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한 강(康)은 비록 소국이었지만 비옥한 영토와 따뜻한 기후를 가진 천
혜(天惠)의 국가였다.
때문에 강대국들의 강(康)을 차지하려는 음모와 계략은 당연한 것이 었다. 그러므로 자국수
호는 역대황제들이 이뤄내야할 지상과제요 가장 막중한 과업이었다.
그러나 살육과 광란에 마주할 이는 황제(皇帝)가 아니었다. 황제는 강(康)의 유일한 주인이
었고 국부(國父)였으나 높은 권좌(權座)에 앉아 호령할 뿐이었고 피로써 국토國土)를 지켜
낼 이는 갖은 수탈과 멸시와 냉대를 받아야 했던 힘없고 연약한 백성들이었으며 권좌(權座)
의 주위에서 황제께 간(諫)하며 국사(國事)를 논하는 이는 문신들(文臣)이었으나 목숨을 내
걸고 적의 목을 베어 바칠 이는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천대를 한몸에 받는 무신(武臣)이었
다. 기득권자들은 전란이 닥치기 전까지결코 전란은 없을거라며 단언하다가는 전란이 나자
모든 책임을 무신들에게 떠맡기고는 그 죄를 씻기 위해 나아가싸우라며 등을 떠밀었다. 어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으나 그들은 영원한 강(康)의 신하였으며 또한 백성이었다.
지금껏 자신을 짓밟고 모욕했던 그들의 제단에 목숨을 바치며 국경으로 떠난 것이었다. 당연
히 그들의 몫이어야 했을 그 참혹한 전장을 향해. 그 아프도록 차가운 현실을 향해.
군졸(軍卒)들은 물론이요 장군(將軍)들도 두텁게 옷을 껴입었으나 싸늘한 한기(寒氣)는 막
을 수 없었다. 온 몸 가득히 추위는 스몄고 수차례 몸서리치며 몸을 웅크릴 수 밖에는 없었
다. 연원(撚寃)은 씁쓸히 웃었다. 그리도 따뜻하던 강(康)에 이같이 매서운 추위가 있었던
가. 강(康)의 끝자락 국경(國境)이라 그러한가. 푸르던 하늘이 조금씩 검붉게 물들어가고 있
었다. 마치 땅에 가득한 피비린내가 스미기라도 한듯이. 아니 피비린내가 아니라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원(撚寃)은 차마 눈을 찌푸릴 수가 없었다. 자신조차 그 피비린내에 절여지고 있었
기 때문이다. 전사(戰士)임을 각인하듯이 이젠 온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배어나왔다. 운명
(運命)이다. 내 죽음으로 이 전쟁을 마쳐야할 운명. 수없이 되뇌였던 말이었으나 익숙해지
지 않았다. 살고자 하는 강한 본능이, 운명을 거부하며 죽음의 냄새를 밀어내고 있는지도.
저 하늘처럼 나도 핏빛처럼 물들어가는구나.
히이잉하고 말이 하늘을 향해 길게 울었다. 너도 이 주인이 서글프냐하고 픽 웃으며 연원은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전장에서 늘 자신과 함께했던 백마(白馬)였다. 비록 말못
하는 짐승이었으나 영혼마저 스며든 듯 하여 아끼는 말이었다. 말갈기를 쓰다듬던 연원
의 귀에 무슨 소리가 들렸다. 군막(軍幕)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의아함에 말에서 내려 몇걸
음 걸었다. 소리가 조금 가까워졌다. 마치 고향마을에서 신세한탄하듯 두런거리는 소리였다.
보아하니 군졸(軍卒)들이 무기를 손질하며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호기심에 연원은 더 다가
갔다.
“벌써 이 전쟁에 나온지가 몇년이오. 나 나올때 딸년이 태어났다는디, 난 딸자식 얼굴도 못본 아비요.”
“아 누가 안그렇겄소. 전쟁 나온 사람들이 다 똑같제. 난 내 자식이 계집인지 사낸지도 모르오.”
“이만저만 해도 이녀석만 하겄소. 아 야는 젊디젊은 것 아니오. 한창 신혼에 왔을틴디, 부인이 얼마나 그립겄소.”
연원은 씁쓸히 웃다가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번 했다. 이건 뭔가 하고 고개를 돌리던 군
졸들의 눈이 휘둥그레해지더니 넙죽 엎드려서 죽을 죄를 지었다고 난리를 쳐댄다.
연원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군졸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제서야 군졸들의 굳었
던 표정이 풀리며 한시름 놓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연원은 빙그레 웃으며 군졸들 옆에
앉아 자상하게 물었다.
“가족들이 많이 그리우냐.”
엄마에게 혼난 아이처럼 군졸들의 표정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연원은 마치 아이를 어르는
부모처럼 뭐든 다 말해보라는 듯이 자상하게 웃고 있었다. 연원 자신또한 해윤(該奫)과
시예(旦翅叡)가 사무치게 그리운 때문에. 어쩌면 전장이 괴롭고 아픈 이유는 부상때문만이
아니라 두고온 자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이리라.
“…워째 안 그립겄소. 장군님. 시방도 눈에 막 아른거리여라. ”
“그래, 그립겠지. 집을 떠나온지가 벌써 몇년이더냐. 조금만. 조금만 참아라.”
“반드시.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그래서 자랑스럽게 가족에게 돌아갈 것이다. ”
연원은 힘있는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군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기보단 자신에게 말하듯이.
하지만 군졸들의 표정은 아직도 시무룩했다. 연원은 다시 그들을 다독였다.
“그렇겄제라…?”
“날 믿지 못하겠느냐? 서연원(徐撚寃)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마.”
“장군…!”
“허니 그렇게 시무룩하게 앉아있지들 말고. 자자. 일어들나라. ”
돌려보낼 것이다. 반드시. 이 전장을 내 선혈로 물들여 내 피로써 아군의 피를 갚은 후에.
나는 죽어서 적의 칼에 죽은 아군과 나의 칼에 죽은 적과 만나고 너희는 살아 너희의
가족과 재회(再回)할 것이다. 반드시 그리할 것이다. 허리에 찬 칼을 꽉 틀어쥐며 연원
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멀어져가는 군졸들의 그림자를 눈에 박힐듯이 응시하면서.
첫댓글 와.....글솜씨가 정말 화려하시네요^^
무슨 말씀을요 ㅜㅜ;; 코멘 달아주셔서 감사해요ㅎㅎ 앞으로도 많이 읽어주세요 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