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0일(주님 세례 축일) 이사 42,1-4.6-7; 루카 3,15-16.21-22
하느님, 민원 넣으려구요
예수님은 일찍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이 행하던 회개의 세례 운동에 예수님이 가담하셨던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들은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이 복음 선포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세례 운동을 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에게 세례를 준 요한이 예수님보다 더 큰 인물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복음서를 집필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을 숨기지 않고 보도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요한에게 가지 않고, 세례를 받은 예수님에게 가도록 장치를 하였습니다. 그 장치의 하나가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요한의 고백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말은 성령이 불혀 모양으로 제자들에게 내려왔다고 말하는 사도행전의 성령강림 장면을 상기시킵니다.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같은 저자가 집필하였습니다.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는 말은 예수님에 비하면, 요한은 종도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세례 사실은 알리되, 요한은 예수님의 출현을 예고한 인물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기도하고 계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태로 그분 위에 내리셨다.’고 말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시는 것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새로운 창조를 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새롭게 창조된 인간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고 말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말씀은 시편(2,7)의 메시아에 대한 말과 이사야서(42,1)의 “하느님 마음에 드는 종”이라는 말을 합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인데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하느님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반영된 말입니다.
| | | ▲ '예수의 세례', 후세페 데 리베라.(1643) |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인이 받는 세례를 죽음과 관련짓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오실 때, 그분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는 제자들에게 “당신들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마르 10,38)라고 예수님이 반문하셨다고 합니다. 여기 “내가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누구나 다 그분의 죽음과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았다.”(로마 6,3)고 해설합니다. 초기 신앙공동체가 세례를 죽음과 관련지어 생각한 것은 세례로 시작된 예수님의 활동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으신 결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말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대하였듯이, 이스라엘의 국권을 회복하고, 현세적 번영을 주는 인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여 준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의 모습은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하는 일입니다. 세례는 내어주고 쏟는 그 삶을 시작하는 성사입니다.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 되는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삽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배워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재물은 이 세상에서 나의 삶을 편하게 해줍니다. 권력은 나를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해 줍니다. 나 한 사람 편하고, 나 한 사람 행세하며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재물과 권력은 나를 중심으로 한 세상에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은 나 한 사람의 안일과 출세를 보장하기 위해 사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하느님이 아닙니다. 성전은 우리의 뜻을 이루어 주는 민원실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 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삽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마태 6,24) 하느님과 현세적 부귀영화를 동시에 얻으려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현세적인 것을 잃는 것이 죽음입니다. 잃고 또 잃으면, 자기 목숨마저 잃습니다. 사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스스로를 잃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고 키우는 부모는 부모로 살기 위해 많은 것을 잃습니다. 살신성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재물과 지위와 권력을 자기 인생의 최대 보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비는 사람은 이웃을 형제자매로 생각합니다. 재물만을 좇는 사람은 자기의 자유가 재물만을 위한 것이라 착각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그 자유의 기준입니다.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아끼고 보살피면,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우리의 자유가 지닌 본연의 뜻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 신앙으로 입문하게 하는 성사입니다. 우리의 삶을 바꾸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사는 자유를 누리겠다고 약속하는 성사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허례허식을 끊어 버리고, 하느님의 자유를 좇아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이 세상의 물질과 부귀영화를 자기 삶의 유일한 보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례는 그런 것을 최대의 보람으로 생각하였던 자기의 과거가 죽는 성사입니다. 자비롭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 새롭게 살겠다고 약속하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선거 때가 되면, 각 후보들이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들을 봅니다. 자기 한 사람 뽑아 달라고 남을 비방하고 흑색선전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입으로는 백성을 섬기겠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가 표를 많이 얻어, 자기 한 사람이 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면 모두 쉽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이웃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의 말에 귀 기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가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자,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고 말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우리가 받은 세례도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또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되도록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세례에서 약속한 대로 하느님의 자녀 되어 내어 주고 쏟음을 살려고 노력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신부님
지금 나를 사랑하기
사람은 같이 어울려 사는 데 익숙한 나머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나 사랑은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자기 소외 현상과 더불어 어김없이 나타나는 건, 나와 함께 있는 이들, 특별히 잘나 보이거나 잘났다고 일컬어지는 이에게 기대는 버릇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개 정치인들에 대한 민중의 처연한 태도에서도 강하게 작동한다. 정치인들에 대한 기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크다. 다만, 그 기대가 정치인들의 능력이나 자질에서가 아니라, 민중의 ‘게으른(?)’ 무관심에서 기인할 때가 많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정치를 제대로 보고자 하는 노력은 상당한 힘을 필요로 한다. 제대로 보기 위해선 주위에 일어나는 일과 그 인과관계 등, 챙겨 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적, 사회적 주체로서 자신을 잃어버린 이들이 가지는 정치인들에 대한 기대는 자기 자신과 그 삶에 대한 게으르고 허황된 욕망의 투사일 뿐이다. 요한에 대한 민중의 기대 역시 그러했다. 요한이 살아갔던 시대는 메시아에 대한 바람이 민중 개개인의 좌절과 포기를 기반으로 한 영웅주의에 기대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식민주의를 살던 민중은 메시아가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은 애당초 없었다. 그가 누구든 메시아라면 지금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내 주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민중은 그들의 현실 삶을 너무나 싫어해서 역설적이게도 너무나 그 현실 삶에 붙들려 있었고 그로 인해 참된 메시아는 볼 수도, 보려 하지도 않았다. 너무 심하게 갈구하면 그것에 파묻혀, 새롭게 다가오는 대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편견에 빠지니까.... 민중은 메시아를 기다리지만 메시아는 소외되었다.
| | |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
요한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했다. 자신이 소거된 자리에 새로운 기대를 불러일으킬 메시아를 불러오는데, 그가 예수다. 요한이 예수를 소개하는 방식은 철저한 자기 낮춤이다. 예수의 신발 끈조차 풀어 내지 못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격하시키는 것은 예수와의 관계 안에서 종보다 못한 자리를 굳이 차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예수 시대 랍비들은 그들의 제자들에게 주인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한다. 마치 종이 주인을 대하듯 랍비들의 제자들은 스승을 모셨다. 그런데 신발 끈을 푸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종이라도 주인의 신발 끈을 풀어 주진 않았다. 그건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요한이 예수의 신발 끈조차 풀지 못한다 한 것은 종보다 더 낮은 자리, 모든 것을 내어 놓고 버릴 수 있는 자리를 택했다는 철저한 자기 낮춤이다. 메시아 예수는 요한의 ‘자기 낮춤’을 발판 삼아 근엄한 도인이나 현인처럼 등장하지 않았다. 예수의 등장은 기대에 찬 민중의 바람과는 전혀 달랐다. 예수는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오히려 죄인들이나 받는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으로 등장한다. 요컨대, 메시아 예수는 종보다 낮은 자리를 스스로 선택한 요한보다 더 낮춘 모습, 곧 ‘죄인’ 예수로 등장한다. 신약성경 곳곳에 예수는 죄 없는 이로 소개되는데(2코린 5,21; 히브 4,15; 7,26; 1베드 2,22; 1요한 3,5 참조), 죄 없는 이가 죄인이 된다는 사실은 하나의 ‘자기 부정’이다. 더 큰 능력을 지닌 채, 자신 아닌 모습으로 처연히 내려앉을 수 있다는 것은 희생이란 말로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이것은 죽음처럼 지독히 힘든 일이어서 사실상 죽음에 가까운 것이다. 예수는 실제로 죽어 갈 것이다. 그 죽음이 이 세상의 죄인들의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게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 세례 사건의 핵심이다.(로마 6,4; 콜로 2,12 참조) 예수는 하느님이되,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 그래서, 기다려지는 메시아가 아니라 이미, 여기에 사람으로 하나된 메시아로 등장하는 것, 이것이 예수 세례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바다. 기다림엔 새로움이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현실 삶을 받아 내는, 그것으로 지금 내가, 우리가 처한 삶과 시대를 제대로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메시아 예수는 자신의 세례로 증거한다. 예수의 세례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며,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이 땅과 저 하늘을 하나로 묶어 낸다.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묘사되는 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인데, 그 묘사의 끝이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유일하다. 죄인의 모습으로, 완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온 예수만 하늘과 땅을 하나로 엮어 내는 유일한 사랑의 시작이요 마침이다.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도래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죽음으로 빚은 사랑의 결실이다. 세상 권력 속에 위엄을 갖춘 임금으로서가 아니라,(시편2 참조) 어디 내놔도 보잘것없을 만큼 초라한 메시아, 죄인 예수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하느님이 기특해 마지않는 메시아의 본모습이다.(이사 42,1 참조)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 경쟁 속에 허덕이는 삶에 지칠 대로 지친 것 같다. ‘더, 더 더’ 좋은 것, 멋진 것, 대단한 것에 ‘환장’한 환우들이 우리 곁에 상존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세상 뒤집어엎을 영웅이 아니라, 세상 속에 스스로에 대한, 우리에 대한 질문을 차분히 던져 볼 여유와 시간이다. 우린 영웅 옆에 기생하려고 이 세상에 사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 삶 안에 메시아를 만나 뵈려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 삶이 어떤지, 스스로를 죽여 가며 오시는 메시아가 머물 만한지 먼저 되돌아보는 게 신앙인이 가질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성당에서 묵주 들고 세상의 각박함을 잊고자 하는 이에게 메시아는 도대체 소용이 있을까.... 예수를 받아들이는 건, 지금 현실을 살아 내는 것으로 족하다. 있지도 않을 유토피아에서 예수를 기다리는 허황된 꿈일랑 벗어 던져 보는 것, 그거면 족하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생활 속의 복음]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군요! 주님 세례 축일(루카 3,15-16. 21-22)
1. 예수님이 받은 세례는 어떤 세례입니까?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다 보내고 성인이 되셔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은 먼저 고향 사람들과 함께 요르단 강으로 가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셔서 하느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로마제국 황제의 통치를 받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치욕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 원인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기에, 요르단 강에 와서 세례 예식을 하면서 민족 전체가 회개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시지만, 자신이 속한 이스라엘 민족의 일이기에 기꺼이 동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세례자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을 정도로 겸손한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식민 통치를 받는 동족의 여러 가지 고통을 같이 아파하시고 그들의 행동에 동참하시던 분이 분명합니다.
2. 예수님의 자세와 기도
오늘도 교회는 온 백성 가운데서 겸손하게 자리매김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온 백성이 겪는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문제 해결을 위해 그들과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 나서기를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동족은 어떤 고통을 겪으면서 살고 있는가? 오늘 지구촌의 이웃 사람들은 어떻게 파괴되고 소외되고 있는가?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하고 있는가? 어느 나라에서든지 젊은이들은 절망하면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풍요한 시대에 부모들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아무 대책도 없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방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요한 환경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사이에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기도를 열심히 하십니다. 우리도 사람들이 곤란을 겪는 일상 삶의 한가운데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을 배워야 하겠군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자는 회개 운동을 하고 있는 현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시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3. 그때 내리신 비둘기 모양의 성령
그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 위에 내리셨습니다. 비둘기라고 하니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사건이 생각납니다. 타락한 인류가 벌을 받지만, 하느님께서 노아와 가족들을 홍수에서 구출하십니다. 그 결정적인 때에, 비둘기가 싱싱한 올리브 잎을 물고 노아에게 돌아온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비둘기의 형체로 예수님 위에 내리셨음은 모든 인간에게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표시가 아닌가요?
예수님께서 전도를 시작하실 때 ‘주님의 영이 내리셨습니다’(루카 4,18). 사도행전 2장에서 보듯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불꽃과 같은 혀 모양을 한 성령강림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백성에게 이렇게 당신 모습을 드러내실 때부터 성령께서 예수님 위에 내려오시더니 이제는 우리 모두 위에 내려오십니다. 예수님과 하나되는 세례성사를 받은 우리가 주님의 소집에 응답하여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심으로써 가능하게 된 일입니다.
4.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느님 아드님이라는 사실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확인되고 있습니다. 덕분에 우리도 하느님 자녀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이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4-6).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은 이런 분입니다.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겸손하여 큰소리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분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1-3). -주수욱 베드로 신부님
2016년 다해 주님 세례 축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오늘 김수환 추기경님과 최월갑이란 한 사형수의 이야기로 먼저 시작할까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가톨릭시보사 사장을 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최월갑이란 사형수는 살인강도죄를 짓고 사형선고를 받은 젊은 사형수였습니다. 그는 개신교 신자였는데 천주교로 개종하고 싶다고 해서 추기경님이 (물론 그 때는 추기경님이 아니셨지만) 미사도 드려주고 수녀님께 부탁하여 교리도 받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기 직전에 사형대에 서야 했습니다. 그 래서 추기경님은 그에게 급하게 조건부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형수는 매우 평화로웠고 오히려 밝은 햇살을 맞으러 나갈 추기경님이 울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는 천주교 묘지에 묻히게 해 달라는 유언과 함께 사형대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잠시 후 ‘쿵’하는 소리가 났고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해졌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간수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 추기경님 옆에 있던 소장에게 뛰어왔습니다.
“소장님, 월갑이, 월갑이가...”
“왜 그래. 무슨 일인가?”
“월갑이가 저 밑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어요.”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야. 죽은 사람이 웃고 있다니?”
추기경님과 소장이 현장에 가 보니 그는 정말로 밧줄을 목에 걸고 편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나무로 된 낡은 교수대가 그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져 아래로 함께 떨어진 것입니다.
소장은 즉시 ‘사형집행 계속’ 명령을 내렸습니다. 추기경님은 두 번씩이나 교수대에 서야하는 상황이 애처로워 어쩔 줄 몰라 그의 손만 꼭 잡고 있었습니다. 간수들이 사형대를 고치는 것을 태연스레 보고 있던 그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전 괜찮습니다. 지금 죽는 것이 제게는 가장 복된 죽음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믿음이 있으면 제 말을 이해하실 거예요.”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제가 반시간쯤 후면 천당에 가 있겠네요.”라며 추기경님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편안하게 떠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는 하느님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죽이고 하느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나는 신비’를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주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죄가 없는 예수님까지도 죽음과 새로 태어남의 신비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세례의 전형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사건입니다. 또한 여호수아(사실상 ‘예수’와 같은 이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도 세례의 예표입니다.
세례란 이와 같이 강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갈라진 바다 사이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뒤를 쫓던 이집트 군인들은 자신 안에 있는 ‘악’ 혹은 ‘나쁜 경향들’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죄의 종살이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로 태어나고 죄의 경향들은 바다 속에 묻히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세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그들에겐 나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쁜 경향들은 이미 홍해 사건과 사십년 동안 사막을 걸어오면서 모두 죽었고 이미 새로 태어난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완전한 인간일지라도 하느님 앞에서 낮아지고 자신을 비우는 모습은 ‘사랑의 본질’이기에 꼭 죄나 회개할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 안에서 항상 새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셨지만 아버지 앞에서 자신을 죽이시고 온전히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따라서 죄 사함을 받을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랑’한다면 ‘세례’를 통한 새로 태어남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번만이 아니라 ‘내가 받을 세례가 따로 있다.’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죽이고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의 의미를 알았다면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뜻을 죽이시고 아버지의 뜻을 따름으로서 돌아가셨지만 다시 부활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물은 이렇게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죽이는 우리의 작업을 의미하고 ‘회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예수님께도 성령님이 내려오시면서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례는 이렇게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즉, 세례를 받는 입장에서는 자신을 죽이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고, 하느님의 입장에서는 당신이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시며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한 수녀님께 세례에 대해 말씀해 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수녀원에 들어와서 못난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해 주심을 느꼈어요. 그래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죠. 이것이 세례 같아요.”
그렇습니다. 세례는 한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새로 태어남입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났다는 증거는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구나!’를 느꼈다면 자신도 모르게 그 순간에 또 한 번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한 사제에게도 세례에 대해 말해 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고해성사를 볼 때 세례를 다시 받는 것 같아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새로 태어남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고해하는 작업은 홍해를 건너는 일과 같습니다. 나쁜 것들을 바다에 남겨놓고 주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용서해주시고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시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끼면 그것도 역시 작은 세례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저도 신학교 들어갔을 때 교만하여 주님께서 불러주신 것에 대해 만족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틀 정도를 굶고 나서 성체를 영하는데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틀을 굶어보니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보잘 것 없는 나를 불러주신 것에 대해 한 없이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세례 같았습니다.
세례는 결국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 행복에 위의 사형수처럼 죽음 앞에서도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죽음도 이길 수 없는 힘을 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 일상에서도 이런 끊임없는 새로 태어남이 없다면 삶을 살아갈 힘을 얻기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낀다면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그 사랑의 에너지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낮추는 이들에게 이 무한한 사랑을 느끼게 해 주십니다. 그런 힘을 얻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자주 자신을 돌아보며 ‘안 좋은 경향들을 죽여 가는 작업(회개)’일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 어쩌나] 326. 중년의 로망? | |
문: 중년기에 접어든 신자입니다. 이제 나이가 오십이 넘어서 주위에서는 초로에 접어들었다고 놀림을 받기도 하는데 왠지 제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아직도 가슴 설레는 일들이 잦아서 제 마음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들을 묻어버려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혹스럽습니다. 제 마음을 어떻게 해야 중년기를 잘 지낼 수 있을까요?
답: 인생에서 중년기는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자식들에 대한 책임감, 연로하신 부모님에 대한 효심으로 사는 시기이지요. 많은 중년의 가장들은 자기는 밥을 굶어도 가족들은 절대로 굶기지 않겠다는 책임감으로 온갖 모욕을 감수하면서 생계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놓는 헌신성을 보입니다. 중년기의 이런 마음가짐이 가정과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참으면서 가장 역할을 하다 보니 중년기 사람들은 아무 감정도 못 느끼는 듯이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중년기의 감정에 대하여 공감조차 하지 못하고 중년의 부모가 감정 표현을 하면 거부감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년기도 감정의 파고를 맞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항구가 가까워져도 파도를 맞아야 하듯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감정이란 파도를 맞지 않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년기에도 여러 가지 감정들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시는 것이 좋습니다. 때로는 다루기 힘든 감정에 쩔쩔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감정이라도 절대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나이에 남 부끄럽게 이게 뭐란 말인가’ 하고 자기 감정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고 하지 말고 친한 친구에게 자기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감정이든 좀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자원이라 여기고 에너지의 원천으로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자신의 현재 자신의 운명 안에서 발생하는 자기 감정에 진실하게 다가갈 때, 피하지 않고 맞닥뜨릴 때 역설적으로 보람과 자신감, 행복감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노래 가사에서 말하듯이 어떤 감정이든 아파서 못 견디겠다면, 죽을 만큼 괴롭다면 그것은 그만큼 자신이 싱싱하게,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방증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만이 아파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통과의례를 거친 사람, 감정의 파도를 견뎌낸 사람만이 진짜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으로 행복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아는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요셉 성인을 ‘주님의 양부’라고 칭송합니다. 그런데 그런 요셉 성인이 무슨 말을 하셨는지,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셨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야 신앙인의 관점에서 성인이시라고 존경을 드리지만, 요셉 성인의 개인적인 삶이 정말 행복하였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자기 감정을 한 번도 표현하지 못한 요셉 성인의 삶이 과연 인간적 관점에서 행복하였을까 하는 의문들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모범생들이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기보다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범생들은 윤리적 규범을 철저하게 지키고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순응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렇게 이성을 따라서만 살다 보면 우리 마음 안의 감성적 부분이 억압되거나 퇴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성만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을 활기차게 생동감 있게 살려면 감성이 살아야 합니다. 이성만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은 심리적 후유증을 앓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 안의 감성을 질식시키는 바람에 생기는 부작용들입니다. 그래서 영성심리에서는 감성을 살리기 위한 작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30% 정도는 하고 싶은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심리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홍성남 마태오 신부님(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상담전화: 02-727-2516)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50>
신앙과 이성과 과학의 대화
교회는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 여러 분야와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교황은 이와 같은 대화 중, 두 번째로 신앙과 과학의 대화를 언급하였다.
배타적 사상의 위험성
과학은 이성의 산물이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과 신앙이 양립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는 편견이 깔려 있다. 신앙은 과학적 기초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 주장이 옳은가? 그들 중 대부분은 ‘실증주의’와 ‘과학주의’라는 이데올로기(Ideologia)를 들고 나온다. 오직 실증 가능한 학문만, 오직 과학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교황은 이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며 차분히 자기 생각을 설명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배타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교황은 이와 같은 사상을 경계한다. 오직 그것만을 신뢰하는 것은 치명적 오류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것만을 신뢰하고, 다른 것은 배척하는 것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틀리기도 하다. 아직 검증되지 않았으나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실증과학의 영역도 끊임없이 확대되고 있다. 제한된 시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실제로 모든 것을 경험할 수도 없다. 따라서 다른 형태의 지식의 타당성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교황은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학문의 성과를 존중하면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태도를 요구했다. “경험 과학의 방법론들을 책임감 있게 사용하면서, 이를 신앙뿐만 아니라 철학이나 신학과 같은 다른 학문과 종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242항).
교황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신앙’과 ‘이성’의 관계 정립부터 시작했다. 이성적인 것은 신앙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다른 것이라는 인식을 불식시켰다. 신앙은 이성과 분리된 초월적인 것에만 관심을 둔 어떤 것이 아니다. 이성의 빛과 신앙의 빛은 둘 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에, 둘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있을 수 없다. “신앙은 이성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신앙은 이성을 추구하고 신뢰합니다” (242항).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교황이 주장한 권고문의 내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 아우구스티노(354~430)의 태도가 필요하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모든 내용을 다 파악하고 나서 믿겠다고 하는 태도보다는 그 모두를 이해하기 위해서 일단 믿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습니다”(Credo ut Intelligam).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하여 그분을 탐구하십시오. 그분을 항상 탐구하기 위하여 하느님을 발견하십시오.”
중세 시대의 성 안셀모(1033~1109)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 신앙을 설명하면서 “이해(깨달음)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을 말씀하셨다. 신앙은 늘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 신앙인은 계시 진리의 내용을 믿으면서 끊임없이 그 의미를 탐구하는 사람들이다.” 교황은 권고문에서 신앙의 참된 가치를 이렇게 표현했다. “신앙은 인간 존재를 자연과 인간 지성을 초월하는 신비에 이르도록 드높여 줍니다”(232항).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과학의 놀라운 진보를 막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교회는 하느님께서 인간 정신에 주신 크나큰 잠재력을 깨닫게 되어 기쁘고 또 즐거워합니다”(243항). 교회는 과학의 진보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신앙과 자연의 빛으로 과학의 새로운 진보를 해석하며 기뻐한다. 그리고 과학의 진보가 인간 삶의 모든 단계에 있어서 참된 가치를 찾도록 도움을 준다. 언제나 그 중심에는 인간이 존재해야 하고 생명과 구원의 최고 가치가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이렇게 과학과 대화할 때, 사회 전체는 사상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이성의 가능성을 확장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홍기선 히지노 신부님
교황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24> 25.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④국가 및 지역 차원의 새로운 정책들을 위한 대화- 정치, 할수 있는 일이 정말 많은데
“일부 지역에서는 재생 가능 에너지 자원을 이용하기 위하여 협동조합들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단순한 이 사례는 기존의 세계 질서가 그 책임을 떠맡는 데 무력한 반면에, 지역의 개인들과 시민 사회들은 실질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179항).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공동 가정인 ‘통합의 생태’를 보호하고, 그때까지라도 우리가 초래한 거센 ‘자멸의 소용돌이’(163항)라 할 만한 생태의 재앙 문제(인간과 사회와 자연의 위기 및 지구촌 차원의 불평등 심화)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그 일은 ‘급박하고 절실하며 광대한’ 도전이다(15항 참조). 그 때문에 반드시 국제 공동체 차원의 접근이 요구된다.
이에 교종은 국제 관계의 윤리(51항 참조) 회복, 국제 질서에서의 공동 및 차등의 책임(170항)과 우주적 연대에 뿌리를 둔 각국의 윤리적 결정(172항), 구속력 있는 국제 협정들(173항)과 보다 더 효율적으로 조직된 강력한 국제 기구들과 세계 공권력의 확립(175항)을 모색하는 ‘대화’를 긴급하게 호소한다(제5장 I ‘환경에 관한 국제 공동체의 대화’).
그렇다고 해서 국제 공동체의 실효적인 대응책이 마련될 때까지 모두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는 국제 공동체의 효과적인 대응이 실망스러울뿐더러,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 각 나라와 지역 차원에서 짊어져야 할 ‘공동 및 차등의 책임’이 엄연히 존재하며, “할 수 있는 일이 정말로 많기 때문이다”(180항).
회칙은 국가의 책임과 임무로 자국 내의 ‘계획 수립과 조정과 감독과 집행’을 꼽는다. 인간이 자기 능력들을 오용할 가능성이 실제로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국가가 그 임무를 수행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권위’다. 국가의 권위는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특정한 소수의 폐쇄적 지배 집단의 위력에서 생기는 것도 다수의 합의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 권위는 ‘도덕적’이어야 한다. 회칙은 국가 권위의 도덕성을 참된 ‘법치’에서, 그리고 동시에 현재와 미래의 건전하고 성숙하며 위엄이 있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공동선’에서 찾는다(177항 참조). 가톨릭 사회교리는 정치 행위가 ‘인간 존엄’과 ‘인권’을 보호함으로써 공동체의 ‘공동선’을 증진할 수 있기 때문에 ‘차원 높은 애덕의 행위’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흔히 ‘근시안적인 권력의 정치’와 ‘선거의 이해 관계’에 몰두하는 정치는 즉각적인 결과물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대중을 화나게 하는, 소비 수준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거나 외국인 투자에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그런 조처를 꺼린다.” 그곳에서는 “어려운 시기에, 고상한 원리들을 유지하고 장기간의 공동선을 생각하는 참된 치국을” 기대하기 어렵다(178항). 정치 공동체(국가)의 참된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근시안적인 권력의 정치만이 아니다. ‘정치적 부패’도 빼놓을 수 없다. 정치적 부패는 “민주주의 제도의 가장 심각한 결함 가운데 하나”로서 “도덕 원칙과 사회 정의 규범을 한꺼번에 짓밟는다”(「간추린 사회교리」411항).
교종은 다음과 같이 시민 사회가 정치 권력을 압박하고 단속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때때로 부패로 인하여 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정부들(정치인들)이 결정적인 정치 행동을 취하도록 하려면 대중이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사회는 반드시, 비정부 기구들과 중간 그룹들을 통해서, 보다 더 엄격한 규제들과 절차들과 단속(통제)들을 발전시키도록 정부들에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시민이 정치권력을 - 국가, 지역, 그리고 자치도시의 정치 권력을 - 단속(통제)하지 않으면, [정치 권력과 기업이] 환경에 가할 손상을 통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웃한 공동체들 사이에서 동일한 환경 정책을 지지하는 합의들이 이루어진다면, 지역 차원의 입법이 보다 더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179항).
교종의 이런 발언에 불편함을 느끼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가톨릭 신자 가운데 그런 분이 계시다면 우리 신앙의 확신에서 발전한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교종의 가르침은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충실할 뿐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는 ‘정치 공동체(국가)는 시민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이를 ‘정치 공동체에 대한 시민 사회의 우선성’이라고 한다. 가톨릭 교회의 이 가르침은 유별한 것도 아니다. 거의 모든 나라의 헌법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나라의 헌법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근시안적인 권력의 정치와 선거의 이해 관계에 몰두하는 정치, 정치적 부패와 민주주의 제도의 가장 심각한 결함, 그리고 정치 권력에 대한 시민 및 시민 사회의 통제와 참된 치국을 다시 생각한다.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님
[그림으로 보는 복음묵상] 오래전부터
당신 머리 위로
쏟아지는 이 물은
오래전부터
그분과 우리의 사랑을 드러내 주는
아름다운 물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루카 3,16)
-임의준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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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 조차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