흥미롭다. 교통의 기구이고 운행의 도구인 자동차는 그 실용성을 떠나 사회적 존재가 되었다. 정말로 특별한 이 물체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강한 이중성을 가진 강력한 이중 존재이다. 기능적으로 분석하자면 회전과 운행, 방향과 속도의 전환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고, 구조적으로 분석하자면 모터, 차체, 장비 등으로 파악되는 그저 단순한 기계인 자동차는 그러나 단순히 기술적인 물체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수단이고 환경이며, 요구와 강제가 되었다. 즉 그것은 감각의 대상인 동시에 상징이고, 실용적인 물건이면서 동시에 상상의 물건이 되었다.
우선 자동차는 등급을 야기한다. 자동차는 사회적 신분의 상징이고 위엄의 상징이다. 자동차에서는 모든 것이 안락과 힘과 위엄과 속도의 상징이며 꿈이다. 실제 사용에 기호들의 소비가 중첩된다. 그것은 꿈 속으로 들어간다. 소비의 기호들과 기호들의 소비, 행복의 기호들과 기호들에 의한 행복이 서로 한데 얽히고 서로 강화되고 상호 중화된다. 자동차는 역할들을 누적한다. 그것은 일상성의 강제들을 요약한다. 자동차는 중개물 또는 수단에 부여된 사회적 특권을 극단까지 밀고 간다. 동시에 자동차는 일상에 게임과 모험과 의미를 덧붙여 줌으로써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을 압축해 보여준다.
부상자와 사망자 그리고 유혈이 낭자한 도로와 함께 자동차는 일상에 남겨진 모험의 한 잔재이고 감각적인 쾌감이며 일종의 놀이이다. 에로티즘과 모험을 위한 알리바이이며, 주거와 도회적 사교성을 위한 알리바이이다. 자동차는 사람들의 경제적, 심리적, 사회학적 행동을 결정하고, 스스로 총체적 물체가 되기를 원한다. 자동차는 하나의 의미를 지닌다. 자동차는 일상에 자신의 법을 부과하면서 일상을 공고히 만든다. 오늘날 일상성은 크게 보아서 모터의 소음이고 모터의 합리적 사용이며 자동차의 생산 및 분배의 요구라고 르페브르는 잘라 말한다
(레모네이드 블로그)
앙리 르페브르의 "현대세계의 일상성"은 파리에서 1968년에 출판된 이래로, 우리나라에는 2005년 박정자의 번역으로 소개되었다. 68운동이 일어났던 같은 해에 출판이 되어서인지, 포스트모더니즘운동에서 거대담론을 거부하고 미시담론을 주장하는 맥락과 같이하여 그간 철학사에서 소외되었던 ‘일상성’에 대하여 분석한 글이다. 역자는 이에 대하여 “축제든 모험이든 모든 비일상적인 것들을 삼켜버리는 일상성의 위대함이 공산주의 역시 하나의 모험으로 돌리면서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 모험은 어디까지나 모험으로 끝나는 것이며, 일상만이 묵묵하게 진행되며 영원한 삶을 살고 있다. 르페브르는 일상의 비참함과 위대함에 주목한 탁월한 혜안의 소유자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일상성은 우선 보잘 것 없다. 지루한 임무, 모욕적인 인간관계, 언제나 반복되는 사물들 혹은 상품들과의 관계, 늘 해결되지 않는 돈이나 욕구와의 관계 등등. 요컨대 궁핍의 존속이고, 부족함의 연장이며, 박탈, 억압, 채워지지 않는 욕망, 비천한 인생의 반복이다. 이것이 일상성의 비참함이다. 그러나 일상성에는 비참함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온갖 창의성과 기쁨, 쾌락도 들어 있다. 일상성의 가장 위대한 측면은 그 완강한 지속성이다. 영원히 지속되는 인간의 삶처럼 일상성은 땅에 뿌리박고 영원히 지속된다. 일상에서 탈출하여 여행을 다녀와도, 일상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축제를 벌여도, 그것들이 끝나면 다시 일상성은 집요하게 계속된다. 혁명도 마찬가지다. 비참한 일상을 끊기 위해 혁명을 해 봐도 그것 역시 어느새 다시 제도, 관료주의 등의 딱딱한 일상적 틀 속으로 굳어진다. 이것이 일상성의 위대함이다.
하나의 탐구와 몇 개의 발견 제시
저자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관한 언급을 시작으로, 일상성이 문학에 침투하였고, 철학에서도 이것을 더 이상 도외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철학에 비해 일상생활은 비철학적인 것으로 제시되고, 이상에 비해서 현실적인 세계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도를 버리고, 일상을 철학에서부터 출발하여 분석하고 묘사해야 한다. 철학, 철학의 언어, 정교한 개념들에서부터 시작하되, 철학과 비철학적 세계를 대립시키는 사변적 체계화는 피하고 일상성이란 개념의 철학에 대해, 그리고 비철학적인 것을 숙고하는 철학에 대해 논하는 것은 철학이 자기를 지양하는 가운데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완결일 것이다.
일상은 추락의 방향도, 봉쇄나 장애물도 아니며, 다만 하나의 장인 동시에 교대, 하나의 단계이며 도약대, 여러 순간들로 이루어진 한 순간이고, 가능성을 실현시키기 위해 반드시 거기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변증법적 상호작용이다. 비록 철학이 산을 사이에 두고 일상성을 견제해왔지만 이제는 일상생활을 철학의 대상으로 끌어들여서 철학에서 전통적인 대상들을 제거한다. 이 연구는 (비록 40년 전이지만) 우리 시대, 우리 사회 안에 있는 합리와 비합리의 갈등의 장을 보여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넓은 의미에서의 생산의 구체적 문제가 제시되는 장을 결정한다. 곧 희소성에서 풍요로움으로, 귀중한 것에서 가치하락으로 이행해 가는 동안 인간존재의 사회적 실존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는 방법의 문제이다. 이 비판적 분석은 강제, 그리고 편파적 결정론들에 대한 연구가 될 것이다. 결정론을 제압하는 것이 이성의 목적이며 의미인데도, 마치 결정론과 강제가 합리적인 양 통용되고 있는 이 거꾸로 된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
소비조작의 관료사회
소비는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다. 소비는 과거에 의미를 추구하던 어떤 것들을 삼켜버렸고, 사람들은 의미를 청산하거나, 의미의 추구를 우스꽝스럽다고 선언한다. 20세기 후반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는 그 어떤 것도 자신의 분신에 의해서가 아니면, 즉 후광이 되어 주는 광고적 이미지가 추가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 이미지는 물체의 감각적 물질성만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쾌락하고도 중복을 이룬다. 동시에 이 이미지는 욕망과 쾌락을 허구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상상 속에 위치시킨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 다시 말해서 소비자에게 만족을 가려다주는 것은 바로 이 이미지이다.
소비사회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광고는 현대성의 시이자 가장 성공한 공연물의 모티브 혹은 변명이 되었다. 그것은 예술, 문학, 그리고 사용 가능한 시니피앙들과 내용 없는 시니피에들의 총체를 사로잡았다. 광고는 예술과 문학이 되었고, 그 안에서 광고는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을 갖는다. 광고는 상품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예전의 철학·도덕·종교·미학의 자리에 대신 들어섰다. 그렇기에 ‘문화’도 역시 소비품이 된다. 문화생활로 대변되는 이 소비행위는 자유를 자처하고 축제의 모습을 띠지만 일종의 허구적 통일성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결국에는 모든 소비의 대상이 기호가 되듯이 문화도 그렇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회의 주장과 실체를 비교해야 한다. 덧없음을 사랑하고, 탐욕적이며, 생산적임을 자처하고 스스로 동적, 역동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균형을 찬양하고 안정을 존중하며 구조와 일관성을 격찬하는 사회, 항상 단절의 위험을 안고 있는 이 사회는 철학적 실현의 부재로 가득 차 있다.
언어현상
현대사회의 언어현상의 연구는 참조대상의 몰락과 메타언어, 두 개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먼저 사회적 현실로서의 언어는 언어의 내부가 아닌 외부, 참조대상을 사회적 사실에 놓고 파악된다. 백 년 전 사회적 맥락 속에서 말과 담론의 주변에 견고한 지시대상들은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여러 가지 압력(과학·기술·사회변화) 밑에서 지시대상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그러면서 과거에 청각 및 담론의 우위성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던 시각의 의미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표현주의와 입체파로 불리는 미술사조는 기호의 거대한 간섭과 표현에서 의미에로의 이행에 의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일체성을 깨뜨렸다. 감각과 실천 속에는 더 이상 참조대상이 없다. 감각-실천의 양식에 이어 다른 모든 지시대상들, 예컨대 자연·역사·도시 같은 것들도 사라졌고, 철학적 절대성·종교적 도그마·도덕적 명령, 그리고 지시대상의 분석이나 이데올로기 비판도 사라졌다. 생산관계와 생산적 ‘인간’이라는 개념과 이미지도 역시 달라지고 있다.
참조대상으로 남은 것은 고급문화의 수준과 아주 보잘것없고 통속적인 수준이다. 즉 철학과 일상성이다. 철학은 필요하기는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그 앞에 일상성이 있지만 이것을 참조대상으로 삼는 순간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하지만 참조체계에 대한 요구와 그 추억까지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다. 여기서 바로 사회적 관계의 기초로서의 담론만이 끈질기게 남아있다. 기준도, 사실성도, 진정성도, 객관성조차도 남지 않았고, 그 관계들의 토대를 잃어버렸다. 다만 담론이 구조의 환상 속에서 이미지와 뒤섞이므로 참조대상의 부재는 더욱더 큰 비중을 갖는다. 이미지 자체가 참조대상으로 보이고, 이미지와 담론은 서로 상대방을 참조한다. 이미지는, 매우 광범위하지만 항상 불확실하고 다양한 의미작용(시니피앙)의 장을 마련해 준다. 이것을 시니피에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것은 담론뿐이다. 하지만 담론은 이미지를 지주로 삼고 있으나, 이미지 또한 또 하나의 지주를 필요로 한다.
참조대상의 붕괴는 바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분리현상을 일반화시킨다. 상식을 제공해 주는 법규와 참조대상이 없으므로 기호의 두 측면 사이의 연동장치는 확보되지 못한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재연결 또는 조정이 가까스로 이루어지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이다. 하지만 ‘가짜’라는 심연에서부터, 일상의 한가운데에서 가장 좁은 의미의 일상성에서 고독의 외침소리가 들리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끊임없는 소통 속에서, 또 정보의 홍수 속에서 고독의 외침소리가 들려오고, 사실상의 소통은 가능-불가능이 되었고 강박증과 고통이 되었다. 매순간 가능하지만,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므로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참조대상이 없이도 서로 소통할 수 있는가?
메타언어는 담화자가 자신의 준칙의 일부를 발설하는 순간 거기에 존재한다. 메타언어적 기능은 담론에 있어서 규범적이고, 현행적이고, 본질적이다. 담론에 대한 담론이며 두 번째 등급의 담론인 메타언어는 담론 안에서 일어난다. 준칙에 대한 선행적 의사소통이 없다면, 다시 말해 메타언어가 없다면 담론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참조대상이 희미해지면 질수록 메타언어의 중요성이 증가한다. 언어와 담론이 자신을 참조대상으로 자처할 때 메타언어의 지배가 시작된다. 이 메타언어를 전면에 내세워 주장하는 것은 바로 메시지의 개념이다. 현대의 수많은 메시지는 사실 철저한 비판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것으로 사람들의 호의적인 편견, 흥분된 열광, 변호론자들의 표상과 맞닥뜨리게 된다. 거기서 보이는 산업화는 도시화 속에서만 자신의 목적성을 발견할 수 있다. 산업은 그 자체만으로는 수단에 불과하다. 만일 수단이 자신을 목적이라고 주장한다면 합리성은 부조리성이 되고 만다. 사람들은 그러한 실제적, 이론적 방법을 요구하며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을 언어에, 의미 즉 사고에, 활동하는 의식에 가져다주지 못했다. 따라서 메타언어는 언어로 대체되었다. 그 거대한 구멍이 하나 파인 곳에, 기호들이 가득 메워진 것이다.
테러리즘과 일상성
테러리스트 사회는 설득과 강제라는 이중의 수단으로 유지된다. 또한 억압적 사회이며, 더 나아가 악압의 양식, 그 과정, 수단 및 이것들의 토대를 수정하는 과잉억압의 사회이다. 테러리스트 사회에는 폭력이 판을 치고 피가 흐르는 사회를 명명할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공포가 넓게 만연되어 있으며, 폭력이 잠재상태에 머물러 있고, 압력이 모든 방향에서 사회 구성원들에게 가해지고 있을 때 사용된다. 이러한 사회에서 강제적이지만 폭력적이지는 않은 글쓰기, 더 정확히 말해서 글로 쓰인 물건은 테러의 기초가 된다. 글쓰기가 인류의 수많은 획득물의 기초이며 출발점이라는 것은 강조할 필요가 없다. 법과 함께 글쓰기는 관념성의 토대를 이룬다. 재귀성과 함께 그것은 반성과 합리성을 이루고, 결정적이고 한정된 경험과 함께 글쓰기는 축적과 사회적 기억을 허용한다.
하지만 현대적 문맥 속에서는 사회적 텍스트가 스스로를 세속화한다. 사회적 텍스트는 자연의 순환적 시간으로부터, 그리고 자연의 인과율에 예속된 감정과 정서의 내재적 성격인 두려움으로부터, 또는 희소성에서 연유하는 공포로부터 완전히 분리된다. 글은 명령을 간직한 시니피앙으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글은 개인과 그룹들을 사회적 정신적 질서를 투영하는 문맥 속에 집어넣는다. 도시적 산업적 합리성은 마침내 정신적 형태와 사회적 형태라는 이 이중의 변증법적 운동을 파악하도록 해준다. 분리를 극복하면서 우리의 인식은 글쓰기가 어떻게 말과 분리되고, 또 말을 수상한 것으로 만들면서 이 분리를 어떻게 자신의 명령 속에 기입했는지 알게 된다. 동시에 이론은 글이 어떻게 말의 새로운 출발점 또는 도약대가 되어 말의 재도약을 돕는지를 알게 해준다. 말은 이 대상과의 비판적 관계 속에서 자신을 구성하는 ‘주체’에게 하나의 대상을 제공하고, 동시에 글은 주체의 조건이며 장애물이고 이유이며, 또 최고의 물화이다.
이제 글쓰기의 탈신비화를 통해서 우리는, 현대사회의 통합-해체라는 단순한 그림을 걸 수 있다. 자신이 통합되고 또 남들을 통합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집단·‘문화’·제도가 있는 모든 사회 및 집단구성원들의 강박관념이다. 이러한 강박관념은 항상 현전하는 상당한 통합능력을 수반하지도 않고, 또 완전한 통합불능이나 통합부재를 수반하지도 않는다. 우리 사회의 강박관념은 대화·의사소통·참여·통합·결집 등이다. 사람들은 이 주제들에 대해 강박적으로, 또는 현학적으로 말을 많이 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는다. 고독과 의사소통의 부재, 그리고 불만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새로운 것은 수다 속의 고독이고, 지나치게 많은 기호들 속에서의 의사소통의 부재이다.
영구 문화혁명을 향해서
‘문화혁명’은 하나의 개념이다. 개념인 한에서만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적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다. 토대·구조·상부구조 사이의 관계들은 무엇인가? 이론과 실제 사이의 관계는? 이데올로기·인식·행동·전략 사이의 관계는? 이 관계들은 확고한 것인가,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가? 또 구조적인가, 아니면 상황적인가?
이것은 문화에서부터 출발하는 하는 혁명이 아니고, 문화를 위해서 또는 문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혁명은 더더욱 아니다. 문화가 도덕주의·심미주의, 그리고 기술 이데올로기 속에서 단편화되고 산산조각이 나고 해체되는 이때에 문화혁명은 현실 속에서, 또는 사회적 실천 속에서 하나의 문화를 구현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우리의 문화혁명은 문화의 창조를 그 의미와 목표로 삼고 있는데, 이때 문화란 제도가 아니고 생활양식이다. 문화혁명은 우선 철학의 정신 속에서의 철학의 실현으로 정의된다. 문화 그리고 이 말에 연결된 위엄과 환상, 또 문화의 제도화적 성격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철학과 그 이론적·실제적·교육적·생명적·정신적·사회적 중요성을 완전히 복원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작품과 그 의미의 복원은 ‘문화적’인 목적이 아니라 실제적인 목적을 갖는다. 사실 우리의 문화혁명은 단순히 ‘문화적’인 목표만을 가질 수는 없다. 이것은 문화를 실천 쪽으로, 즉 변형된 일상성 쪽으로 유도한다. 혁명은 단순히 국가나 재산관계만 변혁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개조한다. “일상이 작품이 되게 하라! 모든 기술이 일상의 이러한 변모에 기여하게 하라!” 정신적으로 ‘작품’이라는 용어는 더 이상 예술적 물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알고, 자신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의 조건들을 재생산하고, 자신의 자연과 조건들을 전유하고, 스스로 자신의 작품이 되는 그러한 행위를 지칭한다. 이것으로 우리는 일상의 비참함 속에서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다.
현대세계의 일상성 앙리 르페브르 (win24.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