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노년의 음식
늙어서 결핵으로 인해 후두에 고통 겪은 카프카, 그때 그가 가장 그리워한 것은 차가운 맥주뿐
중병 걸린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겐 물마저도 절제해야 하는 진미… 최후의 만찬 ‘빵과 포도주’는 정신의 요체
소설 ‘가스파르, 멜쉬오르 그리고 발타자르’의 네 번째 동방박사 타오르는 33년간의 고행 끝에 ‘최후의 만찬’이 끝난 뒤에 도착한다. 고통과 허기로 죽음을 앞둔 그는 식탁에 남은 빵과 포도주를 허겁지겁 먹는다. 이는 소박한 음식 속에서 빛나는 가시성을 얻는, 말년 음식에 대한 은유다.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맛있는 음식은 살아 있다는 것을 기쁘게 해준다. 코로나19에 감염된 사람들이 증언하듯 질병은 맛도, 향기도 빼앗아 버린다. 음식의 맛은 음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먹는 이의 건강한 신체와 정서에서 나오는 것이다.
삶이 음식과 함께 얼마나 즐거워지는지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 흐라발의 ‘영국왕을 모셨지’에서 희귀한 요리를 맛본 사람의 모습을 보라. “그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가 복도에서 소리를 지르더니 다시 뛰어와 포크로 음식을 또 한 번 찍어 먹었다. 이제 절정에 도달했다. 또다시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아예 호텔 앞까지 나가 소리를 지르며 춤추다 다시 환호를 지르며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다시 뛰어들어 왔다. 그가 소리를 지르고 다리를 흔드는 것은 잘 손질해 속을 꽉 채운 낙타 요리에 대한 감사의 노래와 춤이었다.…… 또 한 명의 미식가인 퇴역 장군은 천장을 바라보며 뭔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 같은 소리를 길게 내질렀다.”(김경옥 역)
음식 때문에 인간은 이토록 행복해진다. 삶의 행복을 구가하는 자들은 음식과 술을 맛있게 만들기 위해 정성을 기울인다. 검소한 고대 그리스인들조차 제법 화려한 술을 마시기도 했다. ‘일리아스’가 기록하고 있는, 힘을 북돋워 주는 칵테일 제조법을 보라. “그들을 위해 머리를 곱게 땋은 헤카메데가 밀주(蜜酒)를/만들어주었다.……술맛을 돋우는 양파가 든 청동 바구니와 노르스름한 꿀과/신성한 보릿가루를 갖다 놓았다.……이 잔에다 여신과도 같은 그녀가 그들을 위해 프람네 산(産)/포도주로 밀주를 만들고 나서, 그 위에 청동 강판으로/염소 치즈를 갈아 넣고 그 위에 다시 흰 보릿가루를 뿌렸다/이렇게 밀주가 완성되자 그녀가 마시기를 권했다.”(천병희 역) 꿀과 치즈 때문에 ‘단짠단짠’할 것 같다. 보릿가루가 들어갔으니 미수 같은 와인이리라. 그리고 짜장면처럼 양파가 반찬이어야 한다. 맛이 어떨지, 누군가 이 그리스의 지혜를 복원해 들려주시기 바란다.
그러나 사라져 가는 인간, 병과 노화로 인해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없는 말년의 인간에겐 음식은 생이 종말을 향해 나가는 징표로서 서글픔을 준다. 카프카는 말년에 결핵으로 인해 후두에 고통을 겪었다. 그때 그가 그리워한 것은 아버지와 수영하러 가서 소시지와 함께 마셨던 맥주였다. 후두의 고통으로 인한 갈증이 맥주의 차가움을 그립게 하였다. 이러한 일은 역시 폐질환을 가졌던 프루스트의 말년에도 비슷하게 닥쳐왔다. 그의 비서였던 셀레스트 알바레는 프루스트에 대한 회상록에서 말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크루아상을 먹지 않았다. 커피 속에 타서 마시는 우유가 전부였다.”(심민화 역) 얼마 후 그는 커피조차 마시지 않게 된다. 남은 것은 오로지 열로 인한 갈증을 가라앉게 하기 위한 맥주였다. “식사를 하지 않은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의 일이었지만 그는 이제 커피까지도 마시지 않게 되었다.……아마도 열 때문이었던지, 그는 차가운 맥주밖에 마시려 하지 않았다. 그런 건강 상태에서, 그리고 그렇게 추운 방에서,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
프루스트처럼 온 힘을 기울여 하나의 작품에 몰두하며 말년을 맞고 있는 제갈량의 식사 역시 마찬가지로 극소화돼 있다. 제갈량에게 저 작품이란 프루스트가 매달린 소설이 아니라 소설과도 같은 위나라와의 전쟁이었지만. 51세에 죽은 프루스트와 비슷한 나이인 54세에 제갈량은 세상을 떠났다. 사마의가 제갈량의 사신에게 승상은 식사를 얼마나 하시냐고 물었다. 사신은 일은 많으나 드시는 음식은 적다고 답한다. 대답을 들은 사마의는 일은 많은데 먹는 것이 부실하니 어떻게 오래 견디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제갈량 역시 수긍하며 자신은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로부터 탄생한 고사성어가 ‘식소사번(食少事煩)’이다. 제대로 먹지도 않고, 즉 몸을 돌보지 않고 일만 지나치게 한다는 뜻이다.
말년에 화려한 식사라는 것은 없다. 건강 때문이든, 최후의 작품 때문이든 서글프게도 음식을 즐길 수 없다. 말년에는 음식을 즐기기보다 음식을 버거워한다.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에서 중병에 걸린 황제는 말한다. “물 자체가 환자인 나에게 이제 아주 절제하여 섭취해야 하는 하나의 진미이다.”(남수인 역) 죽기 직전의 베토벤 역시 그가 좋아하던 포도주를 눈길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얀 카이에르스는 전기 ‘베토벤’에서 기록하고 있다. “쉰들러는 부종에 도움이 될 음료와 1806년산 뤼데스하임 포도주 두 병을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았다. 베토벤은 이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유감이군. 늦었어. 너무 늦었어.’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향기로운 술을 숟가락으로 여러 번 그에게 주었지만 그의 입으로 흘러들어 간 건 얼마 되지 않았다.”(홍은정 역) 한 시대의 쇠락을 늙어가는 공작에게 투영해 보여주고 있는 영화, 비스콘티의 ‘레오파드’의 마지막은 성대한 무도회를 겸한 만찬이다. 쇠락으로 인해 우수에 젖은 늙은 공작은 풍성한 음식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것 모두 내 위장에는 벅차네.” 마찬가지로 움베르토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의 주인공은 대단한 미식가지만 건강을 잃은 말년에는 음식을 감당하지 못한다. “위장에 탈이 나서 맛있는 요리를 먹으며 위안을 얻을 수도 없다. 나는 집에서 수프를 끓여 먹는다.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다. 때로는 먹은 것을 토하기도 한다.”(이세욱 역)
그래서 말년엔 음식을 조심스럽게 다루게 된다. ‘홍루몽’은 중국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인 만큼 온갖 진미가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요리책 같다. 예를 들면 닭을 곤 국물에 쪘다가 볕에 말리기를 아홉 번 반복해서 만든 가지오가리. 한 접시의 가지오가리를 위해선 닭 아홉 마리와 수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별로 어려운 요리가 아니라고 소개된다. 이 작품에선 말년의 음식마저 진기하다. 집안의 큰 어른인 대부인은 말한다. “……난 늙었어!……음식은 씹을 수 있는 걸로 조금씩 먹는 정도이고, 잠은 그때그때 시늉만 낼 뿐이구…….”(안의운 외 역) 그렇다면 노인이 씹을 수 있을 정도의 저 음식이란 어떤 것일까? 다음 밥상 묘사가 보여주고 있다. “이윽고 밥상이 들어오는데 맨 처음 나온 반찬은 우유에다 양의 태를 넣어서 찐 것이었다. ‘이건 해를 보지 못한 물건인데 나 같은 늙은이나 먹는 약이야. 섭섭하지만 너희들은 먹을 것이 못 돼. 오늘은 너희들을 위해서 특별히 싱싱한 사슴고기를 마련해 놨으니 그거나 기다려 먹도록 해라.’” 이제 음식은 조심스럽게 선택해야 하는 약이어야만 한다.
이렇게 음식 앞에서 조심스럽게 된 말년의 삶은 그저 초라하기만 한 것일까? 다르게 보면, 그것은 물질적인 것에 대한 종속에서부터 벗어나는 자유의 기회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노년이 자유를 획득하게 되는 은총의 시간이라고 찬양한다. “노년은 지고한 자유를, 그러니까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은총의 한순간을 향유하게 되는 순수한 필연성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말년의 음식에는 자유로워진 정신의 모습이 투영된다. 온통 작품의 완성에 몰두했던 프루스트 말년의 간소한 식사가 그런 것 아닐까?
말년의 음식이 지닌 정신적 가치를 잘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투르니에의 소설 ‘가스파르, 멜쉬오르 그리고 발타자르’는 네 번째 동방박사의 이야기다. 우리가 잘 아는 세 동방박사 말고, 전설이 전하는 네 번째 동방박사가 있다. 네 번째 동방박사인 인도의 타오르 왕자는 대단한 미식가인데, 유대인들 사이에서 훌륭한 요리사가 태어날 것이란 소문을 접하고 그를 찾아 나선다. 실제 우리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탄생이 예고된 이 인물이 후에 정말 음식에 대한 환상적인 이야기를 쏟아낸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요한복음’, 6:48) 동방에서 출발한 타오르의 여행단은 먼 길을 가며 점점 재력을 잃어간다. 어느 날 그는 빚을 갚지 못해 소금광산에 갇히게 될 한 죄인의 재판을 보게 된다. 이 죄인에겐 아내와 네 명의 자식이 있다. 이미 재산을 모두 잃어 돈으로 그 죄인을 도울 수 없었던 타오르는 그 대신에 직접 소금광산에 수감되기로 한다. 그리고 죄인이 진 빚을 광산에서의 노동으로 갚는다. 무려 33년 동안! 광산에서 나온, 다 늙어 죽어가는 타오르는 그가 처음에 계획했던 여행을 계속한다. 그는 33년 전 다른 동방박사들처럼 베들레헴에서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그 요리사를 만났어야 했다. 이제 늦은 밤 예루살렘에 도착했는데, 이번에도 지각한 것일까? 물어물어 아리마대의 요셉의 집에 겨우 도착했을 때는, 후대에 사람들이 ‘최후의 만찬’이라 부르는 식사는 이미 끝나고 모두 떠난 뒤였다. 그는 이번에도 요리사, 아니 그리스도를 놓친 것이다. 33년간의 고통과 허기로 이제 죽음을 앞둔 타오르는 만찬이 끝난 식탁에 남은 음식들을 본다. “빵과 포도주다!” 허겁지겁 그는 남은 포도주를 마시고 빵을 입에 넣었다. 33년간 남을 대신해 고통받은 자, 그래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리엔 늘 지각했지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한 자, 그는 성체(聖體)를 영한 최초의 인간이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특정 종교 안에 갇혀 있지 않다. 젊음과 함께 혀의 즐거움이 사라지면, 그다음에 음식은 정신의 생김새를 보여준다. 내겐 이 이야기가 말년에 가까스로 완성된 한 인간의 삶이란 그가 먹는 음식, 그것도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 한 덩이 같은 소박한 음식 속에서 빛나는 가시성을 얻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은유 같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 설명 - 홍루몽
청나라의 조설근이 쓴 ‘홍루몽’은 우아한 중국 귀족사회의 모습을 세심하게 담아내고 있는 소설이다. 마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사라진 유럽 귀족사회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듯이 말이다. ‘홍루몽’은 진귀한 중국 요리 백과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음식에 대한 귀중한 묘사들 역시 담고 있는데, 중국에는 이 묘사대로 실제 요리를 만들어내는 요릿집도 있다.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은 음식에 관한 매우 인상 깊은 성찰들을 전해준다. “나는 병영에서 빵 쪽을 베어먹을 때마다 이 무겁고 거친 음식의 소화가 피가 되고, 체온이 되고 아마도 용기까지로 변모될 줄 안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음식은 생명뿐 아니라 정신적 덕목까지도 만들어내는 것이다.
첫댓글 삶을 지속시켜주는 것은 권력도 돈도 지위도 아니고
맛있는 음식,,,