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서 경험한 한국 여권의 위력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최근 아랍에미리트(UAE) 수도 아부다비에 다녀왔다. 필자는 1인 미디어를 운영하고 있는데 1월에 중동의 모습을 유튜브에 소개하기 위해 출장을 떠난 것이다. 우선 총사업비 5000억 달러(약 662조 원) 규모의 초대형 신도시 사업 ‘네옴시티’를 보려고 사우디아라비아 북부 도시인 타부크에 갔다. 그곳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낸 다음 메카로 향했다. 이슬람 신자로서 “사우디까지 왔는데 메카 메디나에 가야 되는 거 아니야? 평생 한 번은 카바 신전을 봐야 하는데”라는 생각으로 국내선 비행기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한국 여권의 위력을 실감했다. 필자는 귀화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 여권을 쓰고 있다. 여권 얘기를 하기 전에 약간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사우디에서는 젊은 왕세자가 정권을 잡은 뒤로 관광업 발전에 힘을 쏟고 있다. 그 일환으로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에 쉽게 비자를 내주는 제도를 마련했다.
한국 여권 소지자인 필자는 약 18만 원을 내고 인터넷으로 아주 간편하게 비자를 받은 뒤 사우디에 갔다. 한데 필자와 달리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성지순례를 하기 위해 40만 원 넘는 비자 비용을 내고 성지순례 비자를 받아야 한다. 인터넷 신청은 아예 불가능하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성지순례를 한국 여권 덕분에 간단하고 저렴하게 하게 됐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특히 카바 신전에 여권으로 쉽게 입장했을 때는 너무 기뻐서 6·25전쟁 당시 목숨 바쳐 싸운 젊은 한국 군인들에게, 경제 발전을 위해 구슬땀을 흘렸던 기업인과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민주화를 위해 힘쓴 학생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사우디 일정을 마무리한 뒤엔 요르단, 팔레스타인, 이스라엘로 향했다. 한데 이스라엘은 다른 중동 국가들과 관계가 안 좋다. 이스라엘에 다녀왔다고 하면 다른 중동 국가들이 입국 시 불이익을 줄까 봐 여권에 도장을 찍지 않고 별도의 종이로 출입국 심사를 진행할 정도다. 많은 중동인들은 이스라엘이 안전을 관리하고 있는 동예루살렘의 알아끄사 사원을 방문하고 싶어 한다. 한데 안보 문제 때문에 방문이 원활하지 않다. 이때 한국 여권이 또 천사처럼 필자를 구해 줬다. 한국 여권 덕분에 요르단과 이스라엘 국경을 비교적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실제 한국 여권 파워는 최상위권이다. 글로벌 금융자문사 아턴캐피털이 지난해 공개한 ‘글로벌 여권 파워 순위’에서 한국은 스웨덴, 핀란드, 독일, 이탈리아 등과 함께 공동 2위에 올랐다. 단독 1위는 UAE였다. 일본이 공동 3위, 싱가포르가 공동 5위였다. 한국 여권이 일본 캐나다는 물론이고 미국 여권보다 더 센 것이다.
한국이 처음부터 강력한 여권 파워를 자랑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 말에는 여권 발급이 상당히 힘들었다. 한국인들의 해외여행이 대중화된 것은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시행된 1989년 이후로, 불과 30여 년 전이다. 한국은 오랜 기간 절치부심 성실하게 달려온 끝에 여러 방면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됐다.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적 기업을 배출했고 문화적으로도 영향력이 상당하며 군사력도 갖췄다. 여기에 더해 외교력도 강해지고, 이를 통해 여권 파워도 세진 것이다.
하지만 국력이 커진 만큼 외교 관계도 복잡해졌다. 유엔에 가입한 193개국과 모두 우방을 맺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양한 국가와 최선의 외교 라인을 짜려면 국민이 최대한 많은 국가에 관심을 갖고 정보와 지식을 체득하는 것이 좋다. 언론에서도 이런 주제를 충분히 다뤄야 한다. 이런 노력들이 모여 건강한 외교 정책의 바탕으로 작용할 것이다.
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의 UAE 국빈 방문이 큰 화제를 모았다. 윤 대통령은 7일간 국가 수장과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두루 만나며 경제외교 성과를 올렸다. 한국 여권 파워는 이런 정부 차원의 노력과 기업, 국민들의 성장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최상위권에 올랐을 것이다. 한국 여권 파워가 더욱 강해지고 계속 유지되기를 기대해 본다.
알파고 시나씨 튀르키예 출신·아시아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