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산책길에서
하루 중 저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모를 일이다. 저녁은 곧 쉼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저녁 들판으로 나가, 지는 해를 바라보는 시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장마철이라 구름에 가린 일몰의 모습은 그리 장엄하지는 않아도 구름 사이로 비껴서 비치는 붉은 광휘(光輝)는 세상의 어느 빛에 못지않은 숙연함이 묻어 나온다.
천지창조 6일간에는 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고 그 시간의 순서를 달리 표현하였을까. 유대인은 지금도 하루를 해진 다음에서 그다음 날 해지는 때까지로 정의한다. 이에 대한 창세기 주석서에는, 하루의 시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루가 저물어가고 다음 날이 시작되는 아침까지의 비어있는 시간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생각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루의 모든 시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전체 시간의 부분에만 일하시고 나머지 시간에는 휴식을 취하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매일 찾아오는 아침은 우리의 삶에서 불안했던 밤을 몰아낼 뿐 아니라, 피조물을 향한 창조주의 신실하심과 인자하심의 증거이기도 하다는 설명이 있다. 그러나 이해하기가 어렵다.
간혹 늦은 저녁 산책길에 여의천 얕은 물 속에서 저녁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온몸을 집중하며 어둠 속에서, 먹이를 노리는 왜가리와 백로를 볼 수 있다. 그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따져보면 이 늦은 저녁 먹이를 찾는 동물들이 어디 그들뿐만이 아닐 것이다.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주기도문의 내용이었으니, 피조물의 일상은 피곤한 것이다. 그래서 노자(老子)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자연은 어질지 아니하고 그대로 행할 뿐, 뿌린 대로 거둔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욥기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고 물으셨다. 창조하신 책임을 끝까지 스스로 지신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은 저녁이 되어도 쉬실 시간이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왜가리와 백로의 한 끼 저녁을 위해서는 물고기의 희생이 따라야 한다. 물고기는 무엇을 먹을까. 물속의 작은 벌레와 수초 혹은 부유생물인 플랑크톤일까. 그 부유생물들의 먹이는 무엇일까. 참으로 창조주의 지혜는 무궁하실 것이다. 자연 속의 모든 피조물의 먹이사슬을 선순환으로 인자하게, 질서 있게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거대 짐승(behemoth)도 만드셔서 “모든 들짐승이 뛰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내니라. 그것이 연잎 아래에 갈대 그늘에서나 늪 속에 엎드리니, 연잎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그를 감싸는 도다. 강물이 소용돌이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강물이 쏟아져 그 입으로 들어가도 태연하니, 그것이 눈을 뜨고 있을 때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것의 코를 꿸 수가 있겠느냐?”라고 욥에게 물으셨다. 왜 거대 짐승은 만드셔서 산이 그것을 위해 먹이를 내게 하셨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거대 짐승에 비하면 고라니 새끼의 하루는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동네 앞 계곡 풀숲에 거처를 정한 고라니 새끼는 밤에도 열심히 풀을 뜯고 있다. 왜 그 녀석은 무리에서 이탈하여 혼자서 풀숲에서 외롭게 지나고 있을까.
늦은 저녁 산책길에서 마주친 왜가리의 허기에 지친 모습과 풍요로워진 인간의 과잉 소비 행태가 오버 랩이 되었다. 오늘의 인간은 물 쓰듯 자원을 소비한다. 사실 물 쓰듯 이란 말은 틀린 말이다. 이 나라도 물부족국가이고 지구의 물 저장량이 곧 고갈된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더는 사용할 수 없는 비유이다. 또한, 에너지는 낭비는 어떠한가.
지구환경과 지구온난화 운동으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앨 고어는 그의 저서 《불편한 진실에서》 “지구온난화를 사실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생활방식을 모두 바꿔야 한다”라고 하며, 그 방안으로 에너지 절약형 가전 기구 사용,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 나무 심기, 냉동되지 않은 유기농 식품 먹기, 육류 적게 먹기, 짧은 거리 걸어 다니기 등을 제안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방 수십 개가 딸린 커다란 저택에서 전기료만 수십만 달러씩 내는 초호화판 생활을 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전형적인 ‘강남좌파(limousine liberal)’라고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그가 말한 제안을 실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지구환경을 보호하고 관리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보호한다면서 또 다른 한편에서는 자연을 파괴하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흔히 목격하고 있다. 탄소 중립을 지키기 위해 산과 들 곳곳에 세우고 있는 풍력과 태양광 발전이 바로 그러하다. 그 시설을 만들기 위해 이산화탄소의 흡수원인 산림을 파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산림파괴는 그곳에 서식하고 공존하는 많은 야생동물과 식물들을 사라지게 한다. 결국, 인간은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으로 지구를 망치고 있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 같다.
마이클 셀린 버거(Michael Shellenberger)는 그의 저서 《종말은 오지 않는다(Apocalypse Never)》에서 종말론적 환경주의가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기후 종말은 없으며 자연은 회복되고 인간은 적응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종말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지난 30여 년간 온실가스 배출이 줄어든 원인은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에서 가장 경제 규모가 큰 국가에서 석탄 대신 천연가스와 원자력으로 에너지 전환을 이룬 덕분이라고 했다. 즉 기술의 힘으로 기후변화를 막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이런 경험이 주는 교훈에는 낯설게 대할까.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 우주의 주인이신 창조주께서 천지(天地)를 불인(不仁)의 상태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분은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라는 욥의 말뿐 아니라, 눈과 폭풍우, 홍수, 얼음, 별자리, 하늘의 궤도, 번개, 구름, 티끌 등 모든 자연과 자연현상을 만드시고 사랑과 공의로 경영하시는 그분의 섭리에 우리는 그저 놀랄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생활 속에서 에너지를 비롯한 모든 일상의 자원을 아낄 뿐 아니라, 청정한 환경을 유지할 수 있도록 숲과 강을 가꾸어 그 안에 서식하는 생명의 다양성을 보호하는 일일 것이다.
욥기를 읽으며, 인간이 지구 기후를 변화시키는 결과로 지구 종말이 온다는 기후 위기론자들의 주장이 어쩌면 창조주와 자연의 섭리에 대한 무지함이거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만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