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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해 곡강의
흥안리 이씨 낭자 죽음의 원인은 비문 그대로 '남모를 한(幽恨)',
즉 아무도 모른다.
이씨 낭자의 죽음과 얽힌 전설이 전해오나
물론 사실이 아니고 전설이다.
경주 선비가 이씨 낭자를 성희롱하고
여기에 저항하다가
부담을 느껴 자살을 하였다고 하는
이 전설과 같은 구조의 전설이
의성 낙동강에도 전해온다.
충비 순량이 순절한 물웅덩이
순량은 흥해군 북쪽 흥안리 이씨 아가씨의 몸종이다.
아가씨에게 남모를 한이 있어서 이 물웅덩이에 빠져 죽었다.
여종이 뒤따라 뛰어내리려고 하였는데
민망(난처)하게도 그 어린 자식이 뒤따라오므로
달래어 집에 돌아가게 하고서는
물웅덩이로 와서 주인 아가씨의 시신을 끌어안고 떨어져 죽었으니
곧 기해(숙종45, 1719)년 4월 24일의 일이었다.
그 48년 뒤인 숭정기원후 3째 병술(영조42, 1766)년 8월 일에
행 흥해군수 조 성이 글을 쓰고 그 일을 적는다.
색리(담당 실무 아전) 정창신,
석수(돌에 새긴 사람) 윤탕이,
야장(돌을 갈아 다듬은 장인) 김기원
順良 郡北 興安里 李娘婢也 娘有幽恨 沒
于是淵 婢欲下從 憫其稚子隨後 誘使歸
家 卽赴淵 抱娘屍而死 乃己亥四月二十
忠婢順良殉節之淵
四日也 後四十八年
崇禎三丙戌八月 日
行郡守 趙 峸 書而識之
色吏 鄭昌臣
石手 尹湯伊
冶匠 金起元
*원문은 우에서 좌로 세로행으로 새겨짐.
*장소는 흥안리 뒷산 북미질부성 절벽 아래 흥해군 관아에서 배를 대는 곳으로 쓰인 곳의
곡강 참포 관소(曲江 斬浦 官沼)가 몸을 날려 죽은 연소이고
그 맞은편 바위벽에 비문이 새겨져 있음.
*2008년 4월 13일 박창원, 장태원, 김병례, 이순영, 윤종희, 김희준 현장 재차 답사.
1. 흥안리 이씨 아가씨가 죽은 원인은 이 비문에서는 ‘남모를 한(幽恨)’이라고 하였다.
2. 朴一天이 편찬한 <<日月鄕誌>>(1967) 146-147쪽에서 경주에서 흥해 군수를 찾아온 제독(계림의 한 선비)가 곡강으로 놀러갔다가, 빨래하러 나온 흥안리의 이씨 낭자를 희롱하는 시를 읊자, 이에 아가씨가 그 선비를 조롱하는 시를 지어 응수하다가, 흥해 군수가 아가씨를 잡아 오게 하자 화가 집안에 뻗칠 것을 우려하여, 그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여 강물에 투신하였다고 하는 흥해 지역에 전해 오는 이야기를 적었다.
선비(제독)의 희롱 시
爾非三尺劍 너는 3척의 칼(남성의 성기를 상징)이 아니거늘
能斷幾人膓 몇 사내의 애간장을 끊었느뇨
흥안리 이씨 낭자(기생 초옥)의 복수 시
妾本荊南和氏璧 첩은 본래 형남의 화씨벽(여성의 성기를 상징)이온데
偶然流落曲江隅 우연히 곡강 모퉁이에 굴러 왔습죠
秦城十五猶難(不)易 진나라 열다섯 성하고도 바꾸기 어려울(않을) 보배이온데
何况鷄林一腐儒 하물며 계림의 한 썩은 선비하고서야
그리고, 순량비 제막식에 흥해군수 조성이 지은 추도문이 곡강서원에 전해오다가 흥선대원군 서원 철폐 때 잃어버렸다고 하였으며, 필자인 박일천 외에 남포, 보공의 순량 순절에 대한 시를 기록하였다.
3. 김용제 등이 편찬한 <<迎日邑誌>>(1929) 권2 <명소고적>의 ‘곡강’에서는 북미질부성 아래의 기담(妓潭)이 있다고 하며, 기담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연유를 소개했다. 일월향지와 다른 점은 흥안리의 이씨 낭자 대신 흥해군의 기생 초옥이를 등장 시킨다.
4. 의성군의 기생 초옥이를 시골 선비가 사랑하자 초옥이가 흥해의 위 시와 같은 시를 읊으며 사랑을 거부하였다. 다만, 곡강 대신 낙동강이 등장할 뿐이다.
5. 판소리 <<변강쇠전(가루지기타령, 횡부가)>> <기물타령>에도 “십오성(十五城) 바꾸려던 화씨벽(和氏璧)을 가져 볼까.”라는 구절이 나온다.
6. 결국, 영일읍지에 등장하는 흥해군 기생 초옥(=화씨벽)과 곡강에 굴러 온 화씨벽 시는 의성군 기생 초옥과 낙동강에 굴러온 화씨벽의 흥해 버전(Version)인 것이다. 이런 민간의 에로틱한 시는 판소리 변강쇠의 사설의 한 대목으로 집대성될 만큼 19세기말 한국의 민중 속에는 흔한 사설이었다. 이런 사설이 흥안리 이씨 낭자의 죽음에 이입되어 흥해 지역에 구전되어 온 것을 영일읍지가 채록하고, 곡강 현장을 답사한 박일천은 일월향지에서 기생 초옥 대신에 비문대로 흥안리 이씨 낭자로 수정하되 '초옥이 지은 화씨벽 사설' 자체는 그대로 채록한 것이다. 그러나, 비문은 흥안리 이씨 낭자의 죽음의 원인을 ‘남모를 한(幽恨)’이라고 할 뿐이다.
7. 우리 역사에서 이와 비슷한 만들어진 역사가 더러 있다. 논개와 정몽주가 그런 경우이다.
대표적으로 임진왜란으로 인한 강렬한 반왜 및 피해 의식과 전쟁 뒤의 조선 국가에 대한 민심 이반에 대한 한 방어책, 여성의 국가에 대한 충성의 표상 필요성,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의식, 한국전쟁 뒤의 여성의 순결함조차 국가주의에 복속시키려는 애국주의로서 논개 신화가 살이 보태지며 탄생하였다.
조선 국가와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을 대표로 하는 사림 세력에 의하여 정몽주를 충신의 표상으로 만들었다. 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은 그들 유학의 연원인 정몽주를 만고 충신으로 중국 역사의 백이 숙제와 병렬시켰다.
정몽주의 순절처가 본래 개성 태묘동 동구임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개경 일대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장소인 선죽교로 둔갑하고, 선죽교는 국왕의 정통성이 흔들리고 노론 권력에 왕권이 휘둘리고, 천주교가 퍼져나가며 성리학 사회 기강이 흔들려 나갈 때, 대외적으로 병자호란 이후 청의 국력이 치성할 때로 숙종 이후인 영조, 정조 전후로 하여 성역화되었다.
8. 충비 순량의 순절을 기린 비이고, 순량이 순절한 못(淵)이라고 비문에서 말하였듯이, 이 비는 어디까지나 어린 자식마저도 달래어 집으로 보내고 주인의 시신을 안고 물에 투신하여 죽은 여자 노예, 이씨 낭자의 몸종, 아이의 엄마인 순량의 순절을 기리는 것이다.
9. 모든 생명체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인 삶이라는 자연의 질서를, 부모와 자식이라는 가장 본원적인 자연 질서를 따르지 않고, 성리학적인 당연(의리, 문명)에 따른 주인에 대한 노예의 충성과 절개라는 도덕의 표상이 되고, 성리학적인 이데올로기에 순종한 모범이 된 사례로서 순량의 순절을 흥해군수 조성이라고 하는 국가 권력은 사건 뒤 48년 뒤에 비를 새겨 세상에 드러내고 후세에 전하게 한 것이다.
요즈음 텔레비전 드라마 ‘추노(推奴)’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조선 시대 후기에 들어서는 노비가 많이 도망하고, 주인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일이 많았고,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도 크게 흔들렸다. 이런 시대에 흥해라는 변방에 살았던 여자 노예 순량의 일은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국가 사회 체제 유지를 위한 좋은 사례로 크게 표창되었던 것이다.
시대는 뒤떨어지지만, 비슷한 사례가 있다. 형산강변에 여관을 하던 송씨 여인을 강물에서 구하고 익사한 충비 甲連의 일을 국왕에게 보고하였고, 국왕의 명으로 고을 사람들이 비석 경비를 거두고, 관찰사가 비문을 쓰서 교통로의 길목에 세운 충비 갑련 비가 있다.
10. 유럽 중세에는 잔다르크처럼 가톨릭 종교 재판에서 마녀로 낙인찍혀 죽은 사람이 무려 20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16세기에서 17세기 경 가톨릭 사회인 이탈리아에서도 종교 재판으로 화형이 자주 이루어졌다. 민중의 우주관, 세계관, 문화는 지배층의 가톨릭 우주관, 세계관과 자주 충돌하였고, 이런 것들은 지배층의 가톨릭 중심 사회 체제 유지를 위한 검열 대상이 되었다. 이런 검열에서 걸린 사람 중 일부는 종교 재판과 심문을 받고 결국 화형에 처해졌다.
11. 건국 후 약 200년 정도가 지나면 지배층의 국가 사회 체제 유지 이념인 성리학 유교 질서가 지방 사회와 민중과 여성에게까지 내면화된 조선 후기 사회에서 노비는 타살된 화형 대신 물에 자살하였다. 그러나, 성리학 유교 이데올로기는 이런 일을 크게 드러내어 또 다른 자발적인 '타살'을 유도하고 있다. 충신, 효자, 효우, 열녀, 충비의 비각과 의견(義犬)까지 그러한 역사의 소산이다.
12. 영일읍지나 일월향지는 충비 순량에 초점을 두지 않고, 이씨 낭자의 죽음의 원인이나 배경에 얽힌 이야기를 채록하고 조명하고 있다.
13. 일월향지는 비문을 채록하여 싣고, 충비와 관계되는 시들이나, 충비 위령제 때 흥해군수 조성의 추도문이 곡강서원에 전해져 왔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 분실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하고 있다. 과연 곡강서원에 군수 조성의 추도문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군수 조성의 문집이 있다면 확인이 될지 모르겠다. 앞으로 이 사건과 관계되는 기록을 추적해 보아야 할 것이다.
14. 일월향지는 2여인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이 사건이 발생한 연대를 잘못 계산하고 있다. 일월향지의 기사 처음은 선조 16(1583)년 봄이라고 하였다.
또 '숭정3병술'을 오독하여 '숭정3년병술'이라고 채록하였다. 그래서 '숭정 기원 후 3째 병술년'이라고 읽어야 할 것을 '숭정 3년인 경오(인조8, 1630)년'에 비석을 새긴 것으로 연대 계산을 잘못한 것이다. 그래서 사건 48년 뒤에 비문을 새겼다고 하는 정확한 비문이 잘못되었다고 하며, 사건 뒤 30년 뒤에 비문이 새겨졌다고 일월향지가 다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사건은 1719(기해, 숙종45)년 음력 4월 24일에 일어났고, 비문은 48년 뒤인 1766(병술, 영조42)년 음력 8월에 새겨졌다.
***이하 일월향지 원문 옮김
<때는 이조 선조16년 봄이었다. 계림(경주) 일사(선비) 혹은 제독(고명한 장수)의 지우가 흥해군수로 도임중에 있어서 유람 차 흥해에 와서 지기인 군수를 방문하고 수일 묵게 되었다. 북미질부성하 곡강 어구가 흥해 명승지로서 저명하고 그 풍경이 절경이란 말을 듣고 필마단기로 소풍 겸에 그 주변에 이르니 양안절벽의 기암괴석이 난립한 양상 곡강 백사장의 청류수 북미질부성의 고적 조봉대 하의 녹음 금오산 화초 극목한 창랑 도음산 원경 비학산 자색등 과연 천하의 절경이라 첨가한 화영거불류의 녹수와 호연한 鳶魚에 도취하여 一詩를 詠하여 왈
욕호창해 풍호등산 석벽수난화소립 풍장만수조채신
바다에서 목욕하고 산에 올라 바람 쐬니 위태로운 석벽위에 꽃은 피어 웃고 섰고
나무에 잠긴 바람 새소리만 새롭더라
꽃은 피어 만발하고 춘풍은 훈훈한데 청류수 시냇가에 절세 미인 낭자 하나
다락같은 검은 머리 등위에 출렁이며 화장 저고리에 연분홍 치마
꽃과 같이 맵사리고 빨래하며 앉은 품이 마치 선녀와 같이 아름다워 보였다.
호탕한 경주 일사 馬上에 지나가며 일시를 영하되
이비삼척검 능단기인장
너는 석자 칼이 아닌데 몇 장부의 창자를 끊었는가
설마 저 낭자가 이 시의 의미야 알까보냐 하고 조롱을 하며 경주 일사 마상에 호호당당 뽐내면서 지나가니 빨래하던 낭자 고개를 들어 일시를 답하되
아본형남화시벽 진성십오유불역 우연유랑곡강두 화여게림일부유
나는 형남에 화시벽 같은 보배로서 진나라 십오성에 바꿀 수 없노라
우연히 곡강땅에 머무는 몸이로되 경주 썩은 선비와 더불어 허할손가.
(주. 화시벽은 형남의 보옥으로 진의 시황제가 십오성과 교환하자 하여 불응하였던 귀보임.)
설마 하던 경주 일사 촌락 일 낭자의 유창한 문장에 顔汗의 모욕을 당하고 답구할 여지도 없이 황황히 말을 몰아 지우 흥해 군수에 달려와서 전후종말을 고하고 양반으로서 상촌의 일부녀에게 당한 모욕에 분함을 참지 못하였다.
흥해군수 대노하여 상놈의 자녀로서 문무겸전지양이요 금지옥엽지반에게 교만무례한 행동이 어데있느냐고 軍奴司令에게 영을 내려 낭자를 체포하여 즉각 대령할 것을 엄명하였다. 명령받고 군노사령 뛰어가며 생각하니 양반이 도도한들 제 얼마나 도도한고 이랑의 죄라 한들 글 지운 죄뿐인데 양반이 조롱하여 지어 던진 시 한 수에 아무리 상놈 인들 조롱 시에 못 응하리 군노사령인들 양심이 있어 차마 이랑을 체포하여 사도 앞에 대령할 수 없었다.
흥안동에 도착하여 이장에게 이랑의 체포령을 전달하고 비리에 낭자가 원지도피할 것을 권유하며 돌아와서 사도 앞에 낭자의 원지출타로 보고하였다. 이 소식을 전하여 들은 이랑은 자기일신에 어떠한 굴욕을 당하여도 상관치 않으나 양반 모욕의 누가 부모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고 또 당시봉건사회의 도의로 미혼여자가 선악사를 막론하고 관가출입은 부도가 허용하지 아니하였다.
이랑은 고민하였다. 하늘을 우러러 보고 울었다. 청산을 바라보고 탄식하였다. 좁은 여자라 이 고민이 고뇌의 탈출구를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양반상놈의 봉건제도의 엄연한 계급 상놈은 양반 앞에 의사 표시의 자유조차 약탈당하고 철쇄줄에 얽매여 있는 봉건사회제도를 저주하면서 죽음으로 항거할 것을 결심하고 부모에게 유서 한장 남겨두고 몸종 순량에게만 낭의 심중을 토하며 사랑하는 순량과 마지막 눈물의 이별을 나누고 현 북미질부성하 곡강 참포 관소에 이르러 양반을 저주하는 천추의 한을 품고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이랑의 몸종 순량도 랑이 자살한 관소에 이르러 이랑의 시신을 안고 순사하였다. 이랑과 몸종 순량이 순사한 48년 후에 이조 인조 조에 조성이란 흥해 군수가 이 순화미담을 전하여 듣고 가련하고 애절한 정을 이기지 못하여 충비 순량지비를 竪하였는데 건비 위령 일에 흥해 군수 조성이가 낭독한 이랑과 순량의 진혼 추도사가 당대 명문으로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구곡 간장을 도려내고 폐부를 찔렀다고 하며 이 명문 추도사가 곡강서원에 보존 중 고종 무진에 대원군 서원 철훼 시에 곡강서원과 함께 영원히 분실되었다함은 오등 사학도로서는 대유감지사이며 건비 제막 당일에 곡강 용수가 피와 같이 붉고 참포 양안에 虫鳴이 斷聲되고 秋雨 陰風 日月이 광채가 없더라고 전하고 있다.
충비순량비 명왈 순량군북흥안리이낭비야 낭유유한몰우시연비욕하종민기치자수후유사귀가즉부연포랑시이내기해사월이십사일야 후사십팔년 숭정삼년병술팔월 일 행흥해군수 조성 서이지 색리 정찬신 석수 윤탕이 야장 김기원
충비 순량 비문을 해독하면
순량은 흥해군의 북쪽 흥안리에 사는 이랑의 몸종이다. 이랑이 극한 슬픔이 있어 못에 빠져 죽으니 이랑의 몸종 순량이 이랑의 뒤를 따르고저 하나 어린 자식이 민망스럽게 보챔으로 달래어 집에 돌아 보내고 이 못에 와서 이랑의 시체를 안고 죽었노라. 색리는 아전 석수는 석공 야장은 磨石 숭정3년은 이조 인조 8년(경오) 서기1630년 거금 334년 전에 각명한 것이다. 비 순량이 이랑과 순사한 것은 기해 4월 24일이라 하고 사후 48년 만에 숭정3년에 해당함으로 충비 순량 사후 30년 뒤에 건비한 것이다.
충비 순량 靈에게
박일천
천척절벽다락이나 가을 풀만 쓸쓸하고
낭떠러지 바위 밑에 강물 출렁 파도 치네
지난 일 꿈 이런가 순량비만 홀로 서서
조봉대 넘는 구름 시름인가 바라보네.
哀歌
寶鞏
상심욕문전년사 서럽다 지난일 묻자 했더니
유견강곤거불회 흘러서 올길 없는 강물이구나
일모동풍추초황 해지자 이는 바람 풀만 시들어
저고장상월왕대 서고새만 월왕대를 넘나드는구나
坐曲江頭
낙일공강유 곡강에 해는 지고
연파처처수 저녁 연기 떠오른다.
부침천고사 천고 묻힌 옛일을
수여문동류 그 누구에게 물어보리
望順良婢
南圃
전불견거인 바라보아도 가는 이 없고
후불견내자 돌아보아도 오는 이 없네
염천지지유 천지는 태고처럼 하냥 조용한데
독창연체하 혼자 서성거리며 눈물 지우네.>
***金鎔濟 등이 편찬한 <<迎日邑誌>>(1929) 권2 <名所古蹟>의 ‘曲江’에서는
“성가퀴 그 아래에 기생못이 있다. 흥해군의 기생 초옥은 성품이 지혜롭고 시를 잘 지었는데, 한 제독(또는 계림의 어떤 선비)가 있어서 시험 삼아 시운을 불러 말하길, ‘너는 3척의 칼이 아니거늘 몇 사람의 애간장을 끊었느뇨’라고 하였다. 초옥이 답하여 말하기를 ‘첩은 본래 형남의 화씨지벽이온데, 우연히 곡강 모퉁이에 굴러 왔습죠. 진나라 열다섯 성하고도 바꾸지 않을 보배이온데, 하물며 계림의 한 썩은 선비하고서야’하고는 물에 빠져 죽었다. 그 몸종 순량이 주인을 따라 순절하여 죽었다. 못의 이름이 이렇게 하여 생긴 것이다. 그 못가에는 ‘충비 순량 순절비’가 있다.(城堞其下 有妓潭 郡妓楚玉性慧能詩 有一提督(或云鷄林逸士) 欲歡呼韻試之曰 爾非三尺劍 能斷幾人膓 楚玉答曰 妾本荊南和氏璧 偶然流落曲江隅 秦城十五猶難易 何况鷄林一腐儒 卽溺水死 其婢順良因殉從之 潭之得名以是 其邊有忠婢順良殉節之碑)
****의성 기생 초옥과 시골 선비 사이에는 곡강 대신 낙동강이 등장한다.
초옥 楚玉, 의성 기생 시골 유생이 사랑을 호소했으나 시를 지어 이를 거절하다 나는 본디 형산(荊山)의 화씨벽(和氏璧) 우연히 굴러서 낙동강변에 떨어졌네 진(秦)나라 십오성(十五城)으로도 얻기 어려웠는데 하물며...
***판소리 변강쇠전
절대가인 너 났구나. 네가 무엇을 가지라느냐. 조건전후 십이승의 야광주를 가지랴느냐. 십오성을 바꾸려허던 화씨벽을 가져볼꺼나. 부제도산독은옹의 은항아리를 가져볼거나. 배금문 십자달이 생평통보를...
***완벽(完璧)
- 겉뜻 : 구슬을 온전히 함.
- 속뜻 : “완전무결(完全無缺)”을 뜻하여 쓰임
- 유래 : <<한비자>> 《사기》의 〈인상여열전〉
1. 화씨벽의 내력
춘추(春秋)시대에 초(楚)나라에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산에서 한 개의 박(璞, 옥을 싸고있는 돌덩어리)을 얻어서, 초여왕(楚勵王)에게 바쳤다. 초여왕은 옥장인에게 돌을 감정하게 하였는데, 옥장인은 그냥 평범한 돌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초여왕은 변화가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하고, 변화의 왼쪽 다리를 잘라버렸다. 나중에 초무왕(楚武王)이 즉위하자, 변화는 다시 박을 가져다 초무왕에게 바쳤다. 초무왕도 역시 옥장인에게 감정을 시켰는데, 옥장인은 또 그냥 돌맹이일 뿐이라고 말했다. 초무왕도 변화가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하고 다시 변화의 오른 다리를 잘라버렸다.
초문왕(楚文王)이 즉위하자, 변화는 박을 안고 산에 가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삼일 밤낮을 울어서 눈물도 모두 마르고, 피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초문왕이 이 소식을 듣고 기이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서 물어보았다. "천하에 다리 두 개가 잘린 사람도 많은데, 너는 왜 이렇게 슬프게 우느냐?". 변화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다리 두 개가 잘린 것을 슬퍼해서 우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옥석을 돌맹이라고 얘기해서 슬픈 것이고, 충정있는 사람이 사기꾼으로 몰리는 것이 슬픈 것이다." 초문왕은 다시 옥장인에게 명을 내려 박을 쪼개보도록 하였다. 과연 박안에는 보옥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이 옥을 변화의 이름을 따서 "화씨벽"이라 하였다.
2.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은 어떻게 화씨벽을 얻게 되었는가
초문왕이래로, 화씨벽은 계속 초나라에 머물러 있었다. 초위왕(楚威王)의 시대에 이르러, 초위왕은 공이 많은 초나라의 재상인 소양(昭陽)에게 화씨벽을 상으로 내렸다. 소양이 한번은 크게 연회를 연 적이 있는데, 이 때 화씨벽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연회중에 화씨벽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렸다. 소양은 장의(張儀)가 훔친 것으로 의심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초위왕이 장의를 받아주지 않아, 장의는 살길이 막막하여 당시 소양의 문하에 기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양은 장의를 피부가 터지고 살이 뭉그러지도록 때렸으며, 몇번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장의는 결국 초나라를 떠나서 진나라로 돌아갔다. 후에 소양은 천금을 내걸고 이 화씨벽을 사겠다고 하였지만 화씨벽을 훔친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소양은 결국 화씨벽을 찾지 못하였다.
50년이 지난 어느날, 먼 곳에서 온 손님 하나가 조나라의 환관인 영현의 집에 와서 하나의 옥벽을 팔았다. 영현은 이 옥벽이 흰색에 윤이 나고 하자가 없으며, 빛을 내뿜는 것을 보고는 오백금을 주고 사들였다. 후에 영현은 옥장인에게 옥을 감정하라고 시키자, 옥장인은 깜짝 놀라면서 이것이 바로 화씨벽이라고 하였따. 영현은 매우 기뻐하며 이를 감추어 두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미 사람을 통해 조나라 혜문왕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혜문왕은 영현에게 화씨벽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영현은 화씨벽을 너무나 아껴 즉시 바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왕은 크게 노하여 사냥하러 가는 길에 갑자기 영현의 집안으로 들이닥쳐 화씨벽을 수색해서 가지고 가버렸다
3. 완벽(完璧)에 대한 이야기
이 사실을 눈치 챈 것은 초강대국 秦나라였다. 아니나 다를까. 秦의 昭襄王은 15개 城을 줄테니 和氏璧과 바꾸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惠文王은 고민에 빠졌다. 주자니 약속을 어길 것은 뻔하고 그렇다고 안 주자니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고, 惠文王은 大臣들에게 사신으로 누가 적당한지를 물으니 藺相如(인상여)를 추천하기에 그를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다.
"적임자가 없으시다면 신으로 하여금 和氏璧을 가지고 秦나라에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만약 약속한 성들이 趙나라에 들어오게 된다면 和氏璧을 진나라에 주겠습니다만, 성들이 수중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신은 和氏璧을 완전하게 하여 조나라로 돌아오겠습니다(臣請完璧歸趙)" 라고 다짐하고 진나라에 간 藺相如는 昭襄王에게 和氏璧을 건넸다.
예측한대로 그는 소양왕이 15개의 성(城)과 화씨벽을 교환하려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아 차렸다. 인상여는
“사실 和氏璧에는 보통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흠집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 드릴까 합니다.”라고 말해 일단 和氏璧을 돌려 받아 손에 넣자마자, 궁전의 기둥에 기대어 섰는데, 어찌나 격분하였던지 곤두선 머리털이 관(冠)을 밀어 올릴 정도로 흥분한 어조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 구슬을 도로 가져가겠습니다. 만약 돌아가는 길을 막는다면 저는 머리와 함께 이 구슬을 기둥에 부딪쳐 산산조각 내 버리겠습니다.”
의리를 저버린 昭襄王은 아무 말도 못하고 수행원에 명하여 和氏璧을 가지고 몰래 趙나라로 돌아가게 했다는 데서 ‘完璧(完璧歸趙완벽귀조)’이란 고사가 생겨나게 되었고 그로 인한 공로로 藺相如는 벼슬이 上大夫(상대부)가 되었다.
[출처] 화씨벽의 내력|작성자 여월
***진(秦)나라 소왕(昭王)은 유명한 보물인 화씨벽(和氏璧)이 조나라 혜문왕의 수중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소왕은 화씨벽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편지를 보내, 혜문왕에게 진나라의 15성(城)과 바꾸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혜문왕은 화씨벽을 주더라도 15성을 얻지 못한 채 그저 속을 것만 같고, 그렇다고 주지 않으면 진나라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 걱정되었다.
혜문왕이 한 대신(大臣)에게 사신으로 누가 적당한지를 묻자, 그는 인상여를 추천하였다. 혜문왕이 인상여를 불러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는 적당한 사신을 추천해보라고 하자, 인상여는 이렇게 말했다.
“적임자가 없으시다면 신으로 하여금 벽옥을 가지고 진나라에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만약 약속한 성들이 조나라에 들어오게 된다면 화씨벽을 진나라에 주겠습니다만, 성들이 수중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신은 벽옥을 완전하게 하여 조나라로 돌아오겠습니다(臣請完璧歸趙).”
화씨벽을 가지고 진나라에 온 인상여는 소왕에게 화씨벽을 건냈다. 하지만 인상여는 소왕이 15개의 성(城)과 화씨벽을 교환하려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아 차렸다. 인상여는 화씨벽에 흠이 있다고 하며 소왕을 속여 화씨벽을 일단 돌려 받아 손에 넣자마자, 궁전의 기둥에 기대어 섰는데, 어찌나 격분하였던지 곤두선 머리털이 관(冠)을 밀어 올릴 정도가 되었다(怒髮上衝冠)
“왕께서 기어이 신을 협박하여 벽옥을 빼앗아 가시겠다면, 저의 머리는 지금 이 벽옥과 함께 기둥에 부딪쳐서 부서질 것입니다.”
느닷없는 인상여의 돌발 행동에 진왕은 깜짝 놀라며, 즉시 성을 내 주겠노라 약속했다. 그러나 인상여는 더 이상 속임수에 넘어갈 수 없다며, 진왕에게 닷새 동안 목욕 재계한 다음 이 성스럽고 순결한 벽옥을 받으라고 요구했다. 그러고는 몰래 사람을 시켜 벽옥을 조나라로 되돌려 보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닷새 동안 목욕재계를 끝낸 진왕이 날이 새기 무섭게 인상여를 불러 벽옥을 요구했다. 인상여는 당당하게 벽옥은 이미 조나라로 돌아갔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큰소리를 쳤다. 진왕은 화가 났지만 한편 인상여의 용기에 감탄하여 인상여를 돌려보냈다.
忠婢甲連之碑
舍生而取義, 殺身而成名, 君子事也. 然知義之可舍生也. <以舍生也則舍>知名之可<以>殺身也.<則殺無異甚焉> 惟不知義與名,<之可貴可重> 而能舍其生殺其身者, 眞出乎純心, 而不負其彛性也.<之天也>
上之二十九年, 己丑, 余按節嶺南, 翌年.
南之延日縣 有宋寡婦, 以旅店爲生, 人有侮其弱, 而奪其業者, 凌辱之已甚, 寡力不敵, 憤罵而投于江. 其婢曲(曰?)甲連, 年二十四, 而踵而號 曰,
"主死我何獨生爲",
遂瞥然赴水, 援而攀之, 浮而出水, 船人衆極之, 寡婦不死, 連爲波濤所推, 湯皿(그릇명 받침의 요동칠 탕)入船底, 久而得連, 連已死矣.
于時, 隣里, 及船上四方商旅, 觀者莫不挹奔走, 告于縣, 縣報省.
余聞之, 喟然曰,
"此非所謂不知義不知名, 而能舍生殺身者耶?"
摭其實, 以聞于朝, 上嘉其忠, 命旅之.
鄕人重爲之, 鳩財立石, 圖所以壽其傳, 求志於余.
嗟呼, 名固非甲連之所求者, 又豈以非其所求, 而不爲之彰其名也.
余旣與其事以彰之, 余何辭乎. 紀其事不朽之. 遂爲之銘曰,
"天旣成汝之不獨生, 胡使汝獨死.
死而旌其里碣其水, 執如生而婢."
嘉善大夫 行慶尙道觀察使 兵馬水軍節度使 大邱都護府 兼巡察使 朴岐壽 撰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知經筵 弘文館提學 李勉昇 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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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버리고 대의를 취하며 몸을 죽이고 명분을 이룸은 군자의 일이다. 그러나 대의를 알아야 생명을 버리고 명분을 알아야 몸을 죽이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대의와 명분을 알지 못하고도 능히 그 생명을 버리고 그 몸을 죽이는 자는 진실로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타고난 떳떳한 본성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임금님(순조) 즉위한 지 29년 되는 기축(1829)년에 내가 영남의 안절사로 나간 다음해였다. 남쪽의 연일현에 송씨 성을 가진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는 여관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런데 그 연약함을 업신여기고 그 여관업을 탈취하고 심히 능욕하는 자가 있었다. 과부의 힘이 그자에 상대가 되지 않아서 과부가 분하게 여기고 그자를 꾸짖으며 형산강에 뛰어들었다. 과부에게 갑련이라는 몸종이 있는데 나이가 24세였다. 주인 과부를 뒤쫓아 가며 크게 소리치며 말하기를
“주인마님이 죽는데 내 어찌 혼자 살려고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순식간에 물에 들어가 그 주인을 잡아당기고 끌어올려서 물위로 떠올라 물에서 나오게 하였다. 뱃사람 여럿이 과부를 강가에 다다르게 하였다. 그래서 과부는 죽지 않았다. 그러나 갑련은 파도에 떠밀려 배 밑창으로 쓸려 들어가 한참만에야 건져내었지만 이미 죽어 있었다. 당시 이웃마을과 사방 배 위의 행상(行商, 도붓장수)들로 이 일을 보았던 자는 서로 끌어당기며 연일현 관아로 달려가 고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현에서는 성(省, 경상감영)에 보고하였는데 내가 그 일을 듣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대의와 명분을 모르면서 능히 생명을 버리고 몸을 죽인 것이 아닌가?”
라고 하였다.
그 사실을 갖추어 조정에 보고를 하니 임금님께서 그 충성을 아름다이 여기고 그 일을 표창하라고 명하셨다. 고을 사람들이 임금님의 명을 중히 여기고 재물을 내어 빗돌을 세워 그 일을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며 나에게 기록을 구하였다.
슬프다! 명분이야 진실로 갑련이가 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찌 그 구한 바가 아니었다는 것으로 하여 그 명분을 드러내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이미 그 일을 가지고 현창하였으니 내 어찌 사양 하리오? 그 일을 기념하여 썩지 않게 하리니, 마침내 이 일을 비명으로 이렇게 노래한다.
하늘이 너를 이룰 때 홀로 살게 하지 않았으니,
어찌 너로 하여금 홀로 죽게 하리오?
죽었지만 그 마을에 정표하고 그 물가에 빗돌을 세웠으니,
빗돌을 만지거들랑 살아있는 충비인듯 여길지라.
가선대부 행경상도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대구도호부 겸순찰사 박기수 짓고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지경연 홍문관제학 이면승 머리글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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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月鄕誌>>(朴一天, 1967) 146쪽에 인쇄된 문장을 그대로 옮김. 같은 책에 갑련의 무덤이 용흥동 蓮花재 아래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음. 무덤과 비각과 사건 현장 답사는 하지못함.
* 당시 연일현 관아는 현재 연일 향교 부근으로 옮긴 시기였다.
*< >, ( )안의 글자는 채록 또는 인쇄 과정에서 일어난 착오로 보인다. 비문의 재 판독과 채록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위의 한글 옮김에서는 < > 안의 문장은 문맥으로 보아 잘못 인쇄 또는 채록 된 것으로 여겨져 해석하지 않음.
*박기수(1792(정조 16)∼1847(헌종 13). 박기수는 1830년 11월 27일(음력)에 경상도 관찰사직을 제수 받았고, 1831년 5월 25일에 흥해군 양전사업을 마치고 조정에 원장부의 전답이 2,696결이었는데, 면세지 묵은 전답을 제하고 起耕하는 실제 총 결수는 2,128결이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1832년 8월 29일에 이조참판, 1833년 8월 3일에 경기관찰사직을 제수받았다.
* ( )안의 글자와 문장 띄우기와 문장 부호는 옮긴이가 한 것임.
*<<포항의 역사와 전통>>(1990. 포항시) 287쪽에는 용흥동 산 41-3번지 연화재 중턱 오른편 길가 부근 지역에 위 사진에 나오는 <충비갑련지비>가 있다고 하였으나, 2008년 4월 21일 현재 제일교회에서 그 위쪽의 공동 묘지까지 답사했으나 비석을 찾지 못함. 비석이 포항-대구 간 고속국도 진입 도로 확장으로 인하여 다른 곳에 보관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
*2009년 여름에 확인해보니, 향토사가 황인이 비석의 도난을 우려하여
흥해의 영일민속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형산강이 본래 2갈래로 한 갈래는 현재와 같고,
또 한 갈래는 포항의 효자동에서 대흥산 아래로 하여 우현동의 나루끝으로 하여 바다로 흘러 나갔다.
대흥산으로 하여 현재의 대구 포항 간 고속도로로 가는 연화재 고개가 기계와 연일을 오가는 교통로였다.
갑련의 무덤과 비석도 그래서 용흥동 산41-3번지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원래 무덤 자리에 표석을 세워 놓을 필요가 있다.
곡강 답청(曲江踏靑)
참꽃 한 다발
다시 새봄이다. 며칠 가랑비가 뿌리더니 무채색의 대지에는 초록 물감이 하루가 다르게 번지고 꽃들이 여울진다. 지난 일요일에는 고개 너머 읍내에 사는 글벗들과 만나 점심밥을 같이 먹고 강을 따라가며 옛사람의 체취를 맡으러 나섰다. 나는 농수(農叟) 최천익 진사의 무덤으로 안내하였고, 교감 선생님은 옛 성의 길라잡이가 되었다.
인품이 도연명(陶淵明)의 시 <의고(擬古)>에 나오는 동방의 선비를 닮고 문장이 당대에 이름 높았던 농수 선생의 무덤에는 작년 가을에 나 홀로 다녀갔다. 농부들이 타작하는 들녘에는 기러기가 떼 지어 날고, 무덤가엔 감이 누렇게 익어가며 들국화가 그윽한 향기를 머금고 홀로 피어 있었다. 바람은 제법 쌀쌀하고 해는 짧아져 서산으로 기우는 오후였다.
농수는 대대로 흥해 고을의 아전을 맡았던 집안에서 태어나 진사가 되고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고 향리로 안분지족하였다. 서른 해 동안 낡고 좁은 집에 살면서 글방을 열어 학동들을 가르쳐 궁벽진 바닷가 고을에 문사들이 나왔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오만한 원님이라도 농수 앞에서는 반드시 예의를 차렸다고 한다. 이웃 고을 청하에서 태어난 두 살 위의 보경사 대비암에 기거하는 시승 의민(毅旻) 스님과는 유불과 승속의 경계를 넘어 근원의 자리에서 만나고 천지간에 함께 노닐었다. 선생 사후에 제자들과 고을 사람들이 선생을 추모하여 문집을 새겨내었다. 문집의 윤문으로 고민하던 제자들에게 선생의 영혼은 꿈에조차 나타나 시구를 다듬었다고 하니, 선생의 치열한 시혼이 절절히 전해온다.
읍내에 사는 남녀 다섯 글벗들과 동행하여 찾아간 이 봄날의 들녘에는 훈풍이 불고 논두렁에는 쑥이 새파랗게 돋아나 있었다. 선생의 무덤 마른 잔디 속에는 샛노란 양지꽃이 앙증맞게 빛났다. 선생은 흙으로 돌아갔다가 가을날에는 들국화로 피어나고 새봄이면 양지꽃으로 환생하여 길손을 반겨 맞으시느니. 나는 벗들 앞에서 선생의 시 한 머리 읊조렸다. 이백오십 성상 앞에 이 마을에 머물렀던 선생도 오늘처럼 산에 들에 꽃이 다투어 피어난 시절을 아꼈는가보다. 산에 나무하러 간 머슴아이가 글을 좋아하는 주인 영감에게 참꽃 한 다발 꺾어 바쳤겠다. 선생의 시를 읊조리는 내 마음에는 문득 남모를 그리움이 물밀려 왔다. 어릴 적 아버지가 지게 위 나뭇짐 위에 얹어와 말없이 전해주던 연분홍 연연한 그 꽃 한 아름을 잊을 수가 없다.
童去折遠山花 초동은 먼 산에 가서 꽃을 꺾어왔고,
落席春光滿眼多 봄 햇살은 자리에 쏟아져 눈부시어라.
忍看弱枝渾縛束 연약한 가지 뒤섞어 묶은 것을 차마 보자니,
爲憐殘萼更摩挱 남은 꽃떨기 가련하여 어루만지누나.
留念經宿增憔悴 하룻밤 자고 나면 꽃잎 더욱 초췌해질 것을 생각하니,
愛欲常新無奈何 평소의 신선한 빛을 아끼려 하지만 어찌할 수 없구나.
强揷白頭仍小酌 억지로 흰머리에 꽂고서 술 잔 기우리자니,
可云佳節不虛過 좋은 계절 허송하지는 않네 그려.
미질부성에 올라
농수 선생의 무덤을 떠나 곡강을 따라 십리가 넘는 들판 길을 달린다. 어진 농부들의 삽질은 가을날의 풍요를 예고하고 있다. 질펀한 동녘 벌에 청보리밭이 끝 간 데 없이 물결치던 풍광이 새삼 그립다. 신라 지증왕 때 쌓은 미실성(彌實城)은 미질부성이고 뒷날 흥해(興海) 고을이 되었다. 조선 정조 때 고을 원님이 백성과 동고동락하며 9개의 제방을 쌓아 벌판에 물을 댔고, 순조 때 양전(量田)을 하고 관찰사가 고을 전답이 2,696결이 되었다고 조정에 보고한 일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수리시설이 만들어지고 갈밭이 농경지로 개간되었고, 해방 후에 다시 간척되어 이렇게 너른 들이 이루어진 것이다. 평야 끝 강을 건너 야트막한 산에 안긴 마을이 보인다. 고샅길을 돌아 미질부성 비탈을 오르니 솔숲 길가에는 비단에 수놓은 듯 풀꽃들이 얼굴을 내밀고 무덤들이 봉긋봉긋 솟아 있다.
고구려와 말갈의 말발굽 소리도, 고려 태조에 귀순한 성주의 호령도, 왜구의 침략도 시간의 강물에 흔적도 없이 쓸려가고 성 안에는 옛 기와 파편만이 간간이 눈에 띈다. 고성은 이제 죽은 자들이 머무는 견고한 성채가 되어 있다. 육이오 전쟁에 종군하여 무공훈장을 받은 분도 잠들어 있고, 갑남을녀 들풀처럼 이름 없이 살다 간 사람들이 여기서 옹기종기 이웃이 되어 산다. 이층 양옥을 닮은 새로 지은 납골당에는 죽어서도 가족이 한집에 살고 있다. 어느 아버지는 고명따님만 남겨두고 저승으로 먼저 갔는가 보다. 무남독녀 수복이는 이승에서, 봉화 금씨 영감님은 저승에서 그리움에 지쳐 가는지 모른다. 무덤에는 풀이 우거지고 청명 한식이 와도 추석 명절이 되어도 술 한 잔 부어주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공동묘지의 금잔디 무덤 잔등에는 샛노란 양지꽃, 보랏빛 오랑캐꽃, 자주색 할미꽃이 한 가족인양 피어나 산자들을 애달프게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연지 곤지 바른 수줍은 얼굴에 솜털 송송하던 짙붉은 새댁이던 할미꽃은 꽃잎 다 지고 바람에 호호백발을 날리며 할미가 되어 영감님 무덤을 울 삼아 담 삼아 살고 있다.
산성 마루 무덤 떼 사이에 서자 곤륜산과 목장산 사이로 동해 바다가 창망히 떠올랐다. 한번 나래 짓으로 구만리 창천을 날아간다는 붕새가 살던 북명(北溟)이 저러할까. 바다는 언제나 보아도 태허의 숨결이 살아 있어 좋다. 샛바람이 제법 차가웠지만 가슴 저 밑바닥까지 시원하여온다. 남자 넷, 여자 둘 일행은 자리를 펴고 배낭에 챙겨온 음식을 주섬주섬 내 놓는다. 쑥 버무리 떡 한 덩이를 들고 먹다 목이 막히자, 끓여 온 커피 한 잔을 따라 마신다. 술보다 더 진한 커피의 구수한 냄새가 사람을 살아 있는 행복감에 젖게 한다.
발아래 조봉대(釣峰臺) 바위 절벽 밑으로 흐르는 짙푸른 강물이 천연의 해자가 되어 칠포 바다로 굽어 흘러들고, 산 사이로 시야 가득 만경창파가 일어나는 바다가 둥실 떠 있다. 그 옛날 저 바다 수평선에 왜구들이 탄 배들이 나타나면 봉화가 연이어 올랐고, 고을 사람들은 성을 비우고 산중으로 몸을 숨겼다. 행상은 소금과 생선과 젓갈을 실은 돛단배를 노저어 바다에서 곡강(曲江) 어구로 올라왔고, 너른 평야에서 거두어들인 세미(稅米) 가마니를 싣고 사공은 돛을 올려 부지런히 서울로 갔으리라. 찬 기운이 따사로운 햇살에 뒤섞여 불어오는 바다 바람에 머리카락을 감으며 나는 말없이 동해 바다를 응시한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밝고 죽음이 두려울수록 삶은 소중해진다. 무덤 위에 생명의 등불로 피어난 꽃들이 내 마음을 한없이 애잔하게 한다. 죽은 자가 묻힌 겨울의 대지에 봄은 생명의 환희를 피워내고 산자를 슬픔과 행복에 젖어들게 하는 마법을 가진 야누스의 여신인가 보다.
공자님이 어느 날 제자들에게 저마다의 포부를 물었다. 자로(子路)와 염구(冉求)가 나라를 경륜하고 공서적(公西赤)이 종묘의 예악을 배우겠노라고 하자 스승은 한숨을 내쉬었다. 증점(曾點)은 달랐다. 타던 거문고를 내려놓고 대답하기를, ‘햇살이 따스한 봄날에 새 옷이 지어지면 갓 쓴 사람 대여섯과 동자 예닐곱과 더불어 성읍 남쪽 기수(沂水)에서 몸을 씻고, 기우제 지내는 동산에 올라 바람을 쐬고는 시를 읊으며 집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하여 스승을 흡족하게 하였다. 어린 날 저 아래 바닷가 학교를 다닌 분은 갯가 바위에서 미역을 뜯어 읍내까지 걸어와서 팔던 일이며 동무들과 소풍 갔다 목이 말라 물 마시러 혼자 집에 왔다 방에서 깜박 잠들어 없어진 아이를 찾느라 소동이 일어났던 일을 말해준다. 저마다 이런저런 기억과 세상살이의 실타래를 풀어 놓았지만 눈 아래 펼쳐진 검푸른 바다와 옛 성을 굽어 돌아 바다로 흘러드는 강물을 지그시 바라보기도 하며 사람들은 세상의 소음과 티끌들을 씻고 있었다. 북미질부성은 들뜨고 성내고 탐욕스런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정화시키는 그런 힘이 있었다.
이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분은 기억을 더듬어 마을 가운데에 있었다던 연못과 못가의 제당을 찾는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촌로에 물으니 못을 메우고 당집을 헐어 그 자리에 이층 시멘트 건물인 동네 회관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새마을 깃발이 펄럭인다. 두레박으로 온 동네 처녀들이 사철 시원한 샘물을 길어 올리던 우물은 이젠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려져 있다. 우물 속을 들여다본다. 탁한 물빛에 내 얼굴마저 흐리게 떠올랐다. 삶의 근원인 물을 갈무리하던 연당(淵塘)에는 신성한 생명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연못은 메워지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생명을 외경하던 제식이 해마다 정월이면 행해지던 제당은 이성이란 괴물에 부수어 졌다. 두레박으로 생명의 근원인 물을 길어 올리고, 웅숭깊은 심성의 원천이었던 우물은 근대 문명의 폭력에 버려지고 물빛은 탁해졌다. 과학과 자본과 권력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자초한 일이다. 그곳은 우리 시대의 미신과 천박함을 웅변하는 현장이었다.
마을 앞 논 가운데에는 남근석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오래 동안 땅 속에 파묻혔던 선돌이 다시 세워져 있다. 또 그 옆에는 고인돌이 터 잡고 있지 않은가. 내외분별이 엄했던 유교의 도덕은 선돌을 음탕한 기운을 내뿜는 돌로 인식하였고, 기나긴 세월은 고인돌을 그저 한 덩이의 바윗돌로 둔갑시켜 망각의 강물로 던져버렸다. 하지만 우리가 누리는 오늘 이 해와 달도, 근대도 이성도 저 시간의 물살에 부질없이 떠내려가고 말리라. 먼먼 훗날 사람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문명이 지어낸 저 시멘트의 공화국도 모래성처럼 덧없이 사라지리라. 그 날이 되어도 이 땅은 선돌을 세우고 고인돌을 지은 저 청동기 부족의 영토로 남으리라. 그들은 곤륜산 그 기슭에서 북두칠성 별자리와 하늘과 땅의 교합 무늬를 바위에 새기고 어머니 대지의 축복을 받았다. 바다와 강과 들을 터전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이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어 아직도 청동거울에 푸른 녹이 되어 전하고 있지 않은가.
천곡사(泉谷寺) 있는 도음산(禱蔭山)에서 발원한 남천과 법광사(法廣寺) 안긴 비학산(飛鶴山)과 해월(海月) 선생을 낳고 선생이 수도한 검등골에서 발원하는 북천이 동녘 벌을 적시며 흐르다 옛 성 아래에서 합류하여 곡강을 이루었다. 태곳적부터 몸을 낮추고 바다로 흘러들며 강은 숱한 생명을 가슴에 품고 키워왔다. 강가에 서서 들녘을 바라보았다. 지평선 끝에 산을 기대고 남미질부성과 읍내의 아파트와 인가가 하늘과 땅 사이에 신기루처럼 가물거린다.
까마득한 태곳적부터 이 들과 산과 강과 바다에 사람이 터를 잡고 살아왔다. 하지만 읍내의 인구가 늘어날수록 강은 몸살을 하고, 강이 신음할수록 바다는 황폐해지고 있다. 물이 자기 정화 능력을 잃고 천지의 생명 기운이 순환을 하지 못하면 인간과 사회와 문명도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으리라. 물빛이 탁해지고 잉어와 뱀장어와 피라미가 떠난 강가에 선 나는 마음이 허전해 견딜 수가 없다. 뭇 생명의 어머니, 저 강이 다시 맑아질 봄날이 정녕 오기라도 할까. 장안성 교외에 흐르는 곡강에서 시사(詩史) 두보(杜甫)도 가는 봄을 응시하며 술잔을 기우렸다. 그의 시 <곡강(曲江)>이 떠오른다.
한 조각 꽃이 떨어져도
봄빛이 줄어들거니
바람에 불리는 만 조각이
진정 시름에 겹게 한다.
......
가는 곳마다
술빚은 으레 있고
인생 칠십은
예부터 드물거니.
말하노라, 풍광(風光)은
세월과 함께 흐르는 것
잠시나마 즐기고
부디 등지지 말라.
이화에 월백하고
흥안리 마을 고샅길을 돌아 나오는데 봄빛에 복사꽃이 붉게 탄다. 순박해서 좋은 황매화와 순결한 배꽃 가지가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할미가 툇마루에 서서 사진기에 꽃을 훔쳐 담으며 호들갑을 떠는 낯선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배꽃을 보자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배운 고려 충신 이조년의 시조를 읊었겠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아! 그러나 어찌 짐작이나 하였으랴. 이 마을 흥안리에 슬픈 곡절이 서려 있을 줄이야. 한 삼백년 앞의 일이다. 마을에 이씨 성을 가진 낭자가 살았는데, 상사병인지 우울증인지 봄을 앓다가 남이 알지 못할 원한이 있어 미질부성(彌秩夫城) 너머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곡강 참포(塹浦) 관소(官沼), 시퍼런 물웅덩이에 뛰어들어 죽었단다. 달빛 아래 배꽃이 희고 은하가 굽이치는 이슥한 밤에 소쩍새 피를 토하듯 절규하던 그날 밤, 아씨는 강물이 은하수처럼 굽이치는 벼랑 아래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단다. 선덕여왕을 극진이도 연모한 지귀(志鬼)의 가슴에서 불이 나 영묘사(靈廟寺) 그 큰절이 다 타고 가슴은 ‘숯껑’이 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낭자는 유한(幽恨)으로 가슴에 타오르는 괴로움의 불을 저 시퍼런 강물에 뛰어들어 껐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더더욱 슬픈 일이 일어났단다. 몸종 순량(順良)이가 칭얼대며 따라오는 어린 자식을 달래어 집에 보내고는 아씨의 주검을 부여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으니․․․․․․ . 어린 것을 두고 주인아씨를 따라 저승길을 함께 하였으니, ‘이를 어쩐담, 이를 어쩐담.’ 충신은 임금님을, 열녀는 지아비를, 효자는 어버이를, 종은 주인을, 충견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던지고 생사를 같이한다. 의리가 지중한 윤기(倫紀)였다손일망정 짐승이나 사람이나 새끼와 자식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거룩한 본능이 있고, 죽음을 싫어하고 삶을 좋아하는 것은 생명 가진 존재들의 거스를 수 없는 이법이지 않은가.
낭자는 도무지 무슨 남모를 원한이 있었기에 물웅덩이에 빠져 죽었을까. 아무도 모를 한에 사무쳐 저승길 혼자 떠날 때 몸종 순량만이 주인 아씨의 아픔을 연민하고 산보다 높은 고독과 바다보다 깊은 두려움에 함께 하였나 보다. 어린 자식을 두고 주인아씨의 시신을 안고 창천에 통곡하다 이승을 버리고 주인 아씨를 따라 죽는 일이 정녕 정직한 삶이었던가. 엄마를 찾다가 울다 울다 지쳐 눈물범벅이 되어 잠든 어린 것은 그 얼마나 가련한가. 엄마를 잃고 한 평생을 또 어이 살아갔을까. 아버지는 있었을까. 반상과 적서와 양천과 남녀의 분수와 법도가 그렇게도 지중했을까․. 우리들은 이성적으로 그리고 감성적으로 벼라 별 상상을 하며 삼백 년 세월 저 너머 오늘처럼 배꽃이 피어나는 봄날에 있었던 일에 가슴이 저미어 오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낭자는 남모를 원한이 가슴에 사무쳐 타나토스의 심연으로 몸을 날렸다. 몸종 순량이는 주인과 생사를 같이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시대정신에 희생되어 천리를 어기고 어린 자식과 생사의 길을 달리하고 말았다.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숨기지 않고 개인의 행복을 위하여 가족을 깨고 공동체를 버리는 이기주의가 강물처럼 도도히 범람하는 우리시대는 남을 위해 목숨을 돌보지 않는 의인이라는 이름의 영웅을 낳는다. 도덕과 감정, 야만과 문명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역사는 발전을 하는 것일까. 이 시대는 과연 인권이 있고 자유와 평등과 행복이 넘치는 사회일까.
칠포 바다로 흘러드는 강물을 건너고 성벽 아래 바위 벼랑이 보이는 물가로 걸어갔다. 시금치가 자라던 강가 묵정밭에는 흰 냉이꽃 무리가 안개처럼 피어나 몽환적인 미감을 자아낸다. 이씨 낭자와 몸종 순량의 혼령이 달밤이면 이 길을 따라 강가를 거닐고 성벽 너머 그리운 이승의 집에도 다녀갔으리라. 늙은 아비가 바람벽에 그림자를 드리우고서 밤마다 우두망찰 앉아 등잔불이 사위도록 방문 밖을 내다보며 과년한 딸을 기다리고 앉았으리라. 엄마를 찾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잠든 어린 것은 밤마다 꿈속에서 울며불며 엄마를 잡고 놓지 않았겠지. 금강산 만물상을 옮겨 놓은 듯, 천분의 신선이 열 지어 있고 오백의 나한이 합장하고 서 있는 듯, 곡강 남안 암벽은 절경이다. 절벽 바위 틈새에는 낭자의 원한처럼 진달래 꽃가지가 짙붉고, 푸른 물결치는 강물 저편 성 아래에는 순량의 순절처럼 시누대가 청청하였다.
이윽고 예전 고을 관청에 드나들던 배들이 정박하던 바위 벼랑 아래 참포 관소가 나타났다. 강가 모래톱에 서서 한참을 피안의 벼랑 아래 물웅덩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안의 바위벽을 깎아 새긴 비를 떨리는 마음으로 더듬어 읽어 내려갔다. 삼백년 전 오늘처럼 농익은 봄빛이 강물에 아롱지던 날 예서 있었던 사연이 비밀의 문을 열고 내 귀에 들려왔다. 순량의 충절이 서린 듯 바위벽조차 붉디붉었다.
忠 ․ 婢 ․ 順 ․ 良 ․ 殉 ․ 節 ․ 之 ․ 淵
順良 郡北 興安里 李娘婢也 娘有幽恨 沒
于是淵 婢欲下從 憫其稚子隨後 誘使歸
家 卽赴淵 抱娘屍而死 乃己亥四月二十
四日也 後四十八年
崇禎三丙戌八月 日
行郡守 趙 峸 書而識之
충비 순량이 순절한 물웅덩이
순량은 흥해군 북쪽 흥안리 이씨 아가씨의 몸종이다. 아가씨에게 남모를 원한이 있어서 이 물웅덩이에 빠져 죽었다. 여종이 뒤따라 뛰어 내릴려고 하였는데, 민망(난처)하게도 그 어린 자식이 뒤따라오므로 달래어 집에 돌아가게 하고서는 물웅덩이로 와서 주인 아가씨의 시신을 끌어안고 죽었으니 곧 기해(숙종45, 1719)년 4월 24일의 일이었다.
그 48년 뒤인 숭정기원후 3째 병술(영조42, 1766)년 8월 일에 행 흥해 군수 조 성이 글씨를 쓰고 그 일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