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보이스의 모자 외 3편
강기원
백지 위로 비가 내린다
한낮의 사막에 어둠이 쏟아진다
그의 어깨에서 골반까지 금이 간다
마침표 쉼표 말없음표
뇌수 속의 다족류들
네 귀퉁이로 기어나와
빗속에 갇힌다
그의 창이 열린다
산산조각난 창문
말미잘처럼 찢기어
흔들리는 투명한 글자들
비 냄새가 난다
사납게 일어서는 사막
모래가 꿈틀거린다
말들을 쓸어간다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간다
머리에 구멍이 난다
그의 모자엔 원래 덮개가 없다
창의 뒤편
그는 갇혔다
말을 하기 위해
거리의 모든 말들에게서
도망했다
납골당 크기의
투명한 방음벽
갇힌 그가
유리에 비쳐
둘이 되었다
둘인 것을 납득할 수 없다
등 돌린다
두 손을 입 가까이에 모으고
악을 쓴다 그러나
물 속에서 벙긋거리는
물고기 주둥이
말이 고픈 그에게 사람들은
먹이통을 흔들어 보이며
해초처럼 흔들린다
말이 몹시 마려운
한 사람이
그의 몸을 두드린다
안개꽃을 들고 있다
조심스레
그러나 곧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흩어지는 꽃잎
살기등등해진다
납작해진
더 이상 뒤로 갈 수 없는 그가
유리벽의 부조로
굳어간다
누군가
그의 몸을 뜯어낸다
소리의 감옥 1
그는 전화기에 들려
방으로, 거실로
욕실로 끌려다닌다
무거운 그를 들고도 전화기의 몸체는 가볍고 작다
햇빛 아래서도
달리는 차 속에서도 전화는 그를
떼어놓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나 혼자인 그는
간수의 발걸음 같은 벨소리를 하루종일 기다리기도 한다
아무도 모르게 탈옥을 꿈꾼다
두 귀, 전화와 함께 떼어내
소리 한가운데 적막의 방을 짓는다
백색에 갇히다
빈방에 내가 있다
내가 있다고 빈방이 아닌 건 아니다
가구도 창도 없는 네 벽
울리는 소리와 벌거벗은 백색이 내 몫이다
뜨거운 햇살
한 오라기의 빛마저 되쏘아내는 모래알갱이들
눈 베어질 듯 수 없는 칼날 세워놓은 바다
에 나는 갇혔다
이 모든 백색에
검은 고양이를 갖고 싶다
내 등을 깔아
길들여지지 않는 짐승의 침낭이 되어주고 싶다
흰 벽에 색칠하는 것보다 따뜻해질 것이다
연필이 없는 나는 손가락으로 고양이를 그린다
뭉툭한 손가락 밑에서
웅크린 적의의 고양이는
사지를 쭈욱 뻗는 게으른 녀석이 되기도 한다
빈방에게 창문을 그려준다
창턱 넘어 파도의 어깨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낮게 낮게 그려준다
밀물따라 들어온 거북이 한 마리 보인다
물컹한 거북이다
등껍질 끌고 알몸으로 오는 거북이
아니, 조가비인지 모른다
제 집 지고 다니는
거북이는 조가비
조가비도 거북이
그가 나온 집 속으로 내가 들어간다
빈방 뒤집어쓰고
나도 조가비다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시
강기원 시인
1958년 서울에서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요셉 보이스의 모자〉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세계사, 2005)와 『바다로 가득 찬 책』(민음사, 2006),『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민음사, 2010)이 있음. 2006년 제25회 '김수영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