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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6월6일 화요일 [(녹) 연중 제9주간 화요일]
[수도회] 자기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복된 사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토빗 2,9ㄴ-14
† 복음 마르 12,13-17
◈ 오늘의 묵상
날마다 삶의 구체적인 순간들에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어떤 때는 그냥 지나쳐도 되는 가벼운 선택이지만, 때로는 인생의
무게를 느끼는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오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예수님께
올무를 씌우려고 한 질문이지만, 어쩌면 날마다 현실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구체적인 삶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선택들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선택들은 우리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일관성이 요구되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삶을 혼동 없이 이끌어 가고, 다른 이들과 조화된
사회생활을 하려면, 일관된 선택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황제가 만든 화폐를 쓰면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인간의 법이 요구하는 일관성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간에 우리의 모든 선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선택은 모두 하느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선택이 모든 인간적인 가치와 권리 체계를
보증해 주는 최상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선택과 하느님을 향한 선택은 두 가지 구분된 현실이지만,
그 사이에는 서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사랑이지만, 또한 우리의 구체적 삶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 안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2017년 가해 6월6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제1독서
<나는 시력을 잃은 채 지냈다.>
○ 토빗기의 말씀입니다. 2,9ㄴ-14
복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3-17
저는 책을 많이 봅니다. 아무리 바빠도 책을 조금이라도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바쁘고 힘든 일이 주어질 때에는 책을 읽어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되는 감동도 줄어듭니다.
하지만 약간의 여유를 갖고서 책을 읽을 때에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자주 깨닫습니다. 여유가 있다 보니 잠깐이라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주변을 바라보면서 책에서 말하고 있는 의미를 삶에
접목해 보기도 합니다.
세상은 바쁘게 흘러갑니다. 그러다보니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사유의 발전은 여유로움에서 생기는 것
같습니다. 바쁨 안에 몸을 내맡기면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그냥
보낼 뿐이지만, 여유로움 안에서 생활하면 많은 생각 속에서 그만큼
많은 의미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바쁨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서 잠 잘 시간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럴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하루에 단 5분도
여유로움을 가질 수가 없을까요? 이 여유로움을 주님과 만나는 시간인
기도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 기도가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기도를
해치워야 할 하나의 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다보니 그만큼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를 맡기는 모습보다는 하느님께 내
자신을 맡기는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말씀해주십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를 다루고 있지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께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이 합당한지를 묻습니다.
세금은 당연히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유다인들에게는 조금
다른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금으로 내는 데나리온
동전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동전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우상숭배를 따르는 것으로 하느님께 대한
커다란 불충이 되는 것이어서 세금 내는 것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단순히 세금 문제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근본적인 우리들의 마음이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 데나리온 한
닢에는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기에 로마 황제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누구에게 돌려 드려야 할까요? 바로 우리를
만드시고 사용하고 계시는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즉, 황제에게는 돈을
돌려주고, 하느님께는 우리 자신을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의
바쁨만을 쫓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온전히 주님께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늘 행복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자주 변해야 한다(공자).
오늘은 현충일입니다. 순국선열을 기억합시다.
함께한다는 것.
종종 사업은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습니다. 하긴 형제지간,
부자지간에도 같이 사업하다가 싸우고 고소하는 일이 흔히 벌어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사업은 무조건 혼자 해야 성공할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IT 계열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둘을 뽑으라고 하면 아마 애플의 스티븐
잡스(Steven Paul Jobs)와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Bill Gates)
일 것입니다. 이 둘의 천재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자신의 천재성으로 혼자 창업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티븐 잡스는 스티브 워즈니악, 로널드 웨인과 애플을 공동 창업했고,
빌 게이츠는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공동 창립했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천재성을 가지고도 왜 함께 했을까요? 후대의 사람들은
이 둘이 다른 사람과 함께 창업하고 협동하지 않고 혼자서 나아갔다면
지금까지 이룬 업적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팀워크, 파트너십,
집단지성을 추구하면서 함께 했기에 놀라운 업적을 이룰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몇 배 세상에 쏟아 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혼자서 모든 것을 다하려고 할까요? 단지 이견의
차이를 인정하기 싫어서, 그래서 싸우기 싫어서? 어쩌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내 안에 숨겨진 놀라움을 꺼내지 못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주님과 함께한다는 것도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고, 이로
인해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놀라운 잠재력이 세상에 나옵니다.
스티븐 잡스와 빌 게이츠.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자기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복된 사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6월6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마르 12,13-17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17)
자기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복된 사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논쟁했으나 실패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을 그분께 보내어 올가미를 씌우려
합니다(12,13).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님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당한지 여쭙습니다(12,14). 이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12,17)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심으로써 그들의 계략에서 벗어나십니다.
나아가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과 황제에게 바쳐야 할 것을 구별하시어
그 차이를 알려주십니다. 황제에게는 그의 흉상이 박힌 은화를
돌려주면 그만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들, 권력과 명예와
인간이 이루어낸 성과 등은 세상에 돌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얼과 형상을 지닌 인간은(창세 1,27)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따라서 내 전부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하느님께는
나의 마음과 정신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12,30).
나의 시간과 재능과 하느님께서 주신 온갖 은총의 선물을 기꺼이,
그리고 남김없이 되돌려드려야 하는 것이지요.
황제에게 바쳐야 할 것은 세상적인 것이지만,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과 자유와 평화와 사랑입니다. 따라서 황제에게
바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나,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황제에게 바치는 것은 있다가도 사라져버리지만,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황제에게 속한 세상의 일과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의 일을 분별하라 하십니다. 양자를 구별하여 일시적이고
세상적이며, 영혼 구원과 무관한 것들에 대해 애착을 두지 말라 하신
것이지요. 우리가 되돌려야 하는 것은 일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내
존재와 인격 전부, 내가 받은 모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한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횡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면서, 자기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사람을 복됩니다.”(영적 권고 11,4) 여기서 성찰해야 할
점은 ‘소유없이’(sine proprio)의 삶입니다. 세상의 것이든 하느님께
속한 것이든 모든 것을 다 되돌리는 가난한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되돌릴 줄 아는 가난한 사람은 좋은 대우, 인정과 배려,
존경에 대한 기대를 버릴 줄 압니다. 그것이 자기 소유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지요. 가난한 사람은 기대심 뿐 아니라 자존심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조차도 남겨두지 않기에, 모욕과 멸시를 받을 때에도 겸손합니다.
나를 찾아오고, 나에게 주어지는 내적, 외적인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아는 까닭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 당신 뜻대로 나에게 주기기도 하고
앗아 가실 수도 있습니다. 주시는 것도 주님의 뜻이요, 되돌림으로써
나를 떠나가는 것도 주님의 뜻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마음 쓸
일은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되돌리는 것뿐입니다. 하느님과 일치하고
하느님의 풍요 안에 머물기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의 방향인 셈입니다.
우리 모두 기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리면서, 자기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유에
초점을 맞추고 몰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때, 나 자신은 물론
교회와 우리 한국사회도 변할 것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6월6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 17)
하느님의 것은 소중합니다.
보살펴 주시는 주님 사랑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연중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허황된 논쟁으로 퇴색시키는
아쉽고도 아쉬운 우리의 시간입니다.
부정직한 허세와 과시욕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되어야합니다.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예수님께 물음을 던지는 우리의
오만함을 만나게됩니다.
하느님의 것은 결코 우리의 뻔뻔함으로 훼손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위선과 변명을 보게 됩니다.
늘 우리 식대로 우리 편한대로 되풀이되는
가식적인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올바른 삶이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진실되이
돌려드리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더이상 예수님과의 만남이 위선과 자기기만이라는
오만함이 아닌 겸손된 만남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믿음또한 하느님의 것을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행동하는 믿음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것을 더이상 나의 방식으로 축소시키지 맙시다.
황제의 초상과 글자에 견줄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9주간 화요일
2017년 가해 6월6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 마르 12,13-17
새로운 정부에서도 ‘종교인 과세’가 논의되고 있습니다. 이미 세금을
내고 있는 천주교회는 찬성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에 유예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종교인은 ‘성직자, 목회자, 스님’을 이야기합니다. 신앙을 가진 분들은
당연히 세금을 충실하게 납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당, 교회, 사찰의
운영을 위해서도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 사목을 할 때입니다. 수입은 대부분 헌금과 교무금 그리고
감사헌금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성당은 성물 방을 운영하기도 하고,
카페를 운영하기도 하고, 물품을 판매하기도 합니다. 부채가 있는
성당이었기 때문에 매년 일정부분의 부채를 상환하였고, 교구에 내는
납부금도 냈습니다. 사무장, 관리인, 주방 근무자를 위한 급여가
있었고, 주일학교 운영비, 단체 보조금, 각종 공과금과 가스요금이
있었습니다. 교구에서는 본당 예산의 10%는 자선과 찬조를 위해서
사용하도록 지침을 주었습니다. 지역에 계시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나누기도 했고, 형편이 어려운 본당을 도와 드리기도 했습니다.
국민으로서 종교인들도 소득에 대해서는 세금을 납부해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세금을 낼 정도의 소득이 되지는 않지만, 소득이
있다면 당연히 그에 상응한 세금을 내야 할 것입니다. 종교인들도 군
복무를 하듯이, 종교인들도 투표를 하듯이, 종교인들도 국민으로서
책임과 권리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토빗의 아내 안나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선행을 베풀어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그렇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충실하게 살아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뉴턴이나,
데카르트의 업적은 대단합니다. 그분들은 근대 과학과 철학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요즘 양자물리학은 그분들의 과학과
철학의 ‘틀’을 깨고 있습니다. 세상은 기계론적으로 움직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라는 법칙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습니다. 우리의 교육과 사회제도는 계속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남들보다 더
잘살아야 하고, 더 많이 소유해야하고, 끊임없이 ‘더’라는 마법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다 앞서 가는데 나만 멈추면
도태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잠시 멈추면 정말 보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하늘의 구름도, 바람의 느낌도, 꽃의 색깔도, 새들의
노래도 비로소 보이게 됩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려하고, 증거를
찾으려하고, 확신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심하고, 미워하고,
죽이려고 까지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멈추라고 합니다.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하느님의 것들이 보인다고 합니다.
세상은 기계론적인 자연법칙의 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세상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응보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은 바로 그런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멈출 수 있었고,
버릴 수 있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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