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
박숙경
한 차례 소나기가
풀벌레의 언어를 잔뜩 풀어놓았다
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
오갈 데 없는 고요의 행간에 쉽게 닿는다
자정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꿈꾸기에 알맞은 시간
바람 없는 밤
오래전 생각을 앞질러 걸어도 되는 밤
모처럼 근심 없이 머루가 영글어도 되는 밤
문득, 속눈썹 사이로 별 하나 반짝인다
액정 속에서 흐르고 있는
아버지
갸륵함에 대하여
11월의 은행잎은 월요일에 포장이 끝난 아스팔트를 지나 봉명네거리로 몰려든다
십자가에 매달린 호기심과
화요일의 점멸등과
우수수 떼 지은 메마른 나뭇잎과
주인을 끌고 가는 반려견과
텅 빈 리어카를 밀고 가는 귀마개를 한 노인과
왼쪽으로 열린 편의점과
오른쪽의 풍진 참기름 집과
전봇대 두 개와 빨간 자두나무 길,
꽤나 선정적인 밤이었을 것 같은 골목길과
모처럼의 햇살과 짧은 치마
그리고 연명하지 않고 뛰어내리는 갸륵한 은행잎과
― 박숙경 시집, 『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 (시인동네/2021)
박숙경
경북 군위 출생. 2015년 《동리목월》 신인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날아라 캥거루』 『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 .
첫댓글 바라보는 시선이 그윽해서 이를 보는 시선도 눅눅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